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개혁주의 교의학이란 무엇인가?
최 홍 석 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일반적으로 ‘개혁파’ 혹은 ‘개혁주의’라는 수식어가 교회나 신학이나 교의학 앞에 붙게 되면, 교리사적으로 말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별히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경우를 가리킨다. 개혁파 사상을 견지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교회들은 네덜란드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개혁교회들과 스코들랜드의 종교개혁자 요한 낙스(J. Knox)의 신앙적 후예들인 장로교회 등에서 발견된다.
우리 역시 장로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신학 사상적으로는 개혁파 교회들과 동일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개혁 교의학은 그 경향에 있어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1. 중심사상
교의학이라 하여 다 같은 교의학이 아닌 것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지성적이어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할 때 합리성을 중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어서 모든 일을 감정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사람의 의지가 강해서 아예 귀를 막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자기 주관대로 행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경우 다 온전한 삶의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정의의 조화는 음(音)의 세계의 어울림처럼 미묘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생명의 신비함처럼 미묘하다. 개혁 교의학은 치우침을 피한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초월과 내재, 현세와 내세, 존재와 의식, 이론과 삶의 세계에 있어서 조화와 큰 어울림을 추구한다.
개혁 교의학은 그 어울림과 조화의 원리와 틀이 다만 하나님께 있고,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나오고 말미암고 돌아간다(롬 11 : 36)는 고백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진행하고 마치려함에 모든 관심이 놓인다. 그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모든 것들이 엮어져 나아간다.
2. 다른 분야들과의 관계
물론 교의학은 신학의 여러 분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학이 곧 교의학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17 ~ 18세기 이후 게블러(J. P. Gabler)란 사람이 성경신학의 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 각기 독립된 분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교의학이 신학이었을 때가 있었다는 말은 신학의 각 분야가 교의학과 연결되어 서로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교의학은 통전성을 지녔다. 즉 교의학 앞에 놓여있는 분야들(성경신학, 역사신학)이나 뒤에 놓여 있는 분야들(윤리학, 실천신학, 선교학)의 중간에 위치하며 서로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여러 신학 분야들의 중간에 위치한 교의학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에서 나온 진리(성경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역사의 지평 위에 나타나는데(역사신학) 여기서 여러 스펙트럼, 곧 다양한 접근과 상이한 개념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준으로, 선택하고 제거하며, 분류하고 체계화하여 삶의 자리와 관련된 분야(윤리, 실천, 선교 등의 분야)로 넘기는 역할을 교의학이 맡고 있다. 이처럼 교의학은 그 근거와 목표라는 관점에서 신학의 다른 모든 분야들과는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건전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의 기반 없는 교의학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고 또한 교회와 삶을 향한 미래가 없이는 오늘의 교의학의 자리는 의미가 없게 된다.
3. 원리와 방법
교리적 자료의 출처는 성경과 교회의 신조요, 그것을 엮어나가는 끈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기독교적 의식이다. 여기서 개혁 교리학의 원리는 두 면으로 나누어진다. 성경은 객관적인 원리요, 성령의 내적인 증거, 곧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내적인 원리이다. 말씀과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말미암는 신앙 - 그것이 곧 개혁 교의학의 원리인 셈이다.
그리고 교의학의 방법이란 교리적인 출처와 그 자료들을 다루는 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접근방법이 있다. ⑴ 전통주의적 방법, ⑵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 ⑶ 주관주의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개혁신학이 추구하는 방법은 단순히 이들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다.
전통주의적인 방법의 극단적인 예는 중세 로마교회에서 발견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권위는 교회요, 교회의 전통이었다.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은 이와 같은 전통 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때로는 교회의 신조를 무시하며 그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극단주의로 나아가 독단론에 빠지기도 했었다. 주관주의적 방법은 ① 이성과 감성 위주의 방법 ② 종교사적인 방법 ③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나뉘어진다.
이성과 감성은 같은 집안에 사는 두 아들이다. 이들은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시도하는 쪽으로 나아가 마침내 이성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주관주의적인 경험신학으로 떨어지고 만다. 객관성이 결여된 이 같은 주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증주의적인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종교사적인 접근이 행하여졌으나, 이 역시 이론적인 부분만 실증주의적인 과학에 맡겨지고, 종교 자체는 막연히 신비한 감정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이 심리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막연한 신비스런 감정까지도 실험적인 방편을 통하여 객관화 시켜보려 하였으나, 심리란 원래 그 성격상 절대적이지 못하여 결국 상대주의에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로써 여러 방법의 한계가 드러난 셈이 된 것이다.
