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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_심혼은.. 묵시적 전제다

심혼은.. 묵시적 전제다

-  1. 정신의 본질에 관한 이론적 고찰 -


 


심혼은 .. 묵시적 전제다.




A. 무의식의 문제에 관한 역사

인간이 오성(五性), 또는 이성을 수단으로 하여 어느 정도 스스로의 정신적 한계를 벗어나 초(超)정신적, 합리적 상태에 이를 수 있다는 단순한 가정이 존재하는 한에서는, 그의 학문적 주장이 곧 정신 현상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과거의 관점에서는 물론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람들을 심혼의 표현이 결국에는 어떤 정신 조건의 증후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아직도 꺼리고 있다.

주체들이 매우 무의식적일 때, 다시 말해 그들의 실제적 차이점들을 의식하지 못할 때 가능하다. 어떤 사람이 무의식적일수록 그 사람은 정신적인 현상의 일반적인 규범을 따른다. 그러나 그가 자신의 개성을 의식하면 할수록 다른 주체들과의 차이점이 전면에 드러나고, 또한 그는 보편적인 기대에 그만큼 덜 부합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의 반응도 예견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후자는 개인의 의식이 점점 더 분화되고 확장되는 것과 관계가 있다. 그러나 의식이 더 확대되면 될 수록 의식은 더욱더 많은 차이점을 인식하고, 더욱더 집단의 규칙성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확장에 비례하여 경험적 의지의 자유는 그만큼 증가하기 때문이다.

의식의 개인적 분화가 증대됨에 따라 객관적 타당성은 감소하며, 의식의 주관적 견해는 증가한다. 그것이 반드시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주변 사람의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견해가 타당하려면 제기하는 논쟁과는 무관하게 가능한 한 다수의 찬성을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진실하고 유효한 것은 다수가 믿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모든 사람들이 동등하다는 것을 증명해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화된 의식의 경우에는 자신의 전제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맞는 것이라든지, 그 반대의 경우도 옳다는 것이 더 이상 당연하지 않다.



B. 심리학에서의 무의식의 의미

무의식의 가설은 정신 개념의 이면에 놓여 있는 커다란 의문 부호를 의미한다. 당시까지 철학적 지성에 의해 규정되고 온갖 능력을 부여받았던 심혼은 의외로 불가해한 성질을 가진 것으로 드러날 기세다. 심혼은 이제 더 이상 직접 알고 있고 알려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잘 알려진 것인 동시에 전혀 모르는 것이라는, 이중의 모습으로 이상하게 나타났다.

...심혼이 실제로 하나의 개념일 뿐이라면, 이 개념은 그 자체로 이미 교감할 수 없는 예상 불가능한 것이다. 이 개념은 그 어느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성질을 가진 존재다. 심혼이 의식이며 그 내용이라고 사람들이 오랫동안 확신해 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것이 장애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이전에는 짐작하지 못했던 배경, 즉 모든 의식 현장의 진정한 모질, 그리고 의식의 이전과 이후, 위와 아래의 발견을 촉진시킨다. 사람들이 어떤 사실에서 개념을 만드는 순간, 그들은 그 여러 측면 중의 하나를 포착하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이때 통상적으로 전체를 파악했다는 착각에 빠져든다. 전체적 파악이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자신에게 변명하는 일도 없다. 전체적이라고 규정된 개념조차도 전체적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전히 예견할 수 없는 성질들을 지닌 고유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기만은 물론 안정과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준다. 왜냐하면 미지의 것에 이름을 붙였고, 멀리 있는 것이 이제는 손에 올려놓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기 때문이다.

심리학은 다른 자연과학과 비슷한 발달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또한 우리가 앞에서 보았듯이 지금까지 심리학은 철학의 마력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모든 학문은 심혼의 기능이고, 모든 인식은 심혼에 뿌리를 둔다. 심혼은 모든 우주적 신비 가운데에서 최고의 것이며 객체로서 세계의 필수조건이다. 매우 이상한 점은, 서양 사람들은 몇 가지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사실을 그다지 평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많은 외적 인식대상 때문에 모든 인식의 주체는 점차 겉보기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뒷전으로 물러났다.

