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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회심 과연성경적인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적 결단
{이것이냐 저것이냐}
李 基 相(한국외국어대학 교수/철학)
http://abstinence_.blog.me/110086185855
 
1. 인간 키에르케고르
   키에르케고르는 1812년 5월 5일 덴마크의 코펜하겐에서 일곱 자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났고 거기서 1855년 11월 11일 42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실존철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키에르케고르에게 인간적으로나 철학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아버지 미카엘 페더센 키에르케고르와 그의 약혼녀 레기네 올센이다. 그의 실존철학은 그와 아버지와의 실존적 관계, 그리고 그와 약혼녀와의 실존적 관계에서 발원하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키에르케고르가 24살 되던 해 여름 그는 아버지의 비밀을 알게 된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친다. 그 때의 충격적 체험을 그는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 엄청난 지진이, 무서운 변동이 일어났다. 그것은 나에게 전 현상의 새로운 해석을 강요하였다. 나는 아버지의 장수가 하느님의 축복이 아니고, 오히려 저주라는 것을 알았다. 또 나는 우리 가족들의 뛰어난 정신적 천분이 단지, 서로 괴롭히기 위해서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예감하였다. 나는 아버지에게서, 우리들 모두보다도 더 오래 생존해야 할 운명을 걸머진 하나의 불행한 인간을 보았을 때, 나의 주위에 죽음의 정적이 짙어가는 것을 느꼈다. 하나의 죄가 전 가족의 머리 위에 뒤덮고 있음이 틀림 없다. 하느님의 형벌이 그 위에 있음이 틀림 없다.]
   키에르케고르가 아버지와 화해하고 아버지의 죄를 떠맡아 대신 참회하기로 결정한 뒤 아버지는 82세의 나이로 조용히 눈을 감는다.

   25살의 키에르케고르는 15살의 레기네 올센을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3년 후 그는 그녀와 약혼한다. 그런데 이때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얼마 후 키에르케고르는, 자신이 도대체 한 여자를 자기에게 묶어 놓을 권한을 갖고 있는지 숙고하기 시작한다. 결혼에 대한 그의 엄격한 생각에 따르자면, 결혼의 주요 부분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절대적으로 솔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것을 해낼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그에게는 함구해야 할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윤리적 . 종교적인 데 반해 레기네는 심미적 . 직접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나는 종교적인 것만 가지고 있으면, 레기네 없이도 살 수 있었고, 또 지금도 살 자신이 있다.] 애인을 종교에로 끌어올릴 힘이 자기에게 있는 것일까 하는 것을 생각하고 또 한편 자기의 무력을 깨달은 그는 절망하였다. 이윽고 키에르케고르는 결단을 내렸다. [이 편지를 쓴 사람을 잊어 주십시요. 한 사람의 처녀를 행복하게 하여 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사내를 용서해 주십시요.]하고 그는 편지를 띄웠다. 레기네는 미칠듯이 날뛰었다. 그가 외출한 사이에 달려온 레기네는, [당신이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저를 버리신다는 것은 저를 죽이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써놓고 돌아갔다.

   키에르케고르는 약혼녀가 스스로 약혼을 파기하기를 바란다. 그는 혐오스럽게 처신하고 타락한 것처럼 보이게 하여, 마침내 레기네가 약혼 파기를 선언하도록 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다시 자유롭게 해주기 위해서 못된 놈으로, 그것도 가능한 한 최고로 못된 놈으로 행세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다.] 그리하여 놀라운 연극이 시작되고 어린 레기네에게 잔인한 장면이 연출된다.
