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저너머에p937_과정신학_화이트헤드와 존캅의 과정신학
화이트헤드와 존캅의 과정신학
자료출처: http://blog.naver.com/shincdhmch/130012353063
과정신학에 관한 일반적 考察 : 화이트헤드와 존캅을 중심으로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생성과 변화 속의 하나님’,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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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지금 올리고 있는 이 과정신학의 차원으로 바라보는 현대신앙의 흐름은
무엇이 문제일까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한꺼번에 무너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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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면서 :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길 걷다보면 가끔은 환하게 웃기도 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인생길 걷다보면 가끔은 쓸쓸히 눈물도 짓는다오
하나님 우리가 웃을때에 우리와 함께 웃으시고
하나님 우리가 눈물지을때 눈물을
오늘도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는 하나님
당신의 참사랑을 감사해요]
언젠가 작곡을 하면서 쓴 노랫말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고백하는가? 그는 어떤 하나님이시며 어디에 계시는가?등등 우리는 수없이 많은 질문들을 던지면서 살아간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이 나에게 눈물을 주시기에 하나님을 고백한다.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우리네 생의 처음을 우리는 눈물로서 이세상에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또 생의 끝을 타인으로 하여금 눈물 흘리게끔 하기에 인간은 눈물의 존재이다. 그 눈물을 가지고 신학을 하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눈물을 외면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네 인생이 지치고 힘겨울때면 하나님은 방관만하시고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스리시느라 분주하시기에 그래서 너무나 바쁜 나머지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분은 우리의 눈물 한방울 한방울속에 함께 계시고 우리의 웃는 웃음의 한 미소마다 하나님은 함께 계신다. 그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필자는 하나님을 믿는다.
전통적으로 신학은 하나님을 규정하기를 ‘우주적 도덕가로서의 신, 불변하며 무감각한 절대자로서의 신, 통제적 힘으로서의 신, 현상의 묵인자로서의 신, 남성으로서의 신으로 규정하였다. 이러한 묘사로서의 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로서의 의미를 가진다. 다시 말해서 ‘신’은 우리에게 그의 영향을 주지만 신 그 자신은 그 이외의 다른 어떤 무엇에 의해서도 영향을 받지 않는 부동의 원동자의 모습으로 있는 것이다. 이런 모습으로 하나님은 이 세계밖에 항상 존재하는 그래서 결코 이 세계에 관여하지 않는 권위주의적인 무서운 하나님, 추상적, 관념적 하나님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관계성 속에 계시다면 그 하나님은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참으로 살아계신 하나님, 즉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면서 우리가 눈물 흘릴때 함께 흘리시고 우리가 웃을때 함께 웃으시는 감정을 가시신 하나님이며 또한 그 고통과 부조화를 극복해 나가시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인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전통적 유신론의 세가지 계통의 사상들 ‘신격화된 시저’(절대군주적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하나님, ‘히브리의 예언자’(도덕적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아리스토 텔레스’(부동의 원동자로서의 하나님)을 비판한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과 그리고 그의 철학을 발전시켜 과정 신학을 형성시킨 존 캅의 신학 체계와 과정철학의 전개과정을 소개하고자 한다.
2. 글의 한가운데서 : 생성과 변화속의 하나님
한 처음에 始原의 물방울이 대지에 떨어져서 두방향으로 흘렀으니 그 하나는 ‘참으로 있는것은 존재 뿐이다’라고 하는 파르메니데스적 ‘존재(being)’철학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만물유전’(All things flow)이라고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becoming)'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환언해서 나아가면 전통적 신학 특히 서구의 신학이 파르메니테스적 ‘존재철학’과 plato적인 정적 존재개념에 근거한 관념적이며 이원론적인 사고에 치중된 신학이었다면 과정신학은 보다 동적인 실재론과 구체적이고 일원론적인 사고에 더 비중을 둔 신학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헤라클레이토스에 기원을 둔다고 하겠다. 그런면에서 과정신학은 희랍철학이기 보다는 오히려 히브리 종교적이며 한편으로는 동양적 사고에 가까운 통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대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1차 세계대전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토대가 된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무너뜨렸으며 죽음앞에선 인간실존의 허망함을 느끼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 정통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한편 다윈(Darwin)dml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Einstein)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이런 과학적 세계관이 또 다른 신학적 흐름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는데 그것이 화이트헤드(Whitehead)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신학과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의 진화론에 기초한 신학이 그것이다.
2.1 화이트헤드(ALFRED North Whitehead)의 과정철학
신학자들이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몇가지 호의적 평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그의 철학은 현대의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에 부합되는 철학으로 평가되었다. 변화와 생성, 상호관계성을 특히 강조하는 화이트헤드의 패러다임을 현대과학의 패러다임에 접근했다고 하는 평가는 신학자들로 하여금 화이트 헤드의 사상에 대한 관심을 높게 하기에 충분했다. 둘째, 20세기 실존주의의 부흥과 함께 표출된 인간실존의 탐구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화이트헤드에게서 유럽의 실존주의보다 더 풍요롭고 더 적합한 실존주의를 발견해 내었다. 유럽의 실존주의가 주로 인간의 실존을 중시했다면 과정적 실존주의는 인간과 더불어 전체 세계와 신을 포괄하는 실존주의라고 볼 수있다. 셋째, 서양과 동양사상의 융합의 가능성을 과정신학작들은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발견하였다. 넷째, 하트숀은 과정철학의 신관을 최선의 철학적 신관과 기독교의 사랑의 신관과의 결합으로 보았다.
