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으로 성경 읽기_대상의 그림자와 대상"의 위험성
"정신분석으로 성경 읽기_대상의 그림자와 대상"의 위험성

정신분석으로 성경을 난도질하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 왔지만,
계몽주의 사조 이래로 심리학은 더욱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아래 기사는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인용 자료 시작 ------------------------------------
정신분석으로 성경 읽기
대상의 그림자와 대상(눅 15:1~7)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220
데스크 승인 2011.03.18 10:36:48 박성만 (gana049)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유대 지역의 가파르고 험한 지역에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있다. 그가 양을 계수해 보니 한 마리가 부족하였다. 그는 99마리의 양을 위험에 방치하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이 골 저 골을 헤집고 다닌다.
목자에게 양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원리만 작용해야 하고 그것은 목자의 능력과 관계된 일이다. 만일 당신이 목자라면 그 한 마리의 경제적 이윤을 위하여 99마리의 손실을 각오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 비유는 논리적 사고를 가지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조차도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되는 것이 경제적, 도덕적, 종교적 원리에서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목자로 하여금 들판을 헤매게 하였을까? 99마리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험을 단행한 것일까. 이러한 동화적 해석이 사람들의 믿음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소위 '은혜 받았다'는 내적 충족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 비유를 실천에 옮기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성장해 있고 세상은 그러한 동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해석을 따라가 보는 것은 환상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내려놓는 것이 될 수 있다.
목자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자. 목자가 되고 싶어서 목자가 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유대 신분 사회에서 가문도, 경제적 지위도, 학문적 성취도 없다 보니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목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목자에게 양은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적 소득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즉 대상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드리워진 경제적 표상만 가치를 가질 뿐이다.
대상의 표상은 아직 인격화 이전의 단계이며, 이를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볼라스는 '대상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무수한 대상의 그림자는 인격화된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100마리의 양들은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만일 자아의 리비도가 대상의 그림자에 투여된다면 그는 누구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형식적인 관계로 도피하게 된다.
정신 분열증 환자나 분열성 성격 장애자들은 종종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자신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꿈을 꾼다. 무의식에 내면화된 대상의 그림자들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지만 어느 하나도 내 사람은 없다. 그의 인간관계 방식도 대상의 그림자를 현실의 대상에게 투사하는 방식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의 속내는 대상보다는 대상이 주는 욕구 충족에 있게 마련이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위험을 감수하는 여행을 한다. 정신분석적으로는 무의식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그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표상으로만 머물러 있던 대상의 그림자가 대상 자체의 의미를 회복하고 대상이 된 것이다. 즉 무의식에 있던 대상의 그림자가 의미 있는 대상으로 인격화된 것이다.
인격화된 대상은 곧 인격화된 자기의 일부로서 외부 대상에 투사하여 친숙한 관계를 재향한다. 이것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한판 놀이'의 행위로 나타났으며, 이는 자기실현이며 치유이고, 의미 있는 관계의 구현이며 창조성의 영역이다. 예수님은 되찾은 한 마리의 양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결시키는데, 이는 소외된 대상의 그림자가 한판 놀이의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변형되는 분석적 통찰과 맥을 같이한다.
본 비유가 논리적으로는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대인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대상의 그림자에서 대상으로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박성만 / 목사. 가나심리치료연구소장 www.gana6.com
------------------------------------ 인용 자료 끝 ------------------------------------
성경의 구속사적인 이해 없이,
심리학으로 성경의 비유를 해석하니 그것은 그저 무의식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목자와 양을 "인간 내면에 있는 무수한 대상의 그림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으로 그렇게 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싫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이 인간을 주도해 간다고 보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과는 완전히 충돌이 됩니다.
그런데도 신학교에서 교회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고 상담으로 영혼을 돌본다고 하니
그런 신학교와 그런 교회는 과연 기독교 안에 있는 신학교이고 교회 일까요?
세상의 악하고 썩은 물인 심리학은 결코 성경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http://www.esesang91.com
http://twtkr.com/rptministries
http://www.facebook.com/RPTministries

정신분석으로 성경을 난도질하는 시도는 언제나 있어 왔지만,
계몽주의 사조 이래로 심리학은 더욱 심각하고 위험합니다.
아래 기사는 그런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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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으로 성경 읽기
대상의 그림자와 대상(눅 15:1~7)
http://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4220
데스크 승인 2011.03.18 10:36:48 박성만 (gana049)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유대 지역의 가파르고 험한 지역에 100마리의 양을 치는 목자가 있다. 그가 양을 계수해 보니 한 마리가 부족하였다. 그는 99마리의 양을 위험에 방치하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이 골 저 골을 헤집고 다닌다.
