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분석적책읽기

이어령의 회심 과연 성경적인가? 칼바르트의 신앙의 도약

칼 바르트 (Karl Barth, 1886-1968)
http://blog.naver.com/prayeresther?Redirect=Log&logNo=60109745734
 
바르트는 그간 하나님의 초월성을 거부하였던 자유주의에 반해 하나님의 초월성을 회복시켰던 신학자이다. 바르트는 초월성과 내재성을 포함하는 변증법적 방법을 사용한다.

 
바르트의 신학의 까다로움과 애매함으로 인해 많은 복음 주의자들이 그를 자기 진영으로 생각해 왔다. 아마도 슐라이어마허와 리츨로 시작되었던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가 정통 보수 신학에서 너무도 벗어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바르트 신학을 복음적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바르트 신학은 결코 보수-개혁 주의 신학과 맥을 같이 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독소적 요소가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바르트 신학은 비 성격적 신학이며 칸트, 헤겔, 키르케고르 같은 철학자들의 사상 등을 기초로 나름대로 발전시킨 것이다. 당시 바르트가 처했던 자유롭고 인본주의적 구-자유주의에 대항하여 기독교적 신앙 회복, 성경을 근거로 한 설교의 가능성과 필요성, 초월적 하나님의 위상,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 등을 확립하고자 했던 그의 학문적 업적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바른 신학은 인간이 처한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도 아니요,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여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요, 학문적 성취를 위한 것도 아니다. 바른 신학은 바로 하나님의 계시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성경 자체에서 시작했다기보다는 초월적 기독교를 회복하고픈 마음에 철학적 조명 아래에서 나름대로의 ‘계시’ 개념을 가지고 그의 신학을 시작했던 것이다.
 
바르트가 자유주의 신학과 급진적인 결별을 하게 된 것을 몇 가지로 이야기하는데 첫째로 그가 자펜빌의 사람들에게 설교함에 있어서 자유주의 신학이 쓸모없음을 발견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기 시작했고 자유주의의 철학적 내용이 아니라 성경 안에 있는 초월적 말씀 안에서 그의 교인들을 위한 적절한 설교 내용을 찾았다. 둘째 이유로, 1914년 카이저 빌헬름의 전쟁 정책을 지지하는 93인 독일 지식인들이 낸, 지지 성명에 자신이 존경하던 은사들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이 전쟁의 이데올로기와 타협을 한다는 것은 그들의 자유 신학에 어떤 문제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때 바르트는 로마서 주석을 쓰기 시작했고 그의 자유주의 비판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이 책에서 그는 성경 연구에 적용된 역사-비평도 옳고 축자 영감설도 옳다고 말하며 그 둘 중 하나를 택하라 한다면 후자를 택하겠다고 했다. 그는 자유주의 신학이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케 하는, 즉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과 전혀 다른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그들 스스로의 힘으로 예기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메시지로 인정하기는커녕, 복음을 하나의 종교적 메시지로 바꾸어 인간들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결과가 되었다고 비판하였다. 이것을 다르게 말하면 그동안의 신학을 ‘아래로부터 위로’ 라 한다면 바르트는 ‘위로부터 아래로’의 신학을 발전시키려 했다. 하나님의 초월, 복음, 영원, 구원 등은 인간의 보편적 경험이나 이성으로부터 세워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하여 오는 것이므로 순종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한다.
 
바르트 신학을 ‘변증법적 신학’ 혹은 ‘위기의 신학’이라고 한다. ‘변증법적’이라는 말은 헤겔보다는 키르케고르의 철학적 방법을 답습한 것을 의미한다. 인간의 죄성과 하나님의 전적 타자성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와 인간의 생각이 합리적인 종합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자기 계시의 역설적 진리들은 유한한 인간의 지성으로는 신앙의 도약을 통해서만 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키르케고르가 말하는 ‘시간과 영원사이의 무한한 질적 차이’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칼바르트는 기본적으로 자신의 스승들의 생각 - 성경은 믿을만한 것이 못되며, 예수는 인간이었다는 것 -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종교는 무엇이고, 예수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한 답에 물음을 한 것이지 그것을 반박한 것은 아니다.

