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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영성신학」 정립이 시급하다

「개혁주의 영성신학」 정립이 시급하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각종 세미나, 수련회 등 여러 집회들이 영성에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고 있다. 서점에도 영성에 관련된 책들이 단연 베스트셀러를 차지하고 있다. 교회나 신학교 및 기독교 단체에서도 각종 영성 훈련 프로그램이 도입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오늘날 기독교계 전반에 걸쳐서 영성이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영성’이 일종의 신드롭을 일으킬 정도로 주목을 받고 있는 실정이지만 여전히 일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용어가 생소하기만 하다. ‘영성’이 무엇인지 개념조차 정리가 안된 경우가 허다하다. 게다가 각 곳에서 비성경적인 프로그램들이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목회자들과 성도들을 현혹하기도 한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이단성이 있는 영성 프로그램조차도 아무런 여과없이 받아들이기도 한다.
 
우리 총회에서 영성 훈련 프로그램을 경계하도록 몇 차례 결정했던 것(78회:트레스디아스, 86회: 박철수 영성훈련원 등)은 이런 현실들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이런 현실들을 고려할 때 개혁주의 영성신학을 정립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이다. 역사적으로 개신교에서는 ‘영성’이란 용어에 담긴 캐톨릭의 색체 때문에 그 말에 거부감을 표시해 왔다. 특히 일부 신학자들은 칼빈 신학의 경건 중심성 때문에 ‘칼빈의 영성’이란 말은 신학의 방법론에서 중대한 오류를 범한 것이라고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소위, 개혁주의에서는 칼빈이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영성’이란 단어를 사용하기 보다는 ‘경건’이란 개념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칼빈이 사용하지 않았다고 개혁주의에서 ‘영성’이란 용어를 채용하는 것이 부당하다는 주장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가령, 성경에서는 삼위일체란 용어가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통신학에서는 목숨을 걸고 삼위일체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싸워왔다.
 
그렇다면 개혁신학에서도 영성 신학적 접근은 얼마든지 가능하지 않겠는가? 더욱이 칼빈의 입장 자체가 개혁신학의 절대성을 견지하지 않는다. 그는 신학이 도그마의 울타리로 제한되는 것을 경계했다. 개혁신학은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말씀이 가라하면 가고 멈추라하면 멈추는 것이 개혁신학의 기본적인 입장이다. 개혁신학의 범주는 절대 불변의 것이 아니다.
 
세속적인 영성은 초인적인 훈련과 정신 집중으로 초월의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개혁주의 영성에서는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전제로부터 시작된다. 인간이 죄로 오염된 상태로는 초월자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부패한 심령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갈 수도 없다. 다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일 뿐이다.
 
개혁주의 영성의 출발선은 하나님의 은혜에 있다. 인간과 하나님과의 만남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과 성령의 은혜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영성이란 하나님과 교제를 통해서 공동체에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속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영성의 핵심은 성령으로 변화된 사람이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에 있다.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를 통해서 매일 삶 속에서 그분의 형상을 드러내 보여주는 영적 실제가 진정한 영성이다.
 
개혁주의 영성은 신비한 상태나 은사를 지향하지 않는다. 종교적인 열심이나 의를 내세우지도 않는다. 현실을 떠난 수도원적인 색체는 더욱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거룩을 추구한다. 매일 죄를 죽이며 말씀대로 살아가는 경건을 소망한다. 개혁주의 영성은 그리스도처럼 사는 것이 최종적인 목표이다. 영성은 삶이다! 
 
 글 송삼용목사
기독신문 2006년 3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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