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엄마가지마_주서택 목사가 사용하는 구상화치유
2엄마가지마_주서택 목사가 사용하는 구상화치유
주서택 목사는
'엄마가지마'에서 뉴에이지적 치유 방법인 구상화(visualizat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은 글에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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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학생이 방금 자신에 대해서 말한 그런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 시간에 학생이 직접 주님과의 만남을 가지는 것이 좋겠어요.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고 말한 시편139편의 말씀을 믿지요?"
"네, 지금 제 감정이나 믿음은 엉망이지만 저는 그 분밖에 믿을 데가 없는 걸요."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학생은 어린 시절의 그 현장에 계신 주님을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성령께서 강의하신 분을 통해 이런 기억을 구체적으로 호명하셨다면 주님이 하고 싶으신 일이 있지 않겠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 사건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기도해 보도록 하지요.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네."
눈을 감으니 힘들이지 않고도 분명하게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는 염두에 두지 않고 바쁘게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 그리고 먼지가 이는 길고 긴 시골길, 그 뒤에서 주저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보였다.
"그 장면을 생각하고 있나요?"
"주님이 그곳에 계셨다고 믿을 수 있나요?"
"네"
"그러면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이것은 학생이 스스로 보아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분의 말대로 기도했다. 주님이 그곳에 계셨다는데 어디에 계셨는지 알게 해 달라고‥‥‥‥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하게 내 생각의 장면 속에 주님께서 그 주저앉아 있는 어린아이 뒤에서 계시면서 아이 어깨에 한 손을 얹으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번쩍 들어 올려 주님의 목에 무등을 테우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안 아프지? 자 이제부터는 엄마만 보지 말고 저쪽 산으로 놀러갈까?"
그리고 주님은 그 시골길이 아닌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나는 갑자기 이루어진 이런 장면에 아연할 뿐이었다. "주님이 그곳에 계셔요?"
"네‥‥‥"
내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그리고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나는 내 생각 속에서 그러나 너무도 분명하게 펼쳐지고 전개되고 있는 장면들을 상담 순장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무등을 태워준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은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아주 좋은 아빠들만이 하는 일이었다. 나는 주님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요청해 본 적도 없었고 주님이 이렇게 해주셨다는 간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어린 나를 안아 목말을 태워 주신 채 파란 들판을 구경시켜 주시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 속에 얼음 조각처럼 나를 찌르던 아픔들이, 그렇게 차갑고 나를 두렵게 하던 것들이 따뜻한 기쁨에 눌려 사라져 갔다.
"그래, 지금 마음이 어때요?"
"아프지가 않아요 그리고 외롭지도 않고요. 주님이 너무나 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셔요."
한참 후에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어머니는 어디에 있지?"
아! 나에게 어머니가 있었지. 주님도 풀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어머니‥‥‥‥
나는 다시 그 장면 속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길 저 만큼에 서 있었다. 나는 주님에게 말했다.
"주님! 엄마가 저렇게 혼자 가는데 엄마 불러요."
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의 말이 마쳐지자마자 그 즉시 엄마도 나와 같이 주님의 손을 같이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나의 뇌리에 고통의 못처럼 박혀 있는 엄마의 모습은 한탄하고 외로워하고 희망이 없는 짜증스런 모습이었는데 지금 내 마음 속에 보여 지는 엄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도 주님의 손을 잡고 나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그렇게 그리던 진짜 엄마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만으로도 내가 엄마에게 가진 죄책감과 연민과 증오와 번민, 이런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자유, 기쁨, 평안, 이런 것들이 밀려와 통곡을 했다. 상담해 주시는 분의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는지 ‥‥‥ 그 분의 옷이 젖어 버렸다.
이 울음은 내가 지금까지 흘린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울면서 내가 더 고통스럽고 더 쓸쓸해지는 울음이 아니라, 울면서 나는 더 기뻐졌고 더 평안해져서 또 울었다.
시편 23편의 말씀이 그림이 되어서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떠올랐다. 주님이 나와 엄마를 그 아름다운 곳에 같이 데리고 있어 주셨다.
상담 순장님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는 또 다시 엄마 쉬 마려워요 하든지 다리 아파요 하는 말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럼 자매가 지금까지 했던 그 거짓말,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했던 그 거짓말하는 습관을 십자가 앞에서 끊도록 합시다. 그것은 이제 필요 없는 거짓된 것이니까요"
"어떻게 끊는 건데요?"
