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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저너머에p397_과정신학_죤 캅에 있어서 인간실존과 기독론의 의미

존캅의 과정신학 신학

[출처] http://blog.naver.com/shincdhmch/130012353030

제목: 죤 캅에 있어서 인간실존과 기독론의 의미

I. 서 론: 과정신학이 나타나게 된 배경


전통적으로 기독교가 인간들에게 고통과 불행 및 슬픔을 주는 악(evil)의 존재는 하나님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설명해 주지 못했으며, 그리고 이 악의 존재에 대한 기독교인의 책임이 무엇이며,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인간의 자유는 이 악이라는 실재와의 관계에 있어 어떻게 행사되어야 하는가에 대하여 잘 가르쳐지지 않았었다. 이러한 기본적 문제들에 관하여 전통적인 견해와는 상이한 답변을 제시하는 일련의 연구 결과들이 나타났는데, 그 중 하나가 “과정사상(process thought)”적 혹은 “과정신학(process theology)”적 접근이다. 이 입장은 주로 1920년대에 출판한 화이트헤드(Afred N. Whitehead)의 두 권의 저서인 ‘과정과 실재’와 ‘과정 속의 종교’에서 제시된 과정철학의 기본사상과, 그 후 이 사상을 신학에 연결시킨 찰스 하트손(Charles Hartshorne), 버나드 멜란드(Bernard Beland), 슈버트 오그덴(Schubert M. Ogden), 다니엘 윌리암(Daniel Day Williams) 및 존 캅(John Cobb, jr.) 등의 저서에서 뚜렷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면 이제 존캅의 과정신학에 있어서 신 이해, 인간실존, 그리고 기독론에 대하여 언급하면서 동시에 우리가 여기서 얻을 수 있는 통찰들(Perspective)과 기독론 이해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다루어 보고자 한다.


II. 본 론


과정신학은 과정철학에 근거를 한 신학적 통찰체계인데, 이것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사상에 근거한다. 즉 고정구조 속에서 존재하는 실체란 불변의 속성에 의해 인과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전통적 관점(원인과 결과에서 사건을 해석하는 기계론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서, 우주는 불변하는 속성을 가진 부동의 객체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 상호 영향을 주면서 그 과정중에 변화되며, 각 개체는 각 전체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며, 우주와 세계에서 지속적으로 변화과정에 있는 하나의 유기체가 가지는 자기 모습과 특성을 밝히려는 해석의 틀이다. 즉 유기체 가간에 상호 관계를 가지면서 더불어 객체로 변화하며, 각 세포는 유기체와 상호 작용의 관계를 가지고, 이들은 또 유기체 전체와 상호 작용을 통해서 개체도 변하고 전체도 변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에는 어떠한 원리가 존재하는데, 이것을 창조성이라고 하며 이것은 컴퓨터에 있어서 소프트웨어의 수정 변화 과정으로 비유될 수 있다. 과정철학에서 신을 이러한 창조성의 원리로서 설명하는데, 이러한 존재로서 신은 모든 우주와 세계와 상호 작용의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도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고 한다.

캅에 의하면, 과정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으로부터 논리적 틀을 제공받은 통전적인 미국적 신학이라고 한다. 즉, 영국인 화이트헤드의 경험적이 사유와 논리적인 엄격성을 바탕으로 하여 미국인들의 실용적인 가치관을 낙관적인 생활 태도에 부합하도록 기독교 메시지를 설득력 있게 설명해 주는 철학적 신학을 재구성한 것이 바로 과정신학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신학은 성서를 포함한 “기독교 전통의 메시지(생명력)”를 “오늘 우리”에게 설득력 있게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려주려는 노력이다. 그리고 이 과정신학은 논리의 일관성을 가지고 “우리들의 경험”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정확하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먼저 이분법적인 이해를 극복하고, 만물 사이의 단적이나 독립보다는 관계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 이러한 과정 신학에 기초를 두고 있는 과정신학, 특히 John Cobb의 인간실존과 기독론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먼저 캅이 가지는 인간실존과 기독론에 대한 이해를 줄 수 있는 그의 신 이해에 대해서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A. 신 이해

