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_꿈의 해석과 그 목회적 활용 - 김외식 박사
꿈의 해석과 그 목회적 활용 - 김외식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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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과 그 목회적 활용
-C. G. Jung의 꿈 해석을 중심으로
김 외 식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Interpretation of Dream and Its Appropriation to Christian Ministry
focused on the C. G. Jung's Inpterpretation of Dream -Oe Shik Kim-
목 차
I. 시작하는 말
II. 융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A. 분석심리학과 현대물리학
B.. 집단적 무의식의 개념
C. 무의식의 원형
III. 융의 꿈 원리와 해석
A. 꿈의 원리와 기능
B. 꿈의 구조와 해석과정
IV. 꿈의 해석의 목회적 활용
A. 목회의 방향 설정
B. 설교
C. 목회상담과 영성지도
V. 맺는 말: 분석심리학, 양자물리학, 그리고
실천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참고문헌
I. 시작하는 말
필자가 신학대학교에서 영성과목을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985년이라고 생각된다. 중부연회 인천지역 K. I. 교회에서 목회하는 S목사가 내 강의를 수강하였다. 그 분은 중부연회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요, 인품과 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분이다. 그 분은 학교로 말하면 나의 선배이지만 늦게 대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는 그분의 졸업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그 분이 수업 중에 질문 겸 상담 겸 말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주 동안 주일예배에 보이지 않는 여 집사가 있었다. 한 번은 시간을 내어 심방하였더니 그 여 집사는 매우 죄송스러워하면서 다른 교회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얼마 전부터 매일 밤 꿈을 꾸면 남편이나 자식이 죽고, 사업이 망하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꿈을 꾼 시점이 바로 자기 집에 모 여 전도사가 와서 엄포를 놓고 간 이후라는 것이다. 즉, 당신은 현재 나가는 감리교회를 떠나 자신이 속한 교회로 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가족과 사업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 집사는 처음에는 이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밤마다 거의 매일 위에서 말한 악몽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 예배에 불참하게 되었고, 이제는 불가불 가족을 위하여 감리교회를 떠나서 그 교회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유사종교단체였다. 당시 수강생들과 필자는 목회현장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S 목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도 함께 나누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유사종교나 사이비종교가 꿈과 환상을 오용하여 신도들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협박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 때 휴거설로 한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다미선교회 사건도 꿈이나 환상의 오용과 직결되어 있다. 만일 목회자가 꿈이나 환상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면 이러한 현상을 바로 파악하고 대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속수무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로 인하여 이단적이라고 이를 점점 기피하고 억제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필자는 이런 이유로 꿈이나 환상을 바로 이해하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꿈의 의미와 실제를 고찰하였다. 특히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꿈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가 가진 생동성의 한 면을 파헤쳐 보려고 시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980년대 말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안에서 꿈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인식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인 연구가 나타났으며, 목회현장에서 꿈 해석을 통하여 상담하며 영적인 지도를 시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협성대학교 김성민 교수는 그의 최근의 저서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제 2부의 전반부를 칼 융(Carl G. Jung)의 분석심리학을 사용하여 꿈의 해석과 영적인 성장을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스위스 심층심리학 연구소에서 융 학파 분석가 과정을 거친 심상영 목사는 역시 융의 분석심리학을 개 교회의 목회상담과 영적 성장에 적용하여 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융의 꿈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는 일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사실 융의 분석심리학을 그대로 목회에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으며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분석심리학과 실천신학과의 학제간 연구도 선행되어야 하며,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신학과의 경계, 그리고 그의 심리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 등도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연구의 제한으로 인하여 융의 분석심리학과 꿈 해석을 위한 예비적 고찰과 꿈이론을 중심으로 이를 목회에 적용하는 실제에 한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II. 융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A. 분석심리학과 현대 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발견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면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의 거보를 내 딛게 된다. 이 무렵, 칼 융은 한 물리학자와 공동작업을 하게 된다. 그 물리학자는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로서 1945년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를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융은 파울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작품, 자연과 정신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Nature and the Psyche)에서 실재의 두 측면, 즉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따라서 양자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관점만이 진정으로 승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융은 현대 물리학과 심리학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이는 마치 빛 혹은 전자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것과 유비되는 일종의 상호 보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융은 꿈을 포함하여 동시성 현상(Gleichzeitigkeit), 초감각적 현상 등을 언급하면서 물리학과 심리학의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인식상황으로는 어떤 기본적 고찰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있는 유사성은 강조해도 될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이와같이 현대물리학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융의 심리학의 특성은 물질적인 실재와 동일하게 정신적인 실재를 인정하고 인간의 자아를 초월해 있는 심혼(Seele) 혹은 정신 세계에 대한 탐구를 확장해 나가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이부영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혼이 있는 심리학(Pshychologie mit Seele)"이라고 표현한다. 심혼이란 우리의 자아를 초월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내재하는 정신의 자율성이요 독자성이다. 이러한 심혼을 다루는 융의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을 초월하는 심혼의 자율성과 독자성으로 인하여 진술에 있어서 모호성과 모순을 피하기 어렵다. 융이 꿈과 무의식을 다루고 이와 관련하여 신화, 민담, 동서양의 종교 등을 다룰 때 나타나는 난해한 진술들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융은 현대물리학이 외견상 이중모순으로 보이는 현상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제 심리학자들도 용기를 얻어 모험적으로 “자연과학의 정신세계에서 이탈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도” 정신 세계에서 경험되는 현상들을 감히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융은 일견 혼돈 또는 모순인 듯이 보이는 이러한 정신적인 현상 속에서 숨어있는 의미 내지 어떤 논리를 찾고자 한다.
융이 자연과학과의 유비에서 정신의 실재를 다룬 것은 “정신적 에너지론”(On Psychic Energy)"이다. 여기서 융은 인간의 정신적인 실재는 물리적 실재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정신의 여러 구조들 사이에는 에너지의 분배와 이동이라는 역학적인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정신적 에너지론에 활용한 물리학의 법칙은 열역학 제 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the conservation of energy)과 열역학 제 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 법칙이다. 융은 열역학의 두 법칙이 정신적인 세계에도 작용하는데, 제 1법칙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정신적 요소가 에너지를 잃으면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신적인 요소로 이동한다고 보고 있다. 이 법칙은 평형의 법칙(the principle of equivalence)이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정신적인 에너지는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 즉 균형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 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제 1법칙에 따른 필연적이고 보완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의 변형은 강도(intensity)의 차이들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열은 뜨거운 데서 차가운 데로 흘러감으로써 변형된다. 그리고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으로, 강도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바꾸어지는데, 그 반대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닫힌 에너지 체계에서는 두 요소간에 동일한 온도에 이를 때까지 강도가 감소하는데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융은 바로 이러한 에너지론에 입각하여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정신적인 에너지의 이동, 변형, 그리고 균형의 문제를 전개하여 나간다. 나아가서 그의 분석심리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인간 심리의 전체성 회복인 개성화(individuation)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B.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개념
융은 스승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상적인 차이는 이미 그의 중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는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를 여러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무의식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에게서 무의식의 발견은 프로이트의 공헌이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이란 의식에서 잊혀지고 억압된 내용의 저장에 지나지 않으며, 나아가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융은 이러한 개인적 무의식(personal conscious)을 인정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개인적 무의식이 토대하고 있는 한층 더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단 무의식을 보았다. 이 집단적 무의식이란 개인의 경험이나 습득에 의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이며, 초개인적인 것이다. 이 집단무의식은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본능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일찍이 한번도 개인적으로 획득되지 않았으며 유전의 덕택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집단무의식의 발견은 융 자신이 어릴 때 직접 경험하였던 충격적인 꿈 체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서 치료하였던 환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의 꿈을 분석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어떤 계기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의식에 분출하는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처럼 개인적 무의식뿐이라면 의식이 우선이고, 무의식은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집단적 무의식을 가정한다면 정 반대의 경우가 된다. 즉, 무의식에서 의식이 나온다. 여기서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에서 버려지고 억압된 찌꺼기가 아니라, 의식 보다 훨씬 크고 넓고 심오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의식이 수면에 떠있는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수면 아래에 있는 빙산의 더 큰 부분인 것이다.
그 다음 융은 무의식 속에 억압되는 내용에 대해서 프로이트와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억압의 원인을 주로 성(性)적인 주제로 보았으나 융은 성적인 것 외에도 다른 요인들, 즉 사회적이며, 비극적 생활상황, 권력에 대한 욕구 등이 있음을 그의 임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유년 시절에 억압된 성적 욕구에 중점을 두고 꿈을 이해하는 방법을 환원론적 인과론적 해석이라고 보았으나 융은 이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융은 무의식의 분출은 꿈 꾼 이의 의식이 무시했거나 소홀하게 여겼던 것을 보여줌으로써 꿈 꾼이의 정신상황이나 삶을 보상 내지 보완함으로써 균형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프로이트처럼 꿈은 꿈꾼이의 과거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아울러 포함하고 있으며, 유년기나 청년기만이 아니라 중년기와 노년기까지 포함하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융은 주장하였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방법이 꿈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거 지향적이며 환원론적(reductive)이라면 융의 방법은 꿈이 지향하는 목표를 찾아내는 미래지향적이며(prospective)이며 목적론적(purpositive)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서 융이 발전시킨 것은 원형(archetypes)의 개념이다. 이 원형은 정신 속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일정한 형식들(forms)"이며 ”선재하는 틀들“이다. 이 원형은 또한 본능과도 비슷하여 ”본능적인 행동의 기본틀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융이 이름 붙인 원형은 일찍이 신화학에서는 주제(motive), 원시인 심리학에서는 ‘집단표상(representations collectives)', 그리고 비교종교학에서는 ’상상의 범주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원형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원형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특성은 원형은 이미지 즉, 상(像)이며 동시에 정동(情動, emotion)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할 때에 원형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미지만 있을 때, 그것은 단어상(單語像)일뿐 어떤 효과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의 정동적인 측면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이 때의 이미지는 신성력(神聖力) 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얻으면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원형은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상(像)이요 틀이지만 그 내용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틀이요 형식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모두나 동일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융은 원형의 다른 표현을 신화나 민담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동일한 형식을 가진 비슷한 내용의 신화와 민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나 민담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민족의 상황에 따라 약간의 변형을 거쳐 굳어진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개인이 원형을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꿈이다. 원형은 꿈을 통하여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게 전달하며, 그러한 내용은 그때 그때의 개인의 의식에 맞추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통하여 무의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받으며 이러한 메시지를 해석함으로 우리의 의식이 소홀하게 여겼던 중요한 면을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편향되고 혹은 병든 우리의 정신적이며 실제적인 삶을 벗어나 전체적이며 균형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인간이 본래적인 자기(self)를 회복하는 것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말한다. 그러면 융이 제시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C. 무의식의 원형들(archetypes)
무의식은 일반적으로 의식의 저편에 밀폐되어 있는 개인의 내밀한 세계에 속한다. 융은 이 무의식을 성서에서 말하는 마음(Herz)으로 보고 있다. 마음의 구조를 둘러싼 전체의 모습은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의식활동의 주체인 자아(ego)와 이 자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persona), 그리고 콤플렉스가 있다. 그 다음,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 및 그 원형들이 있고, 마침내 마음의 중심에는 개인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자기( 自己, self)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무의식의 원형들 가운데 그림자, 아니마, 그리고 아니무스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무의식의 원형 가운데서 개인이 가장 먼저 접촉하는 것을 융은 그림자(shadow)라고 부른다. 그림자는 개인이 진정한 자기를 만나러 가는 첫 번째 길목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이다. 이것은 개인이 그 동안 페르조나라는 가면 뒤에 억압되어 있었거나 숨겨져 있었던 제 2의 자아(alter ego)이다. 이것은 인간의 온갖 결점, 노여움, 병적인 것, 유치한 면, 관능적인 면, 반항심, 열등감 같은 것으로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싫어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스티븐스(R. L. Stevenson)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주인공의 페르조나가 지킬 박사라면 그림자는 하이드 씨이다.
누구라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또 하나의 자아인 그림자와의 갈등은 꿈속에서 나타날 때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꿈이 되며, 이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할 때 신경증적인 병적인 현상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기 모습을 회복하고 치유를 경험하려면 그림자와의 대면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융의 꿈에서 그림자와의 만남과 그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내면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첫 번째 담력시험이다. 많은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란 불쾌한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적인 것을 환경에 투사하는 동안은 그것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아 는 데서 오는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다면 비로소 과제의 작은 부분은 해결된다. 우리는 최소 한 개인적인 무의식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있는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 한 형태로는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이 문제는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전체를 불 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망감과 무능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보아도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변명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 허물을 전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꿈은 때때로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사람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시인할 때 비로소 겸손하며 발전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그림자를 시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삶의 의미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개성화이다. 존 샌포드는 우리가 그림자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이요, 하나님을 직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샌포드는 그림자의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특성은 그림자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그림자와 씨름하는 것은 마치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하나님)와 씨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자와의 대면은 우리가 개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자기를 실현하는 필수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성화의 길에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제인 것을 볼 수 있다.