 
그의 로마서 주석으로 인해 신학적 인정을 받고 1921년에 독일 괴팅겐대학교의 신학교수로 가게 된다. 거기서 리츨학파들과 심각한 갈등을 이루었고, 그는 복음이 직면한 최대의 위험은 그것이 거부되는 것이 아니라, 순순히 받아들여지지만 또 하나의 인간 이성과 문화의 소유물로 전락되어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뮌스터 대학교로 옮겨 5년을 봉직하다가 1930년 본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서 그의 신학의 작은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에 대한 거부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지난 10년 동안 천명하였던 ‘아니오’ 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예’를 더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는 조직신학을 처음에 저술하기를 꺼려했다. 그 이유는 그는 바라기를 어떤 인간적 사상체계에도 의존하지 않는, 절대적으로 신학적이고 그러므로 전적으로 성경적인 신학을 창출하고 싶었다. 더욱이 인간이 가지는 신앙의 주관성보다는 하나님의 계시의 객관성을 강조하기를 원했다. 이당시 바르트의 영향을 준 것은 중세시대 신학자 안셀름 (Anselm)이었다.
안셀름은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라는 말을 함. 혹은 ‘내가 믿기 때문에 이해한다’. 안셀름은 믿음의 우월성을 강조한 것이다.

 
바르트는 안셈을 합리주의자가 아니라 이성을 이용하여 신앙에 도움이 되게 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존재에 관한 안셈의 존재론적 논증은 하나님을 신앙과는 별개로 입증하려 했던 시도가 아니라 신앙으로 이미 믿어진 바를 이성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였던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는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한 존재라는 것이다. 하나님보다 더 이상 위대한 존재는 없다. 이는 논리적으로 맞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이 이렇다면 실재론적으로도 존재해야 하나님이 되실 수 있다는 것이다. 생각에서 존재한다면 당연히 실제에서도 존재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것이 안셈의 존재론적 논증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사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확실성으로 보았다. 믿음을 통해서 초월성을 취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강조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교리적인 개념은 계시였다.

 
기독교 신학이 객관적이고 냉정한 과학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객관적 자기 계시는 은혜와 믿음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범위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능하다는 것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1. 바르트의 계시관
먼저 바르트의 계시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의 대작 「교회 교의학」(Church Dogmatics)은 크게 4권으로 (세밀하게 나누면 13권이 된다) 되어 있는데 (원래 5권을 쓰기로 했으나 그의 생전에 완성하지 못했다) 그 중 첫 권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교리’이다. 그의 신학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말씀의 신학’ 혹은 ‘계시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말씀’ 혹은 ‘계시’의 초월적 개념으로 ‘신학’의 가능성을 다시 확립시키려 했던 것이다. 이 전 구자유주의(old liberalism)은 신학이 아니라 문화적 인간학에 불과하다고 믿었던 바르트에게는 계시야 말로 초월적 하나님을 회복시키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실 그의 계시관은 단지 성경관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계시관이 바로 신론이요 기독론이요 성령론인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 신학의 핵심은 바로 그의 계시관이라고 할 수 있다.
 
반틸에게서의 계시란 ‘하나님의 전적 나타나심’이다.
 
그러면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란 무엇인가?
바르트는 인간의 어떤 것, 역사상의 어떤 것도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고 계시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성경은 정말 비역사적인 산물인가? 역사적인 산물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역사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르트는 말하기를 역사적인 산물이 되어 버리면 그 때부터 초월성은 상실된다고 보는 것이다.
 
