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개념에 대하여/강상림(한국외대 철학)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개념에 대하여/강상림(한국외대 철학)
자료출처 http://www.hyanglin.org/bbs/free01/22544
처음 키에르케고르가 단독자란 말을 썼을 때는 `내가 기쁨과 고마운 마음으로 나의 독자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였다. 여기서 `저 사람`이란 그의 약혼자였던 레기네 올센을 뜻한다. 그러나, 그 후 `단독자`란 말이 뜻하는 바는 점차로 일반화된다. 이 일반화된 `단독자`는 모든 사람이 그것(단독자)이며 또 그것일 수 있는 단독자로서 그 전형은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즉, 여기서의 단독자는 특별히 탁월하거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단독자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의 단독자이며, 단독자임을 자신의 영예로 여겨야만 하고, 더욱이 한 사람의 단독자임에 참으로 자신의 축복을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독자란 말에는 `오직 한사람`이라는 것 - 누구나 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서 또한 모든 사람이 단독자가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과 `누구나`라고 하는 것이 함께 스며있다.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사실, 주의를 환기하여 그리스도 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단독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단독자이어야 한다는 의무를 즉, 바로 그리스도교에 관계해야 하는 방식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 그것은 지극히 고독한 일이다. 그것은 무리를 거슬러 혹은 떠나서 가장 진실된 자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감을 뜻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실존의 삼단계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찾을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단독자의 보기를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에서 찾는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 관계된 이 사건 - 모리아산 사건 - 을 바라보는 키에르케고르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모순속에 사람을 불면에 빠뜨릴 수 있는 불안이 있다. 그리고 이 불안이 없다면 아브라함은 이미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의 불안은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이 것 곧, 보편자와 단독자가 서로 모순 대립되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사실, 아브라함의 의도는 인륜적, 보편적인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신앙이 바탕이 된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순전히 사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브라함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윤리적 목적도 없이,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인륜적으로 정해진 세계를 체념하고 그런 끔직한 짓을 행하려 했을까. 결국,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사회나 국가의 이념보다 높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위해 윤리적 보편적인 것과 충돌하고 신앙한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는 윤리적인 것의 무한한 체념을 통해 더 높은 목적 곧, 신앙을 실현하고 참다운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가 되는 것, 그것은 실존의 삼단계에서 관찰할 수 있듯,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아래에 있은 다음에 이제 보편적인 것을 돌파하고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위에 있는 개별자가 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이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뜻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나 종 엘리에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에 대해 말로써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 `절대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에 대해 말로써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코르사르 사건`이후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은 더욱 심화된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단독자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적인 범주가 되도록 더욱 힘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무엇`이냐고 하는 객관적 문제`가 아니라, 단독의 개인이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관계하느냐`고 하는 주체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주체적 사고의 쟁점은 `무엇`에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고 대상의 진리 비진리는 문제가 안 된다. 사실,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하는 `선택과 결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전체가 진리`라고 했던 헤겔에 맞서서 "주체적인 어떻게와 주체성이 진리"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 진리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사고자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업신여긴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주체성이 문제가 될 때에는 언제나 사고자를 떠나 서 있는 진리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실존하는 사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진리에 관계하느냐고 하는데 있다. 헤겔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을 실존 사상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헤겔은 마치 모든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 가능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인간은 극히 미련한 것이어서 세계와 우주의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비판 기준은 사람이 가지는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내적 행위이므로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여부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주체성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한낱 감정- 말하자면, 광기 같은 것 - 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단락 짓는다. `무엇`도 함께 주어진 `어떻게`가 있다. 사실, 그 `어떻게`가 올바로 주어진다면 `무엇`도 또한 주어진다. 이는 신앙의 `어떻게`이다. 이것은 분명히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는 다시 `객관성`을 확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신앙의 어떻게`는 `무엇`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신앙의 어떻게`이며, 이 내면성을 정당하게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관계의 어떻게`로서 파악된 주체성의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 객관성을 찾는다 함은, 주체성의 정열이 그의 극한인 신앙의 정열에까지 높아졌을 때, 주체성은 동시에 내재성을 버리고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 던져 넣어야 할 어떤 것을 찾아냄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는 곧, 실존하는 신의 현실성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그에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것이고, 진정한 주체성은 여기서 객관성을 확보한다. 