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이트-개념 3 프로이트의 외디푸스화와 욕망의 삼각형
프로이트-개념 3
http://blog.daum.net/parktong/406
* 참고자료입니다*
1. 프로이트의 외디푸스화와 욕망의 삼각형
▶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시나리오는 핵가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
▶ 욕망의 삼각형 모델 : 아버지-어머니-자녀를 중심으로 구성.
1) 유아는 생물학적으로 남자, 여자로 태어났음에도 외디푸스 단계를 경과하기 이전까지는 양성적인 존재. 그러나 외디푸스 단계를 거치면서 사회, 문화적인 성으로서의 젠더 형성되기 시작.
2) 외디푸스 이전 단계에서 유아는 성별에 상관없이 일차적 사랑의 대상을 어머니로 설정->그러나 3자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불가능해지고, 아버지는 남아에게 어머니를 욕망하지 못 하도록 금지시킴. 즉, 근친상간을 금기로 만들고, 거세 협박 시작. 이것이 아버지의 법이자 문명의 질서가 됨->이 과정에서 남아는 살부충동을 느끼지만, 죄의식로 인해 남아는 강력한 초아자를 발동시키고, 남아는 거세된 여아를 보면서 거세공포로 인해 생긴 아버지로 향해 있는 미움과 질투를 버리고,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됨->남아는 거세공포로 인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 사회가 부여한 남성의 역할을 학습하게 됨.
1. 비판
※ 프로이트의 여아/여자에 대한 인식
① 프로이트는 이미 거세된 여아는 초자아의 형성이 어렵다고 봄.
②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이 남아에 비해 덜어지는 여아는 기존질서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고 따라서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게 됨.
③ 초자아의 형성이 미흡한 결과 여아는 남아에 비해 윤리적 감수성이 떨어지고, 변덕스럽게 됨.
④ 자기억제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여자가 문명에 기여한 것이라고는 베짜기와 수유가 전부.
1) 자기 이론 내에서의 모순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라는 논문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래 죄의식을 훨씬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여성은 수동적이고 매저키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초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여성이 강력한 죄의식을 갖는 다는 것으로써, 프로이트 자신의 이론 안에서 모순을 발생 시키는 결과로 이어짐.
2)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로 이어지게 하는 비과학적 이론화 시도. 과학의 이름으로.
(1)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해소 과정을 설명하면서 남아는 여아의 거세된 상태를 보며 '여아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여아는 이미 거세된 자신을 보게 된다고 성명..->이것은 여아가 페니스를 선망하는 것으로("페니스 선망"), 자신에게 열등한 기관을 준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선망하게 만듦(어머니로 향했던 동성애적인 사랑을 거두어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보냄).->여아는 자신이 어머니의 역할을 하다보면 언젠가 아버지의 페니스를 갖게 될 것이라 자위하면서, 여아는 자신의 여성성과 모성을 동일시, 기존 가족제도의 재생산을 담당하게 하는 결과로 이러진다고 주장.
(2)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설명은 페니스를 판단 척도로 삼고 그것을 기존으로 남성기관은 '크고 우월하며', 여성의 것은 '납작학도 열등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하는 편견의 해석을 주장함. 그는 페니스/클리토리스라는 이항대립을 토대로 남성성을 존재/충만/공격성/새디즘/훔쳐보기로 연결시키고, 여성성을 부재/결핍/수동성/매저키즘/노출증으로 연결시킴.
3) 사회/문화적 맥락 무시
(1)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성 발달 초기 단계들은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에게 동일하게 전개 됨. 이는 성감대가 동일하고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로 정당화 됨. 이것은 여러 성감대가 동일하고, 유사한 역할 즉, 흥분의 원천이며, '부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만족의 원천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로 정당화 됨. 이러한 주장은 유일하고도 동일한 생식 기관-남성 기관-이라는 가설이 양성의 유아기 성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가정. 그리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항상 남성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리비도가 남성 혹은 여성에게 나타나고 욕망의 대상은 여성적일 수고, 남성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지. 페니스를 항상 우위에 둠.