캅은 신에 관한 이해에서 “모든 것을 다할 수 있고 또 다하시는 하나님” 보다는 만물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하시는 하나님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서로 영향을 끼치며 맺게 되는 관계성, 모든 현실체의 특성인 양극성, 그리고 궁극적인 형이상학적 원리를 “창조성”(creativity)이라고 이해했다. 화이트헤드는 이러한 창조성을 궁극적인 것으로 이해했으나, 기독교 신학은 신을 궁극자 또는 궁극적 존재(the Ultimate Reality)로 이해해 왔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는 “창조성의 가장 뛰어난 예”로서 신을 이해한다. 과정신학자 캅은 이 창조성을 신성(Godhood)으로, 신을 야훼(God)-구약에 나타나는 인격적인 하나님- 으로 이해해 보려고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신관은 기존의 신관, 즉 하나님을 도덕적 심판관(심판자 - 피 대상자와의 분리되고 무관하고 초월적인 타자로서 율법으로 구원의 여부를 심판하시는 )으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즉 캅은 이러한 기존의 신개념과는 달리 하나님을 설득적 사랑을 가지신 창조적 원리로 보는데, 이러한 하나님은 역사속에 강제로 이끌지 않고, 비록 하나님의 뜻과 비전이 있지만, 강요하지 않고 자신을 노출해가면서 인간들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한다. 즉 인간들이 받아 들이지 않으면 이것을 아파하며,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는 설득적 사랑을 가진자(심판적 창조주가 아니라)로 본다. 즉 하나님은 무감각한 존재가 아니라 인간이 선을 행했을 때 기뻐하며, 악을 행했을 때 고통을 느끼시는 역사속에 함께 계시는 내인적 관계를 가지는 존재로 이해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직접 결정하시는, 즉 지금 결과적인 결정을 내린 것이 아니며, 역사의 진행에 참여해서 일방적으로 끌고 가시는 분도 아니며 지금도 역사 한 복판에서 역동적으로 계시는 분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곧 하나님의 양면성을 말하는데, 하나님은 영향을 주면서도 영향을 받으시며, 능동적이면서 피동적인 관계를 가진다. 인간이 범죄할 때 하나님은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보여줌으로서 인간을 설득해나가는데, 이 설득적 사랑의 전형이 바로 예수그리스도 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보는데, 인간의 결정, 역사의 방향에 따라 영향을 받는 존재로 이해한다. 이렇게 하나님을 이해할 때,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문제는 신정론에서 나타나는 악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 제시될 수 있다. 캅은 악을 실체로 보지않고 과정속에 실재하는 것으로서 이해하며, 인간은 악으로부터 선택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악을 통해서 고통을 겪지만 그 고통은 선을 생성시키는 긍정적 존재로 이해한다. 그는 상대적으로 양면성으로 존재하는 선과 악의 관계를 현상안에 이해하고 설명하려한다. 역사속의 악으로 하나님은 고통하시지만 자신의 설득적 사랑으로 역사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끄시신다. 인간은 한편 설득적 사랑으로서 하나님을, 다른 한편으로는 악을 접하면서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하는 내 던져진 존재로서 이 상황에서 자유와 선택의 책임성이 주워진다. 인간은 선과 악의 기로에서 이 현재에 대하여, 미결정 상태로 열려있는 가능성 미래에 대하여 선택의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직 열려있지 않은 미래는 하나님에게도 미지의 상태로 남아있지만, 미래의 바람직한 방향을 하나님은 아시며 인간을 설득하시는 존재이시다. 따라서 인간은 이러한 가능성을 인식하고 현재를 채워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선을 제시하는 방향 내지 비전)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과정신학에서 파지라는 말을 사용한다. 악의 영향으로 고통하는 인간을 보시고 고통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해 나가면서, 인간은 그 책임성을 가지게 된다. 즉 인간은 주어진 자유로 선택의 결과에 따라 하나님에게 고통도 줄수 있고 기쁨도 줄 수 있음을 인식하게 되며, 자유로운 선택이 악과의 관계속에서 이루어지 않게 하기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파지하려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인지하며, 따라서 궁극적으로 악을 극복하려는 하나님의 활동에 참여하는 인간상이 나타난다. 요컨대, 이러한 과정신학속에 나타나는 새로운 인간 실존이해의 통찰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파지해야 하는 선택적, 책임적 존재로서 하나님의 뜻을 파지하여 역사를 올 바르게 이끌기위해 살아가는 존재로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통찰들이 실제로 우리의 교회의 현장에서 사용되어 질 수 있다. 즉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설득적 사랑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경험하게 하며, 자신을 바라보는 하나님의 느낌이 어떠하며, 하나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이해하고 계시며, 고통하고 안타까와 하시는 가를 생각하면서 자신의 주어진 상황들 속에서 이러한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며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파지하여 자신의 경험을 이루어 나갈 수 있는 교육원리가 파악될 수도 있다. 이제 캅이 가지는 인간 실존과 기독론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B. 과정신학과 실존적 인간학

1. 우리의 실존을 지배하는 미리 수립된 규칙들이란 없는 것이다. 각각의 상황은 독특한 것이다. 미리 결정된 것은 없다. 미래는 근본적으로 열려 있다. 우리는 우리의 결정으로 미래를 창조한다. 따라서 우리는 미래에 대해서 책임이 있다.

2. 미래에 대해서 미리 결정된 것이 없기에 우리의 실존은 근본적으로 우연적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이데거의 표현으로는 우리는 세상에 “내던져진” 것으로 경험한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것은 이러한 임의적인 상황에서이다.

3. 우리의 실존은 세계 안에 있는 한 존재이다. 우리의 실존은 단순히 우리의 신체나 혹은 우리의 두뇌에 위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실존은 세계에 속하고, 세계는 우리의 실존에 속한다.

4. 하이데거에게는 실존은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이다. 즉 죽는 날까지 하나의 단일한 실재이다. 그러나 화이트헤드에게는 인간 실존은 순간들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살아 숨쉬는 우리는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 자신의 말에 “우리는 끊임없이 소멸해 간다(perpetually perishing)".

5. 하이데거의 실존은 사람들 사이에 진정한 내적 관계들이 존재할 수 없다. 화이트헤드에게는 다른 존재는 나 자신의 실존의 구성에 있어서 기여하는 요소가 될 수 있으며, 그리고 나는 다른 존재에게 기여할 수 있다.

6.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며, 공동체 안에서의 상대적인 독립이 수립된다. 참여와 개체성(participation and individuality)은 대극적인 것으로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다른 존재들과 더욱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우리는 더 개체들이 될 수 있으며, 또한 우리가 더 개체들이 되면 될수록 우리는 공동체에 더 풍부히 참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7. 화이트헤드는 인간 실존을 정신사적으로 언급하는 동시에 그에게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존재란 인류 이전의 동물적인 형식들의 존재로부터 나온 여러 단계들을 통하여 출현했다는 것도 또한 분명하다(진화론).

8. 화이트헤드는 동물적인 배경으로부터 인간의 출현을 신생, 언어, 그리고 종교의 역할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다(「과정신학」118-120쪽).

C. 인간 실존의 구조들

화이트헤드는 진화론적인 철학이 생리학적인 변화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주관성의 발전까지 설명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인간 실존 구조들의 역사는 현재의 실존 구조가 그 이전의 구조들로부터 발생되었다는 전제로부터 추적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다른 문화들을 “현재의 서구적 실존을 현상학적으로 분석하여 발견한 또 다른 하나의 실존 구조”로 보는 대신에, 그것들을 그들 자신의 독특한 구조로도 생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맥락으로 보면 불타나 소크라테스, 예수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의 역할은 실존의 새로운 구조들을 가져온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진화론적인 발달 단계에서, 보다 상위의 경험의 계기들은 동물이 생존과 복지에 관계된 외부 세계의 어떤 감각적 자료들을 통합하고 그에 대해 알맞게 응답할 수 있도록 하는 추진력으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계기들은 산발적이거나 오랜 기간 이상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1)신체적 경험의 제한된 일부들만을 통합하여 미미한 영향만을 끼치거나, 2)군주제 사회와 같이 종합과 통제를 철저하게 수행하여, 일련의 통할하는 계기들로서 중추신경을 가진 동물로 묘사할 수 있다.

