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철학]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의 의미
[실존철학]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주장의 의미
그렇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선 제작된 어떤 한 대상, 예를 들어 책이나 종이를 자르는 칼 같은 대상을 고려해봅시다. 이 대상은 어떤 한 개념을 통해서 영감을 받은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인은 종이를 자르는 칼이라는 개념을 참고하여, 또 그 자체가 개념의 일부를 이루며, 그 자체가 제작법에 해당하는, 대상에 선행하는 생산기술을 참고하여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이 자르는 칼은 이처럼 일정한 방법으로 생산된 대상이면서 또한 한정된 용도를 갖는 대상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대상이 무엇을 위해서 쓰일지 알지 못한 채 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하는 사람을 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종이 자르는 칼에 있어서는 본질 - 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며 종이 자르는 칼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 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런저런 종이 자르는 칼의 현존 또는 이런저런 책의 현존은 이처럼 그 자체가 결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에 대한 그 어떤 기술技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즉 그곳에서는 생산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기술적인 비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적인 신을 상상할 때, 대부분의 경우 신은 탁월한 장인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려하는 신에 대한 독트린이 어떤 것이 되었던 상관없이, 예를 들어 그것이 데카르트의 것과 같은 것이 되었든 또는 라이프니츠의 것과 같은 독트린이 된었던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는 의자가 오성을 다소간에 뒤따른다는 점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지가 오성을 동반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신은 창조를 할때 그 그 자신이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정신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개념은 공예가의 정신 속에 있는 종이 자라는 칼에 대한 개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즉 마치 장인이 그 어떤 정의와 기술을 따라서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이 기술과 그 어떤 개념을 따라서 사람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인간은 이처럼 신적인 오성 속에 있는 그 어떤 개념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 철학자들의 무신론 속에서 신의 개념이 제거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때 본질인 실존에 앞선다는 관념까지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이 관념을 도처에서 적지않게 재발견합니다. 디드로, 볼테르, 심지어는 칸트에게서도 우리는 이 관념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인간 본성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 인간 본성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개념으로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각각의 사람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의 특수한 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보편성으로부터 원시인과 미개인도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의에 매여 있으며 동일한 기본 성질을 소유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본질이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마주치는 바로 그 역사적 실존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소개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방금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일관적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선언합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한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기 이전에 실존하는 어떤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울러 이 어떤 한 존재란 곧 인간이라고, 또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 실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될 수 없다면, 우선은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로지 그 다음에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간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원칙입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30-33pp.
http://blog.naver.com/against1318/150092624473
그렇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 이 말은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우선 제작된 어떤 한 대상, 예를 들어 책이나 종이를 자르는 칼 같은 대상을 고려해봅시다. 이 대상은 어떤 한 개념을 통해서 영감을 받은 장인에 의해 제작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장인은 종이를 자르는 칼이라는 개념을 참고하여, 또 그 자체가 개념의 일부를 이루며, 그 자체가 제작법에 해당하는, 대상에 선행하는 생산기술을 참고하여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였기 때문입니다. 종이 자르는 칼은 이처럼 일정한 방법으로 생산된 대상이면서 또한 한정된 용도를 갖는 대상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대상이 무엇을 위해서 쓰일지 알지 못한 채 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하는 사람을 가정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는 이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종이 자르는 칼에 있어서는 본질 - 종이 자르는 칼을 생산할 수 있게 해주며 종이 자르는 칼을 정의할 수 있게 해주는 제작법과 성질의 전부- 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런저런 종이 자르는 칼의 현존 또는 이런저런 책의 현존은 이처럼 그 자체가 결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에서 세계에 대한 그 어떤 기술技述적인 비전을 보게 됩니다. 즉 그곳에서는 생산이 실존에 앞선다고 말할 수 있는 그런 기술적인 비전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창조적인 신을 상상할 때, 대부분의 경우 신은 탁월한 장인에 비유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려하는 신에 대한 독트린이 어떤 것이 되었던 상관없이, 예를 들어 그것이 데카르트의 것과 같은 것이 되었든 또는 라이프니츠의 것과 같은 독트린이 된었던 상관없이, 언제나 우리는 의자가 오성을 다소간에 뒤따른다는 점을 인정하거나, 아니면 적어도 의지가 오성을 동반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또 우리는 신은 창조를 할때 그 그 자신이 창조하는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고 인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의 정신 속에 있는 인간에 대한 개념은 공예가의 정신 속에 있는 종이 자라는 칼에 대한 개념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즉 마치 장인이 그 어떤 정의와 기술을 따라서 종이 자르는 칼을 제작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신이 기술과 그 어떤 개념을 따라서 사람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인간은 이처럼 신적인 오성 속에 있는 그 어떤 개념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한편 18세기에 이르러 철학자들의 무신론 속에서 신의 개념이 제거되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때 본질인 실존에 앞선다는 관념까지 제거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본질이 실존에 앞선다는 이 관념을 도처에서 적지않게 재발견합니다. 디드로, 볼테르, 심지어는 칸트에게서도 우리는 이 관념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인간 본성을 소유한 자입니다. 이 인간 본성은 그 자체가 인간에 대한 개념으로서,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곧 각각의 사람은 인간이라는 보편적인 개념의 특수한 한 경우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서는 이러한 보편성으로부터 원시인과 미개인도 부르주아와 마찬가지로 동일한 정의에 매여 있으며 동일한 기본 성질을 소유한다는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와 같이, 여기에서도 여전히 인간의 본질이 우리가 자연 속에서 마주치는 바로 그 역사적 실존에 앞서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내가 소개하는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방금 언급한 것보다 훨씬 더 일관적입니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선언합니다. 만약 신이 없다고 한다면, 실존이 본질에 앞서게 되는 어떤 한 존재, 그 어떤 개념으로 정의될 수 있기 이전에 실존하는 어떤 한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아울러 이 어떤 한 존재란 곧 인간이라고, 또는 하이데거가 말한 것처럼 인간 실재라고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이 말은 인간이 먼저 세계 속에 실존하고, 만나지며, 떠오른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정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실존주의자가 생각하는 인간이 정의될 수 없다면, 우선은 그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오로지 그 다음에야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 본성이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 본성을 구상하기 위한 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며 또한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일 뿐입니다.
인간은 이처럼 실존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구상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또 인간은 실존을 향한 이같은 도약 이후에 인간 스스로가 원하는 무엇이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간는 것과 다른 무엇이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실존주의의 제 1원칙입니다.
사르트르,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박정태 옮김, 이학사, 30-33pp.
http://blog.naver.com/against1318/1500926244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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