(2) 여성의 성욕은 단 한번도 남성이 아닌 다른 성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적이 없음. 프로이트에게, 그 차이가 성행위 속에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문화적 작용을 규정하는 상상과 상징의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게 될 두 개의 성은 존재하지 않음. '여성'은 항상 결점으로, 위축증으로, 가치를 독점하는 유일한 성, 즉 남성의 반대면으로 묘사되기만 함. 그리하여 그 유명한 '페니스를 갖고 싶은 욕구'가 만들어 짐. 여성의 성적 변화가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의해, 그리하여 그에 대한 욕구, 질투, 요구에 의해 명령을 받는 다는 것. 그러나 여성의 성욕을 기술하는 모든 내용들은 여성이라는 성에도 역시 마땅한 '특수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임.
(3)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이 다루는 산물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면 그는 자기에게 그러나는 여성의 성욕을 규범으로 인정한다는 것. 그는 그들의 '병적 상태'가 사회적, 문화적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묻지 않은 채, 개인사에 따라 여자들의 질병과 증상, 불만족을 해석한다는 데에 있음. 이것은 그들이 요구 사항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아버지의 지배적인 담화에, 아버지의 법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함. 즉, 그는 담화 생산의 편견을 성적 차이와 연과지어 분석하지 않았음.
4) 전략
(1) 정신분석이 담화 자체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여성 성욕에 대한 참된 진실은 아직까지 매우 엄격하게 진술됨. 거기에서 더 많은 해부학이 두 성 사이의 실제적 차이를 입증하는 증거-구실로 아주 조금이라고 이용될 것. 이 두 성은 언어활동 속의, 언어활동을 통한 그들의 결정으로 명시. 이 언어활동의 법칙이 수 세기 전부터 남성 주체들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됨.
(2) 이를테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들로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틀, 종교 및 신화를 위시한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이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딸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여성 나름의 문화를 구축해 나가야 함. 남성과 똑같아지려는 평등을 추구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은 아편과 다름없고, 결국 종족 말상의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음. 여성과 남성의 각각 다른 차이를 인정한 위에 여성 문화를 확립해야 함.
2. 프로이트의 두 가지 사랑 개념
프로이트는 남녀에 따른 사랑을 구분함. 남성의 사랑은 대상애, 여성의 사랑은 나르시즘. 대상애는 세계로 열리는 적극적이고 이타적인 사랑, 나르시즘은 자기만족적이고, 이기적인 사랑. 대상애가 능동적이라면 나르시즘은 사랑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동적인 특징을 지님.
2-1. 비판
1) 대상애적인 연인은 사랑받는 여성을 흠모하고 그녀의 가치 자체를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자기의 입장에 더욱 많이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 교비니즘의 세련된 한 형태로 볼 수 있음. 대상으로 열리는 사랑 또한 유아의 원초적 나르시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을 자기 동일성의 논리로 환원하는 나르시즘으로 간주될 수 있음. 대상애 연인은 사랑대상에세 자기 나르시즘을 전이하는 것이므로,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임. 즉,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된 대상애가 여성적인 나르시즘으로 반전됨. 이처럼 남성적, 능동적 사랑 형태로서의 대상애와 여성적, 수동적 사랑형태로서의 나르시즘은 프로이트 이론 내부에서 서로 역전 됨.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능동/수동에 맞춰서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구분하다가, 마침내는 이런 이분법마저도 해체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보여줌.
2) 프로이트는 나르시즘적인 여성을 평가절하 함. 윤리적으로 나르시즘은 이기주의와 연결되며, 유아시절의 리비도 단계로 퇴행한 것으로 간주. 프로이트는 나르시즘적인 여성은 자족적이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타자의 사랑이 없으면 자기 존재가치가 무의미해지고, 자신을 파편으로 느끼게 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펼침.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에게 완벽한 대상애는 모성성을 통해서만 가능.
