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않은여행p265-메릴린퍼거슨_오스기니스와의대화중에서
<소명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 :오스 기니스와의 대화>
커크 웹/김종철 옮김
커크 웹: 당신은 통찰력 있는 문화 분석가로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당신의 책 [소명]을 보면,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오스 기니스: '소명'은 나에게 지난 30년 동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또한 이제 나는 무엇인가 건설적인 일들--단순한 문화 비평뿐 아니라 복음이 가진 핵심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일들--로 방향을 트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60년대 초, 그분을 알아 가는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마음 한 곳에서는 "왜 현대 사회에서는 믿음이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너무나 하찮게 취급되는가"하는 문제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믿음이 역동적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을 살펴보았고 그것의 동인(動因)이 된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하였습니다.
연구를 거듭해 갈수록 그 동인으로 보여지는 두, 세 가지의 진리가 계속해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소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역사의 발전--시내 산에서의 유대 민족의 형성, 갈릴리 지방에서의 기독교 운동, 17세기의 종교개혁, 기독교 신앙에 의한 근대적 세계의 형성, 청교도 운동 등--뒤에는 언제나 '소명'이라는 진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소명'의 개념이 혼동되고 왜곡되어진 오늘날,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소명관'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웹: 왜곡이라면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기니스: 첫 번째 왜곡은 내가 '구교적(舊敎的) 왜곡'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성스러운/세속적인, 높은/낮은 이라는 구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분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기원은 에우스비우스같은 사람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 그는 이 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그리스도인과 '용인된'그리스도인이라는 두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신부, 수녀 그리고 제사장과 같이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고, '용인된 그리스도인'이란 군인, 농부, 상인과 같이 '평범한 일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영적인 계급 같은 것을 낳았습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왜곡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뿌리깊게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말이죠! 그것은 "전임(專任) 사역"과 같은 말들이 우리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왜곡은 내가 '신교적(新敎的) 왜곡'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소명'에 대한 영적 개념화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소명'을 직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 직업과 일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직업', 즉 사람들이 하는 '일'이 '소명'이라는 말과 실질적인 동의어가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직업은 신성화된 반면, '소명'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세속화되었습니다. 신교적 왜곡도 그 방향만 반대일 뿐이지 구교적 왜곡만큼이나 해악이 큽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 균형을 찾아보려고 애써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에 의한, 주님을 위한, 주님에 대한 소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소명입니다. 이 부르심은 무엇(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가르치는 일, 정치하는 일)으로의 부르심, 어디(법조계, 캠퍼스, 아프리카)로의 부르심에 앞선 누구(하나님)에게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근본적인 소명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수적인 소명입니다. 내가 소명을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나누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순서를 뒤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근본적인 것은 언제나 부수적인 것 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점에서 모두 실패하였고 그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말한 왜곡의 두 형태입니다.
웹: 많은 사람들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고들 합니다. 중년의 위기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자신의 직업 혹은 소명이나 가치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위기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어떠한 영적, 심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기니스: 많은 이들이 가지는 중년의 위기는 '소명'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직업을 선택했던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사람들은 직장을 선택할 때에 그 일과 나에게 주어진 재능이 맞는가를 고려하기보다, 얼마나 돈을 벌 수 있고 얼마나 유망하냐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4·50대에는 자기에게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꼴은 못 보겠다"라든지 "이 일은 정말 내일이 아냐"라고 투덜대기 시작하는 거죠.
이 점에 있어서는 이러한 위기의식은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사람들이 그 시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나를 진지하게 살펴볼 수 만 있다면, 그러한 위기의식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이 무엇이고, 소명이 무엇인가를 살펴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었습니다. 돈이나 성공, 명성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한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입니다.
웹: 교회 역시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바로 발견하도록 잘 도와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니스: 교회가 '구교적 왜곡'을 받아들여 목사나 선교사 같은 일들을 영적으로 더 높게 취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교적 왜곡'에 영적, 종교적 포장을 씌워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전략적인 직업 혹은 전략적인 소명'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자신들이 마치 '소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특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법조계로 진출해야한다" 혹은 "우리는 모두 미전도 종족에게로 가야한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터무니없는 주장들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를 지으신 분은 어떤 분이신가? 나에게 주어진 재능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의 재능과 소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진지하게 씨름하지 못하게 하는 엉터리 가르침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형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명이 무엇인지 찾게 해주는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해 오고는 있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교회에 봉사하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즉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해준 뒤 곧 바로 교회에서 필요한 여러 일들을 시키는 거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할 일은 사람들의 영적인 재능뿐 아니라 자연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의도하시고 맡겨주신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합니다.
