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분석으로 읽는 성경"의 위험성
"정신분석으로 읽는 성경"의 위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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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으로 읽는 성경
마마보이 야곱의 성장사 - 오이디푸스콤플렉스
데스크 승인 2012.07.05 08:03:01 박성만 (gana049) 기자에게 메일보내기
오이디푸스콤플렉스 타협
당신은 왕의 남자다(창 28:16~22)
야곱은 이렇게 서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고,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고, 제가 안전하게 저의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시면, 주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모든 것에서 열의 하나를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
당당한 사람이 부러웠다
나는 당당한 사람을 부러워하였다. 정말 부러워하였다. 내가 당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당해야 할 때조차도 겸손이란 덕목으로 슬그머니 뒤로 뺀다. 겸손한 사람이 되어 교만한 세상을 손가락질하여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 되려 했다. 그렇게 겸손을 떨고 나서는 패자가 된 것 같다. 오히려 교만하도록 당당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럽다. 30년 전, 당당하게 사는 비법을 건질까 하여 로버트 슐러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읽었다. 당시 베스트셀러 더미에 오른 이시형 박사의 <배짱으로 삽시다>를 탐독한 적도 있다. 그래도 한국인의 아픈 심성을 잘 아는 저자였기에 공감할 점이 많았다.
당당함을 생각할 때마다 잔뜩 위축된 유년기 경험이 떠오른다. 그때 아버지를 몹시 무서워하였다. 그분의 힘에 압도되어 나는 한없이 작아 보였다. 엄마 찾아 징징거린다고 언성을 높이시면 나는 공포에 질렸다. 아버지는 나와 엄마 사이를 갈라놓고 내가 엄마 곁으로 가는 것을 방해하는 무서운 박해자처럼 보였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오이디푸스 거세 불안이라 하였다. 아동은 거세 불안의 고통스러운 짐을 "아버지! 말 잘 들을 테니 절 좀 어여삐 봐 주세요"로 바꾸어 타협을 시도한다. 타협의 성공 여부는 아버지가 친밀한 대상으로 다가오느냐에 달렸다. 우리 시대에 친구같이 다정한 아버지는 드물었다. 또 대다수 아버지는 그런 부성은 자식들 버릇을 잘못 들인다며 멀리하였다. 사회적으로 정당화된 무서운 아버지 이미지를 내면화하면서 성장하였으니 당당한 척 알아서 기는 사람은 많아도 정말 당당한 사람은 드물다.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하나님에 대한 감정으로
프로이트는 종교를 오이디푸스 갈등의 파생물로 보았다. 아버지를 달래어 용서를 받아내려는 아동의 욕구가 하나님께 전이된 것이라 한다. 종교를 하나의 현상으로 연구하면 매우 타당한 측면이 있지만 경건한 사람에겐 아주 고약한 말이다. 감히 심리학 따위가 하나님을 재단하고 천하보다 귀한 내 신앙을 침범하려 하다니. 내 강의실에서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을 무조건 거부하는 목회자가 좀 된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점은 단 한 권의 프로이트 2차 자료도 정독해 보지 않은 용감한 사람들이다. 편견은 역시 무지에서 나온다. 그 편견과 무지는 대단히 선동적이고 정치적인 힘을 가진다.
유대교를 깊이 연구한 프로이트는 야곱의 서원을 읽었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 야곱의 서원은 프로이트의 낚시에 딱 걸린 월척이다. 오이디푸스 갈등의 산물로서 종교를 이처럼 잘 표현한 다른 성경 구절이 있을까 싶다.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이곳에서도 하나님 계심을 알고 매우 두려워한다. 배신을 때린 아버지와 물리적으로는 떨어져 있지만, 야단치고 벌을 주는 아버지 상은 심리적으로 항존(恒存)하여 여기까지 따라 왔다. 당연히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두려운 분이시다. 이 대목에서 프로이트는 그의 진료대를 주먹으로 쳤을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보복이 두려운 거세 불안이다." 즉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으로 전이된 것이다. 인간의 신에 대한 감정은 바로 유년기 아버지 감정과 연결된다. 야곱이 사는 길은 아버지를 달래 두려움을 벗겨내야 한다.
