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켈러의 신앙고백 나는 신비주의자 입니다.
헬렌켈러가 말하는 사랑
헬렌켈러의 신앙고백 나는 신비주의자 입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conjugiallove/16152056
p168-172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490~430)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 사랑이 인간사에서 차지하는 참된 의미를 간파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들이 결합되는지 알아내려 했던 그는, 그 원소로서 ‘물’ ‘불’ ‘흙’ ‘공기’를 열거한 다음 ‘사랑’을 덧붙였습니다.
‘그들 중 사랑은, 나머지 원소들과 길이와 폭이 동일한데, 그대는 그것을 멍한 눈으로 보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라보라. 사람 내면에 새겨져, 좋은 생각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람들은 이 사랑을 ‘기쁨’ 또는 ‘아프로디테’라고 부른다. 사랑은 썩을 육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다음,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에, 플라톤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에 크게 감화되어 동시대의 현인들이 사랑에 대해 무정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항의했습니다. 그는 ‘용기’에 대해 쓴 《라케시스(Lachesis)》에서 아래와 같이 부르짖습니다. **
‘다른 신들에게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시와 찬미가를 바치면서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 사랑이 예찬자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현인들은 산문으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들의 미덕을 예찬하고, 심지어 소금의 효용성을 감동적인 필치로 쓰기도 하며, 열렬한 관심을 보일 뿐이다. 오늘날까지 감히 사랑에 대해 찬가를 바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위대한 신은 그토록 철저히 무시당하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비록 아무리 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신들과 사람들, 그리고 우정을 맺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거룩한 결속(holy bond)’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 이후, 증오로 말미암아 귀가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음성을 제외하면, 2천년이 넘는 세월은 헛되이 흘러갔습니다. 다만 이 기간에 이따금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지상의 언어로 옮기려 한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간간히 나타났을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경~1471),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야콥 뵈메, 그리고 그 밖의 신비주의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감연히(과감히)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불가해한 암흑가운데 하염없이 파도치는 광대한 미지의 감성의 바다 속을 깊숙이 응시하였습니다.(나는 그 중에서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깊이 통찰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8세기 냉혹한 이성의 시대에 비로소 사랑은 만물의 중심이자 생명, 그리고 보존자로 다시 빛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근거를 언제나 《성경》에 두고, 《천국의 신비》에서 이 가르침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했으며, 특히《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서는 더욱 조직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 삶을 사랑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여러 상태와 능동성, 능력, 기능과, 건설적이고 감싸주며, 용기를 더해주는 사랑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더욱이 이 예언자는 주목할 만한 의미에서 사랑이 신성과 동일하며, 그 사랑을 “주님이 모든 천사, 모든 영인, 모든 사람의 영혼에 유입하신다(천국의 신비 6058)”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물질세계는 생명을 올바르게 선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결과물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갖는 사랑의 충만함과 경이로움이 드러난다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혼에서 출발한 한줄기 빛이, 무한을 거쳐 귀먹고 눈먼 인간의 정신세계에까지 도달한 것 입니다. 보십시오, 드디어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 플라톤(Platon) B.C. 427년경~B.C. 347년경
**《라케시스(Lachesi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인 모이라이[moiraiː 모이라의 복수형] 중 하나가 라케시스이다. 모이라이에는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여 생명의 실을 짜내는 클로토(Clotho), 개개인의 생애를 마음대로 다루는 라케시스(Lachesis), 그 생명의 줄을 끊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트로포스(Atropos) 등이 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서두에서 그가 언급한 비극적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슬픔에 잠깁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설령 사랑에 대해 생각할지라도 그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시각이나 청각이나 촉각, 또는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이야말로 그의 생명 자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육신의 생명이자 모든 사고의 생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세세한 것들의 생명 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말이나 미소나 눈짓 또는 친절한 행동을 사랑 그 자체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두뇌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고한다거나 몸이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여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의지 및 마음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백합꽃에 손을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그 촉각과 후각이 꽃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냄새와 촉각을 느끼는 것은 나의 코와 피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생명․정신활동 등을 논의할 때는 무엇보다도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분명히 정의 내릴 수 없으므로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교회는 사랑은 무엇을 하게 하는 주체요 실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실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고, 우리 영체는 이러한 사랑으로 형성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실체의 한 징표일 뿐입니다. 사랑은 마치 공기가 촉각․ 후각․ 미각․시각․청각 등에 지각 능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모든 기능을 살아 있도록 만듭니다. .
헬렌켈러의 신앙고백 나는 신비주의자 입니다.
자료출처 http://blog.daum.net/conjugiallove/16152056
p168-172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490~430)는, 사랑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아가 사랑이 인간사에서 차지하는 참된 의미를 간파한 최초의 인물입니다. 이 세상을 구성하는 원소가 무엇이고 어떤 과정을 통해 그것들이 결합되는지 알아내려 했던 그는, 그 원소로서 ‘물’ ‘불’ ‘흙’ ‘공기’를 열거한 다음 ‘사랑’을 덧붙였습니다.