웹: 영적인 재능과 자연적인 재능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기니스: 영적인 재능은 '제도로서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재능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재능을 그렇게 협소하게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재능을 '제도로서의 교회' 뿐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관련해서도 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워싱턴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마침 '소명 확인 주일'이라고 불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목사님이 하신 소명에 관한 설교는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끝난 후 목사님은 "내가 여러분의 소명을 하나씩 부를테니, 자기 소명이 호명(呼名)되면 일어나십시오. 그럼 예배 후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명이라는 것이 전부 '제도로서의 교회'와 관계되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진 언론인 몇 명이 다니고 있었지만, 그 예배가 끝나도록 그들에게 일어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재능은 '제도로서의 교회'에서는 그리 쓸모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능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던 거죠. 이 모든 것이 신학적인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웹: 당신이 말한 오류란 교회가 사람들의 재능을 단지 '제도적인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만 보게 한다는 말입니까?
기니스: 네. 교회는 사람들의 재능과 소명을 바로 알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소명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웹: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교회가 이원론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니스: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교황이 개신교보다 더 종교 개혁 정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개신교도들이 루터가 배척한 구교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교가 우리보다 하나님의 소명이나 일에 대해 더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자들이나 뉴 에이지 운동가들조차도 '소명'이라는 말을 가지고 일의 존귀함을 회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메를린 퍼거슨과 같은 작가들도 자신의 책에서 '소명과 일'이라는 주제로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의 존귀함이 상실된 오늘날, 우리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도 알고 있듯이, "부르는 자가 없는데, 부르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소명을 완전히 뉴 에이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토마스 무어에게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소명에 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 의해 더 강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록 그들이 소명의 올바른 의미를 모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웹: 사회도 뉴 에이지 주장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만은 그러치 않은 것 같은데요.
기니스: 청교도 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육체 노동의 존귀함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17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인 존 코튼의 초기 글들을 이러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작은 일은 그냥 작은 일이지만, 주께 하듯이 하면 큰 일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조지 허버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청소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서도 중요성과 거룩함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들이 품었던 '소명'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소명'에 대한 종교개혁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진보 진영이건, 보수진영이건 마찬가지입니다. WCC는 '책임 있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뉴트 깅그리치를 비롯한 공화당원들은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미국과의 계약]에서 '개인 책임 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책임에 대해서 한마디씩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모든 덕(德)이 상실되었다는 주장 속에서도, '책임'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덕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전까지 만해도 '책임'은 덕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하나의 당연한 전제요, 기초 개념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책임'이 덕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도 바뀌었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이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에서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책임"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이제 현대인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몸을 위할 책임이 있고 환경보전을 위할 책임이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할 책임이 있지만,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인 responsibility--'응답하다'인 response와 '할 수 있는'의 able 그리고 '명사형 접미사'인 ity로 이루어져 있는--를 살펴보면, 우리는 책임이라는 말이 누구에 대한 책임일 뿐 아니라 그 말이 어원적으로 부르심이라는 말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책임은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이며, 우리는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응답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는 책임은 누구에 혹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우리는 마지막날 우리의 사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책임을 져야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잡지로부터 시작해서 심리학까지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흡족한 대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막스주의자들은 인간을 계급이라는 범주로, 페미니스트들은 성(性)이라는 범주로, 어떤 사람들은 인종이라는 범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여러 가지 범주를 나눈 뒤, 인간을 그 범주에 '귀속(歸屬)된 존재'로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류층에 속한 백인 남자' 이것이 나의 정체성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의 문제점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일성이 범주라는 일반적 것에 함몰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입장은 내가 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첫 번째 것과는 상반되는 두 번째 입장은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운명의 주인은 바로 너다"라는 말은 이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신뢰해서 계속 살아갈 정도로 우리가 강하고 슬기롭고 부(富)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대부분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 특히 토마스 무어의 친구인 제임스 힐만이 주장하는 입장은 인간을 '운명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팔자에 의해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이 취하고 있는 '미리 결정되어졌다'는 사상 자체가 이 입장의 취약성을 보여줍니다.