   이러한 마음의 결전은 두 달이란 세월을 끌었다. 드디어 레기네와의 일은 종막을 고하였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레기네와의 사랑을 통하여, 그리고 그 사랑이 끝난 후에도, 키에르케고르는 허다한 저술을 통하여 레기네와의 관계를 되풀이 하였다. 즉 키에르케고르는 레기네라는 한 여성을 통하여 자기의 본질의 일부를 형성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레기네를 통하여 직접성의 삶이 어떤 것인지를 깨달았다. 여기서 다루려고 하는 {이것이냐 저것이냐}도 이러한 레기네와의 실존적 관계가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2. 인간은 정신, 자기 자신, 자유
   키에르케고르의 철학사적 중요성은 그가 인간을  있는 그대로의 구체적인 실존에서 보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하였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여태까지와는 다르게 인간에 있어서 영원보다는 시간을, 무한보다는 유한을, 보편보다는 개별을, 이상보다는 실재를 고려하면서 인간의 본래적인 실존의 모습을 끊임없는 그 둘의 종합의 노력으로 보려고 시도하였다. 인간을 [관계]라고 정의한 키에르케고르의 인간에 대한 규정은 유명하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러면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이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이란 무엇인가? 자기 자신이란 자기 자신과 맺는 하나의 관계이다. 또는 자기 자신이란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그 관계 속에 있음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이라고 하는 것은 관계가 아니라,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것을 말한다. 인간은 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다. 요컨대 인간은 한 종합이다. 종합이란 양자 사이의 관계이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은 아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양자 사이의 관계에 있어서의 관계는 부정적인 통일로서의 제3자이다. 그리고 양자는 관계에 대해서, 그리고 관계에 대한 관계 속에서 서로 관계한다. 이와 같이 영혼의 규정 아래에서는 영혼과 육체와의 관계 역시 한 관계이다. 이와 반대로 관계가 자기 자신과 관계하게 되면 이 관계는 긍정적인 제3자이다. 이것이 자기 자신이다.]({죽음에 이르는 병})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여기의 정의에서 관계가 항상 이미 주어져 있는 것으로서, 통상적 의미의 실존함으로 표현되고 있고 (...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그 관계...), 그리고 관계의 부과되어 있음이 떠맡아야 할 관계로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관계가 ... 관계를 맺는 그 관계 속에...).
   자기 자신이란 다시 말해 관계의 선택이며, 이 선택을 통해 관계가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과 관계한다. 따라서 정신이 됨과 자기 자신이 됨은 실존 속에서 자기 자신을 선택함이다. 즉 개별자는 자기 자신을 선택함으로써 정신이 되며, 또한 역으로 자기 자신은 비로소 이 선택에서 자기 자신이 된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 대한 의식 역시 자기 자신에 대한 이론적인 관조가 아니라 자기 선택의 변증법과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정신, 자기 자신, 자유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나 자신의 선택의 관점들이다. 인간의 그 자신과의 차이가 어느 순간에나 존립하고 있고, 따라서 선택이 결코 전혀 지나가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과제로 주어져 있는 한, 그 관점들은 선택 이전에나 선택 이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선택 안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3. {이것이냐 저것이냐}
   {이것이냐 저것이냐}는 키에르케고르가 1843년 [빅토르 에레미타]라는 익명으로 출간한 키에르케고르의 첫번째 작품이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작품과 더불어 일반적 인간 실존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 실존을 심미적인 단계와 윤리적인 단계로 나누어 고찰한다.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개별 인간의 과제는 실존하는 자기 자신을 떠맡아 그 안에서 자기 자신과 어떤 일정한 관계를 구현하는 데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이 관계를 세 가지 근본 형태로 구분하여 [실존 영역] 또는 [단계]라고 칭하며, 이 단계를 심미적 . 윤리적 . 종교적 단계로 나누고 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는 이 중 두 가지 단계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우리도 이 두 단계를 상세하게 살펴보고 종교적 단계는 간략하게 언급만 하고 끝내도록 한다.

가. 심미적 단계
   [심미적]이란 키에르케고르에게 있어 예술이론의 범주라기보다는 차라리 지각의 양태에 있는,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것에 대한 표현이다. 심미적인 것은 직접 주어져 있는 것과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이며, 실존의 양태로서의 선택을 통해서 뚜렷하게 떠맡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가 아닌 직접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감성적 자기 자신이란 직접적으로 주어진 자연 상태의 자신으로서 풍부한 구체성과 다양한 특성 및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심미적으로 실존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직접적인 주어져 있음 안에서 존재함을 뜻한다.