 
*발산 - 헬라적인 개념에서는 햇빛이 있을 때 햇빛을 쬐면 세상으로 들어오지만(초월적인 것) 햇빛에 의해서 태양이 오염이 되지는 않는다.
바르트는 발산의 개념을 이용하여 초월성을 논한다. 하나님의 초월성을 이야기할 때 인간과는 어떠한 상관도 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날 때야만 초월성을 유지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전적으로’나타나셔야 하며, 이럴 때 이것은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 사건 속에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 나시는건데, 십자가 사건 역시 이에 속한다. 성경을 이야기하면, 계시가 인간세계에 들어와야 한다. 우리와 관계가 없는 하나님이라면 의미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들어오셔야 한다. 이것을 내재성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라는 것은 역사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 역사 속에 있는 것들은 계시적이라 할 수 없다는 것이 바르트의 핵심이다. 하나님께서 인간과 접촉하셨기 때문에 이미 신적인 것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초월성을 이야기하면서 내재성을 부인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터치가 되긴 됐는데, 그 속으로는 들어오지는 않는 것이다. 단순한 하나의 사건으로만 끝나버리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초월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이고, 인간적인 것들을 통해서는 신격화 할 수 없다는 것이다.(내재성으로 인한 부인) 성경을 계시의 방편으로 이야기하는데, 설교, 성경, 예수 그리스도가 그것이다. 계시의 사건을 이야기할 때 방편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위의 3가지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 때 성경, 설교,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차원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 우리는 목사가 설교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차원으로 보지 않는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성경 자체가 하나님 말씀이라는 확신으로 그것을 대하지만,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만나기 위해(계시 사건이 발생되는 것을 원하며) 성경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실존주의적인 접근을 했던 키에르케고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나에게 특별한 사건, 부딪힘이 있어야만 그것이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실존주의
즉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경은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성경이 역사적 산물이라고 할 때와 의미가 다르다. 그에게는 이것이 곧 초월성을 상실한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것 자체를 계시로 보지는 않는 것이다. 그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성경을 이야기한다고 해도, 궁극적인 전제가 다르기 때문에 그의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바르트 한 말들은 다음과 같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것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이 되도록 하시는 경우, 즉 그분이 그것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범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 만약에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진짜 오류가 있는 인간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심지어 그의 직책에 있어서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계시를 말하고 쓸 때에도 오류가 있지 않다고 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 바울이 말한 것과 하나님이 말씀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리고 또 이 둘은 하나님의 말씀의 사건에서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또한 같은 것이 되는 하나이고 같은 것이 되는 이유 때문에 계시는 상위의 원리로 성경은 하위의 원리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성경과 계시가 사건을 통해서 하나로 된다는 것이다.
“설교사건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의미와 똑같은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믿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나타내고 그의 뜻을 알려주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물론 ‘계시’라는 말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뜻하기 때문에 이런 형식적인 의미로는 바르트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와 보통 우리가 말하는 계시라는 단어는 같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의 계시관은 우리의 계시관과 다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한마디로 바르트의 계시는 ‘초월적 하나님’의 ‘전적으로 나타나심’(wholly revealed)을 의미한다. 바르트에게는 인간과 질적으로 영원한 차이를 가지신 하나님이 어떤 역사적인(달력의 의미로) 사건이나 인간의 언어 속에 나타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다시금 신학을 인간학으로 만드는 결과라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믿고 있는 것처럼 신성이 그의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든지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로 자신을 계시했다고 믿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지 않고 ‘사건’ (event)으로 자신을 나타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사건의 의미는 역사적 사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계시의 행위’를 의미한다. 마치 키르케고르가 주장했듯이 영원한 진리가 인간에 다가온 어떤 역설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우리가 믿듯이 그의 종들을 통하여 언어로 계시를 주셨다 한다면 그런 하나님은 초월적 하나님이 되지 못한다고 바르트는 믿고 있는 것이다. 