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주의" 란 용어의 유래
"칼빈주의" 란 용어의 유래
김재성: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신학’ 혹은 ‘개혁파’라는 용어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신앙고백의 흐름을
각각 대변하는 하나의 통칭으로 등장한 것은
초기 종교개혁 시대부터였다.
[Josef Bohatec,
"Lutherisch" und "Reformiert",
Reformiertes Kirchenblatt für Österreich 28]
(January, 1951), 1-3.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16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로마 카톨릭에 항거하는 개신교회) 진영은
크게 두 그룹으로 대별되어졌는데,
한 그룹은 ‘복음적인 루터파’ (Evangelcial- Lutheran)이고,
다른 한 그룹은 ‘복음적인 개혁파’(Evangelical-Reformed)
를 형성하였다.
종교개혁 초기에 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다 같이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복음에 따라서
교회의 갱신과 신앙 교육의 갱신에
같이 헌신하는 자들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점차 기본적인 것은 같지만,
서로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어졌다.
주로 광활한 독일의 지역에서 하나의 흐름이 생겨나고,
루터가 신학적인 권위를 인정받으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과 요리문답(1529)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런가하면,
라인지방과 스위스에서는
칼빈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고,
'기독교강요'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정하는 무리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교회론이나 정치론이 서로 달라지면서
각 도시나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나는 신앙고백들이
만들어졌다.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학문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문서는
루터파 신학자 요아킴 베스트팔이
1552년에 스위스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성찬론을 비판하면서
발행한 논쟁적인 책자에서였다.
[Westphal, Farrago confusanearum et inter se dissidentium opinionum
de coena Domini ex sacramentarioum libris congesta] (Magdeburg: 1552).
이를 지적한 교리사는
[Ernst Bizer, Studien zur Geschichte des Abenmahlsteirs im 16. Jahrhundert ](Gütersloh: 1940),
[Jean C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e la sainte cène](Montpellier: 1951)
이다.
한번 이 용어가 사용되자마자,
루터파 교회 내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이렇게 빨리 퍼진 이유는
역사적으로 루터파로 간주되던 독일 지방에
개혁신학의 영향력이 점차 급증하게되자
루터파 내부에서 걱정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팔라틴 지역에서 프레데릭 3세가 1563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독일 지역에서
아우그스부르크 평화조약(1555)에 대한
공공연한 분열과 배신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독일 지역의 외부로부터 낯선 영향력이 미쳐오고 있음을
경계하려는 의도였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개혁신학에 나쁜 이미지를 주려고 사용된 단어였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을 빗대어서
부정적인 용어로 ‘칼빈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스트팔의 성찬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으므로
충분히 그런 용어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칼빈은 1563년 7월 23일,
프레데릭 군주에게 예레미야 주석의 헌사를 쓰면서
이에 대해서 밝힌 바 있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성찬론의 이해가 다른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이
프레데릭 군주의 개혁신앙 옹호를 깍아내리려는
시도하였음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폐하의 고명하심에 대해서
칼빈주의라는 말을 전면에 부착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주력하고 있는 바는
불명예를 표시하려는 것이며,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사악함과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리고 야비함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칼빈의 예레미야 주석서문 헌사)
이런 실상을 프레데릭에게 알려준 후에,
칼빈은 불과 몇 달 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루터파 교회를 향해서
상세하게 부당함을 호소했던 항의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견해를
통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칼빈주의는
16세기 초기 유럽 개혁 진영의
내부적인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서
의심스러운 유산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Alister McGrath,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Europen Reformation]
(Oxford: Basil Blackwell, 1987), 6-7.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스위스를 넘어서 하이델베르크 주변 지역에 널리 확산된
개혁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주의가 스위스 내부에서만 득세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유럽 전지역의 성도들에게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영토에서 루터교와 미묘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보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루터파 종교개혁사 연구가인 루이스 스피츠 교수는
조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슈말칼트 동맹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란 혼란과 박해 속에서,
루터교인들과 구별된 신조와 신앙을
지닌 일단의 교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었다.
'칼빈주의자들'이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도 아니요, 루터란도 아닌
한 부류의 개신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서
주로 스위스의 자치 도시들(제네바, 바젤, 베른 등)에서
칼빈과 같은 사상을 가진 성도들의 교회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용어로 쓰여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Lewis W. Spitz, The Protestant Reformation, 1517-1559]
(New York: Harper & Row, 1985), 122.