무의식의 원형에서 그림자 못지 않게 자주 등장하는 상(像)을 융은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고 부른다. 생리적으로 남성이 여성 호르몬을, 여성이 남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아니마는 남성 안에 있는 여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성 안에 있는 남성이다. 아니마는 독일어 Seele, 그리고 아니무스는 독일어 Geist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융은 이러한 학술적이며 일반적인 용어보다는 무의식의 특수한 심리적 사실을 표현하는 데는 보다 신화적인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아니마, 아니무스를 선호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신화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융은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념이 이론적인 발명이나 현실감이 없는 신화라는 편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순수한 경험적 개념”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둘은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개인적인 무의식에 속한 것, 본능적인 것, 사회적인 것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초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세계적인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역사적으로는 남녀 신의 짝에서, 중국 철학의 우주론적 진화의 개념에서는 남성적인 양(陽)과 여성적인 음(陰)의 짝으로 나타난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상(像)을 투사하는 데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적인 흔적을 어렴풋이 찾아 볼 수 있다. 융의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것은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역사 속에서 드러나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통념으로 굳어진 집단적인 여성상과 집단적인 남성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그는 남자답다” 혹은 “그녀는 여자답다” 할 때, 그것은 심리적인 원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시대와 집단 사회의 사고(collective thinking)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고 강조점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시대와 집단 사회를 초월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인류공통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내적인 혼이요 정신인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tm의 원형들은 중년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여성심리와 남성심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꿈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격적인 존재를 가진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난다. 예를 들면, 여성적인 아니마는 때에 따라 어머니, 아내, 애인, 약혼녀, 직장의 여자 동료, 여비서, 여사장, 유혹적인 여인, 요정, 여자 천사, 여왕, 공주, 여신(女神), 선녀, 여성 무당, 정신적인 안내자, 여자 어린 아이 , 성녀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남성적인 아니무스는 아버지, 남편, 애인, 약혼자, 유혹하는 남자, 대왕, 왕자, 직장의 남자 동료, 남자 비서, 직장 상사, 정신적인 안내자, 치료사, 마법사, 마귀, 천사, 남자 아이, 성자 등으로 나타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미지는 문학작품과 민담에도 풍부하게 나타나는데, 단테의 神曲에서 뻬아트리체(Beatrice),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미인 헬렌(Helen)과 요정 사이렌, 심청전에서 심청 등은 아니마로서, 그리고 에밀리 브론테(Emilie Bronte)의 폭풍의 언덕에서 히쓰클리프(Heathcliff), 호머의 작품에서 오디세이와 그 아들 텔레마코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등은 아니무스로 나타난다. 만일 성서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찾아본다면, 미리암, 들릴라, 기생 라합, 마리아, 루디아 등은 아니마 이미지로, 그리고 모세, 삼손, 다윗, 솔로몬 등은 아니무스와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각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가령 심청전의 심봉사에게 있어서 심청은 긍정적인 아니마라면, 뺑덕어미는 전형적으로 미숙하고 부정적인 아니마라고 할 수 있다. 샌포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니마는 남성 자신의 영감이자 어두운 측면에 대한 느낌인 동시에 남성 자신의 부드러움이자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여성 속의 아니무스는 여성 자신이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사람처럼 여성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꿈에 나타나는 이러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지금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니마의 경우, 융은 어떤 남성의 무의식에서 아니마가 너무 강도 높게 배정되어 있으면, 아니마는 그 사람의 남성적인 성격을 여성화하여 예민하고 신경질 부리고 짜증내게 만들며,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게으르고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반대로 중년기 이후 남성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아니마 상실은 삶에서 생동성, 융통성, 그리고 인간성에 손상을 입게 한다. 대개 성격의 조기 경직이 일어나고, 석회화,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상동성(常同性), 광신적인 일방성, 완고함, 원칙주의를 나타내며, 그 반대인 체념, 피로 나태함, 무책임성, 그리고 과음 성향을 동반한 유아적인 연화(軟化) 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아니마를 남성은 자신의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어 조정하고 알맞게 함으로서 아니마가 지닌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바르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경우도 그러하다.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게 있어서 아니무스가 분화되지 않고 강도 높게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으면, 이 여성은 아니무스적인 충동에 의하여 남편을 좌지우지하려들고, 자식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하여 지나친 기대를 하여 가정과 자녀교육을 위험한 지경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부영은 우리 나라 민담 「해와 달」에서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그녀의 옷을 입고 어머니 목소리를 내면서 아이를 잡아먹는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부정적인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경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부정적인 아니무스도 의식세계로 끌어올려 분화시키고 조정하여 그 에너지를 바르게 활용하면, 여성의 성숙과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림자, 아니마, 그리고 아니무스의 이미지들은 앞으로 꿈을 해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서 개성화 과정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원형적인 성질의 상들이 있다. 그것들은 둥근 해나 달 모양, 십자가, 만다라, 사방 혹은 팔각형으로 뻗어나가는 상, 황금꽃, 장미, 사각형의 물체 등이다. 이러한 정신의 전체적인 상을 가리키고 있으며 새로운 인격의 중심 형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원형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는 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살펴보자.
III. 융의 꿈 원리와 해석
A. 꿈의 원리와 기능
융은 꿈과 환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꿈을 통하여 무의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의 경우도 중시하였다. 즉 무의식은 바로 꿈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인간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융은 후자를 중시하고 있다. 융은 인간이 결코 꿈을 만들거나 조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반대로 무의식이 꿈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꿈은 인간이 잠자는 동안에 발생하는 특유한 정신 활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자율성이요, 무의식의 자기 조절기능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꿈의 내용이 우리의 의식 세계에서 경험하였던 인상, 생각, 분위기, 감정 등에서 기원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과거적(backward)이며 원인론적 해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에는 그 꿈을 꾼 사람의 의식적인 정신생활에 뚜렷한 영향을 주어 현재 상황을 바로 잡으려는 미래 지향적(forward)인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융은 꿈이 “왜 발생하는가?”라고 그 원인을 찾는 일(causa efficiens)이 “무슨 목적으로 발생하는가?”라는 꿈의 목적을 찾는 일(causa finalis) 보다 결과적으로 더 생산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융은 프로이트의 환원론적인 해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에서 머물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융은 바로 여기서 꿈의 보상적 기능(the compensatory function) 혹은 보상의 원리(the principle of compensation)를 중시한다. 융이 보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융은 비록 보상이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프로이트가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은 억압된 욕망의 성취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에서 억압된 욕망이 분출하여 어떤 외부적인 자극을 일으키고, 따라서 자는 이의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꿈은 바로 이러한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해소시키므로 수면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바로 꿈의 생물학적이며 보상적인 기능이다. 융은 이러한 프로이트식의 꿈의 보상적 기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꿈은 때때로 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꿈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잠을 깨우게 한다. 꿈 때문에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보상과 보충(complementation)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융은 이 둘은 엄밀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보충의 개념이 너무 협의적이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보충이란 두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상호 보충한다는 의미로서 이것으로는 꿈의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본 것이다. 융이 말하는 보상이란 서로 다른 자료들이나 관점들을 비교하고 균형을 취하게 하여 결국 편향된 것을 수정(adjustment) 혹은 교정(rectification)하는 것을 말한다. 꿈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가 무시하고 방치한 자료들이나 삶의 관점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아의 오류를 교정하고 삶의 균형을 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기고 있다는 말이겠다.
융은 꿈의 보상적 기능에서 세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우리의 삶의 상황에 대한 자아의 의식적인 태도가 너무 일방적으로 편향되어 있을 때, 꿈은 그 반대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스스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신사는 꿈에 시궁창에서 술 취한 부랑자를 보는 꿈을 꿀 수 있다. 꿈에서 그는 부랑자를 보면서 저토록 타락한 인간이 있을 수가 있는가 하고 멸시하는 오만의 말을 내 뱉는다. 또한 자신이 평소에 매우 똑똑하고 정숙한 숙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꿈에는 타락한 창녀 모습의 여인이 자주 등장할 수 있다. 둘째로, 의식적인 태도가 비교적 중립적인 경우, 꿈은 약간의 변화(variations)를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의식적인 태도가 올바른(correct) 것이라면 꿈은 이러한 경향을 부합하고 일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꿈의 해석에서는 꿈꾸는 자의 의식적인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꿈 내용만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꿈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꿈의 보상적 기능의 한 실례로 구약성서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거대한 나무에 관한 꿈(단 4:10-17)을 들고 있다. 융은 이 꿈의 의미는 분명히 느부갓네살 왕의 과대망상증을 치유하고 보상하려는 시도라고 보고 있다. 만일 왕이 자신의 의식상의 잘못을 교정하였더라면 정신병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꿈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융은 꿈은 예시적 기능(豫示的, prospec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예시적 기능을 보상적 기능과 구분한다. 보상적 기능은 과거에 억압되었거나 너무 약하여 의식이 포착하지 못한 일들에 대하여 정신의 자기 조정작용(a self-regulation)에 따라 수정하고 교정하려는 목적적인(purposive) 것이다. 그러나 예시적인 기능이란 미래와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의식적인 성취에 대하여 무의식 안에서 예견하는 것(anticipation)으로서, 일종의 예비적인 연습이나 스케취요, 혹은 미리 대충적으로 기획해보는 기능을 말한다. 융은 이러한 예시적 기능을 예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나 일기예보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시적인 꿈들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꿈들은 실제로 일어날 사건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예견하는 것이며, 반드시 구체적인 세목까지 일치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다. 만일 그 꿈이 구체적인 세목까지 일치한다면 그 때는 그 꿈을 “예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융은 꿈에 대한 과거의 문헌과 자신의 동료의 사건에서 꿈의 예시적인 기능을 발견한다. 특히 우리가 분명히 의미 있는 꿈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명할 만한 과거의 일이나 전후관계를 알 수 없는 경우에 예시적 꿈일 가능성에 유의하라고 한다. 이러한 예시적인 꿈은 삶의 한 신비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무의식의 정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우수하고 정확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꿈의 이러한 기능에 집착할 수도 있다. 비록 예시적 기능이 꿈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도 하지만 융은 너무 우리가 이 예시적 기능을 과대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촉구한다. 꿈의 초월적이며 우수한 지식이 우리를 절대 오류가 없는 미래의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융은 꿈의 심리학적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 못지 않게 꿈 분석에 집착하여 실제 생활에 대한 무의식의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무의식 못지 않게 우리의 의식도 중요한 것이다. 꿈을 꾼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운명론적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재정비하고, 꿈이 주는 무의식의 정보를 참조하여 미래를 대비하고 의식과 종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이란 말은 “건설, 준비, 종합(construction, preparation, synthesis)"이란 말과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꿈의 보상적 기능과 예시적 기능 속에는 경고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전후 관계를 알기 어려운 예시적인 꿈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을 보여주는 경고적인 꿈일 수 있다.
꿈은 환원적, 보상적, 예시적 기능으로만 그 해석의 가능성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융은 이러한 꿈의 기능에 추가하여 몇 가지를 더 소개하고 있다. 먼저, 외상적인(trauma) 꿈이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이나 심한 충격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손상을 끼쳐 신경조직이 상처를 입어 발생하는 꿈이다. 전쟁, 화재, 자동차 사고, 기타 우리의 삶에 충격을 준 사건들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꿈은 계속 되풀이하여 반복되면서 마침내 그 자율성을 잃어버리면서 꿈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다음은 텔레파시 (telepathy)에 기인하여 일어나는 꿈이다. 융은 이 텔레파시 현상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일이고, 자신도 경험한 일이며,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 이론을 밝힌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오늘날 대학교에서나 정부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는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꿈의 텔레파시 현상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발생하는 사건 혹은 일이 어떤 사람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어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가까운 가족 사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현상은 반드시 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반의식 혹은 잠재의식 상태에서도 일어난다. 심지어 강할 때에는 의식 상태에 있을 때에도 나타난다.
텔레파시의 원인에 대하여 융은 연상일치작용 (concordance of associations), 평행적인 정신과정(parallel psychic processes), 잠복기억(cryptomnesia)-과거에 경험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전혀 미경험의 사실로 느끼는 것-등을 비롯한 몇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지만 신중을 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현상을 우연이라고 말하며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융은 만일 우연이라고 한다고 치더라도 이러한 우연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에는 더 이상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융은 자신이 꿈의 텔레파시 현상을 말한다고 하여 그 뒤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꿈의 텔레파시 현상은 융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를 배경에 두고 전개하는 그의 동시성 현상에 대한 연구와 연결된다. 동시성 현상은 현재 인간지식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현상이기는 하나 오늘날 양자물리학, 특히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의 도움을 빌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B. 꿈의 구조와 해석과정
꿈도 일종의 드라마와 같이 분명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어떤 작가가 드라마를 쓰려고 할 때 하나의 구성(plot)을 가지고 쓰는 것과 비슷하다. 융은 꿈은 네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전개된다고 설명한다. 첫째 국면은 일종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장소에 대한 진술이 나온다. 예를 들면, “나는 호텔처럼 생긴 건물 안에 있었다”라든가 혹은 “나는 전차들이 이동하는 전쟁터에 있었다”는 식이다. 그 다음에는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나는 어떤 친구 00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라든가 장소와 인물이 복합적으로 전개되어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 모퉁이에서 00를 만났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진술은 드물게 나타난다.
꿈의 둘째 국면은 꿈 구성의 전개(the development of the plot)이다. “나는 어떤 거리에 서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오는데, 매우 불안정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운전사가 술에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계에서는 사건의 전개가 복잡하게 얽히고 사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예상하기 어려운 어떤 분명한 긴장이 나타난다. 세 번째 국면은 꿈의 절정(culmination)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서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나타나던가 사태와 완전히 달라지는 일이 생긴다. “나는 차안에 있었는데, 나는 마치 만취한 운전기사처럼 생각되었다. 아무리 핸들을 잡아도 차가 제대로 가지 않으며 마치 핸들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더 이상 차를 조정할 수 없어 마침내 벽 혹은 낭떠러지를 향하여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혹은 “갑자기 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넘어지면서 강아지로 변하고 말았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나 연극의 클라이맥스나 반전과도 비슷하다고 하겠다.
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국면은 종결 혹은 결과이다. 융은 이 네 번째 장면은 어떤 꿈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꿈은 어떤 특별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는 부서진 자동차를 보았는데, 전혀 내가 알지 못하는 차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전혀 다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이 차가 사고난 데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네 번째 장면에서는 꿈을 꾼 이의 감정이 나타난다. 그러한 감정은 기쁨, 환희, 슬픔, 분노, 안도, 안타까움, 미안함, 죄스러움, 죄책감, 의무감 등이다. 이러한 감정의 진폭이 클 때는 꿈을 꾸면서 실제로 크게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서 이 꿈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메시지를 주려는지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네 번째 국면이 나타나지 않는 꿈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꿈을 꾸는 이가 특별히 유의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꿈 작업을 통하여 그 꿈속에 다시 들어 가든가, 그 다음에 일어나는 꿈들에 주목함으로써 그 꿈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꿈 작업은 융이 제안한 적극적 명상법(active imagination)과 확충법(amplification), 그리고 융의 방법을 활용한 세이버리의 꿈 자아 따라가기, 상징몰입법, 상징연상법, 상징확장법 상상으로 꿈속에 다시 들어가기 등을 사용하면 가능하다. 그러면 융의 꿈 해석을 살펴보자.