‘그들 중 사랑은, 나머지 원소들과 길이와 폭이 동일한데, 그대는 그것을 멍한 눈으로 보지 말고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바라보라. 사람 내면에 새겨져, 좋은 생각을 하고 선한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사랑이다. 사람들은 이 사랑을 ‘기쁨’ 또는 ‘아프로디테’라고 부른다. 사랑은 썩을 육체를 갖고 있지는 않지만,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들 사이에서 관찰되고 있다.‘
한 세기가 지난 다음, 그리스 철학의 전성기에, 플라톤은 엠페도클레스의 ‘사랑’에 크게 감화되어 동시대의 현인들이 사랑에 대해 무정함에 대해 열변을 토하며 항의했습니다. 그는 ‘용기’에 대해 쓴 《라케시스(Lachesis)》에서 아래와 같이 부르짖습니다. **
‘다른 신들에게는 존경하는 마음으로 시와 찬미가를 바치면서도,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신, 사랑이 예찬자가 없다는 것은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현인들은 산문으로 헤라클레스 같은 영웅들의 미덕을 예찬하고, 심지어 소금의 효용성을 감동적인 필치로 쓰기도 하며, 열렬한 관심을 보일 뿐이다. 오늘날까지 감히 사랑에 대해 찬가를 바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위대한 신은 그토록 철저히 무시당하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비록 아무리 천한 노예라 할지라도 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은 신들과 사람들, 그리고 우정을 맺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 ‘거룩한 결속(holy bond)’에 대한 모독이라는 것입니다.
플라톤 이후, 증오로 말미암아 귀가 어두워진 사람들에게 전한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의 음성을 제외하면, 2천년이 넘는 세월은 헛되이 흘러갔습니다. 다만 이 기간에 이따금 하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것을 지상의 언어로 옮기려 한 용감한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간간히 나타났을 뿐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St. Augustinus),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 1380년경~1471), 스피노자(Baruch Spinoza, 1632~1677), 야콥 뵈메, 그리고 그 밖의 신비주의자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감연히(과감히) 일어섰습니다. 그들은 불가해한 암흑가운데 하염없이 파도치는 광대한 미지의 감성의 바다 속을 깊숙이 응시하였습니다.(나는 그 중에서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흥미 있게 읽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그리고 자신에 대한 사랑을 깊이 통찰했습니다.
스베덴보리는 18세기 냉혹한 이성의 시대에 비로소 사랑은 만물의 중심이자 생명, 그리고 보존자로 다시 빛을 발하게 하였습니다. 그는 근거를 언제나 《성경》에 두고, 《천국의 신비》에서 이 가르침에 대해 상당 부분을 할애하여 설명했으며, 특히《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에서는 더욱 조직적으로 완벽하게 설명했습니다. 그는 모든 인간 삶을 사랑의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의 여러 상태와 능동성, 능력, 기능과, 건설적이고 감싸주며, 용기를 더해주는 사랑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더욱이 이 예언자는 주목할 만한 의미에서 사랑이 신성과 동일하며, 그 사랑을 “주님이 모든 천사, 모든 영인, 모든 사람의 영혼에 유입하신다(천국의 신비 6058)”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물질세계는 생명을 올바르게 선용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온 결과물이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모든 인류에게 갖는 사랑의 충만함과 경이로움이 드러난다는 것도 알려 주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한 영혼에서 출발한 한줄기 빛이, 무한을 거쳐 귀먹고 눈먼 인간의 정신세계에까지 도달한 것 입니다. 보십시오, 드디어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습니다!
* 플라톤(Platon) B.C. 427년경~B.C. 347년경
**《라케시스(Lachesis)》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운명의 세 여신인 모이라이[moiraiː 모이라의 복수형] 중 하나가 라케시스이다. 모이라이에는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여 생명의 실을 짜내는 클로토(Clotho), 개개인의 생애를 마음대로 다루는 라케시스(Lachesis), 그 생명의 줄을 끊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트로포스(Atropos) 등이 있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내적인 본질
《하나님의 사랑과 지혜》의 서두에서 그가 언급한 비극적 상황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슬픔에 잠깁니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알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는 모르고 있다.‥‥ 설령 사랑에 대해 생각할지라도 그에 관한 개념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랑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하거나, 아니면 시각이나 청각이나 촉각, 또는 타인과의 교류를 통해 흘러들어와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이야말로 그의 생명 자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사랑은 육신의 생명이자 모든 사고의 생명일 뿐만 아니라, 모든 세세한 것들의 생명 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사랑스러운 말이나 미소나 눈짓 또는 친절한 행동을 사랑 그 자체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람의 두뇌가 스스로의 능력으로 사고한다거나 몸이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인다고 여기는 것과도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나의 의지 및 마음으로 말미암아 움직입니다. 이는 마치 사람들이 백합꽃에 손을 대고 냄새를 맡으면서 그 촉각과 후각이 꽃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실제로 냄새와 촉각을 느끼는 것은 나의 코와 피부인데도 말입니다. 우리가 사랑․생명․정신활동 등을 논의할 때는 무엇보다도 이런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분명히 정의 내릴 수 없으므로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한 추상적이고 모호한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교회는 사랑은 무엇을 하게 하는 주체요 실체라고 가르칩니다. 사랑은 실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고, 우리 영체는 이러한 사랑으로 형성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실체의 한 징표일 뿐입니다. 사랑은 마치 공기가 촉각․ 후각․ 미각․시각․청각 등에 지각 능력을 부여하는 것처럼 모든 기능을 살아 있도록 만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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