독일에서는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여 통합된 왕국을 통치하려는
황제 찰스 5세와 그를 따르는 군주들이 연합하여
루터의 새로운 신앙을 박해하자,
독일 북부 삭소니의 군주 요한과 헷세의 필립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지지하는 군주들이 슈말칼트 동맹군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도 아니요, 루터를 따르는 독일교회도 아닌,
스위스 지방의 교회들을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30년 12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파의 화해를 위한
아우그스부르크 회의가 결렬되자,
공식적으로 슈말칼트 동맹이 출범하였다.(1531)
이 동맹군은 다분히 방어적이요, 수세에 몰려있었다.
1535년 슈말칼트에서 모인 회의에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주장하는 동맹군 군주들의 요청이 약간 받아들여졌으나,
결국 1547년 무엘베르그와 빗텐베르그 전투에서
신성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합스부르크 황제군이
슈말칼트 동맹군을 대파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이 루터파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은
성찬론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평화회의(1555)이후에도,
1558년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몽뻴리에 회의(the Colloquy of Montpellier) 가 열렸는데,
양측의 성찬론이 첨예하게 맞서서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서로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Jill Raitt, The Colloquy of Montpellier :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Sixteenth Century ]
(Oxford: Oxford Univ Press, 1993).
이 책에서 저자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성찬론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6세기는 바로 “신앙고백의 시대”로서
이렇게 믿는 바에 따라서 살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칼빈주의자들은 엄청난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개혁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신학적인 동지들을 상호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학적인 입장이
사람들의 행동과 연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성찬론이나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신학대학원에서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지만,
16세기 유럽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일반 사람들, 군주들, 시골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신앙적인 논쟁이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고,
군대를 동원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심지어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칼빈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또 다른 문헌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칼빈파’(Calvinian)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566년이고,
‘칼빈주의’(Calvinism)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570년이며,
'칼빈주의자'(Calvinist)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1579년에 발행된 문서에서였다는 주장을 발견한다.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309.
엘리자베드 여왕 통치기(1558-1603)에
스위스의 영향을 입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칼빈주의라는 말이 자주 소개되었고,
마틴 부쳐(1491-1551)와 불링거(1504-1575)의 영향에 의해서
퓨리탄들이 형성한 신앙을 칼빈주의라고 불렀다.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칼빈주의가 발전했는데,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죤 라스코의 기여도 있었다.
결국,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루터파와 재세례파에 비하면 다소 늦게 생겨났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스위스와 독일 남부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후에 네덜란드, 영국, 미국, 헝가리, 동부 유럽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은 중심 인물을 요한 칼빈 (1509-1564)으로 생각하고,
그의 신학을 기준으로 하여
루터파와는 다른 교리체계를 발전시킨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를 '칼빈주의'라고 불렀다.
칼빈주의자란,
칼빈의 신학과 저술에서 영향을 입고,
제네바 교회가 채택한
성도들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라는 용어에
칼빈이라는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오직 칼빈의 신학으로만 정체되어있고,
그것만 앵무새처럼 외우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출처:김재성 저 "개혁신학의 광맥" 중에서
김재성: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교수
‘루터파’와 구별되는
‘개혁신학’ 혹은 ‘개혁파’라는 용어가
서로 대칭을 이루는 신앙고백의 흐름을
각각 대변하는 하나의 통칭으로 등장한 것은
초기 종교개혁 시대부터였다.
[Josef Bohatec,
"Lutherisch" und "Reformiert",
Reformiertes Kirchenblatt für Österreich 28]
(January, 1951), 1-3.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16세기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로마 카톨릭에 항거하는 개신교회) 진영은
크게 두 그룹으로 대별되어졌는데,
한 그룹은 ‘복음적인 루터파’ (Evangelcial- Lutheran)이고,
다른 한 그룹은 ‘복음적인 개혁파’(Evangelical-Reformed)
를 형성하였다.
종교개혁 초기에 개혁자들은
기본적으로는 같은 신앙을 고백하였기에
다 같이 복음주의자들이었다.
복음에 따라서
교회의 갱신과 신앙 교육의 갱신에
같이 헌신하는 자들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16세기 중반에 이르자,
점차 기본적인 것은 같지만,
서로 차이점이 있음을 인정하게 되어졌다.