2.01 화이트헤드의 유기체 철학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유기체 철학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그의 철학 3기인 1924-1936년 미국 하바드대학에서 있을때의 그의 사상이론이다. 화이트헤드 자신은 과정철학이란 말 대신에 유기체의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이란 말을 사용하기를 더 좋아했던 것 같다. 존재의 전통철학은 궁극적존재를 자기 충족적 원인(self sufficient cause)이라 한것에 화이트헤드는 반대하면서 어떤 궁극적 존재도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고 모든 경험되어지는 구체적인 존재들과 유기적 관계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plato의 idea든 칸트의 물자체(Ding an sich)이든 화이트헤드는 이 모든 것이 경험사례에 불과하며 초월적 존재는 위에(above)따로 존재할 수가 없고 돌, 나무 같은 유기체이든 모든 존재와 유기적으로 연대(total interrelated)되어져 있을 수 밖에 없다.
2.02 과정철학에서 기본 개념들
2.021 과정(process)
과정사상을 정의내린다면 과정이 근본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것이 과정안에 있다는 주장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물들이 과정안에 있다는 사실까지도 변화에 종속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현실적인 것은 과정적이다. 현실세계는 과정이며 과정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을 핵으로 한다. 현실적 존재의 생상이라는 개념은 데카르트의 cogito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비판에서 탄생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나는 존재한다’라고 언표할때마다 자아인 현실적 존재는 달라진다.
2.022 현실적 존재(actual entity), 전이(transion), 합생(concrescence)
현실적 존재는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참으로 구체적이고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실재를 말한다. 현실적 존재는 복잡하고도 상호의존적인 경험의 방울들(complex and interdependent drops of experience)로 특징지워진다. 방울이라는 말은 현실적 존재의 다원론적 상호초월성내지 게체적 절대성(individual relativity)을 ‘상호의존적’이라는 말은 상호 내재성 내지 ‘개체적 상대성(individual relativity)을 함축한다. 라이프니츠는 그의 단자론(monadology)에서 데카르트의 이원론 극복하고자 했다. 화이트헤드는 이 라이프니츠으 단자론을 변하시켜서 그것이 닫혀진 단자의 모습이 아닌 열려진 그래서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모습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 actual entity는 시간적 과정에서 한 현실적 존재에서 다른 현실적 존재로의 전이(transition)를 순간순간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 자신의 순간적인 되어짐(becoming)의 과정들이다. 외부적이고 시간적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더 깊은 단계에서 보면 그들은 불변하는 작은 조각을 통하여 지속되는 사물들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되어져 가는 시간의 작은 조각을 받아들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을 화이트 헤드는 합생(concrescence)이라고 부른다. 한편으로 전이는 시간의 중요성을 성립시킨다. 한계기적 사건은 다른 계기적 사건을 계승한다. 과거는 이미 일어났던 사건들로 구성된다. 미래는 사건을 내포하지 않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현재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사건을 말한다. 시간은 불균형적으로 과거로 부터 현재를 통하여 미래로 흐른다. 다른한편 영원한 현재(eternal now)의 경험이 또한 이해되어진다. 합생자체의 과정속에서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정적인 현실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전이의 연속성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순간은 하나의 현재이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무시간적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현실태로서의 현실적 존재는 정신성과 물질성이라는 이원론적 도식에 선행하는 근본적인 존재이다. 그것은 중성적 일원론(neutral monism)의 기초가 되는 개념이라 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는 이를 정신적 극(mental pole)과 물리적 극(physical pole)이라 이름한다. 그러기에 현실적 존재는 구체적인 동시에 객체적이며 능동적 지각작용과 수동적 소재의 역할을 함께 한다.
2.023 영원적 객체(eternal object)
화이트헤드는 현실세계를 현실적 존재들이 합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한편 이와 대비되는 궁극적 실재로서 영원적 객체와 신을 제시했다.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의 순수가능태라면 현실적 존재는 영원한 대상의 현실태이다. 영원한 대상은 사실의 특수한 결정을 위한 순수가능태(pure potentials)이며 현실적 존재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한정의 형식’(Form of definition)이다. 영원한 대상의 기능은 현실적 존재속으로 진입(ingression)하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대상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그것의 가능태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햇다. 마치 초록색 공이나 초록색 깃발이 감각대상이라고 한다면 초록색은 영원한 대상이다. 이 초록색은 현실재 즉(공, 깃발)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영원한 대상은 두 본성을 가지는데 개체성과 관계적 본질(relational essence)이 그것이다. 전자는 영원한 대상의 개별적인 본성이며 존재자체외의 다른 것으로 기술될 수 없다. 후자는 영원한 대상이 다른 영원한 대상과 분리될 수 없을 정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관계적 본질은 어떻게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결정한다. 맹목적 현실태와 단순한 가능태의 무시간적 영역사이의 매개자로 나타난 것이 신이다.
