칼빈 신학에서 '영성신학'이 정당한가?
개혁주의 영성신학
칼빈 신학에서 '영성신학'이 정당한가?
<*주의할 내용입니다. 영성과 경건이라는 단어 자체가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성이라는 말은 종교다원주의, 신비주의에서 신인합일을 지향하는 의도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반드시 크나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고 읽어시기 바랍니다!!!>
칼빈 신학에서 '영성신학'이 정당한가?
<*주의할 내용입니다. 영성과 경건이라는 단어 자체가 같이 갈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성이라는 말은 종교다원주의, 신비주의에서 신인합일을 지향하는 의도를 가진 단어입니다. 이 점을 간과하면 반드시 크나큰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이 점을 참고하시고 읽어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영성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혹자는 21세기를 가리켜서 ‘영성의 시대’라고 칭하기도 한다. 그런 현실에 부응하여 개신교 각 신학교에서도 ‘영성 신학’ 과목이 개설된지 수년이 지났다. 이제 ‘영성’이란 용어는 더 이상 카톨릭의 전유물만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란 용어에 담긴 카톨릭의 색체 때문에 그 말에 거부감을 표시해 왔다. 대신에 ‘경건’이란 용어를 채용하면서 칼빈의 입장을 견지해 왔다. 그러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필립 홀트롭(Philip C.Holtrop)의 주장대로, 분명 칼빈의 신학은 ‘경건의 신학’이다. 예컨데, 칼빈 신학의 결정체요, 사상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기독교 강요」의 핵심은 경건이었다. 1536년 판 「기독교 강요」의 출판 목적에 대해서 쓴, 발행인에 의해 덧붙여진 것으로 보이는, 문구는 이를 입증해 준다:
경건의 전체와 구원 교리에서 필히 알아야할 거의 모든 것을 포함한 이 저작은 경건을 사랑하는 모든 이가 읽을 가치가 있으며, 최근에 출판되었다. 칼빈 자신도 프랑스 왕 프랑시스 1세에게 다음과 같이 저술 동기를 밝혔다: 저의 의도는 종교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 개요를 알려드림으로서 참으로 경건된 삶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칼빈이 일생 동안 추구했던 신앙과 삶의 목표, 저술과 연구의 최종 종착점, 그리고 목회와 사역의 방향은 ‘경건’에 집중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칼빈의 경건을 연구한 배틀스(F.L.Battles)는 그의 신학의 핵심은 “경건”에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는 1537년 불어로 출판(1538년 라틴어 출판)된 요리 문답서에서 경건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참된 경건이란 오히려 하나님을 아버지로 사랑하며, 주로서 두려워하고 경외할 뿐만 아니라 그분의 의로움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거역하는 것을 죽음보다도 더 무서워하는 신실한 감정이다.
한마디로 경건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총을 알 때 나타나는 경외감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연관된 것”(I.2.1)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하나님에 대한 열열한 두려움과 관련된 신앙”(I.2.2)이다. 물론 여기에 말하는 ‘두려움’ 안에는 자발적인 경외감이 포함된다. 더 포괄적으로 표현하자면, 경건이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반응이요 태도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지식과 예배의 태도까지 포함한다. 그렇기 때문에 경건은 완성된 채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완제품이 아니다. 그것은 굉장한 노력을 해야만 얻어질 수 있다. 동시에 열심을 가지고 끊임없이 추구해야만 한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은 계속적인 경건의 실천이라고 볼 수 있다.
칼빈은 성경을 통해서 ‘경건의 맛’을 체험했다. 그런 체험 이후에 칼빈은 일생동안 참된 경건을 추구해 나갔다. 그는 경건을 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각 사람은 자신의 미약한 능력이라고 가지고 진행하여 시작한 여행을 중단치 말자. 아무리 작은 거리라도 매일 조금씩 간다면 결코 절망할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조금씩이라도 진행할 수 있도록 노력을 중단하지 말자--- 우리가 죽는 날까지 추고하고 따라야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III.6.5)
그의 저술 활동, 목회 및 설교에서도 언제나 최종적인 목표는 경건이었다. 예를 들면, 「기독교 강요」나 「기독교인의 삶에 관하여」 등에서는 완전한 그리스도인, 곧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거쳐야하는지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여기에서 제시한 기독교인의 삶의 규범들은 칼빈이 지향하는 바, 참된 경건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들이요, 영성의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이같은 칼빈 신학의 경건 중심성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칼빈의 영성’이란 말은 신학의 방법론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심지어 “16세기에 살았던 칼빈에게 20세기 신학자들의 개념을 가지고 대입한다는 것이 방법론적으로 옳지 않다(리차드 갬블)”고 주장하기도 한다. 거기에다 20세기 신학자들이 즐겨 쓰는 ‘영성’이란 매우 혼란을 가져오는 애매한 개념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칼빈의 신학에서 만큼은 그가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경건’이란 개념으로 사용할 것을 주장한다(김재성교수).
