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의 회심 과연 성경적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개념과
2. 사상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개념과 실존의 3단계
실존(實存, Existenz ) (
1) 실존을 강조하게 된 동기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Kierkegaard는 당시 널리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인간들이 인간의 삶 혹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에 대한 생각을(의식을) 상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국가인 덴마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외면적인 교칙이나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추구를 계속하고 회의하면서 뜨거운 내적 경험을 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철학혹은 사색의 대상이 아닌 삶, 혹은 존재하는 것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2) 실존의 개념 덴마크어, 독일어, 그리고 다른 어군에서는 영어의 존재한다(exist)-혹은 실존한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수개의 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Kierkegaard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독특한 종유와 관련되어 있는 존재에 해당하는 하나의 용어를 포착하고서 그 것에다 새롭고 깊이 있는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Kierkegaard의 실존개념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기독교를 빠뜨릴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실존은 신 앞에 있는 실존인 것이다.(실존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Existenz ist vor Gott). 다시 말해서 실존은 신 앞에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여 자기가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실존은 신 앞에 있을 때 되는 것이며 거꾸로 신 앞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기 즉 실존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단독자, 외톨이가 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신이며 완전히 좌절된 자, 마음이 가난하고 절망한 자만의 신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신 앞에 서는 존재, 신 앞에 홀로선 단독자를 참된 실존으로 보았다.
(3) 실존과 진리 실존이란 객관성이 아니고 주관성이다, 외면성이 아닌 내면성이다, 보편자가 아닌 단독자이다, 영원한 필연성이 아닌 시간적 우연성이다. 결국 Kierkegaard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기 존재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 진리는 객관적,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 하여 주체성이 진리이다고 했다. 주체성이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한다
실존의 3단계 Kierkegaard는 실존의 자기 형성의 과정을 실존의 3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 감각적(미학적) 실존으로서, 이는 내적인 분열과 무익한 자기 반성, 목표도 없는 인생의 향유 및 그로 인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둘째는 윤리적 실존으로서 이는 미학적 실존의 불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아의 선택을 내용으로 하며 최고의 규정임을 선언한다. 또 자아에 대한 인식 및 특히 그러한 인식에 의거한 행위를 요구한다.
이러한 두 실존 양식을 넘어선 세번째의 단계는 본질적, 종교적 실존으로 종교세계의 가치에 따라 살면서 신앙에 의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삶이다. Kierkegaard는 윤리나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앙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종교적 실존이며 자신이 부단히 추구했던 진정한 실존으로 생각하였다.
결론: 평가 Kierkegaard는 거의 확실히 실존주의적 운동을 자기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기독교국가에 기독교를 다시 소개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열에 찬 열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절망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경험한 그 시대의 비합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가 그의 논리적 결론을 따라 어느 정도 그와 같은 노선을 따른 다면, 불신앙 보다는 신앙을 더 선호해야 할 필요가 없고(진리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지식도 인간의 조건에 따르는 주관적 지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3. 쉬운 사상 설명
파혼을 한 서른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맹렬한 속도로 창작 활동에 몰입했다. 그리하여 불과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공포와 전율》(1843), 《반복》(1843), 《철학적 단편》(1844), 《불안의 개념》(1844) 등 수많은 굵직한 책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글은 간명하고 대중적이며 알아듣기 쉬운 편이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은 대부분 자기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었다. 이 점은 그가 처음 쓴 책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여기서 인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美的)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평생 하루 종일 전자 오락만 하면서 놀고 지낸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방학 때 사나흘 동안 내리 전자 오락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오락마저도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할 뿐 행위하지 않고 책임도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 뿐이다. 그런 쾌락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 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 군자처럼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성적 나쁜 이유를 끊임없이 자신 외에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계속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하려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고교 독서평설》2000. 7.에서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1&docId=55979808&qb=7Iuk7KG07KCBIOqysOuLqCvrj4Tslb0=&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5R%2Bysoi5Tossa3D8W4sss--427363&sid=TJU72PLTlEwAAEy6F@U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의 개념과 실존의 3단계
실존(實存, Existenz ) (
1) 실존을 강조하게 된 동기 성직자가 되려고 했던 Kierkegaard는 당시 널리 확산되고 있는 기독교에 대한 오해의 중요한 원인중 하나는 인간들이 인간의 삶 혹은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에 대한 생각을(의식을) 상실한 것이라고 믿었다. 기독교국가인 덴마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이다라는 생각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외면적인 교칙이나 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추구를 계속하고 회의하면서 뜨거운 내적 경험을 하는 데에서만 찾을 수 있다고 확신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기독교는 철학혹은 사색의 대상이 아닌 삶, 혹은 존재하는 것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2) 실존의 개념 덴마크어, 독일어, 그리고 다른 어군에서는 영어의 존재한다(exist)-혹은 실존한다-라고 번역될 수 있는 수개의 용어들을 가지고 있다. Kierkegaard는 인류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독특한 종유와 관련되어 있는 존재에 해당하는 하나의 용어를 포착하고서 그 것에다 새롭고 깊이 있는 의미를 부여했다. 물론 Kierkegaard의 실존개념을 이해 하는데 있어서 기독교를 빠뜨릴 수는 없다. 그가 말하는 실존은 신 앞에 있는 실존인 것이다.(실존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다, Existenz ist vor Gott). 다시 말해서 실존은 신 앞에 자기 스스로를 자각하여 자기가 진정한 자기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의 실존은 신 앞에 있을 때 되는 것이며 거꾸로 신 앞에 있을 때만이 진정한 자기 즉 실존이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신은 단독자, 외톨이가 된 자만이 발견할 수 있는 신이며 완전히 좌절된 자, 마음이 가난하고 절망한 자만의 신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신 앞에 서는 존재, 신 앞에 홀로선 단독자를 참된 실존으로 보았다.