심혼은 많은 점에서 잘 알려진 것처럼 보이는 묵시적 전제다.


...인식은 의식에 밀려드는 정신체계의 반응이 형이상학적, 또는 근본적으로 실제적인 것들의 형태에 상응하는 방향으로 정리되는 데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이미 분트에 의해 제기된 바 있는 이의가 생기게된다. 즉, 무의식적 ‘감각’ ‘표상’ ‘감정’과 ‘의지행위’는, 이 현상들을 경험하는 주체 없이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에 논의될 수 없다는 것이다. 게다가 의식의 문턱이라는 표상은 에너지론적 관찰 방식을 전제로 하는데, 이에 따르면 정신적 내용에 관한 의식성은 본질적으로 그 내용의 강도, 즉 그 에너지에 달려있다. 오직 특정 강도를 지닌 자극이 의식의 문턱을 넘어설 수 있듯이, 또한 그 밖의 정신적 내용도 문턱을 넘어설 수 있는 특정 강도의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이미 립스Th. Lips가 강조했듯이, 첫 번째 이의는 다음과 같은 사실로 해결된다. 즉, 정신의 과정 그 자체는 그것이 표상되어 있든 그렇지 않든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의식 현상이 정신전체를 이루고 있다는 관점을 취하는 사람은 물론 우리가 갖고 있지 않은 ‘표상들’은 ‘표상들’이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다. 그는 또한 관념들 이외에는 모든 정신적 특성을 거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서 증거를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즉, 아직 어떤 개도 자신의 정신 내용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입 밖에 낸 일이 없지만 이성적인 인간은 개에게 정신 과정이 있음을 한번도 의심하는 일이 없다는 사실이다.



C. 정신의 해리성

무의식적 과정이 반드시 주체를 지녀야 한다고 가정할 만한 이유는 선험적으로 없으며, 마찬가지로 정신 과정의 실재성을 의심할 근거도 없다. 무의식 과정만이 의식의 체험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독립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의식 과정도 또한 느슨해지거나 분리된다는 사실을 분명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식에 등장하는 내용들은 우선 징후적symptomatisch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혹은 무엇에 근거를 두는지를 알거나 알고 있다고 믿는 한에서는 부호학적semiotisch이다. 이 부호적인 것에 대해 프로이트는 문헌에서 항상 ‘상징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사람들이 실제로 알지 못하는 것이 항상 ‘상징적’으로 표현된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 증상적 내용들은 부분적으로는 진정 상징적이며, 무의식의 상태나 과정을 간접적으로 대변한다. 이들의 성질은 의식에 나타난 내용으로는 충분히 해명되고 의식화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무의식이 그렇게 큰 에너지 활력을 갖고 있는 내용들을 내포하고 있고, 그 내용들은 다른 상황에서는 자아에 의해 인지될 수 밖에 없게 될 것이다.



...만약 무의식이 의식의 기능으로 알려져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다면, 결국에는 무의식도 의식과 마찬가지로 주체, 즉 일종의 자아를 가져야 한다는 가능성이 제기된다.

...무의식의 가설을 진지하게 고려해 볼 때 우리의 세계상이 임시적인 것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인지하고 인식하는 주체에 배가의 변화처럼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난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상이 생겨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D. 충동과 의지

프로이트에 의해 의식화된 내용들은 그것이 지닌 의식 가능성과 본래의 의식성 덕분에 가장 수월하게 재생될 수 있는 것들이다. 이것들은 무의식적 정신에 대해서 의식의 저편에 어떤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줄 뿐이다.

관찰과 경험을 통해 접근할 수 있는 심리적 과정들이 모두 어떤 식으로든 기질적 토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은, 심리적 과정들이 유기체의 총체적 삶에 편입되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유기체의 역동성, 즉 충동의 한 부분임을, 또는 특정 관점에서 보았을 때 충동 활동의 결과임을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예외없이 충동영역에서, 그리고 충동영역의 기질적 토대에서 파생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바로 그런 까닭에 심혼 그 자체는 생리적 화학현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심혼은 무생물의 본성을 지배하는 엔트로피 법칙과는 달리, ‘생명’과 더불어, 자연법칙의, 즉 통계적 질서를 ‘더 높은’, ‘비자연적’ 상태로 변환시킬 수 있는 유일한 자연 요인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알려져 있는 물리적 자연법칙으로는 도출할 수 없는 고유의 법칙성을 갖는다.