2.024 양극적 신
2.0241 신 개념
화이트헤드는 초월적 유신론을 형성하는 세가지 계통의 사상들을 ‘신결화된 시저’(절대군주적 황제의 이미지로서의 하나님), ‘히브리의 예언자’(도덕적 심판자로서의 하나님),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부동의 원동자(unmoved Mover))로 들고 이들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갈릴리인(예수그리스도)에 의한 기독교의 기원에는 이 세 주요 사상계통의 그 어느 것과도 잘 들어 맞지 않는 또 다른 시사점이 있다. 그것은 통치하는 시저나 무자비한 도덕주의자, 또는 부동의 동자를 강조하지 않는다. 그것은 서서히 고요함 속에서 사랑에 의해 작용하는 세계 내의 부드러운 요소들을 강조한다. 그것은 또 이 세계가 아닌 왕국의 현재적 직접성 속에서 목적을 발견하고 있다. 사랑은 통치하지 않으며 또 부동의 것도 아니다. 또 사랑은 도덕에 대하여 별로 주의하지 않는 편이다. 그것은 미래에 눈을 돌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직접적 현재에서 그 보답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2.0242 신의 본성
신은 양극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 존재가 물극과 심극을 가지고 있듯이 신 역시 개념적이며 물리적인 양극성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를 원초적 본성(primordial nature)이라 부르고 후자를 결과적 본성(consequence nature)이라 불렀다. 세계의 가능성을 포용하고 자아 생성의 첫 출발점을 창조하며 자유롭고 완전하며 원초적이고 영원하지만 현실성을 결하고 있고 또 무의식적이고 개념적인 신의 본성을 원초적 본성이라 한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의 역할을 가능성의 구체화이다. 다니엘 윌리암의 설명에 따르면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에 대하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행동이다. 그가 존재한는 것, 바로 그자체가 그의 행동이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대상들을 통한 간접적인 관계만을 가진다. 결과적 본성은 이 소멸하는 개체들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사랑의 완성을 말한다. 이 본성은 결정되어 있고 불완전하며 결과적이고 지속적이지만 완벽하게 현실적이며 의식적이다. 결과적 본성은 ㄱ. 신의 물극이며 현실적 존재에 대한 신의 물리적 파악으로 부터 생겨난다. 결과적 본성에서 신은 세계와 직접적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ㄴ. 개념에 비해 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ㄷ. 신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ㄹ. 신의 무한한 인내심이다. 이것은 세계를 구원하려는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이런면을 진리, 미, 신에 관한 그의 비견에 의해 세계를 주도하는 부드러운 인내심을 가진 세계의 시인으로 표현했다. ㅁ. 현실적인 신을 의미한다. 현실태의 다양한 자유를 신 자신의 현실화의 조화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신의 경험을 성취하는 것이다. ㅂ. 영속적(everlasting)이다. 결과적 본성은 시간과 같이 창조적인 전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속적이다. 현실적 존재이나 생성하고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현실 존재들을 파악하고 수렴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뿐만아니라 세계에서 소멸되던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신의 본성속에 수용됨으로써 역시 영속적인 것이 된다. 요약하면 결과적 본성은 파생적 본성으로 유한하며 불완전하고 결과적이며 영속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면서 의식적인 것이 특징이다. 신의 존재는 양극적이다. 두 본성을 가진다해서 이중성(duality)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한 현실적 존재의 두 측면이다. 신은 통일체이며 그 어떤 측면도 다른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원초적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 그의 철학적 신관이 나오고 결과적 본성에서는 그의 종교적 신관이 전개된다. 이 두 본성은 화이트헤드가 이해한 신이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이며 영원한 동시에 시간적이며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임을 말해준다.
2.03 과정 철학의 전개과정
1930년 들어와서 화이트헤드사상은 시카고 대학을 중심하여 크게 형성되었는데 1940년에 들어오면서 그의 사상에 대한 상반되는 평가가 제기되었다. 하나는 그의 신이 철학적 신이냐 혹은 종교적인 신이냐 하는 논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엘리(Stephen Ely)는 1942년 ‘화이트헤드의 신의 종교적 적합성’(The Religious Availability of whitehead's God)을 출판하면서 화이트헤드의 신은 인간에게 선을 제공하고 기쁨과 만족을 주는 신이 아니고 자기 혼자 선을 추구하고 혼자 자족하는 신이기 때문에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신이라 혹평했다. 이 견해에 대해 화이트헤드의 제자들중 얼리의 책에 대해 반격을 한 사람은 버나드 루머(bernard loomer)교수였다. 그는 화이트헤드의 신은 그 안에 ‘비극적 평화’일지라도 그 안에 비극(TRAGEDY)을 포함하고 계신분이다고 하면서 결코 화이트헤드의 신이 자기 기쁨의 만족만 추구하는 신이 아님을 지적한다. 멜러트 또한 이런 입장이다.
1950년 들어서면서 과정신학의 동향이 두 흐름으로 나뉘어진다. 그 한 흐름은 경험주의적 조류와 합리주의적 조류로 구분해서 발전되어 왔다.