"자매가 그런 생각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생각을 거부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기도해 보세요. '이 시간부터 나는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 썼던 쉬 마렵다고 하는 말과 다리 아프다고 하는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거짓말의 힘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는다. 나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겠다.'"
"맞아요. 나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기도하겠어요"
그랬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 썼던 거짓말 그것이 나를 병으로 묶고 있었고, 성장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나는 나의 병을 이용했던 적이 많았다. 아! 새롭게 될 태도의 변화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런 태도들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며 기도했다.
(주서택 김선화 지음, 엄마가지마, 순출판사, 2010, pp.4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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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바로
뉴에이지적 치유 방법인 구상화(visualization)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것이 뉴에이지 구상화인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저 내적치유라고 하니, 그것도 목사가 한다고 하니,
또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하라고 하는 대로 따라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뉴에이지적인 방법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구상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최면치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이런 구상화가 점점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잘못된 구상화에 빠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과거를 재 구성해야 하겠지요~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생각은
오로지 자기 마음대로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현장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구상화를 통하여 등장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두고서
영적인 안내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당들이 신내림을 받는 '애기동자'나 '조상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것인줄도 모르고 내적치유랍시고 가서
은혜받았다고 치유받았다고 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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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서택 목사는
'엄마가지마'에서 뉴에이지적 치유 방법인 구상화(visualization)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증거는 다음과 같은 글에 나타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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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사건을 통해서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학생이 방금 자신에 대해서 말한 그런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내가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보다는 이 시간에 학생이 직접 주님과의 만남을 가지는 것이 좋겠어요. 주님이 항상 함께 계신다고 말한 시편139편의 말씀을 믿지요?"
"네, 지금 제 감정이나 믿음은 엉망이지만 저는 그 분밖에 믿을 데가 없는 걸요."
"그렇다면 그 믿음으로 학생은 어린 시절의 그 현장에 계신 주님을 만나 볼 수 있을 거예요 특히 성령께서 강의하신 분을 통해 이런 기억을 구체적으로 호명하셨다면 주님이 하고 싶으신 일이 있지 않겠어요?"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럼 이 사건을 주님께서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지 기도해 보도록 하지요. 그 상황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겠어요?"
"네."
눈을 감으니 힘들이지 않고도 분명하게 그 장면이 다시 떠올랐다. 아이는 염두에 두지 않고 바쁘게 걸어가는 엄마의 뒷모습, 그리고 먼지가 이는 길고 긴 시골길, 그 뒤에서 주저앉아 있는 나의 모습이보였다.
"그 장면을 생각하고 있나요?"
"주님이 그곳에 계셨다고 믿을 수 있나요?"
"네"
"그러면 주님이 어디에 계신지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보세요. 이것은 학생이 스스로 보아야 하는 거예요"
나는 그분의 말대로 기도했다. 주님이 그곳에 계셨다는데 어디에 계셨는지 알게 해 달라고‥‥‥‥ 그런데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분명하게 내 생각의 장면 속에 주님께서 그 주저앉아 있는 어린아이 뒤에서 계시면서 아이 어깨에 한 손을 얹으시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는 번쩍 들어 올려 주님의 목에 무등을 테우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제 안 아프지? 자 이제부터는 엄마만 보지 말고 저쪽 산으로 놀러갈까?"
그리고 주님은 그 시골길이 아닌 아름다운 자연 속으로 나를 데려가셨다. 나는 갑자기 이루어진 이런 장면에 아연할 뿐이었다. "주님이 그곳에 계셔요?"
"네‥‥‥"
내 눈에서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 그리고 콧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나는 내 생각 속에서 그러나 너무도 분명하게 펼쳐지고 전개되고 있는 장면들을 상담 순장님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무등을 태워준 사람은 없었다. 이 일은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아주 좋은 아빠들만이 하는 일이었다. 나는 주님에게 이렇게 해달라고 요청해 본 적도 없었고 주님이 이렇게 해주셨다는 간증을 들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 어린 나를 안아 목말을 태워 주신 채 파란 들판을 구경시켜 주시고 있지 않은가!
내 마음 속에 얼음 조각처럼 나를 찌르던 아픔들이, 그렇게 차갑고 나를 두렵게 하던 것들이 따뜻한 기쁨에 눌려 사라져 갔다.
"그래, 지금 마음이 어때요?"