이 각각의 입장은 어느 정도 부분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존재'입니다. 무한하시지만 인격적이신 부르시는 자(하나님)는 우리 각자--유일하고 귀하며 개성이 서로 다르며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를 부르셔서 교제 가운데 이끄시고 어떠 어떠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분은 우리를 이끄셔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 분의 응답에 반응하지 않거나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거나 고착된 것이 아닙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우리가 자신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을 벗어버리고 그것을 주님께 맡기면 맡길 수록, 우리는 더욱 참된 '자아'를 얻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웹: 당신은 이제까지 해온 문화 비평 작업을 계속하실 겁니까?
기니스: 나는 복음을 우리 세대가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을 나의 소명으로 삼고 있습 니다. 즉 변증학의 영역이죠. 하지만 세상을 교회가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 또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 분석 내지는 문화 비평인데, 나는 교회를 위해서 이 시대의 표지가 무엇이고 또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웹: 과거 라브리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당신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의 힘과 지식을 과신하여 이 시대의 흐름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나폴레옹이나 시저 같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상황이 다릅니다.
웹: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실 지 간략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기니스: 70년대 초 라브리를 떠나면서, 나는 앞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한 25가지 책 제목을 일기장 앞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아직 11 권밖에 쓰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계속 쓸 작정입니다. 내가 제일 쓰고 싶은 책은 기독교 변증에 관한 책입니다. 이미 변증학에 대해서 나는 1권의 책을 낸 바가 있지만, 이제는 매우 실제적인 관점에서 변증학을 다루고 싶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로 복음을 설명해주는 그런 책 말입니다.
자료출처:http://www.sisim.or.kr/bbs/view.asp?index=book&page=7&no=17&curRef=17&curStep=0&curLevel=0&bbsName=%C6%DB%BF%C2%B1%DB
커크 웹/김종철 옮김
커크 웹: 당신은 통찰력 있는 문화 분석가로 널리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나온 당신의 책 [소명]을 보면, 새로운 방향전환을 모색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오스 기니스: '소명'은 나에게 지난 30년 동안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또한 이제 나는 무엇인가 건설적인 일들--단순한 문화 비평뿐 아니라 복음이 가진 핵심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일들--로 방향을 트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주님께 돌아온 60년대 초, 그분을 알아 가는 기쁨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마음 한 곳에서는 "왜 현대 사회에서는 믿음이 감상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너무나 하찮게 취급되는가"하는 문제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믿음이 역동적으로 사회에 영향력을 발휘하던 시절을 살펴보았고 그것의 동인(動因)이 된 진리가 무엇인지 연구하였습니다.
연구를 거듭해 갈수록 그 동인으로 보여지는 두, 세 가지의 진리가 계속해서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소명'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역사의 발전--시내 산에서의 유대 민족의 형성, 갈릴리 지방에서의 기독교 운동, 17세기의 종교개혁, 기독교 신앙에 의한 근대적 세계의 형성, 청교도 운동 등--뒤에는 언제나 '소명'이라는 진리가 중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소명'의 개념이 혼동되고 왜곡되어진 오늘날, 성경에 기초한 올바른 '소명관'을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의 본래의 모습과 영향력을 회복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웹: 왜곡이라면 무엇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까?
기니스: 첫 번째 왜곡은 내가 '구교적(舊敎的) 왜곡'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성스러운/세속적인, 높은/낮은 이라는 구분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분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기원은 에우스비우스같은 사람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데 그는 이 틀을 가지고 그리스도인들을 '완전한'그리스도인과 '용인된'그리스도인이라는 두 부류로 구분했습니다. '완전한 그리스도인'은 신부, 수녀 그리고 제사장과 같이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고, '용인된 그리스도인'이란 군인, 농부, 상인과 같이 '평범한 일거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왜곡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영적인 계급 같은 것을 낳았습니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교부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왜곡의 영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오늘날에도 우리 가운데 뿌리깊게 남아있습니다. 심지어 복음주의권 내에서도 말이죠! 그것은 "전임(專任) 사역"과 같은 말들이 우리 가운데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왜곡은 내가 '신교적(新敎的) 왜곡'이라고 명명한 것으로, '소명'에 대한 영적 개념화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소명'을 직업을 포괄하는 개념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이는 바람직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후 직업과 일이 너무 강조된 나머지 '직업', 즉 사람들이 하는 '일'이 '소명'이라는 말과 실질적인 동의어가 되어버렸다는 점입니다.