주도적 또는 지배적인 계기들은 거의 전적으로 신체 안에 있는 사건들로부터 발생할 수 있지만, 각 계기가 알고 있는 세계에는 신체뿐만 아니라 통합된 과거 시간에 대한 경험도 포함된다. 그래서 지금 경험한 것이 그 특정한 동물의 과거 경험들을 고려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집중된 동물 경험의 진화론적 기능은 동물적 신체의 생존과 복지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경험 자신의 향유’도 목표로 삼는다. 통일된 경험의 단계에서 향유를 성취하려는 목적과 신체의 행복을 성취하려는 목적은, 주도적인 동물 경험의 향유가 신체적인 즐김에서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향유에 공헌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대립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그러나 주도적인 동물 경험의 향유가 신체적인 즐김에서 발생하고 나서 자신의 향유에 공헌하게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게 대립되는 개념들은 아니다. 그러나 주도적인 계기들은 신체의 필요들을 초월하는 목적들을 즐길 수 있으며, 그들이 ‘군주’와 같이 통제와 시간적 지속을 이루는 동안 그들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신체를 이용할 수도 있다. 이런 면으로 보면 동물에게도 정신(psyche)이나 영혼(soul)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고등동물이라도 정신은 신체의 요구에 봉사하는 기능을 한다. 정신의 자율적인 즐김, 즉 신체의 즐김으로부터 얻어진 것들을 초월하는 즐김은 일반적으로는 사소하게 여겨진다. 하지만 발전된 “정신의 자율적 능력”은 정신적 경험의 계기들이 자신을 현실화하려는 목적이 될 수 있으며, 신체의 행복은 그것이 그 자신의 즐김에 대해 도구적 역할을 하는 것과 같이 그것의 목적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인간에게 잘 나타난다. 신체에 대해 봉사하는 “봉사자” 정신으로부터, 그 자신(정신)들의 목적을 위해 신체를 사용하는 “사용자” 정신으로의 전환은 진화론적이고, 역사적인 과정 속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이런 전환점에서 출발하면 일차적 관심은 정신과 신체를 유기체적으로 생각하는 정신물리학적 입장보다는 정신 그 자체의 내면적인 생명의 구조에 집중하게 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는 “실존의 구도”들을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동물적 경험은 의식을 세계 안으로 도입하였고, 의식은 동물의 환경의 특징을 선택하고 그에 알맞은 응답들을 유발시켰다. 이 의식의 작용은 인간 안에서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인간 안에서의 의식은 또한 의식 자신의 향유를 위해 촉진된 또 다른 종류의 정신적 활동들을 강조하였다. 이것들은 인간실존의 근본적인 중심이 되는 것들이며, 그 활동들의 결과들이 의식적으로 경험되기는 하지만 이 정신적 활동들은 무의식적이며, 미리 결정되어 주어져 있는 것들이다. 인간 실존 역사에서 의식과 무의식적 경험과의 관계는 주도적인 동물적 계기들이 신체와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것과 같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의식의 역할이 증대되면 의식은 그 자신의 향유를 목적으로 삼아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정신적 삶(psychic life)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의식은 인간 이전의 존재들에게는 없었던 역할들을 인간에게 수행한다; 외부 세계에 대한 감각적 경험보다는 정신적 활동들의 자유로운 결과들을 시험하며, 무의식적인 상상의 삶을 훈련한다. 이 합리적 훈련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특정한 한 계층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되어간다. 합리적인 의식의 상승과 그것과 일치하는 내면적 삶의 재정돈은 실존 구조들이 역사적인 발전에 있어서 또 다른 출발점의 교차로를 형성한다. 그것이 바로 합리화된 “종교”이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의 새로운 구조들의 출현이 어떤 의미로는 “진보”이지만, 그 진보에 뒤따르는 대가가 너무 큰 것은 아닌지 또 그 진보라는 것이 하나의 질병처럼 여겨지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심각한 질문들이 제기되고 있다. 즉, 의식이 신체보다 그 자신의 정신적 향유에만 집중하게 됨으로 신체를 소홀히 여기고 신체를 정신의 목적에 종속시킬 때 우리 삶에 오는 불안함(dis-ease)을 지적하면서 “몸의 부활”을 촉구하는 시도들이다. 그래서 많은 종교적 스승들은 주로 인간 종족의 정신적 삶으로의 “타락”과 함께 상실되었던 신체와의 원래적 조화를 회복하도록 우리에게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타락으로 인간 자아는 그 이전에 넓은 공동체가 주던 밀접한 영향으로부터 소외되면서, 개체와 그리고 개인적인 자유가 엄청나게 증가하였다. 그러나 거기에는 존재들에 대한 더 광범위한 공동체로부터의 참여와 지지를 잃는 막대한 손실도 있었던 것이다. 앞의 “축의 시기”(axial period)에 나타난 합리적 종교들이 바로 이 타락을 심화시킨 매체들이면서도 그 결과들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들 각각은 실존의 분명한 구조를 형성하였으며, 실존의 이같은 축의 구조들은 오늘날까지도 인간실존을 위한 주요한 선택 방도를 구성하고 있다.

