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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샬렘영성훈련원"의 김오성 목사의 글

갈수록 교회 안에 영성이라는 이름으로 
비성경적이고 위험한 관상기도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문화와신학 (2015년 5월호)
 
문에서 새어드는 햇빛만 봐도 부끄러웠다-한국 최초의 기독교 수도공동체 동광원 분원
 
어스름하게 채 여명이 밝지 않은 새벽, 남원에 있는 ‘기독교 수도원 동광원’ 본원을 방문하기 위해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 속으로 차를 몬다. 수도공동체는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영적 여정의 길 위에 선 사람들의 모임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께 속하고자 하는 갈망을 품고 세상 속에 존재하면서, 세상적인 가치를 벗어나려고 한다. 이를 위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kenosis)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추구한다. 수행과정을 통해 내면 속에 있는 참다운 자기와 만나게 되고, 동시에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 형성은 삶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삶을 통해 복음의 빛을 전달하는 투명한 매개체의 역할을 한다. 신앙을 지닌 사람들은 이런 갈망을 지니고 있다. 근본적이고, 급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강밀도의 차이만 있을 것이다. 
‘동광원’은 근본적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려는 삶을 추구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수도공동체이다. 동광원은 본래 1950년 광주에 세워진 고아원의 이름이었다. 이 고아원을 평소에 빈곤층과 약자들에 관심이 많은 이현필 선생님과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맡아 운영하면서 동광원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사회적 실천이 강한 수도공동체인 동광원의 시작은 이보다 조금 앞선다. 1947년 이현필 선생님께서 남원 서리내에서 소년소녀 14명과 함께 성경공부를 하면서 교육공동체로 발족한 것이다. 이현필 선생님은 성경말씀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명령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고, 사회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한 훈련으로 탁발을 시작했다. 광주 양림동 다리 밑에서 거지 생활을 하면서 찬송으로 새벽을 열고, 낮에는 시내를 돌아다니며 음식들을 구걸하고, 그 음식과 시장터에서 주워온 채소 잎을 끓여 나눠먹는 탁발행위는 1953년부터 54년까지 계속되었다. 이러한 삶이 이현필에게 ‘한국의 성 프란치스코’, 혹은 ‘맨발의 성자’라는 별칭을 얻게 만들었다. 
4시간 넘게 달려 북남원 IC를 빠져나오자마자 동광원 본원에 도착했다. 동광원은 풍악산 중턱 양지바른 기슭에 자리 잡은 단정한 전형적인 시골 풍광이었다. 1980년 지금의 장소로 자리를 잡은 이후 전국에 흩어진 분원 식구들이 이주를 희망해서 모여 살기 시작한 것이 동광원 본원의 시작이었다. 이곳이 수도공동체라는 표식은 마을에 들어서기 전에 세워진 ‘기독교수도원 동광원’이라는 이정표를 제외하곤 눈에 띄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 검소하지만 깨끗한 시골 아낙네 차림의 김금남 원장 언님(‘어진 님’이라는 뜻의 개신교 여성 수도사를 의미하는 말로 다석 유영모 선생님께서 명명)이 나를 맞아주셨다. 언님은 마알간 낯빛과 차분한 목소리 이외에 그 어떤 종교적 상징물도 몸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다. 공동체의 식사시간이 조금 지나서 도착한 나를 위해 식사를 남겨두셨다고 하시면서 식사자리로 초대를 하셨다. 언님들은 하루에 두 번 오전 10시 반과 오후 4시 반에 식사를 하신다고 하셨다. 하루에 밥 한 끼씩을 모아 어려운 사람들을 돕자는 이현필 선생님의 ‘일작운동’(一勺運動)이 동광원의 삶 속에 그대로 녹아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식사는 잡곡밥에 김치, 멸치볶음, 봄동 무침, 취나물 무침 그리고 된장쑥국이었다. 새벽같이 집에서 나오느라 허기진 속을 봄내음이 묻어나는 나물무침과 된장쑥국으로 채우면서 하루에 일식을 하셨다는 이세종 선생님, 이현필 선생님, 유영모 선생님, 김흥호 교수님으로 이어지는 식습관을 떠올려보았다. 신학대학원 때, ‘먹 가는 기계’라는 별명처럼 교수연구실에 늘 묵향이 스며 있던 김흥호 교수님께서는 당신의 스승이셨던 다석 유영모 선생님의 ‘일일일식’(一日一食)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하나님이 몸을 우리에게 밥으로 주셨으니 아침은 내 몸을 하나님께 밥으로 드리고, 점심은 이웃에게 내 몸을 밥으로 드리고, 저녁은 나를 위해 밥을 먹는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밥을 제물로 알고 밥 먹음을 예배로 안다고 하셨다는 것이다. 하루의 일상이 신앙과 따로 분리되지 않은 극진한 삶! 동광원에서 한 끼의 식사를 마주하면서 ‘일일일식의 영성’을 잠시 묵상해 보았다. 