산업혁명이 한창일 때, 직업은 신성화된 반면, '소명'이라는 개념은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는 의미로 세속화되었습니다. 신교적 왜곡도 그 방향만 반대일 뿐이지 구교적 왜곡만큼이나 해악이 큽니다.
나는 이 두 가지 왜곡을 극복할 수 있는 균형을 찾아보려고 애써왔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에 의한, 주님을 위한, 주님에 대한 소명이 있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소명입니다. 이 부르심은 무엇(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가르치는 일, 정치하는 일)으로의 부르심, 어디(법조계, 캠퍼스, 아프리카)로의 부르심에 앞선 누구(하나님)에게로의 부르심입니다. 그런데 한편으로 이 근본적인 소명을 따르고자 할 때 우리가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행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부수적인 소명입니다. 내가 소명을 근본적인 것과 부수적인 것으로 나누는 데는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이 두 가지를 함께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순서를 뒤바꾸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근본적인 것은 언제나 부수적인 것 보다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교회는 이 두 가지 점에서 모두 실패하였고 그것이 바로 내가 앞에서 말한 왜곡의 두 형태입니다.
웹: 많은 사람들이 중년에 접어들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낀다고들 합니다. 중년의 위기라고나 할까요. 이렇게 자신의 직업 혹은 소명이나 가치에 대해서 충격을 받고 위기의식을 가진다는 사실은 어떠한 영적, 심리적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까?
기니스: 많은 이들이 가지는 중년의 위기는 '소명'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직업을 선택했던 데서 기인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뭔가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는 거죠.
사람들은 직장을 선택할 때에 그 일과 나에게 주어진 재능이 맞는가를 고려하기보다, 얼마나 돈을 벌 수 있고 얼마나 유망하냐에 따라 선택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 4·50대에는 자기에게 맞지 않은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더 이상 내가 이 일을 계속하는 꼴은 못 보겠다"라든지 "이 일은 정말 내일이 아냐"라고 투덜대기 시작하는 거죠.
이 점에 있어서는 이러한 위기의식은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한 편으로 사람들이 그 시점에서 자신이 어떻게 했어야 했나를 진지하게 살펴볼 수 만 있다면, 그러한 위기의식은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능이 무엇이고, 소명이 무엇인가를 살펴 직업을 선택해야만 했었습니다. 돈이나 성공, 명성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직업을 선택한다면, 누구나 필연적으로 그러한 문제에 봉착하기 마련입니다.
웹: 교회 역시 그리스도인들 각자가 자신의 재능을 바로 발견하도록 잘 도와주지 못한 것 같습니다.
기니스: 교회가 '구교적 왜곡'을 받아들여 목사나 선교사 같은 일들을 영적으로 더 높게 취급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신교적 왜곡'에 영적, 종교적 포장을 씌워 사람들을 오도하는 것 또한 큰 문제입니다. 그들은 '전략적인 직업 혹은 전략적인 소명' 같은 용어들을 사용합니다. 자신들이 마치 '소명'을 결정할 수 있다는 듯이 말이죠.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오늘날은 특별히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법조계로 진출해야한다" 혹은 "우리는 모두 미전도 종족에게로 가야한다"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터무니없는 주장들입니다. 우리 각자는 "나를 지으신 분은 어떤 분이신가? 나에게 주어진 재능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이제 무엇을 해야하는가?"라는 말밖에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에는 "나의 재능과 소명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진지하게 씨름하지 못하게 하는 엉터리 가르침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일부 대형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소명이 무엇인지 찾게 해주는 새로운 기술들을 개발해 오고는 있지만, 그것들의 대부분은 교회에 봉사하게 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합니다. 즉 교회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영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해준 뒤 곧 바로 교회에서 필요한 여러 일들을 시키는 거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사람들을 고용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진정으로 해야할 일은 사람들의 영적인 재능뿐 아니라 자연적인 재능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의도하시고 맡겨주신 일들을 잘 할 수 있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어야 합니다.