융은 꿈 해석이나 상징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꿈을 꾼 당사자의 의식, 현재 상황, 철학, 문제들, 그 사람 자신의 해석을 중시하였다. 그는 프로이트식의 꿈 전문가들처럼 자기들의 이론적인 틀에 꿈을 억지로 맞추어 해석하려는 태도를 피하려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전반적인 꿈 작업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꿈은 일종의 극장이며, 이 극장에서 꿈꾸는 이는 자기 자신이 장면이며, 배우, 프롬프터, 연출가, 작가, 관중, 그리고 비평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융은 꿈을 해석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개의 수준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째는 주관적인 수준의 해석이다. 이 주관적인 수준의 해석은 꿈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꿈을 꾸는 자신의 인격을 보여주는 일종의 인격화된 상들이라는 것이다. 가령, 꿈에 나타나는 집은 자기 인격의 내면적인 모습일 수 있고, 친구가 나타난다면, 그 친구의 특성을 띠고 나타나는 자신의 인격의 일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에 대한 저항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주관적 수준의 해석을 통하여 꿈을 꾸는 이는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정신적인 성향들, 무의식적인 감정, 태도, 생각 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무의식의 성향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조정하고 균형을 취함으로 자신의 정신적 성숙을 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둘째로는 객관적인 수준의 해석이다. 이 수준의 해석은 꿈에 나타난 이미지를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가족, 사회, 공동체, 그리고 사물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가족이나 친구의 이미지를 실제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와 연결시켜서 볼 때, 비로소 그 동안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그들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의 감정과 태도 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 그 동안 그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수정해야할 것, 발전시켜야 할 것들을 찾아 자신의 객관적인 삶의 변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융은 주관적인 수준과 객관적인 수준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이 두 해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낳게 된다고 보고 그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꿈에 나타난 객관적인 이미지는 그 사람의 꿈에서 한편에서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어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구체적인 사례에서 어느 편이 더 지배적인지를 결정하려면 그 이미지가 주관적인 중요성을 띠는지 아니면 객관적인 중요성을 띠는지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융은 만일 꿈에 나타난 사람이나 사물이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인물이요 사물이라면 객관적인 해석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좋고, 반대로 잘 모르는 인물이나 사물이 등장할 때에는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전자의 경우 융은 자신의 꿈 사례를 들어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꿈 해석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꿈을 꾼 이의 현재 상황, 의식적인 태도, 느낌 생각 등을 중시할 때 더욱 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전혀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꿈 내용만 듣고서 섣불리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꿈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나기에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해석 사이에서 여러 가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는 인간이 아닌 여러 형상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동물, 무생물, 자연적인 사건 등 여러 형상들이다. 이러한 꿈의 해석에는 무의식의 원형에 대한 이해와 상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존 샌포드는 융의 꿈 해석 이론에 근거하여 인간이 아닌 꿈 상징들을 해석하는 법칙 및 주의사항을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그것은 첫째, 꿈꾸는 사람의 의식 상태를 잘 파악하는 일, 둘째, 한 가지 꿈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꿈을 연구할 것, 셋째 꿈과 관련한 연상(聯想), 넷째 많은 꿈을 꾸어보면서 해석기술을 터득하는 일, 마지막으로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에서 나오는 꿈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는 일 등이다. 세이버리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도 이러한 꿈 해석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융의 꿈 해석은 결코 닫힌 해석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꿈 해석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꿈이라고 하는 이 복합적인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일반적으로 만족할 만한 이론이나 설명을 내어놓았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이론에 만족하지 말 것이며, 모든 이론에 의심을 가지고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융의 꿈 해석을 열린 해석이며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서 긍정적인 점은 기독교 성서에 나타난 꿈과 환상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도구들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방법이 자연과학적인 방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매우 근접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신학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고 하는 점이다. 융은 어디까지나 심리학자로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의식과 신(神)의 경계를 드나들며 때로는 모호하거나 위험한 면을 보이기는 하지만 분석심리학과 신학 사이에 활발한 접촉점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천 신학적인 면에서 융을 깊이 연구하고 목회에 활용하여 크게 도움을 받은 샌포드는 대담하게도 “인간의 꿈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면 꿈의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는 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IV. 꿈 해석의 목회적 적용
지난 반세기 동안 수면과 꿈에 대하여 연구하는 과학적인 꿈 연구소들이 수 십 개 이상 문을 열고 본격적인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꿈과 수면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 있고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에 꿈을 꾼다는 사실은 1952년 시카고 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생 유진 아제린스키(Eugene Asesinsky)가 우연히 급속안구운동(REM: rapid eye movement)을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REM이란 깊은 수면 상태에서 꿈을 꿀 때 마치 생시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움직이는 안구운동을 말한다. REM주기는 하루 밤새 보통 4-6회에 걸쳐 나타난다는 것도 밝혀졌다. 필자는 가끔 한번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사람도 사실은 꿈을 꾸지만 다만 깨어나서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마치 꿈을 꾸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실험은 뉴욕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Mount Sinai) 병원의 윌리암 디멘트(William Diment) 박사가 행한 것이다. 그가 행한 실험 중에는 REM 주기에 들어갈 때마다 사람을 깨워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것이 있다. 5일 동안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사흘째 밤과 닷새째 밤에 신경쇠약증세를 나타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디멘트 박사가 1960년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발표한 결론은 “만일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꿈을 꾸지 못한다면 일종의 정신적인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모두 꿈을 꾸며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꿈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꿈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너무 꿈에 치우쳐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않는 순응적 자세도 문제지만 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꿈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무의식의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꿈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꿈의 메시지와 영적인 에너지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적절하게 통합하고 적용(appropriation)하는 수용적이며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머지 않아 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통로인 것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풍부한 사례를 통해서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 특별히 교부들의 사상과 삶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초대교회 이후 4세기말에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꿈을 중시하는 전통은 맥이 끊어지게 되었고 꿈은 기독교 역사의 뒷면에서 억압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20세기에 들어서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재발견함으로써 꿈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특별히, 융의 분석심리학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융은 생전에 70여명이나 되는 신학자들과 편지를 교환하였는데, 그 중에는 개신교,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 신학자들도 있었다.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융과 그의 분석심리학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을 본격적으로 목회에 적용한 이들은 드물었다. 융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를 과감하게 목회 적용의 길로 열어 놓은 이들이 존 샌포드, 머톤 켈시, 그리고 빅터 화이트(Victor White) 등이다. 한국에서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이기춘 교수와 그의 두 제자인 동 대학교 안석모 교수와 협성대학교 김성민 교수, 그리고 꿈에 관한 두 개의 번역서를 낸 한신대학교의 정태기 교수가 목회상담 분야에서 융 심리학의 실제적인 목회적용의 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필자는 지난 1984년 이후 꿈을 영성지도 및 영성수련의 관련 아래에서 강의하고 워크숍을 해왔다.
필자는 그 동안의 연구와 경험을 통하여 무언가 창조적이고 풍성한 사역을 희망하는 꿈꾸는 목회자들이 아래의 몇 가지 방면에서 꿈을 활용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꿈을 목회사역에 적절하게 활용한다고 할 때 어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호렙산으로 도망간 엘리야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탈진한 목회자는 꿈을 통하여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극복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통찰력과 활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목회에서 목회전반의 방향설정, 설교, 예배, 성서연구, 목회상담, 그리고 영성지도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비전과 영적인 에너지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선 이러한 분야에서 꿈을 활용하는 일을 사례와 함께 다루어 보고자 한다.
A. 목회의 방향설정
여기서 목회방향 설정이라 함은 크게 말해서 목회방향이지만 예배, 교회행정, 선교, 사회봉사 등을 포함하여 목회에서 당면하는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어떻게 결단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 범주에 포함된다. 또한 크게는 목회전반의 방향 수정 혹은 재 설정을 포함하며, 개인적으로는 목회자 자신의 목회관, 목회와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도 포함한다.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십 여 년 전념하다가 보면 때때로 목회자 자신이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가 온다. “내가 하는 목회가 참으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것인가?” “내가 오늘 이렇게 목회하자고 신학교를 다녔고, 성직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왔고 그 과정에 대하여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특별히 성장의 둔화상태에 접어든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교회에 대한 거센 비판의 목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별히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 중요하냐 아니면 질적인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양적 성장 일변도로 나가는 목회자이든, 혹은 질적인 일변도로 나가는 목회자이든 칼 융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림자(shadow)에 삼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는 자기의 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의식적인 삶 속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소홀히 하였던 점이 있다면 꿈을 통하여 무의식이 보여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상징이 나타나고, 무슨 세미한 소리가 들리는지, 나아가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방향을 잘못 잡음으로 거기에 속한 양떼들이 얼마나 방황할지를 생각하면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자를 치면 양떼는 흩어지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예를 들어보겠다. 이 연구의 주제를 정해놓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칼 융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의 방대함 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가해진 신학적인 비판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서는 그가 정통 기독교와 때로는 성서의 한계를 벗어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다룬 영지주의, 연금술, 주역(周易) 등에 대한 입장도 문제 가운데 포함된다. 이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융의 꿈 해석을 목회에 적응하려고 할 때 필자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아래와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길거리에 있는 한 옷가게 겸 양복점에 들어간다. 거기엔 내게 평소에 옷을 재단해주는 30 대 초반으로 비교적 젊고 건강하게 생긴 여주인이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나는 이 가게에서 바지를 하나 맞출까 아니면 살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그 가게를 나왔다. 그 때 내가 가는 길 앞쪽에 서 있는 한 청년을 만난다. 그는 자신을 재단사라고 소개하면서 나의 바지를 무료로 재단해주겠다고 한다. 나는 고맙기는 하나 내겐 단골 옷가게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이 그 가게 주인에게 가서 직접 양해를 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우리 두 사람은 나의 단골 옷가게로 여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여주인은 젊은 재단사를 보더니 크게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분은 여기서 최고의 재단사입니다. 이분은 우리 아버님의 스승이며 우리 재단학원 제 1회 졸업생입니다. 이 분이 선생님의 옷을 재단한다면 그건 최고이며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시 그 청년을 보면서 나는 매우 놀라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이 가게 주인의 부친의 스승이라면 적어도 노인층 연령에 속할 터인데 어떻게 전혀 늙지 않고 청년으로 남아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 청년은 옷의 재단은 자신이 하지만 바지를 만드는 작업은 이 가게 여주인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면 옷을 언제 찾으러 올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너무 시간이 촉박할 터이고 모레는 주일이니까 주일을 지켜야 되니 안되고, 그러면 글피가 좋겠다.” 그리고 주인에게 글피, 그러니까 삼일 후에 옷을 찾으러 오겠다고 했더니 여주인은 매우 좋다고 대답했다.
나의 꿈은 여기서 그쳤다. 필자는 이 꿈을 적어 놓고 며칠동안 숙고해 보았다. 이 꿈에 나타난 상징이며 여러 가지 대화들을 살펴보면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며칠 뒤 필자는 이 꿈이 지금 쓰려고 하는 논문의 연구방향과 관계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 나이를 초월한 젊은 청년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꿈에서 점차 신비한 인물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친절하게 나를 위해 새로운 디자인을 해주겠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인물은 나에게 일종의 영혼의 안내자(psychopomp)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젊은 재단사가 나의 기존 재단사인 가게 여주인과 협동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였다. 또한 내가 새로운 옷은 내일도 모레도 아닌 3일 후에 찾으러 오겠다는 데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나의 해석은 이 과제는 내일, 즉 급하게 해서도 안돼는 그 무엇이다. 또한 모레인 주일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융의 꿈 연구와 해석이 나의 기존의 기독교 신앙이나 신학적 사고와 충돌하지 않는 길인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제 3일에서 필자는 3이라는 숫자가 함축하는 기독교적인 의미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 꿈을 꾼 후에 연구의 방향을 보다 더 분명하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그 동안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는 목회자들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자주 있었다. 교회 임지의 선택, 목회철학의 문제, 행정적인 문제, 구체적으로는 교회건축, 열린 예배와 관련된 문제 등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갈등의 와중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때, 꿈을 꾸고 나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20년이 넘은 일인데 한번은 강화에서 농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N 전도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교회임지를 놓고 고뇌하다가 하루는 꿈에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 장례식 꿈을 자기의 강화도에서 목회는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결단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지금 그는 인천 지방에서 중견 목회자로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 연구의 서두에서 나온 상황과 비슷하다. 1984년 무렵 필자의 대학원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역시 기독교 계통의 K여학교 교목으로 있었던 Y목사의 이야기였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서울 한강변이 보이고 수많은 물고기 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이 매우 신기하기도 하여 어떤 사석에서 이야기했는데 마침 그곳에 K목사가 있었다고 했다. K목사는 현재에 위치한 교회를 팔고, 당시 개발붐이 일어나던 강남으로 이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K 목사는 Y목사에게 그 꿈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K목사와 그 교회는 한강변에 위치한 장소로 이전하여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현재 Y, K 목사는 다 생존하여 살아 계시기에 익명으로 표기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 이야기는 Y목사의 진실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교회의 야사(野史)에나 나옴직한 것들이다.
필자는 이 두 이야기에서 N목사나 K목사의 맹목성이나 어떤 허물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이 꿈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넓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가지고 있다. 필자가 이 이야기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꿈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지 꿈이 목회자들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보일 때도 있지만 꿈이 목회자의 목회 방향에 어떤 식으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상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Y목사의 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매우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 강물, 물고기는 개인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상징인 것이다. 당시 Y목사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신학대학원에 와서 어린 후배들과 나란히 앉아 공부하게 된 것도 무의식적이나마 그의 꿈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목회자가 자신의 꿈을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개인적인 문제해결과 성숙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목회자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집단과의 관계에서 공동체적이며 객관적 수준에서 그 꿈을 해석하게 된다면 자신의 지역교회, 공동체들, 그리고 전체 기독교회, 민족, 그리고 인류를 위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목회자의 생애에서 한 두 번 정도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의미의 중대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신약성서의 사도들은 물론 교회사의 수많은 인물들의 생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욥바 피장의 집에서 기도하는 중에 본 환상은 초대 기독교회가 이방선교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본 마게도니야인의 환상은 아시아냐 유럽이냐 하는 문제에서 유럽선교 방향으로 결정된 것과 직결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B. 설교
구약시대의 설교를 보면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설교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압도적으로 예언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예언자들의 예언이 곧 당시의 설교였다. 그들은 꿈과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였다. 필자는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 꿈을 설교의 중요한 보조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꿈에 나타난 자료를 설교의 주제나 방향을 잡든지 설교의 내용과 예화 등에 활용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성서의 본문을 설교의 중심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통하여 그 텍스트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감을 얻곤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개척교회를 시작하여 활기 있는 목회를 하고 있는 서울 S교회의 담임자 K목사가 있다.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그의 설교를 자주 듣고 있기에 그의 설교 준비나 작성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 가운데는 아예 꿈을 설교에 활용하기 위해서 잠자기 전에 아예 머리맡에 꿈 노트를 준비해둔다는 말이 있었다. 이러한 습관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꿈 해석 전문가들은 꿈의 연구와 해석을 위해서는 연구자 자신의 꿈 일지(dream journal) 쓰는 습관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의 설교 예화 중에 꿈 자료가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그런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존 웨슬리가 꿈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천국 문에서 베드로를 만났지요. 웨슬리는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감리교인들이 몇 명이나 와 있습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여기엔 감리교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 장로교인은 몇 명 있습니까?‘ ’장로교인도 한 명도 없습니다...." 꿈에 천국과 지옥에 가서 거기서 예수님, 사도, 천사, 기타 아는 인물을 만나 대화했다는 이야기는 실제 설교나 시중의 설교집 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이 흑백 인물 차별로 인해 크게 갈등을 겪을 때 꿈을 소재로 한 예화는 매우 유명하다. 꿈에서 한 흑인이 백인 교회에 예배하러갔다. 그러나 그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는 하는 수 없어 교회의 현관 아래 계단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자기 옆에 또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놀라웁게도 그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흑인에게 말씀하셨다. 실은 나도 이 교회에서 쫓겨났다라고. 이러한 생생한 꿈 자료들은 때때로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형태를 띠면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꿈의 내용이 현실과 문자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를 초월해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꿈은 소설처럼 허구로 만들어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꿈은 어떤 실존적 인물이 실제로 경험했던 실제적인 꿈을 전제로 한다. 재미있는 것은 루이스 세이버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꿈과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꾼 꿈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 대신 우리에게는 그분의
생생한 비유들이 남아 있다. 그 비유들이 대부분 꿈처럼 풍부한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 환상, 기도, 명상 등에서 보았던 영상들을 사용하여 비유 들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로 상징을 통해서 그분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분 역시 이 상징들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
꿈의 자료를 설교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꿈의 보상적이며 예시적인 기능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융이 집단 무의식에서 나오는 꿈은 개인을 초월하여 공동체와 관련되며 전 민족, 종족, 전 세계적인 차원과 연결된 것이라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꿈의 메시지는 공동체와 민족의 미래와 직결되어 전 공동체적인 회개, 각성, 교정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의 꿈 이론과 해석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꿈과 환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좋은 도구가 된다. 만일 오늘도 이러한 꿈 내용을 강단의 메시지로 채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존 샌포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다니엘이나 요셉 같은 해몽가들이 오늘날 기독교 설교단에서 설교를 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
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가 영적인 요구와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얼마나 활기를
띠게 되겠는가?