인도의 경우에는 합리화된 의식에서의 자아의 출현에 의해 야기된 개체적 고립이 아주 특별하게 다루어진다. 사상가들은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는 길을 제시하기 위해 자아의 정황을 규명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상실되었던 자아와 신체 그리고 다른 존재들과의 통일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멀리 별도로 하고, 그들의 분석들은 자아이성적인 의식을 동일하게 봄으로써 그러한 분리를 더욱 촉진시켰다. 해탈은 경험적 정신으로부터의 자아의 분리나 구별에 의해서 추구되었는데, 그 경험적 정신은 그것의 신체와의 연루나 시간에 얽매인 자연의 욕망들을 통하여 자아의 굴레를 영구화하는 것이었다. 몇몇 현인들은 자아는 현실적으로 정신적 또는 물리적 세계와 연루됨을 통하여 정화되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또 다른 현인들은 실제로 자아는 언제나 순수했다는 것과, 우리의 과제는 진실로 정신과 육체의 타락된 세계들과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당면 과제는 변화와 과정으로부터의 초월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한 존재는 이미 언제나 완전하다는 것을 실존적으로 깨닫는 일이다. 이것을 실현함으로써 고통, 즉 불안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고타마(Gautama)는 자아를 시간의 흐름 속에 형성되는 동일성의 느낌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 사람이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대는 그 사람을 과거와 미래에 속박시킨다. 특정한 과거와 미래가 실제로 자기 자신의 것이라는 견해는 그들을 통하여 지속되는 자아가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욕망이나 집착뿐만 아니라 후회와 근심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한 비판은 경험들의 연속의 주체인 “자기-확인적인 자아”(self-identical self)란 없다는 것이다. 시간을 통한 동일성이란 그것에 관한 신념들이 향유되는 실재가 아니라, 다만 믿어짐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실재란 실체적 기반(substantial ground)이 없는 사건들의 한 흐름인 것이다. 그것이 실존적으로 실현될 때에 구원이 있으며, 아니 차라리 아무것도 구원받을 것이 없다는 인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사건의 과정이 매우 다르다. 그들에게는 자아, 정신, 그리고 육체에 대해 깊은 논의가 없었고, 자아의 정화나 순수함의 실현이나 자아의 비존재를 위해 발전된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기술도 없었다. 그 대신 이들은 가부장적인 부족신 야훼와 그의 요구들, 그리고 이러한 경험들의 발전적인 합리화 -유대교의 형성- 에 대한 생생한 경험이 있었다. 이 합리화는 창조주요 정당하게 그의 백성의 순종을 요구하는 자로서 저 “위대한 로서의 하나님 사상”에로 인도되었다. 신의 요구에 대해 순종과 불순종을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었던 개인들로부터 신의 뜻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인격적 자아에 대한 감각이 발생한다. 그 결과 인격적 존재로서의 인간은 그 또는 그녀가 어떻게 다른 사람에 대하여 행동하는가에 관해 전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이성적 의지”(rational will)가 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출현한 실존의 윤리적인 구조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그리고 윤리적 인본주의를 통하여 서양 세계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러므로 자아 혹은 나는 이성적 의지라고 불릴 수 있는 선택의 행위자로서 구성된다. 감정들도 참되고 중요하지만 자아와는 구별되며, 자아를 지원하거나 혹은 위협할 분 자아는 이성적이고 윤리적인 결정에서 감정에 의해 좌우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책임을 지닌다.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사색 역시 그들이 적합한 활동일지는 모르지만 그것들이 언제 어떻게 적합한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도 자아이다. 이성적 의지로서의 자아는 그것의 과거 행위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면서 미래의 행위들을 예상하면서 시간을 통하여 존속한다.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실존의 윤리적 구조로부터 탄생하는 동사에 이러한 실존을 강화하였으며, 변형시켰다. 이성적 의지로서의 실존은 주어진 윤리적 요구들이 의지의 지배 안에 -행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 있을 것을 합리적으로 요구할 것이다. 대표적 예가 바리새인들의 율법이지만, 이 역시 원칙적으로 복종은 가능한 것이며 가능해야만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요구가 이성적 의지의 능력에 맞추어졌음을 의미한다.

이성적 의지에 대한 일차적 통제는 외부적 행위에 대한 것이다. 감정들이나 개인적인 취향들에 좌우되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윤리적인 사람들은 타인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행동을 하며, 계속 진행되어가는 사회의 구조를 지원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그들은 내면적인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방법으로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행동을 통제하듯 감정을 통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원시 기독교는 이러한 제한들에 의해 만족되지 않았으며, 타인들을 위한 행동이 계산된 윤리적 행위를 넘어서며 또한 사랑의 동기를 가져야 한다는 요구를 하게 되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의 외부적인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감정 역시 책임의 영역 안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성적 의지가 지원할 수 있었던 것보다 더 온전한 “의”에 대한 열망들과 동일시하게 되었고, 따라서 기독교는 이성적 의지와 실존의 궁극적인 중심과의 동일시를 거부하였다. 자아는 감정과 이성, 의지로부터 분리되어야만 존재하는 것이 되었고, 이것은 경험의 모든 차원에 대한 책임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을 영성(spirit)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으로서의 자아는 자신을 시험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자신을 대상화하고 초월한다. 이러한 영적 자기-시험은 이미 시험된 자아의 본성을 변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대상화나 자기-초월의 실존처럼 매우 불안정한 것이다. 자기-시험은 자기를 위한 책임감을 표현하는 동시에 그 책임감을 산출시킨다. 그러나 자아는 그 자신을 마땅히 되어야만 하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노력에서 좌절하고 만다. 영적 실존에 있어서 의무(ought)란 앞에서 다룬 윤리적 실존의 경우에서처럼 그 요구 안에 “할 수 있음(can)"이 포함되어 있니 않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원죄나 자연적 타락은 자신의 열망들의 실현에 대한 영성의 저항 -즉, 이런 것들 때문에 성취될 수 없다는 변명을 묘사하는 역할을 한다.

실존주의자들에 의해 분석된 실존과 같이 영성적 실존의 구조는 두 개의 양식들로 현실화될 수 있는데, 이 양식들은 자기 자신의 고유한 목적들 또는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위해 결정한 목적들에 기초하여 각각 살아가는 것을 말하며, 그것은 바로 사랑과 짜기-집중이다. 영성적 실존의 특별한 위험은 자신을 대상화하거나 또는 추월하는 자아가 하나의 자기-폐쇄적 방법으로 자기도취적인 사람이 되어 자신이 죄책이나 자신의 성취에 빠져들게 한다. 자발적인 애정과 자발적인 윤리적 복종의 동기들의 순수성에 대해 자아가 계속적으로 질문함으로써 아이러니컬하게도 바로 그 순수성을 파괴한다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영성은 그 자체를 자신과 다른 존재들에 대해 편협한 하나의 고립된 실존으로 만들 수 있다. 이것이 영성적 실존에 주어지는 독특한 형태의 불안이다.

이에 대한 대안은 영성이 하나님의 창조적-응답적인 사랑에 대해 열려진 영적 실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자아에 대한 책임감은 충분히 간직되어야 하지만, 또한 자아는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관심을 더 넓은 지평들로 옮겨서 자신의 실존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하나님의 응답적 사랑에 대한 자아의 개방에 있어서는, 자아는 자신의 죄에도 불구하고 용납의 확신을 받아들이며, 자기집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또한 사랑에 대한 자아의 개방에 있어서는, 자아는 자신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용납의 확신을 받아들이며, 자기집중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며, 또한 사람들의 복지에 관해 사심 없이 관심을 가지고 타인을 향해 집중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개방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게 해준다. 이런 하나님께 대한 개방으로 자기-집중에서 벗어난 영성적 실존은 특히 타인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창조적-응답적 사랑을 특별히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실존 양식을 영성적 실존에 의해 도입된, 향유를 증가시킬 수 있는 특별한 가능성이다.