여기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된다. 즉, 우리는 언제 ‘정신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생리학적인 것’에 대립되는 ‘정신적인 것’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하는가?

정신적인 것이란 기능의 유일한 결정자로서, 기능을 하나의 기제로 경직시키는 본능의 현실과 그 강박성으로부터의 기능의 해방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신적 조건이나 성질은, 기능이 외적 내적 제약에서 벗어나 더 폭녋고 자유롭게 사용될 때, 다시 말해 기능이 다른 근원에서 동기유발된 의지에 사용되려고 할 때 시작된다.

정신영역 내에서는 기능이 의지의 영향으로부터 바뀌거나 다양하게 수정될 수 있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충동의 체계가 사실상 조화로운 구성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내적 충돌에 내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충동은 다른 충동을 방해하고 억압하는데,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비록 충동이 개인의 존재를 가능하게는 하지만 그 맹목적인 강박적 성향이 종종 상호간의 간섭의 계기가 된다. 강박적인 충동성으로부터 자의적인 사용으로 나아가는 기능의 분화는 존재를 유지해나가는데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

정신영역 내에서는, 우리가 앞에서도 보았듯이 의지가 기능에 영향을 준다. 의지가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은 의지 자체가 다른 에너지 형태를 압도하거나 적어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에너지 형태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내가 정신적인 것이라고 정의하는 이 영역에서 의지는 궁극적으로는 본능에 의해 동기유발이 된다. 그러나 물론 절대적으로 그렇다고 할 수는 없는데, 왜냐하면 절대적이라면 정의상 특정한 선택의 자유가 수반되는 의지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의지는 의식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제한된 에너지 양을 의미한다.

의지는 정신영역의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다. 의지는 본능을 강제할 수 없고, 정신을 지배할 수 없다. 정신을 지능이라고만 이애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정신과 본능은 그 성질상 자율적이며, 두 가지 모두 의지의 적용 영역을 같은 방식으로 제한한다.

내가 고유한 정신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의지에 영향을 받는 모든 기능에까지 이른다. 순수한 충동성은 어떤 의식성이 있다고 생각할 수 없으며, 또한 그런 것을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의지는 경험적 선택의 자유 때문에 기능을 수정하기 위해서 그 자체의 의식성과 같은 더 상위의 심급을 필요로 한다. 의지는 기능의 목표와는 다른 목표를 ‘알아야’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의지는 충동력과 마찬가지 될 것이다. 드리쉬Driesch가 “아는 것 없이는 원하는 것도 없다”라고 지적한 것은 당연하다. 자의(自意)는 다양한 가능성을 직시하는, 선택하는 주체를 전제로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정신Psyche은 본질적으로 맹목적 충동과 의지, 혹은 선택의 자유간의 갈등이다. 충동이 우세하면 의식 불가능한 요소로서의 무의식의 영역에 속하는 정신양 과정이 시작된다. 이에 반해서 정신양 과정이 곧 무의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무의식은 현저하게 더 확장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에는 정신양 과정 외에도 관념이나 자의적 행위, 그러나까 의식 과정 같은 것들이 있다.



E. 의식과 무의식

무의식은 단지 알려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편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신적인 것, 즉 의식이 되었을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정신적 내용과 구별되지 않는다고 전제하는 모든 것을 말한다.

...무의식은 의식과는 다른 매개체이다. 의식에 가까운 영역에서는 별로 달라지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여기에서는 명암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식도 마찬가지로 상대적이다. 왜냐하면 의식의 경계 안에는 의식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의 모든 등급이 강도에 따라 있기 때문이다.