주로 광활한 독일의 지역에서 하나의 흐름이 생겨나고,
루터가 신학적인 권위를 인정받으며,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1530)과 요리문답(1529)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집단이 형성되었다.
그런가하면,
라인지방과 스위스에서는
칼빈을 최종 권위로 생각하고,
'기독교강요'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인정하는 무리들이 형성되었다.
특히 교회론이나 정치론이 서로 달라지면서
각 도시나 지역마다 약간의 차이가 나는 신앙고백들이
만들어졌다.
‘칼빈주의’라는 새로운 용어를
학문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문서는
루터파 신학자 요아킴 베스트팔이
1552년에 스위스 종교개혁자들,
특히 칼빈의 성찬론을 비판하면서
발행한 논쟁적인 책자에서였다.
[Westphal, Farrago confusanearum et inter se dissidentium opinionum
de coena Domini ex sacramentarioum libris congesta] (Magdeburg: 1552).
이를 지적한 교리사는
[Ernst Bizer, Studien zur Geschichte des Abenmahlsteirs im 16. Jahrhundert ](Gütersloh: 1940),
[Jean Cadier, La doctrine calviniste de la sainte cène](Montpellier: 1951)
이다.
한번 이 용어가 사용되자마자,
루터파 교회 내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이렇게 빨리 퍼진 이유는
역사적으로 루터파로 간주되던 독일 지방에
개혁신학의 영향력이 점차 급증하게되자
루터파 내부에서 걱정이 많았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팔라틴 지역에서 프레데릭 3세가 1563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채택하였다.
이것은 독일 지역에서
아우그스부르크 평화조약(1555)에 대한
공공연한 분열과 배신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칼빈주의’라는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독일 지역의 외부로부터 낯선 영향력이 미쳐오고 있음을
경계하려는 의도였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결국 개혁신학에 나쁜 이미지를 주려고 사용된 단어였던 것이다.
칼빈은 자신의 이름을 빗대어서
부정적인 용어로 ‘칼빈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베스트팔의 성찬론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으므로
충분히 그런 용어에 대해서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칼빈은 1563년 7월 23일,
프레데릭 군주에게 예레미야 주석의 헌사를 쓰면서
이에 대해서 밝힌 바 있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성찬론의 이해가 다른 독일 루터파 신학자들이
프레데릭 군주의 개혁신앙 옹호를 깍아내리려는
시도하였음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폐하의 고명하심에 대해서
칼빈주의라는 말을 전면에 부착하여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주력하고 있는 바는
불명예를 표시하려는 것이며,
그들은 결국
자신들의 사악함과 그들의 어리석음과 그리고 야비함을
드러내는 것뿐입니다."
(칼빈의 예레미야 주석서문 헌사)
이런 실상을 프레데릭에게 알려준 후에,
칼빈은 불과 몇 달 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리고 그가 루터파 교회를 향해서
상세하게 부당함을 호소했던 항의는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이제 그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신학적인 견해를
통칭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렇게 칼빈주의는
16세기 초기 유럽 개혁 진영의
내부적인 정치적인 이해관계로 인해서
의심스러운 유산으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Alister McGrath, The Intellectual Origins of the Europen Reformation]
(Oxford: Basil Blackwell, 1987), 6-7.
"칼빈주의라"는 용어가
스위스를 넘어서 하이델베르크 주변 지역에 널리 확산된
개혁신학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이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칼빈주의가 스위스 내부에서만 득세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유럽 전지역의 성도들에게 확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일 영토에서 루터교와 미묘한 갈등을 일으키면서도
보다 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루터파 종교개혁사 연구가인 루이스 스피츠 교수는
조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칼빈주의"라는 말은
슈말칼트 동맹에서 처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주의란 혼란과 박해 속에서,
루터교인들과 구별된 신조와 신앙을
지닌 일단의 교회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여졌었다.
'칼빈주의자들'이라는 단어는
로마 카톨릭도 아니요, 루터란도 아닌
한 부류의 개신 교회를 지칭하는 말로서
주로 스위스의 자치 도시들(제네바, 바젤, 베른 등)에서
칼빈과 같은 사상을 가진 성도들의 교회를
통칭하는 말이었다.
매우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닌 용어로 쓰여지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Lewis W. Spitz, The Protestant Reformation, 1517-1559]
(New York: Harper & Row, 1985), 122.