D.예수 그리스도

기독교는 예수의 삶과 함께 시작하였다. 그의 삶은 “인간의 본성 안에 있는 가장 선한 모든 것으로부터의 반응을 불러일으켰던 요소들을 지녔다. 그 요소들이란 어머니, 아기, 그리고 빈 마구간 ; 평화와 사랑과 동정심의 메시지를 전하는 집도 없고 자신을 잊어버린 저 겸허한 사람 : 고통, 번민, 생명이 꺼져갈 때의 온화한 말들과 그 최후의 절망 : 그리고 최고의 승리의 권위를 지닌 완전함 등이다.” “그리스도의 삶은 군림하는 힘의 과시가 아니다. 그의 영광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자들을 위함이지 세상을 위함이 아니다. 그의 능력은 강압적인 힘의 없음에 있었다. 그것은 최고의 사상적 결정성(decisiveness)을 지녔다”. 강압적이지 아니하고 설득적인 이 최고의 능력에 대한 사상은 플라톤이 그의 생의 후반기에 가까스로 도달한 것이었다. “기독교의 힘은 플라톤이 이론적으로 예언해 놓은 것을 행위로 드러내놓은 데 있다.”

예수의 메시지는 “세계 안에서의 온화한 요소들을 강조하는데, 그 요소들은 서서히 그리고 고요히 사랑에 의해 작용한다.” 그를 통해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 안의 하나님의 내재를 주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가르침을 이론적인 형식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보고된 그의 말들은 “공식화된 사상이 아니다. 그들은 직접적인 통찰의 묘사들이다. 그 사상들은 그의 마음 속에 있는 직접적인 모습들이지 추상적인 개념들로 분석된 것은 아니다. 그의 말씀들은 행동들이지 개념들의 조정이 아니다. 만약 언어 그 자체가 사건이 아니고 과연 언어이어야 한다면, 그는 언어가 가질 수 있는 가장 낮은 단계의 추상적인 말로 말하였을 것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단지 갈릴리의 농부들 공동체에서나 가능한 한없이 순박한 말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로마 제국의 힘과 질서의 현실적인 문제들과는 어울리지 아니하였다. 정확히 바로 그것의 비현실성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인간 사회의 결함들을 시험하는 척도가 되는 하나의 표준을 만들어 주었다. 저 갈릴리 사람들의 영상들이 실현되지 않은 세계의 꿈들에 불과한 만큼, 그만큼 널리 그들은 한 불안한 정신의 영향을 퍼뜨려야만 했다.” 바로 그 영상들의 구체성 때문에 그들의 급진적이고 비현실적인 의미는 숨겨질 수 없었다. 여러 세기를 지나면서 그들은 사회의 구조들을 변화시켜왔다. 화이트헤드의 예수에 대한 깊은 이해와 그의 권위에 대한 존경을 표현하는 것- 플라톤의 통찰과 예수의 생애가 “최근 문명의 성장을 표시하는 도덕적 직관”의 표현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진보들을 구체화하였다고 주장한다. 예수의 지고한 사상의 구체화 때문에, “세계의 역사는 이 시점에서 나누어지는 것이다”.

창조적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은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과 동일시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하나님은 세계 안에서의 새로운 질서와 그리고 질서화된 새로움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통찰에서 볼 때, 비록 정적인 질서에서 역동적인 질서로, 그리고 질서 그 자체에서 새로움을 지닌 질서로의 변화가 이루어졌지만, 정작 말하고자 하는 바는 교부들이 일찍이 불렸던 로고스이다. 원초적 본성 혹은 로고스는 피조물이 그 자신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과의 관계에서 최소의 목표로서 피조물들 안에 내재하거나 혹은 화육한다. 최초의 목표는 직접적인 발생 사건을 위해, 그리고 그 발생 사건이 영향을 미칠 뒤따르는 사건들을 위해, 가장 큰 향유를 성취하는 그러한 현실화의 형식에 위치한다.

이러한“화육적” 로고스가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들 속에 현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조건이 정렬해 있다. 첫째, 무생명의 세계와 생명이 있는 세계 사이에는 절대적인 선은 없지만, 전자에서는 로고스의 현존은 과거의 반복으로부터 거의 구분할 수 없는 것이다. 로고스의 고유의 활동이 의미심장하게 명백히 드러나는 것은 바로 살아 있는 사물들 안에서이다. 둘째, 우리가 로고스의 활동이 특별히 식별되는 더 높은 등급의 유기체들을 다룸에서 보여지듯이, 피조물의 결정이 매우 중요하게 된다. 이것은 이들 피조물들 안에서의 로고스의 효력의 범위가 주로 피조물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피조물들이 로고스를 반대하거나 혹은 지지하여 결정하는 바에 따라서 그리스도는 더 많게 혹은 더 적게 내재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이 로고스의 현존에 가장 충분히 개방적일 때에, 그들 안에 가장 충분히 내재하게 된다.

인간 주체에게 매순간 오는 부조화의 요소들을 지닌 현실 세계에 대해 부조화의 요소를 모두 다 차단하는 방법에 결과는 강렬함이나 힘이 결여된 사소한 조화가 되는 것으로서 무감각증이다. 도 다른 가능성으로서 부조화의 요소들은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조화의 상태로 될 수는 없다 하더라도, 그들 사이의 대조가 전체의 강렬함에 기여할 수 있는 그러한 방법으로, 그들 양쪽이 다 포함될 수 있는 더 크고 더 포괄적인 새로운 형태가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형태는 새로운 사건의 주어진 세계의 부분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 혹은 로고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창조적 변화는 성장의 본질이며, 성장은 삶의 본질이다. 성장이란 상이한 조합의 방법으로 주어진 세계의 요소들을 단순히 함께 첨가시킴으로써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새로움의 도입을 통한 이들 요소들의 변화를 요구한다. 그것은 그들을 파괴하거나 혹은 억압 없이 그들의 본성과 의미를 변화시킨다. 새로움의 원천은 로고스이며, 그것의 화육이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가 효과적으로 현존하는 곳에 창조적인 변화가 존재한다. 창조적 변화는 모든 인간의 응답적인 사람에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의 감정들을 자기 자신에게 영향을 주도록 허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은 피조물들 안에서 창조적인 변화를 생성시킨다. (과정신학 132-153p)

E.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를 창조적 변화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함축적으로 특별히 예수와 관계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수의 영향이 자기 객관화나 자기 초월의 자아를 중심으로 집중시키는 실존의 독특한 구조를 역사 안으로 가져온다는 영성적 구조는 자기 집중으로 인도될 수 있지만, 그것은 그것의 기독교적 형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그럼으로써 이웃의 요구에 대해서도 개방적이다. 이러한 창조적 변화는 자기 객관화가 자기 도취로 인도되는 곳에서는 저항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받아들이는 곳에서는 그 과정이 충만하게 되며 또한 지속될 것이다.

