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저너머에p397_과정신학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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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캇펙의 책 시리즈 중에 '그리고 저 너머에'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저 너머에'는 그의 나이 60이라는 나이에 그의 사상을 거의 완성하는 차원에서 쓴 책인 것 같습니다. 그 '완성'이라는 것이 중요합니다. 결국 '신'이 되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고, 종교다원주의자들이 말하고 뉴에이지가 말하는, "하느님"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그의 과정은, 자아발견 ☞ 자아성숙 ☞ 자아포기 ☞ "신"이 되는 것 으로 갑니다. 이런 과정들을 보시면, 결국 심리학이라는 것이 하나의 학문이라는 차원을 뛰어넘어서 "종교"의 차원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실 수가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런 실체를 모르고 심리학의 좋은 것들만 이용하면 된다고 하니 가슴아픈 현실입니다.
우선 '과정신학'에 대한 몇가지 글을 검색하여 올려 보겠습니다. 참고해 보시면 유익할 것입니다.
1.과정철학의 기원: 헤라클레이토스의 과정철학 과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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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정철학의 기원: 헤라클레이토스의 과정철학 과정 철학의 기원은 헬라철학 특히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544-484년경 B. C)에게서 찾을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근본 사상은 만물이 흐르며(π?ντα ?ε?), 아무 것도 한결같은 존재로 머물러 있지 않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의 단편 91에서 "우리는 동일한 강에 두 번 들어갈 수는 없다"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영원히 흐르고 있다"라고 하는 것이 세계의 참된 본질이다. 그러므로 원리(원질)란 물도 아니고, 공기도 아니고, 아페이론도 아니고, 생성이다.
이러한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은 다음과 같다. 헤라클레이토스 이전의 철학자들은 한결같이 존재자(存在者)에 대해 물어왔고, 모든 것을 성립되게 하는 근본질료가 무엇인가 만을 물어왔다. 이런 단계에서 과도기(중간단계), 즉 생성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생성, 곧 운동이 모든 것이며, 여태까지 존재자라고 보여져온 것들도 생성과 운동이라고 하는 명제가 헤라클레이토스에게서 나오게 되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그의 명제 30에서 "이 세계는 신이 만든 것도 아니며, 인간이 만든 것도 아니다. 이 세계란 정도(μ?τρα)에 따라 불타오르기도 하고 꺼지기도 하는 영원히 살아 있는 불이었으며, 현재도 그렇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라고 했다. 그에게 불이란 일종의 특수한 물질적인 원소가 아니라, 끊임없이 올라가고 내려가고 하는 영원한 움직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불은 "한 사람의 현인(?ν τ? σ???ν)", 즉 하나의 "세계이성"의 상징인 것이다.
생성은 항상 대립되는 것들 사이에 끼여 있다. 그리고 이 대립되는 것들이 운동을 흘러가게 한다. 그렇지만 그의 생성은 항상 새로운 것이 지나쳐 버리는 것이 아니라, 대립들이 살아 남는 것이다. 다시 말해 대립은 생산적이며, 생명으로 가득 차 있고, 생산하는 힘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모든 생성과 모근 것들이 흘러가는 속에서 질서와 조화, 의미와 통일로 보고 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로고스(λ?γο?)의 개념을 자기 자신의 기본 사상으로 삼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로고스란 그에게 있어서 여러 다른 것들의 공통적이 것이요, 영원한 생성 속에서 붙었다 꺼졌다 하는 정도요, 신의 법칙이기도 하다. 이 신의 법칙은 모든 것을 다스리며, "인간의 모든 법률"도 이것에서 영양을 공급받는다.(단편 2,30.114) 또한 그에게 있어서 로고스란 신이기도 하다. 그의 사상이 몇 백년 뒤에 에페소스의 신학자요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이 "그리고 신은 말씀(로고스)이었다"(κα? θε?? ?ν λ?γο?)고 선언했던 것과 비슷하게, 에페소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도 우리들은 유일하게 현명한 자를 제우스라고 말한다 라고 선언했다. 이것은 아직도 그에게 있어서 신적인 것이 영원히 생성되고 있는 모든 것들과 일치한다. 이 로고스는 초월적이고 인격적인 정신은 아니며,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인 것이다.1)
2.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플라톤의 철학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플라톤 자신은 과정 철학자는 아닐지라도 그의 철학은 많은 점에서 과정 철학적 관점과 조화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과정철학은 그 성격에서는 과정적이고, 그 정신에서는 플라톤적이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관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실재와 그 실재에 대한 이해 방법이 변화되고 있다는 것에서 관심하는 것이다. 그동안은 파르메니데스적 우주관에 만족했지만 지금의 시대는 급변하는 세계 속에 있다는 사실이다. 이 급변하는 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실재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했다.
