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자료출처: http://cafe.daum.net/godisall/G2FB/89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대표적 인물이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이다. 그는 1897년 11월 경남 창원군 옹천면에서 주현성 장로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1912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20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장로가 세운 학교로서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적 기상이 강했던 학교였다. 주 목사는 오산에서 당시의 교장 조만식 장로를 위시하여 민족정신이 투절한 교사들에게서 민족정신을 배웠는데, 여기서 배운 항일정신이 후에 신사참배 반대의 서릿발 같은 절개를 이끌어 준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산 학교를 마치고 1917년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평소에 앓던 안질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였다. 이 무렵 그는 김해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감동되어 회개하고 김 목사의 안수로 안질의 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시작, 1926년 30세에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 청빙받아 처녀 목회를 시작하였다. 주 목사가 그 교회를 목회하면서 경남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에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출옥하였으나 결국 6.26사변 중에 순교한 손양원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초량교회에서 6년 간 목회를 한 후 주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문창교회는 박승명이 목회하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고 교회를 떠나게 되자 교회의 혼란을 수습할 사명을 띠고 주 목사가 청빙받아 오게 되었다. 교회는 주 목사가 온 후 안정을 되찾았고 크게 성장하여 주 목사의 명성은 전국에 얼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까지 가서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평양 장로회산학교에서의 사경회는 오랫동안 전해 오는 귀감이 된 집회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이 곳에서 부인을 잃은 어려움을 겪었고, 얼마 후에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 오정모 양과 재혼하였다. 오정모 사모야말로 주기철 목사가 순교자의 영예를 안게 한 장본이이요, 목사 사모로서 우리 교회사에 길이 남을 귀한 인물이었다.
마산에서 6년의 목회생활이 끝날 무렵,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던 송창근 목사 신학사상 문제로 교회를 떠나게 되자, 전에 오산학교의 교장이며 은사였던 이 교회 조만식 장로가 주기철 목사를 청빙하러 내려왔다. 주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줄 믿고 평양으로 떠나갔는데 이 때가 1936년, 그러니까 일제가 서서히 한국교회를 신사참배의 올무로 옥죄기 시작한 때였다. 평양과 한국교회의 거목 길선주 목사가 1935년 세상을 떠나고, 주기철 목사가 이듬해에 평양에 왔으니 이 또한 우연은 아니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그는 곧 예배당 신축을 하였는데, 예배당이 완공되어 헌당하기 직전인 1938년 2월에 일제는 주 목사를 검거하였다.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주 목사를 일시 석방하였으나, 1939년 7월 유재기 목사가 농우회 사건으로 의성 경찰서에 연행되자 아무 연고도 없는 주 목사를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하여 또 검속하였다. 7개월 동안 조사한다고 구속해 두었다가 별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단 석방하였다. 평양에 돌아와 다시 강단에 서서 그는 최후의 우연과 같은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 후 일제는 주 목사에게 3개월 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절개를 꺾고 평안히 사는 길보다는 일사각오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다.
일제의 사주로 평양 노회장 최지화 등 임원들이 평양 감옥으로 수차 찾아와 주 목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강요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평양노회는 할 수 없이 주 목사를 제명하는 결정을 내리고 노회 명부에서 삭제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평양 경찰서는 산정현 예배당에 횡십자로 나무를 대고 못박아 폐쇄하고 말았다.
주 목사는 옥중에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년 하고도 수개월의 세월을 보내면서 안질과 폐와 심장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서 1944년 4월 병감으로 옮겨졌는데, 순교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같은 달 어느 날 오정모 사모가 면회를 갔을 때, 주 목사는 간수에게 부축을 받아 나와서 부인과 최후의 면회를 하였다. 그 때 마지막 유연을 남겼는데, “① 내 신 어머니를 잘 모셔 주오, ② 따뜻한 숭늉이 한 그릇 먹고 싶소, ③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의 주선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 주시오, ④ 나를 웅천에 데려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주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마치고 그 자리에 쓰려졌다. 간수들에게 업혀 병감으로 돌아간 그는 그날 저녁, 즉 1944년 4월 21일 하오 9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운명하니, 그때 그의 나이 47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다. 그는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고 친일하는 배도의 무리도 없는 하나님 품으로 갔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우상 앞에 고개 숙인 한국교회를 짓누르고, 우상 앞에 머리를 곧게 쳐들고 우뚝 선 우리 교회의 다니엘이요, 신앙의 사표요, 영원히 깨지지 않을 횃불로서 타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불과 1년 서너 달 남겨 두고 떠나간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신앙의 본이 되는 청사에 길이 빛날 우리의 선배이다.
자료출처: http://cafe.daum.net/godisall/G2FB/89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투쟁의 대표적 인물이며, 한국 개신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빛나는 순교자이다. 그는 1897년 11월 경남 창원군 옹천면에서 주현성 장로의 7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를 마치고 1912년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 진학하여 20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였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장로가 세운 학교로서 당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항일적 기상이 강했던 학교였다. 주 목사는 오산에서 당시의 교장 조만식 장로를 위시하여 민족정신이 투절한 교사들에게서 민족정신을 배웠는데, 여기서 배운 항일정신이 후에 신사참배 반대의 서릿발 같은 절개를 이끌어 준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오산 학교를 마치고 1917년 연희전문 상과에 진학하였으나, 평소에 앓던 안질이 악화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낙향하였다. 이 무렵 그는 김해교회에 와서 부흥사경회를 인도하던 김익두 목사의 집회에서 감동되어 회개하고 김 목사의 안수로 안질의 치료까지 받게 되었다.
