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_융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클림트의 그림소고2
융_융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클림트의 그림소고2
2.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빈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빈은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 당시 빈은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빈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싹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빈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빈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빈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구문명을 말할 때 단순하게는 서유럽에 구축된 문명, 좀더 넓게 보자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계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그것을 계몽주의를 그 기원하는 사상으로 볼 수도 있고, '진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의 유럽은 마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런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독립된 국민국가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정치체제는 동시에 그로 인한 반동(향)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서구 문명의 정치 체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 그 강한 힘으로 자기를 낳은 문명 자체를 파괴할 듯한 위기를 되풀이해서 초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 문명은 이렇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쇠퇴해갔다.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빈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빈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돈, 더 이상 필요없으니 어서 가져가시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3. 클림트의 그림들 - 아니마와 아니무스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 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원했던 왕들과 부자를 열망한 상인, 은행가들의 결탁으로 시작된 유럽의 팽창 사업은 16세기 동안 서유럽의 무역상인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흘러들었고, 이 시기에 지속된 서유럽의 인구 증가는 서서히 자본주의의 맹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주었다. 자본주의는 복잡하게 설계된 미로와도 같이 인간을 가둬두게 된다. 과연 자본주의가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모택동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을 부엌에 가둬두고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명제의 역관계가 성립한다면 모든 인간을 그런 미로에 가둬두고서 여성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가령 현대의 여성들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다면 그것은 피임약의 발명과 같은 과학의 발전 혹은 전쟁을 통해 남성들의 노동력을 더 이상 착취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력을 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적정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ꡐ요부'인 동시에 ꡐ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① 키스(그림1)
<키스>
짜릿한 첫 키스의 느낌처럼 내게 그런 충격과 여운을 주었던 그림이다. 그리고 클림트라는 화가에 대해서.. 그의 그림, 생각, 느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그림이기도 하다.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되어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 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 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세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 감은 두 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만든다.
한번 보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잊혀지질 않을 것만 같은 그림...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② 유디트1,2(그림2,3)


<유디트1> <유디트2>
유디트는 성서 속에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여인이지만 동시에 '홀로페레느스Holofernes'라는 앗시리아 '남성'장군의 목을 베는 여인이기도 하다.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유디트'는 '키스' 만큼이나 잘 알려진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클림트의 요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그림은 뭐니뭐니 해도 '유디트' 연작이다.
유디트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 그래서 그녀는 서양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소재로 무수히 다뤄졌다. 그러나 이 애국 여걸이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의 요부로 돌변했다. 현양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 그저 남자에 굶주린 악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특히 유디트1은 액자에 유디트란 글자가 박혀 있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살로메를 그린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고대 요부의 인상이 더 강렬히 풍겨나왔던 까닭이다.
유디트 연작을 보면 모두 주인공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그리고 앞가슴도 공통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옷은 속이 들여다 보이는 '시스루'이거나 하늘하늘 나부끼는 관능적인 것이다. 온몸으로 자신의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여인. 게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적의 것이라기보다는 연인의 머리 같다. 그 머리를 잡고 있는 손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손으로부터 일종의 끈끈한 애정마저 흘러나와 화면 전반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체애 환자처럼 유디트는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③ 아담과 이브(그림4)

<아담과 이브>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이브이다. 물론 당시 실제 생활 속의 남편들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적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공포는 바로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19세기의 문학 속에는 종종 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 허울만 남은 가정, 외도, 알콜 중독, 결핵, 온갖 사회악에 무풍지대로 노출된 가정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④ 다나에(그림5)