웹: 영적인 재능과 자연적인 재능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기니스: 영적인 재능은 '제도로서의 교회'의 사역을 위한 재능을 말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의 재능을 그렇게 협소하게만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재능을 '제도로서의 교회' 뿐 아니라 '유기체로서의 교회'와 관련해서도 보아야 합니다.
한번은 워싱턴에 있는 어느 교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그 날은 마침 '소명 확인 주일'이라고 불리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목사님이 하신 소명에 관한 설교는 내가 이제껏 들어본 것 중에 가장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설교가 끝난 후 목사님은 "내가 여러분의 소명을 하나씩 부를테니, 자기 소명이 호명(呼名)되면 일어나십시오. 그럼 예배 후 제가 기도해드리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가 말하고 있는 소명이라는 것이 전부 '제도로서의 교회'와 관계되는 것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 교회에는 매우 잘 알려진 언론인 몇 명이 다니고 있었지만, 그 예배가 끝나도록 그들에게 일어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재능은 '제도로서의 교회'에서는 그리 쓸모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재능으로 취급받지 못하였던 거죠. 이 모든 것이 신학적인 오류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웹: 당신이 말한 오류란 교회가 사람들의 재능을 단지 '제도적인 교회'와의 관련 속에서만 보게 한다는 말입니까?
기니스: 네. 교회는 사람들의 재능과 소명을 바로 알도록 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소명에 따라 살 수 있도록 그들에게 힘을 실어 주어야 합니다.
웹: 당신의 말을 듣고 보니 교회가 이원론을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기니스: 안타깝게도 그게 사실입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의 교황이 개신교보다 더 종교 개혁 정신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개신교도들이 루터가 배척한 구교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교가 우리보다 하나님의 소명이나 일에 대해 더 건전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무신론자들이나 뉴 에이지 운동가들조차도 '소명'이라는 말을 가지고 일의 존귀함을 회복하려 하고 있습니다. 메를린 퍼거슨과 같은 작가들도 자신의 책에서 '소명과 일'이라는 주제로 한 장(章)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일의 존귀함이 상실된 오늘날, 우리는 '소명'이라는 개념을 재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녀도 알고 있듯이, "부르는 자가 없는데, 부르심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은 소명을 완전히 뉴 에이지적인 개념으로 파악하는 토마스 무어에게도 나타납니다. 이처럼 소명에 관한 가르침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에 의해 더 강조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비록 그들이 소명의 올바른 의미를 모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웹: 사회도 뉴 에이지 주장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흐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교회만은 그러치 않은 것 같은데요.
기니스: 청교도 운동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는 육체 노동의 존귀함에 대한 강조였습니다. 17세기의 유명한 설교가인 존 코튼의 초기 글들을 이러한 사실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작은 일은 그냥 작은 일이지만, 주께 하듯이 하면 큰 일이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조지 허버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청소 일을 하는 사람에 대한 시를 쓰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하찮고 의미 없어 보이는 일에서도 중요성과 거룩함을 발견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바로 청교도들이 품었던 '소명'의 중요한 의미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잊고 있었던 '소명'에 대한 종교개혁의 뿌리를 찾아야 합니다.
'책임'이라는 말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어있습니다. 그것은 진보 진영이건, 보수진영이건 마찬가지입니다. WCC는 '책임 있는 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뉴트 깅그리치를 비롯한 공화당원들은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던 [미국과의 계약]에서 '개인 책임 법'에 대해서 말합니다. 모든 사람이 책임에 대해서 한마디씩하고 있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이상한 일이 벌어졌는데, 모든 덕(德)이 상실되었다는 주장 속에서도, '책임'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덕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19세기 전까지 만해도 '책임'은 덕으로 여겨지기 보다는 하나의 당연한 전제요, 기초 개념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이처럼 '책임'이 덕이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의미도 바뀌었습니다. 책임이라는 말이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에서 "누구를 위한 또는 무엇을 위한 책임"으로 그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이제 현대인의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몸을 위할 책임이 있고 환경보전을 위할 책임이 있고 여러 가지 것들을 위할 책임이 있지만,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책임'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인 responsibility--'응답하다'인 response와 '할 수 있는'의 able 그리고 '명사형 접미사'인 ity로 이루어져 있는--를 살펴보면, 우리는 책임이라는 말이 누구에 대한 책임일 뿐 아니라 그 말이 어원적으로 부르심이라는 말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책임은 누구에 대한 또는 무엇에 대한 책임이며, 우리는 응답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어졌고, 응답하도록 부르심을 입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는 책임은 누구에 혹은 무엇에 대한 것입니까? 우리는 마지막날 우리의 사회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책임을 져야합니다.