식사를 마친 후 밖으로 나오자 오세휘 장로님께서 기다리고 계시다가 ‘이현필 선생 기념관’으로 인도해주셨다. 오세휘 장로님은 이현필 선생님께서 소천하신 후 동광원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계시던 오북환 장로님의 아드님이시다. 
기념관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벚꽃과 목련이 만발하게 피었고, 단정하게 정리된 향나무와 활짝 꽃이 핀 수선화를 볼 수 있었다. 모든 사물들이 차분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빛나고 있다는 느낌은 일상을 영성화한 동광원의 숨은 빛이었을까? 아버지를 따라서 동광원에 들어오셨던 오세휘 장로님은  현재는 앞마을에 사신다고 하셨다. 동광원 본원에는 여성 수사들인 언님들 23명이 모여서 사시고, 남자 수사들은 앞마을과 옆 마을에 흩어져서 8명이 사신다고 하셨다. 
‘이현필 선생 기념관’은 2004년도에 이현필 선생님의 삶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후원을 하여 세워졌다고 한다. 기념관 내부에는 이현필 선생님께서 생전에 입으셨던 옷과 사진, 기록물, 동광원의 활동과 함께 일하셨던 분들의 기념물들이 남아 있었다. 오 장로님은 그 기념물들 몇 군데에서 핵심적인 상황들을 간결하게 설명해주셨다. 남아 있는 사진과 기념품들에는 그에 관한 설명도 함께 있었다. 
기념관에는 ‘새마을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던 김준 선생님에 대한 기록도 있었는데, 그는 동광원의 신앙생활에 감동을 받아 교수직을 버리고 동광원에 들어오신 분이다. 김준 선생님은 ‘노동은 기도요, 기도는 노동에서 나오는 기도가 진실이다. 우거지밥은 기도입니다. 땅파는 것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기도입니다.’라는 이현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동광원의 정신과 실천을 새마을운동의 정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현필 선생님의 영성과 독재 끝에 자신의 부하에게 암살당한 박정희 대통령의 새마을운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에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현필 선생님은 생전에 자신의 얼굴을 나타내는 것을 어떤 경우에도 거부했다고 한다. 유일하게 주민등록증 발급을 위해 찍었던 얼굴 독사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신의 얼굴을 남긴다는 것은 이현필 선생에게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을 드러내려는 교만의 표징으로 읽혀졌던 것일까? 기념관 한쪽 유리벽 속에 있는 이현필 선생님이 생전에 입으셨던 무명바지 저고리 한 벌도 같은 정신의 표현으로 보였다. 선생님은 자신이 입었던 옷은 도로 벗겨 빨아서 다른 사람에게 드리고, 자신은 방문에 걸었던 가마니로 싸서 묻어달라는 유언을 하셨다고 한다.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쓰셨던 반성록에는 자신을 가리켜 싹뿌리, 헌신짝, 버린 것이라는 세 가지 별명을 붙이셨다고 한다. ‘싹뿌리’는 두 가지로 풀이하는데 ‘뿌리고 싹이 나다’와 ‘예수님을 알게 된 후로 싹 버렸다’는 뜻이다. 기념관에 있는 모든 기록은 이현필 선생님께서 추구하셨던 삶을 오롯하게 드러내고 있는 듯했다. 
이현필 선생 기념관을 나오자 오세휘 장로님은 동광원에서 기도생활하시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으신 수도사들이 안장되어 있는 묘지로 인도하셨다. 40여 기의 봉분이 동광원 내에 있다는 사실은 인상적이었다. 일반적인 한국 장례 문화에서 무덤은 일상의 공간은 아니다. 일상과 분리된 기억의 공간인 무덤은 삶과 죽음을 분리시키고, 죽음에 대한 기억이 특별한 시간으로 분화됨에 따라 생활과 신앙을 분리시키는 골이 된다. 이에 반해 동광원 내에 있는 무덤은 일상의 공간, 예배의 공간, 기억의 공간을 구분하되 분리시키지 않는다. 이분들에 대한 기억은 일상생활의 공간으로 연장된다. 더구나 먼저 본향으로 돌아가셨던 분들은 땅 위에서의 삶을 마감하며 ‘오, 기쁘다! 기쁘다!’를 말씀하시며 때로는 춤추듯이, 신랑의 부름을 기다리는 신부처럼 하나님의 부르심을 사모하다가 돌아가셨다고 한다. 이렇게 마지막 순간에 보여주시는 언님들의 너무나 확실한 믿음의 마지막 모습은 동광원 내에서 수도생활을 하는 분들에게 커다란 힘이 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동안 매일 드리는 예배시간이 되어 예배에 참석하였다. 여기에서 함께 사시는 언님들 19명이 한자리에 모이셨다. 겨울에는 매일 3번의 예배가 있고, 일손이 바빠지는 절기에는 2번의 예배가 있다고 한다. 예배는 동광원 성가, 찬송, 이현필 선생님의 기도문, 사도신경, 성경봉독, 설교, 동광원 성가, 주기도문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설교는 주로 이현필 선생님의 설교문 또는 오북환 장로님의 설교문을 돌려가면서 읽는다고 한다. 특징적인 것은 우리가 주기도문을 외듯이 이현필 선생님의 기도문을 예배 시간에 외우시는 것이었다. 