<아담과 이브>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 지방을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다. 풍부한 물자와 후한 인심, 천혜의 땅이다. 선량하고 부지런한 시민, 왕은 행복했다. 시민들은, 대지마저도 기꺼이 풍요로운 삶을 향유했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하나. 미모의 여왕 에우리디케가 공주를 출산했다. 공주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쏙 빼어 닮았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바로 다나에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탁은 장차 다나에가 낳을 아기가 왕을 시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비극은 늘 그랬지. 고귀한 신분을 저주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켰지. 아크리시오스는 절망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가 장차 나의 목을 따는 친손주의 어머니라니. 그러나 신탁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왕은 예언의 실현을 막기 위해선 차라리 다나에를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락해선 안됐다. 왕은 다나에를 눈물로 감금했다. 무쇠를 통째로 녹여서 완벽한 철탑을 완공하고 그 속에 공주를 가두었다. 식수를 제공할 조그만 구멍을 철탑의 천장에 냈을 뿐이다. 육중한 철탑은 견고한 요새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우뚝했다. 딸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왕의 가슴은 찢어졌다. 갇힌 이유를 나중에 유모로부터 들은 다나에 역시 자신의 운명과 부친을 원망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슬픔도 철통같은 무쇠탑을 녹일 수 없었다. 설령 눈물이 쇠를 부식시킬 수는 있어도, 철탑은 저 홀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제우스가 이 철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탑 주위를 맴돌던 그가 순간, 천장의 틈새로 아름다운 다나에를 발견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견고한 철탑은 요새 중의 요새.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의 아버지 제우스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앞에서 절망했다. 그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으나 실패했다. 밤마다 전전반측했으리라.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이때 눈물로 시간을 흘리던 다나에가 하늘의 제우스를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랑의 신은 순식간에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잠자던 다나에의 정열을 깨웠다. 이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벅진 넓적다리가 제우스를 향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어할 수도, 아니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우스는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황금의 정령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음껏 벌컥벌컥 쏟아냈다. 다나에는 황홀경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정랑을 갈증 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니 빨아들였다. 절제할 수 없는 쾌락은, 그녀가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조차 망각케 했다. 그랬다. 쾌락이 최고조에 도달할수록 비극은 가깝다. 그것은 죽음의 유혹 같은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다나에와 그녀의 아이를 궤짝에 가두어 망망대해로 띄워 죽음으로 보냈다. 다나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다나에〉. 이 그림은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터질듯한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극단적으로 클로즈 업하여 농염함을 극대화했다. 이처럼 풍만한 허벅지를 경험하긴 어렵다. 상대적으로 가냘픈 종아리가 그것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으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제우스 정랑을 보라. 온통 황금빛이다.
관능은 이렇게 황금빛으로 출렁이며 빛난다. 그는 색으로 황홀한 심리마저 잡아낸 것이다. 여인은 강렬한 엑스타시에 몸을 싣고 꿈같은 몽환의 세계에 침몰했다. 한편 클림트는 다나에의 손을 통해서 퇴폐적 아름다움마저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손을 잘 보라. 무엇인가 긴 막대 같은 것을 살짝 감아 쥔 오른 손은 긴장되어 떨릴 듯 하다. 물론 그 대상은 그림 속에서 생략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벌어진 입, 쾌락에 지펴 감긴 눈은 제우스의 성기를 감아쥐고 탐닉하는 중이다. 그리고 분명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애무한다. 그녀는 자위 중이다. 그녀는 이렇게 손으로 말한다.
⑤ 그 밖의 작품들
아르누보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그 양식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1900-1903년 사이에 제작된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격렬한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빈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 1902년 봄 분리파의 전시회에 출품된 <베토벤 프리즈> 또한 거부당하고 만다.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고, 1905년에는 그의 후원자들과 요제프 엥겔하르트의 후원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로 인해 결국 분리파가 분열되기에 이른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탈퇴하고 만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들이 자국에서는 그토록 천대받았지만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는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빈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일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그는 또한 초상화작업도 매우 열심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고, 클림트 역시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는 장식성을 진보할 수 없고, 지진아적이라고 말했지만 초상화에는 또 현란한 장식성과 색채를 통해 빈의 상류층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이 당시 빈 상류층 여인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금전적인 고민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클림트의 이해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 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 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빈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클림트는 살아 생전에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역시 여인들을 사랑했다. 오늘날 클림트의 작품은 구식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술사적으로는 코코슈카나, 실레에 끼친 영향을 더욱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지속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Ⅳ. 나오는 말
미술치료나 정신분석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두 마리 토끼는 커녕 어느 한 쪽도 제대로 좇지 못한 느낌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클림트의 제자인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싶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이 그림들이 미술치료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그림도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은 느낌이다. 본고를 다 쓰고 나서 느낀 점을 졸시로 표현해 보았다.
구스타프 클림트展
오지리에
색 잘 쓰는 화가가 있었대.
특히 황금색을 잘 썼는데
한 번도 결혼한 적 없는 그는
애가 무려 열 넷이나 되었다지 뭐야
색이 공이란 진리를 깨닫기도 전에
그이는 스페인독감으로 죽고 말았대.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말러의 4번 교향곡이 흘러나오지 뭐야.
왜 있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란 영화에
흐르던 그 음악 말야.
말러는 화가라는 뜻의 독일어와 발음이 똑같대나.