   왜냐하면 [한 인간에 있어서 심미적인 것은 그가 그것을 통해 현재 있는 대로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윤리적인 것은 그가 그것을 통해 되어야 할 바이기] 때문이다. [심미적인 것 안에서 심미적인 것에 의해 사는 사람, 심미적인 것을 통해 그것을 위해 사는 사람이 심미적으로 사는 사람이다.]
   그 때문에 심미적 실존 양태에는 자기 자신을 떠맡는 사건은 없고, 오직 어떤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을 -- 예컨대 능력을 -- 전개하는 것으로서의 발전만이 있다. 이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은 책임감을 갖고 떠맡아야 할 과제로 고려되지 않는다. 오히려 책임은 끊임없이 [소극적 결의]를 통해 자신을 선택하지 않으려는 태도에 의해 회피된다. 실존하는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는 것은 무한성 대 유한성 등의 자기 실존의 요소들을 서로서로의 구체적인 관계 안으로 끌어들여 그 안에서 종합함을 말한다. 이렇게 심미가는 실존에 있어 끊임없이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고, 자신에 대해 관람객으로 머물러 있음으로써 이 과제를 회피한다. 심미가는 오직 성찰과 환상 속에서만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자기의 [있음]의 구체성을 [할 수 있음]으로 계속 해체시키고, 자신의 유한성을 환상적으로 무한화시킨다. 본래적 실존이 자기 자신이라는 본질적인 차원에 그 척도를 가지고 있는 반면, 심미적 실존에게는 모든 것이 마음대로 본질적인 것으로 될 수 있다.
   본질이 없는 상태이긴 하더라도 심미적 실존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즉 우연한 외적인 것에 의해 규정된다. 이런 심미적 준칙은 [사람이란 모름지기 삶을 즐겨야 한다]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쾌 . 불쾌의 변증법 속에서 행복 . 불행 그리고 운명 등과 같은 주도적 개념들을 갖고 실존하는 것이다. 그래서 심미적 실존에서의 지배적인 시간 이해는 역사를 만드는 결단의 순간이 아니라 [찰나]이며, 개별자가 희미하게 자신의 가능성을 느끼는 [기분]의 표현으로서의 찰나적인 것이다.
   이러한 생활형태의 예로서는 모차르트의 오페라에 등장하는 [돈 환](돈 죠반니)의 모습인데, 그는 근본적으로 감각적 성적인것의 대변자, 자기 자신이라는 내적인 역사 없이 살아가고 있는 강력한 유혹자의 대변자이다.
   [돈 환은 밑바닥에서부터 유혹자다. 그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감성적으로 사랑하고, 이 감성적인 사랑이란 것은 그 개념이 말해 주듯이 정숙한 것이 못 되고, 절대적으로 부정하다. 즉 감성적인 사랑은 한 사람의 여자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여자를 사랑한다. 말하자면 모든 여성을 유혹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단지 찰나 속에만 실존할 뿐이지만, 그 찰나란 것도 개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여러 찰나의 총계이고, 이렇게 해서 우리는 유혹자라는 것을 갖게 된다.]
   [돈 환의 삶은 바이올린의 춤추는 듯한 선율에 따라 우리 앞에 전개되고, 이 선율 속에서 그는 가볍게 무심결에 심연(深淵) 위로 달려간다. 우리가 돌을 물 표면에 스쳐가도록 던지면, 돌은 잠시 경쾌하게 물 위에서 춤추며 미끄러져 나가지만, 미끄럼을 멈추는 순간 순식간에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말 듯이, 돈 환도 심연 위에서 잠시 동안 기쁨에 넘쳐 춤을 춘다.]
   심미적 단계에서 [삶의 찰나들은 모두 한 인간에게, 그가 그것을 어떤 임의의 순간에서든지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삶의 찰나들은 모두 한 인간에게 그가 그것을 어떤 순간에든지 다시 기억할 수 있을 만큼의 의미를 가져야 한다.]