예배 후에 김금남 언님, 방순녀 언님과 더불어 동광원 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동광원에 관련된 책들과 자료를 미리 읽은 터라 가장 궁금하게 생각하는 동광원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질문하였다. 

- 동광원에 대해 조금 아시는 분들은 언님들의 나이가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걱정하고 계십니다. 새롭게 수도생활을 하려고 찾아오는 젊은 분들이 없어서 동광원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입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오신 분은 몇 년도에 들어오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알고 찾아오시는지 궁금합니다. 그리고 새로 들어오시는 분들에 대한 교육훈련과정이 있는지요? 
“2011년도에 새롭게 한 분이 들어왔어요. 동광원이 처음 생긴 것은 1947년도였고, 남원에 자리를 잡은 것은 1980년도예요. 남원에 자리를 잡을 때 23명이 시작했는데, 많은 분들이 본향으로 돌아가셨지만 지금도 20여 명이 같이 생활을 해요. 동광원이 운영되는 것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어요. 동광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많지는 않지만 동광원의 신조와 생활원칙, 그리고 동광원에 관련된 이야기와 책들을 보고 찾아오셔요. 동광원은 ‘천국 가다가 낙오된 사람들의 모임’이기에 독신으로 동광원의 신조를 지키려는 사람이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올 수 있어요. 이현필 선생님께서는 동광원의 목표는 첫째가 인격완성, 둘째가 자립이라고 하셨어요. 과거에는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1년간 성경공부과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 외에 다른 교육과정은 없어요.” 

- 동광원은 남원 본원을 포함해서 벽제분원, 화순분원,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이 있는 것으로 아는데 전체가 모이는 정기적인 모임이 있는지요? 
“1년에 두 차례 정기적인 모임이 있어요. 1월에 정기총회로 모이는데 이현필 선생님께서 살아 계실 때는 정초에 한 달씩 모여 회의도 하고, 수련도 했어요. 지금은 일주일 회의만 하지요. 8월 15일 광복절 즈음에는 분원에 흩어진 사람들과, 삼온회 사람들도 같이 모여 수련을 해요. 삼온회는 동광원에서 살다가 나가서 결혼한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에요. 비록 결혼을 해서 동광원을 떠났지만 동광원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임이지요. 지금은 동광원의 취지를 공감하는 일종의 재속모임이면서 후원회와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어요. 8월에 있는 수련 모임은 누구나 참석할 수 있으니 한 번 와보시면 좋을 거예요.” 