C. 목회상담과 영성지도
목회상담은 영성지도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목회상담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완화하거나 치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이에 비하여 영성지도는 마틴 쏜튼(Martin Thornton)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양육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받은 은사를 창조적으로 계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도 가능하지만 결국 목회상담과 영성지도의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는 이 둘은 서로 만나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융이 지향하는 개성화(individuation)은 목회상담의 목표인 동시에 영성지도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기독교 영성에 접목하는 작업의 가능성을 시도한 것은 프랑스의 분석심리학자 에르나 반 드 빙껠(Erna van de Winckel)의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이다. 이 책에서 빙껠은 정신분석이 결코 종교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시도는 영적인 것을 훼손시키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빙껠은 심리학적인 방법을 영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道)과 수단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빙껠은 기독교의 영성수련의 하나인 금욕수련과 개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영성지도를 위한 길을 열고 있다.
존 샌포드는 꿈: 하나님의 잊혀진 언어에서 꿈의 해석을 활용한 목회상담의 실제적인 과정과 결과를 사례를 통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꿈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세이버리와 공동 작가들의 작품인 꿈과 영적인 성장은 제목이 암시하듯 목회상담을 다루기도 하지만 영성지도에 보다 더 강조점을 둔 꿈 해석의 실제를 다루고 있다. 세이버리의 책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꿈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꿈 일지 기록하기, 꿈 자아 따라가기, 상징 몰입법 등 37가지의 꿈 해석기술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꿈 작업은 모두 융의 꿈 해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세이버리가 꿈 해석을 통한 영적 성장을 다룬 한 사제의 꿈을 보기로 한다.
4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제가 되어 첫 미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중석에서 성서를 봉독하고 있었고 나는 헌금 봉헌송 중 독창 부분을 노래하기 위해 성가대석으로 올라갔습 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고, 가락은 그레고리 형식이었습니다. 전에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불렀습니다. 노래를 마친 후에 회중석으로 내려와 어머 니와 함께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성가대석으로 다시 올라가 트럼펫으로 폐회 찬 송을 불렀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어머니의 누이동생인 엘리스 이모를 만났는데 그녀는 매우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모 에게 어머니가 미사를 집전하는 교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모는 미사가 어떠했냐고
물었고, 나는 “아주 좋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 사제는 이 꿈속에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제는 여자를 사제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에 어머니가 집전하는 성찬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놀라거나 싫어하지 않은 사실에 유의하였다. 또한 자신 역시 어머니가 자랑스러웠고, 어머니가 사제품을 받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제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신앙차원에서는 자신의 목회에 여성적인 에너지를 보다 충분히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여자에게도 사제 품위를 주어야 한다는 외적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꿈의 에너지를 통해 사제는 개인, 가족, 지역 교회, 그리고 교회 전체 차원에서 자신의 의식을 한 차원 더욱 높일 수 있었고, 풍부한 종교적이며 영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제의 경우처럼 스스로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이와 비슷한 꿈을 꾼 사람들은 목회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성장에서 무엇이 장애가 되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꿈 이미지를 통해서 보다 더 자세한 문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 순례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꿈의 상(像)은 구체적인 인격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돕고, 안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꿈에서 이러한 영혼의 안내자(pshychopomp)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융의 원형들인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은 이런 영적인 성장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나타난다. 나아가서 자기(self)를 상징하는 십자가, 태양, 만다라, 둥근 원, 사각형의 상들이 나타날 때는 그리스도의 완전성화를 지향하는 것과 관련하여 본다면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융의 개성화 과정은 영성순례라는 맥락에서 영성 지도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외에도 꿈 연구 그룹을 운영하면서 목회를 활성화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 꿈 연구 그룹은 먼저 꿈에 대한 성서적인 연구로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꿈을 문헌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존 샌포드나 머튼 켈시는 이미 신․구약 성서 안에 있는 70여개의 꿈 자료와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저서에 나타난 150여 개의 꿈 자료를 연구하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생애』와 사막 교부들의 삶과 교훈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자들 역시 환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꿈 연구 그룹은 매 모임 때마다 자기들의 꿈을 가지고 와서 공동으로 작업하는 역동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루이스 세이버리의 『꿈과 영적인 성장』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스스로 꿈을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루고 있기에 이 그룹의 교재 중 하나로 활용하면 좋겠다. 또한 이 그룹은 분석심리학적인 방법을 통한 성서연구 그룹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서해석은 꿈에 대한 성서적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발전이 될 터인데, 이 성서연구 그룹은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상징과 비유도 연구 범위에 포함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꿈에서 나온 메시지와 에너지는 목회자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봉사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바람직한 영적인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목회전반에 걸쳐 방향설정, 행정, 예배, 선교, 설교, 상담, 그리고 영성지도 등에서 꿈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지혜로운 청지기가 때에 따라 하늘 창고에 쌓아둔 보물을 꺼내어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목회자의 기본적인 영성생활, 성서연구, 그리고 신학적인 노력과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소홀하게 여길 때는 물론 꿈이 그 보상적이며 예후적 기능을 통하여 메시지를 보내겠지만, 이를 무시하게 되면 꿈과 환상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V. 맺는 말: 분석심리학, 양자물리학, 그리고 실천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발견으로 인류는 거시적인 우주 속에 내재하는 심오한 진리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이 이론을 통해 절대적인 공간이나 시간개념은 수정되었고,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우주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의 발전으로 아원자 차원에서 물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미시적인 세계의 법칙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양자물리학은 빛이 입자(particle)인 동시에 파동(wave)이라는 모순된 발견 앞에서 한동안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이제 닐스 보어(N. Bohr)의 상보설(complementary theory)을 정설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 것은 모순인 동시에 신�
http://www.ccausa.org/bbs/view.php?id=CCA_BBS1&no=57
꿈의 해석과 그 목회적 활용
-C. G. Jung의 꿈 해석을 중심으로
김 외 식 박사
(감리교신학대학교 총장)
Interpretation of Dream and Its Appropriation to Christian Ministry
focused on the C. G. Jung's Inpterpretation of Dream -Oe Shik Kim-
목 차
I. 시작하는 말
II. 융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A. 분석심리학과 현대물리학
B.. 집단적 무의식의 개념
C. 무의식의 원형
III. 융의 꿈 원리와 해석
A. 꿈의 원리와 기능
B. 꿈의 구조와 해석과정
IV. 꿈의 해석의 목회적 활용
A. 목회의 방향 설정
B. 설교
C. 목회상담과 영성지도
V. 맺는 말: 분석심리학, 양자물리학, 그리고
실천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참고문헌
I. 시작하는 말
필자가 신학대학교에서 영성과목을 처음으로 가르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그러니까 1985년이라고 생각된다. 중부연회 인천지역 K. I. 교회에서 목회하는 S목사가 내 강의를 수강하였다. 그 분은 중부연회에서 널리 알려진 분이요, 인품과 여러 면에서 존경받는 분이다. 그 분은 학교로 말하면 나의 선배이지만 늦게 대학원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하였고, 나는 그분의 졸업논문 지도교수이기도 했다. 그 분이 수업 중에 질문 겸 상담 겸 말한 것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몇 주 동안 주일예배에 보이지 않는 여 집사가 있었다. 한 번은 시간을 내어 심방하였더니 그 여 집사는 매우 죄송스러워하면서 다른 교회로 옮겨야겠다고 했다. 그 이유는 얼마 전부터 매일 밤 꿈을 꾸면 남편이나 자식이 죽고, 사업이 망하는 꿈을 꾼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꿈을 꾼 시점이 바로 자기 집에 모 여 전도사가 와서 엄포를 놓고 간 이후라는 것이다. 즉, 당신은 현재 나가는 감리교회를 떠나 자신이 속한 교회로 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 가족과 사업이 망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 집사는 처음에는 이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밤마다 거의 매일 위에서 말한 악몽을 꾸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 예배에 불참하게 되었고, 이제는 불가불 가족을 위하여 감리교회를 떠나서 그 교회로 가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교회는 이미 한국사회에서 많은 물의를 일으키고 있던 유사종교단체였다. 당시 수강생들과 필자는 목회현장에서 생생하게 들려오는 S 목사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책도 함께 나누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이 이야기는 유사종교나 사이비종교가 꿈과 환상을 오용하여 신도들을 현혹시키고 심지어 협박하는 수단으로 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지금은 잠잠해졌지만 한 때 휴거설로 한국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킨 다미선교회 사건도 꿈이나 환상의 오용과 직결되어 있다. 만일 목회자가 꿈이나 환상에 대한 심리학적 이해가 부족하다면 이러한 현상을 바로 파악하고 대처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다시 말하자면 속수무책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꿈과 환상에 대한 편견이나 오해로 인하여 이단적이라고 이를 점점 기피하고 억제한다고 해도 그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일찍이 필자는 이런 이유로 꿈이나 환상을 바로 이해하는 연구를 시도하였다. 여기서 필자는 구약성서와 신약성서에서 꿈의 의미와 실제를 고찰하였다. 특히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꿈 이해를 통하여 기독교가 가진 생동성의 한 면을 파헤쳐 보려고 시도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지난 1980년대 말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안에서 꿈에 대한 관심과 새로운 인식이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근에 와서는 기독교 신학적인 관점에서 학문적인 연구가 나타났으며, 목회현장에서 꿈 해석을 통하여 상담하며 영적인 지도를 시도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협성대학교 김성민 교수는 그의 최근의 저서 분석심리학과 기독교 제 2부의 전반부를 칼 융(Carl G. Jung)의 분석심리학을 사용하여 꿈의 해석과 영적인 성장을 연결시키고 있다. 또한 스위스 심층심리학 연구소에서 융 학파 분석가 과정을 거친 심상영 목사는 역시 융의 분석심리학을 개 교회의 목회상담과 영적 성장에 적용하여 그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다.
본 연구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융의 꿈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는 일에 대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사실 융의 분석심리학을 그대로 목회에 적용한다는 것은 사실상 쉽지 않으며 여러 가지 제약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는 분석심리학과 실천신학과의 학제간 연구도 선행되어야 하며,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신학과의 경계, 그리고 그의 심리학이 안고 있는 문제점 등도 충분히 숙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연구의 제한으로 인하여 융의 분석심리학과 꿈 해석을 위한 예비적 고찰과 꿈이론을 중심으로 이를 목회에 적용하는 실제에 한하여 연구하고자 한다.
II. 융 이해를 위한 예비적 고찰
A. 분석심리학과 현대 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발견으로 인하여 시간과 공간의 개념에 일대 혁명이 일어나면서 현대 물리학의 발전의 거보를 내 딛게 된다. 이 무렵, 칼 융은 한 물리학자와 공동작업을 하게 된다. 그 물리학자는 볼프강 파울리(Wolfgang Pauli)로서 1945년 배타원리(exclusion principle)를 발견하여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인물이다. 융은 파울리와 공동으로 저술한 작품, 자연과 정신의 해석(The Interpretation of Nature and the Psyche)에서 실재의 두 측면, 즉 물리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따라서 양자를 동시에 포용할 수 있는 관점만이 진정으로 승복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융은 현대 물리학과 심리학은 서로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으며, 이는 마치 빛 혹은 전자가 입자인 동시에 파동인 것과 유비되는 일종의 상호 보충관계에 있다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융은 꿈을 포함하여 동시성 현상(Gleichzeitigkeit), 초감각적 현상 등을 언급하면서 물리학과 심리학의 유사성을 언급하고 있다.
현대물리학적, 그리고 심리학적 인식상황으로는 어떤 기본적 고찰의 유사성을 확인하는 것으로 족하다. 그러나 둘 사이에 있는 유사성은 강조해도 될 만큼 충분히 의미가 있다.
융의 분석심리학은 이와같이 현대물리학의 발전과 맥을 같이 하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리하여 융의 심리학의 특성은 물질적인 실재와 동일하게 정신적인 실재를 인정하고 인간의 자아를 초월해 있는 심혼(Seele) 혹은 정신 세계에 대한 탐구를 확장해 나가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이부영은 융의 분석심리학을 “혼이 있는 심리학(Pshychologie mit Seele)"이라고 표현한다. 심혼이란 우리의 자아를 초월하는 동시에 우리 마음의 깊은 곳에 내재하는 정신의 자율성이요 독자성이다. 이러한 심혼을 다루는 융의 분석심리학은 인간의 논리와 합리성을 초월하는 심혼의 자율성과 독자성으로 인하여 진술에 있어서 모호성과 모순을 피하기 어렵다. 융이 꿈과 무의식을 다루고 이와 관련하여 신화, 민담, 동서양의 종교 등을 다룰 때 나타나는 난해한 진술들은 바로 이런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융은 현대물리학이 외견상 이중모순으로 보이는 현상을 수용하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이제 심리학자들도 용기를 얻어 모험적으로 “자연과학의 정신세계에서 이탈한다는 느낌을 갖지 않고도” 정신 세계에서 경험되는 현상들을 감히 시도해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아가서 융은 일견 혼돈 또는 모순인 듯이 보이는 이러한 정신적인 현상 속에서 숨어있는 의미 내지 어떤 논리를 찾고자 한다.
융이 자연과학과의 유비에서 정신의 실재를 다룬 것은 “정신적 에너지론”(On Psychic Energy)"이다. 여기서 융은 인간의 정신적인 실재는 물리적 실재와 마찬가지로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며 정신의 여러 구조들 사이에는 에너지의 분배와 이동이라는 역학적인 관계가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가 정신적 에너지론에 활용한 물리학의 법칙은 열역학 제 1법칙인 에너지 보존의 법칙(the conservation of energy)과 열역학 제 2법칙인 엔트로피(entropy) 법칙이다. 융은 열역학의 두 법칙이 정신적인 세계에도 작용하는데, 제 1법칙으로 설명하자면 어떤 정신적 요소가 에너지를 잃으면 그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정신적인 요소로 이동한다고 보고 있다. 이 법칙은 평형의 법칙(the principle of equivalence)이라고 하는데 결과적으로 정신적인 에너지는 전체적으로 고른 분포, 즉 균형을 취하게 된다는 것이다. 제 2법칙인 엔트로피 법칙은 제 1법칙에 따른 필연적이고 보완적인 법칙이라고 할 수 있다. 에너지의 변형은 강도(intensity)의 차이들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령, 열은 뜨거운 데서 차가운 데로 흘러감으로써 변형된다. 그리고 뜨거운 것은 차가운 것으로, 강도 높은 것에서 낮은 것으로 바꾸어지는데, 그 반대현상은 일어날 수 없다. 이런 식으로 닫힌 에너지 체계에서는 두 요소간에 동일한 온도에 이를 때까지 강도가 감소하는데 더 이상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융은 바로 이러한 에너지론에 입각하여 의식과 무의식 사이에 정신적인 에너지의 이동, 변형, 그리고 균형의 문제를 전개하여 나간다. 나아가서 그의 분석심리학이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인간 심리의 전체성 회복인 개성화(individuation) 역시 이러한 배경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B. 집단적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개념
융은 스승 프로이트(G. Freud)의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힘입은 바가 적지 않음을 스스로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이 프로이트와 결별하지 않을 수 없는 사상적인 차이는 이미 그의 중년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우리는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를 여러 가지 점에서 찾아 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두 개만 살펴보기로 한다. 먼저, 무의식에 대한 이해이다. 인간에게서 무의식의 발견은 프로이트의 공헌이다. 그러나 융은 프로이트에게서 무의식이란 의식에서 잊혀지고 억압된 내용의 저장에 지나지 않으며, 나아가서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성질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았다. 융은 이러한 개인적 무의식(personal conscious)을 인정하지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개인적 무의식이 토대하고 있는 한층 더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집단 무의식을 보았다. 이 집단적 무의식이란 개인의 경험이나 습득에 의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보편적이며, 초개인적인 것이다. 이 집단무의식은 인류의 조상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종의 본능과 같은 것이며 “그것은 일찍이 한번도 개인적으로 획득되지 않았으며 유전의 덕택으로 존재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집단무의식의 발견은 융 자신이 어릴 때 직접 경험하였던 충격적인 꿈 체험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서 치료하였던 환자들, 특히 어린아이들의 꿈을 분석하면서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집단 무의식이 어떤 계기로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의식에 분출하는 것이다. 만일 프로이트처럼 개인적 무의식뿐이라면 의식이 우선이고, 무의식은 의식에서 나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집단적 무의식을 가정한다면 정 반대의 경우가 된다. 즉, 무의식에서 의식이 나온다. 여기서 무의식은 단순히 의식에서 버려지고 억압된 찌꺼기가 아니라, 의식 보다 훨씬 크고 넓고 심오한 세계에 속하는 것이 된다. 의식이 수면에 떠있는 빙산의 일각이라면 무의식은 수면 아래에 있는 빙산의 더 큰 부분인 것이다.