색 잘 쓰는 그의 모델들이
공으로 준다해도 일 없어.
난 이미 무채색이 돼버렸거든.
아무튼 오지리에 가면
내 대신 꼭 그 그림을 봐줘.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냐구?
Ⅴ. 참고문헌
융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미술치료(잉그리트 리델 지음/정여주 옮김/ 학지사 2004)
미술치료의 이해(정여주 지음/학지사 2003)
클림트, 황금빛 유혹(신성림 지음/다빈치 2003)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구로이 센지 지음/김은주 옮김/다빈치 2003)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박명욱 지음/ 박가서장/ 1998년)
은밀한 사전(가타 두벡 지음/ 남문희 옮김/ 청년사/ 2001년)
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에곤 실레(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시공아트 012/1999년)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알렉상드라 라피에르 지음/ 함정임 옮김/ 민음사/ 2001년)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 -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미술사를 바꾼 명화의 스캔들(조이한 지음/ 웅진닷컴/ 2002년)
Klimt(Gustav Klimt/ Taschen/ 1993/ Germany)
성격의 이론 (G.S. Hall ; G. Lindzey 공저/ 이상로; 이관용 공역/ 중앙적성 출판부)
성격심리학 (E. Jerry Phares 저/ 홍숙기 역/ 박영사)
자료출처 http://m.cafe.daum.net/bulkot/IP2l/26?listURI=%2Fbulkot%2FIP2l%3Fprev_page%3D2%26amp%3Bamp%3Bamp%3Bamp%3BnoticeYn%3D%26amp%3Bamp%3Bamp%3Bamp%3Bfirstbbsdepth%3D0001ozzzzzzzzzzzzzzzzzzzzzzzzz%26amp%3Bamp%3Bamp%3Bamp%3Blastbbsdepth%3D0000gzzzzzzzzzzzzzzzzzzzzzzzzz%26amp%3Bamp%3Bamp%3Bamp%3Bpage%3D8
2. 몰락해가는 유럽의 불꽃, 클림트와 빈 분리파
동생 에른스트의 죽음은 그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두려움을 주었으나 구스타프 클림트는 아직 젊었고, 예술가로서의 성공에 대한 야심도 있었다. 당시 빈은 몰락해가는 구체제의 유럽, 그 압축된 모순으로서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수도였다. 당시 빈은 늙은 대륙 유럽에서도 가장 완고한 예술가들이 아카데미를 틀어쥐고, 현대 예술의 새로운 흐름에 대해서는 외면하는 형국이 지속되고 있었다. 그들은 때로 아카데미의 권위로, 때로 상업적인 배려로 답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빈의 숨막히는 분위기를 더욱 옴짝달싹할 수 없게 틀어지었다. 빈의 화단은 새로운 기운을 고취시킬 수 있는 운동이 필요했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빈의 보수적인 예술가 집단인 '쿤스틀러 하우스'를 탈퇴하고, 요셉 호프만, 콜로만 모저 등과 함께 '빈 분리파'를 결성하고 초대 회장이 된다.
빈 분리파에게 사상적 토대를 제공한 헤르만 바는 "우리는 삭막한 일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고 선언하고 나선 것이다. 그들은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하고,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한다. 바야흐로 낡은 세기는 가고, 그들에게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서구문명을 말할 때 단순하게는 서유럽에 구축된 문명, 좀더 넓게 보자면 과학과 기술 그리고 세계시장을 기반으로 하는 문명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인간이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라는 미덕에 의해 이 세상에서 좀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상(그것을 계몽주의를 그 기원하는 사상으로 볼 수도 있고, '진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던 무렵의 유럽은 마치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고 있는 현재 미국 주도의 세계화가 의미하는 것처럼 이런 서구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독립된 국민국가에 의해 인류의 진보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정치체제는 동시에 그로 인한 반동(향)을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이런 서구 문명의 정치 체제는 민족주의가 일어나 그 강한 힘으로 자기를 낳은 문명 자체를 파괴할 듯한 위기를 되풀이해서 초래하게 될 것이란 사실을 알지 못했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유럽 문명은 이렇게 확대되면서 동시에 쇠퇴해갔다.