2.031 경험주의적 조류
원초적인 경험, 즉 주체와 세계, 마음과 몸이 분리되기 이전에 경험에 대한 강조는 에드어즈, 제임스, 듀이등을 통하여 발전되어 왔다. 에드워드가 ‘가슴의 감각’이라고 불렀던 신앙적인 확신, 열정, 회심의 경험, 제임스가 ‘더 넓은 자아’라고 불렀던 인간의 경험의 심층에 있는 종교적 경험, 그리고 듀이가 ‘신비적 직관’이라 불렀던 ‘전체’라는 질(quality)의 경험으로서의 미적, 종교적 경험은 미국적인 경험주의의 깊은 유산들이다. 이 경험주의 입장의 한 사람인 루머는 신의 전능성과 선하심을 비판하면서 선하신 신은 악이 없는 세상을 원할 것이며 전능하신 신은 악을 없앨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 경험주의적 과정 신학은 합리적인 사유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세계와 신과의 직접적인 경험을 탐구하기 위해 종교언어와 상징들에 대해서 관심을 표현했으며 종교적 상징에 의해 인간의 참다운 삶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고 보았다. 이 흐름은 영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 가면서 공동체의 연대성을 강조했다. 이 흐름에도 함정이 있는데 참 신과 우상의 구분이 쉽게 되지 않는 모호성, 지나친 예전화, 내면성에만 흐르는 신앙적 태도등이 그 약점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런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합리화된 종교적 세계관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2.032 합리주의적 조류
화이트헤드에 의하면 합리화된 종교적 세계관이란 가장 예민한 종교적 체험을 가진 사람의 그 체험이 그를 따르는 사람들을 통하여 보편화 되어 전인류의 공동자산이 될때 나타나게 된다고 보았다.
2.0321 하트숀(Charles Hartshorn)
대표학자는 하트숀을 들수 있는데 그는 그의 책 ‘Man's vision of God’(1941)에서 고전적 유신론(CLASSICAL THEISM), 무신론(atheistic view)을 나누고 자기의 신관은 신고전적 유신론(New theism)이라 했다.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으며 세계에 필요한 존재이나 그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신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관적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트숀은 이것을 만유재신론 또는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 불렀다. 종교에 대한 하트숀의 정의를 보면 ‘사랑의 최대 가치로서의 존재를 위한 봉헌적 사랑’(devoted love for a being regard as superlatively worthy of love)으로 규정했던 하트숀은 자신의 새로운 유신론의 신관이야 말로 논리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사랑’을 보다 완벽히 행사할 수 있는 신을 말할 수 있다고 보는데 신은 사랑이다라는 개념이 고전 신학에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논리적 체계의 모순성으로 인해 결국 사랑을 불철저하게 행사하는 신관만을 주장했다고 보면서 자신의 신관은 고전 유신론보다 논리적으로 완성된 신고전적 유신론으로 보는 것이다.
2.0322 옥덴(Schubert ogden)
하트숀의 화이트헤드 철학 해석에 영향을 받아 과정신학의 제 3세대를 형성시킨 청년학자들은 1950년 초반기의 옥덴, 캅(John B, cobb, jr)등이다. 옥덴의 신학에는 두가지 주요 원천이 있다. 하나는 불트만 및 하이데거의 실존주의 철학이요, 다른 하나는 하트숀및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이다. 그는 그의 논문 (Bultman's Demythologizing and hartshorne's Dipolar Theism)에서 그는 불트만의 입장, 즉 신학은 인간 실존의 자기 이해를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입장을 받아들여 신은 생생하게 경험되어져야 한다고 했다. 이에 대한 대답을 하트숀의 사상에 기초해서 해결책을 제시했다. 옥덴의 기독론은 우리의 실존의 궁극적인 의미를 묻는 우리를 위한(pro nobis)기독론이다. 우리를 위한 기독론은 예수에 대한 가장 최초의 전승층, 즉 사도들의 원 증언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기독교의 본래적 증언과 일치되는 기독론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원리 전승층에 의하면 예수의 개인적인 신앙과 사랑의 완전성이 예수를 그리스도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우리를 위해 신앙의 가능성을 결정적으로 재표현 했기 때문에 그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밝혀 준다고 말한다. 그래서 구원의 가능성은 하나님의 원초적 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안에서만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개신교 신학자들이 신약 성경의 신앙은 그리스도중심적이라고 말하는 것을 신약성서에 대한 심각한 오해로 간주했다. 그래서 그리스도중심의 규범적 기독론이 아닌 신 중심의 비규범적 기독론을 제시했다.