야곱은 하룻밤 베고 잔 돌을 세워 기름을 붓고 서원한다. 우뚝 솟은 돌에 기름을 바르는 것은 전형적인 성교 상징이다. 샤먼에서부터 고등 종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적인 상징들, 특히 신비의 정점에 갈수록 성적 상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성적 이미지는 그 이상의 강력한 힘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 돌은 아버지의 성기를 상징한다. 기름을 바르는 행위는 엄마에 대한 아버지의 성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 돌 앞에서의 서원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며 노여움을 달래는 것이다. "아버지 저를 처벌하지 마세요. 어머니를 차지하려는 못된 생각을 버리고 아버지의 권위를 인정하겠습니다." 이런 것이다. 그에 대한 물증으로 아버지에 대한 충성-아버지의 집이 전이된 하나님의 집(베델)을 성소로 하는 것-과, 십일조를 서원하였다. 엄마가 아닌 일을 선택하여 당당히 어른의 길을 가겠다며 아버지를 달랜다.
그리고 그가 받아내려는 것은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창 28:21)", 어른이 될 때까지 인도와 보호, 의식주의 보장이다. 비록 하나님을 대상으로 하는 신앙의 서원이지만, 정신분석적으로는 어머니 품에 있던 남아가 아버지와의 갈등을 해결하고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미는 발달적 행위이다. 젖꼭지 신앙에서 이마 찡그리며 딱딱한 밥을 씹는 신앙으로의 전환이다. 야곱은 미해결 발달 과제를 신앙 안으로 가지고 와서 해결하는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프로이트는 신경증적인 신앙을 분석하면서 신앙을 유아기로 퇴행이라 하였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신앙의 유형이 있기는 하지만, 야곱의 경우는 심리적 발달과 영적 발달이 함께 진행되고 있었다.
당신은 왕의 남자
한 고개 넘었다 해도 성인의 삶은 흰 이 드러내고 덮치는 파도와 싸움이다. 영화, '왕의 남자'는 중년 남성이 보고 또 보아 1000만 관객을 돌파하였다. 왕은커녕, 직장 상사하고도 한 판 놀지 못하고 기죽어 사는 이 땅 보통 남자들의 거세불안 한(恨)이 스크린에서나마 왕과 한판 붙는 광대가 되어 해소되었으니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
나는 당당한 남성의 기세에 당당치 않은 아픔을 많이 보았다. 부모 품에서 당당한 것보다 부모를 떠나 거친 세상에서 겪는 당당치 못함이 더 멋지다. 사내대장부는 어딜 가도 당당해야 한다며 당당함의 신경증에 걸린 이 땅 남성들이 많다. 항상 당당한 사람은 언젠가는 크게 부러진다. 당당치 않을 때가 있더라도 그것이 세상이려니 하고 자신을 사랑하고 사는 것이 인생이다.
당신은 왕의 남자이다. 왕의 당당함과 광대의 당당치 못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당당함의 요구로 무시된 당당치 못한 실존을 인정해야 인간 냄새 향긋 풍기는 부드러운 남성이 된다. 부드러운 남성이야말로 가장 강한 남자이다.
당당하면서도 당당치 못한 나그네 야곱은 외롭지 않았다. 부모 이상으로 실제 대상이 되어 주신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 기사자료 인용 끝 ------------------------------------ 글을 올린 기자님의 말 대로라면,
기독교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대로, "오이디푸스 갈등의 파생물"이 지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기독교란 없다는 말입니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을 조금이라도 제대로 안다면,
프로이트가 얼마나 반기독교적인지 금방 알 수가 있습니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환영에 불과한 것이며, 집단신경증이었고,
그것은 설명에 의하여 없어져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목회자들이 프로이트에 대하여 호평하며
엉터리로 설교하는 바람에 성도들은 심리학에 너무나도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야곱을 프로이트의 심리학으로 설명하면 야곱의 하나님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빚어낸 산물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기자님의 말 대로,
"돌 앞에서의 서원은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 드리겠다며 노여움을 달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기자님이 말하는 대로, 그것은 샤마니즘에 불과한 것입니다.
(기사인용-"샤먼에서부터 고등 종교에 이르기까지 많은 종교적인 상징들, 특히 신비의 정점에 갈수록 성적 상징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이렇게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적 차원으로 성경을 읽으면,
성경은 무너지고 기독교는 사라지게 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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