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개념과 실존의 3단계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개념과 실존의 3단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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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존(實存, Existenz)
(1) 실존을 강조하게 된 동기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Kierkegaard는 당시 널리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인간들이 인간의 삶 혹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에 대한 생각을(의식을) 상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국가인 덴마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외면적인 교칙이나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추구를 계속하고 회의하면서 뜨거운 내적 경험을 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철학혹은 사색의 대상이 아닌 삶, 혹은 존재하는 것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2) 실존의 개념 덴마크어, 독일어, 그리고 다른 어군에서는 영어의 존재한다(exist)-혹은 실존한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수개의 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Kierkegaard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독특한 종유와 관련되어 있는 존재에 해당하는 하나의 용어를 포착하고서 그 것에다 새롭고 깊이 있는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Kierkegaard의 실존개념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독교를 빠뜨릴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실존은 신 앞에 있는 실존인 것이다.(실존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Existenz ist vor Gott). 다시 말해서 실존은 신 앞에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여 자기가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실존은 신 앞에 있을 때 되는 것이며 거꾸로 신 앞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기 즉 실존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단독자, 외톨이가 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신이며 완전히 좌절된 자, 마음이 가난하고 절망한 자만의 신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신 앞에 서는 존재, 신 앞에 홀로선 단독자를 참된 실존으로 보았다.
(3) 실존과 진리 실존이란 객관성이 아니고 주관성이다, 외면성이 아닌 내면성이다, 보편자가 아닌 단독자이다, 영원한 필연성이 아닌 시간적 우연성이다. 결국 Kierkegaard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기 존재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 진리는 객관적,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 하여 주체성이 진리라고 했다. 주체성이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한다.
실존의 3단계 Kierkegaard는 실존의 자기 형성의 과정을 실존의 3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 감각적(미학적) 실존으로서, 이는 내적인 분열과 무익한 자기반성, 목표도 없는 인생의 향유 및 그로 인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둘째는 윤리적 실존으로서 이는 미학적 실존의 불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아의 선택을 내용으로 하며 최고의 규정임을 선언한다. 또 자아에 대한 인식 및 특히 그러한 인식에 의거한 행위를 요구한다.
이러한 두 실존 양식을 넘어선 세 번째의 단계는 본질적, 종교적 실존으로 종교세계의 가치에 따라 살면서 신앙에 의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삶이다. Kierkegaard는 윤리나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앙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종교적 실존이며 자신이 부단히 추구했던 진정한 실존으로 생각하였다. 결론: 평가 Kierkegaard는 거의 확실히 실존주의적 운동을 자기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기독교국가에 기독교를 다시 소개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열에 찬 열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절망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경험한 그 시대의 비합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가 그의 논리적 결론을 따라 어느 정도 그와 같은 노선을 따른 다면, 불신앙 보다는 신앙을 더 선호해야 할 필요가 없고(진리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지식도 인간의 조건에 따르는 주관적 지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쉬운 사상 설명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美的)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평생 하루 종일 전자오락만 하면서 놀고 지낸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방학 때 사나흘 동안 내리 전자오락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오락마저도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할 뿐 행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 뿐이다. 그런 쾌락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군자처럼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성적 나쁜 이유를 끊임없이 자신 외에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계속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하려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인간적 실존의 과제는 참된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참」이란 나 자신에 대해서 「참되다」, 「성실하다」의 뜻이다. 그러니까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는다는 것은 본래의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다. 참된 자기 자신을 되찾기 위해 키에르케고르는 감성적 실존, 윤리적 실존, 종교적 실존이라는 세 단계의 자기 형성을 제시했다.
근대의 특징은 이성이나 경험과 같은 거대한 중심을 바탕으로 관점을 성립시키는 것이었으며, 그 근거를 제시하고 또 요청하는 것이 특징이었지요. 중세의 신학은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성을 바탕으로 한 철학을 방법으로 하여 신을 증명 가능한 것으로 주장하지요. 하지만 근대의 틀 안에서는 이성이나 경험을 통한 증명이 요구되며 이러한 요구를 만족할 때만 객관화된 진리로 여겨지며 하나의 학문으로서 가치를 갖게 되지요. 이러한 맥락에서 신학이나 윤리학은 학문으로써 성립할 수 없다는 비판을 피할 수가 없게 되지요.