2.2 캅(John B, cobb, jr)의 신학
위의 옥덴의 주장에 대해 견해를 달리하는 학자는 존캅이다. 캅은 역사 상대주의와 신죽음의 신학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캅은 옥덴의 모든 실존 속에 있을 수 있는 신 존재의 가능성을 중립(neutral)이라 한데 대해 반대하고[Living option in protestant theology)에서 중립이란 있을 수 없고 기독교 신앙은 그 신앙안에 주어지지 않은 실재의 본성에 관한 어떠한 예관도 할 수 없다고 했다. 1967년 출판한 캅 교수의 ‘기독교적 존재구조’(The structure of christian Existence), 한국어로 ‘존재구조의 비교연구’로 1981년도 번역에서 존재론적 심리분석 방법을 적용시킨 캅은 인간존재의 구조의 발전을 원시시대(primitive Age), 문명시대(civilized Age), 차축시대(Axial Age), 그리고 기독교적 시대(christian Age)로 나누고 기독교적 존재구조는 원시시대의 존재구조 속에 있는 신화, 주술, 기적을 포함하면서 동시에 차축시대의 존재구조속에 있는 정의, 사랑, 합리성같은 것도 동시에 함축하고 있는 존재구조라 분석하면서 특히 기독교적 존재구조의 특징을 ‘정신’(Spirit)이란 말로 정의하였다. ‘정신’이란 사랑안에 표현되는 영적 존재로 자기가 형성하는 행위에 대해 책임적인 ‘나’(I)를 강하게 느끼는 동시에 ‘나안에 머물지 않고 나 자체마저 초월하는 자아’라고 한다. 이 정신이란 말에서 캅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성(FINALITY)과 기독교적 존재구조의 특수성(UNIQUENESS)를 찾고 있다. 캅에 있어서 하나님은 설들적 사랑의 하나님이신데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설득해 나가는데 이 설들적 사랑의 전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보는데 인간의 결정, 역사의 방향에 따라 영향을 받는 존재로 이해한다. 모든 것은 다 할 수 있고 또 다 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만물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관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로 영향을 끼치며 맺게 되는 관계성, 모든 현실체의 특징인 양극성, 그리고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를 창조성(CREATIVITY)이라고 이해했다. 이 창조성의 가장 뛰어난 예로서 신을 이해했다. 과정신학과 캅은 이 창조성을 신성(GODHOOD)으로 신을 야훼(GOD)-구약에 나타나는 인격적 하나님-으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고 말했다.
2.21 캅에 있어서 인간 실존
과정신학자들 역시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영향을 받아 그들 역시 인간의 주체를 하나의 대상으로 취급하는 것을 피하려는 것과 그리고 인간 주체들에 대해 적당한 범주를 사용하는 것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믿었다. 실존사상의 중심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이론이다. 첫째, 우리가 인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나 사회에 의해서나 혹은 우리의 개인적인 과거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실존하는 행위 속에서 결정한다.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는 미리 수립된 규칙이란 없고 미래란 근본적으로 열려 있고 그 미래에 대해 우리는 책임을 지는 것이다. 둘째, 우리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이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피투적 존재’인 것으로 경험했다. 셋째, 세계 내 존재(in -der- welt-sein)이다. 세계로 부터 분리된 자아는 없으며 또한 자아로 부터 분리된 세계도 존재하지 않으며 다만 세계 내 존재의 한 실재만이 존재한다.(the one reality of being-in-the-world)이다. 넷째, 과정신학자와 실존주의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하이데거는 인간의 실존이나 혹은 현존재(Dasein)를 ‘죽음을 향해가고 있는 존재’(being- toward-death)로 묘사한다. 즉 인간실존에 대한 견해를 태어나서 죽는 날 까지 하나의 단일한 실재라는 것이다. 반면에 화이트헤드는 인간실존을 순간들의 연속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소멸해 간다’(perpetually perishing) 다섯째, 위의 차이를 환언해서 나가면 하이데거는 사람들 사이의 진정한 내적 관계가 존재할 수 없는 오직 세계를 공유하는 존재(Mit sein)로만 나타낸다. 이에 반해 화이트헤드는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며 그리고 그 공동체 안에서의 상대적 독립이 수립된다고 주장한다. 출생에서 죽음까지를 고립된 자기-동일성(self-identity)으로 보는 견해는 환영이다. 여섯째, 미래는 화이데거와 불트만에게 열려 있지만 새로움(Novum), 즉 질적으로 새로운 것에 대한 안목이 부족하다. 