1921년 평양의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하여 수업을 시작, 1926년 30세에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 청빙받아 처녀 목회를 시작하였다. 주 목사가 그 교회를 목회하면서 경남 성경학교에서 가르쳤는데, 그의 제자 중에 같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출옥하였으나 결국 6.26사변 중에 순교한 손양원이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초량교회에서 6년 간 목회를 한 후 주 목사는 마산 문창교회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문창교회는 박승명이 목회하고 있었는데, 교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고 교회를 떠나게 되자 교회의 혼란을 수습할 사명을 띠고 주 목사가 청빙받아 오게 되었다. 교회는 주 목사가 온 후 안정을 되찾았고 크게 성장하여 주 목사의 명성은 전국에 얼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일본에까지 가서 사경회를 인도하였고, 평양 장로회산학교에서의 사경회는 오랫동안 전해 오는 귀감이 된 집회였다. 그러나 주 목사는 이 곳에서 부인을 잃은 어려움을 겪었고, 얼마 후에 마산 의신여학교 교사 오정모 양과 재혼하였다. 오정모 사모야말로 주기철 목사가 순교자의 영예를 안게 한 장본이이요, 목사 사모로서 우리 교회사에 길이 남을 귀한 인물이었다.
마산에서 6년의 목회생활이 끝날 무렵, 평양의 산정현교회에서 목회하던 송창근 목사 신학사상 문제로 교회를 떠나게 되자, 전에 오산학교의 교장이며 은사였던 이 교회 조만식 장로가 주기철 목사를 청빙하러 내려왔다. 주 목사는 하나님의 부르심은 줄 믿고 평양으로 떠나갔는데 이 때가 1936년, 그러니까 일제가 서서히 한국교회를 신사참배의 올무로 옥죄기 시작한 때였다. 평양과 한국교회의 거목 길선주 목사가 1935년 세상을 떠나고, 주기철 목사가 이듬해에 평양에 왔으니 이 또한 우연은 아니다.
산정현교회에 부임하고 나서 그는 곧 예배당 신축을 하였는데, 예배당이 완공되어 헌당하기 직전인 1938년 2월에 일제는 주 목사를 검거하였다. 1938년 제27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주 목사를 일시 석방하였으나, 1939년 7월 유재기 목사가 농우회 사건으로 의성 경찰서에 연행되자 아무 연고도 없는 주 목사를 이 사건에 연루된 것으로 하여 또 검속하였다. 7개월 동안 조사한다고 구속해 두었다가 별 혐의를 발견하지 못하고 일단 석방하였다. 평양에 돌아와 다시 강단에 서서 그는 최후의 우연과 같은 “5종목의 나의 기원”이라는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 후 일제는 주 목사에게 3개월 내에 목사직을 사면하라고 협박하였다. 그러나 그는 신앙의 절개를 꺾고 평안히 사는 길보다는 일사각오로 끝까지 싸우다 죽는 길을 택하였다.
일제의 사주로 평양 노회장 최지화 등 임원들이 평양 감옥으로 수차 찾아와 주 목사에게 사표를 내라고 강요하였으나 응하지 않자 평양노회는 할 수 없이 주 목사를 제명하는 결정을 내리고 노회 명부에서 삭제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평양 경찰서는 산정현 예배당에 횡십자로 나무를 대고 못박아 폐쇄하고 말았다.
주 목사는 옥중에서 온갖 고문을 받으며 년 하고도 수개월의 세월을 보내면서 안질과 폐와 심장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져서 1944년 4월 병감으로 옮겨졌는데, 순교의 날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같은 달 어느 날 오정모 사모가 면회를 갔을 때, 주 목사는 간수에게 부축을 받아 나와서 부인과 최후의 면회를 하였다. 그 때 마지막 유연을 남겼는데, “① 내 신 어머니를 잘 모셔 주오, ② 따뜻한 숭늉이 한 그릇 먹고 싶소, ③ 나는 하나님 앞에 가서 주님의 주선교회를 위하여 기도하겠소. 교회에 이 말을 전해 주시오, ④ 나를 웅천에 데려가지 말고 평양 돌박산에 묻어 주오”라는 것이었다. 이 말을 마치고 그 자리에 쓰려졌다. 간수들에게 업혀 병감으로 돌아간 그는 그날 저녁, 즉 1944년 4월 21일 하오 9시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며 운명하니, 그때 그의 나이 47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다. 그는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고 친일하는 배도의 무리도 없는 하나님 품으로 갔다.
한국이 낳은 위대한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우상 앞에 고개 숙인 한국교회를 짓누르고, 우상 앞에 머리를 곧게 쳐들고 우뚝 선 우리 교회의 다니엘이요, 신앙의 사표요, 영원히 깨지지 않을 횃불로서 타고 있는 것이다. 해방을 불과 1년 서너 달 남겨 두고 떠나간 순교자 주기철 목사는 오고, 오는 모든 세대에게 신앙의 본이 되는 청사에 길이 빛날 우리의 선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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