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학적 실존 - 문학처럼 사는 삶
미학적 실존 - 문학처럼 사는 삶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신학적 미학, 미학적 신학”을 주제로 주최한 신학포럼에서 이경재(감신대 종교철학과) 교수가 발표한 ‘미학신학 또는 문예신학’의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오늘날 미적 상상력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대적 증상이다. 계몽적 이성이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믿음은 현대에 이르러 환상으로 끝나게 되었다. 과학적 이성은 지배적, 도구적, 계산적 이성으로 변했고, 실천 이성은 더 이상 사회의 도덕을 담보하지 않는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된 시대, 과학과 도덕, 필연과 자유가 분리된 시대는 쉴러의 말처럼 도착의 시대요 혼돈의 시대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기 위한 제3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양자를 매개하면서 양자를 포섭하는 상상력의 재발견이요, 상상력에 근거한 미학적 질서의 기대다. 상상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은 진리 인식의 영역이고, 문학은 허구의 영역이라는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철학은 문학으로서 읽을 수 있고, 문학은 철학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러한 작업은 기호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미학적 실존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진리와 선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진리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에 대치되는, 미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다. 이 글에서는 키엘케고르를 통해 미학적 실존의 의미가 문학처럼 사는 삶이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
키엘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 Or>와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에서 실존의 양태를 미학적, 윤리적, 신앙적 양태로 구별하였다. 키엘케고르의 실존 양태를 검토하면서 그의 이상인 신앙적 실존은 바로 탈형이상학적인 문학적 실존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키엘케고르의 미학적 실존은 감관적 존재를 말한다. 미학적 실존의 극단적 형태는 감관적 쾌락을 따라서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실존이다. 미학적 실존은 감관적 직접성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모든 순간은 쾌락과 흥분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요, 인생의 영원성이나 연속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미학적 실존에는 인생이 실현해야 할 이상이나 내적 목표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이 결국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미학적 실존은 삶의 절망을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외적 대상에는 권력, 재산, 아름다움, 건강, 성(性) 등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학적 실존은 외부적 대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채우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지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마저 팔고, 돈 팡은 사랑의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무수한 여인을 섭렵하는 마성적 형태의 미학적 실존이다. 그러한 마성적 형태 외에도 자신의 사적 또는 공적 사업을 달성함으로 삶의 갈증을 채우려는 무수한 형태의 미학적 실존이 있다. 그러나 외적 대상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는 미학적 실존은 우연적이고 찰나적인 대상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절망과 좌절로 귀결된다. 키엘케고르가 당시의 독일과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서 미학적 실존의 절망을 읽었듯이 우리 또한 포스트모던의 삶에서 그러한 절망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적 대상이 삶의 갈증을 풀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학적 실존은 자신의 좌절과 불행을 넘어서려는 욕구로부터 어떤 불변하는 대상에 닻을 내리려고 한다. 이로부터 키엘케고르의 두 번째 실존 양태인 윤리적 실존이 등장한다.
윤리적 실존은 미학적 실존에 비해 진보된 새로운 양태의 삶이다. 미학적 실존이 외적 대상에 집착했다면,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주의를 돌린다. 윤리적 실존의 목적은 외적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아를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 성찰·자기 수양을 통해 진리를 실현하는 윤리적 자아, 즉 ‘이상적 자아’(ideal self)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키엘케고르의 윤리적 실존은 스토아주의의 명상적 인간이나 칸트의 자율적 인간의 이상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미학적 실존이 쾌락에 무게를 둔다면, 윤리적 실존은 선악과 의무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생각해 본다면, 선악의 보편 가치는 실상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띄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프로이트가 양심 또는 초자아는 외적 가치의 내화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듯이, 내적 자아를 추구하는 윤리적 실존의 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가치라는 외적 가치를 실존의 내적 가치로 삼으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윤리적 가치는 언제나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 자아라는 말은 결국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자아를 몰입 또는 희생시킴으로 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에 키엘케고르의 윤리적 실존에 대한 탁월한 심리분석이 존재한다.
키엘케고르는 윤리적 실존과 신앙적 실존의 차이를 <두려움과 떨림>에서 ‘비극적 영웅’(tragic hero)과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극적 영웅은 아가멤논이나 입다와 같이 보편적, 전체적, 객관적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딸을 희생하는 비극의 주인공을 가리킨다. 그것은 헤겔의 객관적 철학체계 밑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 실존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회의 객관적 가치체계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윤리적 실존의 메타포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하튼 비극적 영웅이 확실한 객관성을 위해서 불확실한 실존을 희생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기사는 객관적으로 불확실하고 결국에는 역설적인 미래적인 것을 향하여 참여와 헌신을 동반하는 영적 운동이요 ‘도약’(leap of faith)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의 음성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객관성에 희생당하는 윤리적 실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불확실성을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참여와 헌신의 자기 기투로 이해되어야 한다. 키엘케고르는 불확실성을 향한 자기 기투와 도약을 신앙이라 불렀고, 이를 몸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신앙의 기사라 이름하였다.