그렇다면 개혁 신학에서 ‘영성’란 용어가 과연 합당한가? 특히 칼빈에게 있어서 ‘영성’이 가능한 용어인가? 다음 몇가지 이유들은 칼빈 신학에서도 ‘영성’, 혹은 ‘영성 신학’의 정당성을 충분히 입증해 주고도 남는다.
첫째, 칼빈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영성이란 용어를 채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가령, 성경에서는 삼위 일체란 용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교리사는 삼위 일체의 논쟁사라고 할만큼 치열한 싸움을 그치지 않았다. 정통 신학에서는 목숨을 걸고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다. 지금도 삼위일체 교리는 이단성을 부여하는 가장 중요한 단초가 되고 있다. 그렇다면 개혁 신학에서 영성 신학적 접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문제는 칼빈이 당시 ‘영성’이란 용어보다 ‘경건’이란 단어를 채용한 배경이 있다는 점이다(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겠다).
둘째, 칼빈의 입장 자체가 개혁 신학의 절대성을 견지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 도그마의 울타리로 제한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에 의하면, 개혁신학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개혁 신학은 말씀에 기초를 둔 생명의 신학이다.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추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입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의 범주는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다. ‘영성’이란 단지 시대의 조류가 낳은 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현장을 살리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에서 나왔다. 그리스도인의 본분으로 돌아가자는 함성이며,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뜨거운 구호이다. ‘영성’에 대한 갈망을 잠재울 수 없는 현실이다. 따라서 개혁주의 입장에서 ‘영성 신학’을 바로 정립하는 것은 시대적인 요청이다.
셋째, 칼빈이 지향했던 ‘경건’과 우리 시대의 최대의 잇슈인 ‘영성’은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혁 신학의 범주 내에서 영성 신학의 접근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존 리스(John H.Leith)는 칼빈의 “신학은 이론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학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실로 칼빈의 신학은 삶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 경건한 삶을 위해서 일생동안 필사적인 노력을 다했다. ‘영성’이란 어떤 신비한 상태나 은사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삶이다! 매일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 영성의 삶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아가는 것이 영성의 최종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경건’이나 ‘영성’은 동일하게 삶에 목표를 둔 공통적인 신학의 주제이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에서 ‘영성’이란 용어를 채용하는 것은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넷째, ‘영성’에 대한 관심사가 돋보이는 현실적인 요청을 거역할 수 없는 실정이다.
지난 60년대 이후부터 카톨릭에서 신학과 실천의 양면에 있어서 ‘영성'이라는 주제가 중요한 잇슈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런 영향은 개신교도들로 하여금 ‘영성’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를 갖게 했다. ‘영성’에서 풍기는 열광적이고 신비적인 선입견들이 그 요인이 되었다. 거기에다 ‘영성’이란 학문의 대상일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학문적인 접근을 시도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83년 뱅쿠바에서 개최 되었던 WCC 세계 대회에서 ‘영성’이 그 주제로 채택될 만큼 그 관심이 증폭되었다. 그후 개신교 내에서도 영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현실들은 영성 신학이 개혁 신학계와 교회 공동체 및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가장 큰 관심사로 떠오르게 한 주요인이 되었다. 가장 현실적인 측면에서 목회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영성’에 목말라 있다. 영적인 삶을 원하고, 교회의 생명이 회복되기를 갈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이유들은 '칼빈의 영성신학'의 정당성을 충분히 지지해주고도 남는다. 칼빈이 어떤 용어를 채용했던지간에 종교 개혁은 교회의 영성 회복과 말씀 회복 운동에 다름 아니었다. 더욱이 칼빈에게 있어서 경건한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비적인 체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복종하는 삶을 말한다. 참된 경건이란 말씀이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회복된 삶, 말씀의 생명력이 드러난 삶이 바로 경건한 삶이다.
많은 학자들이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신적 속성으로 이해한다. 영성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그분의 생명력에 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과의 깊은 교통은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말씀 안에 있을 때 성령의 교통이 깊어지며, 말씀이 없으면 영적인 삶을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런 점에서 칼빈이 즐겨 사용한 경건은 영성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이제 우리 모두는 칼빈의 영성신학을 계발해서 말씀과 성경의 역사로 교회를 회복시켜야할 중대한 과제를 짊어진 개혁주의의 후예들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글/ 송삼용목사
2009년 9월 15일 인터넷 신문 리폼드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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