반면에 화이트헤드에 있어서 창조적인 새로남(creative novelty)은 한 존재가 열려 있는 미래의 본질이며 그리고 미래는 이러한 개방성을 지니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인간의 결정들이 미리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이 기대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이트헤드주의 자는 에른슨트불로흐(Ernst Bloch)에게는 가까운 하나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다. 일곱째, 과거에 대한 느낌에도 차이가 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데는 공통점이 있으나 화이트헤드에게서는 새로운 가능성이란 새로운 방법으로 과거를 통합하는 기회이다. 과거로부터 나온 요소들의 합성에 의해 구성되지 않는 순간이란 없다. 여덟째, 인간의 역사성에 대한 대조적인 관점들이 있다. 불트만은 인간 실존의 의미사적(geschichtlich)인 의미에서 역사적임을 강조한다. 이것은 사실사적(historich)이지는 아니하다. 그 결과 불투만은 그리스도 사건이 다만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행위라는 견해를 도입함으로서 인간 실존의 상황을 변하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저서는 인간실존을 정신사적으로 언급되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그에게 있어서 인간존재란 인류 이전의 동물적인 형식들의 존재로 부터 나온 여러 단계들을 통하여 출현됐다는 것은 분명하다. 화이트헤드는 동물적인 배경으로부터의 인간의 출현은 신행, 언어, 종교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되고 있다. 이것을 통해 돔물과 인간의 연속성 속의 불연속성의 역사를 추적하였다. 이러한 관찰로부터 네가지 점이 주목되어질 수 있다. 첫째, 역사란 제국들이나 혹은 다른 외부적인 사건들의 흥망성쇠보다는 주관적인 실존의 양식들의 역사로서 설명되는 것이 가장 근본적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둘째, 실존의 역사는 종교의 역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셋째, 사건들의 진행과정은 계속적이고 이해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자연적이란 것이다. 넷째, 사건들의 전행과정은 발전의 같은 단계에서 다양한 형식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2.22 인간 실존의 구조들
화이트 헤드는 진화론적인 철학이 생리학적인 변화뿐만 아니라 인간의 주관성의 발전도 추적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동물의 출현인데 동물적 경험은 의식을 세계안으로 도입시켰다. 의식의 역할이 중대함에 따라서 그것은 그것으로부터 정신적 삶(psychic life)의 여타 부분들이 이해 되는 중심이 된다. 이것은 상상의 삶을 훈련시키는데 이러한 상상의 삶을 훈련은 합리성이며 합리적인 의식의 상승과 그리고 그것과 일치하는 내면적 삶의 재정돈은 새로운 출발이 되었다.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합리적 종교(rational religion)의 출현이라고 불렀다. 칼 야스터스는 그것을 축을 이루는 혁명(axial revolution)즉 차축시대라 하였다. 캅은 이 정신적 삶의 발전을 ‘타락’으로 표현한다. 고타마(Gautama)는 한사람의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는 그 사람을 과거와 미래에 속박시킨다. 특정한 과거와 미래가 실지 자기자신의 것이라는 견해는 그들을 통하여 지속하는 한 자아가 있음을 암시한다. 사실은 경험들의 연속의 주체인 자기 확인적인 자아(Self-identical self)란 없는 것이다. 시간을 통한 동일성이란 그것에 관해서 신념들이 향유되는 주어진 실재는 아닌 것이다. 그것은 다만 믿어짐속에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동일성을 위한 형이상학적 근거는 없는 것이다. 실재란 신체적 기반(substantial ground)이 없는 사건들의 한 흐름인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자아에대한 상이 없었다. 이러한 합리화는 세계를 창조했고 그의 백성의 복종을 요구했던 저 위대한 ‘나’로서의 하나님 사상으로 인도되었다. 의식의 발달로 인격적존재로서의 인간은 책임지는 ‘이성적 의지’(rational will)가 되었다. 이성적 의지의 일차적 통제영역은 외부적 행위이다. 윤리적인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으로 그들의 감정을 통제할 수 없다. 그래서 타인에 대한 행동이 사랑의 동기를 나타내게 되었다. 기독교는 실존의 궁극적인 중심과 이성적 의지와의 동일시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자아는 감정과 이성으로 뿐만 아니라 의지로 부터 그 자신을 구분함으로써만 존재하며 그리고 이것은 경험의 모든 차원들에 대한 책임감을 내포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아는 영성(spirit)이라고 불릴 수 있다. 이것은 영성적 실존의 구조를 이루는데 그것은 영어로 ‘참된것(authentic)'과 ‘참되지 않는 것(inauthentic)으로 번역되는 이 용어들은 사람의 자기자신의 고유한 목적들에 기초하여 혹은 그 사람을 위해서 다른 사람들에 희해 수립된 목적들에 기초하여 각각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 두 양식들이란 사랑과 자기집중이다. 영성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에게 메몰되지 않게 하고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에 대한 개방에 나아가도록 해준다.
