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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회심 과연성경적인가? 인어공주의 실존적 결단

인어공주의 실존적 결단 -김환희  - 其他  2008/03/18 18:52
 http://blog.naver.com/nenia21/130029299550

내가 안데르센의 <인어공주>를 처음 읽었을 때는 열살 무렵이었던 것 같다. 어릴 때 인어공주 이야기를 읽고 느꼈던 슬픔과 당혹감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동화란 거의 대부분 해피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에 인어공주 도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행복하게 되리라고 기대했던 내게 <인어공주>는 충격적인 동화였다. 끝끝내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어리석은 왕자, 혀가 잘렸다고 왕자에게 자신의 진심을 조금도 전하지 못하고 죽는 무기력한 공주, 사건의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채 주인공의 허망한 죽음으로 끝나는 대단원 등 <인어공주>는 여느 동화와는 너무도 달랐다. 무슨 동화가 이렇게 이상 스러운 것일까? 사랑은, 산다는 것은, 이다지도 슬픈 일일까? 안데르센은 무슨 심보로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이웃나라 공주를 행복하 게 만들고, 불쌍한 인어공주를 죽게 만든 것일까?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가 공기의 요정과 함께 하늘나라로 갔다는 작가의 위로의 말은 내게는 전 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이러한 당혹감은 그 이후 안데르센의 다른 동화들을 읽었을 때도 종종 느끼곤 했다. 가엾은 어린 소녀가 추위에 떨다가 얼어 죽는 <성냥팔이 소녀>, 온갖 혹독한 시련을 꿋꿋이 견딘 뒤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 온 장난감 병정이 주인집 아이에 의해 무참히 불에 던져져 녹아버리는 <꿋꿋한 장난감 병정>등 안데르센의 비극적인 동화를 읽으면서, 슬픔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곤 했다. 하지만 동화답지 못한, 허망하기 짝이 없는 결말을 지닌 안데르센의 동화들은 그 어떤 동화보다도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깊은 반향을 일으켰다. 안데르센 동화를 읽고 이러한 감정을 느낀 사람은 비단 나뿐만은 아닌 것 같다.
 
안데르센의 동화는, 특히 인어공주는 많은 작가들에 의해 개작되었다. 미국의 디즈니 영화사는 애니메이션 <인어공주>를 권선징악적인 해피엔딩으로 처리하였고, <안데르센의 절규 >를 쓴 안나 이즈미는 성적인 호기심으로 세상에 나아간 인어공주가 사랑을 배신한 왕자와 그 신부를 함께 죽일 결심을 하는 것으로 이 야기를 끝맺었고, <인어공주>를 완전 성인용으로 개작한 키류 미사오는 왕자의 기사라는 인물을 새롭게 설정해서 인어공주가 왕자 부부 살해 미수 혐의로 마녀재판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때 그도 함께 죽는 것으로 끝맺음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개작은 대부분 페미니즘 이론과 프로이드의 심리학을 어설프게 적용한 졸작들 로서 <인어공주>가 지닌 예술적 가치를 크게 훼손한다. 동화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한 편의 이야기가 독자의 감수성과 상상력에 따라 서 다의적으로 해석 가능하다는 점인 데, 개작된 <인어공주>는 독자를 위한 여백을 남겨 놓지 않고 있다. 프로이드 심리학을 임의로 차용 해서 인어공주의 비극을 채워지지 않은 성욕 내지 성적인 에너지의 분출이 초래한 비극으로 해석한 안나 이즈미나 키류 미사오의 <인어 공주>, 선과 악의 대립구조를 설정하고 대단원을 권선징악적으로 처리한 디즈니의 <인어공주> 등은 모두 이야기를 하나의 틀에 담아 단선적으로 풀어가기 때문에 독자가 나름대로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는 '불확정성의 빈 공간'이 없다. 안데르센의 원작에 내재되어 있는 논 리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여러 요소들, 보편적인 동화의 도식에서 벗어난 비동화적인 요소들은 독자로 하여금 나름대로 해석을 하도록 이끈다.
 
어린 시절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충격적이었던 안데르센의 동화가 지닌 심층적인 의미를 조금 씩 이해하기 시작한 것은 나이가 들어 이런저런 인생경험을 하면서부터이다. 인간이란, <신데렐라>, <흥부와 놀부>, <콩쥐와 팥쥐>, <장화와 홍련>에서처럼, 그렇게 선인과 악인의 두 부류로 나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며, 세상살이에서 착하고 부지런한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늘 더 많은 행운과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안데르센의 동화는 내 마음 속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던 것 같다. 삶의 부조리와 무상성, 사랑의 허망함, 인간의 소외감 및 어리석음에 대해 말해주고, 시간의 폭력 앞에서 무기력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일회적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가르쳐 준 최초의 선생이 내게는 안데르센이 아니었나 싶다.
 