진정한 주체적 사고자는 그 자신의 주체성에 대하여 객관적 태도를, 자기밖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관 안에서 승화된 객관`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적으로 로마 위정자들에 의해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강력한 이단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예수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에 대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쓸데없이 거지 행색을 하며 사람들에게 대가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그의 모습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럽게 조차 비쳤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성경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삶’으로 얘기치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네들은 그가 베푼 이웃에 대한 대가 없는 무한한 희생과 사랑에 감동을 받고 조금이나마 그에 부합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삶을 한없이 우러러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이미 객관화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신앙은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로써 객관적인 불확실성 곧, 부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독자의 내면적 행위이다. 만일 우리가 객관적으로 하느님을 잡을 수 있다면 굳이 믿음의 행위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신앙을 붙잡기 위하여 단독자로서 객관적 불확실성 속에 몸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감각 기관에 의한 실질적인 감각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으로 그와 함께 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의 단독자는 무한한 내면성의 정열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앙의 진실을 확보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단독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독자는 대중, 공중, 집단, 다수, 얼마만큼, 류, 사람의 무리, 표본인 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거짓되고 악한 세상과 충돌하면서 드러나는 순교하는 ‘진리의 증인’을 지칭하게 된다. 이리하여 단독자의 개념은 종교적인 범주와 개념을 갖기에 이른다.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으로 인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사상가 - 일체의 사회 윤리에서 멀리 떠난 개인주의, 종교적 금욕주의를 주장한 무세계적 자기 독백적인 고독한 사상가 -로 간주되며,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심밖에는 가지지 않았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심지어 근대적 퇴폐의 한 징후로, 개인주의적 반동적 비합리주의 철학의 선구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사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진행된 사회적,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출판된 그의 저작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의 국민 전체를 흥분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848년의 슬레스버, 홀스덴 분쟁에 얽힌 독일과의 전쟁에도 ,1849년의 절대 왕정의 붕괴와 자유 헌법 시행으로 이끌어간 국민주의적, 자유주의적 운동에도 무관심했던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 정치적 변혁을 겨냥한 운동을 비롯하여 대중, 저널리즘, 국교회 등에 노골적인 혐오와 불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모든 저작 활동의 사상 전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하는 문제에 있기에, 정치적 문제에 거리를 둔다. 어쩌면, 그가 영락없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왕실 옹호주의자,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한 정신적인 귀족주의자 등으로 이해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조국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가 엄청난 동란과 변혁을 겪고 있는 그 즈음에 정말로 전적으로 이러한 일체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좀 더 융통성을 갖고 이렇게 그에 대해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당시 복잡다단한 양상의 시대적 배경으로 정치 사회적 국내외 상황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 특별한 그만의 임무를 깨닫고 행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회 정치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는 주어진 사명에 따라, 사람들이 정치, 사회 문제에 열중하고 무리를 이루어 절규하는 데서 간과하기 쉬운 것 곧,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날카롭게 통찰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의한 수평화 과정이 이미 한 시대의 조류로서 이미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수평화 과정이 끝난 후 대중, 다수, 공중이 구원하는 힘, 자유를 실현하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그에 의하면 이것-신 앞에 선 `단독자`-뿐이다. 즉, 낱낱의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선별된 개인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흔들리지 않는 종교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운동 등 이러 저러한 운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것이며, 대중은 윤리적, 종교적 심판자로서는 비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 대중과 민중을 법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회, 정치적인 혁명 운동은 민중의 신화, 양의 지배라고 하는 악마의 복음인 민중의 소리와 하느님의 소리를 혼동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급무는 민중, 대중을 집단의 힘으로 결집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하는 일이며, 이 단독자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집단 사상이나 연합의 원리로 도피하여 다수를 하느님으로 삼는 집단적인 주체는 인격적 하느님과 단독자를 상실한 세속적 인간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세속적 인간주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유물론 내지 자연주의로 타락하여 하나의 끔찍한 종교로, 그리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키에르케고르의 염려대로 후일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에게 무비판적인 충성과 무조건의 복종 자기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시대의 문제가 단지 정치/사회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에 관한 내적/정신적 문제이며 따라서 정치/사회 문제는 필연적으로 종교 문제로 전환되고, 그 해결도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바꿔 생각하면, 이 단독자의 개념은 키에르케고르가 자기의 시대를 그만의 예리한 시각으로 섬세하게 이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최선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아래, 그에게 종교적인 형태로 인간의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은 단독자의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뜻했다. 이웃은 인간평등의 절대적이고 참된 표현이다. 만일 진실로 모든 사람이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한다면 그 때에는 완전한 인간평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정치적 평등권도 이룩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본래의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범주인 단독자의 개념이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고 정치 사회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파악, 종교적인 해결을 추구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사상의 참 면목이 있겠다.