- 공동체에서 모여서 살면 기쁜 일도 있고 힘든 일도 있을 텐데 특별히 기억나는 일들이 있다면 어떤 것인지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산다는 건 힘이 들지요. 그런데 모여서 살면 자기공부가 돼요. 혼자 살면 자기를 잘 모르지요. 여럿이 모여서 살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내 모습을 볼 수 있고 나의 내면을 알 수가 있지요. 에고가 죽지 않고 얼마나 살아 있는가를 알 수 있어요. 그래서 회개도 많이 하지요. 금을 연단하는 것과 같아요. 금을 얻기 위해서 불가마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공동체 생활을 시작한 것이 60년이 넘었으니 그동안 여러 가지 힘든 일도 많았지요. 그러나 힘든 일보다는 은사가 많아요. 나 같은 것이 무엇인데 이런 은총을 주셨는가 하는 기쁨이 더 많아요. 첫째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이 감사하고, 둘째는 바른 지도자를 만난 것이 감사하고, 셋째는 한길 가는 형제들을 만나서 살게 된 것이 감사하지요.” 

- 모여 사시면서 생기는 갈등은 어떻게 해결하는지 궁금한데, 갈등을 해결하는 동광원만의 특별한 방법이 있으신지요? 
“아무래도 여럿이 모여 사니까 갈등이 많지요. 선생님이 살아 계실 때는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께 물어보았지요. 선생님께 문제를 가지고 가면, 문제를 이야기하기 전에 꿰뚫어보시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선생님을 한 번 더 뵐 수 있어서 좋았어요.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난 이후에는 선생님이시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를 생각해보면 해결책이 떠올라요. 모여 사는 데 갈등이 없을 수 없지요. 하지만 갈등이 있어야 자기 위치도 알고, 갈등이 있어야 자라지요. 지나고 보면 갈등이 자기를 성장시키는 길이더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죄인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으면서 모든 사람들이 불쌍해 보이더라고요. 우리가 죄인의 혈통이구나라는 마음이 들면, 다른 사람들이 불쌍하다는 마음이 들면서 다 감싸 안게 되더라고요. 젊었을 때는 문제가 다 외부에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한데 나이가 들면서 기도하다 보니 다 내 문제더라고요.” 

- 그런 외면적인 갈등 말고 내면적인 괴로움이 있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요? 
“제일 괴로웠던 것은 주님만이 나의 모든 것인 줄 알고 살았는데, 살다 보니 주님이 와서 앉아 계셔야 할 자리에 사람이 앉아 있더라고요. 그것은 다른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였는데, 주님보다 선생님을 더 의지했어요. 기도 중에 나의 양심이 주님보다 선생님을 더 의지하는 것에 대해 말한 적이 있는데 그게 정말 괴로웠어요. 거기서 벗어나려고 몇 달을 고생했어요. 그래도 안 되더군요. 여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것이 같이 모여 사는 형제들에게 누가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누가 괴로워하고 있으면 그게 다른 사람에게도 전달이 되거든요. 그러다가 하루는 아무도 모르게 정리를 하고 떠나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하염없이 뒷산으로 올라갔는데 이장을 하고 난 빈 무덤이 보였어요. 그래서 그 무덤 속에 들어가 주님께서 저를 변화시켜 주시든지, 저를 거둬주시든지 해결해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 속에서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는데 너무나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어요. 이러다 해결이 안 되면 죽겠지 그런 생각을 했지요. 이장해간 자리니 바람이 불고 비오면 쌓아둔 흙이 흘러내려 덮어버리겠지 하면서…. 삼일째 되는 날에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상반신이 보였어요.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면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신 말씀이 마음속으로 울리더군요.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이미 2,000년 전에 십자가로 너를 용서했다라고 하신 말씀이 깨달아지더군요. 그때 이 죄인을 예수님께서 용서해주셨다는 그 감격과 기쁨에 무덤에서 나와서 춤을 췄어요. 그 이후로 한층 신앙이 성장했다는 걸 느꼈어요.” 