많은 작가들과 비평가들은 왕자를 안데르센의 삶 속의 연인들, 특히 그의 후원자의 동생인 루이즈 콜린과 연결지어 단선적으로 해석하는 데, 내 생각에는 왕자는 꼭 인간으로만 해석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인어공주>의 왕자는 안 데르센의 연인일 수도 있겠지만, 그가 사랑한 문학과 예술로도 해석할 수 있다. 원작을 보면 인어공주가 맨 처음 사랑한 대상은 현실 속의 왕자가 아니라 대리석 조각으로 된 소년 상이다. 난파선의 잔해로 가득 찬 정원에서 인어공주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소년 조각상을 발견 하고 애지중지 아낀다.
"하지만 막내 공주는 꽃밭을 해님처럼 둥글게 만들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 때의 햇살과 같이 붉은 꽃들을 심었다. 막내는 조용하고 생각이 깊었다. 언니 공주들은 난파한 배에서 주워 온 진기한 물건들을 보고 즐거워했지만 막 내는 해님처럼 붉고 예쁜 꽃 외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아름다운 대리석 조각만을 탐냈다. 그 조각은 배가 침몰하면서 바다 밑으로 내려온 것인 데 눈처럼 흰 돌로 조각된 아름다운 소년 상이었다" ({안데르센 동화전집}, 현대지성사, 73).
 
나중에 인어공주는 난파한 배에서 자신이 구출해 낸 아름다운 왕자의 얼굴을 보면서 바다 속 의 작은 정원에 서 있는 조각상을 연상한다. 그리고 왕자와 헤어져 바다의 세계로 돌아와서는 인간 세계의 왕자에 대한 그리움을 자신의 정원에 있 는 소년 상을 껴안으면서 달래곤 하였다. 이처럼, 인어공주가 사랑한 대상은 현실세계의 왕자와 예술세계의 왕자가 중첩된 존재이다. 특히 소년 상은 태양과 꽃의 이미지와 결합되어 아름다움과 영혼불멸을 나타내는 상징물로 그려진다.
 
불멸의 삶을 꿈꾸는 인어공주에게 소년 상은 바다에서 썩어 해골로 변한 난파선 속의 시체들 과는 달리 그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오랫동안 유지하기 때문에 매력적이다. 또 인어공주가 인간 세계의 왕자에게 이끌린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도 물 거품으로 돌아가는 바닷 속의 인어들과는 달리 인간은 몸은 썩어도 영혼이 불멸하는 존재라는 점이다. 인어공주는 할머니에게 말한다. " 우리에겐 왜 불멸의 영혼이 없나요? 단 하루만이라도 인간이 되어 별 너머에 있는 찬란한 세계에 가볼 수 있다면 제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겠어 요." "제가 죽으면 물거품이 되어 바다 위를 떠다니겠죠? 파도가 연주하는 음악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름다운 꽃도 붉은 해 도 보지 못하겠죠? 어떻게 하면 영혼을 얻을 수 있나요?" 그리고 인간세계의 배를 보았을 때 인어공주는 생각한다. "틀림없이 왕 자가 탄 배일 거야, 내게 소망과 행복을 가져다 줄 왕자 말야. 꼭 왕자를 얻고 말테야. 영혼을 얻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 어."
 
대부분의 동화에서 여주인공이 왕자와 결혼해서 행복을 얻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안데르센 의 <인어공주>에서는 왕자와의 사랑을 통해 불멸의 영혼을 얻으려는 인어공주의 소망은 산산히 부서진다. 왕자의 혼례식 날 인어공주 를 구하기 위해 언니들이 마녀에게 머리카락을 잘라주고 칼을 구해 왔을 때 인어공주는 실존적 결단의 위기에 처한다. '사랑하는 왕자를 죽이고 가족 의 품으로 돌아가 삼백년 동안 더 살다가 물거품이 될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왕자를 위해서 바다에 몸을 던져 그 즉시 물거품이 될 것인 가?' 이 선택의 기로에 서서, 영혼불멸을 꿈꾸었던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서 과감하게 그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물거품으로 돌아 갈 것 을 결심한다.
 
나는 아직도 가끔씩 그 실존적 결단의 찰나에 인어공주가 느꼈을 내면적 갈등을 상상한다. 다른 여자를 사랑한 왕자를 위해 물거품이 되기를 선택했을 때 인어공주가 느꼈을 '절대고독'을. 그 절대고독은 마르크시즘을 연구한 독일 비평 가 발터 벤야민이, 유태인이면서 마르크시즘을 연구했다는 그 사실 때문에, 이 넓은 지구촌의 그 어떤 나라에서도 망명을 받아주지 않아서 피레네 산맥에 서 자살했을 때 느꼈을 그 처연한 외로움과 같은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은 때때로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그 대상이 인간이든 이데올로기든 자신이 하고자 는 일이든, 실존적인 결단을 할 것을 요구한다. 인생에 늘 행운이 따르지 않는 한, 우리 대부분은 누구나 인생에 한번쯤은 '가족 및 자신이 속 한 사회의 요구에 순응해서 푸근하고 편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 미래가 불확실한 외로운 가시밭길을 걸어갈 것인 가' 하는 갈림길에 서게 된다. 그 때에, '하나 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기로에서, 우리 대부분은 불확실한 미래와 집단으로부터의 이탈 이 두렵기 때문에 전자를 선택하게 된다. 불멸의 영혼을 꿈꾸다가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처럼 무모한 선택을 하기 쉽지 않다.
 
그런 우리 평범한 인간의 나약함 내지 현명함(?)을 보면서 인어공주는, 아마도 안데르센은 말하고 싶었을런지 모른다. 사랑을 희생하고 오랜 세월을 안락하게 살다가 물거품이 되든 사랑을 위해 그 즉시 물거품이 되든 뭐가 다른 가? 결국 물거품 인생인 것은 마찬가지 아닌가?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숙명이라면, 자신의 꿈을 향해, 자신이 진심으로 사랑하는 대상 을 위해, 물거품이 될 위험성을 무릅쓰고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한 순간이라도 열정적으로 사는 삶이 더 낫지 않은가?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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