단독자는 고독하다. 단독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죄인으로서 자기 홀로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고독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임을 일깨워 준다. 참회자는 자기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고, 자기에게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타자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 하나님 앞에 내면적으로 기도한다. 모든 사람은 단독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거나 함께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무리 속에 몸을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단독자에게만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단독자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한 대결 후, 다시 문을 열고 타자에게로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은밀한 기도실에서의 고독은 바깥의 `이웃`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고, 기도실에서 고독 중에 하나님을 만난 자의 다음 일은 타자 곧 이웃에게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타자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지만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 만나는 최초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는 죄를 고백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독해졌던 단독자는 곧바로 타자, 이웃과의 공동관계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의 고독은 다른 단독자 곧, 이웃과의 참된 맺어짐을 가능케 함을,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는 단독자는 이미 그 자체 속에 `이웃사랑`을 안고 있음을 뜻한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 자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몰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의 관계는 동시에 열리는 두 개의 문과 같다. 한쪽을 열면서 다른 쪽을 안 열 수 없고, 한 쪽을 닫으면서 다른 쪽을 안 닫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일요일만의 공동관계에서 일상의 공동생활에서의 사랑의 실천으로 옮겨져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라는 것과 함께 말이다. 그럼으로써, 불평등한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과의 참된 공동관계, 평등관계를 실현하려면 그리스도교적인 `이웃사랑`에 바탕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인격적인 사랑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과연 인간이 진정하게 이웃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실현을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선택적인 편애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 완벽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사이의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이 연애와 우정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즉, 그 한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에 거스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애와 우정은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선호 또는 편애일 뿐이었다. 연애나 우정이 정열적으로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상대는 또 하나의 자기 또는 또 하나의 나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편애란 결국 또 하나의 자기에 의하여 점화된 자기 연소, 곧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와서 인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완벽한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실천(실현)의 본보기고 이상이다.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속박에서 한 걸음 지평을 넓힌 것으로서 연애나 우정과는 다른 사랑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일종의 의무로 이는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면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외적 세계의 변혁이 아닌 내적 영역에 있어서의 변혁이다. 곧, 밖으로 향하는 사랑을 안으로 향하도록 변혁하여 모든 것을 양심의 문제로 삼아 `정신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한 양심의 문제로 비추고 그것을 다시 인간의 문제로 바꾸는 것, 결국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사랑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의 문제이다. 이러한 정신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구별을 넘어서 보편성을 취하며, 모든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서 사랑한다. 이때 나와 이웃을 맺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다.