클림트가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 유럽의 부르주아지들은 식민지 쟁탈과 착취를 통해 쌓아올린 부를 통해 유럽 대륙이 세계 제일의 문명이자 인류의 미래가 진보해갈 것이라 확신했다. 새로운 세기인 20세기가 시작될 무렵 클림트는 빈 대학으로부터 대회랑 천장 벽화 작업을 의뢰받게 된다. 그는 법학, 철학, 의학을 주제로 그린 3부작을 통해 인간의 삶 속에 투영되는 고통과 두려움, 인간의 정신적 방황에 대해 추상적 패턴을 도입해 복합적이고 왜곡된 양식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러나 빈의 대중들과 심지어는 비엔나 대학의 교수들조차 발끈해서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평소 여인들의 자위행위 장면이나, 남녀간의 성교 장면을 거침없이 그렸던, 풍문이 좋지 않았던 클림트의 작품을 참아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클림트는 이런 비판에 대해 자신의 예술에는 조금의 문제도 없다고 생각했다.
"이 돈, 더 이상 필요없으니 어서 가져가시오!"
클림트는 천장벽화작업을 스스로 포기하고, 작품 제작비 일체를 돌려주었다.
3. 클림트의 그림들 - 아니마와 아니무스
'퇴폐적인 에로티시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들은 당대에도 이미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그가 살았던 시대는 그의 작품보다 더 퇴폐적이었다. 부르주아의 청교도적인 도덕률은 제국주의와 함께 오간 데 없이 사라졌고, 매독은 창궐했다. 클림트의 작품을 보며 퇴폐적이란 비난을 서슴없이 가한 사람들은 잠시 후 뒷골목 매음굴에서 지갑을 잃어 버렸다. 그의 작품에는 어째서 그토록 많은 여인들이 등장하며 이전의 예술가들이 그리듯 그렇게 다소곳한 표정의 수줍게 고개 숙인 누드가 아니라 그토록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있는가? 어째서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 속의 정숙한 여인, 혹은 유대 민족을 구원한 유디트는 금방 정사를 끝낸 여인의 몽롱한 눈빛을 하고 있는가? 그들은 과연 팜므 파탈인가.
현대예술이 이렇듯 요부상이나 창부상 등을 통해 현실을 드러낸 것과 관련해 예술사회학자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는 다음과 같은 언급을 했다.
"창부는 격정의 와중에서도 냉정하고, 언제나 자기가 도발한 쾌락의 초연한 관객이며, 남들이 황홀에 도취에 빠질 때에도 고독과 냉담을 느낀다. 요컨대 창부는 예술가의 쌍둥이 짝이다."
왜 한 시대의 여성 이미지가 바로 그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창부의 상으로 압도돼야 했는지를 매우 잘 설명해주는 지적이다. 역사 이래 가장 치열한 '성(性)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그들은 냉정해져야 했고 그로 인한 고독을 회피하지 말아야 했다. 이는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 황금률이었다. 부르주아와 같이 혁명을 일으켰으나 혁명 뒤 그들로부터 버림받은 근대의 예술가들은 (예술가들은 부르주아 혁명의 가치를 담아 작품을 제작했으나, 주지하듯 권력을 장악한 부르주아지는 그런 예술을 멀리하고 오히려 고전적 작품을 선호하는 등 급속히 복고적이 되어갔다) 스스로를 창부와 동일시함으로써, 또는 창부를 동경함으로써 스스로 창부가 되고, 그럼으로써 세상을 향해 특히 부르주아 사회를 향해 "네가 오히려 진짜 창부다"하고 절규할 수 있었다.
강력한 군사력과 부를 원했던 왕들과 부자를 열망한 상인, 은행가들의 결탁으로 시작된 유럽의 팽창 사업은 16세기 동안 서유럽의 무역상인들을 통해 전 유럽으로 흘러들었고, 이 시기에 지속된 서유럽의 인구 증가는 서서히 자본주의의 맹아로 자리잡았다. 그리고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들에게 확고한 지위를 주었다. 자본주의는 복잡하게 설계된 미로와도 같이 인간을 가둬두게 된다. 과연 자본주의가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사했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지만 모택동이 '하늘의 절반을 떠받치고 있는 여성들을 부엌에 가둬두고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했던 명제의 역관계가 성립한다면 모든 인간을 그런 미로에 가둬두고서 여성들에게 자유가 주어졌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가령 현대의 여성들이 이전보다 자유로워졌다면 그것은 피임약의 발명과 같은 과학의 발전 혹은 전쟁을 통해 남성들의 노동력을 더 이상 착취할 수 없었던 자본주의가 여성의 노동력을 시장으로 끌어내기 위한 적정한 타협의 산물일 수도 있다.