(3) 실존과 진리 실존이란 객관성이 아니고 주관성이다, 외면성이 아닌 내면성이다, 보편자가 아닌 단독자이다, 영원한 필연성이 아닌 시간적 우연성이다. 결국 Kierkegaard는 구체적이고 현실적이고 개별적이고 주체적인 자기 존재를 최대의 관심사로 삼아, 진리는 객관적,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주체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라 하여 주체성이 진리이다고 했다. 주체성이란 육체를 가지고 원죄에 허덕이는 존재로서, 그러기에 부단히 자기 자신의 존재 방식에 관심을 쏟고 어떻게 살것인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하며 살아가는 인간적 실존을 말한다
실존의 3단계 Kierkegaard는 실존의 자기 형성의 과정을 실존의 3단계로 표현하고 있다.
첫째는 감각적(미학적) 실존으로서, 이는 내적인 분열과 무익한 자기 반성, 목표도 없는 인생의 향유 및 그로 인해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을 보여준다.
둘째는 윤리적 실존으로서 이는 미학적 실존의 불완전성을 표현하는 것으로 자아의 선택을 내용으로 하며 최고의 규정임을 선언한다. 또 자아에 대한 인식 및 특히 그러한 인식에 의거한 행위를 요구한다.
이러한 두 실존 양식을 넘어선 세번째의 단계는 본질적, 종교적 실존으로 종교세계의 가치에 따라 살면서 신앙에 의해 본래적 자기를 찾으려는 삶이다. Kierkegaard는 윤리나 양심이 아니라 절대적인 신앙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종교적 실존이며 자신이 부단히 추구했던 진정한 실존으로 생각하였다.
결론: 평가 Kierkegaard는 거의 확실히 실존주의적 운동을 자기 자신과 무관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오직 기독교국가에 기독교를 다시 소개하는 것이 그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는 누구보다도 정열에 찬 열정으로 기독교의 진리를 호소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절망을 통하여 주관적으로 경험한 그 시대의 비합리성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만약 우리가 그의 논리적 결론을 따라 어느 정도 그와 같은 노선을 따른 다면, 불신앙 보다는 신앙을 더 선호해야 할 필요가 없고(진리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또 하나님에 관한 객관적 지식도 인간의 조건에 따르는 주관적 지식으로 대체되어야 할 것이다.
3. 쉬운 사상 설명
파혼을 한 서른 살의 키에르케고르는 그 고통을 잊기 위해 맹렬한 속도로 창작 활동에 몰입했다. 그리하여 불과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이것이냐 저것이냐》(1843), 《공포와 전율》(1843), 《반복》(1843), 《철학적 단편》(1844), 《불안의 개념》(1844) 등 수많은 굵직한 책들을 세상에 내놓았다. 그의 글은 간명하고 대중적이며 알아듣기 쉬운 편이었다. 키에르케고르의 책들은 대부분 자기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쓰여진 것들이었다. 이 점은 그가 처음 쓴 책인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는 여기서 인간의 삶을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미적(美的)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인간은 감각적 쾌락을 쫓아 산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평생 하루 종일 전자 오락만 하면서 놀고 지낸다고 생각해 보자. 이 삶이 과연 행복한 삶일까? 방학 때 사나흘 동안 내리 전자 오락을 해본 경험이 있는 학생이라면 오락마저도 얼마나 큰 고통이 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바라보고 즐기기만 할 뿐 행위하지 않고 책임도지지 않는다. 이렇게 감각적 쾌락만을 좇는 삶의 결과는 '권태'와 '절망' 뿐이다. 그런 쾌락으로 인간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이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두 번째 단계인 '윤리적 단계'에 따른 삶을 살게 된다. 쾌락만을 좇아 무비판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켜야 하는 보편적 가치와 윤리에 따라 생활하는 것이다. 이 때 인간은 비로소 여러 가지 가능성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결단을 내리며 스스로 책임 지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데 불행히도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 아무리 도덕 군자처럼 살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언젠가는 파멸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윤리적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허무하게 느껴지고, 인간 존재마저 허무하게 느껴질 뿐이다. 인간은 이 '불안'과 '절망'을 통해 다음 단계로 나아가게 된다.
인간으로서 완전하고 참된 삶은 세 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와서야 비로소 실현된다. 스스로의 결심에 따라 진정으로 신을 믿고 따를 때에 인간으로서의 무력감과 허무함을 떨쳐 버리고 완성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한 단계에서 다른 단계의 삶으로 옮겨가는 것은 '자기 자신의 주체적 결단과 도약'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점이다. 마치 부모님과 선생님이 아무리 공부하라고 다그쳐도 정작 자신이 공부하려고 하지 않으면 성적이 오르지 않는 것과 똑같은 이치로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개인의 주체성'을 강조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공부 못하는 학생들이 대부분 성적 나쁜 이유를 끊임없이 자신 외에 다른 곳에서 찾으려고 하듯이, 사람들은 자신이 윤리적이고 주체적이지 못한 이유를 계속 주변 사람들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서 찾으며 변명하려 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사람들에게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살아갈 것을 요구했다. 신이 나의 모든 행동과 말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결코 나 외에 다른 것에 책임을 돌릴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으로 매 순간 최선을 다해 결단하고 노력하며 살라는 뜻이다.
《고교 독서평설》2000. 7.에서
네이버 지식검색에서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1&docId=55979808&qb=7Iuk7KG07KCBIOqysOuLqCvrj4Tslb0=&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g5R%2Bysoi5Tossa3D8W4sss--427363&sid=TJU72PLTlEwAAEy6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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