종합하여 볼 때,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하기에 합당한 완전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진지하고 진실하게 사랑하고 진지하고 진실하게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파악하고 현재 주어졌고 선택된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일 때 역시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그대가 만일 완전한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할 때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라. 그를 지금 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불완전이나 결점과 더불어 사랑하라. 비록 그가 끔찍하게 변했다 해도, 비록 그가 이미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매정하게 그대를 외면하고, 또는 그대를 버리고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그를 사랑하라. 비록 그가 그대를 배반하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라.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진정한 그리스도 인을 가르킨다. 진정한 그리스도 인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며 그 인격과 삶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오직 이 한가지를 진리로 여기며 온갖 고뇌와 시련을 극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정열로 하나의 진리를 믿고 섬기는 모험을 감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진리를 찾아 나선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그리고, 존재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모두 각자 다른 삶이지만, 알고 보면 이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진리가 있을까라고 곧잘 되뇌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 진리가 있음을 - 전제하고 믿는다.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적, 실존적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실존의 문제다. 철학자이기에, 학식자이기에가 아닌 인간으로서다.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이 살아있음은 바로 여기에 바탕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는 믿음을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신뢰는 가능하다. 어떠한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없는 모험이 되겠지만, 스스로의 믿음을 끝까지 따르는 자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유일한 실존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 인이 아니다. 그러면 수많은 비 종교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믿음이 비록 제각각이지만 충분히 주체적인 실존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믿음이건,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 믿음에 일관적안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실존을 지향하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바는 `자, 어서 참다운 실존 - 삶 - 을 위해 하느님을 믿으라`는 교화를 위함이 아니다. 그는 주체적인 진리를 부르짖으면서 이것만이 절대적인 진리와 함께하는 참다운 실존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무리 속에 숨어 정신적으로 무뎌지고 나태해진 우리를 끄집어내어 고뇌하며 실존하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 그 삶과 당당하게 겨루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자료출처 http://www.hyanglin.org/bbs/free01/22544
처음 키에르케고르가 단독자란 말을 썼을 때는 `내가 기쁨과 고마운 마음으로 나의 독자라고 부르는 저 사람`이라는 표현과 함께였다. 여기서 `저 사람`이란 그의 약혼자였던 레기네 올센을 뜻한다. 그러나, 그 후 `단독자`란 말이 뜻하는 바는 점차로 일반화된다. 이 일반화된 `단독자`는 모든 사람이 그것(단독자)이며 또 그것일 수 있는 단독자로서 그 전형은 그리스도인을 말한다. 즉, 여기서의 단독자는 특별히 탁월하거나 재능이 있다고 하는 의미에서의 단독자가 아니다. 말하자면, 모든 사람이, 누구나 그런 존재가 될 수 있고 또 되어야만 한다는 의미에서의 단독자이며, 단독자임을 자신의 영예로 여겨야만 하고, 더욱이 한 사람의 단독자임에 참으로 자신의 축복을 발견하게 되는 그러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단독자란 말에는 `오직 한사람`이라는 것 - 누구나 될 수 있음의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서 또한 모든 사람이 단독자가 될 수는 없음을 시사한다- 과 `누구나`라고 하는 것이 함께 스며있다. 역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이 개념은 사실, 주의를 환기하여 그리스도 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함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단독자일 수 있다는 가능성과 단독자이어야 한다는 의무를 즉, 바로 그리스도교에 관계해야 하는 방식을 일깨워 준다.
하나님 앞에 홀로 선다는 것, 그것은 지극히 고독한 일이다. 그것은 무리를 거슬러 혹은 떠나서 가장 진실된 자기의 모습으로 되돌아감을 뜻하기에 말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내가 살고 또 죽을 수 있는 진리`를 찾아 경건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진리`는 실존의 삼단계에서 살펴보았듯,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는 결코 찾을 수 없다. 키에르케고르는 이러한 단독자의 보기를 구약성서의 아브라함에서 찾는다.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에 관계된 이 사건 - 모리아산 사건 - 을 바라보는 키에르케고르의 시각은 다음과 같다 - 아브라함이 한 일은 윤리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죽이려고 했다는 것이며, 종교적으로 표현하면 그가 이삭을 바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바로 이 모순속에 사람을 불면에 빠뜨릴 수 있는 불안이 있다. 그리고 이 불안이 없다면 아브라함은 이미 저 아브라함이 아닐 것이다. 아브라함의 불안은 윤리적인 것과 종교적이 것 곧, 보편자와 단독자가 서로 모순 대립되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사실, 아브라함의 의도는 인륜적, 보편적인 것과 아무 관계가 없다. 오직 신앙이 바탕이 된 하느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순전히 사적인 관계만 있을 뿐이다. 그런데, 도대체 왜 아브라함은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윤리적 목적도 없이, 두려움과 떨림 가운데 인륜적으로 정해진 세계를 체념하고 그런 끔직한 짓을 행하려 했을까. 결국, 아브라함은 개별자로서 사회나 국가의 이념보다 높이 있다고 믿는 하느님과의 절대적인 관계를 위해 윤리적 보편적인 것과 충돌하고 신앙한 것이다. 어떠한 것에도 굴하지 않는 윤리적인 것의 무한한 체념을 통해 더 높은 목적 곧, 신앙을 실현하고 참다운 실존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말이다.