목자에게 양은 생계를 위한 수단일 뿐이다. 거기에는 경제적인 원리만 작용해야 하고 그것은 목자의 능력과 관계된 일이다. 만일 당신이 목자라면 그 한 마리의 경제적 이윤을 위하여 99마리의 손실을 각오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 비유는 논리적 사고를 가지는 초등학교 저학년 학생들에게조차도 의구심을 가지게 한다. 다수를 위해서 소수가 희생되는 것이 경제적, 도덕적, 종교적 원리에서 타당한 것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목자로 하여금 들판을 헤매게 하였을까? 99마리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모험을 단행한 것일까. 이러한 동화적 해석이 사람들의 믿음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소위 '은혜 받았다'는 내적 충족감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본 비유를 실천에 옮기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성장해 있고 세상은 그러한 동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해석을 따라가 보는 것은 환상 안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보다 구체적인 삶의 현장으로 내려놓는 것이 될 수 있다.
목자라는 직업을 생각해 보자. 목자가 되고 싶어서 목자가 된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유대 신분 사회에서 가문도, 경제적 지위도, 학문적 성취도 없다 보니까 누구나가 할 수 있는 목자라는 직업을 가지게 된 것이다. 목자에게 양은 관계의 대상이 아니라 경제적 소득을 가져다주는 수단으로서의 대상일 뿐이다. 즉 대상 자체가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 대상에 드리워진 경제적 표상만 가치를 가질 뿐이다.
대상의 표상은 아직 인격화 이전의 단계이며, 이를 심리학자 크리스토퍼 볼라스는 '대상의 그림자'라고 하였다.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무수한 대상의 그림자는 인격화된 대상이 되기를 원한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100마리의 양들은 우리 내면 안에 있는 대상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만일 자아의 리비도가 대상의 그림자에 투여된다면 그는 누구하고도 친밀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형식적인 관계로 도피하게 된다.
정신 분열증 환자나 분열성 성격 장애자들은 종종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자신이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꿈을 꾼다. 무의식에 내면화된 대상의 그림자들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지만 어느 하나도 내 사람은 없다. 그의 인간관계 방식도 대상의 그림자를 현실의 대상에게 투사하는 방식을 택하게 마련이다. 그의 속내는 대상보다는 대상이 주는 욕구 충족에 있게 마련이다.
목자가 한 마리의 양을 찾아 위험을 감수하는 여행을 한다. 정신분석적으로는 무의식의 여행이라 할 수 있다. 목자는 한 마리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그 찾은 기쁨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표상으로만 머물러 있던 대상의 그림자가 대상 자체의 의미를 회복하고 대상이 된 것이다. 즉 무의식에 있던 대상의 그림자가 의미 있는 대상으로 인격화된 것이다.
인격화된 대상은 곧 인격화된 자기의 일부로서 외부 대상에 투사하여 친숙한 관계를 재향한다. 이것이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것은 '한판 놀이'의 행위로 나타났으며, 이는 자기실현이며 치유이고, 의미 있는 관계의 구현이며 창조성의 영역이다. 예수님은 되찾은 한 마리의 양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결시키는데, 이는 소외된 대상의 그림자가 한판 놀이의 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변형되는 분석적 통찰과 맥을 같이한다.
본 비유가 논리적으로는 현대사회에 맞지 않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현대인에게 감동을 주는 이유가 자명해진다. 대상의 그림자에서 대상으로 의미를 부여받고 싶은 무의식적 욕구를 실현시켜 주기 때문이다.
박성만 / 목사. 가나심리치료연구소장 www.gana6.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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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구속사적인 이해 없이,
심리학으로 성경의 비유를 해석하니 그것은 그저 무의식의 투사에 불과합니다.
성경은 목자와 양을 "인간 내면에 있는 무수한 대상의 그림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신분석학으로 그렇게 보는 이유는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 있다는 그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싫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무의식이 인간을 주도해 간다고 보기 때문에,
성경의 하나님과는 완전히 충돌이 됩니다.
그런데도 신학교에서 교회에서 심리학을 가르치고 상담으로 영혼을 돌본다고 하니
그런 신학교와 그런 교회는 과연 기독교 안에 있는 신학교이고 교회 일까요?
세상의 악하고 썩은 물인 심리학은 결코 성경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버려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 이유는 살리는 것이 아니고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RPTministries 정태홍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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