클림트의 작품에는 유난히 많은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고 클림트에 의해 표현된 여성상은 ꡐ요부'인 동시에 ꡐ어머니'라는 대조적인 상징성을 동시에 부여한다. 이는 클림트가 개인적으로 갖고 있었던 어머니에 대한 고착 현상과 여성을 통한 시대정신의 표출이라는 점에서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에선 최초의 여자중등학교가 등장했고, 독일에서도 여성 교육기관이 생기는 등 여성의 지위가 향상되어 가는 분위기였다. 여성들은 가부장적인 서양 문명의 오랜 관습을 서서히 벗어 던지기 시작했다.
① 키스(그림1)
<키스>
짜릿한 첫 키스의 느낌처럼 내게 그런 충격과 여운을 주었던 그림이다. 그리고 클림트라는 화가에 대해서.. 그의 그림, 생각, 느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를 만들어준 그림이기도 하다.
벌써 한 세기 전에 그려진 그림이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원한 사랑의 이미지로서 남을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이 그림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키 작은 풀꽃이 만발한 언덕 위에 두 연인이 서로에게 의지한 채 서있다. 짧은 순간에 도취되어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여인 하지만 그 순간 의 감흥이 얼마나 큰지는 말려들어가는 손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금빛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커다란 가운은 마치 후광처럼 짧은 순간의 감흥을 더해주고 두 사람은 하늘을 향해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하나인 듯 하지만 결국 엄연히 다른 둘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것은 패턴화된 장식을 통해서다. 남성의 옷에는 직사각형의 장식을 넣어서 남성성을 드러냈고 여성에게는 둥근 원형의 장식을 넣어서 여성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두 사람을 둘러싸고 있는 큰 가운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남성의 상징을 연상시킨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결국 남성안에 남성성과 여성성이 동시에 존재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남성안에 있는 남성성과 여성성의 진정한 화해.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이해와 존경을 통해서만이 진정 남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는 메세지가 담겨져 있는 것이다. 궁극적인 화해의 이미지는 입맞춤인 것이다.
이 그림을 통해 클림트가 말하려고 했던 것은 남성과 여성의 화해를 통한 영원한 사랑이다. 하지만 그건 결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자신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클림트 자신과 에밀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처럼. 이 그림은 분명 사랑을 통한 화해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결코 따뜻하거나 희망적이라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관자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매몰차게 돌려져 있는 남자의 머리와 창백한 얼굴로 세상으로 통하는 문을 닫아버린 듯 꼭 감은 두 눈의 여자의 얼굴에서 오히려 소외감과 우울함을 느끼게 만든다.
한번 보면 영원히 기억 속에서 잊혀지질 않을 것만 같은 그림...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황금색의 황홀하고, 몽환적인 그림으로 카페의 벽 어딘가 남녀가 부대끼는 장소에 걸려 있을 법한 그림 1순위에 오르는 화가가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② 유디트1,2(그림2,3)
<유디트1> <유디트2>
유디트는 성서 속에서 앗시리아의 침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여인이지만 동시에 '홀로페레느스Holofernes'라는 앗시리아 '남성'장군의 목을 베는 여인이기도 하다. 유디트는 서양 미술에서는 오래된 고전의 주제 중 하나였다. 주로 패덕과 욕망을 단죄하는 겸손과 순결, 믿음의 승리를 드러내기 위한 기독교적인 미덕의 소재로 다루어지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살인과 폭력의 흥분되는 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로 다루어지는 변화를 보인다.
'유디트'는 '키스' 만큼이나 잘 알려진 클림트의 대표작이다.
클림트의 요부상을 가장 잘 대표하는 그림은 뭐니뭐니 해도 '유디트' 연작이다.
유디트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 그래서 그녀는 서양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소재로 무수히 다뤄졌다. 그러나 이 애국 여걸이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마치 마약에 취한 듯 몽롱한 표정의 요부로 돌변했다. 현양해야 할 아무런 가치도 지니지 않은, 그저 남자에 굶주린 악녀의 모습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특히 유디트1은 액자에 유디트란 글자가 박혀 있음에도 대중들 사이에서 살로메를 그린 그림으로 잘못 알려져 왔다. 세례 요한의 목을 벤 고대 요부의 인상이 더 강렬히 풍겨나왔던 까닭이다.