예수가 창조적 변화를 촉진시키는 분으로 이해되는 또 다른 방법은 그의 계시적 의미의 관점에서이다. 바울은 기독교인의 삶을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으로 이해했으며, 이것은 예수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의해 발생된 능력의 영역 안에서의 삶으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었다. 진실되게 예수의 가르침을 경청하는 일도 또한 창조적 변화인 그리스도에게 개방됨을 뜻한다. 예수는 또한 자신들이 실존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청중들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예수는 편안한 자들에게는 괴로움을 주며, 괴로움을 당한 자들에게는 위로를 준다. 그는 우리의 덕행을 의심케 하였으며, 또한 죄 가운데 있는 우리에게는 구원의 확신을 준다. 그는 우리의 자기 평가를 역전시킴으로써 우리를 창조적인 변화에 개방하게 한다. 이들 말씀들은 특별히 직접적이고 왜곡되지 않은 삶에의 통찰을 표현하고있다. 예수는 마치 자신이 특별한 권위를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말했으며,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행동했다. 그의 권위에 대한 함축적인 주장은 예언자들의 권위를 능가하였으며, 신자들의 그에 대한 의존감과 대조되었다. 예수의 실존의 구조는 독특하였던 것처럼 보이며, 그 독특함은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의 양식에 집중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진정한 예수의 말씀들에서, 한 실존은 자신을 신적인 것에 대한 타자성을 경험하지 않은 것으로 표현된다. 대신에, 그의 자아성은 자신의 개인적인 과거에 의한 만큼이나 그분 안에 있는 신적 활동에 의해 구성되는 것처럼 보인다. 과거의 목적들이 신적인 목표들에 순응되었고, 그럼으로써 각자의 미래의 순간에서 하나님의 부름에 개방적인 자세가 될 수 있는 기본적 성질이 관련되었다는 점에서, 최초의 목표들과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목표들 사이에는 정상적인 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 안에서 화육하는 반면, 예수는 그 화육이 바로 그의 자신성의 구성적 요소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이다”. 비록 그리스도는 우리가 예수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임재의 정확한 성질에 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 것에 관계없이 우리 안에서 활동하지만, 예수의 실존의 구조에 대한 질문은 단순히 한가한 사변만은 아니다. 우리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활동은 우리가 예수를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로 받아들일 때에, 따라서 하나님을 창조적이고 응답적인 사랑으로 생각할 때에 향상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신중하게 우리 자신들을 그의 능력의 영역 안에 둘 때에, 그리고 우리가 그의 가르침에 대한 우리의 만남을 새롭게 할 때에도 역시 향상된다. (과정신학141p - 148p)

F.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

그리스도는 창조적 변화로서 작용하는 화육된 로고스라고 정의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사물들 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특히 생명이 있는 곳은 어디에서든지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활동의 징표들은 고도의 방법으로 그의 현존을 나타내는 새로움을 화육할 수 있는 인간들 사이에서 특별히 나타난다. 인간들 사이에서의 그리스도의 효과는 특별히 사람들이 자신들을 그에게 개방하는 곳에서 현존한다. 그와 같은 개방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올바르게 불려지는 곳에서 촉진된다. 그것은 또한 예수와의 관계가 우리의 허영심들을 깨뜨리고, 또한 우리의 절망 속에서도 우리에게 확신을 줄 때에 촉진된다.

그리스도의 활동을 촉진시키는 예수와의 관계는 특히 말씀의 선포와 또한 성례전에의 참여를 통하여 의식적으로 그리고 의도적으로 유지된다. 교회에는 이러한 징표들이 있으며, 진정한 말씀과 성례전이 현존하는 곳은 어디든지 교회가 있다. 그러나 교회의 실재성은 종종 이와 같은 정의가 사용될 때에 이해되는 것보다 한층 더 심오한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과 성례전을 통하여 지탱되는 교회 공동체에서 예수 자신이 신자에게 임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임재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와 또한 예수 안에서 시작된 저 화육의 연장으로서의 교회를 구성한다. 이러한 표현은 주도적인 현대 개념과의 긴장관계 속에 있어왔던 언어이며, 따라서 그것이 표현하는 직관들은 순전히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설명들을 유리하게 하기 위해서 억압되어왔다. 그러나 화이트헤드는 우리에게 심리학과 사회학이 한번 더 존재론과 형이상학으로 심화되도록 하는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는 우리에게 예수가 교회 안에 참으로 현존하며, 그리고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그와의 연합을 이루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스도 안에 있음’의 바울적 이해는 신앙인이 예수의 영향권 안에 들어간다는 의미이며, 그 영역 안에 있다는 것은 어느 정도 그에게 순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옳지만, 그것은 여전히 예수의 참된 임재의 충분한 의미를 암시하지는 못한다. 화이트헤드가 어떤 한 사건이 그것의 미래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할 때, 그는 정말로 그 사건이 미래에 있을 사건들에서 구성 요인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은 참으로 이들 사건들 하나하나 안에 현존하는 것이다. 뒤따르는 사건들은 부분적으로 이 사건에 의해 구성될 것인가 혹은 아닌가를 선택하지 아니한다. 그들은 다만 그것을 어떻게 고려할 것인가만을 결정한다. 계승자가 그 선임자를 어떻게 결합하느냐가 그 이후의 사건들에서의 그 선임자의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결정은 점진적으로 선임자의 영향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중요한 영향에 관한 한, 대부분의 힘의 영역들은 빠르게 소멸되어간다. 그러나 그 힘의 장을 통하여 한 사건은 모든 다른 사건들을 구성함에 있어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다만 한 위대한 내적인 힘의 사건만을 다룰 것이 아니라 또한 힘의 영역의 확대를 그의 사명으로 받아들이는 교회를 낳았던 한 사건을 다루지 않으면 안된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구성하기 위한 그 사건의 잠재력이 증가된 바로 그러한 방법으로, 예수의 사건에 의해서 구성되어지도록 결정들을 하였다. 이 결정들은 성례전을 통하여 형성되었는데, 그 성례전의 목적은 신자들의 삶에서의 높여진 효과를 위한 사건들을 재현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에 의해서 발생한 힘의 영역을 유지하고, 확장하며, 강화하는 일에 의식적으로 헌신하는 공동체이다. 그와 같은 공동체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그러한 힘의 영역에 접목되는 일이며, 그리하여 자신의 실존을 구성하는 예수의 진정한 현존을 경험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 안에서의 진정한 임재에 의해 구성된 한 몸의 일부분이 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결과들은 심리학적으로 채택된 태도들의 결과만으로나 혹은 사회학적으로 다른 신앙인들과의 연합의 결과만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된다. 예수의 영향이 적절한 심리학적이고 사회학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향상되고 강화되는 것처럼, 그 결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정한 영향의 결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148-150p).