2.23 기독론
하나님에 관해 언급되어진 것은 두가지 방법에서 이미 기독교적이다라고 할 수 있다. 첫째, 화이트헤드가 인정했던 바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이해는예수의 통찰들과 그의 삶으로부터 얻어진 것이다. 둘째,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은 그것이 화육적인 한에서 그리스도‘이다’. 존캅의 기독론은 로고스 기독론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존캅에 있어서 ‘그리스도는 로고스의 성육신, 또는 성육된 로고스이다. 이 로고스는 불변의 하나님이라는 희랍 사상의 틀 속에서 이해된 교부들의 ’로고스‘와 적적으로 다르다. 캅은 로고스를 화이트헤드가 말한바 신의 원초적 본성으로 이해한다. 이 로고스의 내재를 최초의 목표, 시원적 목적(initial aim)이라 부른다. 성육된 로고스는 새로움의 원리(principle of novelty)창조적 변화(creative transformation)부른다. 그리스도는 결코 지금껏 관습적으로 이해되는 것가 같이 종교적인’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는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창조적 변화를 믿으며 그것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신뢰하며 그리고 그것에 그들 자신을 개방하는 곳에서 가장 충만히 현존할 수 있으며 또한 효력을 발휘 할 수 있다. 이것은 로고스의 효과적 현존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인식되어질때 일어날 것 같다. 캅에 의하면 창조적 변화의 힘은 초월적 측면과 내재적 측면 두가지를 가지고 있다. 창조적 변화의 힘은 항상 개개의 피조물 속에 성육하며 그들 각각의 특정한 창조적 변형을 위한 특정한 힘이 된다. 여기에 내재적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힘은 어떤 특정한 피조물들에게 한정되어 역사하지 않는다. 그것은 모든 때의 모든 경우들과 관계한다. 따라서 그것은 무시간적이고 무한하며 그런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캅은 초월적 측면에서의 창조적 변화의 힘을 ‘로고스’라 부르고 내재적 측면에서의 창조적 변화의 힘을 ‘그리스도’라 부른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성육된 로고스‘ 곧 내재적 로고스이다. 캅에 있어서 창조적 변화의 힘은 삼위일체론적 언어로는 ’성자‘(son)와 동일시된다. 캅은 성자와 창조적 변형의 원리와 신의 원초적 본성 셋을 동일시 하고 있다. 반면에 성령을 궈결적 본성으로 이해되고 있으며, 이것은 또한 천국상징이 가리키는 실재와 동일하다고 보고 있다. 한편 성부는 원초적 본성의 성자와 귀결적 본성의 성령이 통일된 면에 있어서의 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여기서 캅은 어떤 방법으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저 가장 근본적인 기독론적 명제를 논증하는가? 또 캅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하는 기독론적 주장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캅에 의하면 로고스의 다양한 역할들, 즉 다양한 시원적 목적들과 그에 대한 인간 편에서의 여하한 응답에 따라 여러 존재 구조들(structure of existence)이 생긴다고 주장한다. 그 중하나가 로고스의 현존이 자아의 구성에 참여하게 되고 그 자아는 매 순간 자신의 과거와의 연속성에 의해서 자기를 구성하는 것 못지 않게 ’로고스의 부름과 현존‘에 대한 응답에 의해서 자기를 구성하게 되는데 이러한 존재구조는 가장 충만한 의미에서 로고스의 성육신이 된다. 이러한 존재구조가 하나의 가능성에 머물지 않고 예수에게서 현실화 되었으며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이 캅의 주장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이 환언될 수 있다. 예수에게서 구현된 저 독특한 존재 구조는 첫째로 하나님이 예수에게 독특한 시원적 목적(initial aim)을 부여한 것과 둘째로 예수가 이상적으로 그것을 수용한 것으로 설명되고 있다. 이것을 다시 환언해서 설명하면 하나님의 시원적 목적을 부여 했지만 예수의 자유로운 응답이 없이는 성취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약 예수가 그것을 거부했다면 그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캅은 예수에게서 구현된 존재구조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구현될 수 없다라고 한다. 그것은 예수에게서만 독특하다는 것이다. 캅은 ’하나님이 예수에게 부여하신 저 특별한 목적 내지 가능성을 우리 모두에게로 또한 부여해 주신다는 증거가 없다. 예수는 온전히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소명받은 존재의 내용과 내(캅)가 소명받은 존재의 내용이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캅은 예수가 구현한 구조는 이 세상에서는 예수만이 구현하였지만 천국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구현할 수 있고 또 마땅히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기독교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 의 삶으로 이해했으며 그리고 이것은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발생된 능력이 영역안에서의 삶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었다. 캅의 힘의 영역(a field of force)란 개념을 상용해서 힘의 영역안에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 영역을 발생시키는 사건에 순응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예수께 순응한다는 것이다. 예수가 자신을 창조적인 변화에 개방하였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것은 그러한 개방성을 공유하는 일이다. 이것은 시원적 목적 보다는 응답에 초점이 있다고 하겠다. 캅이 보여주는 예수그리스도느 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미를 밝혀 주는 분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위한 또는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의 올바른 자세를 밝혀 주는 분이다. 캅은 그리스도를 세가지 측면에서 보는데 첫째는 영원한 현재 속에 현존하는 영원한 로고스로의 그리스도이다. 둘째는 나사렛 예수로서의 그리스도, 셋째는 미래에 대한 희망의 이미지로서의 그리스도이다. 이것에 해당하느 구체적 모습을 살펴보면 첫째로 상상력으로서의 이성, 둘째로 닮음(conformation)의 형식이고 셋째는 ‘희망’의 형식을 취하게 된다. 캅에 이 세번째 희망의 중심적 이미지를 보조할 것으로 다음 네개의 희망의 이미지를 제시한다. 첫째, 생태학적 위기에 응답하는 희망의 이미지는 파올로 솔레리의 ‘건축-생태학적(arcological)도시에 대한 비젼. 둘째, 사랑의 완전의 이미지이다. 세번째는 천국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귀결적 본성이다. 네번째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2.24 캅의 기독론에 대한 문제제기
첫째. 캅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와 용납으로서의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인가?캅의 그리스도는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의 구속사적 사랑의 계시자가 되지 못하고 다만 어떤 방법으론가 계시된 그 구속적 사랑에 어떻게 이상적으로 응답할 것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 주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닮게 하는 역할을 하는데 불과하게 된다. 그러면 예수의 죽으심의 의미는 무엇인가?