   기억 속에서 과거를 임의로 재생시켜 내어 현재의 무의미함을 잊어 버리도록 하는 이 요구는, 그것이 개별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과 거리를 두어 어느 때든지 지나간 삶의 순간들을 다시 재연시키는 것을 보장하고 있듯이, 결단 속에서 자기 자신을 결속시키는 가능한 자기 현재까지도 괄호 안에 넣어 버린다.
   [사람이 이런 식으로 잊는 기술과 기억하는 기술을 완전하게 터득하고 나면, 그는 자기의 전 현존재를 갖고 배드민턴 놀이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자신과 거리를 둠은 윤리적으로 볼 때 자기 자신에게서의 절망적인 도피이며, 따라서 심미적 단계에서 윤리적 단계에로의 넘어감은 우선은 절망적인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에서 윤리가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심미가의 물음에 대해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오직 하나의 대답을 갖고 있다. 절망하라!] 그 이유는 참된 의미의 절망은 진리에 대해 절망하는 데에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나. 윤리적 단계
   윤리적 실존은 심미적 실존과는 달리 선택이라는 범주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여기서 우선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심미적인 무선택과 윤리적인 선택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윤리적 실존 양상의 선택은 선택의 선택과 동일하다. 요컨대 여기서의 선택은 선과 악 사이의 선택이 아니고, 선과 악의 선택, 다시 말해 윤리적 차원의 개방이 문제가 된다.
   [그는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갖고 있지만,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자리를 선택한다. 그는 하나의 특정한 개인이고, 자신의 선택을 통하여 그는 자기 자신을 하나의 특정한 개인으로 만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기 자신을 다양하게 규정된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로 선택하고, 때문에 자신의 지속성에 따라서 자신을 선택한다. 이 구체적인 존재가 개인의 현실성이다.]
   여기서 선택되고 있는 것은 구체적인 자기 자신 전체이고, 이 전체란 그의 개인적 특징, 역사적 제약, 그리고 그의 다른 개인 및 종과의 관계인 그의 세계 관련 모두를 포함한다. 이 때문에 자기 자신의 선택에서 개별 인간은 전 인류를, 이 인류의 역사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이 역사 안의 개인으로서 떠맡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는 이 구체적인 인간이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인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윤리적인 개인은 확실히 자신은 자기 자신의 편집인이라는 표현을 사용할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동시에 자신에게는 책임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 즉 그가 선택하는 것이 자신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될 한에 있어서, 그는 자신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책임이 있고, 그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많은 사물의 질서에 대해서 책임이 있고, 하느님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다... 내가 윤리적으로 나의 과업으로 받아들이는 것만이 본질적으로 자기에게 속하는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에 있어서 이러한 선택은 오직 윤리적 선택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 선택을 통해 개별자는 자기 자신을 윤리의 요구에 내맡긴다. 윤리적 과제란 모든 인간을 [참된 인간, 전인적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며], 이것은 윤리 자체가 [보편 인간적인 것]이고 개개 인간에 있어 [가장 근원적인 것]일 때에만 가능하다.
   따라서 개별자에 대한 윤리의 요구는 이 보편적인 것을 실현하는 것이다. 윤리적 운동은 개별자가 윤리적 요구의 무한성에 자신을 내맡겨 자기 자신으로부터 무한하게 벗어나 있고, 다시 자신의 현사실성 속에서 무한히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 오는 행위이다. 이 행위를 통해 그는 보편적 임무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 개별자와 보편자의 통일을 실현시킨다.
   개별자가 그 선택을 하는 순간, 그는 그의 임무를 일깨워 주는 양심에 의해 이러한 가능성에 향하도록 요구된다. 키에르케고르가 개별과 보편의 통일의 가능성이라고 규정하고 있는 양심은 개별자에게 그때그때의 구체적 상황(= 그의 임무) 속에서 얘기하는데, 그 방식은 그 구체적 상황을 보편적으로 구속력있는 윤리적 요구(= 그의 임무)에 예속시키는 것이며, 이때 윤리적 요구의 내용은 선과 악이다.