이러한 근대의 특성으로 키에르케고르의 신 앞에선 단독자는 독특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신과 나의 관계는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관계가 아닌 주관적이며 특수한 관계라는 의미가 바로 신 앞에선 단독자이며, 내 자신의 주체적 결단을 통해 신(예수)과 나의 관계를 정립해야한다는 것이였지요. 즉 내 자신의 삶에서 신이 있다고 믿고 선택한다면 내 삶에는 신이 진리가 된다는 것으로, "주체성이 곧 진리이다."는 말의 의미가 되지요. 이러한 주체적 선택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실존주의의 선구로 사르트르가 분류한 것이죠.
또한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에 있어서 신은 세상의 중심입니다.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없다 하더라도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인간의 삶은 죽음과 유한성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삶은 심미적 단계 -> 윤리적 단계 -> 종교적 단계로 비약해 나가며 이러한 비약은 죽음과 유한성에 대한 극복의 과정이며 그 극복이 좌절 될 때 삶의 더 높은 단계로 비약된다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의 요지이지요.
실존철학 existentialism
20세기 초중반에 세계적으로 일반대중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지지를 받았던 철학으로 구체적인 인간 실존의 상황에 대한 문제와 해석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19세기 전반기의 인물인데도 불구하고 20세기의 실존 철학자들은 그에게서 실존철학의 동기와 원천을 이끌어 내었다. 그는 헤겔의 역사주의와 합리주의에 반기를 들어 개인적인 실존의 문제 즉, 죄의식과 불안과 절망를 주제로 삼았다.
시대 배경 20세기에 실존철학의 등장은 세기의 배경과 밀접한 상관관계를 가진다. 20세기는 과학기술 발전의 불균형과 거기에서 야기되는 제반 문제들, 두 차례의 세계적 규모의 전쟁, 진보주의적인 낙관주의의 역사관에 대한 회의, 추상성과 객관성에 대한 학문의 강박증, 물질적 가치의 팽배에 따른 종교성의 상실과 인간소외 그리고 불안, 고통, 죽음, 타락 등으로 나타난 인간 현실의 부정적인 측면의 증대, 인간적 가치의 하향화의 시대였다.
철학에 있어서 19-20세기는 과학에 있어서의 전반적인 유물론의 경향, 헤겔의 역사적 관념론, 마르크스의 유물론, 실증주의로의 추세를 그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른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가 크게 철학의 관심사로 부각되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본질의 문제가 아닌 개별적인 인간의 좌절, 선택, 죄책감, 불안, 죽음 등의 실존적 문제이다.
실존 먼저, 실존이란 용어에 관하여 해명이 필요하다. 실존은 철학사에서 전통적인 철학적 개념인 본질에 대비된다. 본질(essence)은 한 사물을 규정할 때, 그 사물의 변화하지 않는 고유한 특질을 지시하는 말이다. 가령 인간의 본질은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답해질 수 있는 인간의 근본적인 본성을 지칭한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인간만의 인간을 인간이게끔 하는 이성과 정신을 인간의 본질이라고 할 것이다. 이에 대하여 실존(existence)은 어원상으로 ex(밖에, 밖으로) + sistere(나타나다, 나와서다)로 이루어져 있는 단어로서 인간의 존재방식에 관한 개념이다.
실존이란 말이 함의하고 있는 실존의 성격을 들면, 첫째, 실존은 보편적 인간이 아닌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인간을 다룬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사물의 존재방식과 다르다. 사물과 인간은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인간만이 실존한다.(하이데거)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서 실존이 본질에 앞선다.(사르트르) 실존철학은 전통적인 합리주의 철학에서 강조하는 보편적 이성을 지닌 유적 인간보다 총체적 존재로서의 개인에게 관심을 둔다.
둘째, 인간에 대한 실존철학의 주된 관심사는 일상적이고 피상적인 생활사가 아닌 '실존적'이라고 할 만한 생(生)과 사(死), 고뇌 등의 숙명과도 같은 실존적 체험과 주체적 자각이다. 철학자마다 실존적 체험은 다르게 나타난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으로부터의 소외와 그에 따른 죄책감과 절망을 자신의 실존적 문제로 삼았으며, 야스퍼스는 극복되기 어려운 한계상황을, 하이데거는 죽음과 불안을, 사르트르는 전반적인 구역질을 기반으로 삼는다. 실존적 체험은 이제 더 이상 구체적인 실존 상황 속에서 주체를 소외시키지 않고 진리의 중심으로서 당당하게 그 권한을 인정한다. 그리하여 실존 철학은 역사와 현실세계 속에서 소외되고 함몰되지 않는 개인의 주체적인 자각을 촉구한다.