독일에서는 로마 가톨릭을 지지하여 통합된 왕국을 통치하려는
황제 찰스 5세와 그를 따르는 군주들이 연합하여
루터의 새로운 신앙을 박해하자,
독일 북부 삭소니의 군주 요한과 헷세의 필립을 중심으로
개신교를 지지하는 군주들이 슈말칼트 동맹군을 결성하였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도 아니요, 루터를 따르는 독일교회도 아닌,
스위스 지방의 교회들을 '칼빈주의자들'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1530년 12월, 로마 가톨릭 교회와 루터파의 화해를 위한
아우그스부르크 회의가 결렬되자,
공식적으로 슈말칼트 동맹이 출범하였다.(1531)
이 동맹군은 다분히 방어적이요, 수세에 몰려있었다.
1535년 슈말칼트에서 모인 회의에서
새로운 교리를 가르치고 설교하는 약간의 자유를 허용하도록
주장하는 동맹군 군주들의 요청이 약간 받아들여졌으나,
결국 1547년 무엘베르그와 빗텐베르그 전투에서
신성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합스부르크 황제군이
슈말칼트 동맹군을 대파하였다
칼빈주의자들이 루터파와 첨예하게 대립하게 된 것은
성찬론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우구스부르그 종교평화회의(1555)이후에도,
1558년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 사이에
몽뻴리에 회의(the Colloquy of Montpellier) 가 열렸는데,
양측의 성찬론이 첨예하게 맞서서
이를 해소하려는 노력을 시도하였으나
결국 서로 간의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다.
[Jill Raitt, The Colloquy of Montpellier : Religion and Politics in the Sixteenth Century ]
(Oxford: Oxford Univ Press, 1993).
이 책에서 저자는 루터파와 칼빈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성찬론이 다르다는 이유로 인해서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16세기는 바로 “신앙고백의 시대”로서
이렇게 믿는 바에 따라서 살았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종교전쟁이 일어난 이후로,
칼빈주의자들은 엄청난 핍박의 대상이 되었고,
개혁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은
신학적인 동지들을 상호 보호하고 도와주어야 할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신학적인 입장이
사람들의 행동과 연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다.
오늘날에는
성찬론이나 정부와 교회와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주로 신학대학원에서 있는 것으로 생각할 것이지만,
16세기 유럽은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일반 사람들, 군주들, 시골과 농촌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런 신앙적인 논쟁이 편을 가르는 기준이 되었고,
군대를 동원하는 이유가 되었으며,
심지어 목숨을 내걸고 싸우는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칼빈주의'라는 용어에 대한
또 다른 문헌적인 자료를 살펴보면,
‘칼빈파’(Calvinian)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1566년이고,
‘칼빈주의’(Calvinism)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1570년이며,
'칼빈주의자'(Calvinist)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게 된 것은
1579년에 발행된 문서에서였다는 주장을 발견한다.
[John T. McNeill, The History and Character of Calvinism]
(N.Y.: Oxford University Press, 1954), 309.
엘리자베드 여왕 통치기(1558-1603)에
스위스의 영향을 입은 지도자들에 의해서
칼빈주의라는 말이 자주 소개되었고,
마틴 부쳐(1491-1551)와 불링거(1504-1575)의 영향에 의해서
퓨리탄들이 형성한 신앙을 칼빈주의라고 불렀다.
다른 지역에서도 역시 칼빈주의가 발전했는데,
피터 마터 버미글리와 죤 라스코의 기여도 있었다.
결국, 칼빈주의라는 용어는
루터파와 재세례파에 비하면 다소 늦게 생겨났음이 드러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스위스와 독일 남부지방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후에 네덜란드, 영국, 미국, 헝가리, 동부 유럽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그들은 중심 인물을 요한 칼빈 (1509-1564)으로 생각하고,
그의 신학을 기준으로 하여
루터파와는 다른 교리체계를 발전시킨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과 교회를 '칼빈주의'라고 불렀다.
칼빈주의자란,
칼빈의 신학과 저술에서 영향을 입고,
제네바 교회가 채택한
성도들의 생활을 중시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칼빈주의자들은 칼빈주의라는 용어에
칼빈이라는 개인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오직 칼빈의 신학으로만 정체되어있고,
그것만 앵무새처럼 외우는 사람들은
아니라는 점이다.
출처:김재성 저 "개혁신학의 광맥"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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