F. 행동 양식과 원형

의식의 내용은 의식적이자 동시에 무의식적이기 때문이다. 즉, 어느 면에서는 의식적이며 다른 면에서는 무의식적이다. 의식은 여기에 있고 무의식은 저기에 있다는 식으로 그 한계가 분명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히려 정신은 의식적․무의식적 전체성을 표현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에서 태고의 잔재들과 원시적인 기능 양식을 확인했다. 그후의 연구들은 이것을 증명하였으며 풍부하고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공해주었다. 신체구조와 관련해 볼 때 발달사에서 분명한 흔적을 보여주지 않는 유일한 생물학적 현상이 정신이라면 놀랄 만한 일일 것이다. 또한 이러한 태고의 특성들이 바로 본능의 토대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것은 전적으로 있을 수 있는 사실이다. 충동과 태고의 양식은 행동유형pattern of bahavior이라는 생물학적 개념 속에서 일치된다. 즉, 형체없는 충동은 없으며 모든 충동은 각기 그 상황에 맞는 형상을 갖고 있다. 충동은 항상 확정된 성질을 갖고 있는 상을 충족시킨다. 나뭇잎을 자르는 개미의 충동은 개미, 나무, 나뭇잎, 자르기, 나르기와 버섯농원의 상 속에서 이루어진다. 위의 확정된 것들 중에서 한가지만 부족해도 충동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충동은 그 전체의 형상, 그 자신의 상 없이는 전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상은 선험적 성질의 전형이다. 이것은 개미의 모든 활동 이전에 개마가 타고난 것이다. 왜냐하면 활동은 그에 어울리게 형성된 충동이 그 활동의 계기와 가능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식은 모든 충동에 해당되고 같은 종의 모든 개체에게 동일한 형태로 존재한다. 인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인간은 그가 본능적으로 기능하는 한 그 활동의 동기와 본보기를 만들어내는 본능 유형을 갖고 있다.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은 특수하게 인간적으로 행동하고 자신의 행동 유형을 실현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가능성은 매우 제한되어 있고, 인간이 더욱 원시적일수록, 그의 의식이 본능영역에서 더 많이 좌우될수록 그 제약은 더 심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으로 이러한 유형의 생물학적, 심리학적 의미가 올바르게 평가된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잔존물이거나 이전의 기능 방식의 잔재가 아니라, 항상 존재하는, 생물학적으로 절대 필요로 하는 충동영역의 조절장치이기 때문이다. 그 충동영역의 작용은 모든 정신영역에 걸쳐 확대되며, 그 작용이 의지의 상대적인 자유에 의해 제약될 때 비로소 그 절대성을 상실한다. 상(像)은 충동의 의미를 나타낸다.



...이 사실들은 무의식적 조절자에 의해 유도된 현상과, 전통이나 민속학적 연구에 의해 알려진 인간 정신활동의 기념비적 사실들과 일치를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전 과정에 걸쳐 조형뿐만 아니라 그 의미에 대한 은밀한 선지식(先知識)이 개제되어 있는 것 같다. 상과 의미는 동일하며, 상이 만들어지면 의미가 분명해진다. 형상은 원래 해석을 요하지 않는 것으로 그 고유의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 개념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러한 특별한 작업은 시대를 초월해 항상 존재하는, 그리고 조작적인 원형을 그때 그때 시대에 걸맞는 학술적 언어로 옮기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이러한 경험과 고찰을 통해,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무의식적 조건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들은 창조적 환상활동의 조절자로서 그리고 자극자로서 작용하며, 이에 상응하는 형상들을 만들어내는데 이들은 주어진 의식 자료들을 그들의 목적에 맞게 이바지 하도록한다. 이와 같은 무의식적 조절자의 존재가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나의 이른바 비개인적, 집단적 무의식의 가설을 세우는 근거로 삼았다. 이 방법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상으로의 환원이 아니라 의도적 태도에 의해서 다만 뒷받침이 되었을 뿐이며 그 외에는 수동적 의식 재료와 무의식적 영향과의 자연스러운 합성, 즉 일종의 원형의 자발적인 확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원형의 출현은 ‘마법적’이라고 할 수는 없어도 ‘정신적geistig'이라고 표현 할만한, 두드러진 누미노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본능과의 이러한 친족성(親族性)에도 불구하고, 혹은 오히려 이 친족성 때문에 원형은 정신 Geist의 고유한 요소를 표현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정신은 인간의 오성(悟性)과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오성을 이끄는 혼을 표현하는 것이다. 모든 신화와 종교, 그리고 무슨무슨 주의의 본질적 내용은 원형적 성질의 것이다. 원형은 정신이거나 비정신이며, 원형이 결국 무엇으로 자신을 드러낼지는 대개 인간 의식이 어떤 관점을 취하느냐에 달렸다. 원형과 본능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큰 대극(對極)을 이루고 있다. 서로 상응하는 것으로서 둘은 함께 속하지만, 하나가 다른 하나로부터 도출되는 식이 아니라, 정신적 에너지 설이 그 근간이 되고 있는 대극으로부터 우리가 만든 표상으로서 나란히 존재한다. 인간은 적어도 어떤 것이 되도록 추진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어떤 것을 상상하는 자로서 존재한다. 이러한 대극은 근본적으로 도덕적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충동 그 자체는 나쁘고, 정신은 근본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신 과정은 의식이 따라가는 계기(計器)의 눈금처럼 해동한다. 때로는 충동 과정 근처에 있으면서 그 영향에 빠지고, 때로는 정신이 우세하며 심지어 그에 반대되는 충동 과정을 동화시키는 다른 한쪽 끝에 접근하기도 한다. 착각을 일으키는 이와 같은 대립적인 위치는 결코 이상한 현상이 아니라, 오늘날의 정상적인 인간에게서 전형적으로 볼 수 있는 정신의 일방성을 만들어 낸다.