3. 프로이트의 우울증 : 이중부정/이중거부의 방식('거부의 거부')
1)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대상애가 미치는 영향을 더욱 강조하면서, 대상애 시기 이후에 나르시즘으로 되돌아오는 퇴행적 동일시로서 우울증을 설명하고 있음. 애도와 우울증은 둘 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실패했을 때 상실한 애정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고통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자아의 형성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애도보다 우울증임. 우울증이 발현되려면 우선 애정의 대상을 상실하고 나서 나르시즘적 단계로 퇴행하고, 그리고 양가감정을 통한 새디즘의 발현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함. 그리고 우울증은 상실한 애정의 대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거부가 거부되어('거부의 거부) 자신의 자아를 이루는 방식이라는 점임.
2) (애도와 우울증에 관한 설명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여성성에 관한 설명을 통해 여아에게 최초의 애정의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포기되고, 아버지로 전환된 후, 근친상간의 금기 때문에 다시 어머니가 애정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설명했는데(이성 부모에 대한 사항이 동성 부모에 대한 동일시로 변하는 것은 남녀가 동일하지만 여성의 경우 애정의 대상이 두 번 부인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여성성 획득은 '이중의 물결'을 타게 된다고 함 ), 이것은 남성성의 획득방식과 달리 이중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울증의 이중부정 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음.
3-1. 비판 : 버틀러의 이중부정/이중거부의 방식('거부의 거부')
1) 젠더란 동성애적 애착의 거부를 통해 획득되며,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위치는 동성애라는 특정한 성적 애착의 금지 때문에 형성된다는 것. 프로이트의 설명체계 안에서 성정체성은 이성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의 금기로 인해 형성된다면, 버틀러에게서는 이성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보다 동성 부모에 대한 억압된 동성애적 욕망이 금기의 근원이 됨. 즉, 여아는 어머니와 동일시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에 대한 이성애적 근친상간의 욕망이 거부되어 여성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던 동성애적 사랑이 거부되어 이중부정의 방식으로 여아의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그리고 남아는 아버지에 대한 동성애적 욕망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된 대상애를 자신의 자아로 내면화되어 남성성을 구성한다는 것.
2) 이러한 금지의 거부, 부정의 부정은 젠더를 구성하는 우울증의 양식이기 때문에 버틀러는 젠더가 일종의 멜랑콜리라고 간주. 젠더의 우울증적 구성이란 거부의 거부라는 '이중 거부'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떠나버린 대상의 완전한 애도가 불가능해서 떠나버린 연인을 향한 대상애를 자신에게도 내면화하며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는 동일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중거부의 양식이 버틀러에게서는 젠더를 구성하는 핵심적 기제로 부각됨. 우울증에서 거부된 애정의 대상은 완전히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나 합체의 형식으로 주체의 심리 안에 보유된다. 상실의 내면화는 거부 기제의 일부이고, 이 거부의 동일시 과정에서 거부되는 것은 프로이트에게는 근친상간의 금기로, 버틀러에게는 동성애의 배제로 나타남.
3) 버틀러는 일차적 기질이나 욕망의 성향이 원인이 되어서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적 담론이 젠더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 어떤 성적 기질이나 욕망의 성향이 형성된다고 봄. 즉, '양성적인 기질'이나 '일차적 성적 시질'이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범이 금지의 결과로 생산한 욕망이라는 것. 그리고 그 법은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규범이고, 그 법에서 금지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동성애 임(프로이트가 말한 심리적인 근본으로 전제되어 있지만 나중에는 억압된다고 말하는 양성성도 버틀러가 보기에는 그 자체로 담론의 생산물임). 그것은 담론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규범적 이성애의 강압적인 실천을 통해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 근원적 욕망이 그 욕망을 금기시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을 금기시하는 법이 금지이 결과로 완전히 금지되지 못한 욕망을 생산하는 것. 이성애라는 중심 규범은 어떤 금기를 통해 발견되는데, 이 금기의 대상은 바로 동성애적 애착. 따라서 이성애 사회는 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강요.