유디트 연작을 보면 모두 주인공의 눈동자가 풀려 있다. 그리고 앞가슴도 공통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옷은 속이 들여다 보이는 '시스루'이거나 하늘하늘 나부끼는 관능적인 것이다. 온몸으로 자신의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여인. 게다가 그녀의 손에 들린 적장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는 적의 것이라기보다는 연인의 머리 같다. 그 머리를 잡고 있는 손은 섬세하기 이를 데 없고, 그 손으로부터 일종의 끈끈한 애정마저 흘러나와 화면 전반에 기괴한 분위기를 더한다. 그러니까 마치 사체애 환자처럼 유디트는 죽은 적장의 머리를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③ 아담과 이브(그림4)
<아담과 이브>
클림트의 <아담과 이브>에서 남성인 아담은 흑빛으로 질려 있고, 생기발랄한 이브 뒤에 숨어 있다. 아담이 마치 죽은 것처럼 눈을 감고 있는 반면에 이브는 마치 볼테면 맘껏 보라는 듯한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많은 평자들이 클림트의 작품을 비롯한 당대의 여러 예술작품들을 통해 당시 여성운동이 얼마나 커다란 공포를 불러 일으켰는지, 당시의 여성들이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본연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세상에 전하기 위해 얼마나 체계적으로 노력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일순간이나마 시간을 내서 자아를 주장하는 여성, 완전히 헌신하지 않는 여성은 이미 위험하고, 죄를 저지른 이브이다. 물론 당시 실제 생활 속의 남편들은 예술작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적은 상처를 받았을 터이지만 말이다.
공포는 바로 문학이나 미술과 같은 예술에도 반영되어 19세기의 문학 속에는 종종 경제적이던 문화적이던 허울만 남은 가정, 외도, 알콜 중독, 결핵, 온갖 사회악에 무풍지대로 노출된 가정을 등장시킨다. 그들은 바람 피우는 남편이나 알콜 중독에 걸린 남편, 결핵에 걸리거나 병약한 아이들을 수도 없이 쏟아냈다.
④ 다나에(그림5)
<아담과 이브>
그리스 신화의 한 토막.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골리스 지방을 아크리시오스가 통치하던 때의 이야기다. 풍부한 물자와 후한 인심, 천혜의 땅이다. 선량하고 부지런한 시민, 왕은 행복했다. 시민들은, 대지마저도 기꺼이 풍요로운 삶을 향유했다. 그리고 나라의 경사 하나. 미모의 여왕 에우리디케가 공주를 출산했다. 공주는 아름다운 어머니를 쏙 빼어 닮았다. 아니 그것을 능가했다. 바로 다나에였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신탁은 장차 다나에가 낳을 아기가 왕을 시해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비극은 늘 그랬지. 고귀한 신분을 저주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침몰시켰지. 아크리시오스는 절망했다. 이렇게 아름답고 매력적인 공주가 장차 나의 목을 따는 친손주의 어머니라니. 그러나 신탁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변화시킬 수 없는 일이다.
왕은 예언의 실현을 막기 위해선 차라리 다나에를 절해고도에 유폐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남자의 접근도 허락해선 안됐다. 왕은 다나에를 눈물로 감금했다. 무쇠를 통째로 녹여서 완벽한 철탑을 완공하고 그 속에 공주를 가두었다. 식수를 제공할 조그만 구멍을 철탑의 천장에 냈을 뿐이다. 육중한 철탑은 견고한 요새로 한 치의 틈도 없이 우뚝했다. 딸을 가둘 수밖에 없었던 왕의 가슴은 찢어졌다. 갇힌 이유를 나중에 유모로부터 들은 다나에 역시 자신의 운명과 부친을 원망하고 날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어떤 슬픔도 철통같은 무쇠탑을 녹일 수 없었다. 설령 눈물이 쇠를 부식시킬 수는 있어도, 철탑은 저 홀로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 제우스가 이 철탑을 발견하고 호기심이 발동했다. 탑 주위를 맴돌던 그가 순간, 천장의 틈새로 아름다운 다나에를 발견했다.