...원형의 감정적 가치를 간과한다면 이것은 용서받지 못할 태만죄일 것이다. 원형의 감정적 가치는 실제적으로, 또한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원형은 신성한(누미노제적인) 요소로, 예지(豫知)나 중심잡기의 과정으로 표현되는 목표의 선험적 소유로서, 형상화의 방법과 진행을 규정한다.

...의식은 적합하게 조종된 적응 능력, 즉 충동 억제를 가능하게 하며,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은 의식 능력을 지님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된 것이다.



...원형은 충동의 형식원리.. 원형으로부터 충동을 유도해낼 수 있듯이, 더 높은 주파수 영역에서의 추동의 복원을 의미할 수도 있다.

무의식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원형적 표상과 원형 그 자체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원형적 표상은 스스로는 보이지 않는 기본형식을 가리키고 있는, 다양하게 변용된 형상들이다. 이 보이지 않는 기본 형식은 특정한 형식 요소들과 특정한 본질적인 의미를 통해 두각을 나타내지만 이것을 완전히 알 수는 없고 그저 대략적으로만 파악할 뿐이다. 원형 그 자체는 정신양(정신 비슷한)요소로서, 정신적 스팩트럼의 불가시적인 자외선 부분에 해당된다. 그러한 것으로서의 원형은 의식 불가능한 것인 듯하다.





-  2. 집단적 무의식의 원형에 관하여 -



어느 정도 표면에 있는 무의식 층은 명백히 개인적이다. 우리는 그것을 개인적 무의식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개인적 무의식은 개인의 경험이나 습득에 의하지 않고 태어날 때부터 있는 더 깊은 층의 토대 위에 있다. 이 더 깊은 층이 소위 집단적 무의식이다. 나는 ‘집단적’이란 표현을 선택했는데, 그 이유는 이 무의식이 개인적이 아닌 보편적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개인적 정신과는 달리 모든 개인에게 어디서나 똑같은 내용과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적 존재는 오직 의식될 수 있는 내용이 있음으로 해서 인식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용을 증명할 수 있는 한에서만 무의식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개인적 무의식의 내용은 주로 이른바 정감이 강조된 콤플렉스인데, 이것은 정신생활 가운데에서 개인적으로 친숙한 내용들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와는 반대로 집단적 무의식의 내용은 소위 원형이다.

...잘 알려진 원형의 다른 표현은 신화나 민담이다. 그러나 이것들도 오랜 시간에 걸쳐 굳어진 특정한 형태들이다. ‘원형’이란 개념은 아직 의식의 가공(加工)을 받지 않은, 또는 그렇기 때문에 직접적인 정신의 소여성(所與性)을 나타내는 정신의 내용만을 표시한다는 점에서 ‘집단표상’에는 그저 간접적으로 상응할 뿐이다. 그러한 것으로서 원형은 역사적인 것이 되어버렸거나 역사적으로 부각된 공식과는 적지 않게 다르다. 이와는 반대로 꿈이나 환상에서 우리가 보는 것과 같은, 원형의 직접적인 출현은 예를 들어 신화의 경우보다 훨씬 더 개인적이며 이해하기 어렵거나 소박하다. 원형은 본질적으로 무의식의 내용을 나타내며 그것이 의식화되고 지각됨으로써 변하는 것이다. 즉 원형은 나타나는 그때그때의 개인의 의식에 맞추어 변한다.