- 혹시 이 시대를 사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슨 말씀을 해주시겠는지요? 
“주님의 길밖에 없어요.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혔듯이 세상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 거기에 부활이 있어요. 나를 내려놓고 주님만을 바라보면 부활이 분명히 있어요. 성령의 힘으로 해야지, 사람의 힘으로 안 됩디다. 살다 보면 영적인 과정이 있어요.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자기들이 깨끗한 줄 알잖아요. 성령의 빛이 내면을 비쳐야 나를 알게 되지요.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주님과 깊이 교제하다 보면 자신의 밑바닥을 알게 돼요. 내가 죄인 됨을. 해가 비쳐야 깜깜한 것을 알게 되지요. 선생님께서는 그래서 그런 기도를 하셨던 것 같아요. ‘주님, 제가 항상 죄인 됨을 기억하게 해달라고.’ 주님의 빛이 있으니 자신이 죄인 됨을 알게 되는 것 같아요. 자신을 알게 되면 고개를 못 들어요. 주님의 용서하심으로 고개를 들고 살지요. 그렇게 내가 죄인 됨을 알게 되면 다른 사람들을 다 용서할 수밖에. 죄인 됨을 깨달음과 동시에 다른 형제들이 다 귀하다는 것을 알게 돼요. 내가 젊었을 때 어머니의 기도생활을 본받아 100일 작정 기도를 했어요. 기도와 성경을 보면서 나무하기와 하루 한 끼 식사만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성경말씀을 보다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에게 하신 말씀이 나에게 하신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전에는 다 남에게 하는 말씀인 줄 알았거든요. 성경말씀이 전부 내면으로 부딪히더라고요. 나를 알았어요. 내가 이렇게 타락한 존재구나. 그때는 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햇빛만 봐도 부끄러웠어요. 내 마음은 이렇게 깜깜한데 햇빛은 저렇게 밝구나 하고. 그 때문에 하나님이 용서를 해주시니 내가 사는구나 하는 것을 알았어요. 사는 것은 내 힘이 아니에요. 길은 이 길밖에 없어요. 순결하게 위에서 붙들린 대로 사는 수밖에. 이 길로만 들어서면 아무 걱정이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좋은 길을 몰라요. 지금 같은 시절에 모두가 이리로 들어와서 살았으면 좋겠어요.” 

3시간에 가깝게 두 언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다시 집으로 가기 위해 차를 몰았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오랜 시간 수도공동체의 외면의 여정과 내면의 여정을 통해서 깨단한 내용을 듣고 전달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영성의 길을 머리로 이해한다는 생각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에 불과하다. 영성은 다른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오랜 시간 몸으로 붙잡고 묵혔을 때야 비로소 불현듯 솟아올라 그 사람의 삶 전체를 감싸는 어떤 것이다. 중요한 것은 어떤 순간적 앎이라기보다 시간이 쌓이고 쌓인 몸으로 얻게 되는 지평인 것이다. 몇 권의 책과 자료, 짧은 시간의 만남을 통해서 그것을 온전히 체득하는 것도 불가능하고, 전달할 수도 없다는 사실이 못내 안타까웠다. 다만 오랜 기도를 통해 새어 들어오는 빛 한 줄기에 자신을 깨달았던 언님들의 삶에 약간 의탁하여 자신의 영적 여정을 잠시 돌아볼 수 있는 짧은 시간이 주어졌음이 고마울 따름이다. 

이현필 선생님의 기도문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죄인 됨을 기억케 하옵소서. 
죄인 된 것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행복된 것은 
구주가 가까워지는 까닭이로소이다. 

주님 
저로 하여금 항상 저의 약함을 기억케 하옵소서. 
저의 약함을 깨닫는 시간만이 제게 가장 복된 것은 
크신 권능 물밀듯이 찾아주시는 까닭이로소이다. 

이 험악한 세대에서 이 두 가지 위로가 제 자랑이 되나이다. 
성령의 역사로 참으로 주를 우러러보는 이들은 
주님 구원만 믿고 바라게 하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들으소서. 
아멘. 

김오성 | 목사는 세상 안에서 세상 밖을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고민 끝에 교파를 뛰어넘는 영성수행 공동체에 관심을 가지고 한국샬렘영성훈련원에서 기도하며 그 길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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