이제 이야기는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그러나 견고한 철탑은 요새 중의 요새. 틈을 발견할 수 없었다. 신의 아버지 제우스도 난공불락의 철옹성 앞에서 절망했다. 그는 요새를 공략하기 위해서 절치부심했으나 실패했다. 밤마다 전전반측했으리라. 그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었으니. 이때 눈물로 시간을 흘리던 다나에가 하늘의 제우스를 발견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사랑의 신은 순식간에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잠자던 다나에의 정열을 깨웠다. 이제 활화산처럼 폭발하고 타오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녀는 처음 경험하는 야릇한 흥분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흐벅진 넓적다리가 제우스를 향해 절로 벌어지는 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제어할 수도, 아니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제우스는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었다. 그 역시 욕정을 참지 못하고 황금의 정령을 그녀의 다리를 향해 마음껏 벌컥벌컥 쏟아냈다. 다나에는 황홀경에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녀는 제우스의 정랑을 갈증 난 사람처럼 게걸스럽게 받아들였다. 아니 빨아들였다. 절제할 수 없는 쾌락은, 그녀가 재앙을 잉태한다는 것조차 망각케 했다. 그랬다. 쾌락이 최고조에 도달할수록 비극은 가깝다. 그것은 죽음의 유혹 같은 것이다. 결국 이 사실을 알게 된 왕은 다나에와 그녀의 아이를 궤짝에 가두어 망망대해로 띄워 죽음으로 보냈다. 다나에는 피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운명을 한탄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다나에〉. 이 그림은 제우스와 다나에의 그 쾌락적 합일과 열락을 관능적으로 포착했다. 그는 거두절미하고 터질듯한 여인의 풍만한 육체를 극단적으로 클로즈 업하여 농염함을 극대화했다. 이처럼 풍만한 허벅지를 경험하긴 어렵다. 상대적으로 가냘픈 종아리가 그것을 극단적으로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타구니 사이를 비집으며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제우스 정랑을 보라. 온통 황금빛이다.
관능은 이렇게 황금빛으로 출렁이며 빛난다. 그는 색으로 황홀한 심리마저 잡아낸 것이다. 여인은 강렬한 엑스타시에 몸을 싣고 꿈같은 몽환의 세계에 침몰했다. 한편 클림트는 다나에의 손을 통해서 퇴폐적 아름다움마저 예술적으로 승화시켰다. 손을 잘 보라. 무엇인가 긴 막대 같은 것을 살짝 감아 쥔 오른 손은 긴장되어 떨릴 듯 하다. 물론 그 대상은 그림 속에서 생략되었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 가능하다. 벌어진 입, 쾌락에 지펴 감긴 눈은 제우스의 성기를 감아쥐고 탐닉하는 중이다. 그리고 분명 그녀는 왼손으로 자신의 성기를 애무한다. 그녀는 자위 중이다. 그녀는 이렇게 손으로 말한다.
⑤ 그 밖의 작품들
아르누보 양식을 바탕으로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그 양식 때문이 아니라 그의 그림이 담고 있는 도발적인 내용 때문에 사회로부터 거부 당한 것인지도 모른다. 1900-1903년 사이에 제작된 비엔나 대학의 벽화가 격렬한 논쟁 끝에 거부당하고, (빈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 1902년 봄 분리파의 전시회에 출품된 <베토벤 프리즈> 또한 거부당하고 만다. 그는 점점 고립되어 갔고, 1905년에는 그의 후원자들과 요제프 엥겔하르트의 후원자들 사이의 팽팽한 긴장 상태로 인해 결국 분리파가 분열되기에 이른다. 클림트는 빈 분리파를 탈퇴하고 만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들이 자국에서는 그토록 천대받았지만 이미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에 접어든 프랑스 등에서는 그의 작품을 높이 평가해주었다. 1900년 개최된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는 그의 작품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고, 로댕은 벽화 "베토벤 프리즈"에 대해 "너무나 비극적이고 너무나 성스러운 작품"이라는 찬사를 던졌다. 1907년 이탈리아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예술의 영향을 받아 그는 금빛 물감과 금박이 등장하는 이른바 "황금 시대"를 시작한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클림트에게 있어서도 황금기였다. 그는 <다나에>, <세기의 세 여자>, <물뱀 1>, <물뱀 2>, <희망 2> 등을 잇따라 발표한다. 그리고 그의 대표작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는 황금시대를 종료한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최후의 순간까지 관능성과 장식성을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다.
말년의 그는 1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고 한다. 낮에는 아프리카풍의 스먹(Smock)을 입고 빈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동생의 처제인 의상 디자이너 에일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명상과 휴식을 즐겼다. 그는 이 무렵 수많은 풍경화들을 남겼는데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작품들이 이 무렵의 것들이다.