‘원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방금 제시한 원형과 신화, 비의, 민담과의 관계를 통해서 분명해졌을 것이다. 원시인들에게는 명백한 일을 객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반면에 그는 모든 외부의 감각 경험을 정신적으로 일어난 것과 동화시키고자 하는 어쩔 수 없는 요청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무의식적 심혼이 그렇게 하고자 하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시인은 태양이 떠오르고 지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이 외부적 관찰은 동시에 정신적 사건이 되어야 한다. 즉 태양은 그 변환을 통해 근본적으로는 바로 인간의 심혼 속에 살고 있는 어떤 신이나 영웅의 숙명을 묘사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름과 겨울, 달의 변화, 장마철 등과 같은 모든 신화화된 자연 과정들은 이러한 객관적 경험의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심혼의 내면적이고 무의식적 드라마에 대한 싱징적인 표현이다. 투사되는 동안에, 즉 자연 사건에 반영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의식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원시인은 매우 인상 깊은 주관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신화와 심혼적인 것을 연관시킬 생각을 했음에 틀림없다. 원시인의 자연 인식이란 근본적으로 무의식의 심적 과정의 언어이며 겉옷과 같은 것이다. 심적 과정이 무의식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사람들이 신화를 설명할 때 심혼을 제쳐두고 그밖의 다른 것들만 생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일찍이 심혼 속에 신화를 생성시킨 저 모든 상들이 들어있다는 사실과, 또한 우리의 무의식이 행동하며 변화를 견디어내는 주체이며 원시인은 이 무의식의 드라마를 모든 크고 작은 자연의 과정에서 유추하여 재발견한다는 사실을 도무지 알지 못했던 것이다.


[문화] 분석심리학 대가 이부영 교수가 본 ‘한국인’

 
         


사진설명 : 97년 정년퇴임 후 한국융연구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이부영 서울대 명예교수./ (이기룡기자)krlee@chosun.com*)