그 초월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순간적 나타나심(사건 혹은 행위)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이것이 바로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 방법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언어와 동일시 할 수 없고 믿음이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러한 사건으로서의 계시는 어떤 역사적 형태 혹은 방편을 동반한다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계시의 세 가지 방편으로 그는 ‘그리스도’ ‘성경’ 그리고 ‘설교’를 말한다. 계시가 단지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역사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많은 사람들은 마치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있고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정의하며 그 위상을 높였다고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는 계시란 반드시 역사적이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계시가 역사적이라는 말에는 우리가 동의하지만 역사적인 것이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계시가 역사적 성경에 나타났다고 우리와 같은 성경관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바르트에게는 역사적 기록인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더 핵심적인 것이다. 또한 바르트가 계시의 세 가지 방편 중 하나로 ‘설교’를 말할 때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설교를 ‘하나님 말씀 선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설교’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초월적 계시가 주어짐을 의미하는 것이다. 즉 성경과 설교를 액면 그대로 동일시하는 것이다. 설교의 권위를 세운 것이 아니라 성경을 설교 정도로 추락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트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 ‘이다’는 우리가 믿는 식의 ‘이다’가 아님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오히려 그 말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순간적으로 된다(becomes)’로 이해해야 한다. 바르트는 성경을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을 죽은 말씀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성경과 계시를 ‘동일화’ 함에 있어서 그것은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인 것이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동일시하는 것도 직접적 동일이 아니라 간접적 동일이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바르트도 성경의 영감(inspiration)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영감은 전통적 기독교가 믿는 그러한 영감이 아니라 초월적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함에 있어서 불완전한 인간의 언어를 자신을 사용하셧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이다’라는 바르트의 주장을 듣고 그의 성경관이 복음주의적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성경관은 다른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성경관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해 다시 요약 설명하자면 그의 ‘계시’는 한마디로 그의 ‘초월적 하나님’이 어떤 인간적인 요소(언어, 시간적 역사를 포함하여)를 통하지 않고 역사 속에 바로 나타나는 방편인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계시는 “위에서부터 바로 내려지는”(Senkrecht von Oben)것으로 말한다. 또한 그래서 계시를 하나님의 ‘전적’ 나타남‘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전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어떤 인간의 언어나 사상 같은 매개체가 중간에 개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 안에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자신의 존재로부터 따로 인간에게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전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계시 사건과 동일시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존재의 권위와 그의 계시의 권위가 동등하다는 것이 아니라, 계시와 하나님의 존재가 동일시 되는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에 대해 몇 가지 더 지적한다면, 그는 계시의 형태로 성경과 설교를 말하지만 성경과 설교 자체가 하나님에 대해 다 계시하지는 않는 것이다. 즉 그러한 계시 형태로 하나님이 ‘전적으로’ 자신이 다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계시는 받는 자의 믿음의 반응과 함께 일어나야 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너무 주관적이라 하겠다. 바르트는 슐라이어마허나 리츨의 신학을 주관적이라 혹은 인간적이라 비판했지만 이러한 비판이 바르트 자신에게도 해당된다고 하겠다. 어쩌면 그에 눈에는 정통주의자들이 성경 자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그것을 해석하고 논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어떤 인간 연구의 객체적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으로 비쳐졌는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나님 말씀을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능력을 인정한다면 하나님이 인간 저자들을 통하여 그의 말씀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게 하신 능력 인정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아무튼 우리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관을 알고 나면 그의 계시관은 정통 신학이 아님을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혹 성경이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기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바르트의 계시관이 그럴듯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의 계시관은 그 계시 개념에만 국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까지 연결되는 개념이다. 우리가 믿는 인격적이시며 절대적 존재이신 하나님이냐 아니면 바르트의 전적 타자(wholly other)로서 추상적 개념적 하나님이냐의 선택까지 연결되는 것이다.