사람들은 오늘날 현대인들은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다고들 합니다. 잡지로부터 시작해서 심리학까지 이 문제를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아무 것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흡족한 대답을 주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막스주의자들은 인간을 계급이라는 범주로, 페미니스트들은 성(性)이라는 범주로, 어떤 사람들은 인종이라는 범주로 설명하려고 합니다. 즉 여러 가지 범주를 나눈 뒤, 인간을 그 범주에 '귀속(歸屬)된 존재'로 파악하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중류층에 속한 백인 남자' 이것이 나의 정체성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의 문제점은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유일성이 범주라는 일반적 것에 함몰되어 버린다는 사실입니다. 이 입장은 내가 왜 이 세상에서 유일한 존재인지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이 첫 번째 것과는 상반되는 두 번째 입장은 인간을 '스스로 만들어 가는 존재'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실존주의적인 입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네 운명의 주인은 바로 너다"라는 말은 이 입장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이 입장을 신뢰해서 계속 살아갈 정도로 우리가 강하고 슬기롭고 부(富)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대부분은 다른 요인들에 의해 심각한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뉴 에이지 운동가들, 특히 토마스 무어의 친구인 제임스 힐만이 주장하는 입장은 인간을 '운명적인 존재'로 파악하는 것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팔자에 의해 살아갈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입장이 취하고 있는 '미리 결정되어졌다'는 사상 자체가 이 입장의 취약성을 보여줍니다.
이 각각의 입장은 어느 정도 부분적인 진리들을 담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르심을 입은 존재'입니다. 무한하시지만 인격적이신 부르시는 자(하나님)는 우리 각자--유일하고 귀하며 개성이 서로 다르며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를 부르셔서 교제 가운데 이끄시고 어떠 어떠한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그의 부르심에 응답할 때, 그분은 우리를 이끄셔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우리를 빚어 가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가 그 분의 응답에 반응하지 않거나 거부하지 않는 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거나 고착된 것이 아닙니다. 씨 에스 루이스는 "우리가 자신의 '자아'라고 부르는 것을 벗어버리고 그것을 주님께 맡기면 맡길 수록, 우리는 더욱 참된 '자아'를 얻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웹: 당신은 이제까지 해온 문화 비평 작업을 계속하실 겁니까?
기니스: 나는 복음을 우리 세대가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일을 나의 소명으로 삼고 있습 니다. 즉 변증학의 영역이죠. 하지만 세상을 교회가 잘 알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 또한 내가 하고 싶어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문화 분석 내지는 문화 비평인데, 나는 교회를 위해서 이 시대의 표지가 무엇이고 또한 우리가 지금 어디에 있는가를 성경적으로 분석하고 비평하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할 겁니다.
웹: 과거 라브리에서의 경험이 지금의 당신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식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의 힘과 지식을 과신하여 이 시대의 흐름을 쉽게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문제입니다. 과거에는 나폴레옹이나 시저 같은 한 사람에 의해 그 시대의 흐름이 바뀌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늘날은 상황이 다릅니다.
웹: 앞으로 어떤 일들을 하실 지 간략하게 말씀해주시겠습니까?
기니스: 70년대 초 라브리를 떠나면서, 나는 앞으로 써야겠다고 결심한 25가지 책 제목을 일기장 앞에 적어두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중 아직 11 권밖에 쓰지 못했습니다. 주님이 허락하시는 한 계속 쓸 작정입니다. 내가 제일 쓰고 싶은 책은 기독교 변증에 관한 책입니다. 이미 변증학에 대해서 나는 1권의 책을 낸 바가 있지만, 이제는 매우 실제적인 관점에서 변증학을 다루고 싶습니다. 비 그리스도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들로 복음을 설명해주는 그런 책 말입니다.
자료출처:http://www.sisim.or.kr/bbs/view.asp?index=book&page=7&no=17&curRef=17&curStep=0&curLevel=0&bbsName=%C6%DB%BF%C2%B1%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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