신 앞에서의 단독자가 되는 것, 그것은 실존의 삼단계에서 관찰할 수 있듯, 개별자가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아래에 있은 다음에 이제 보편적인 것을 돌파하고 개별자로서 보편적인 것 위에 있는 개별자가 된다고 하는 역설이다. 이는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를 뜻한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그의 아내 사라나 종 엘리에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것은 `윤리적인 것의 목적론적 정지`에 대해 말로써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해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 이 `절대적인 것에 대한 절대적인 의무`에 대해 말로써 설명하며 이해를 구할 수 있단 말인가.
`코르사르 사건`이후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은 더욱 심화된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종교적 단독자의 개념이 그리스도교적으로 결정적인 범주가 되도록 더욱 힘쓴다. 이에 따라,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무엇`이냐고 하는 객관적 문제`가 아니라, 단독의 개인이 그리스도교에 `어떻게 관계하느냐`고 하는 주체적 문제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주체적 사고의 쟁점은 `무엇`에가 아니라 `어떻게`에 있고 대상의 진리 비진리는 문제가 안 된다. 사실,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 윤리적 단계에서 종교적 단계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최종적으로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택하는 `선택과 결단`만이 있을 뿐이다.
그럼으로써, `전체가 진리`라고 했던 헤겔에 맞서서 "주체적인 어떻게와 주체성이 진리"라고 단언한 것이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가 진리의 주체성을 강조함으로써 사고자를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진리 자체를 부정하거나 업신여긴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그에게 주체성이 문제가 될 때에는 언제나 사고자를 떠나 서 있는 진리의 존재가 전제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초점은 실존하는 사고자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그 진리에 관계하느냐고 하는데 있다. 헤겔에 대한 키에르케고르의 비판을 실존 사상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그에 의하면 인간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헤겔은 마치 모든 보편적인 진리를 파악 가능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인간은 극히 미련한 것이어서 세계와 우주의 전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어림도 없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진리의 비판 기준은 사람이 가지는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 여부를 가리는 일이다.
그런데, 이 관계는 어디까지나 내적 행위이므로 진리에 대한 관계의 진실여부를 증명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그 주체성이 참된 것인지, 아니면 한낱 감정- 말하자면, 광기 같은 것 - 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어떻게 분간할 수 있을까. 키에르케고르는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일단락 짓는다. `무엇`도 함께 주어진 `어떻게`가 있다. 사실, 그 `어떻게`가 올바로 주어진다면 `무엇`도 또한 주어진다. 이는 신앙의 `어떻게`이다. 이것은 분명히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는 다시 `객관성`을 확보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즉, `신앙의 어떻게`는 `무엇`을 동시에 생각하지 않고서는 의미를 가질 수 없는 `신앙의 어떻게`이며, 이 내면성을 정당하게 `객관성`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곧, `관계의 어떻게`로서 파악된 주체성의 내면성이 그 극한에 있어서 객관성을 찾는다 함은, 주체성의 정열이 그의 극한인 신앙의 정열에까지 높아졌을 때, 주체성은 동시에 내재성을 버리고 자기 바깥에 있는 어떤 것 속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 던져 넣어야 할 어떤 것을 찾아냄을 뜻한다. 말하자면, 이는 곧, 실존하는 신의 현실성에 대하여 무한한 관심을 가지고 그에 절대적으로 귀의하는 것이고, 진정한 주체성은 여기서 객관성을 확보한다. 진정한 주체적 사고자는 그 자신의 주체성에 대하여 객관적 태도를, 자기밖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해서는 주체적인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자이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주관 안에서 승화된 객관`에 대한 예를 들어보겠다. 예수 그리스도는 시대적으로 로마 위정자들에 의해 참으로 많은 박해를 받았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강력한 이단으로 몰리기까지 한다. 예수와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에 대해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쓸데없이 거지 행색을 하며 사람들에게 대가 없는 희생적인 사랑을 베푸는 그의 모습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우스꽝스럽게 조차 비쳤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성경이 인류역사상 최대의 베스트셀러가 된 지금, 어느 누구도 예수의 삶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삶’으로 얘기치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오히려 우리네들은 그가 베푼 이웃에 대한 대가 없는 무한한 희생과 사랑에 감동을 받고 조금이나마 그에 부합되는 삶을 영위하지 못한 것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 모두는 예수의 삶을 한없이 우러러본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우리에게 이미 객관화된 그 무엇이 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신앙은 내면성의 무한한 정열로써 객관적인 불확실성 곧, 부조리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단독자의 내면적 행위이다. 만일 우리가 객관적으로 하느님을 잡을 수 있다면 굳이 믿음의 행위가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신앙을 붙잡기 위하여 단독자로서 객관적 불확실성 속에 몸을 던지는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감각 기관에 의한 실질적인 감각이 아닌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만나 그의 사랑으로 그와 함께 하는 자이다.