 
 
2. 바르트의 신관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바르트는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전적 타자,’ ‘감추어진 자,’ ‘자유’ 등으로 표현한다. 하나님의 ‘존재’는 그의 ‘자유’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자유는 하나님의 근본적 성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유하시다는 것은 하나님은 자신이 아닌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자유도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감추어진 하나님이 전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르트는 하나님을 “자유를 사랑하는 자”라고 정의하기도 한다. 그의 자유(초월성)는 그의 감추어짐을 말하지만 그의 사랑(내재성)은 그의 계시, 구원, 은혜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감추어짐과 계시가 동시에 가능한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자유란 그 자신외의 무엇이 될 자유도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내재하실 자유도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변성은 그의 자유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그의 영원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한 자유라는 것이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바르트가 하나님을 그의 계시와 동일시 할 때는 어떤 간접적 동일을 의미한다. 즉 계시가 역사적 형태를 취할 수 있어도, 역사적인 어떠한 것이 계시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 사건이 어떤 면에서는 계시에 참여할 수는 있지만 계시와 동일시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계시의 간접성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 속에서도 감추어지신 분이라고 한다. 즉 계시 안에서도 자유하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이러한 간접성 개념은 변증법적 방법으로 하나님이 동시에 감추어지고 동시에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으로 하나님을 계시와 동일시하는 것에 문제가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도대체 인간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의 정체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듯이 계시란 하나님이 자신을 알리는 매개체(특별 계시와 일반 계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면 우리가 계시를 받을 (계시 사건) 순간 그 계시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계시를 받는 순간에 우리가 하나님이 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그 순간에 하나님이 인간이 된다는 소리인가? 아니면 계시란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보편적 실재(realty)로서 우리 주변에 존재하는 (범신론적으로) 그 무엇인가? 어떠한 것도 바르트는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바르트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감추이심 혹은 초월성만을 강조하며 하나님을 헬라 철학에서 말하는 “알 수 없는 신”으로 정의하든지, 굳이 하나님의 내재성을 말하고 싶으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인격적 하나님이 인간(역사적 매개체)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셨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그의 존재는 사건 그 자체임을 의미하고 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감추어지신 분인지라 그의 계시는 보존할 수도 조정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키르케고르의 ‘순간’ 개념과 같이 우리가 간혹 순간적으로 가지는 계시라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은 전적으로 계시된 분이시기에 (즉 계시와 동일시되는 분이기에) 그의 존재는 계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이렇듯이 바르트는 그리스도의 성품(person)과 그의 사역의 구분을 하지 않고 하나님의 정수 혹은 성품과 그의 사역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않는다. 바르트의 하나님은 ‘인격체’이신지 ‘과정’인지 분명치 않다.
 
하나님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존주의적인 방법으로만 만날 수 있고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본질과 하나님의 사역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가 말씀하시고 계시하시는 것 - 내재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3. 바르트의 역사관
초월적인 신이 우리와 접촉할 수 있는 통로는 계시이다. 그렇다면 성경 자체가 계시인가? 바르트는 그렇게 볼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왜냐하면 성경을 계시로 볼 때는 초월성이 사라지기 때문에.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초월성은 이런 것이다. 초월성을 계시라는 통로로 놓고 이야기할 때는 변증법적 방법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부분적으로 나타난 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분적으로 나타날 경우 우리가 하나님을 조정할 수 있고, 소유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전적으로 나타나셔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동일한 말의 반복)
전적으로 나타났을 때 우리가 다 알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우리와는 질적인 차이가 있는 분이기 때문에 감춰진다. 이는 이중적인 것이다. 전적으로 나타나면서도 전적으로 감춰지는 것.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 ‘이다’가 아니라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되게 할 때 말씀‘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즉 칸트의 개념이라는 것이다.
흠 있고 오류가 있는 언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감이며 따라서 놀라운 일이라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을 통로로 기록하게 하신 말씀 자체가 정확무오하다고 본다.!!

Historie -일반적 역사, Geschichte - 원 역사
바르트가 말하는 참 역사, 믿음의 역사, 계시의 역사는 후자를 의미하는 것이다.
키에르 케고르는 현실, 본질적인 것보다는 실존이 더 중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측면에서 바르트는 동정녀 탄생도 Historie -일반적 역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 본다. 바르트는 하나님이 유일하게 택한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고 유일하게 버린 것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본다.
 
우리가 보통 생각할 때 예수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고백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보는 개념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종결되었다. 따라서 예정론의 개념도 애매모호해지고 구원에 대한 개념 자체가 모호해진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부분에서 직설적인 질문을 회피한다. 부활 역시 마찬가지이다.
 