4)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시
(1) 여아는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억압하는 금지에 복종하면서 금지된 대상을 자아의 일부가 되도록 해주는 우울증적인 동일시를 통해 여자가 됨. 따라서 동일시는 자기 안에 금지와 욕망을 동시에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일시에 의해 동성애 리비도 집중이라는 슬퍼할 수 없는 상실을 체화. 만약 어떤 여아가 여자를 원하지 않는 한에서만 여자가 될 수 있다면, 여자를 원하는 여자는 의심스러운 여자가 됨. 이런 토대 안에서 동성애 욕망은 젠더를 공포에 질리게 만듦.
(2) 이와 같이 이성애는 금지를 통해 양성되며 이런 금지는 동성애적인 애착을 금지의 대상으로 간주하므로, 이러한 애착을 없애도록 강제. 여아가 아버지로부터 다른 대체된 대상으로 사랑을 전이시키려면, 우선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체념해야 하는데, 이 경우 사랑의 목적과 대상 양자 모두를 미리 배제시켜야 함. 그녀는 동성애적인 사랑을 동성애 여성적인 인물로 대체해서는 안 되며, 동성애적인 애착 자체의 가능성을 체념해야 함. 오로지 이런 조건 아래서만 성적인 경향성이라고 부르는 이성애적인 목적을 확립시킬 수 있음. 동성애의 배제라는 조건 아래서만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리물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머니는 불편한 동일시의 공간이 됨.
(3) 동성애 금지가 주로 규정적인 작업의 하나인 이성애 문화 전반을 통해 작동한다는 개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동성애 대상과 동성애 목적의 상실은 처음부터 아예 배제된 것처럼 보임. 이 사랑이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런 사랑은 발생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런데도 발생한다면, 그것은 금지와 부정이라는 공식적인 기호 아래서만 방생할 수 있을 것임. 만연된 문화적 금지 때문에 특정한 형태의 상실이 강제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만연된 우울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우울증은 슬퍼할 수 없고 슬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동성애 리비도 집중을 내재화한 징조인 셈. 그와 같은 상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슬퍼할 수 있는 공적인 인정과 공적인 담론이 없다면, 멜랑콜리아는 당대의 중요한 문화적 차원이 됨. 물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 부분적으로는 부인된 슬픔으로 구성된 동일시를 통해 합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됨.
(4) 욕망에 반대하여 동일시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음. 이 점은 이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자신을 동성애와 이성애의 형태를 조합한 것으로 간주하는 양성애자 모두에게 다 같이 사실로 남아 있음. 실제로 양가성과 상실을 연출한 극적인 언어가 그것에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런 규칙의 압력 아래서 그만큼 더 나약하게 되며, 그만큼 더 유동적인 존재로 되어 감.
* 출처 :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2003년 6월, 『하나이지 않은 성』. 뤼스 이리가라이. 이은민 역. 동문선. 2000년 12월
http://blog.daum.net/parktong/406
* 참고자료입니다*
1. 프로이트의 외디푸스화와 욕망의 삼각형
▶ 프로이트의 외디푸스 시나리오는 핵가족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음.
▶ 욕망의 삼각형 모델 : 아버지-어머니-자녀를 중심으로 구성.
1) 유아는 생물학적으로 남자, 여자로 태어났음에도 외디푸스 단계를 경과하기 이전까지는 양성적인 존재. 그러나 외디푸스 단계를 거치면서 사회, 문화적인 성으로서의 젠더 형성되기 시작.
2) 외디푸스 이전 단계에서 유아는 성별에 상관없이 일차적 사랑의 대상을 어머니로 설정->그러나 3자인 아버지의 개입으로 어머니에 대한 욕망은 불가능해지고, 아버지는 남아에게 어머니를 욕망하지 못 하도록 금지시킴. 즉, 근친상간을 금기로 만들고, 거세 협박 시작. 이것이 아버지의 법이자 문명의 질서가 됨->이 과정에서 남아는 살부충동을 느끼지만, 죄의식로 인해 남아는 강력한 초아자를 발동시키고, 남아는 거세된 여아를 보면서 거세공포로 인해 생긴 아버지로 향해 있는 미움과 질투를 버리고, 아버지를 사랑의 대상으로 삼게 됨->남아는 거세공포로 인해 외디푸스 콤플렉스를 해소, 사회가 부여한 남성의 역할을 학습하게 됨.
