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마스 아 캠피스 (Thomas A Kempis)_그리스도를 본받아 에
토마스 아 캠피스 (Thomas A Kempis)_그리스도를 본받아 에 대한 비판적 고찰
(자료출처 http://orthodoxy.tistory.com/405)그리스도를 본받아 에 대한 비판적 고찰기독교, 책을 말하다 2012/03/20 04:11책제목: 그리스도를 본받아 (The Imitation of Christ)저자: 토마스 아 캠피스 (Thomas A Kempis)성향: 가톨릭적토마스 아 켐피스 지음, 이장호 옮김/엔크리스토* 본 서평은 개신교의 몇몇 신학적 전제에 따라 비판되었습니다. 가톨릭 신자들과 달리, 개신교도들에게 이 책은 어느 정도 조심성을 지니고 볼 필요가 있는 책입니다.이 책은 수많은 판본과 번역본을 통해 가톨릭 진영뿐만 아니라, 개신교에서도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이 이 책의 대중적 인기를 잘 보여줍니다. 이 책은 지금까지 나온 기독교 서적 중 가장 유명하고 독자들의 사랑을 많이 받아온 책이며, 이러한 이 책에 담긴 가톨릭적 영성은 개신교의 감리교 창시자 존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에게까지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 책은 "종교적 개인주의와 인간이나 물질에 치우쳤던 마음을 돌려 오직 하나님만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샐리 커닌)하기도 했는데, 그러나, 필자는 커닌의 말대로 이 책이 "기독교인이나 가톨릭 신자 모두가 받아들이기에 무리가 없다"고는 쉽사리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이 책은 예리한 정신을 지닌 개신교 신자들의 입장에서 그저 있는 그대로 보아주기에는 다소 불편한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 이 책은 교회 안에서 폭넓게 영향을 미친 실제적인 맥락에서 공로를 얻기 위한 자기금욕이 가장 주목할 만한 점으로 부각되기 때문입니다. 토마스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고 감각의 쾌락들을 떠나 '영적인'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가톨릭 윤리관은 전형적으로 육체의 욕구를 억제하는 규율 실행을 통한 개인적인 특정 "덕목"들을 향상을 추구합니다. 이는 주로 '육체'를 억제하기 위한 구체적인 훈련을 강조합니다. 육체적, 감각적 삶은 악으로 간주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이나 하나님의 은혜와의 협력을 통해 이런 악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헌신과 훈련에 대해 가장 폭넓게 알려진 가톨릭교회의 교본은 바로 토마스 아 캠피스의 이 책이 될 것입니다.아 캠피스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그의 전 삶을 바치며," "보이지 않는 것을 떠나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추구하며," "감각적 쾌락을 제어하며," "참된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 육체적 소욕에 저항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자신에 대해 더욱 엄격하고 내적인 일에 몰두하면 할수록 우리는 신적인 것들을 맛볼 수 있으며," "고난과 슬픔은 자신으로 하여금 세상에 빠지지 않게 하기에 유익하며," "먼저 중심을 자신에게 두고," "자기 자신과 죄에 대해 염려해야 하야 심판 날을 면한 것이며," "자기 자신에 대해 가혹하면 가혹살수록 은혜 안에서 자신의 성장은 더욱 증진될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여기서 그의 좀 더 신비적인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넘어 영 안으로 고양될 수 있으며," "영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며," "거룩한 십자가와 날마다의 금욕의 길 이외에 생명과 참된 내적 평화를 얻을 다른 길은 없다"고 계속적으로 반복합니다. 전체적으로 토마스 아 캠피스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금욕의 모범이며,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의 금욕, 즉 그의 금욕적이고 수도원적인 훈련, 감각세계를 떠나 영의 세계로의 그의 비상을 본받는 과정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 캠피스의 이 책에서 드러나는 생각을 중심으로 우리는 - 결국에는 매우 미묘한 신학적 차이에서 시작하는 - 가톨릭의 윤리관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확고한 반대를 표합니다.