여기서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정통 기독교의 도그마를 수용하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실존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가멤논이나 입다와 같은 비극적 영웅의 몫이다. 이들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실존 또는 윤리적 실존이라면, 아브라함으로 표상되는 신앙적 실존은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신앙으로 도약하는 탈형이상학적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키엘케고르의 이상형인 신앙적 실존, 탈형이상학적 신앙, 신앙의 기사는 어떠한 매개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적 실존은 철저히 아브라함의 삶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서술되고 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매개는 이매지네이션의 힘이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처럼 살아가는 삶, 결국은 문학처럼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키엘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삶을 모방함으로 역설적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듯이 자신의 연인 레지나 올슨을 대할 때 야훼에게 바치듯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도 얻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키엘케고르는 올슨도 잃고 단지 신앙적 실존의 역설만 얻게 되었다.
여하튼 문학처럼 사는 삶이란 말은 키엘케고르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미학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키엘케고르는 미학적 실존을 실존 양태의 가장 낮은 단계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미학적 실존이란 낮은 단계의 감관적 실존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정통 기독교의 로고스적 신앙을 해체하는 양태의 실존인 것이다.
정리/이성숙 기자 sara26@cnews.or.kr
http://data.cnews.or.kr/1452/contents/jungbo/jungbo1452-1.htm
크리스찬아카데미가 “신학적 미학, 미학적 신학”을 주제로 주최한 신학포럼에서 이경재(감신대 종교철학과) 교수가 발표한 ‘미학신학 또는 문예신학’의 일부를 발췌해 싣는다.
오늘날 미적 상상력이 화두로 등장하고 있는 것은 이성에 대한 비판적 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시대적 증상이다. 계몽적 이성이 인류를 해방시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믿음은 현대에 이르러 환상으로 끝나게 되었다. 과학적 이성은 지배적, 도구적, 계산적 이성으로 변했고, 실천 이성은 더 이상 사회의 도덕을 담보하지 않는다.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이 분리된 시대, 과학과 도덕, 필연과 자유가 분리된 시대는 쉴러의 말처럼 도착의 시대요 혼돈의 시대다. 이러한 혼돈의 시대에서 새로운 자유와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기 위한 제3의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양자를 매개하면서 양자를 포섭하는 상상력의 재발견이요, 상상력에 근거한 미학적 질서의 기대다. 상상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철학은 진리 인식의 영역이고, 문학은 허구의 영역이라는 구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철학은 문학으로서 읽을 수 있고, 문학은 철학으로 읽을 수 있으며, 그러한 작업은 기호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미학적 실존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진리와 선의 패러다임에서 인간을 해석하는 진리적 실존과 윤리적 실존에 대치되는, 미의 패러다임으로부터 인간 실존을 이해하고 해석하려는 시도다. 이 글에서는 키엘케고르를 통해 미학적 실존의 의미가 문학처럼 사는 삶이라는 것을 살펴보려고 한다.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
키엘케고르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Either/ Or>와 <두려움과 떨림 Fear and Trembling>에서 실존의 양태를 미학적, 윤리적, 신앙적 양태로 구별하였다. 키엘케고르의 실존 양태를 검토하면서 그의 이상인 신앙적 실존은 바로 탈형이상학적인 문학적 실존이라는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키엘케고르의 미학적 실존은 감관적 존재를 말한다. 미학적 실존의 극단적 형태는 감관적 쾌락을 따라서 순간을 위해 살아가는 실존이다. 미학적 실존은 감관적 직접성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모든 순간은 쾌락과 흥분과 재미를 위해서 존재할 뿐이요, 인생의 영원성이나 연속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즉 미학적 실존에는 인생이 실현해야 할 이상이나 내적 목표가 존재할 수 없다. 그러한 삶이 결국에는 좌절과 절망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따라서 미학적 실존은 삶의 절망을 외부적 대상으로부터 회복하기를 기대한다. 외적 대상에는 권력, 재산, 아름다움, 건강, 성(性) 등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미학적 실존은 외부적 대상을 통해 삶의 의미를 채우려고 한다. 파우스트는 지적 갈증을 채우기 위해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자신의 영혼마저 팔고, 돈 팡은 사랑의 갈증을 채우기 위하여 무수한 여인을 섭렵하는 마성적 형태의 미학적 실존이다. 그러한 마성적 형태 외에도 자신의 사적 또는 공적 사업을 달성함으로 삶의 갈증을 채우려는 무수한 형태의 미학적 실존이 있다. 그러나 외적 대상을 통해 의미를 찾으려는 미학적 실존은 우연적이고 찰나적인 대상에 삶의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절망과 좌절로 귀결된다. 키엘케고르가 당시의 독일과 프랑스의 젊은이들에게서 미학적 실존의 절망을 읽었듯이 우리 또한 포스트모던의 삶에서 그러한 절망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적 대상이 삶의 갈증을 풀어주지는 않는다. 따라서 미학적 실존은 자신의 좌절과 불행을 넘어서려는 욕구로부터 어떤 불변하는 대상에 닻을 내리려고 한다. 이로부터 키엘케고르의 두 번째 실존 양태인 윤리적 실존이 등장한다.