1. 비판
※ 프로이트의 여아/여자에 대한 인식
① 프로이트는 이미 거세된 여아는 초자아의 형성이 어렵다고 봄.
② 자신의 욕망을 억제하는 능력이 남아에 비해 덜어지는 여아는 기존질서에 제대로 순응하지 못하고 따라서 문명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거의 없게 됨.
③ 초자아의 형성이 미흡한 결과 여아는 남아에 비해 윤리적 감수성이 떨어지고, 변덕스럽게 됨.
④ 자기억제 능력이 결여되어 있는 여자가 문명에 기여한 것이라고는 베짜기와 수유가 전부.
1) 자기 이론 내에서의 모순
프로이트는 『자아와 이드』라는 논문에서 "여성은 남성에 비래 죄의식을 훨씬 강하게 느끼기 때문에 여성은 수동적이고 매저키즘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초자아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여성이 강력한 죄의식을 갖는 다는 것으로써, 프로이트 자신의 이론 안에서 모순을 발생 시키는 결과로 이어짐.
2)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로 이어지게 하는 비과학적 이론화 시도. 과학의 이름으로.
(1) 프로이트는 외디푸스 해소 과정을 설명하면서 남아는 여아의 거세된 상태를 보며 '여아에게는 아무것도 없음'을 보고, 여아는 이미 거세된 자신을 보게 된다고 성명..->이것은 여아가 페니스를 선망하는 것으로("페니스 선망"), 자신에게 열등한 기관을 준 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선망하게 만듦(어머니로 향했던 동성애적인 사랑을 거두어 아버지에게로 사랑을 보냄).->여아는 자신이 어머니의 역할을 하다보면 언젠가 아버지의 페니스를 갖게 될 것이라 자위하면서, 여아는 자신의 여성성과 모성을 동일시, 기존 가족제도의 재생산을 담당하게 하는 결과로 이러진다고 주장.
(2) 그러나 이와 같은 프로이트의 설명은 페니스를 판단 척도로 삼고 그것을 기존으로 남성기관은 '크고 우월하며', 여성의 것은 '납작학도 열등하다'는 가치판단을 내림.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생물학적 차이를 차별하는 편견의 해석을 주장함. 그는 페니스/클리토리스라는 이항대립을 토대로 남성성을 존재/충만/공격성/새디즘/훔쳐보기로 연결시키고, 여성성을 부재/결핍/수동성/매저키즘/노출증으로 연결시킴.
3) 사회/문화적 맥락 무시
(1)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성 발달 초기 단계들은 사내아이와 여자아이에게 동일하게 전개 됨. 이는 성감대가 동일하고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로 정당화 됨. 이것은 여러 성감대가 동일하고, 유사한 역할 즉, 흥분의 원천이며, '부분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만족의 원천이라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사실로 정당화 됨. 이러한 주장은 유일하고도 동일한 생식 기관-남성 기관-이라는 가설이 양성의 유아기 성 체계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이 된다는 사실을 가정. 그리하여 동일한 방식으로 프로이트는 리비도가 항상 남성적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이 리비도가 남성 혹은 여성에게 나타나고 욕망의 대상은 여성적일 수고, 남성적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지. 페니스를 항상 우위에 둠.
(2) 여성의 성욕은 단 한번도 남성이 아닌 다른 성과의 관계에 의해 규정된 적이 없음. 프로이트에게, 그 차이가 성행위 속에서, 그리고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적, 문화적 작용을 규정하는 상상과 상징의 과정 속에서 서로 이어지게 될 두 개의 성은 존재하지 않음. '여성'은 항상 결점으로, 위축증으로, 가치를 독점하는 유일한 성, 즉 남성의 반대면으로 묘사되기만 함. 그리하여 그 유명한 '페니스를 갖고 싶은 욕구'가 만들어 짐. 여성의 성적 변화가 남성의 성기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것에 의해, 그리하여 그에 대한 욕구, 질투, 요구에 의해 명령을 받는 다는 것. 그러나 여성의 성욕을 기술하는 모든 내용들은 여성이라는 성에도 역시 마땅한 '특수성'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임.