둘째, 캅은 예수 보다는 예수 자신의 존재가 어떠 했는가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이 있으며 이런 면에서 캅의 기독론적 진술의 주어는 ‘실존적-역사적예수’(existential historical JESUS)가 아니라 경험적-역사적 예수(EMPIRICAL-historical Jesus)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구원은 예수의 존재구조에 참여하는 것, 그리스도화 하는 것인데 우리는 항상 예수의 존재구조에 동참하기 전까지는 누구든지 구원과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이다.
셋째, 로고스는 이 세상어디에난 편만해 있는데 거기에 전적으로 응답한 사람이 예수이기에 예수는 그리스도라 칭함을 받는다고 한다면 제 2의 예수가 또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캅은 예수의 unique한 모습을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의문의 여지는 많다는 것이다.
3. 글을 끝맺으면서: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을 사모하는자 하나님의 평안을 바라보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하나님께 찬양과 경배하는자 하나님의 선하심을 닮아가는자
너의 모든것 창조하신 우리 주님이 너를 자녀 삼으셨네.
하나님 사랑의 눈으로 너를 어느때나 바라보시고
하나님 인자한 귀로서 언제나 너에게 기울이시니
어두움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고 너의 작음 신음에도 응답하시니
너는 어느곳에 있든지 주를향하고 주만 바라볼찌라]
‘주만 바라볼찌라.’ 복음 성가 중에 이런 제목의 곡이 있다. 요즈음 한창 필자의 입에서 불리어지는 찬양이다. 이 찬양을 좋아 하는 이유는 적어도 이 세상으로 부터 절대적으로 독립되어서 홀로 군주의 모습으로 계시는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개념은 여기서는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를 사랑의 아들로 부르시는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아버지로 계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어두움에 거할 때에 밝은 빛을 비쳐 주시는 분이시고 그리고 누구든지 그 어떤 고민으로 -그것이 아무리 사소할 지라고- 신음할지라도 그 고통을 함께 나누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신것이다.
과정신학은 기독교 신앙과 현대과학 사상을 중재하고 종합하려고 한 시대적 산물이다. 진화, 상대성, 유기체, 창조성등 자연과학적 개념들을 신학에 도입하여 기독교 신앙을 현대 지성인이 수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재해석 한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사상적 체계내에서 기독교신앙을 해석하려 한 과정신학은 많은 난점과 문제가 있다.
첫째, 우선 철학과 신학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다. 틸리히는 신학은 신앙에 대한 실존적인 참여를 통해서만 가능한 학문이라고 말했다. 과정철학을 신학적으로 응용한다면 기독교신앙에 대한 실존적 참여를 전제하고 그 과제를 수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 주체의 체험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와 성서의 규범성의 인정의 문제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체의 종교적 체험의 규범이 되어야 함을 예수에게 있어서 신의 ‘초기의 주체적 목표’가 독특하다는 캅의 초기 견해와 여기에 동조하는 그리핀의 견해는 다원주의의 문제에 봉착하면서 과정신학자들간에 상대화 되어가는 추세를엿볼 수 있다. 또한 성서의 저자들과 그 공동체의 주체적 체허밍 다른 모든 인간들의 주체적 체험의 규범성으로 과정신학의 구조 안에 받아들여 질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한 문제이다.
현대신학의 신론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문제는 우리의 모든 존재의 무조건적 근원이신 하나님의 절대성과 이 세상의 역사의 인도자요 대화적인 동반자요 구속자이신 하나님의 상관적인 행위와 역동적인 관계성을 어떻게 성서에 증언된 삼위일체 상징의 본래의 변증법적인 의미를 회복하여 현대의 관계적, 과정적, 역동적인 존재론의 지평 속에서 인간의 자율성을 파괴하지 않는 방식으로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잘 조화 시키고 연결시키느냐 하는 것이다. 첫째,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세상과 인간 실존과의 관계성안에 계신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관계론적 개념이며 사랑의 힘은 관계능력이다. 둘째,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창조자요 모태로서 소멸하는 과거로부터 우리의 현실을 구성하는 새로운 현재에로의 운동의 무조건적(unconditioned, 조건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과정적 존재에 대한 소멸하지 않는 무조건적인 근거이며 동시에 시간적 존재의 운동과 창조적인 관계성안에 계신다. 셋째, 하나님은 또한 현재의 우리의 자유의 근원이다. 자유는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지며 오직 하나님에 대한 의존적인 관계성 안에서만 현실화 되어진다. 넷째, 하나님은 미래로 부터 현재로 들어오는 새로운 가능성의 근거와 근원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비극적 현실속에서 비극적 인간의 현실을 감싸안고 대속적인 고통을 당하시는 자기희생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며 구원하신다.
오 늘 도 우 리 와 함 께 하 시 는 하 나 님,
그 사 랑 하 심 을 감 사 하 며 . . .
[ 참 고 문 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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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rnst Blosch, 희망의 원리, 박설호 역, (서울: 솔, 1993)
13. 백 승균, 희망의 철학자 블로흐, (계명대학교 출판부, 1982)
14. 문 창옥, 우주론의 문제와 범주. - 이글은 1996.10.30일 장로회신학대학원 철학적 신학 수업시간에 발표된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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