실재는 근본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않다. 우연적이며 만들어져 가는 변화 자체일 뿐이다. 실재 그 자체는 끊임없이 흐르는 것으로 경험되어진다. 그래서 실재의 근본범주는 고정된 것이 아니고 과정이다.
우리는 실재의 상호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을 급변하는 현실 세계 속에서 특히 통신과 통상수단을 통해서 경험할 수 있으며, 우리의 매우 높은 감각성을 통해 자연환경에 대하여, 그리고 사물의 생성되는 역사적 상황에 대하여 경험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실체에 대한 이러한 상호관계성을 깊이 의식했으며, 바로 이 점이 그의 철학과 이론을 형성시키는 본질적 부분이 되고 있다. 화이트헤드는 그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philosophy of organism)'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이 철학이 사물들의 사실적 관계성의 이론 위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개별화 분류화 시키기보다는 통합화 종합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실재는 ‘복합된 통일체(a comolex unity)', 혹은 ’유기체(organism)', 그 통일체 안에 있는 각 요소들은 자체로써 ‘유기적 통일체(an organismic unity)'이다. 이런 유기체의 개념이 바로 모든 실재의 통전성과 이 관계성을 이해하는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서양철학의 대부분이 정체적이고, 개별적이고, 비 시간적인 개념들로 구성되어진 반면에 그의 철학은 역동적이며, 전체적이며, 4차원적이게 하는 시간적 그리고 통전적 차원들을 첨가하고 있다.
3. 기독교의 화이트헤드 영향
화이트헤드 사상이 철학에서 그만큼의 영향을 갖는다는 것은 신학에서도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기구보다도 종교적 기구만큼 전통에 고착되어 있는 곳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변화에의 적응이 잘못 이해되고 곡해되는 것이 종교만큼 큰 곳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화이트헤드의 사상에 따른 새로운 신학의 형성을 더욱 혼란스러움을 야기시키고 평화스런 기독교 정통사상에로 돌아가려는 것을 교란시킬 뿐이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이 있다. 이들은 오늘날의 신학을 비난하면서 단순한 신앙을 요구한다. 그러나 신앙이 사상의 대치물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정통성 역시 사상의 대치물이 아니다. 오히려 신앙은 사상을 발전시키고 도전하는 직접적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은 신앙 자체와 전체로서의 실재와 더 잘 통전되어져야 한다.
고대 라틴어의 표현대로 할 것 같으면 신학이란 “이해를 구하는 신앙”(fides quaerens intellectum)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해를 구하는 것이다. 신앙이 이해를 뒤집어 바꾸어 놓으 수는 없다. 신앙이 구하는 이해는 특수한 역사적 계기 안에서 그것에 적합한 실재의 가장 깨어난 관념과 접합되어진 상태로 발견되어져야 한다.
화이트헤드는 기독교 신학에서 아주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의 실재에 대한 생생한 표현을 할 수 있는 깨어난 관념들을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기독교 신앙을 하나의 전체로써 실재의 가장 유용한 이해(철학적 이해)와 통전 시키려고 했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의 본래 모습과 ‘정통성’ 자체가 이미 그 당신 철학에 의해 표현되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과정신학자들 역시 시도하는 바가 결국 그 본질에서 기독교신앙을 철학의 개념적 언어로 표현함으로써 그 시대적 의미를 주려했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에 의하여 영감된 사건들과 전통 속에 있는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기 위해서 과정적이고도 유기적인 철학 양태를 사용하는 신학이다. 여기서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을 사용한다는 것이 기존의 신학이 사용했던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사용한 것과는 다르다. 기존의 정체되고 절대 공간적 양태로 파악하던 신학에서 변화와 과정적 이해와 같은 경향의 신학으로 변하여 가고 있는 것이다.
4. 과정철학의 기본 개념들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을 이해하려고 할 때 부딪히는 첫 문제는 종래의 철학과는 전혀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고 전통 철학적 용어라 하여도 전혀 새로운 의미를 거기에 부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의 근본적인 통찰은 실재란 상호 관련된 생성의 연속(series of interrelated becoming)이란 점이다. 어떻게 한 사물이 있는(is) 그대로의 사물로 구성되어지는(become)가 라는 것이 근본문제이다. 되어 가는 과정이란 성취되어진 존재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며, 그래서 이것이 철학적 연구에서 더 중요하다. 존재(being)를 대부분의 철학자들이 실체적(substantive) 명사로 사용하지만 실제로 그것은 동사(verb)라는 사실이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과거의 시간적인 내포(內包)가 존재들(beings)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말할 때 상실되어 왔기 때문에 ‘되어 가는(becoming)'이란 말을 더 철학적으로 적합한 것으로 선택한 것이다.