(3)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이 다루는 산물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결정되었는가에 의문을 던지지 않는다는 것. 예를 들면 그는 자기에게 그러나는 여성의 성욕을 규범으로 인정한다는 것. 그는 그들의 '병적 상태'가 사회적, 문화적 상태와 어떤 관계를 맺는가는 묻지 않은 채, 개인사에 따라 여자들의 질병과 증상, 불만족을 해석한다는 데에 있음. 이것은 그들이 요구 사항을 말하지 못하게 하면서 가장 일반적으로 여자들을 아버지의 지배적인 담화에, 아버지의 법에 굴복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초래함. 즉, 그는 담화 생산의 편견을 성적 차이와 연과지어 분석하지 않았음.
4) 전략
(1) 정신분석이 담화 자체를 자신들의 연구 대상으로 삼을 때, 여성 성욕에 대한 참된 진실은 아직까지 매우 엄격하게 진술됨. 거기에서 더 많은 해부학이 두 성 사이의 실제적 차이를 입증하는 증거-구실로 아주 조금이라고 이용될 것. 이 두 성은 언어활동 속의, 언어활동을 통한 그들의 결정으로 명시. 이 언어활동의 법칙이 수 세기 전부터 남성 주체들에 의해 미리 규정되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 됨.
(2) 이를테면,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상에서 볼 수 있듯이, 아들로 이어지는 남성 중심의 틀, 종교 및 신화를 위시한 문화 전반에 깊이 뿌리내린 이 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딸과의 유대를 강화하고 여성 나름의 문화를 구축해 나가야 함. 남성과 똑같아지려는 평등을 추구하는 기존의 페미니즘은 아편과 다름없고, 결국 종족 말상의 위기까지 초래할 수 있음. 여성과 남성의 각각 다른 차이를 인정한 위에 여성 문화를 확립해야 함.
2. 프로이트의 두 가지 사랑 개념
프로이트는 남녀에 따른 사랑을 구분함. 남성의 사랑은 대상애, 여성의 사랑은 나르시즘. 대상애는 세계로 열리는 적극적이고 이타적인 사랑, 나르시즘은 자기만족적이고, 이기적인 사랑. 대상애가 능동적이라면 나르시즘은 사랑받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수동적인 특징을 지님.
2-1. 비판
1) 대상애적인 연인은 사랑받는 여성을 흠모하고 그녀의 가치 자체를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라 연인으로서의 자기의 입장에 더욱 많이 기초하고 있다는 점에서 남성 교비니즘의 세련된 한 형태로 볼 수 있음. 대상으로 열리는 사랑 또한 유아의 원초적 나르시즘으로부터 파생된 것이라는 점에서 모든 것을 자기 동일성의 논리로 환원하는 나르시즘으로 간주될 수 있음. 대상애 연인은 사랑대상에세 자기 나르시즘을 전이하는 것이므로, 결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 다시 말해 타자를 사랑하고 있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임. 즉, 남성적인 것으로 간주된 대상애가 여성적인 나르시즘으로 반전됨. 이처럼 남성적, 능동적 사랑 형태로서의 대상애와 여성적, 수동적 사랑형태로서의 나르시즘은 프로이트 이론 내부에서 서로 역전 됨. 그의 이론을 따라가다 보면 오히려 능동/수동에 맞춰서 남성적인 것, 여성적인 것을 구분하다가, 마침내는 이런 이분법마저도 해체될 수밖에 없음을 스스로 보여줌.
2) 프로이트는 나르시즘적인 여성을 평가절하 함. 윤리적으로 나르시즘은 이기주의와 연결되며, 유아시절의 리비도 단계로 퇴행한 것으로 간주. 프로이트는 나르시즘적인 여성은 자족적이라 주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타자의 사랑이 없으면 자기 존재가치가 무의미해지고, 자신을 파편으로 느끼게 된다는 모순적인 주장을 펼침. 프로이트에 의하면 여성에게 완벽한 대상애는 모성성을 통해서만 가능.