전통주의적인 방법은 개혁 교의학의 원리와는 전적으로 충돌된다. 왜냐하면 개혁 교의학은 성경을 신학과 교회의 유일한 원리(principium unicum)로 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혁 교의학은 교회 전통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은 다른 두 방법보다 월등하게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이나 신조를 무시하고 자신의 성경 해석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자신의 옳고 그름을 비교 검증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다분히 독단에 빠질 소지를 안고 있다. 물론 개혁 교의학은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높이는 성경 지상주의의 태도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신조를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신조는 물론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는 한 진리라는 조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개혁 교의학은 주관주의적 방법의 인식 원리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주관 곧 인간 의식의 중요성에 대하여 결코 과소평가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개혁 교의학은 폐일언하고 신앙의 유일한 원리를 성경으로 삼고, 교회(전통, 신조)와 기독교적인 의식(주관)의 주관성을 고려하는 방법을 교의학의 방법으로 취한다.
이처럼 개혁 교의학은 성경의 권위라는 형식 원리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는 실질적인 원리를 가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신학적인 한계들을 극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륙의 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카이퍼나 바빙크 그리고 스킬더 같은 교의학자들은 이 모든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칼빈과 그 이후 개혁자들의 신앙적 관점을 계승하려 하였고, 미국에서의 핫지나 워필드, 머레이, 메첸, 반틸 같은 이들의 개혁 신학적인 열정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4. 실질적 원리와 교의학 각론
종교개혁의 형식원리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요, 실질적인 원리는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였다. 루터파는 초기의 루터와는 달리 인간을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완연히 드러냈었다. 이에 반하여 개혁파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였고,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개혁 교의학은 ’믿음을 통한(방편) 은총으로 말미암는(원인) 구원‘(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의 개념(엡 2 : 8 ~ 9)을 중요한 관점으로 삼았다.
개혁 교의학은 종교 개혁자들의 유산을 이어받음으로써 반로마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고, 조교 개혁자들 중에서도 칼빈 노선의 신학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루터파와는 성격의 차이를 보였다. 그 뿐 아니라 재세례파와 더불어 은혜의 수단을 무시하고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강조했던 신비주의적인 열광주의자들의 ‘말씀 없이 성령으로’라는 입장을 ‘오직 성경으로써’라는 개혁의 원리로써 공격했었다.
이로써 개혁 교의학은 ‘오직 성경으로써’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써’라는 두 원리를 가지고 좌우로는 신비주의와 로마교를 대항하면서, 안으로는 루터파를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의 미흡함을 극복함으로써 개혁파의 독특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신학사상에 관한 한, 이러한 신학적인 자리매김은 개혁 교의학 각론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서론에서는 교회를 신학의 원리로 삼는 로마교의 전통주의적 예전주의를 반대했고, 또한 내적인 말씀만을 강조했던 신비주의자들을 대항했다. 그리하여 개혁 교의학은 성령과 말씀의 조화로운 원리, 곧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이로써 성령의 주권성은 높아졌으며, 그것은 자연히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연결되어 신론으로 발전된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 창조주, 인간은 그의 피조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 그래서 신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강조되고 했지만,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그의 계시를 인정함으로써 제한된 지식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있다는 가지성을 견지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은 자연히 그의 절대의지에 근거한 절대예정으로 인도되었고, 절대예정의 사상은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상과 연계되어 발전된다.
인간론으로 들어가면서 5세기 이후, 논쟁되어 온 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반대하여, 인간의 전적인 부패, 전적인 무능력 교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개혁 교의학은 이처럼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하여 자연과 은총의 연속성을 부인하는 루터파의 오류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고, 이 둘 사이의 기계적 연관성을 주장했던 로마교의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자연과 은총 사이의 유기적인 상관성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함으로써 역동적인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이 모든 신학적인 이해들은 자연스럽게 개혁 교의학에서 구원론과 연결되어 인간의 전적인 부패,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로의 견인 교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인간의 피조성,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미미함 그리고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은총으로써의 구원 등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윤리적인 동기를 갖게 하였고, 이와 같은 경건한 동기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의 틀 속에서 이 세상에서의 적극적인 문화 창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5. 결론
개혁 교의학은 ① 교회적 기능 ② 재생적 기능 ③ 생산적 기능이라는 세 발 위에 놓여 있는 솥과 같다. 한 발이라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솥은 넘어지고 만다.
첫째로,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교의학이어야 한다. 둘째로, 성경과 신조들을 잘 요약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과거에 그랬다’고 말하지 않고, ‘지금 이렇다’고 말해야 한다. 세 기능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에게 더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생산적 기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개혁 교의학은 그 어느 신학 체계보다 탁월한 견해를 가졌다. 탁월하다는 것은 논리성이나 효용성에 의한 판단이 아니다. 오직 성경을 얼마나 성경 정신대로 반영하고 있느냐는 관점에 의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탁월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그의 섭리의 결과인 줄 믿는다.