   [의무는 보편적인 것이다... 나는, <나는 나의 의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그대는 그대의 의무를 수행하라>고 말한다. 이 사실은 개인은 보편적인 존재인 동시에 특정한 존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의무는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보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내가 보편적인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의무를 수행할 수가 없다. 반면에 나의 의무는 특정한 것이고 나만을 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의무고, 따라서 보편적인 것이다. 여기에 인격이 그것이 지닌 최고의 타당성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인격은 법에 매여 있지 않은 것이 아니지만, 그 자체가 자신을 위해서 법을 만들지도 않는다.]
   선택이란 비판적 선택이며, 개인이 되어야 할 바인 어떤 당위에 자신을 내맡기는 운동이다. [따라서 개인이 자신을 윤리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때, 그는 자신이 되어야 할 바가 된다.] 윤리적 단계는 있음의 매개이기보다는 오히려 되어감의 매개이다. 결단을 내리기에 앞서 불안이 따르는데, 이 불안 속에서 개별자는 자신의 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주목하게 된다. 불안이 그 앞에서 불안해 하고 있는 바는 자기 자신의 [무]이다. 불안은 인간의 존재구조에 속하며, 그의 자기 자신으로 있음이 과제로 부과되어 있다는 데에서 생긴다. 불안은 개별자가 그의 역사적 제약 속에서 아담에 의해 결정된 역사 그 전체를 선택하려 들 때, 언제나 고개를 든다.
   [나는 나 자신을 잘못이 있는 존재로 선택할 때에만 나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다. 도대체 나는 나 자신을 하나의 방식으로 절대적으로 선택해야 하는데, 이 선택은 자기 자신을 만들어 냄과 동일하지 않다. 아들에게 상속되어 내려온 것이 아버지의 탓이라고 하더라도, 그 아들은 그것을 함께 참회할 때에만 자기 자신을 절대적으로 선택할 수 있다. 눈물이 그에게서 모든 것을 완전히 씻어낼 정도로 그가 계속해서 참회할 때에만 그는 자기 자신을 선택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을 선택한다는 것은 참회의 행위와 동일하다. 참회 속에서 개별자는 인류의 죄를 떠맡아 인류의 역사 안에 들어서게 된다. 자기 자신을 잘못이 있는 존재로 선택함은 동시에 자유롭지 못한 자신을 선택함 또는 자유로서의 자신을 선택함이며, 이 때의 자유는 불안 속에서 가능성으로 드러나지만 선택에서는 비자유로 설정된다. [자유의 반대는 죄이다.] 이로써 윤리적 자유는 윤리적인 자기 선택으로서의 참회를 통해서는 지양될 수 없는 비자유이다. 왜냐하면 참회는 항상 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회의 요구는 [최고의 윤리적 모순]이며 [이 모순 앞에 개별 인간은 항상 파산한다.]

다. 종교적 단계
   그렇지만 이 모든 것으로도 여전히 키에르케고르의 가장 내면적인 사상의 정곡을 찌르지는 못한다. 스스로 윤리적인 인간이 되어 보려는 노력도 절망으로 끝나 버린다. 결국 그는 인간은 그 혼자의 힘만으로는 진실로 자기 자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 무력감이 바로 인간이 갖는 유한성의 가장 심오한 징표이다. 키에르케고르처럼 지칠 줄 모르고 끊임없이 인간 현존재의 수수께끼를 되씹는 사람은 마침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즉 인간의 존재는 그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러한 사실에 대한 극단적인 절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그에게 -- 그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 새로운 가능성이 열려야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능성 속에서 인간은 자신이 단순히 유한한 존재만은 아니며, 유한과 무한으로 섞여 짜여진 경이로운 존재라는 사실을 경험한다. 인간의 본질에서 유한은 인간을 이 세상 삶의 소용돌이 속으로 내던져 그 속에 꼭 붙들어 두는 그것이다. 이에 반해 인간 본질의 다른 부분은 인간으로 하여금 무한한 열망 속에서 다른 세계와 연관을 맺는 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인간은 그것으로부터 절망의 비애 속에서도 위안을 받으며, 동시에 자기 형성, 행위와 결단에 필요한 지침을 획득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무엇보다도 특히 현존재 안에 있는 무한성을 잊어 버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무한을 깨닫게 된 사람은 세번째 단계인 [종교적 단계]에 들어서게 된다.