3. 프로이트의 우울증 : 이중부정/이중거부의 방식('거부의 거부')
1) 프로이트는 「애도와 우울증」이라는 논문에서 대상애가 미치는 영향을 더욱 강조하면서, 대상애 시기 이후에 나르시즘으로 되돌아오는 퇴행적 동일시로서 우울증을 설명하고 있음. 애도와 우울증은 둘 다 대상에 대한 사랑이 실패했을 때 상실한 애정의 대상에 대한 주체의 고통스러운 반응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만, 자아의 형성과 직접 간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애도보다 우울증임. 우울증이 발현되려면 우선 애정의 대상을 상실하고 나서 나르시즘적 단계로 퇴행하고, 그리고 양가감정을 통한 새디즘의 발현이라는 세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함. 그리고 우울증은 상실한 애정의 대상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거부가 거부되어('거부의 거부) 자신의 자아를 이루는 방식이라는 점임.
2) (애도와 우울증에 관한 설명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정상적인 여성성에 관한 설명을 통해 여아에게 최초의 애정의 대상이었던 어머니가 포기되고, 아버지로 전환된 후, 근친상간의 금기 때문에 다시 어머니가 애정의 대상이 되는 과정을 설명했는데(이성 부모에 대한 사항이 동성 부모에 대한 동일시로 변하는 것은 남녀가 동일하지만 여성의 경우 애정의 대상이 두 번 부인된다는 점에서 여성의 여성성 획득은 '이중의 물결'을 타게 된다고 함 ), 이것은 남성성의 획득방식과 달리 이중부정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울증의 이중부정 방식과 상통하는 면이 있음.
3-1. 비판 : 버틀러의 이중부정/이중거부의 방식('거부의 거부')
1) 젠더란 동성애적 애착의 거부를 통해 획득되며, 남성적이거나 여성적인 위치는 동성애라는 특정한 성적 애착의 금지 때문에 형성된다는 것. 프로이트의 설명체계 안에서 성정체성은 이성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적 애착의 금기로 인해 형성된다면, 버틀러에게서는 이성부모에 대한 근친상간적 욕망보다 동성 부모에 대한 억압된 동성애적 욕망이 금기의 근원이 됨. 즉, 여아는 어머니와 동일시해서 아버지를 사랑하고 아버지에 대한 이성애적 근친상간의 욕망이 거부되어 여성성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어머니에 대해 갖고 있던 동성애적 사랑이 거부되어 이중부정의 방식으로 여아의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 그리고 남아는 아버지에 대한 동성애적 욕망을 금지함으로써 그 금지된 대상애를 자신의 자아로 내면화되어 남성성을 구성한다는 것.
2) 이러한 금지의 거부, 부정의 부정은 젠더를 구성하는 우울증의 양식이기 때문에 버틀러는 젠더가 일종의 멜랑콜리라고 간주. 젠더의 우울증적 구성이란 거부의 거부라는 '이중 거부'의 구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며, 떠나버린 대상의 완전한 애도가 불가능해서 떠나버린 연인을 향한 대상애를 자신에게도 내면화하며 자신의 자아를 형성하는 동일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중거부의 양식이 버틀러에게서는 젠더를 구성하는 핵심적 기제로 부각됨. 우울증에서 거부된 애정의 대상은 완전히 추방되는 것이 아니라, 내면화나 합체의 형식으로 주체의 심리 안에 보유된다. 상실의 내면화는 거부 기제의 일부이고, 이 거부의 동일시 과정에서 거부되는 것은 프로이트에게는 근친상간의 금기로, 버틀러에게는 동성애의 배제로 나타남.