칸트는 본체론적 세계와 현상론적 세계로 나누었는데, 이 자체로서는 오늘 해가 뜬 사실이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사실에 원천을 제공해주지는 못한다. 오늘 해가 뜬 것과 내일 해가 뜬 것의 인과원리, 관계성등은 경험하여 알 수가 없는 것이다. 경험하지 못하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는 단순히 추측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부분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본체론적 세계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 본체론적 세계에 하나님이 계실 때, 현상론적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본체론적 세계가 있어야만 현상론적 세계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본체론적 세계가 당위성을 존재하지만, 이는 현상론적 세계에서는 알 수도 없고 경험할 수도 없는 세계이다. 바르트 역시 이와 마찬가지 논리를 전개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경험으로는 알 수 없는 초월적 존재라 할 때 우리는 그가 자신을 계시하시기 전까지는 경험하여 알 수 없다. 그저 당연히 계신 것으로, 당위적인 것으로 가정하고 받아들일 뿐이다.
 
이는 칸트의 철학과 매우 흡사하다. 이에 바르트는 칸트의 철학을 답습한 것에 불과하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또한 그는 기존의 신학을 그대로 차용하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자신만의 신학을 다시 재창조하고 있다.
 
삼위일체 - 양태론적인 개념
Christomonism - 바르트
Christocentrism - 우리
 
바르트는 모든 것을 예수그리스도로 일원화시킨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다. 우리 역시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을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이 바르트가 이야기하는 것처럼 예수로 모든 것이 일원화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는 삼위일체의 한 위인 것이지 그가 전부는 아니다.
 
바르트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는 인격이 아닌, ‘사건’적인 진행에 불과한 예수 그리스도로 전락한다. 만약 빈 무덤이 있는 것이 실제적인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참 역사를 가리키는 지표로서만 기능하고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일반 역사로서의 사건들은 우리에게 정말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것일까? 의미 있는 사건은 분명 초월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초월성이 필요하다고 해서 일반 역사에서 발생되지 말라는 법이 있는가? 이는 뒤집어 보면 바르트에게는 하나님이 인간이 되실 수 있고, 일반 역사에 하나님의 역사가 기록될 수 없다는 자신의 신념에 의해 다시 말해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일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일반 역사를 통해 일어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받아들인다.
 
일반적인 역사를 떠나서 초월성을 찾고자 했던 바르트. 이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추상적인 개념에 가두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계시를 나 자신이 생각하는 개념으로 국한시켜 버렸다. 끝으로 바르트에 대한 비판 중 하나는, nominalism(유명론- 이름뿐인)이다. 유명론은 이름뿐인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철학과 신학에서는 실재론이냐 유명론이냐로 갈린다. 바르트는 유명론적인 색채가 농후하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구원을 얻었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일어났던 것들은 모두 실제적인 예수님과 연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형식만 있고 내용은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에 실제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없는 껍데기뿐인 이러한 신앙이 과연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사건이 내 안에서 내면적인 파장을 일으킬 때에만 영향력을 갖는다고 할 때, 이것의 주제는 ‘ 나 ’이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는 전자로 보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은 위의 모든 것이 단순한 사건이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주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되실 때 이는 인격적인 사건이 됨으로 초월성을 상실케 되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는 키에르케고르의 사상과 잇닿아 있다. 키에르케고르가 본질보다 실존이 앞선다고 이야기했을 때, 우리의 존재가 본질보다 앞선다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나의 존재가 있다고 할 때 그 존재를 이루는 알맹이 즉 본질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름뿐이지 않겠는가? 실제적인 본질을 이루지 않는 것은 이름뿐인 유명론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참 하나님이며 참 인간이라고 할 때 바르트는 이것이 존재론적 차원에서 불가능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이름만 거는 것이다. 즉 유명론이다. 따라서 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믿는 믿음에 대한 발생이 불가능하다.
조용기 목사 - 부활처녀 사건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제한다면 이 세계는 단순히 ‘우연’에 의해서 움직여 간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우연’의 세계는 일정한 기준과 원리가 없다. 그저 아무렇게나 이루어져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성경을 기록하셨다고 할 때,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연 세계에서는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다. 어떤 것도 가능할 것 같지만 가능하지 않다. 우리는 무조건 적인, 비이성적인 믿음에 의해 ‘믿음’을 갖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계시를 바탕으로 한 일정한 기준으로 토대로 해서 믿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우연’에 의해 모든 것이 가능해졌다고 할 때 그들은 그 우연을 믿는 신념체계를 갖고 있지 않은가! 관념 속에서 만들어낸 자신만의 믿음을 토대로 우리를 비판해야 한다면 역으로 우리 역시 그들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 않겠는가.
 