실재에 대한 이러한 시간적 차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체적(static)실재 이해에서 벗어나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 내지 않을 수 없게 한 것이다. 이것을 알 수 있는 단편적인 예는 “가장 작은 실재의 단위가 무엇이냐?”라고 물으면 아마도 원자(an atom), 혹은 전자(an electron)라고 대답할 것이다. 이와 같은 대답의 문제점은 ‘되어감(becomes)'으로써의 물질의 단위조각(tiny bits)을 생각하고 있지 않고 ’있음(beings)'으로써 그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사고를 정체된 철학의 틀 속으로 응고시키는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어 이런 정체된 사고를 벗어나게 했다. 실재의 근본적인 요소들은 사실계기(actual occasions)이다. 이것을 사실체(actual entities), 혹은 경험의 사실계기(actual occasions of experience)라고도 사용했다.
화이트헤드는 물질의 단위조각 대신에 우리는 경험의 순간들(moments of experience)로써 실재의 기본단위를 생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즉 경험의 순간들이 실재의 근본적 요소들을 이해하는데 더 알맞은 모델을 제공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물의 단위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시간적 의미가 함축된 내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실재를 경험의 순간들이 구성한 것으로 생각할 때 우리는 실재를 항상 되어감(becoming)으로써 의식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계기(actual occasions)는 화이트헤드 사상의 중심 개념이다. 이것은 세계가 구성되어지는 마지막 참된 실재(the final real things)이다. 이것보다 더 궁극적 실재는 없고 그것을 밑받침하는 다른 실재도 없다. 신에서부터 미미한 존재에 이르기까지 실재하는 모든 것은 사실체들로 설명될 수밖에 없다. 사실체 밖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다.
이점에 관해서 분명히 밝혀 놓을 것은 경험을 의식할 필요가 없다. 왜냐면 모든 것은 경험한다. 경험은 모든 실재 사물들에 가장 근본 되는 것이다. 실재는 상호 연관되어져 있고 그 성격에서 과정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화이트헤드의 철학에서 다른 근본적인 실체는 ‘영구적 대상(eternal object)'이라는 것이다. 영구적 대상은 순수한 가능성들이다. 이 말은 플라톤의 형식(forms)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보편성(universals)과 같은 것으로 그것은 추상적인 것이다. 그러나 희랍철학자들의 그것과는 다르다. 왜냐하면 ’영구대상‘은 사실체 속에서 존재의 실재적 양상(real mode of existence)이기 때문이다. 영구대상은 다른 영구대상과도 서로 관계를 맺는다. 왜냐하면 관계성이란 추상적 단계에서도 이루어지는 유기체의 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영구대상은 매우 다양한 상황 속에서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이 나타날 때마다 그들은 항상 같다. 그러나 그것들은 분명히 드러나는 사실체들을 떠나서는 독립된 혹은 이상적인 실존을 가지지 못한다. 그들은 사실화(actualization)를 위한 유용한 단순한 기능에 불과 하다. 즉 잠재적 가능성(potential)이다.
모든 사실계기가 경험의 주체라는 것은 우리들을 세 번째 중요한 개념을 이끌어 가고 있다. 즉 ‘파지(prehension,把持)'라는 개념이다. 얼핏 보기에는 이 말이 ’파악(apprehension)'이란 말의 잘못된 기록인 것으로 생각하지만 두 말 모두는 라티어의 ‘갖는다(to take)’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파악’이란 말은 객관을 인지하고 미래를 위해 객관을 받아들이는 것을 평가하는 주관의 행위이다. 그러나 이런 의미로 주관이 객관을 붙잡고 이해하기 전에 주관은 객관에 관계되어져야만 한다. 어떤 것에 관계되어 진다는 사실은 객관의 주관적 인지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화이트헤드는 ‘파지’란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the concrete facts of relatedness)이라고 했다.
파지를 이해하는데 또 다른 길은 ‘느낌(feeling)'이란 말을 통해서이다. 사실계기, 혹은 ’경험의 순간‘이 나타남에 따라서 그것은 제 자신의 우주 속에 있는 그것에 유용한 모든 자료들을 ’느낀다(feels)‘. 이것들이 바로 사실계기의 파지이다. 느낌에는 ’물리적 느낌(physical feeling)'과 ‘관념적 느낌(conceprual feeling)'의 두 가지가 있다.
물리적 파지란 나타나는 실체를 직접적인 과거의 사실계기에 관계시키는 것이다. 직접적 과거의 사실계기는 자기 범위(scope) 내에서 물리적 파지를 ‘느끼게’ 한다. 개념적 파지란 관련되어 있는 영구적 대상들에 대한 ‘느낌들(feelings)'이다.
* 과정신학 過程神學 (process 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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