이부영(67) 서울대 명예교수는 국내 분석심리학의 대가다. 33년전 스위스 융 연구소에서 융 학파 '분석가 자격'을 취득하고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장을 역임하며 이론과 임상 양 부문에서 탄탄한 실력을 쌓았다. 2년전 정년퇴임하고 성북동 한국융연구원에서 후학들을 지도하는 이 교수가 최근 '그림자-마음속의 어두운 반려자' (한길사)를 내놓았다. 융심리학를 통해 한국인의 마음을 분석하려는 3부작 중 첫째권. 앞으로 '아니마와 아니무스', '자기와 자기실현' 등 1년씩 펴낸다는 야심있는 기획이다. "책 제목이 다소 생소할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면, 우리 무속을 들여다보세요. 무당은 유교의 그림자 노릇을 했어요. 점잖은 선비들은 무당을 싫어했는데 무당은 바로 선비들의 무의식속에 자리잡은 비합리성과 자유분방성이라는 그림자를 투사한 존재였죠. 그림자란 이렇게 자아에 숨겨진 어둡고 활성화되지 못한 억압 혹은 컴플렉스를 말합니다."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인간의 집단무의식에 대한 분석심리학을 제창한 거목. 융 전문가에 읽힌 한국인의 심성은 어떤 것일까. 이 교수는 내향성과 외향성 개념을 이용해 설명했다. "압축적 성장을 하느라 우리 마음에 이상이 생겼어요. 너무 외향적으로 변해버렸습니다. 내향적 전통을 가진 동양이 서구를 따라가려고 흉내를 내다가 오히려 서양인보다 외향적으로 바뀐 것이죠. 동양이 '서양'이라는 그림자의 세례를 받은 셈입니다." 대표적인 것으로 외화내빈을 들었다. 밖으로 보이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고층건물이나 대형 경기장 등 대형-대량에 대한 숭배주의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실질이나 내용을 외면한 결과 삼풍아파트가 무너지고 IMF를 맞았다는 진단이다. " 5·16 이후 이런 경향이 강해졌어요. 조급히 서두르는 '빨리빨리 병', 상대방 장점을 인정하지 않고 업적을 깎아내리는 '너죽고 나죽자 병', 지역과 동문끼리 뭉치는 '끼리끼리 병', 매사에 양극단을 가지고 팽팽히 대립하는 '흑백판단증'등이죠." 빨리 근대화를 해야했기 때문에 수량과 생산성을 강조해야 했던 상황은 인정하지만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렸다고 부연한다. 전략 전술만 알뿐 무엇이 옳고 그른지 철학의 부재를 초래했다고 말한다. 이런 심성의 왜곡은 시대나 제도의 탓이 아닐까? "아닙니다. 제도는 개성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게 해주는 조건에 불과해요. 헤엄칠수 있는 공간이 제도라면 헤엄을 잘 치느냐 못치느냐는 개인의 몫입니다. 모든 것을 상황 탓이라고 돌리는 것은 잘못이죠." 따라서 사회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애를 써야한다는 것으로 들렸다. 그는 우리 사회의 집단무의식에 대해서도 메스를 들이댔다. "개인적인 무의식과 달리 집단 무의식이 투사되면 강력한 힘으로 초인적 대상을 절대적으로 숭배하거나 증오하는 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영웅신화를 재현한다고 할까요. 김일성을 우상화하는 북한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이것이 돈이나 물질에 대한 숭배로 나타나고 있어요." 21세기를 앞둔 한국인들의 정신적 준비에 대해서는 "세계화니 뭐니해서 엄벙덤벙 남의 것만을 쫓아다니다가는 또 망한다"고 말했다. 개성에 바탕한 한사람 한사람의 자기실현이 중요하고, 이를 위해 생각하는 사람들의 작은 모임이 늘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준호기자 : juno@chosun.com)
▲한국융연구원: 융 심리학의 교육기관으로, 매주 화요일 세미나를 통해 신경전문의들을 수련시키고 있다. 국내에 있는 '국제 분석심리학회' 정회원은 5명. 1천여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는 한국분석심리학회는 1년 2회 학술 토론회를 열고 있다.


 
 
     융의 이론 풍부한 예증 제시 '아니마와 아니무스'

◇ '아니마와 아니무스'/ 이부영 지음/ 365쪽 1민2000원 한길사
  하녀와 바람을 피우기도 했던 데카르트는 정액을 식물의 수액 같은 것으로 이해했지만 그렇다고 정액이 생명체의 기원에 관계된 물질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궁극적 관심이 생명체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에 있었던 그에게 정액이란 (영혼이라는 말 이외에 달리 적절한 단어가 없는)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의 기원을 의심하게 하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카톨릭 교도였던 프로이트였지만 그는 영혼의 문제를 피해갔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하나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것을 해석해야만 했던 그는 시간이 없었을 것이다. 데카르트와 프로이트는 ‘나는 내가 없는 곳에서 생각한다’는 라캉에게 와서 초월적이자 지극히 물리적이기도 한 언어의 문제와 조우한다. 융은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었을까? 인간 복제가 시간 문제인 오늘날, 영혼의 문제는 더욱 더 비장한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융은 남자 속의 여자를 아니마로, 여자 속의 남자를 아니무스로 부른다.이부영 박사(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책에서 많은 예들을 통해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이론을 쉽게 풀어 설명하고 있다. 이 박사는 “인간의 정신을 이미 알려진 뇌기능의 결과에 불과하다고 보는 심리학에서 혼을 찾기는 어렵다. 무의식은 주로 의식에서 억압된 충동으로 이루어진다고 보는 정신분석적 관점으로도 혼의 향방은 묘연하다”고 말한다.   반 프로이트주의자인 융의 이론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남성 여성의 차이가 사회적인 것도 생리적인 것도 아닌 ‘원형’적인 어떤 것으로부터 집단 무의식을 통해 끊임없이 변전된다고 보는 융의 이론이 지닌 독특한 매력은 ‘처음’과 ‘전체’를 해석하겠다는 종교적 열정과 야망에서 나온다.   수많은 신화와 예술가들도 이 욕망과 욕망 너머의 진실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아마도 20세기 내내 가장 많이 운위되었던 인문 사회학 용어들 중의 하나일 이 ‘원형’의 원형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에 대해서는 융조차 답을 아끼고 있다.   정장진(문학평론가)         


