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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아켐피스-신비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토마스아켐피스-신비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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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신비주의, 개혁교회 신학, 그리고 이단 (上)
 2003년 09월 03일 (수) 00:00:00 교회와신앙  webmaster@amennews.com 
정행업 교수 /  대전신대
 
신비주의는 신앙의 심화와 교리적 확신을 가져다주는 종교의 소중한 자산인가, 아니면 종교적 이기주의와 현실도피를 조장하는 이단·사이비 신앙의 온상인가? 정행업 교수(대전신대)의 글 ‘신비주의, 개혁교회 신학, 이단’을 두 차례에 걸쳐 요약 게재한다. 본고를 통해 한국교회가 신비주의를 바르게 이해하고 수용하고 있는지, 또 신비주의의 명암과 그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Ⅰ. 신비주의
신비주의자 버나드(Burnard of Clair-vaux, 1091∼1153)는 “나는 그러한 경험(신비경험)을 하도록 허락받기는 했으나, 그것을 표현하도록 허락받지는 못했다”고 했듯이 신비주의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신비주의에 대해서 대표적인 정의를 열거해 본다.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됨”(Thomas Aqunas).
“신비주의란 살아계신 하나님의 현존을 영혼, 또는 자연 속에 실현하려는 시도이다. 현실이 영원 속에 있고 영원이 현실속에 있는 것을 사상과 감정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W.R.Inge).

“인간이 지상적인 것과 초지상적,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과의 사이에 조격이 극복되었다고 보고 스스로는 아직 지상적, 시간적인 것 속에 있으면서도 초지상적인 영원한 것 속에 잠입해 있다고 체험하는 경우, 이것이 곧 신비주의이다”(Albert Schweitzer).
 
“신비경험은 종교적인 맥락에서의 경험이며 비이성적인 방법으로 궁극적이며 신적인 실재와 대면한 것으로 해석되는 그러한 경험인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즉각적으로 또는 경험 후에 시도되는 것이지만, 이와 같은 경험에서 깊은 일체감과 생동감이 형성되는 것이며, 일상적인 영역이 아닌 다른 영역에서 그것이 발생하는 것이다”(Roerrts S.Ellwood).

이러한 정의를 종합해 보면 신비주의란 절대자(신)와의 합일이나 연합을 경험하고 황홀경의 경지에 이름을 말한다.

여기에 이르는 방법은 이성이나 감각을 초월하여 직접적인 직관을 통해 성취하는 체험이다.
신비주의에는 종교마다 수련법이 있는데 (1) 정심, (2) 금욕, (3) 명상, (4) 요가, (5) 자극법(염불, 송주, 타령), (6) 보행, (7) 심상법, (8) 기도 등의 방법이 있다.
기독교적 신비주의자들의 심리적 발전 과정을 에벌린 언더힐(Evelyn Underhill)은 다섯 단계로 분류했다. (1) 신의 실재에 대한 각성, (2) 신을 향한 정진에 방해가 되는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 (3) 빛을 조명해주는 정화, (4) 자아의 순화 신비적 고통 혹은 죽음, (5) 합일의 과정으로 초월성 위에 자아 확립 과정이다.
 
신비주의 단계를 성서에 기반을 두고 다시 정리하면 회개 (Repentance), 성화(Santification), 연합(Union with God) 혹은 정화(Purification), 조명(Illumination), 합일(Unification)의 과정이다.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양태는 신비체험의 특성상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 중에서 종교적 지식의 근원을 추구하는 관점에서 4가지로 분류하는 방법이 있다. (1) 자연주의적 신비주의, (2) 초자연적 신비주의, (3) 접신적 신비주의, (4) 범신론적 신비주의 등을 들 수 있다.
 
특히 기독교 신비주의의 현상을 이해하려는 관점에서 부캄(Y.M.Bucham)이 분류한 형태는 (1) 명상 신비주의(풀로티누스, 어거스틴, 에크하르트), (2) 인격 신비주의(바울, 루터, 토마스 아켐피스), (3) 자연 신비주의(성프렌시스), (4) 실천 신비주의(카타리나, 줄리안) 등으로 정리된다.
 
Ⅱ. 기독교의 신비주의와 개혁교회 신학
기독교적 신비주의는 이미 바울 문서와 요한 문서에서 찾을 수 있다. 바울의 신비주의는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그리스도 신비주의(Christ-mysticism)이고 요한의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하나님 신비주의(God-mysticism)라고 한다.
 