따라서, 그의 단독자는 무한한 내면성의 정열을 가지고 자기 안에서 신앙의 진실을 확보함으로써 마음의 평화를 누리는 단독자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단독자는 대중, 공중, 집단, 다수, 얼마만큼, 류, 사람의 무리, 표본인 등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거짓되고 악한 세상과 충돌하면서 드러나는 순교하는 ‘진리의 증인’을 지칭하게 된다. 이리하여 단독자의 개념은 종교적인 범주와 개념을 갖기에 이른다.
이러한 단독자의 개념으로 인해서 키에르케고르는 사회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사상가 - 일체의 사회 윤리에서 멀리 떠난 개인주의, 종교적 금욕주의를 주장한 무세계적 자기 독백적인 고독한 사상가 -로 간주되며, 정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관심밖에는 가지지 않았던 극단적인 보수주의자, 심지어 근대적 퇴폐의 한 징후로, 개인주의적 반동적 비합리주의 철학의 선구로 낙인찍히기도 한다. 사실, 그는 자기 주위에서 진행된 사회적, 정치적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며, 출판된 그의 저작에서도 이러한 문제들을 직접적인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 그는 덴마크의 국민 전체를 흥분과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1848년의 슬레스버, 홀스덴 분쟁에 얽힌 독일과의 전쟁에도 ,1849년의 절대 왕정의 붕괴와 자유 헌법 시행으로 이끌어간 국민주의적, 자유주의적 운동에도 무관심했던 것처럼 보였다. 오히려 그는 그의 저작에서 사회, 정치적 변혁을 겨냥한 운동을 비롯하여 대중, 저널리즘, 국교회 등에 노골적인 혐오와 불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모든 저작 활동의 사상 전체는 `사람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는가`하는 문제에 있기에, 정치적 문제에 거리를 둔다. 어쩌면, 그가 영락없는 정치적 보수주의자, 왕실 옹호주의자,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한 정신적인 귀족주의자 등으로 이해됨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는 그의 시대에 다시 말하여, 조국 덴마크는 물론 유럽 전체가 엄청난 동란과 변혁을 겪고 있는 그 즈음에 정말로 전적으로 이러한 일체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 무관심할 수 있었을까. 좀 더 융통성을 갖고 이렇게 그에 대해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당시 복잡다단한 양상의 시대적 배경으로 정치 사회적 국내외 상황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더 특별한 그만의 임무를 깨닫고 행하게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사회 정치 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 대신 스스로 생각하는 주어진 사명에 따라, 사람들이 정치, 사회 문제에 열중하고 무리를 이루어 절규하는 데서 간과하기 쉬운 것 곧, 인간의 내면적 세계를 날카롭게 통찰하였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에 의한 수평화 과정이 이미 한 시대의 조류로서 이미 어떻게도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사람들 간의 수평화 과정이 끝난 후 대중, 다수, 공중이 구원하는 힘, 자유를 실현하는 구원의 근거가 되는 상황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은 그에 의하면 이것-신 앞에 선 `단독자`-뿐이다. 즉, 낱낱의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선별된 개인으로서, 하느님 앞에서 책임을 지는 흔들리지 않는 종교성을 획득하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정치적, 사회적 운동 등 이러 저러한 운동이라는 것은 언제나 대중을 향하는 것이며, 대중은 윤리적, 종교적 심판자로서는 비진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 대중과 민중을 법정으로 삼을 수밖에 없는 사회, 정치적인 혁명 운동은 민중의 신화, 양의 지배라고 하는 악마의 복음인 민중의 소리와 하느님의 소리를 혼동하는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시대의 급무는 민중, 대중을 집단의 힘으로 결집시키는 일이 아니라 거꾸로 그것을 하나님 앞의 단독자로 해체하는 일이며, 이 단독자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하여 참된 공동체를 이루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집단 사상이나 연합의 원리로 도피하여 다수를 하느님으로 삼는 집단적인 주체는 인격적 하느님과 단독자를 상실한 세속적 인간주의일 뿐이다. 