그는 또한 초상화작업도 매우 열심이었다. 오스트리아의 많은 여인들이 그의 손으로 그려진 초상화를 원했고, 클림트 역시 기꺼이 이에 응했다. 그는 장식성을 진보할 수 없고, 지진아적이라고 말했지만 초상화에는 또 현란한 장식성과 색채를 통해 빈의 상류층 부녀자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그에게 초상화를 그려 받는 것이 당시 빈 상류층 여인들에게는 일종의 유행이었고, 금전적인 고민을 벗어나고 싶어했던 클림트의 이해와도 잘 맞아 떨어졌다. 1910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그는 구스타프 쿠르베, 오귀스트 르느와르와 더불어 그만의 개인 전시실을 갖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말년에 찾아든 명성은 그의 호반 생활과 더불어 분명 평화롭기 그지 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의 종료를 한 해 앞둔 1918년 전 유럽을 강타해 수백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은 바로 얼마 전 뇌졸증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던 클림트의 목숨을 거두어 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건축가 오토 바그너도, '빈 공방'의 창설자인 디자이너 콜로만 모저, 임종의 클림트를 스케치했던 28세의 청년 에곤 실레도 갔다.
클림트는 살아 생전에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았고, 그 역시 여인들을 사랑했다. 오늘날 클림트의 작품은 구식처럼 보이기도 하고, 미술사적으로는 코코슈카나, 실레에 끼친 영향을 더욱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를 향한 여인들의 사랑은 지속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Ⅳ. 나오는 말
미술치료나 정신분석에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두 마리 토끼는 커녕 어느 한 쪽도 제대로 좇지 못한 느낌이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클림트의 제자인 에곤 쉴레와 오스카 코코슈카의 그림에 대해서도 잠깐 언급하고 싶었으나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이 그림들이 미술치료와 어떻게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지는 솔직히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떠한 그림도 미술치료의 관점에서 보면 보다 다양한 해석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히 깨달은 느낌이다. 본고를 다 쓰고 나서 느낀 점을 졸시로 표현해 보았다.
구스타프 클림트展
오지리에
색 잘 쓰는 화가가 있었대.
특히 황금색을 잘 썼는데
한 번도 결혼한 적 없는 그는
애가 무려 열 넷이나 되었다지 뭐야
색이 공이란 진리를 깨닫기도 전에
그이는 스페인독감으로 죽고 말았대.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자면
말러의 4번 교향곡이 흘러나오지 뭐야.
왜 있지, <베니스에서의 죽음>이란 영화에
흐르던 그 음악 말야.
말러는 화가라는 뜻의 독일어와 발음이 똑같대나.
색 잘 쓰는 그의 모델들이
공으로 준다해도 일 없어.
난 이미 무채색이 돼버렸거든.
아무튼 오지리에 가면
내 대신 꼭 그 그림을 봐줘.
전남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냐구?
Ⅴ. 참고문헌
융의 분석심리학에 기초한 미술치료(잉그리트 리델 지음/정여주 옮김/ 학지사 2004)
미술치료의 이해(정여주 지음/학지사 2003)
클림트, 황금빛 유혹(신성림 지음/다빈치 2003)
에곤 실레, 벌거벗은 영혼(구로이 센지 지음/김은주 옮김/다빈치 2003)
너무 낡은 시대에 너무 젊게 이 세상에 오다( 박명욱 지음/ 박가서장/ 1998년)
은밀한 사전(가타 두벡 지음/ 남문희 옮김/ 청년사/ 2001년)
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지음/ 학고재/ 2001년)
에곤 실레(프랭크 화이트포드 지음/ 김미정 옮김/ 시공아트 012/1999년)
불멸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알렉상드라 라피에르 지음/ 함정임 옮김/ 민음사/ 2001년)
위험한 그림의 미술사 - 바로크에서 현대까지 미술사를 바꾼 명화의 스캔들(조이한 지음/ 웅진닷컴/ 2002년)
Klimt(Gustav Klimt/ Taschen/ 1993/ Germany)
성격의 이론 (G.S. Hall ; G. Lindzey 공저/ 이상로; 이관용 공역/ 중앙적성 출판부)
성격심리학 (E. Jerry Phares 저/ 홍숙기 역/ 박영사)
자료출처 http://m.cafe.daum.net/bulkot/IP2l/26?listURI=%2Fbulkot%2FIP2l%3Fprev_page%3D2%26amp%3Bamp%3Bamp%3Bamp%3BnoticeYn%3D%26amp%3Bamp%3Bamp%3Bamp%3Bfirstbbsdepth%3D0001ozzzzzzzzzzzzzzzzzzzzzzzzz%26amp%3Bamp%3Bamp%3Bamp%3Blastbbsdepth%3D0000gzzzzzzzzzzzzzzzzzzzzzzzzz%26amp%3Bamp%3Bamp%3Bamp%3Bpage%3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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