중세시대에는 스콜라철학을 틀로 해서 신학의 체계와 교리의 확립 그리고 교권이 확립되는 가운데서, 이와는 반대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해서 신비주의가 도도히 저류를 이루고 있었다.
중세시대 가톨릭교회는 교회안에 저명한 인사들이 신비주의와 깊은 인연을 맺은지라, 신비주의를 교회내의 신앙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고 더구나 헬만이나 하르낙 교수 같은 이는 신비주의란 결국 가톨릭 경건의 완성형이라고 말할 정도로 그 관계가 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특히 개혁교회 신학에서는 신비주의가 제 2의 타락이고 하나님의 절대권에 대한 불신경의 교만이라 규탄받아 이단시 되어왔고 그것이 교리상으로 불가피하다는 견해가 지배적으로 되어 있다.
‘오직 성경’을 종교개혁의 기치로 내걸고 모든 교리나 신학의 최고 권위를 객관적 계시인 성경에 둠으로 신비주의자가 발붙일 근거를 잃게 되었다. 특히 개혁교회신학을 수립하는 데 산파역을 한 칼빈은 신비주의의 온상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원 제도를 배격했다.
 
물론 칼빈도 <기독교 강요(III.11.10)>에서 신비적 연합이란 말을 썼으며 성찬에서 주님의 임재설을 주장함으로 신비체험을 가능케 할 소지를 남기고 있다. 그러나 전반적인 신학의 흐름은 중세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칼빈은 목사제도를 만들고 목사상을 신비주의가 아니라 예언자와 학자와 교사에게서 취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개신교신학의 특징인 명료성, 확실성, 단순성, 신실성 등을 요구하던 시대에 신비주의는 수용하기 어려운 면이 많았다.
 
현대신학자 리츨(Albrecht Benjamin Ritschl)은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중보자 없이 합일을 추구함으로 신학으로부터 제거하려고 했다.
 
그는 신비주의의 주장을 세 가지로 요약을 했다. 첫째, 인간의 영혼은 교회와 세계로부터 격리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둘째, 하나님과 사귀는 최고의 형태는 성경의 매체 없이도 이루어질 수 있다. 셋째, 그리스도에 대한 정당한 태도는 믿음보다는 사랑이다.
 
이러한 신비주의는 결국 개별적이고 영적 생활의 구체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포기하고 그것을 초월한 보편적 존재를 선호한다. 또한 신비주의는 중보자도 필요 없고 사회와 역사에 대해서 무관심하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신비주의는 기독교의 본질과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신정통주의자인 바르트(Karl Barth)는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라는 선언하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질적 차이를 말함으로 단절을 말하고 오직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는 길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인 계시된 그리스도를 통해서만이 하나님을 알 수 있고 만날 수 있다고 했다. 이러한 신정통주의신학의 입장에서는 신비주의는 용납될 수 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대로는 개혁교회신학 정서에 의하면 신비주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도외시될 수밖에 없다.
 
첫째,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이신 그리스도 혹, 성경을 제쳐놓고 신과 합일이나 연합을 시도하는 일이다.
 
둘째, 교회나 세상과 격리해서 개인적 체험이나 황홀경에 이르는 것을 추구하는 것은 탈 역사적이고 탈 사회적 현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것이다.
 
셋째, 신비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신학적 반대의 취지는 신비주의는 공로에 의한 구원의 형태를 필연적으로 띄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의은총, 이신득의의 교리를 강조하는 것은 신비주의에 치명적 일격을 가하는 것이 된다.
 
모든 종교에 있어서 신비주의는 매우 매력적이고 또한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비주의의 맹점을 지적하고 특별히 계시종교인 기독교와 관련해서 마이클 그린(Michael Green)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비인격적인 ‘존재자’를 향한 신비주의적 접근은 전혀 윤리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나는 정령술이 마술에 못지않게 치병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방법들을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 나는 요가와 힌두교를 통한 명상이 고요와 평안을 불러올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는 곧 이러한 방법과 통로들을 사용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신비주의는 매우 매력적이다. 이는 전혀 휴식을 취할 줄 모르는채 항속적으로 행동에만 사로잡힌 시대에 보다 큰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방도들을 통해 인간들 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인 모습이다.
 
특별한 비밀의식을 통하여 비밀히 전수되는 지식을 얻고, 특별히 죽음 저편의 신비로 인도된다는 것은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인가. 그러나 이러한 모든 작업과 행위들은 모두 성경에 의하여 금지되고 있다”(로버트G.투틀 저, 권태형 역, <웨슬레와 신비주의>은성, 1993. p.278∼279).
(자료출처 http://www.jesus114.net/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1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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