3) 버틀러는 일차적 기질이나 욕망의 성향이 원인이 되어서 젠더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규범적 담론이 젠더 정체성을 형성한 결과 어떤 성적 기질이나 욕망의 성향이 형성된다고 봄. 즉, '양성적인 기질'이나 '일차적 성적 시질'이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은 범이 금지의 결과로 생산한 욕망이라는 것. 그리고 그 법은 이성애 중심주의라는 규범이고, 그 법에서 금지되어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동성애 임(프로이트가 말한 심리적인 근본으로 전제되어 있지만 나중에는 억압된다고 말하는 양성성도 버틀러가 보기에는 그 자체로 담론의 생산물임). 그것은 담론 이전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규범적 이성애의 강압적인 실천을 통해서 효과를 발휘하게 되는 것. 근원적 욕망이 그 욕망을 금기시하는 법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욕망을 금기시하는 법이 금지이 결과로 완전히 금지되지 못한 욕망을 생산하는 것. 이성애라는 중심 규범은 어떤 금기를 통해 발견되는데, 이 금기의 대상은 바로 동성애적 애착. 따라서 이성애 사회는 동성애적 애착의 상실을 강요.
4) 우울증적 젠더/거부된 동일시
(1) 여아는 어머니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을 억압하는 금지에 복종하면서 금지된 대상을 자아의 일부가 되도록 해주는 우울증적인 동일시를 통해 여자가 됨. 따라서 동일시는 자기 안에 금지와 욕망을 동시에 포함할 뿐만 아니라 동일시에 의해 동성애 리비도 집중이라는 슬퍼할 수 없는 상실을 체화. 만약 어떤 여아가 여자를 원하지 않는 한에서만 여자가 될 수 있다면, 여자를 원하는 여자는 의심스러운 여자가 됨. 이런 토대 안에서 동성애 욕망은 젠더를 공포에 질리게 만듦.
(2) 이와 같이 이성애는 금지를 통해 양성되며 이런 금지는 동성애적인 애착을 금지의 대상으로 간주하므로, 이러한 애착을 없애도록 강제. 여아가 아버지로부터 다른 대체된 대상으로 사랑을 전이시키려면, 우선 그녀는 자기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체념해야 하는데, 이 경우 사랑의 목적과 대상 양자 모두를 미리 배제시켜야 함. 그녀는 동성애적인 사랑을 동성애 여성적인 인물로 대체해서는 안 되며, 동성애적인 애착 자체의 가능성을 체념해야 함. 오로지 이런 조건 아래서만 성적인 경향성이라고 부르는 이성애적인 목적을 확립시킬 수 있음. 동성애의 배제라는 조건 아래서만 아버지와 아버지의 대리물은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어머니는 불편한 동일시의 공간이 됨.
(3) 동성애 금지가 주로 규정적인 작업의 하나인 이성애 문화 전반을 통해 작동한다는 개념을 우리가 받아들인다면, 동성애 대상과 동성애 목적의 상실은 처음부터 아예 배제된 것처럼 보임. 이 사랑이 처음부터 전혀 불가능한 것이라면, 그런 사랑은 발생할 수가 없을 것이고, 그런데도 발생한다면, 그것은 금지와 부정이라는 공식적인 기호 아래서만 방생할 수 있을 것임. 만연된 문화적 금지 때문에 특정한 형태의 상실이 강제될 때, 우리는 문화적으로 만연된 우울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런 우울증은 슬퍼할 수 없고 슬픔의 대상이 될 수 없는 동성애 리비도 집중을 내재화한 징조인 셈. 그와 같은 상실이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슬퍼할 수 있는 공적인 인정과 공적인 담론이 없다면, 멜랑콜리아는 당대의 중요한 문화적 차원이 됨. 물론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남성성'과 '여성성' 모두 부분적으로는 부인된 슬픔으로 구성된 동일시를 통해 합체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됨.
(4) 욕망에 반대하여 동일시를 해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어디에도 없음. 이 점은 이성애와 동성애, 그리고 자신을 동성애와 이성애의 형태를 조합한 것으로 간주하는 양성애자 모두에게 다 같이 사실로 남아 있음. 실제로 양가성과 상실을 연출한 극적인 언어가 그것에 주어졌을 때, 우리는 그런 규칙의 압력 아래서 그만큼 더 나약하게 되며, 그만큼 더 유동적인 존재로 되어 감.
* 출처 : 『페미니즘과 정신분석』.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 2003년 6월, 『하나이지 않은 성』. 뤼스 이리가라이. 이은민 역. 동문선.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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