그리고, 이 세속적 인간주의는 인간을 비인간화하는 유물론 내지 자연주의로 타락하여 하나의 끔찍한 종교로, 그리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모습들은 키에르케고르의 염려대로 후일에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국민에게 무비판적인 충성과 무조건의 복종 자기 희생을 강요하는 전체주의적 국가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는 자기의 시대의 문제가 단지 정치/사회 문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종교에 관한 내적/정신적 문제이며 따라서 정치/사회 문제는 필연적으로 종교 문제로 전환되고, 그 해결도 종교적 구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사실 바꿔 생각하면, 이 단독자의 개념은 키에르케고르가 자기의 시대를 그만의 예리한 시각으로 섬세하게 이해, 파악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 안에서 최선의 해결방안을 모색하고, 실천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맥락아래, 그에게 종교적인 형태로 인간의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은 단독자의 `이웃 사랑`의 구체적인 실천을 뜻했다. 이웃은 인간평등의 절대적이고 참된 표현이다. 만일 진실로 모든 사람이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한다면 그 때에는 완전한 인간평등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어떠한 정치적 평등권도 이룩할 수 없는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본래의 종교적 그리스도교적 범주인 단독자의 개념이 정치/사회 영역에서도 결정적인 의의를 갖게 되고 정치 사회 문제를 종교적인 문제로 파악, 종교적인 해결을 추구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 사상의 참 면목이 있겠다.
단독자는 고독하다. 단독자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 있는 죄인으로서 자기 홀로 자기의 죄를 감당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이 고독이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임을 일깨워 준다. 참회자는 자기자신의 내면만을 들여다보고, 자기에게 말해져야 할 것을 말하는 타자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에 귀 기울이면서 하나님 앞에 내면적으로 기도한다. 모든 사람은 단독자로서 다른 사람에게 핑계하거나 함께 할 수 없는 자기자신의 책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무리 속에 몸을 숨기려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단독자에게만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기울여야 한다.
단독자는 이러한 하나님 앞에서의 고독한 대결 후, 다시 문을 열고 타자에게로 나가야 한다. 말하자면, 은밀한 기도실에서의 고독은 바깥의 `이웃`을 만나기 위한 준비이고, 기도실에서 고독 중에 하나님을 만난 자의 다음 일은 타자 곧 이웃에게로 나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하여 타자로부터 마음의 문을 닫지만 그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갈 때 만나는 최초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우리가 사랑해야만 하는 우리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는 죄를 고백하기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고독해졌던 단독자는 곧바로 타자, 이웃과의 공동관계에 나아가지 않을 수 없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키에르케고르의 단독자의 고독은 다른 단독자 곧, 이웃과의 참된 맺어짐을 가능케 함을, 하나님 앞에서 실존하는 단독자는 이미 그 자체 속에 `이웃사랑`을 안고 있음을 뜻한다. 형제가 어려움에 처한 것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닫는 자는 그 순간에 하느님을 몰아내는 것이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사랑의 관계는 동시에 열리는 두 개의 문과 같다. 한쪽을 열면서 다른 쪽을 안 열 수 없고, 한 쪽을 닫으면서 다른 쪽을 안 닫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라는 키에르케고르의 말은 교회의 복음 선포가 일요일만의 공동관계에서 일상의 공동생활에서의 사랑의 실천으로 옮겨져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이루는 것은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라는 것과 함께 말이다. 그럼으로써, 불평등한 사회계층간의 대립을 극복하고 모든 사람과의 참된 공동관계, 평등관계를 실현하려면 그리스도교적인 `이웃사랑`에 바탕해야 함을 말한다. 이는 인격적인 사랑의 모범으로서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자기 이웃을 내몸과 같이 사랑하는 일이다.