"아프지가 않아요 그리고 외롭지도 않고요. 주님이 너무나 맑은 얼굴로 나를 보고 계셔요."
한참 후에 그분은 나에게 이렇게 물으셨다.
"어머니는 어디에 있지?"
아! 나에게 어머니가 있었지. 주님도 풀 수 없을 것 같은 나의 어머니‥‥‥‥
나는 다시 그 장면 속에서 어머니를 보았다. 어머니는 여전히 등을 보인 채 길 저 만큼에 서 있었다. 나는 주님에게 말했다.
"주님! 엄마가 저렇게 혼자 가는데 엄마 불러요."
아! 어쩌면 이럴 수가 있을까? 나의 말이 마쳐지자마자 그 즉시 엄마도 나와 같이 주님의 손을 같이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서 그 엄마의 얼굴을 보았다. 엄마의 얼굴은 변해 있었다.
나의 뇌리에 고통의 못처럼 박혀 있는 엄마의 모습은 한탄하고 외로워하고 희망이 없는 짜증스런 모습이었는데 지금 내 마음 속에 보여 지는 엄마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엄마도 주님의 손을 잡고 나처럼 즐거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얼굴은 내가 그렇게 그리던 진짜 엄마 같은 얼굴이었다. 그 얼굴만으로도 내가 엄마에게 가진 죄책감과 연민과 증오와 번민, 이런 것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나는 평생 한 번도 체험해 보지 못한 자유, 기쁨, 평안, 이런 것들이 밀려와 통곡을 했다. 상담해 주시는 분의 품에 안겨 얼마나 울었는지 ‥‥‥ 그 분의 옷이 젖어 버렸다.
이 울음은 내가 지금까지 흘린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울면서 내가 더 고통스럽고 더 쓸쓸해지는 울음이 아니라, 울면서 나는 더 기뻐졌고 더 평안해져서 또 울었다.
시편 23편의 말씀이 그림이 되어서 그리고 그 속에 내가 주인공이 되어서 떠올랐다. 주님이 나와 엄마를 그 아름다운 곳에 같이 데리고 있어 주셨다.
상담 순장님이 나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는 또 다시 엄마 쉬 마려워요 하든지 다리 아파요 하는 말 할 필요가 있어요?"
"아니오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요"
"그럼 자매가 지금까지 했던 그 거짓말,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했던 그 거짓말하는 습관을 십자가 앞에서 끊도록 합시다. 그것은 이제 필요 없는 거짓된 것이니까요"
"어떻게 끊는 건데요?"
"자매가 그런 생각을 따르지 않기로 선택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그 생각을 거부하는 거예요 이런 식으로 기도해 보세요. '이 시간부터 나는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 썼던 쉬 마렵다고 하는 말과 다리 아프다고 하는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그 거짓말의 힘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끊는다. 나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겠다.'"
"맞아요. 나는 다시는 그런 거짓말을 사용하지 않을 거예요 기도하겠어요"
그랬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엄마를 불러 세우기 위해 썼던 거짓말 그것이 나를 병으로 묶고 있었고, 성장해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받기 위해 나는 나의 병을 이용했던 적이 많았다. 아! 새롭게 될 태도의 변화란 이것을 말하는 것이었구나! 이해가 되었다. 나는 이런 태도들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하며 기도했다.
(주서택 김선화 지음, 엄마가지마, 순출판사, 2010, pp.49-52)
-------------------------------
이런 것이 바로
뉴에이지적 치유 방법인 구상화(visualization)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것이 뉴에이지 구상화인줄도 몰랐던 것이다.
그저 내적치유라고 하니, 그것도 목사가 한다고 하니,
또한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니 하라고 하는 대로 따라했던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비성경적이고 뉴에이지적인 방법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구상화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는 최면치유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는 이런 구상화가 점점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런 잘못된 구상화에 빠지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요?
과거의 역사 속에서 역사하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부정하게 됩니다.
결국 자기 마음에 드는 대로 과거를 재 구성해야 하겠지요~
옛날에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는 생각은
오로지 자기 마음대로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현장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 아닐까요?
구상화를 통하여 등장하는 예수는
성경에서 말하는 예수님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두고서
영적인 안내자라고 합니다.
그것은 무당들이 신내림을 받는 '애기동자'나 '조상신'이나 다름없습니다.
이런 것인줄도 모르고 내적치유랍시고 가서
은혜받았다고 치유받았다고 했으니,
얼마나 억울한 일이겠습니까?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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