 
 
바르트의 계시 개념과 더불어 그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꼭 알아야 할 것이 바로 그의 역사 개념이다. 바르트가 ‘역사’라고 할 때는 단지 우리가 갖고 있는 역사 개념이 아닐 수 있다는 것에 유의해야 한다. 그는 두 가지 역사 개념을 말하기 때문이다. 즉 일반 역사(Historie)와 초-역사 혹은 원-역사(Geschichte)이다. 이 두 개 다른 독일어는 똑같이 ‘역사’라고 번역이 된다. 그러므로 영어로 ‘history,’ 한글로 ‘역사’라고 할 때 바르트에게는 어떤 ‘역사’를 의미하는 지를 따져 봐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Historie)는 보통 달력에서 발생되는 사건, 즉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역사를 말한다. 보통 역사가나 과학자들이 탐구하고 분석하는 사건들이다. 그러나 이 일반 역사는 어떤 의미가 결여된 역사라는 것이다. 반면에 초-역사(Geschichte)는 특별한 의미의 역사이다. 믿음을 위한 의미가 들어있는 사건을 말한다. 과학적 혹은 역사적 관점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이해되는 것이고, 멀리서 조명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 초역사의 중요성은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를 망라하여 적용된다고 한다. 초역사란 하나님이 나타나시며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인격 혹은 그리스도와 동일시되는 구속의 역사가 바로 초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초역사의 사건은 과학적 관망이 아니라 실존적 결단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렇게 바르트가 역사를 두 종류로 구분하는 데는 신학적으로 혹은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계시가 역사 속에 들어 올 때, 단지 우리가 가진 일반 역사적 범주에서만 이해할 경우, 그 계시는 초월성을 상실함으로 인간의 소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가 일반 역사 속에 (전적으로 감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가둬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바르트에게는 진정한 역사적 의미 혹은 신학적 의미는 초-역사에 나타난 의미인 것이다. 이러한 두 역사의 구분을 변증법적 구분이라고 할 수 있고 또한 칸트적 이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칸트는 우리가 이미 살펴 본대로 두 종류의 세계를 추론했다. 본체론적(noumenal) 세계와 현상적(phenomenal) 세계가 바로 그것이다. 바르트의 초-역사는 바로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에 속한 것이요, 일반 역사는 칸트의 현상적 세계에 속한 것이다. 초역사속에 감추어진 진정한 의미의 계시가 일반 역사 속에 '마치 있는 것처럼'(as if) 나타난다는 것이다. 칸트 철학을 빌려 표현하자면 어떤 ‘실천적 당위성’을 따라 일반 역사 속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진짜 의미는 초역사속에 발견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알 수 없는 초월성 속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두 종류의 역사가 어떻게 바르트의 신학에 적용되는지 간단히 살펴보도록 하겠다. 바르트는 구속 역사를 철저하게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본다. (물론 바르트가 말하는 ‘그리스도 중심적’ 개념은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 중심적’ 개념과 다르다.) 바르트 신학에 있어서 그리스도로 인한 구속 역사는 일반 역사가 아니라 초역사이다. 그러므로 바르트는 ‘창조’ 조차 일반 역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일반 역사라 한다면 초역사인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속과 상관없게 되기 때문이다. 인간 타락 역시 일반 역사의 사건이 아니라고 한다. 같은 이유다. 일반 역사라고 하면 그 타락의 사건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바르트는 창조, 타락, 구속 모든 것을 초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이 말은 곧 이 사건들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 속에 발생된 사건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동정녀 탄생은 일반 역사적 사건이라고 바르트는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을 들으면 바르트 역시 동정녀 탄생을 우리처럼 역사적 사건으로 믿고 있다고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바르트는 동시에 동정녀 탄생은 ‘직접적 계시’가 아니라 주장한다. 그 이유는 동정녀 탄생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동정녀 탄생은 단지 초역사적 실재(reality)의 지표(sign)에 불과하다고 한다. 바르트가 동정녀 탄생을 일반 역사로 보는 것은 그것이 실재 일어났던 사건이라는 것이 아니다. 단지 동정녀 탄생을 구속적 의미와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부활 역시 동정녀 탄생과 같이 일반 역사적 사건으로 본다. 빈 무덤은 전설적인 것이며 부활의 지표(sign)는 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부활의 본 실재(reality)는 초역사적이라고 한다. 육체적, 일반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부활은 오직 지표 일 뿐이며, 참 사건(초역사적 사건)의 한 국면에 불과하다고 한다. 참 사건은 오직 믿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직접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활은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과학자, 역사가들이 살피며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초역사로서의 부활은 참으로 일어났고 제자들이 참으로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한다. 이것은 참 사건이기 때문에 달력적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요, 그것은 하나님의 참된 임재요 오늘날 우리에게도 보이는 것이라고 한다.
 