G. 삼위일체

고대 교회에서 토론된 근본적인 문제는 예수 안에서 화육된 신성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관한 문제였다. 신성 그 자체인 하나님은 그렇게도 철저하게 초월적이어서, 아리우스가 생각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한 유한한 인간으로 화육한 분으로 말하는 것은 신성모독이었던가? 이 경우에, 예수 안에 현존했던 신적 실재는, 아리우스의 가르침과 같이, 피조물적이거나 혹은 많은 오리겐주의자들이 제안했던 것과 같이 종속적이고 파생적인 신성의 모습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아타나시우스가 영도하였던 교회는 최종적으로, 사람들이 비록 예수 안에서 화육했던 신성을 신의 다른 측면들과 구별할 수 있지만, 그것은 그 다른 측면들과 동등하였으며, 그 다른 측면들과 함께 동동하게 신 자체에 참여하였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즉 예수 안에서 화육했던 신성은 하나님 자체였다는 것이다.

과정 기독론의 공식화는 아타나시우스의 결론에 따른다. 창조적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즉 하나님의 원초적 본성은 예수 안에서 화육된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신의 피조물도 아니며, 또한 신의 파생적이고 종속적인 모습들도 아니다. 그것은 신의 다른 측면들과 구별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과 함께 동등하며, 그들과 함께 동등하게 신 그 자체에 참여한다. 세계 안에서 화육한 하나님은 세계를 초월하는 하나님보다 열등하지 아니하다. 예수 안에서 화육된 실체는 신(혹은 신성, deity)자체였다. 내재적인 하나님이 초월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추론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초월적인 하나님이 내재적인 하나님으로부터 추론된다고 말하는 것도 참인 것이다. 바로 그 성질에 의해서 내재적이고 동시에 초월적인 오직 하나의 신성 곧 신만이 있을 뿐이다.

고대 교회는 하나님이 세계 안에 내재하는 또 다른 식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결정하였다. 이것이 곧 성령이었다. 교회는 그 구분이 신적인 것을 경험하는 인간의 양태에서 뿐 아니라 또한 신적 생명 그 자체 안에도 있다고 믿었다. 이 경우에 있어서 성령으로 현존하는 신적 실재도 역시 완전한 하나님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러한 결론들에 과정신학도 역시 동의할 수 있다.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의 현존에 추가하여, 또한 하나님의 응답적 사랑의 현존이 있다. 하나님의 응답적 사랑은 하나님의 창조적 사랑과 똑같이 그렇게 완전한 하나님인 것이다.

이들은 삼위일체 교리가 형성되어온 근본적인 기독교의 주장들이며, 과정신학은 그들을 긍정하고 분명하게 한다. 그러나 이러한 명료화 작업은 삼위일체 교리의 전통적인 교리들과의 긴장에로 인도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격들이란 말과 같은 의미를 지닌 하나님의 세 가지 측면들의 견해로 인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격(person)을 현대적인 의미로 취급할 때, 하나님은 한 인격인 것이다. 인격을 전통적인 의미로 취급할 때, 두 인격은 창조적 사랑으로서의 하나님과 응답적 사람으로서의 하나님으로 구별될 수 있다. 이 두 인격은 양쪽 다 초월적인 측면과 내재적인 측면을 지니며,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두 인격들 사이에 한 가지 이러한 구분을 첨가시킨다면, 우리는 네 개의 인격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 대신 만약 우리가 두 인격에 관한 사상에 그들이 한 하나님 안에서 결합되어 있다는 통일성을 첨가시킨다면, 그땐 우리는 세 인격성(a trinity)을 갖게 되지만, 그 통일성은 다른 두 인격이 지닌 것과 똑같은 의미에서의 다른 한 인격은 아닌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한 하나님이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성령 안에서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에게 임재한다고 믿는 한 그것은 신앙의 핵심이 된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안에서 들어왔던 것, 즉 창조적이고-응답적인 사랑은 이 우주 안에서의 근본적인 실재이며, 따라서 우리는 그러한 실재와 연합하기를 원하며, 그리고 이 신성한 실재가 우리의 현재적 실존의 양태에서 경험될 수 있다는 확신의 배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님의 가장 신적인 측면이 예수 안에서 들어왔던 것과는 별개의 것이라고 암시되는 한에 있어서 그것은 기독교 신앙에서 왜곡의 한 원천이다. 비록 니케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의 결정들이 세 인격들 모두가 동등하게 신적이라고 말했지만, 성부 하나님이 다른 두 인격들 보다 한층 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라는 느낌을 남겼다. 때문에 그 느낌은 신성의 본질이 창조적이며-응답적인 사랑과는 다른 어떤 것이라고 지원받았다.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계시적인 의지와 그의 숨은 의지 사이의 구별을, 그리고 세계는 궁극적으로 후자에 의해 지배된다고 주장하는 이러한 견해를 분명하게 말해 주는 기교적인 용어들을 개발하기까지 했다. 그리하여, 부분적으로나마 세 인격에 관한 주장으로 인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결정적인 계시였다는 공식적인 고백이 신성에 관한 개념을 전적으로 바꿔놓도록 하지는 못했다.

셋이란 숫자를 가지고 여러 가지 야단법석을 떨 때에, 그리고 하나님이 한 존재 안에 어찌해서든 지 세 인격으로 존재하는 신비가 그 자체로서 특별한 의미 있는 것으로 묘사될 때에,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적인 것이 된다 하더라도, 그 삼위일체 교리는 하나의 인위적인 작업인 것이다. 신성의 다양한 측면들에 대한 토론들은 그들이 경험 일반이나 또한 특별히 기독교적 경험을 설명하는 일을 돕는 한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과정신학은 전통적인 삼위일체 개념들을 따르기 위하여 하나님 안에서의 인격들의 구분을 공식화하려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다른 교리들에서와 같이, 우리는 그 전통적인 교리에는 유익한 안내가 있음과 근본 의도에 있어서는 동의할 점이 많지만, 이전의 공식은 수정할 필요가 있음도 안다. 우리는 만들어져야만 할 주된 구분이 신적 사랑의 창조적 측면과 응답적 측면 사이에 있음을 암시한 바 있다.