그 다음 융은 무의식 속에 억압되는 내용에 대해서 프로이트와 견해에 동의하지 않는다. 프로이트는 억압의 원인을 주로 성(性)적인 주제로 보았으나 융은 성적인 것 외에도 다른 요인들, 즉 사회적이며, 비극적 생활상황, 권력에 대한 욕구 등이 있음을 그의 임상적인 경험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프로이트가 유년 시절에 억압된 성적 욕구에 중점을 두고 꿈을 이해하는 방법을 환원론적 인과론적 해석이라고 보았으나 융은 이에서 만족하지 않는다. 융은 무의식의 분출은 꿈 꾼 이의 의식이 무시했거나 소홀하게 여겼던 것을 보여줌으로써 꿈 꾼이의 정신상황이나 삶을 보상 내지 보완함으로써 균형을 취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이것은 프로이트처럼 꿈은 꿈꾼이의 과거만이 관련된 것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까지 아울러 포함하고 있으며, 유년기나 청년기만이 아니라 중년기와 노년기까지 포함하여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을 융은 주장하였다. 프로이트의 꿈 해석 방법이 꿈의 원인을 분석하는 과거 지향적이며 환원론적(reductive)이라면 융의 방법은 꿈이 지향하는 목표를 찾아내는 미래지향적이며(prospective)이며 목적론적(purpositive) 해석이라 할 수 있다.
집단적 무의식의 관념에서 융이 발전시킨 것은 원형(archetypes)의 개념이다. 이 원형은 정신 속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 있는 “일정한 형식들(forms)"이며 ”선재하는 틀들“이다. 이 원형은 또한 본능과도 비슷하여 ”본능적인 행동의 기본틀을 표현“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융이 이름 붙인 원형은 일찍이 신화학에서는 주제(motive), 원시인 심리학에서는 ‘집단표상(representations collectives)', 그리고 비교종교학에서는 ’상상의 범주들‘에 해당되는 것이다. 원형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마고 데이(Imago Dei), 즉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해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원형 이해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특성은 원형은 이미지 즉, 상(像)이며 동시에 정동(情動, emotion)이라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할 때에 원형에 관하여 제대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이미지만 있을 때, 그것은 단어상(單語像)일뿐 어떤 효과를 나타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원형의 정동적인 측면이 기능을 발휘하게 되면, 이 때의 이미지는 신성력(神聖力) 또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얻으면서 강력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원형은 고대로부터 존재해온 보편적이며 원초적인 상(像)이요 틀이지만 그 내용은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할 때, 바로 그러한 기본적인 틀이요 형식인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모두나 동일한 사람은 아닌 것이다. 융은 원형의 다른 표현을 신화나 민담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동일한 형식을 가진 비슷한 내용의 신화와 민담을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신화나 민담은 오랜 시간에 걸쳐 그 민족의 상황에 따라 약간의 변형을 거쳐 굳어진 형태를 지니고 있다. 개인이 원형을 경험할 수 있는 수단은 바로 꿈이다. 원형은 꿈을 통하여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에게 전달하며, 그러한 내용은 그때 그때의 개인의 의식에 맞추어 변하는 것이다.
우리는 꿈을 통하여 무의식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를 받으며 이러한 메시지를 해석함으로 우리의 의식이 소홀하게 여겼던 중요한 면을 깨닫게 된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편향되고 혹은 병든 우리의 정신적이며 실제적인 삶을 벗어나 전체적이며 균형된 삶을 회복할 수 있는 정신적인 에너지를 받게 된다. 이렇게 하여 마침내 인간이 본래적인 자기(self)를 회복하는 것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라고 말한다. 그러면 융이 제시하는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들에 대하여 살펴보자.
C. 무의식의 원형들(archetypes)
무의식은 일반적으로 의식의 저편에 밀폐되어 있는 개인의 내밀한 세계에 속한다. 융은 이 무의식을 성서에서 말하는 마음(Herz)으로 보고 있다. 마음의 구조를 둘러싼 전체의 모습은 분석심리학에 따르면 의식활동의 주체인 자아(ego)와 이 자아가 외부 세계와 접촉하는 외적 인격인 페르조나(persona), 그리고 콤플렉스가 있다. 그 다음, 개인적 무의식, 집단적 무의식 및 그 원형들이 있고, 마침내 마음의 중심에는 개인의 전체성을 상징하는 자기( 自己, self)가 있다. 본 연구에서는 무의식의 원형들 가운데 그림자, 아니마, 그리고 아니무스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무의식의 원형 가운데서 개인이 가장 먼저 접촉하는 것을 융은 그림자(shadow)라고 부른다. 그림자는 개인이 진정한 자기를 만나러 가는 첫 번째 길목에서 만나는 또 하나의 자신의 모습이다. 이것은 개인이 그 동안 페르조나라는 가면 뒤에 억압되어 있었거나 숨겨져 있었던 제 2의 자아(alter ego)이다. 이것은 인간의 온갖 결점, 노여움, 병적인 것, 유치한 면, 관능적인 면, 반항심, 열등감 같은 것으로서 인간이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고 직면하기 싫어하는 자신의 모든 것을 총칭한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스티븐스(R. L. Stevenson)의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에서 주인공의 페르조나가 지킬 박사라면 그림자는 하이드 씨이다.
누구라도 인정하기 싫어하는 또 하나의 자아인 그림자와의 갈등은 꿈속에서 나타날 때 일종의 악몽과도 같은 꿈이 되며, 이를 적절하게 해결하지 못할 때 신경증적인 병적인 현상을 수반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기 모습을 회복하고 치유를 경험하려면 그림자와의 대면을 피하지 말아야 한다. 융의 꿈에서 그림자와의 만남과 그 중요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이것은 내면으로 향하는 길에서의 첫 번째 담력시험이다. 많은 사람들을 겁먹게 하기에 충분한 시험이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과의 만남이란 불쾌한 일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부정적인 것을 환경에 투사하는 동안은 그것을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그것을 아 는 데서 오는 고통을 참고 견뎌낼 수 있다면 비로소 과제의 작은 부분은 해결된다. 우리는 최소 한 개인적인 무의식을 지양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인격의 살아있는 부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어떠 한 형태로는 함께 살아가려고 한다. 이 문제는 극도로 어렵다. 그 이유는 이것이 인간 전체를 불 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절망감과 무능력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자신의 약점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그런 사람은 누가 보아도 분명히 잘못을 저질렀는데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변명하고,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 그 허물을 전가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꿈은 때때로 우리 자신도 바로 그러한 사람임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가 잘못을 시인할 때 비로소 겸손하며 발전 가능성을 지니게 되는 것처럼 그림자를 시인하게 될 때에 우리는 오히려 더욱 성숙하고 온전한 삶의 의미가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융이 말하는 개성화이다. 존 샌포드는 우리가 그림자를 체험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있는 들보”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일종의 종교적인 체험이요, 하나님을 직면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샌포드는 그림자의 어두운 면에도 불구하고 이상한 특성은 그림자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그림자와 씨름하는 것은 마치 야곱이 얍복강 가에서 천사(하나님)와 씨름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자와의 대면은 우리가 개성화의 과정에서 온전한 자기를 실현하는 필수적인 일일뿐만 아니라 동시에 영적인 성화의 길에도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제인 것을 볼 수 있다.
무의식의 원형에서 그림자 못지 않게 자주 등장하는 상(像)을 융은 아니마(anima)와 아니무스(animus)라고 부른다. 생리적으로 남성이 여성 호르몬을, 여성이 남성 호르몬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아니마는 남성 안에 있는 여성이며, 아니무스는 여성 안에 있는 남성이다. 아니마는 독일어 Seele, 그리고 아니무스는 독일어 Geist에 해당되는 것이지만 융은 이러한 학술적이며 일반적인 용어보다는 무의식의 특수한 심리적 사실을 표현하는 데는 보다 신화적인 표현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아니마, 아니무스를 선호한 것이다. 비록 이러한 신화적인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만 융은 이 아니마와 아니무스 개념이 이론적인 발명이나 현실감이 없는 신화라는 편견에 대해 강하게 부정하고 있다. 융은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순수한 경험적 개념”임을 강조하고 있다. 즉, 이 둘은 추상적이며 형이상학적인 이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심리적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개인적인 무의식에 속한 것, 본능적인 것, 사회적인 것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초개인적이며, 집단적인 세계적인 현상 속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역사적으로는 남녀 신의 짝에서, 중국 철학의 우주론적 진화의 개념에서는 남성적인 양(陽)과 여성적인 음(陰)의 짝으로 나타난다. 가정에서는 자녀가 부모의 상(像)을 투사하는 데서도 아니마와 아니무스적인 흔적을 어렴풋이 찾아 볼 수 있다. 융의 이 개념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주의할 것은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역사 속에서 드러나고, 사회적이며 문화적인 통념으로 굳어진 집단적인 여성상과 집단적인 남성과는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그는 남자답다” 혹은 “그녀는 여자답다” 할 때, 그것은 심리적인 원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역사적인 시대와 집단 사회의 사고(collective thinking)에 따라 규정되는 것이고 강조점이 바뀌는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하여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시대와 집단 사회를 초월한 전 세계적인 현상이며, 인류공통의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무의식의 내적인 혼이요 정신인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tm의 원형들은 중년기에서부터 본격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것은 여성심리와 남성심리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꿈에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인격적인 존재를 가진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나타난다. 예를 들면, 여성적인 아니마는 때에 따라 어머니, 아내, 애인, 약혼녀, 직장의 여자 동료, 여비서, 여사장, 유혹적인 여인, 요정, 여자 천사, 여왕, 공주, 여신(女神), 선녀, 여성 무당, 정신적인 안내자, 여자 어린 아이 , 성녀 등으로 나타난다. 또한 남성적인 아니무스는 아버지, 남편, 애인, 약혼자, 유혹하는 남자, 대왕, 왕자, 직장의 남자 동료, 남자 비서, 직장 상사, 정신적인 안내자, 치료사, 마법사, 마귀, 천사, 남자 아이, 성자 등으로 나타난다.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미지는 문학작품과 민담에도 풍부하게 나타나는데, 단테의 神曲에서 뻬아트리체(Beatrice), 호머의 작품에 나오는 미인 헬렌(Helen)과 요정 사이렌, 심청전에서 심청 등은 아니마로서, 그리고 에밀리 브론테(Emilie Bronte)의 폭풍의 언덕에서 히쓰클리프(Heathcliff), 호머의 작품에서 오디세이와 그 아들 텔레마코스, 미녀와 야수에서 야수 등은 아니무스로 나타난다. 만일 성서에서 이러한 이미지를 가진 인물을 찾아본다면, 미리암, 들릴라, 기생 라합, 마리아, 루디아 등은 아니마 이미지로, 그리고 모세, 삼손, 다윗, 솔로몬 등은 아니무스와 관련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각각 긍정적이며 부정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가령 심청전의 심봉사에게 있어서 심청은 긍정적인 아니마라면, 뺑덕어미는 전형적으로 미숙하고 부정적인 아니마라고 할 수 있다. 샌포드는 우리의 삶 속에서 아니마는 남성 자신의 영감이자 어두운 측면에 대한 느낌인 동시에 남성 자신의 부드러움이자 다른 사람들과 맺고 있는 관계라고 보고 있다. 또한 여성 속의 아니무스는 여성 자신이 옳은 길을 가도록 인도하는 사람처럼 여성 자신의 발전과 성장을 위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꿈에 나타나는 이러한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이미지를 통해서 나 자신의 아니마 혹은 아니무스가 지금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있는지 아니면, 반대로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아니마의 경우, 융은 어떤 남성의 무의식에서 아니마가 너무 강도 높게 배정되어 있으면, 아니마는 그 사람의 남성적인 성격을 여성화하여 예민하고 신경질 부리고 짜증내게 만들며, 다른 사람을 질투하고 게으르고 현실에 잘 적응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보았다. 반대로 중년기 이후 남성에게 있어서 지속적인 아니마 상실은 삶에서 생동성, 융통성, 그리고 인간성에 손상을 입게 한다. 대개 성격의 조기 경직이 일어나고, 석회화, 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상동성(常同性), 광신적인 일방성, 완고함, 원칙주의를 나타내며, 그 반대인 체념, 피로 나태함, 무책임성, 그리고 과음 성향을 동반한 유아적인 연화(軟化) 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이러한 부정적인 아니마를 남성은 자신의 의식의 세계로 끌어내어 조정하고 알맞게 함으로서 아니마가 지닌 긍정적이며 창조적인 에너지를 자신의 성장을 위하여 바르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부정적인 아니무스의 경우도 그러하다. 중년기 이후의 여성에게 있어서 아니무스가 분화되지 않고 강도 높게 무의식을 차지하고 있으면, 이 여성은 아니무스적인 충동에 의하여 남편을 좌지우지하려들고, 자식에게 아니무스를 투사하여 지나친 기대를 하여 가정과 자녀교육을 위험한 지경으로 이끌어갈 수 있다. 이부영은 우리 나라 민담 「해와 달」에서 어머니를 잡아먹은 호랑이가 그녀의 옷을 입고 어머니 목소리를 내면서 아이를 잡아먹는 이야기를 분석하면서 부정적인 아니무스에 사로잡힌 여성의 경우를 잘 묘사하고 있다. 부정적인 아니무스도 의식세계로 끌어올려 분화시키고 조정하여 그 에너지를 바르게 활용하면, 여성의 성숙과 발전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림자, 아니마, 그리고 아니무스의 이미지들은 앞으로 꿈을 해석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나아가서 개성화 과정을 상징하는 여러 가지 원형적인 성질의 상들이 있다. 그것들은 둥근 해나 달 모양, 십자가, 만다라, 사방 혹은 팔각형으로 뻗어나가는 상, 황금꽃, 장미, 사각형의 물체 등이다. 이러한 정신의 전체적인 상을 가리키고 있으며 새로운 인격의 중심 형성을 묘사해주고 있다. 그러면 이러한 원형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오는 꿈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살펴보자.