서울=연합뉴스) 강영두 기자 = 이부영(李符永) 한국융연구원장이 '분석심리학탐구 3부작'을 완간했다.

 

이 원장은 1997년 서울대 의대 신경정신과 교수를 정년퇴임한 후 분석심리학자카를 구스타프 융(1875-1961) 연구에만 매진, 「그림자」(1999년), 「아니마와 아니무스」(2001년)를 펴낸 데 이어 최근 「자기와 자기실현」(이상 한길사刊)을 출간하며 3부작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원장은 66년 스위스 취리히에 있는 융연구소를 수료하고 국제분석심리학회정회원으로 활동하는 등 국내 최고의 융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그동안 「정신요법의 기본문제」「원형과 무의식」등 융의 기본저작을 우리말로 소개했고, 다수의정신분석서를 펴냈다.

그는 이미 출간된 이 시리즈의 1,2부인 「그림자」와 「아니마와 아니무스」에서 무의식의 의식화 과정에서 반드시 부딪쳐야 하는 문제들을 두루 살폈다. 자아,페르조나, 의식, 무의식, 그림자, 아니마, 아니무스, 콤플렉스 등은 진정한 '자기'에 이르는 길목에서 만난 무의식의 요소들이었다.

이번에 나온 3부 「자기와 자기실현」에서 그는 심리학 현상의 긴 터널을 지나하나의 종착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자기실현'과 '전체정신'이 화두다.

분석심리학에서는 자아실현이라는 말이 없다고 한다. 자아는 '알고 있는 정신세계', 즉 의식계의 주인이므로 '실현'이라는 말은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실현하는 것은 자아(ego)가 아니고 자기(self)가 된다. 자아는 의식의 중심이지만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정신(전체인격)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기실현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융은 인간이 인격의 성숙을위해 자기실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원하든 원치 않든 개인의 삶이 그것을 요구할 뿐이며, 엄숙한 것도 심각한 것도 아니고 군자나 초인이 되라는요구도 아니라고 한다. 바로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라고 본다.

이 원장은 '전체인격'이란 그 사람이 무의식을 의식화해나감으로써 서서히 드러나는 것이며, 끝없이 넓고 깊은 무의식을 남김없이 의식화할 수도 없다고 말한다.

다만 부단히 전체인격에 가까워지고자 노력할 뿐이라고 한다.

그는 자기실현의 과정을 우리의 다양한 전통 종교와 문화로 풀어내고 있다. 선불교의 수행과정을 가르치기 위해 만든 '십우도(十牛圖)'에서 자기실현 과정을 살피고,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음 속 '그림자' 문제의 인식과정을 전개한다. 또 유학사상도 대상으로 삼아 "퇴계의 「천명신도」는 퇴계의 만다라, 퇴계가 보는 인간정신의 전체성"이라고 말한다.

진정한 자기실현을 통해 온전한 삶으로 거듭나길 권고하는 그는 자기실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자기실현은 삶의 본연의 목표이며 값진 열매와도 같다. 자연은값진 열매를 헐값에 내주지 않으므로 이 과정은 당연히 갈등과 방황이라는 고통스러운 시련을 수반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성장과 성숙을 위한 고통과 시련을 마다한다면 통찰의 희열도 맛보지 못할 것이다" 356쪽. 1만5천원.

자료출처 http://m.cafe.daum.net/bulkot/IP2l/8?listURI=%2Fbulkot%2FIP2l%3Fprev_page%3D2%26noticeYn%3D%26firstbbsdepth%3D0001ozzzzzzzzzzzzzzzzzzzzzzzzz%26lastbbsdepth%3D0000gzzzzzzzzzzzzzzzzzzzzzzzzz%26page%3D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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