   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는 이렇게 명확하게 표현한다. 그리고 신학자로서의 키에르케고르는 똑같은 것을 좀더 직접적으로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인간은 신의 절대적 요구에 처해 있다. 이것이 선택과 결단에 본래적인 준엄함을 준다. 즉 그것들은 신 앞에서의 선택과 결단인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마침내 이렇게 말한다. [한 인간이 완전히 자기 자신, 한 개별적인 인간, 이 특정의 개별 인간이 되는 것을 감행하는 것은 극히 중요하다. 이 모든 엄청난 긴장과 이 모든 엄청난 책임을 떠맡고 홀로, 신 앞에 홀로 서는 것 말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끊임없이 정신적이며 영적인 고뇌 끝에 이러한 결론에 이르게 되자, 그는 그의 우울한 기질 때문에 겪은 그 모든 시련 끝에 마침내 위안을 얻는다. [내 인생은 끔찍스러운 우울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내 인생은 아주 어린 시절에 벌써 그 깊은 밑바닥까지 뒤죽박죽 엉켜 있었다. 존재 자체의 이러한 불행이 제거될 수 있으리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비록 나는 전 생애를 그토록 괴로워해야 했지만, 신은 분명 사랑이라는 사실을 즐거운 마음으로 확신하면서 영원한 것을 움켜쥐었다.]

4. 너 자신을 선택하라!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한 것은 [나는 사유한다]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키에르케고르는 [사유의 확실성]이니 [사유와 존재의 일치]이니 하는 것을 지성의 비극적인 코메디라고 일축해 버리며 [나는 죽는다]는 것보다 확실한 것이 무엇이냐고 반문한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의 존재의 확실성을 사유로, 무한으로, 영혼으로, 가능으로 해체시켜 죽지 않고 영원히 살 것처럼 여기는 사유 일변도의 철학자를 키에르케고르는 추상적 사상가의 희극으로 간주한다.
   인류라는 보편성을 내세워, 민족이라는 전체성을 내세워 개별자를 무시하여 [전체가 진리]임을 주장하던 시대에 키에르케고르는 [개별(실존)이 진리]임을 과감히 주장한 사람이다.
   [실존]은 나는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라는 의미에서의 개별 인간의 사실적 존재를 뜻한다. 실존은 무조건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환원될 수 없는 나는 존재한다는 현사실이다. 이렇듯 실존은 순수 현사실로서 인간의 어떤 본질 규정보다 앞서 놓여 있으며, 바로 이 본질 규정이 문제가 될 때에 비로소 실존은 경험된다.

   그런데 현사실의 특징은 그것이 그저 단순히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해야 한다는 바로 이 점에 있다. 이것은 나의 존재가 내게 단순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과제로서 떠맡겨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되어 가는 또는 되지 못하는 그것이며, 그래서 나 자신에게 [네가 무엇인 바 그것이 되어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말은, 내가 존재한다는 이 현사실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계로서 존재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 현사실은 그 자체가 이렇게 또는 저렇게 자신에게 관계할 수 있는 그의 가능성인 것이다.

   실존하는 자가 자기 자신과 관계를 맺는 세 가지 근본 형태를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셈이다.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다면 키에르케고르는 [결단을 내려 너 자신을 선택하라!]고 외치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의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이 된다. 자신의 능력과 처지를 한탄하며 형편의 불리함에 대해 불평만 하는 사람들에게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무엇을 받았느냐에 의해 평가되지 않고 그가 어떻게 떠맡았느냐에 의해 평가됨을 주지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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