III. 융의 꿈 원리와 해석
A. 꿈의 원리와 기능
융은 꿈과 환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우리가 꿈을 통하여 무의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이와 반대의 경우도 중시하였다. 즉 무의식은 바로 꿈을 통하여 자신의 정체를 인간에게 나타내는 것이다. 융은 후자를 중시하고 있다. 융은 인간이 결코 꿈을 만들거나 조정한다고 보지 않는다. 반대로 무의식이 꿈을 만들어내고, 이를 통하여 인간에게 나타나는 것으로 본다. 꿈은 인간이 잠자는 동안에 발생하는 특유한 정신 활동의 결과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 정신의 자율성이요, 무의식의 자기 조절기능에 속하는 것이다. 물론 꿈의 내용이 우리의 의식 세계에서 경험하였던 인상, 생각, 분위기, 감정 등에서 기원한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런 의미에서 프로이트의 과거적(backward)이며 원인론적 해석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꿈에는 그 꿈을 꾼 사람의 의식적인 정신생활에 뚜렷한 영향을 주어 현재 상황을 바로 잡으려는 미래 지향적(forward)인 성격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융은 꿈이 “왜 발생하는가?”라고 그 원인을 찾는 일(causa efficiens)이 “무슨 목적으로 발생하는가?”라는 꿈의 목적을 찾는 일(causa finalis) 보다 결과적으로 더 생산적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융은 프로이트의 환원론적인 해석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에서 머물지 않고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였다.
융은 바로 여기서 꿈의 보상적 기능(the compensatory function) 혹은 보상의 원리(the principle of compensation)를 중시한다. 융이 보상이라는 개념을 사용할 때,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에서 혼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먼저, 융은 비록 보상이란 동일한 용어를 사용하지만 프로이트가 해석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꿈의 내용은 억압된 욕망의 성취라고 본다. 그는 무의식에서 억압된 욕망이 분출하여 어떤 외부적인 자극을 일으키고, 따라서 자는 이의 수면을 방해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꿈은 바로 이러한 억압된 욕망을 충족시켜주고 해소시키므로 수면을 보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바로 꿈의 생물학적이며 보상적인 기능이다. 융은 이러한 프로이트식의 꿈의 보상적 기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것은 꿈은 때때로 잠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의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어떤 꿈은 매우 충격적이어서 잠을 깨우게 한다. 꿈 때문에 잠을 깊이 자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다음 보상과 보충(complementation)을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 융은 이 둘은 엄밀하게 구분할 것을 주장하는데 이는 보충의 개념이 너무 협의적이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보충이란 두 사물 사이의 관계에서 다소 기계적으로 상호 보충한다는 의미로서 이것으로는 꿈의 기능을 설명하기에는 미흡하다고 본 것이다. 융이 말하는 보상이란 서로 다른 자료들이나 관점들을 비교하고 균형을 취하게 하여 결국 편향된 것을 수정(adjustment) 혹은 교정(rectification)하는 것을 말한다. 꿈은 우리의 의식적 자아가 무시하고 방치한 자료들이나 삶의 관점들을 보여줌으로써 자아의 오류를 교정하고 삶의 균형을 취하도록 하는 기능을 가기고 있다는 말이겠다.
융은 꿈의 보상적 기능에서 세 가지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우리의 삶의 상황에 대한 자아의 의식적인 태도가 너무 일방적으로 편향되어 있을 때, 꿈은 그 반대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자신이 스스로 매우 높이 평가하고 고결하다고 생각하는 신사는 꿈에 시궁창에서 술 취한 부랑자를 보는 꿈을 꿀 수 있다. 꿈에서 그는 부랑자를 보면서 저토록 타락한 인간이 있을 수가 있는가 하고 멸시하는 오만의 말을 내 뱉는다. 또한 자신이 평소에 매우 똑똑하고 정숙한 숙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꿈에는 타락한 창녀 모습의 여인이 자주 등장할 수 있다. 둘째로, 의식적인 태도가 비교적 중립적인 경우, 꿈은 약간의 변화(variations)를 주는 것으로 만족한다. 마지막으로 만일 의식적인 태도가 올바른(correct) 것이라면 꿈은 이러한 경향을 부합하고 일치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이유로 꿈의 해석에서는 꿈꾸는 자의 의식적인 상황을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도외시하고 꿈 내용만 가지고 해석하는 것은 꿈이 말하는 진정한 의미를 놓치게 만드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꿈의 보상적 기능의 한 실례로 구약성서 다니엘서 4장에 나오는 느부갓네살 왕이 꾼 거대한 나무에 관한 꿈(단 4:10-17)을 들고 있다. 융은 이 꿈의 의미는 분명히 느부갓네살 왕의 과대망상증을 치유하고 보상하려는 시도라고 보고 있다. 만일 왕이 자신의 의식상의 잘못을 교정하였더라면 정신병자가 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왕은 꿈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융은 꿈은 예시적 기능(豫示的, prospective function)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러한 예시적 기능을 보상적 기능과 구분한다. 보상적 기능은 과거에 억압되었거나 너무 약하여 의식이 포착하지 못한 일들에 대하여 정신의 자기 조정작용(a self-regulation)에 따라 수정하고 교정하려는 목적적인(purposive) 것이다. 그러나 예시적인 기능이란 미래와 관련된 것이다. 그것은 미래의 의식적인 성취에 대하여 무의식 안에서 예견하는 것(anticipation)으로서, 일종의 예비적인 연습이나 스케취요, 혹은 미리 대충적으로 기획해보는 기능을 말한다. 융은 이러한 예시적 기능을 예언적인 것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병에 대한 의학적 진단이나 일기예보와는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예시적인 꿈들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러한 꿈들은 실제로 일어날 사건과 일치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을 예견하는 것이며, 반드시 구체적인 세목까지 일치할 필요는 없는 것들이다. 만일 그 꿈이 구체적인 세목까지 일치한다면 그 때는 그 꿈을 “예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융은 꿈에 대한 과거의 문헌과 자신의 동료의 사건에서 꿈의 예시적인 기능을 발견한다. 특히 우리가 분명히 의미 있는 꿈인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설명할 만한 과거의 일이나 전후관계를 알 수 없는 경우에 예시적 꿈일 가능성에 유의하라고 한다. 이러한 예시적인 꿈은 삶의 한 신비를 드러내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한 무의식의 정보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예견할 수 있는 것 보다 더 우수하고 정확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어떤 이들은 꿈의 이러한 기능에 집착할 수도 있다. 비록 예시적 기능이 꿈의 본질적인 특성이기도 하지만 융은 너무 우리가 이 예시적 기능을 과대평가하는 일이 없도록 주의를 촉구한다. 꿈의 초월적이며 우수한 지식이 우리를 절대 오류가 없는 미래의 바른 길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는 잘못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융은 꿈의 심리학적 의미를 과소평가하는 것 못지 않게 꿈 분석에 집착하여 실제 생활에 대한 무의식의 의미를 과대평가하는 것도 위험하다고 보고 있다. 무의식 못지 않게 우리의 의식도 중요한 것이다. 꿈을 꾼 우리는 미래에 대하여 운명론적으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의식을 재정비하고, 꿈이 주는 무의식의 정보를 참조하여 미래를 대비하고 의식과 종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시적”이란 말은 “건설, 준비, 종합(construction, preparation, synthesis)"이란 말과 연관지을 수 있는 것이다. 융이 말하는 꿈의 보상적 기능과 예시적 기능 속에는 경고적인 성격을 가진 것이 있다. 느부갓네살의 꿈은 일종의 경고이기도 하다. 또한 전후 관계를 알기 어려운 예시적인 꿈에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경고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태도에 따라 일어날 수도 있고,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일어날 확률이 높은 것을 보여주는 경고적인 꿈일 수 있다.
꿈은 환원적, 보상적, 예시적 기능으로만 그 해석의 가능성을 다 설명할 수 없다. 융은 이러한 꿈의 기능에 추가하여 몇 가지를 더 소개하고 있다. 먼저, 외상적인(trauma) 꿈이다. 이것은 과거에 일어난 객관적인 사건이나 심한 충격으로 인하여 심리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체적으로 손상을 끼쳐 신경조직이 상처를 입어 발생하는 꿈이다. 전쟁, 화재, 자동차 사고, 기타 우리의 삶에 충격을 준 사건들이 꿈속에서 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꿈은 계속 되풀이하여 반복되면서 마침내 그 자율성을 잃어버리면서 꿈에서 사라지게 된다. 그 다음은 텔레파시 (telepathy)에 기인하여 일어나는 꿈이다. 융은 이 텔레파시 현상은 고대로부터 있었던 일이고, 자신도 경험한 일이며,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그 이론을 밝힌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라고 보고 있다. 오늘날 대학교에서나 정부 차원에서도 이에 대한 연구는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꿈의 텔레파시 현상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발생하는 사건 혹은 일이 어떤 사람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어 꿈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특히 가까운 가족 사이나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현상은 반드시 꿈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소위 반의식 혹은 잠재의식 상태에서도 일어난다. 심지어 강할 때에는 의식 상태에 있을 때에도 나타난다.
텔레파시의 원인에 대하여 융은 연상일치작용 (concordance of associations), 평행적인 정신과정(parallel psychic processes), 잠복기억(cryptomnesia)-과거에 경험했던 사실을 기억하면서 전혀 미경험의 사실로 느끼는 것-등을 비롯한 몇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지만 신중을 기하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러한 현상을 우연이라고 말하며 무시하려는 경향이 있다. 융은 만일 우연이라고 한다고 치더라도 이러한 우연이 반복되어 나타날 때에는 더 이상 그러한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고 주장한다. 또한 융은 자신이 꿈의 텔레파시 현상을 말한다고 하여 그 뒤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법칙 같은 것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면서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우리의 현재 지식으로 파악할 수 없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한다. 꿈의 텔레파시 현상은 융이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 원리를 배경에 두고 전개하는 그의 동시성 현상에 대한 연구와 연결된다. 동시성 현상은 현재 인간지식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일종의 한계를 드러내주는 현상이기는 하나 오늘날 양자물리학, 특히 양자전기역학(quantum electrodynamics)의 도움을 빌어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있다.
B. 꿈의 구조와 해석과정
꿈도 일종의 드라마와 같이 분명한 구조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어떤 작가가 드라마를 쓰려고 할 때 하나의 구성(plot)을 가지고 쓰는 것과 비슷하다. 융은 꿈은 네 가지 국면으로 나누어 단계적으로 전개된다고 설명한다. 첫째 국면은 일종의 해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먼저 장소에 대한 진술이 나온다. 예를 들면, “나는 호텔처럼 생긴 건물 안에 있었다”라든가 혹은 “나는 전차들이 이동하는 전쟁터에 있었다”는 식이다. 그 다음에는 등장 인물들이 나온다. “나는 어떤 친구 00와 함께 길을 걷고 있었다”라든가 장소와 인물이 복합적으로 전개되어 “부모님과 함께 길을 걷다가 모퉁이에서 00를 만났다” 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시간에 대한 진술은 드물게 나타난다.
꿈의 둘째 국면은 꿈 구성의 전개(the development of the plot)이다. “나는 어떤 거리에 서 있었다.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달려오는데, 매우 불안정하게 달려오고 있었다. 나는 운전사가 술에 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단계에서는 사건의 전개가 복잡하게 얽히고 사태가 어떤 식으로 발전할지 예상하기 어려운 어떤 분명한 긴장이 나타난다. 세 번째 국면은 꿈의 절정(culmination)이라 할 수 있는 일이 일어난다. 여기서는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나타나던가 사태와 완전히 달라지는 일이 생긴다. “나는 차안에 있었는데, 나는 마치 만취한 운전기사처럼 생각되었다. 아무리 핸들을 잡아도 차가 제대로 가지 않으며 마치 핸들이 없는 것 같이 생각되었다. 나는 더 이상 차를 조정할 수 없어 마침내 벽 혹은 낭떠러지를 향하여 돌진할 수밖에 없었다.” 혹은 “갑자기 그 사람의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넘어지면서 강아지로 변하고 말았다.” 이 장면은 마치 영화나 연극의 클라이맥스나 반전과도 비슷하다고 하겠다.
꿈의 네 번째이자 마지막 국면은 종결 혹은 결과이다. 융은 이 네 번째 장면은 어떤 꿈에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러한 꿈은 어떤 특별한 문제를 제시하고 있다고 보았다. “나는 부서진 자동차를 보았는데, 전혀 내가 알지 못하는 차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내가 전혀 다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으나 이 차가 사고난 데 대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이 네 번째 장면에서는 꿈을 꾼 이의 감정이 나타난다. 그러한 감정은 기쁨, 환희, 슬픔, 분노, 안도, 안타까움, 미안함, 죄스러움, 죄책감, 의무감 등이다. 이러한 감정의 진폭이 클 때는 꿈을 꾸면서 실제로 크게 웃거나 눈물을 흘리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감정을 통해서 이 꿈이 그 사람에게 어떻게 작용하고 메시지를 주려는지 해석할 수 있게 된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네 번째 국면이 나타나지 않는 꿈은 해결해야할 중요한 문제가 있는데 꿈을 꾸는 이가 특별히 유의해야 함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경우는 꿈 작업을 통하여 그 꿈속에 다시 들어 가든가, 그 다음에 일어나는 꿈들에 주목함으로써 그 꿈의 메시지를 파악하고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꿈 작업은 융이 제안한 적극적 명상법(active imagination)과 확충법(amplification), 그리고 융의 방법을 활용한 세이버리의 꿈 자아 따라가기, 상징몰입법, 상징연상법, 상징확장법 상상으로 꿈속에 다시 들어가기 등을 사용하면 가능하다. 그러면 융의 꿈 해석을 살펴보자.
융은 꿈 해석이나 상징 해석에 있어서 무엇보다도 꿈을 꾼 당사자의 의식, 현재 상황, 철학, 문제들, 그 사람 자신의 해석을 중시하였다. 그는 프로이트식의 꿈 전문가들처럼 자기들의 이론적인 틀에 꿈을 억지로 맞추어 해석하려는 태도를 피하려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전반적인 꿈 작업은 본질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라고 보았다. 꿈은 일종의 극장이며, 이 극장에서 꿈꾸는 이는 자기 자신이 장면이며, 배우, 프롬프터, 연출가, 작가, 관중, 그리고 비평가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융은 꿈을 해석함에 있어서 크게 두 개의 수준으로 나누어 해석한다.