바르트의 역사관을 요약하면 그는 두 종류의 역사 가운데 초-역사가 진정한 의미의 역사라고 한다. 즉 창조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등 성경의 사건들이 우리 구원과 관련되는 진정한 믿음의 사건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가 아니라 초역사에서 발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역사성이 결여된 사건은 우리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바르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직접적 일반 역사가 아니라 간접적 개념인 ‘초 역사’를 도입한 것이다. 직접적 개념의 일반 역사로 보자니 하나님의 초월성이 상실될 것이고,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한정하자니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부여될 어떤 힘이(예를 들어 신앙, 결단, 종교성 등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결여될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초역사의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바르트의 역사관을 우리는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먼저 우리는 왜 의미 있는 사건은 우리가 아는 식의 역사에, 즉 달력의 시간에 발생되지 않는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의미 있는 사건은 어떤 면에서 초월성을 가지고 있다. 시간을 초월해서 현재나 미래에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믿는 십자가 사건은 시간을 초월해서 지금 우리에게 의미 있는 사건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왜 이러한 의미 있는 사건이 보통 역사에 발생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그것은 이미 지적했듯이 하나님의 초월성을 칸트의 본체론적 세계와 같은 개념으로 국한 시키려는 것이다. 즉 바르트가 믿기로는 신적 사건이 일반 사건이 된다면 그것은 이미 신적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왜 일반 역사 속의 사건은 그러한 신적 의미가 없다는 것인가? 정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일반 역사 속에서도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닌 것이다. 바르트는 바로 이것을 믿기 힘들어 하는 것이다. 이것을 믿지 못하고 기독교 신앙의 가능성을 합리적으로 세우려는 그는 이렇게 칸트적 철학 체계를 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한 바르트는 일반 역사로서의 동정녀 탄생이나 부활을 말한다. 물론 그것의 진짜 의미는 초역사적이라고 한다. 만약 바르트가 그리스도의 부활을 일반 역사로 본다면 왜 일반 과학자나 역사가들은 그 부활 사건을 의미 있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인가? 즉 과학자나 역사가들이 객관적으로 부활 사건을 평가하지 못한다는 것은 부활을 두고 두 종류의 역사적 구분을 하는 것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실 사람이 믿음이 없다고 해서 부활 사건이 그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믿던, 믿지 않던 간에 부활 사건은 역사 안에 발생된 것이다. 역사를 초월하는 그 무엇으로 확실성을 찾으려고 했던 바르트는 오히려 역사성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바르트가 찾고자 했던 초역사적 확실성은 사실 주관적 추상화와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