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서택목사_내적치유_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란 무엇인가?
주서택목사_내적치유_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란 무엇인가?
(신성한 내면아이와 구상화에 대해서는
내적치유의 허구성을 읽어 보시면 됩니다)

주서택 목사는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라고 말한다.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다.
이것은 이미 타락해 버린 우리 마음에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마음의 변화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치료와 성숙이다.
성숙은 치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인간의 마음이 치료되어야만 성숙되고 그래서 온전한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것은 마음에 쌓인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뇌는 컴퓨터와 같은 기억 장치를 가진다.
어떤 특정한 일은 유리 조각처럼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게 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유리 조각들 중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있고 이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려 감지되지 못해 치료되지 않고
발별이 시작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기도 한다.
(주서택, 김선화,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순출판사, 2008. pp. 33-34)
----------------------
주서택 목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치료와 성숙이다.
그가 말하는 치료는 의식과 치료와 무의식적 치료로 나뉘며,
의식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무의식적인 것, 곧 잠재의식 속에 깊은 상처로 자리 잡은 것은
성령의 역사로 치료가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말은 전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절충주의 방식이다.
그러면 성경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주석을 참고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은 주석이 잘 나오니, 조금만 참고해 보면
주서택 목사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를 알 수가 있다.
주석은 '카리스 주석'을 인용하겠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δι' ὧν τὰ τίμια καὶ μέγιστα ἡμῖν ἐπαγγέλματα δεδώρηται,
ἵνα διὰ τούτων γένησθε 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
ἀποφυγόντες τῆς ἐν τῷ κόσμῳ ἐν ἐπιθυμίᾳ φθορᾶς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을 통해서 너희가 세상 가운데서 욕망으로 인한 부패를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도록'이다.
카리스 주석 770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 대하여 말한다.
이 표현은 '유세베이아'(경건), '아레테'(덕) 등과 함께 헬라적 의미가 듬뿍 담긴 표현이다.
또한 '노모스'(율법준수)나 '퓌시스'(본성)에 의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됨으로써
'프도라'(부패)의 수고를 피하게 되었다는 이교 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이 표현은 더욱 헬라적인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이교적 의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로 인한 것임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지주의적 색채를 가진 거짓 스승들이 제의한 것은
그들의 추종자들이 물질적 세상의 속박을 피함으로써 더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베드로는 본장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인들의 완곡 어법인 '신기한 능력'(3절)이라는 표현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나타내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4절)이란 표현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이교도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카리스 종합주석, 기독지혜사, p. 770.)
이 말의 본질이자 핵심은,
이교도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언약에 기초한 것이므로,
성도는 그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므로 신의 성품에 참예케 되는 것이다.
카리스 주석에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성품'에 해당하는 '데이아스 퓌세오스'에서
'성품'을 뜻하는 '퓌세오스'는 본성이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새로운 본질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엡 4:22-24).
(베드로후서, 카리스 종합주석, 기독지혜사, p. 757.)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새로운 본질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본질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주서택 목사는 치료를 첫 번째로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식적 치료를 함으로써,
성령은 잠재의식적 치료를 함으로써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이 두 가지로 만들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은 성경과 심리학을 섞어서 가르치는 혼합주의적 절충주의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양분하는 것을
주서택 목사의 내적치유가 가지는 교리적 오류이다.
------- 참고자료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입력 : 2002.09.16 13:09베드로후서 1 : 4
자료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life.view.htm?id=157235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성의 본질은 피조물이 한몫 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질에 관한 한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항상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어져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처럼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도 사랑이 되었습니다-”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우리도 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선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의미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됩니다. 사실 아무리 고상한 의미에서 생각한다 해도 우리는 절대적인 신성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으로 이루어진 그 몸의 지체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 머리에서 흐르고 있는 피와 똑같은 피가 그 손에서도 흐릅니다. 즉 그리스도를 소생시킨 그 동일한 생명이 그의 백성들도 살립니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의와 신실하심 속에서 우리를 그의 신부로 맞이하셨습니다. 주와 연합하는 자는 그와 한 영입니다.
오!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우리가 그 신비를 들여다보지만 그 신비의 오묘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됨-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주요 구주되신 예수님의 일부로 주님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진 사람답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주님과의 그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나타내야 합니다. 일상 생활과 대화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 정욕에서 나오는 그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야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희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자료제공: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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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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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신성한 내면아이와 구상화에 대해서는
내적치유의 허구성을 읽어 보시면 됩니다)

주서택 목사는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라고 말한다.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
총체적인 인간 구원의 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를 닮아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까지다.
이것은 이미 타락해 버린 우리 마음에 전반적인 변화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이 마음의 변화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치료와 성숙이다.
성숙은 치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즉 인간의 마음이 치료되어야만 성숙되고 그래서 온전한 변화를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해 다루어야 할 것은 마음에 쌓인 수많은 기억의 파편들이다.
뇌는 컴퓨터와 같은 기억 장치를 가진다.
어떤 특정한 일은 유리 조각처럼 우리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내게 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마음에 상처를 입힌 유리 조각들 중에서
자신이 의식하고 있고 이해하는 것들은 대부분 해결할 수 있으나,
어떤 것은 잠재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려 감지되지 못해 치료되지 않고
발별이 시작된 감염 부위처럼 계속적인 영향을 우리 삶에 미치기도 한다.