첫째는 주관적인 수준의 해석이다. 이 주관적인 수준의 해석은 꿈에 나타나는 모든 것들은 꿈을 꾸는 자신의 인격을 보여주는 일종의 인격화된 상들이라는 것이다. 가령, 꿈에 나타나는 집은 자기 인격의 내면적인 모습일 수 있고, 친구가 나타난다면, 그 친구의 특성을 띠고 나타나는 자신의 인격의 일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융은 이러한 주관적인 해석에 대한 저항을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주관적 수준의 해석을 통하여 꿈을 꾸는 이는 자신이 모르고 있었던 정신적인 성향들, 무의식적인 감정, 태도, 생각 등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무의식의 성향들을 의식으로 끌어올려 조정하고 균형을 취함으로 자신의 정신적 성숙을 꾀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둘째로는 객관적인 수준의 해석이다. 이 수준의 해석은 꿈에 나타난 이미지를 자신이 관계하고 있는 가족, 사회, 공동체, 그리고 사물 등과 직접적으로 연관지어 해석하는 것이다. 꿈에 나타난 가족이나 친구의 이미지를 실제 가족의 일원이나 친구와 연결시켜서 볼 때, 비로소 그 동안 자신이 의식하지 못했던 그들에 대한 자신의 무의식의 감정과 태도 등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견을 통해서 그 동안 그들과 맺었던 관계에서 수정해야할 것, 발전시켜야 할 것들을 찾아 자신의 객관적인 삶의 변화를 꾀하게 되는 것이다.
융은 주관적인 수준과 객관적인 수준의 해석은 필연적으로 이 두 해석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을 낳게 된다고 보고 그 대답은 결코 쉽지 않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꿈에 나타난 객관적인 이미지는 그 사람의 꿈에서 한편에서는 주관적으로 구성되어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객관적으로 조건 지워져 있기 때문이다. 만일 구체적인 사례에서 어느 편이 더 지배적인지를 결정하려면 그 이미지가 주관적인 중요성을 띠는지 아니면 객관적인 중요성을 띠는지 먼저 볼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융은 만일 꿈에 나타난 사람이나 사물이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인물이요 사물이라면 객관적인 해석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이 좋고, 반대로 잘 모르는 인물이나 사물이 등장할 때에는 주관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보고 있다. 전자의 경우 융은 자신의 꿈 사례를 들어 자세히 분석하고 있다.
이러한 꿈 해석에 있어서도 앞에서 말한 것처럼 꿈을 꾼 이의 현재 상황, 의식적인 태도, 느낌 생각 등을 중시할 때 더욱 바른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전혀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꿈 내용만 듣고서 섣불리 해석을 시도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해석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는 꿈속에서 많은 인물들을 만나기에 주관적이며 객관적인 해석 사이에서 여러 가지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꿈에는 인간이 아닌 여러 형상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동물, 무생물, 자연적인 사건 등 여러 형상들이다. 이러한 꿈의 해석에는 무의식의 원형에 대한 이해와 상징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필요로 한다. 존 샌포드는 융의 꿈 해석 이론에 근거하여 인간이 아닌 꿈 상징들을 해석하는 법칙 및 주의사항을 다섯 가지로 소개한다. 그것은 첫째, 꿈꾸는 사람의 의식 상태를 잘 파악하는 일, 둘째, 한 가지 꿈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의 꿈을 연구할 것, 셋째 꿈과 관련한 연상(聯想), 넷째 많은 꿈을 꾸어보면서 해석기술을 터득하는 일, 마지막으로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바탕에서 나오는 꿈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갖추는 일 등이다. 세이버리가 제시하는 여러 가지 방법들도 이러한 꿈 해석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융의 꿈 해석은 결코 닫힌 해석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꿈 해석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전진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꿈이라고 하는 이 복합적인 현상에 대하여 어떤 일반적으로 만족할 만한 이론이나 설명을 내어놓았다고 자랑하지 않는다. 그는 한 가지 이론에 만족하지 말 것이며, 모든 이론에 의심을 가지고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진실에 가까워진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융의 꿈 해석을 열린 해석이며 모든 해석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해석에서 긍정적인 점은 기독교 성서에 나타난 꿈과 환상에 대하여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도구들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비록 그의 방법이 자연과학적인 방법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에 매우 근접하며 설득력 있는 설명을 할 수 있게 됨으로써 꿈에 대해 관심을 가진 신학자들을 크게 고무시켰다고 하는 점이다. 융은 어디까지나 심리학자로서 인간의 정신세계를 뛰어넘어 초월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다루지는 않았다. 그것은 신학자들의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무의식과 신(神)의 경계를 드나들며 때로는 모호하거나 위험한 면을 보이기는 하지만 분석심리학과 신학 사이에 활발한 접촉점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실천 신학적인 면에서 융을 깊이 연구하고 목회에 활용하여 크게 도움을 받은 샌포드는 대담하게도 “인간의 꿈은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있는 셈이다”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러면 꿈의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는 일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IV. 꿈 해석의 목회적 적용
지난 반세기 동안 수면과 꿈에 대하여 연구하는 과학적인 꿈 연구소들이 수 십 개 이상 문을 열고 본격적인 연구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그 결과 꿈과 수면에 관한 여러 가지 흥미 있고 놀라운 사실들이 밝혀지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잠을 자는 동안에 꿈을 꾼다는 사실은 1952년 시카고 대학교 심리학과 대학원생 유진 아제린스키(Eugene Asesinsky)가 우연히 급속안구운동(REM: rapid eye movement)을 발견함으로써 밝혀졌다. REM이란 깊은 수면 상태에서 꿈을 꿀 때 마치 생시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움직이는 안구운동을 말한다. REM주기는 하루 밤새 보통 4-6회에 걸쳐 나타난다는 것도 밝혀졌다. 필자는 가끔 한번도 꿈을 꾸지 않는다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이러한 사람도 사실은 꿈을 꾸지만 다만 깨어나서 그 꿈을 기억하지 못하기에 마치 꿈을 꾸지 않았던 것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중요한 실험은 뉴욕에 있는 마운트 시나이(Mount Sinai) 병원의 윌리암 디멘트(William Diment) 박사가 행한 것이다. 그가 행한 실험 중에는 REM 주기에 들어갈 때마다 사람을 깨워 꿈을 꾸지 못하게 한 것이 있다. 5일 동안의 실험에서 피실험자들은 사흘째 밤과 닷새째 밤에 신경쇠약증세를 나타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리하여 디멘트 박사가 1960년 미국 정신의학협회에서 발표한 결론은 “만일 어떤 사람이 오랫동안 꿈을 꾸지 못한다면 일종의 정신적인 붕괴가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사실들을 종합해보면 우리는 모두 꿈을 꾸며 이것은 우리의 육체적이며 정신적인 생활의 중요한 부분과 관련되어있다는 것이다.
꿈 해석을 목회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꿈의 중요성을 받아들이는 수용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너무 꿈에 치우쳐서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않는 순응적 자세도 문제지만 꿈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계속적으로 꿈의 메시지를 무시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꿈에 대한 포괄적이면서도 깊이 있는 연구를 통해 무의식의 꿈을 통하여 우리에게 다가오는 꿈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꿈의 메시지와 영적인 에너지를 우리의 의식 속으로 적절하게 통합하고 적용(appropriation)하는 수용적이며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이렇게 될 때 머지 않아 꿈은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가고, 그 분이 우리에게 다가오는 영성 생활에 있어서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중요한 통로인 것을 깨닫고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성서에 나타난 인물들이 보여주었던 풍부한 사례를 통해서나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 특별히 교부들의 사상과 삶에서 충분히 볼 수 있다. 초대교회 이후 4세기말에서 5세기에 접어들면서 꿈을 중시하는 전통은 맥이 끊어지게 되었고 꿈은 기독교 역사의 뒷면에서 억압되거나 사라지고 말았다. 비록 20세기에 들어서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재발견함으로써 꿈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지만 말이다.
특별히, 융의 분석심리학은 신학자와 목회자들에게 꿈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목회에 적용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았다. 융은 생전에 70여명이나 되는 신학자들과 편지를 교환하였는데, 그 중에는 개신교, 가톨릭, 그리고 정교회 신학자들도 있었다. 신학자들은 오랫동안 융과 그의 분석심리학에 대하여 신중한 태도를 취하였으며, 융의 분석심리학을 본격적으로 목회에 적용한 이들은 드물었다. 융 심리학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이를 과감하게 목회 적용의 길로 열어 놓은 이들이 존 샌포드, 머톤 켈시, 그리고 빅터 화이트(Victor White) 등이다. 한국에서는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이기춘 교수와 그의 두 제자인 동 대학교 안석모 교수와 협성대학교 김성민 교수, 그리고 꿈에 관한 두 개의 번역서를 낸 한신대학교의 정태기 교수가 목회상담 분야에서 융 심리학의 실제적인 목회적용의 길을 열어놓기 시작했다. 필자는 지난 1984년 이후 꿈을 영성지도 및 영성수련의 관련 아래에서 강의하고 워크숍을 해왔다.
필자는 그 동안의 연구와 경험을 통하여 무언가 창조적이고 풍성한 사역을 희망하는 꿈꾸는 목회자들이 아래의 몇 가지 방면에서 꿈을 활용한다면 매우 바람직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다고 전망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꿈을 목회사역에 적절하게 활용한다고 할 때 어떤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호렙산으로 도망간 엘리야처럼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탈진한 목회자는 꿈을 통하여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극복해나갈 수 있는 새로운 통찰력과 활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를 위한 목회에서 목회전반의 방향설정, 설교, 예배, 성서연구, 목회상담, 그리고 영성지도 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비전과 영적인 에너지를 지닐 수 있게 될 것이다. 본 연구에선 이러한 분야에서 꿈을 활용하는 일을 사례와 함께 다루어 보고자 한다.
A. 목회의 방향설정
여기서 목회방향 설정이라 함은 크게 말해서 목회방향이지만 예배, 교회행정, 선교, 사회봉사 등을 포함하여 목회에서 당면하는 크고 작은 문제에 직면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조절하며, 어떻게 결단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이 범주에 포함된다. 또한 크게는 목회전반의 방향 수정 혹은 재 설정을 포함하며, 개인적으로는 목회자 자신의 목회관, 목회와 관련된 개인적인 문제도 포함한다. 신학대학교를 졸업한 후 십 여 년 전념하다가 보면 때때로 목회자 자신이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스스로 질문을 던질 때가 온다. “내가 하는 목회가 참으로 제대로 된 방향으로 가는 것인가?” “내가 오늘 이렇게 목회하자고 신학교를 다녔고, 성직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한국교회는 지난 세기에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해왔고 그 과정에 대하여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특별히 성장의 둔화상태에 접어든 지난 90년대 중반 이후 한국교회에 대한 거센 비판의 목소리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특별히 교회의 양적인 성장이 중요하냐 아니면 질적인 내실을 기하는 것이 더 중요하냐 하는 이분법적인 사고는 적지 않은 목회자들을 희생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양적 성장 일변도로 나가는 목회자이든, 혹은 질적인 일변도로 나가는 목회자이든 칼 융의 용어로 표현하자면 그림자(shadow)에 삼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목회자는 자기의 꿈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자신의 의식적인 삶 속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고 소홀히 하였던 점이 있다면 꿈을 통하여 무의식이 보여주고 말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어떤 상징이 나타나고, 무슨 세미한 소리가 들리는지, 나아가서 거기서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지 성찰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가 방향을 잘못 잡음으로 거기에 속한 양떼들이 얼마나 방황할지를 생각하면 이는 매우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자를 치면 양떼는 흩어지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예를 들어보겠다. 이 연구의 주제를 정해놓고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을 때였다. 사실 칼 융을 다룬다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작품의 방대함 때문만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가해진 신학적인 비판이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신학적인 입장에 따라서는 그가 정통 기독교와 때로는 성서의 한계를 벗어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가 다룬 영지주의, 연금술, 주역(周易) 등에 대한 입장도 문제 가운데 포함된다. 이것을 감안하고서라도 융의 꿈 해석을 목회에 적응하려고 할 때 필자는 다소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 아래와 같은 꿈을 꾸게 되었다.
나는 길거리에 있는 한 옷가게 겸 양복점에 들어간다. 거기엔 내게 평소에 옷을 재단해주는 30 대 초반으로 비교적 젊고 건강하게 생긴 여주인이 반갑게 나를 맞아 준다. 나는 이 가게에서 바지를 하나 맞출까 아니면 살까 하고 잠깐 망설이다가 그냥 그 가게를 나왔다. 그 때 내가 가는 길 앞쪽에 서 있는 한 청년을 만난다. 그는 자신을 재단사라고 소개하면서 나의 바지를 무료로 재단해주겠다고 한다. 나는 고맙기는 하나 내겐 단골 옷가게가 있다고 했다. 그러자 청년은 자신이 그 가게 주인에게 가서 직접 양해를 구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우리 두 사람은 나의 단골 옷가게로 여주인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여주인은 젊은 재단사를 보더니 크게 놀라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 분은 여기서 최고의 재단사입니다. 이분은 우리 아버님의 스승이며 우리 재단학원 제 1회 졸업생입니다. 이 분이 선생님의 옷을 재단한다면 그건 최고이며 가장 큰 영광입니다.” 이 말을 듣고 다시 그 청년을 보면서 나는 매우 놀라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상하다. 이 사람이 이 가게 주인의 부친의 스승이라면 적어도 노인층 연령에 속할 터인데 어떻게 전혀 늙지 않고 청년으로 남아 있었을까? 하고 생각하였다. 그 청년은 옷의 재단은 자신이 하지만 바지를 만드는 작업은 이 가게 여주인에게 맡기겠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면 옷을 언제 찾으러 올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 “내일은 토요일이니까 너무 시간이 촉박할 터이고 모레는 주일이니까 주일을 지켜야 되니 안되고, 그러면 글피가 좋겠다.” 그리고 주인에게 글피, 그러니까 삼일 후에 옷을 찾으러 오겠다고 했더니 여주인은 매우 좋다고 대답했다.
나의 꿈은 여기서 그쳤다. 필자는 이 꿈을 적어 놓고 며칠동안 숙고해 보았다. 이 꿈에 나타난 상징이며 여러 가지 대화들을 살펴보면서 해석을 시도해 보았다. 며칠 뒤 필자는 이 꿈이 지금 쓰려고 하는 논문의 연구방향과 관계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여기에 나이를 초월한 젊은 청년의 모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나의 꿈에서 점차 신비한 인물로 드러나고 있었으며, 친절하게 나를 위해 새로운 디자인을 해주겠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 인물은 나에게 일종의 영혼의 안내자(psychopomp) 역할을 하고 있었다. 젊은 재단사가 나의 기존 재단사인 가게 여주인과 협동하고 있다는 점도 중요하였다. 또한 내가 새로운 옷은 내일도 모레도 아닌 3일 후에 찾으러 오겠다는 데서 어떤 의미가 있다고 보았다. 나의 해석은 이 과제는 내일, 즉 급하게 해서도 안돼는 그 무엇이다. 또한 모레인 주일도 피해야 하는 것이다. 나의 융의 꿈 연구와 해석이 나의 기존의 기독교 신앙이나 신학적 사고와 충돌하지 않는 길인 것을 시사하고 있었다. 제 3일에서 필자는 3이라는 숫자가 함축하는 기독교적인 의미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필자는 이 꿈을 꾼 후에 연구의 방향을 보다 더 분명하게 잡을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그 동안 목회의 방향에 대하여 고민하는 목회자들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자주 있었다. 교회 임지의 선택, 목회철학의 문제, 행정적인 문제, 구체적으로는 교회건축, 열린 예배와 관련된 문제 등이다. 모두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들이 갈등의 와중에서 해답을 찾지 못할 때, 꿈을 꾸고 나서 결정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일이 한 두 번이 아니다. 20년이 넘은 일인데 한번은 강화에서 농촌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N 전도사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교회임지를 놓고 고뇌하다가 하루는 꿈에 장례식 장면을 보았다고 했다. 그 장례식 꿈을 자기의 강화도에서 목회는 끝났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는 결단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개척교회를 시작하였다. 지금 그는 인천 지방에서 중견 목회자로 열심히 목회하고 있다.