과연 인간이 진정하게 이웃사랑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란 그것이 아무리 고상한 것이라 해도 결국은 자기 사랑이며, 자기실현을 위해 가치 있는 것을 향한 선택적인 편애에 그치는 것이 아닐까? 도대체 인간이 완벽히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있는 것일까? 인간과 인간사이의 가장 직접적이고 현실적인 사랑이 연애와 우정이라고 할 때 이러한 사랑은 하나님에 대한, 이웃에 대한 사랑의 의무와는 어떻게 다른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그 사람 즉, 그 한 사람을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사랑하고 또한 다른 모든 사람에 거스려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연애와 우정은 키에르케고르에게는 선호 또는 편애일 뿐이었다. 연애나 우정이 정열적으로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할 때 그 사랑의 상대는 또 하나의 자기 또는 또 하나의 나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편애란 결국 또 하나의 자기에 의하여 점화된 자기 연소, 곧 자기 사랑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느님을 향한 거룩한 사랑이다. 왜냐하면, 인간을 사랑하기에 인간이 되어 이 세상에 와서 인간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완벽한 희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완전히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랑의 실천(실현)의 본보기고 이상이다. 내 몸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자기 사랑의 속박에서 한 걸음 지평을 넓힌 것으로서 연애나 우정과는 다른 사랑인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일종의 의무로 이는 사랑을 베푸신 하나님에 대한 보답이다.
그러면 사랑의 행위에 있어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인가? 우선 외적 세계의 변혁이 아닌 내적 영역에 있어서의 변혁이다. 곧, 밖으로 향하는 사랑을 안으로 향하도록 변혁하여 모든 것을 양심의 문제로 삼아 `정신의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모든 문제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립한 양심의 문제로 비추고 그것을 다시 인간의 문제로 바꾸는 것, 결국 그리스도교적으로 볼 때 사랑이란 전적으로 자신의 양심의 문제이다. 이러한 정신의 사랑은 인간적인 사랑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구별을 넘어서 보편성을 취하며, 모든 사람을 나의 이웃으로서 사랑한다. 이때 나와 이웃을 맺어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평등이다.
종합하여 볼 때, 키에르케고르에서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분,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더 나아가,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할 때에는 사랑하는 상대가 사랑하기에 합당한 완전성을 지니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진지하고 진실하게 사랑하고 진지하고 진실하게 자신에게 부과된 과제를 파악하고 현재 주어졌고 선택된 대상을 사랑해야 한다. 눈에 보이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의무일 때 역시 그 사랑에는 한계가 없어야 한다.
그대가 만일 완전한 사랑을 원한다면 사랑할 때 그대가 지금 보고 있는 사람을 사랑하라는 이 의무를 다하도록 노력하라. 그를 지금 보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모든 불완전이나 결점과 더불어 사랑하라. 비록 그가 끔찍하게 변했다 해도, 비록 그가 이미 그대를 사랑하지 않고 매정하게 그대를 외면하고, 또는 그대를 버리고 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 그를 사랑하라. 비록 그가 그대를 배반하고 부인한다 할지라도 지금 그대가 눈으로 보고 있는 그대로의 그를 사랑하라.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진정한 그리스도 인을 가르킨다. 진정한 그리스도 인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며 그 인격과 삶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오직 이 한가지를 진리로 여기며 온갖 고뇌와 시련을 극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같은 정열로 하나의 진리를 믿고 섬기는 모험을 감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진리를 찾아 나선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그리고, 존재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모두 각자 다른 삶이지만, 알고 보면 이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진리가 있을까라고 곧잘 되뇌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 진리가 있음을 - 전제하고 믿는다.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적, 실존적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실존의 문제다. 철학자이기에, 학식자이기에가 아닌 인간으로서다.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이 살아있음은 바로 여기에 바탕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는 믿음을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신뢰는 가능하다. 어떠한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없는 모험이 되겠지만, 스스로의 믿음을 끝까지 따르는 자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유일한 실존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 인이 아니다. 그러면 수많은 비 종교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믿음이 비록 제각각이지만 충분히 주체적인 실존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믿음이건,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 믿음에 일관적안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실존을 지향하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바는 `자, 어서 참다운 실존 - 삶 - 을 위해 하느님을 믿으라`는 교화를 위함이 아니다. 그는 주체적인 진리를 부르짖으면서 이것만이 절대적인 진리와 함께하는 참다운 실존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무리 속에 숨어 정신적으로 무뎌지고 나태해진 우리를 끄집어내어 고뇌하며 실존하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 그 삶과 당당하게 겨루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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