셋째, 방법론에 있어서 실존은 과학에 경도되어 있는 실증적, 실험적인 방법을 벗어난다. 인간의 실존은 사물을 고찰하는 데 사용하는 범주와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으로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각각의 실존 철학자들은 실존에 대한 해석방법을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 실존 철학자들은 주관과 객관의 이분적인 구별을 반대한다. 그 이유는 실존체험과 관련하여 인간 주체와 문제 상황이란 객체가 일치하고 가능성과 과정으로 이해되는 인간은 세계내 존재로서 세계와 다른 인간들과 직접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실존범주와 현상학적 방법을 사용하여 인간의 실존분석을 시도한다. 그리고 키에르케고르에서는 합리적이고 거시적인 역사관이 거부되고 주체적 결단이 실존의 비약에 있어서 필수적인 요소로 등장한다. 야스퍼스는 과학적 방법의 불완전성을 인정하고 실존에 대한 사유방법을 실존해명이라 부른다. 그는 한계상황에 처한 인간이 난파하면서도 그의 실존이 초월과 자유에 근거하고 있음을 명확히 한다. 사르트르는 하이데거와 같이 현상학적 방법을 가지고 <존재와 무>와 관련하여 인간의 실존은 기투에 의한 자유라는 것을 밝힌다.
넷째, 실존은 초월이다. 실존의 어원적 의미에서도 얼마간 드러나듯이 실존은 인간만의 것인데, 사물처럼 본질과 정의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사물이 만들어져 있는 존재로서 생성소멸의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반해 인간은 자유 즉, 주체적인 선택을 통해 스스로를 투기(投企)함으로써 창조하는 자유인 것이다. 자유란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데 가능성으로서의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가능성은 항상 실존의 미래라는 시간성 속에서의 선택과 투기를 말하며 이는 곧 초월이다. 또 실존은 항상 자기 자신을 넘어서 세계의 다른 존재(사물과 타인성소멸총체로서의 세계소멸향하는 초월이기 때문이다. 초월성과 관련하여 초월의 방향은 철학자마다 여러 가지소멸달리 나타난다. 가능성과 무화에로의 자유와 부조리를 강조하는 것은 무신론적 실존 철학으로 나아가고(사르트르, 카뮈), 초월성과 비약을 통하여 존재적 무를 넘어선 존재와 실존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 정립하고자 하면 유신론의 경향에 이른다(키에르케고르, 야스퍼스, 후기하이데거, 마르셀, 신학적 실존철학).
실존이란 개념은 개별적인 인간에 있어서의 삶의 유형과 관련지어 보면, 현실존재와 진실존재라는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실존철학자들은 개별인간의 삶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나름대로의 윤리학을 제시하는데, 공통점은 주체적 삶에서의 소외와 타락이 지배하는 현실에서 탈피하여 각자의 삶에서 주체적 위치를 회복하고 진실한 삶에로의 전환을 설파한다는 것이다. 현실존재로서의 실존은 개체적인 인간의 삶의 현실과 실제 모습을 지시한다. 키에르케고르는 신을 외면한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존재로서의 실존적 삶은 쾌락을 쫓는 미적 실존과 평범한 지성에 파묻힌 합리적 인간이 지니고 있는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합리성과 쾌락에 매몰된 인간은 불안과 절망과 죄의식에 사로잡혀 삶에 고통에 겨워 할 수밖에 없는데, 주체적 결단과 비약만이 절망에서 벗어나 단독자의 신앙과 삶에로 복귀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3. 키에르케고르의 삶의 문제들
1) 실존적 사고의 성격 -- 헤겔과의 비교를 통하여
당시 유럽의 정신계는 헤겔 철학의 강한 영향 아래 있었으며, 덴마크의 사상계 헤겔적 체계를 만드는 일에 골몰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합리적 지식과 전통적 심정적인 것의 일치, 철학과 그리스도의 신과의 일치 그리고 사상(이념)과 현존하는 사회질서와의 일치를 말하는 헤겔적 객관적 순수 사고의 체계 속에 모든 것을 집어넣고 그것을 해결하려고 생각했다. 헤겔에 의하면, 세계는 절대 정신의 나타남이며 그의 변증법은 이 절대정신이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성으로 나가는 끊임없는 운동을 필연적인 전개로 파악하는 체계적 논리였다. 여기서,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으로서 이 세계의 모든 것은 변증법적인 필연성에 따라서 체계화되고 개체는 전체의 개념 속에 포괄되며, 진리는 전체13)가 된다. 따라서 헤겔에게는 항상 전체, 보편, 일반, 체계적 원리가 문제였다. 헤겔 체계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나의 사고가 곧, 자기 자신을 사고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사고와 존재는 동일한 것이 된다.
