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 60주기 맞은 주기철 목사의 생애
순교 60주기 맞은 주기철 목사의 생애
자료출처:http://blog.daum.net/kkho1105/2338
한국 개신교의 큰별 소양(蘇羊) 주기철(1897∼1944) 목사가 순교한지 어느덧 60년이 흘렀다. 주 목사의 호인 ‘소양’은 예수의 한문표기인 야소(耶蘇)에 양(羊)을 붙여 ‘예수님의 양’이란 의미를 가지며 생전의 주 목사가 즐겨쓴 말이기도 하다.
지난 20일 총신대 양지캠퍼스 신학대학원에서 열린 ‘제9회 소양기념강좌’에서는 주 목사의 유족과 교계 인사,성도 등 2000여명이 참석해 주 목사에 대한 뜨거운 추모 열기를 반영했다.
오직 복음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에 앞장서서 일제에 항거한 주 목사는 5차례 총 5년4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48세의 나이에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박용규(총신대 신대원) 교수는 주 목사의 신앙관에 대해 “주 목사의 가정환경과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여러 교회에서의 목회사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며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소양의 생애를 통해 참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양 주기철은 1897년 11월 경남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아버지인 주 장로의 철저한 신앙교육은 소양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관련기사
ㆍ [주목사 아들 주광조 장로] “북한 전역에 복음의 씨앗을”
소양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1906년 7년제 개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보호조약(1905년)과 한일병합(1910년) 등 민족에 대한 일제의 침탈 행위는 소양의 인생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후 소양이 24세 때 참석한 한 부흥사경회가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만든 전환점이 됐다.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소양은 김익두 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나서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이른바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소양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실천과 현장 중심의 사역을 강조하는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25년 신학교를 졸업한 소양은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활발한 목회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31년 6월 문창교회에 부임한 소양은 당시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던 이단세력을 척결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소양은 또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에서 “예수를 버리는 것은 죽는 길이며 오히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길”이라는 순교자적 결단의 신앙을 부르짖었다. 이것이 바로 주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한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다.
1938년 전북노회를 시작으로 많은 노회가 신사참배에 대해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며 참배를 결정하면서부터 소양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 이 됐다. 이때부터 소양은 감옥과 교회를 넘나들게 된다.
하지만 소양의 구속은 오히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소양이 시무하던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교회 폐쇄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1940년 4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소양은 평양노회가 자신의 목사직을 면직시킨 사실을 알고 탄식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부터 또다시 투옥된 소양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진달래가 한창 필 무렵인 1944년 4월21일 소양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소양의 삶과 신앙이 주는 교훈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박 교수는 “소양은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신앙을 일치시킨 분”이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표상”이라고 말했다.
자료출처:http://blog.daum.net/kkho1105/2338
한국 개신교의 큰별 소양(蘇羊) 주기철(1897∼1944) 목사가 순교한지 어느덧 60년이 흘렀다. 주 목사의 호인 ‘소양’은 예수의 한문표기인 야소(耶蘇)에 양(羊)을 붙여 ‘예수님의 양’이란 의미를 가지며 생전의 주 목사가 즐겨쓴 말이기도 하다.
지난 20일 총신대 양지캠퍼스 신학대학원에서 열린 ‘제9회 소양기념강좌’에서는 주 목사의 유족과 교계 인사,성도 등 2000여명이 참석해 주 목사에 대한 뜨거운 추모 열기를 반영했다.
오직 복음을 지키기 위해 신사참배 반대운동과 신앙수호운동에 앞장서서 일제에 항거한 주 목사는 5차례 총 5년4개월간 옥고를 치르다 48세의 나이에 평양형무소에서 순교했다.
박용규(총신대 신대원) 교수는 주 목사의 신앙관에 대해 “주 목사의 가정환경과 그가 처한 시대적 배경,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여러 교회에서의 목회사역 속에서 형성된 것”이라며 “이 땅의 크리스천들은 소양의 생애를 통해 참신앙의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소양 주기철은 1897년 11월 경남 창원군 웅읍면 북부리에서 주현성 장로와 조재선의 넷째아들로 태어났다. 특히 아버지인 주 장로의 철저한 신앙교육은 소양의 신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관련기사
ㆍ [주목사 아들 주광조 장로] “북한 전역에 복음의 씨앗을”
소양은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던 1906년 7년제 개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민족애와 반일사상을 접하기 시작했다. 특히 을사보호조약(1905년)과 한일병합(1910년) 등 민족에 대한 일제의 침탈 행위는 소양의 인생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 후 소양이 24세 때 참석한 한 부흥사경회가 그의 삶을 하나님께 헌신하게 만든 전환점이 됐다. 1920년 5월27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부흥사경회에 참석한 소양은 김익두 목사의 ‘성신을 받으라’라는 제목의 설교를 듣고 나서 이전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이른바 영적 각성을 체험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소양은 1922년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실천과 현장 중심의 사역을 강조하는 신학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25년 신학교를 졸업한 소양은 경남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평양 산정현교회 등에서 활발한 목회 활동을 펼쳤다.
특히 1931년 6월 문창교회에 부임한 소양은 당시 교회 안에 독버섯처럼 퍼지고 있던 이단세력을 척결하는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소양은 또 1935년 12월 평양장로회신학교 사경회에서 “예수를 버리는 것은 죽는 길이며 오히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길”이라는 순교자적 결단의 신앙을 부르짖었다. 이것이 바로 주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한 마디로 표현한 ‘일사각오’라는 제목의 설교다.
1938년 전북노회를 시작으로 많은 노회가 신사참배에 대해 “국민의례라는 일본의 입장을 받아들인다”며 참배를 결정하면서부터 소양은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구심점 이 됐다. 이때부터 소양은 감옥과 교회를 넘나들게 된다.
하지만 소양의 구속은 오히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활성화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소양이 시무하던 산정현교회 성도들은 교회 폐쇄에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반대운동을 펼쳐나갔다.
1940년 4월 가석방으로 풀려난 소양은 평양노회가 자신의 목사직을 면직시킨 사실을 알고 탄식하기도 했다. 같은 해 6월부터 또다시 투옥된 소양은 일제의 가혹한 고문과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심한 육체적 고통을 겪어야 했다. 진달래가 한창 필 무렵인 1944년 4월21일 소양은 순교자의 면류관을 쓰고 하나님 품에 안겼다.
하지만 소양의 삶과 신앙이 주는 교훈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수많은 기독교인에게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박 교수는 “소양은 실천을 통해 자신의 삶과 신앙을 일치시킨 분”이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표상”이라고 말했다.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