(주서택, 김선화,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순출판사, 2008. pp. 3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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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택 목사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두 가지를 말하는데, 치료와 성숙이다.
그가 말하는 치료는 의식과 치료와 무의식적 치료로 나뉘며,
의식적인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무의식적인 것, 곧 잠재의식 속에 깊은 상처로 자리 잡은 것은
성령의 역사로 치료가 된다고 말한다.
물론 이런 말은 전혀 성경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절충주의 방식이다.
그러면 성경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주석을 참고해 보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은 주석이 잘 나오니, 조금만 참고해 보면
주서택 목사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한가를 알 수가 있다.
주석은 '카리스 주석'을 인용하겠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 1:4)
δι' ὧν τὰ τίμια καὶ μέγιστα ἡμῖν ἐπαγγέλματα δεδώρηται,
ἵνα διὰ τούτων γένησθε θείας κοινωνοὶ φύσεως,
ἀποφυγόντες τῆς ἐν τῷ κόσμῳ ἐν ἐπιθυμίᾳ φθορᾶς
직역하면 다음과 같다.
"이것들을 통해서 너희가 세상 가운데서 욕망으로 인한 부패를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이 되도록'이다.
카리스 주석 770페이지에는 다음과 같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에 대하여 말한다.
이 표현은 '유세베이아'(경건), '아레테'(덕) 등과 함께 헬라적 의미가 듬뿍 담긴 표현이다.
또한 '노모스'(율법준수)나 '퓌시스'(본성)에 의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됨으로써
'프도라'(부패)의 수고를 피하게 되었다는 이교 학자들의 주장 때문에
이 표현은 더욱 헬라적인 표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라는 표현을 통해 이교적 의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하나님의 순수한 은혜로 인한 것임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당시 영지주의적 색채를 가진 거짓 스승들이 제의한 것은
그들의 추종자들이 물질적 세상의 속박을 피함으로써 더 하나님처럼 되었다는 것이었는데,
베드로는 본장에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히브리인들의 완곡 어법인 '신기한 능력'(3절)이라는 표현과
하나님의 신실한 언약을 나타내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4절)이란 표현들을 통해서
성도들에게 이교도들의 미혹에 이끌리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베드로후서, 카리스 종합주석, 기독지혜사, p. 770.)
이 말의 본질이자 핵심은,
이교도들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가능한 것이지만,
베드로 사도는 성도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언약에 기초한 것이므로,
성도는 그 언약에 신실한 삶을 살아가므로 신의 성품에 참예케 되는 것이다.
카리스 주석에서는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성품'에 해당하는 '데이아스 퓌세오스'에서
'성품'을 뜻하는 '퓌세오스'는 본성이나 본질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말은 새로운 본질로 다시 태어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했던 것과 같은 의미이다(엡 4:22-24).
(베드로후서, 카리스 종합주석, 기독지혜사, p. 757.)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새로운 본질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말한다.
새로운 본질로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주서택 목사는 치료를 첫 번째로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식적 치료를 함으로써,
성령은 잠재의식적 치료를 함으로써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는 것으로 설명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 이 두 가지로 만들어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설명을 하고 있다.
이런 것은 성경과 심리학을 섞어서 가르치는 혼합주의적 절충주의적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전적은 은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의식과 무의식으로 나누어서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역을 양분하는 것을
주서택 목사의 내적치유가 가지는 교리적 오류이다.
------- 참고자료 ----------------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
크리스천투데이 기사 입력 : 2002.09.16 13:09베드로후서 1 : 4
자료출처http://www.christiantoday.co.kr/life.view.htm?id=157235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은 물론 하나님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성의 본질은 피조물이 한몫 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본질에 관한 한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에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심연이 항상 가로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첫번째 사람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것처럼 우리 역시 성령의 거듭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형상 안에서 만들어져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처럼 만들어졌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우리도 사랑이 되었습니다-”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이십니다. 우리도 진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참된 것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선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이 청결한 자들이 되어 하나님을 뵐 수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이보다 훨씬 더 높은 의미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들이 됩니다. 사실 아무리 고상한 의미에서 생각한다 해도 우리는 절대적인 신성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거룩한 인격으로 이루어진 그 몸의 지체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그 머리에서 흐르고 있는 피와 똑같은 피가 그 손에서도 흐릅니다. 즉 그리스도를 소생시킨 그 동일한 생명이 그의 백성들도 살립니다. “우리는 죽었고 우리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감추인 바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것만으로도 충분치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결혼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의와 신실하심 속에서 우리를 그의 신부로 맞이하셨습니다. 주와 연합하는 자는 그와 한 영입니다.
오! 얼마나 놀라운 신비입니까! 우리가 그 신비를 들여다보지만 그 신비의 오묘함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과 하나됨-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우리의 주요 구주되신 예수님의 일부로 주님과 하나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뻐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뻐하는 것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 만들어진 사람답게 다른 사람들과 교제할 때 주님과의 그 거룩하고 고상한 관계를 나타내야 합니다. 일상 생활과 대화 속에서 우리가 이 세상 정욕에서 나오는 그 더럽고 추한 모든 것들로부터 도망쳤다는 사실을 분명히 나타내야 합니다.
오 하나님이여, 저희 안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더욱 잘 드러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소서!
자료제공: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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