H. 기독론에 있어서 과정신학이 가지는 문제점

과정사상가들에 의하면 예수는 하나의 인간이었다. 곧 예수는 역사적으로 실존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주관적인 뜻을 가장 장 파지한 인물이었다. 예수는 당시 역사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파지하고, 그 뜻에 참여하는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삼았기에, 결과적으로 그의 삶과 죽음은 “신기한 일(novelty)”로 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Alfred N. Whitehead, Adventure of Ideas(New York: Macmillan, 1993), pp.208-214; Religion in the Making, p57; Randolf C. Miller, The theory of Christian Education Practice, pp43-45; 강희천, “기독교 교육과 과정사상”” in 현대와 신학, 제12집, 1988, 217-218).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예수는 실존의 인간 중에서 하나님의 설득적인 사랑의 모습을 가장 잘 파악(prehension)했으며, 그와 같은 사랑의 모습을 지닌 하나님의 목적에 일치되는 삶을 살았기에, 결과적으로 당시 주변의 인간들에게는 물론, 하나님게도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랜돌프 밀러이 서술에 의하면, 하나님은 설득적 사랑이라는 자신의 모습을 가장 잘 파악했으며 그러한 파지를 통해 하나님의 고통(suffering)에 가장 잘 동참한 인간 예수의 삶을 봄으로서 영향을 받아 기쁨(enjoyment)을 느꼈으며 그를 통해 자신의 결정을 변경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인간 예수의 모습은 동시에 인간들이 본 받아야 할 귀감(chief exemplication)으로 남게 되어 인간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영향은 역사상 “생성과 소멸”이라는 새로운 과정을 통해 나타났는데, 곧 예수의 죽음은 교회의 출현이라는 또하나의 신기한 일(novelty)을 생성시키는 과정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Ibid, p43; 양희천, 218p). 이러한 과정 사상적 입장은 예수에 관한 두 가지의 전형적인 설명중 하나만을 수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라는 기독론(christology from above)을 거부하면서,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 예수라는 기독론(christology from below)만을 주장하는 것이다(Ibid, p43; 양희천 218p). 따라서 과정 사상적 입장에서 주장하는 바는 삼위일체의 교리에 입각한 기독론이나 혹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인간의 몸으로 오신 메시아라는 성육화(Incarnation)의 교리에 입각한 기독론과는 상충된다는 점에서 구원과 섭리를 상대적으로 중요시하면서 해석해 온 신앙공동체의 기본 입장과는 쉽게 조화를 이루기 힘든 내용으로 논쟁의 대상으로 남게 된다.


III. 결 론

화이트헤드와 같은 철학자들과 죤 캅과 같은 신학자들에 의해 주장된 “과정사상”이 전통적으로 전수되어온 기독교의 내용에 비판적으로 조명하게 하는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했음을 밝혔다. 캅이 이해하는 하나님은 응답하시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 창조적인 사랑으로서 설득하시는 분으로서의 하나님, 즉 끊임없이 인간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시면서 인내하시면서 설득적으로 응답하는 사랑으로서의 하나님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인간은 하나님의 이러한 설득적 사랑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파지하여, 이것을 인간 자신의 책임으로 삼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존재이다. 이러한 점에서 과정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제공했으며, 그러한 이해에 바탕을 둔 인간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들에 대하여 적극적 책임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기존의 인간이해에서는 인간을 전적 타락한 존재로서 말하기 때문에 세상에서 일어나는 악의 현상에 대하여 어쩔수가 없다는 책임 회피적 입장에서, 적극적으로 악의 문제에 책임성을 가지고 대처해 나가야 하는 입장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따라서 인간의 책임성을 가능하게 했다는 점에서, 신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과정신학의 긍정할 수 있다. 그러나 과정신학 특히, 캅의 기독론에 있어서는 기존의 기독교와 충돌이 일어난다. 캅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파지한 전형적 모델로서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된 것은 창조적 변화로서 이해되는 로고스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의미는 창조적 변화에 있고 그러한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구원의 의미는 창조적으로 변화됨에 있다. 창조적 변화를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화적 사랑(견인의 은총을 통한 사랑)에 해당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 전통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보인 하나님의 구원론적인 의미는 성화적 사랑과 구속적 사랑 둘 다인데, 캅은 그의 기독론에서 예수가 보인 하나님을 창조적 변화의 힘으로만 봄으로써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명백히 간과한 점에서 그 한계점을 드러낸다( 송성진, 103p).

그러면 이러한 과정 사상적 접근이 한국 기독교에 던져주는 시사점은 무엇인가? 우리의 기독교 교육이 이제 더 이상 특정의 신앙고백만을 주입시키며 특유의 고착된 행동양식만을 전수시키는 일과 동일시 될 수는 없다. 이제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 요청되는 것은 스스로가 기독교적 가치를 해석하도록 돕는 해석학적 모형이 제시되어야 한다. 아울러 자아성찰의 차원에서 책임성 있는 인간상을 촉진하게 해야한다. 지금까지 한국 교회에서 강조되어온 인간의 모습이란 죄인으로서의 인간, 불완전한, 너무 많은 한계를 지닌 인간이라는 모습 등으로 설명되어 왔기에. 이같은 설명은 동시에 현 세상에서의 책임성을 상대적으로 경시하는 감추어진 가치를 전수시켜왔다. 그러나 과정사상이 제시하는 기본사상이란 바로 인간의 자유와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뜻을 파지하고 그 뜻에 적극 참여해야 할 모습을-곧 책임성 있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도록 촉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책임성이라는 인간의 의무가 수행될 현장을 구체적으로 인식하도록 도우며, 그 다양한 현장을 소개하고, 그 각각의 현장에서는 어떠한 행동양식으로 반응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결정하도록 격려하는 것이 요청된다. 현 세상에서 인간의 책임성이란 단순히 관념적인 사고나 명상에 의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에 의해야만 이 수행될 수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 과정사상을 통해 얻어낼 수 있는 새로운 시도가 지니는 특징인 것이다.


 

-- Work Cited --

강 성 도,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입문」 (서울: 조명문화사) 1992.

송 성 진. “존 캅의 기독론에 대한 비판적 연구” in 기독교 사상( 1996. 1.),

강 희 천. “기독교 교육과 과정사상” in 현대와 신학, 제12집, 1982. . 193-224p.

존 캅, 데이비드 그리핀 공저. 과정신학」 류기종 옮김. (서울:열림) 1993.

A. N. 화이트헤드. 「과정과 실재」 오영환 옮김. 민음사.

A. N. 화이트헤드. 「종교론」(Religion in the making), 류기종 옮김(서울: 종로서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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