그런데, 순간순간을 괴로워하고 버거워하며 어떻게 살아 나가야 할 지 모르는, 항상 선택의 사거리에 있는 우리에게 헤겔의 사고체계(사유)가 시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인가. 객관적으로 볼 때, '무한한 결단'이란 있을 수 없다. 결단은 오직 '주체성'에만 있는 것이다. 여기서, 키에르케고르는 전체가 진리라고 하는 헤겔에 맞서 '주체적인 어떻게'와 '주체성이 진리'라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 내리기에있는 우. 가장 정열적인 내면성의 자기터득에서 확보된 객관적 불확실성이 실존자에 대해서 존재하는 최고의 진리라는 것. 즉, 객관적으로 불확실한 것을 무한한 정열을 가지고 선택한다고 하는 모험 속에 비로소 진리는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적 사고의 특징은 바로 자기의 존재와 존재하는 일에 본질적으로 관계하는 사고 즉, 그가 말하는 주체성은 곧 '자기에 관계하는 사고'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은 헤겔처럼 우주와 전체를 파악하려는 존재자체에 대한 사고가 아닌 고뇌를 걸머진 현실의 구체적인 피와 눈물을 가지고 울고 웃고 사랑하고 분노하는 낱낱의 인간 존재에 대한 사고의 체계로 결론 내릴 수 있겠다.
2) 실존의 참모습
주체적 실존적 사고의 주체는 시간 안에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체적으로 어떻게 관계하느냐고 하는 것은 시간에 관해서 변증법적이며, 이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바뀔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실존이란 그 어디에 있다고 하는 정적인 자기의 상태나 도달된 정적인 목표가 아니라 끊임없이 본래의 자기를 깊게 자각해 가는 노력의 과정에 있다.
이러한 '자기됨의 노력'속에 나타나는 실존은 크게 세 단계로 - 심미적 단계, 윤리적 단계, 종교적 단계 - 질적으로 구별되고, 이 때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로의 넘어감은 '결단'의 비약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세 단계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시간의 지남과 더불어 올라가는 외형적 변화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 심미적 단계(미적 실존)
실존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낮은 단계이다. 풍부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가능성을 그대로 내버려두는 이 단계의 사람은, 단지 바라보거나 즐기기만 할 뿐 행위 하지 않고 책임도 지지 않으며 구미가 당기는 것이나 오락거리만 쫓아다니며 산다. 따라서 인생의 모든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는 나비가 이곳에서 저곳으로 날아다니듯이 이 단계의 사람은 결코 한 군데에 머물러 있지는 않는다. 언제나 새로운 쾌락의 가능성 속에서 떠돌며 재치 있게 삶을 향수한다. 결국, 인생의 목적은 건강, 아름다움, 부, 명성, 지위, 재능, 미적 감각의 만족 같은 자기 인격의 밖에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 자기 이외의 것,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구하는 이 삶은 필연적으로 절망으로 끝나게 되며, 이 절망한 인간은 점점 더 깊은 절망과 자포자기에 빠지게 된다. 오히려, 자기 자신은 그 자신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소외됨으로써 이로니(Ironie)에 빠진다. 즉, 쾌락을 추구하던 주체는 도리어 욕구의 노예가 되어 자신을 부정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인생의 공허감만 느끼게 곧, 본질적인 의미에서 비현실적으로 남게 될 뿐인 것이다. 이 상태로부터의 해결책은 결국 이러한 사실을 사실로서 받아들이고, 이와 같은 상태에 머물기를 참으로 원하느냐 원하지 않느냐고 자문해 보는 데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쾌락적 감성적 자기에 밀려 무시당했던 양심이 눈을 떠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절대적 선택 앞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자유는 '결단'으로서 실현되는 것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이윽고 현실에 이르고 현존재 속에 자신의 자리를 확립할 수 있다.