윤리적 실존은 미학적 실존에 비해 진보된 새로운 양태의 삶이다. 미학적 실존이 외적 대상에 집착했다면,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의 본성에 주의를 돌린다. 윤리적 실존의 목적은 외적 대상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내적 자아를 추구하는 것으로, 자기 성찰·자기 수양을 통해 진리를 실현하는 윤리적 자아, 즉 ‘이상적 자아’(ideal self)를 완성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키엘케고르의 윤리적 실존은 스토아주의의 명상적 인간이나 칸트의 자율적 인간의 이상과 통할 수 있는 것이다. 미학적 실존이 쾌락에 무게를 둔다면, 윤리적 실존은 선악과 의무와 같은 보편적 가치에 무게를 둔다. 그런데 생각해 본다면, 선악의 보편 가치는 실상 사회적 가치이기 때문에 보편성을 띄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치 프로이트가 양심 또는 초자아는 외적 가치의 내화를 통하여 일어나는 것이라고 보았듯이, 내적 자아를 추구하는 윤리적 실존의 목적이라는 것은 사회적 가치라는 외적 가치를 실존의 내적 가치로 삼으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실제로 윤리적 가치는 언제나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성격을 지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적 자아라는 말은 결국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가치에 자아를 몰입 또는 희생시킴으로 가능한 것이 된다. 여기에 키엘케고르의 윤리적 실존에 대한 탁월한 심리분석이 존재한다.
키엘케고르는 윤리적 실존과 신앙적 실존의 차이를 <두려움과 떨림>에서 ‘비극적 영웅’(tragic hero)과 ‘신앙의 기사’(knight of faith)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극적 영웅은 아가멤논이나 입다와 같이 보편적, 전체적, 객관적 사회를 위해서 자신의 딸을 희생하는 비극의 주인공을 가리킨다. 그것은 헤겔의 객관적 철학체계 밑에서 의미를 잃어버린 인간 실존을 의미할 수도 있고, 사회의 객관적 가치체계를 위해서 희생당하는 윤리적 실존의 메타포로 이해될 수도 있다. 여하튼 비극적 영웅이 확실한 객관성을 위해서 불확실한 실존을 희생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으로 표상되는 신앙의 기사는 객관적으로 불확실하고 결국에는 역설적인 미래적인 것을 향하여 참여와 헌신을 동반하는 영적 운동이요 ‘도약’(leap of faith)이다. 이삭을 바치라는 야훼의 음성에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객관성에 희생당하는 윤리적 실존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고 오히려 불확실성을 향해서 자기를 던지는 참여와 헌신의 자기 기투로 이해되어야 한다. 키엘케고르는 불확실성을 향한 자기 기투와 도약을 신앙이라 불렀고, 이를 몸으로 살아가는 아브라함을 신앙의 기사라 이름하였다.
여기서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정통 기독교의 도그마를 수용하는 로고스 중심주의의 실존이 아님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아가멤논이나 입다와 같은 비극적 영웅의 몫이다. 이들이 확실성을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실존 또는 윤리적 실존이라면, 아브라함으로 표상되는 신앙적 실존은 불확실성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고 이를 신앙으로 도약하는 탈형이상학적 실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키엘케고르의 이상형인 신앙적 실존, 탈형이상학적 신앙, 신앙의 기사는 어떠한 매개체 없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적 실존은 철저히 아브라함의 삶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서술되고 추구되는 것이다. 여기서 이미지의 매개는 이매지네이션의 힘이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아브라함의 이야기처럼 살아가는 삶, 결국은 문학처럼 살아가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키엘케고르는 아브라함의 삶을 모방함으로 역설적 축복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듯이 자신의 연인 레지나 올슨을 대할 때 야훼에게 바치듯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삭도 얻고 믿음의 조상이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키엘케고르는 올슨도 잃고 단지 신앙적 실존의 역설만 얻게 되었다.
여하튼 문학처럼 사는 삶이란 말은 키엘케고르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미학적 실존을 의미하는 것이다. 비록 키엘케고르는 미학적 실존을 실존 양태의 가장 낮은 단계로 설정하고 있지만, 그가 말하는 미학적 실존이란 낮은 단계의 감관적 실존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결국 키엘케고르의 신앙적 실존은 정통 기독교의 로고스적 신앙을 해체하는 양태의 실존인 것이다.
정리/이성숙 기자 sara26@cnews.or.kr
http://data.cnews.or.kr/1452/contents/jungbo/jungbo1452-1.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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