첫째, <은혜를 얻는 수단>으로서의 자기 부인은 <은혜의 표현>으로서의 자기 부인에 반대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이 책으로 대변되는 가톨릭교회의 경건과 심지어 개신교의 경건조차 이러한 가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무리하게 하나로 조합하려 할 경우, 그것은 너무나도 비성서적이고 또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행동하셨다는 선행하는 사실의 인정을 결하고 있기 때문에 이는 신학적으로나 심지어 경건의 실천상으로도 변호될 수 없습니다.둘째, 이 책을 대표로 하는 책들에 대하여 제기하는 질문은 이런 전통의 <인간의 노력>이 얼마나 <하나님의 행위>를 주시하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 용어로 이를 환언하면, 은혜가 먼저이고, 행위가 그 뒤에 줄을 섭니다. 우리는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항상 그리스도의 복종하게 하는 능력에 의존해야 합니다. 다시 반복하면 개신교의 인간상은 하나님의 행동action에 대한 반작용reaction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책 부류는 마치 우리 자신의 노력이 하나님의 은혜에 선행하는 듯한 쉽사리 부정될 수 없는 '인상'을 줍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자기금욕을 통해 평화와 행복을 얻기 위한 엄숙한 결단을 수행한다는 것입니다. "값없이 받았으니 값없이 주라"라는 명제가, "당신은 하나님의 사랑과 평화를 얻도록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당함으로써 육신의 정욕으로부터 스스로 자유로워지도록 열심히 노력하라"는 명제로 도치될 경우, 우리의 목표는 자기중심적이 되기 쉽고, 모호한 도덕적 가치 속으로 혼란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관은 언제 기도를 해야 하고, 악한 생각과 습관을 뿌리 뽑는 방법 등의 지엽적인 주제들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내놓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제1부 1장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에 대해", 5장 "성경 읽기에 대하여", 10장 "불필요한 말을 경계하는 것에 대해" 등)셋째, 과연 성서적 근거가 이 책의 저변에 깔린 근본적 생각인 "완전(최고의 선, summum bonum)"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가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최고의 선이라는 개념은 많은 세속의 이상주의적 진영과 같이 가톨릭 신학 진영의 매우 핵심적인 생각 가운데 하나입니다. 최고선이라는 개념에 대한 비판은 우선 이것이 개신교의 입장에서 볼때 이 개념이 철저히 인간학적인 개념입니다. 또한 이 책에서 나오는 최고선은 지금과 영원의 관점에서 나의 평화이고, 나의 행복일 뿐입니다. 이는 성서가 아닌 도덕주의적 인간학적 완전이라는 개념에 의존합니다. 개신교적인 인간상은 철저히 부패한 인간상이 '강조'되는데 반해, 이 책은 가톨릭에서의 인간에 대한 낙관적 관점이 잘 드러납니다. 이 책은 성서를 반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책은 도덕 교과서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영의 영역(평화, 참된 기쁨, 영혼, 선한 모든 것)과 육신의 영역(정욕, 감각, 세상적인 것, 악한 모든 것) 사이를 깊이 분리하는 사고에서 발견됩니다. 즉, 육신에 대한 그의 금욕은 특별히 십자가의 피의 수난에서 완전을 위한 성공적인 투쟁의 최고의 본보기인 것입니다.그러나 개신교의 윤리관 혹은 성서학적인 - 아무리 성서를 뒤틀어 본다고 해도 성서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 인물들과 역사상의 교회, 그리스도, 그리스도인의 경험의 증언은 그리스도가 보편적인 도덕적 이상을 넘어서는 존재임을 말합니다. 우리가 역사적으로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는 단순한 이상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서는 분입니다. 특별히 광범위한 개신교의 윤리는 <인간 자신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행위>를 바라봅니다. 이는 특별히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 모든 개신교파들의 동일한 경향성입니다. 확실히 이 개신교의 뿌리는 가톨릭의 뿌리가 되는 윤리관과 너무나 달라서, 개신교만의 것이라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충족시킬 수 있는 도덕적 지침의 원천이 아닙니다. 그는 그의 삶이 그의 신성의 현현과 표현이라는 점에서, 그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라는 점에서 언제나 예상할 수 없고(낯선 의), 언제나 새롭게 다가오는 분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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