- 윤리적 단계(윤리적 실존)
'선택과 결단'은 키에르케고르가 인간을 고찰하는 본질적인 범주로서, 이는 '윤리적 단계'의 특색을 나타낸다. 곧, 이는 반성적 의지적 결단에 의해 절대적인 의미에서의, 영원한 인격으로서의 나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윤리적 단계에 들어서 실제로 결단을 내릴 때 비로소 본래의 자기 자신에 이르고 자신의 과제가 될 수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적 실존은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게 하는 동시에 가족, 사회, 민족에게로 돌아가게 해준다. 영원한 절대적 자기는 역사적, 사회적 자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단계에서는 친구 관계, 결혼 관계, 직업 관계에 들어갈 것을 명하며 개방성과 솔직함을 의무로 요청한다. 이에 따라 스스로의 양심에 입각한 영원한 절대적 자기를 현실에서 실현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인간 그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왜냐하면, 어떠한 이도 완벽하게 윤리적일 수도, 양심적일 수도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은 성실하면 할수록, 양심에 따라 살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 양심이 자기에게 지운 과제의 엄청난 요구 앞에 스스로의 무력을 통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처럼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어떻게 그것을 초월한 무한한 존재를 지향할 수 있을까. 이러한 난관에 봉착하여 윤리적 실존은 스스로의 양심 앞에 스스로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양심의 한계를 넘어 자기의 실존을 받쳐주는 다른 근거를 찾게 된다.
- 종교적 단계(종교적 실존)
윤리적 실존이 자기의 양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라면 종교적 실존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리하여, 양심과 윤리에 입각한 보편성의 윤리는 부정되고 죄의 사실을 승인하는 종교적 실존으로 넘어가게 된다.16) 그러니까, 실존의 궁극적인 모습은 종교적 실존이다. 결국, 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키에르케고르의 사상의 핵심이자 그의 평생의 과제이다.
종교적 실존의 단계는 두 가지의 종교성으로 구분된다.17) 그 하나는 내재주의에 선 종교성 일반을, 다른 하나는 계시에 의한 초월 종교 즉, 그리스도교를 가르킨다. 전자는 생존이 실존으로 바뀌면서 절대적 목적에 절대적으로 관계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때에도 실존자는 자기 자신의 벽에 부딪치며 고뇌하게 되지만, 이 고뇌는 자기가 영원자와 관계 맺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영광스러운 고뇌'가 된다. 이 고뇌는 반성을 거듭할 기회를 제공하며 죄책감을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죄책감은 죄의식이 아니다. 자기 반성의 뉘우침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무한한 존재를 지향하기 위해서는 더 강렬한 의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에 상응하여, 후자는 유한한 인간은 홀로 죄의식을 느낄 수 없고 초월자의 힘을 통해서만 가능함을 역설한다. 즉, 인간은 신과의 무한한 거리에도 불구, 신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죄의식을 가질 수 있기에 무조건 신 곧, 초월자를 믿어야 하는 모험을 감행해야 함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가르킨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신 앞에 홀로 선 단독자로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느끼며 그 인격과 삶을 본받고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존재이다. 이 존재는 오직 이 한 가지를 진리로 여기며 온갖 고뇌와 시련을 극복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그리고 이 같은 정열로 하나의 진리를 믿고 섬기는 모험을 감행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저마다 진리를 찾아 나선다. 어떠한 방법으로든 간에. 그리고 존재의 자유를 만끽하고자 한다. 모두 각자 다른 삶이지만, 알고 보면 이를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다. 진리가 있을까라고 곧잘 되뇌기도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 진리가 있음을 - 전제하고 믿는다. 보편적인 진리를 위해서가 아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선은 자기 자신의 삶에 대한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다. 이는 키에르케고르가 말한 주체적, 실존적 삶이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는 바로 실존의 문제다. 철학자이기에, 학식자이기에 가 아닌 인간으로서 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외침이 살아있음은 바로 여기에 바탕 한다. 그 누구도 자신의 삶의 방식이 되는 믿음을 전적으로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신뢰는 가능하다. 어떠한 사람을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더없는 모험이 되겠지만, 스스로의 믿음을 끝까지 따르는 자이다. 믿음,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대자에 대한 믿음을 유일한 실존으로 생각한다. 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면 수많은 비 종교인들은 잘못된 삶을 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그 믿음이 비록 제각각이지만 충분히 주체적인 실존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떠한 믿음이건, 믿음은 형이상학적인 것이고 그 믿음에 일관적안 태도를 갖는다면 우리는 궁극적인 실존을 지향하게 될 것이기에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제시하는 바는 '자, 어서 참다운 실존 - 삶 - 을 위해 하느님을 믿으라'는 교화를 위함이 아니다. 그는 주체적인 진리를 부르짖으면서 이것만이 절대적인 진리와 함께하는 참다운 실존이라고 강요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면 무엇인가. 그것은 무리 속에 숨어 정신적으로 무뎌지고 나태해진 우리를 끄집어내어 고뇌하며 실존하는 자신과 정면으로 대면, 그 삶과 당당하게 겨루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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