또 하나의 이야기는 이 연구의 서두에서 나온 상황과 비슷하다. 1984년 무렵 필자의 대학원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이다. 역시 기독교 계통의 K여학교 교목으로 있었던 Y목사의 이야기였다. 그는 어느 날 꿈을 꾸었는데 서울 한강변이 보이고 수많은 물고기 떼가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이것이 매우 신기하기도 하여 어떤 사석에서 이야기했는데 마침 그곳에 K목사가 있었다고 했다. K목사는 현재에 위치한 교회를 팔고, 당시 개발붐이 일어나던 강남으로 이전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K 목사는 Y목사에게 그 꿈을 자기에게 팔라고 했다는 것이다. 결국 K목사와 그 교회는 한강변에 위치한 장소로 이전하여 계속적인 발전을 거듭했다는 것이다. 현재 Y, K 목사는 다 생존하여 살아 계시기에 익명으로 표기했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는 있을 것이다. 현재로서 이 이야기는 Y목사의 진실성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이런 이야기는 교회의 야사(野史)에나 나옴직한 것들이다.
필자는 이 두 이야기에서 N목사나 K목사의 맹목성이나 어떤 허물을 지적하려는 의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이들이 꿈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넓게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가지고 있다. 필자가 이 이야기들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사람들이 꿈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평가하든지 꿈이 목회자들에게 무엇인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때로는 맹목적이다 싶을 정도로 보일 때도 있지만 꿈이 목회자의 목회 방향에 어떤 식으로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 현상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사실, 위에서 Y목사의 꿈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볼 때 매우 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의 꿈에서 강물, 물고기는 개인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한 상징인 것이다. 당시 Y목사는 나이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늦게 신학대학원에 와서 어린 후배들과 나란히 앉아 공부하게 된 것도 무의식적이나마 그의 꿈이 어떤 역할을 했다는 것을 배제할 수 없다.
목회자가 자신의 꿈을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차원에서 해석한다면 개인적인 문제해결과 성숙을 위해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된다. 또한 목회자 자신이 관여하고 있는 집단과의 관계에서 공동체적이며 객관적 수준에서 그 꿈을 해석하게 된다면 자신의 지역교회, 공동체들, 그리고 전체 기독교회, 민족, 그리고 인류를 위한 중요한 의미를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목회자의 생애에서 한 두 번 정도 일어날까 말까 한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의미의 중대성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구약성서의 예언자들과 신약성서의 사도들은 물론 교회사의 수많은 인물들의 생애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욥바 피장의 집에서 기도하는 중에 본 환상은 초대 기독교회가 이방선교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으며,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이 본 마게도니야인의 환상은 아시아냐 유럽이냐 하는 문제에서 유럽선교 방향으로 결정된 것과 직결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B. 설교
구약시대의 설교를 보면 그것은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설교가 아니었다. 그 당시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는 압도적으로 예언이라는 형태를 띠었다. 예언자들의 예언이 곧 당시의 설교였다. 그들은 꿈과 환상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을 전하였다. 필자는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 가운데 꿈을 설교의 중요한 보조자료로 사용하고 있는 이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꿈에 나타난 자료를 설교의 주제나 방향을 잡든지 설교의 내용과 예화 등에 활용하고 있다. 물론 이들은 성서의 본문을 설교의 중심 텍스트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꿈을 통하여 그 텍스트에 활기를 불어넣은 영감을 얻곤 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을 상대로 개척교회를 시작하여 활기 있는 목회를 하고 있는 서울 S교회의 담임자 K목사가 있다. 필자는 인터넷을 통해 그의 설교를 자주 듣고 있기에 그의 설교 준비나 작성과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글 가운데는 아예 꿈을 설교에 활용하기 위해서 잠자기 전에 아예 머리맡에 꿈 노트를 준비해둔다는 말이 있었다. 이러한 습관은 매우 바람직하다고 본다. 꿈 해석 전문가들은 꿈의 연구와 해석을 위해서는 연구자 자신의 꿈 일지(dream journal) 쓰는 습관을 권장하고 있다.
우리의 설교 예화 중에 꿈 자료가 많이 나타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대개 그런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시작한다. “존 웨슬리가 꿈에 천국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천국 문에서 베드로를 만났지요. 웨슬리는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여기 감리교인들이 몇 명이나 와 있습니까?’ 그러자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여기엔 감리교인이 한 명도 없습니다. 웨슬리는 다시 물었습니다. ’여기 장로교인은 몇 명 있습니까?‘ ’장로교인도 한 명도 없습니다...." 꿈에 천국과 지옥에 가서 거기서 예수님, 사도, 천사, 기타 아는 인물을 만나 대화했다는 이야기는 실제 설교나 시중의 설교집 중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미국이 흑백 인물 차별로 인해 크게 갈등을 겪을 때 꿈을 소재로 한 예화는 매우 유명하다. 꿈에서 한 흑인이 백인 교회에 예배하러갔다. 그러나 그는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입구에서 쫓겨나고 만다. 그는 하는 수 없어 교회의 현관 아래 계단에 앉아 있었는데, 바로 자기 옆에 또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한다. 놀라웁게도 그는 바로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께서 그 흑인에게 말씀하셨다. 실은 나도 이 교회에서 쫓겨났다라고. 이러한 생생한 꿈 자료들은 때때로 은유적이며 상징적인 형태를 띠면서 매우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 꿈의 내용이 현실과 문자적으로 사실이냐 아니냐를 초월해서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물론 여기서 필자가 말하는 꿈은 소설처럼 허구로 만들어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 꿈은 어떤 실존적 인물이 실제로 경험했던 실제적인 꿈을 전제로 한다. 재미있는 것은 루이스 세이버리는 예수님의 비유를 꿈과 관련해서 생각해본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꾼 꿈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아서 알 수 없지만, 그 대신 우리에게는 그분의
생생한 비유들이 남아 있다. 그 비유들이 대부분 꿈처럼 풍부한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분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꿈, 환상, 기도, 명상 등에서 보았던 영상들을 사용하여 비유 들을 만들어 냈을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주로 상징을 통해서 그분에게 말씀하셨듯이
그분 역시 이 상징들을 이용하여 제자들을 가르치셨다고 할 수 있다.
꿈의 자료를 설교에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꿈의 보상적이며 예시적인 기능과도 관련이 있다. 특히 융이 집단 무의식에서 나오는 꿈은 개인을 초월하여 공동체와 관련되며 전 민족, 종족, 전 세계적인 차원과 연결된 것이라 할 때 더욱 그러하다. 이러한 꿈의 메시지는 공동체와 민족의 미래와 직결되어 전 공동체적인 회개, 각성, 교정을 의도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집단적 무의식의 꿈 이론과 해석은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의 꿈과 환상을 설명하는 데 있어 매우 좋은 도구가 된다. 만일 오늘도 이러한 꿈 내용을 강단의 메시지로 채택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존 샌포드는 이렇게 말한다.
만약 다니엘이나 요셉 같은 해몽가들이 오늘날 기독교 설교단에서 설교를 한다면 정말 놀라운 일
일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교회가 영적인 요구와 하나님의 계속적인 계시를 통해 얼마나 활기를
띠게 되겠는가?
C. 목회상담과 영성지도
목회상담은 영성지도를 포함하기도 하지만 이 둘은 엄격하게 구별되기도 한다. 목회상담은 문제를 안고 고민하거나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고, 그들의 고통을 완화하거나 치유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왔다. 이에 비하여 영성지도는 마틴 쏜튼(Martin Thornton)이 지적한 대로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양육하는 것이며, 모든 사람이 받은 은사를 창조적으로 계발하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도 가능하지만 결국 목회상담과 영성지도의 궁극적인 목표에 있어서는 이 둘은 서로 만나고 서로 보완하는 관계에 있다. 융이 지향하는 개성화(individuation)은 목회상담의 목표인 동시에 영성지도의 목표가 되기도 한다. 융의 분석심리학을 기독교 영성에 접목하는 작업의 가능성을 시도한 것은 프랑스의 분석심리학자 에르나 반 드 빙껠(Erna van de Winckel)의 융의 심리학과 기독교 영성이다. 이 책에서 빙껠은 정신분석이 결코 종교를 대신할 수 없으며 그러한 시도는 영적인 것을 훼손시키는 것임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빙껠은 심리학적인 방법을 영적인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하나의 길(道)과 수단으로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시도하고 있다. 특히 빙껠은 기독교의 영성수련의 하나인 금욕수련과 개성화 과정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비교, 고찰함으로써 영성지도를 위한 길을 열고 있다.
존 샌포드는 꿈: 하나님의 잊혀진 언어에서 꿈의 해석을 활용한 목회상담의 실제적인 과정과 결과를 사례를 통해 자세하게 소개하고 있다. 또한 꿈을 통하여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응답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세이버리와 공동 작가들의 작품인 꿈과 영적인 성장은 제목이 암시하듯 목회상담을 다루기도 하지만 영성지도에 보다 더 강조점을 둔 꿈 해석의 실제를 다루고 있다. 세이버리의 책은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꿈 작업을 할 수 있도록 꿈 일지 기록하기, 꿈 자아 따라가기, 상징 몰입법 등 37가지의 꿈 해석기술을 다루고 있다. 이들의 꿈 작업은 모두 융의 꿈 해석을 기초로 하고 있다. 세이버리가 꿈 해석을 통한 영적 성장을 다룬 한 사제의 꿈을 보기로 한다.
4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사제가 되어 첫 미사를 집행하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회중석에서 성서를 봉독하고 있었고 나는 헌금 봉헌송 중 독창 부분을 노래하기 위해 성가대석으로 올라갔습 니다. 가사는 라틴어로 되어 있고, 가락은 그레고리 형식이었습니다. 전에 이 노래를 들은 적이 없었지만, 나는 자신 있게, 그리고 기쁘게 불렀습니다. 노래를 마친 후에 회중석으로 내려와 어머 니와 함께 미사를 집전했습니다. 미사가 끝난 후, 성가대석으로 다시 올라가 트럼펫으로 폐회 찬 송을 불렀습니다. 다음 장면에서 나는 부모님 집 근처에 있는 거리를 걷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는 어머니의 누이동생인 엘리스 이모를 만났는데 그녀는 매우 젊고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이모 에게 어머니가 미사를 집전하는 교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모는 미사가 어떠했냐고
물었고, 나는 “아주 좋았다.”고 대답했습니다.
꿈을 깨고 나서 사제는 이 꿈속에 자신의 영적인 성장을 위한 중요한 메시지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사제는 여자를 사제로 임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에 어머니가 집전하는 성찬식에 참여한 사람들은 놀라거나 싫어하지 않은 사실에 유의하였다. 또한 자신 역시 어머니가 자랑스러웠고, 어머니가 사제품을 받는 것을 진정으로 기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사제는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신앙차원에서는 자신의 목회에 여성적인 에너지를 보다 충분히 끌어들여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객관적인 차원에서는 여자에게도 사제 품위를 주어야 한다는 외적 운동의 필요성을 느꼈다. 이 꿈의 에너지를 통해 사제는 개인, 가족, 지역 교회, 그리고 교회 전체 차원에서 자신의 의식을 한 차원 더욱 높일 수 있었고, 풍부한 종교적이며 영적인 경험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 사제의 경우처럼 스스로 자신의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바로 이와 비슷한 꿈을 꾼 사람들은 목회자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영적인 성장에서 무엇이 장애가 되고 있는지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꿈 이미지를 통해서 보다 더 자세한 문제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영성 순례의 길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에도 꿈의 상(像)은 구체적인 인격을 가진 모습으로 나타나 우리를 돕고, 안내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꿈에서 이러한 영혼의 안내자(pshychopomp)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융의 원형들인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등은 이런 영적인 성장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나타난다. 나아가서 자기(self)를 상징하는 십자가, 태양, 만다라, 둥근 원, 사각형의 상들이 나타날 때는 그리스도의 완전성화를 지향하는 것과 관련하여 본다면 의미 있는 해석이 가능할 것이다. 융의 개성화 과정은 영성순례라는 맥락에서 영성 지도의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외에도 꿈 연구 그룹을 운영하면서 목회를 활성화하는 일도 가능하다. 이 꿈 연구 그룹은 먼저 꿈에 대한 성서적인 연구로 시작하여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꿈을 문헌적으로 연구하는 것이다. 존 샌포드나 머튼 켈시는 이미 신․구약 성서 안에 있는 70여개의 꿈 자료와 초대교회와 교부들의 저서에 나타난 150여 개의 꿈 자료를 연구하였다. 아타나시우스가 쓴 『안토니의 생애』와 사막 교부들의 삶과 교훈을 중심으로 편집된 책자들 역시 환상을 연구하는 데 있어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꿈 연구 그룹은 매 모임 때마다 자기들의 꿈을 가지고 와서 공동으로 작업하는 역동적인 모임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좋을 것이다. 루이스 세이버리의 『꿈과 영적인 성장』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스스로 꿈을 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는 구체적인 방법을 다루고 있기에 이 그룹의 교재 중 하나로 활용하면 좋겠다. 또한 이 그룹은 분석심리학적인 방법을 통한 성서연구 그룹으로 확장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성서해석은 꿈에 대한 성서적 연구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발전이 될 터인데, 이 성서연구 그룹은 성서에 나타난 수많은 상징과 비유도 연구 범위에 포함하면 더욱 바람직할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꿈에서 나온 메시지와 에너지는 목회자의 개인적인 삶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봉사하고 있는 공동체를 위해서 바람직한 영적인 자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는 목회전반에 걸쳐 방향설정, 행정, 예배, 선교, 설교, 상담, 그리고 영성지도 등에서 꿈을 활용할 수 있다. 이는 마치 지혜로운 청지기가 때에 따라 하늘 창고에 쌓아둔 보물을 꺼내어 사용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목회자의 기본적인 영성생활, 성서연구, 그리고 신학적인 노력과 병행하여야 할 것이다. 이런 것을 소홀하게 여길 때는 물론 꿈이 그 보상적이며 예후적 기능을 통하여 메시지를 보내겠지만, 이를 무시하게 되면 꿈과 환상에 지나치게 기울어져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V. 맺는 말: 분석심리학, 양자물리학, 그리고 실천신학의 미래를 위하여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원리의 발견으로 인류는 거시적인 우주 속에 내재하는 심오한 진리에 한 걸음 다가서게 되었다. 이 이론을 통해 절대적인 공간이나 시간개념은 수정되었고, 시공간 연속체 속에서 우주를 이해하게 되었다. 나아가서 양자물리학(quantum physics)의 발전으로 아원자 차원에서 물질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게되고,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로 설명할 수 없는 미시적인 세계의 법칙을 또한 발견하게 된다. 양자물리학은 빛이 입자(particle)인 동시에 파동(wave)이라는 모순된 발견 앞에서 한동안 갈등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모순은 이제 닐스 보어(N. Bohr)의 상보설(complementary theory)을 정설로 받아들임으로써 이 문제는 일단락을 짓게 되었다. 빛이 입자인 동시에 파동이라 것은 모순인 동시에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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