우리 앞에 좋은 길이 열려 있다. 걸어가는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걸어가는 길은 실천이요, 정행이다. 정론은 있으나 정행이 없는 시대에 개혁 교의학을 표방하는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물론 더 알아야 하겠지만, 더 알려고 할 것이 아니다. 우선 적은 것이라도 안 것을 행하는 은혜가 더 요구되는 시대다. “저들의 가르치는 바는 듣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는 원리 앞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http://blog.daum.net/kkho1105/3847
최 홍 석 교수 (총신대 신학대학원)
일반적으로 ‘개혁파’ 혹은 ‘개혁주의’라는 수식어가 교회나 신학이나 교의학 앞에 붙게 되면, 교리사적으로 말해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특별히 칼빈의 입장을 따르는 경우를 가리킨다. 개혁파 사상을 견지하는 것으로 일컬어지는 교회들은 네덜란드나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개혁교회들과 스코들랜드의 종교개혁자 요한 낙스(J. Knox)의 신앙적 후예들인 장로교회 등에서 발견된다.
우리 역시 장로교회에 속해 있으므로 신학 사상적으로는 개혁파 교회들과 동일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이와 같은 배경을 가진 개혁 교의학은 그 경향에 있어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1. 중심사상
교의학이라 하여 다 같은 교의학이 아닌 것은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지성적이어서 모든 사물을 관찰하고 해석할 때 합리성을 중시하고, 또 어떤 사람은 감성적이어서 모든 일을 감정 주도적으로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또 다른 사람의 의지가 강해서 아예 귀를 막고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으며 자기 주관대로 행하는 자들도 있다. 이런 경우 다 온전한 삶의 방식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주신 지정의의 조화는 음(音)의 세계의 어울림처럼 미묘하고 아름다운 것이며, 생명의 신비함처럼 미묘하다. 개혁 교의학은 치우침을 피한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의 지성과 감정과 의지, 초월과 내재, 현세와 내세, 존재와 의식, 이론과 삶의 세계에 있어서 조화와 큰 어울림을 추구한다.
개혁 교의학은 그 어울림과 조화의 원리와 틀이 다만 하나님께 있고, 모든 것이 그 분으로부터 나오고 말미암고 돌아간다(롬 11 : 36)는 고백을 잃지 않으려 한다. 하나님의 주권사상으로부터 시작하고 진행하고 마치려함에 모든 관심이 놓인다. 그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으로부터 기인된 모든 것들이 엮어져 나아간다.
2. 다른 분야들과의 관계
물론 교의학은 신학의 여러 분야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신학이 곧 교의학이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17 ~ 18세기 이후 게블러(J. P. Gabler)란 사람이 성경신학의 독립을 선언하면서부터 각기 독립된 분야로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교의학이 신학이었을 때가 있었다는 말은 신학의 각 분야가 교의학과 연결되어 서로의 역할을 분담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만큼 교의학은 통전성을 지녔다. 즉 교의학 앞에 놓여있는 분야들(성경신학, 역사신학)이나 뒤에 놓여 있는 분야들(윤리학, 실천신학, 선교학)의 중간에 위치하며 서로를 연결시키는 고리역할을 한다.
그렇다면 여러 신학 분야들의 중간에 위치한 교의학의 역할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성경에서 나온 진리(성경신학)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역사의 지평 위에 나타나는데(역사신학) 여기서 여러 스펙트럼, 곧 다양한 접근과 상이한 개념들 가운데 성령의 역사에 의지하여 오직 성경으로라는 기준으로, 선택하고 제거하며, 분류하고 체계화하여 삶의 자리와 관련된 분야(윤리, 실천, 선교 등의 분야)로 넘기는 역할을 교의학이 맡고 있다. 이처럼 교의학은 그 근거와 목표라는 관점에서 신학의 다른 모든 분야들과는 나눌래야 나눌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따라서 건전한 성경신학과 역사신학의 기반 없는 교의학은 불가능한 일이며, 그리고 또한 교회와 삶을 향한 미래가 없이는 오늘의 교의학의 자리는 의미가 없게 된다.
3. 원리와 방법
교리적 자료의 출처는 성경과 교회의 신조요, 그것을 엮어나가는 끈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른 기독교적 의식이다. 여기서 개혁 교리학의 원리는 두 면으로 나누어진다. 성경은 객관적인 원리요, 성령의 내적인 증거, 곧 말씀과 더불어 역사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내적인 원리이다. 말씀과 성령의 내적인 증거로 말미암는 신앙 - 그것이 곧 개혁 교의학의 원리인 셈이다.
그리고 교의학의 방법이란 교리적인 출처와 그 자료들을 다루는 일을 통틀어 일컫는 말인데, 여기에는 세 가지 서로 다른 접근방법이 있다. ⑴ 전통주의적 방법, ⑵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 ⑶ 주관주의적인 방법이 그것이다. 물론 개혁신학이 추구하는 방법은 단순히 이들 중 하나에 속하지 않는다.
전통주의적인 방법의 극단적인 예는 중세 로마교회에서 발견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권위는 교회요, 교회의 전통이었다.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은 이와 같은 전통 지상주의에 대한 반동으로서 때로는 교회의 신조를 무시하며 그 중요성을 간과하면서 극단주의로 나아가 독단론에 빠지기도 했었다. 주관주의적 방법은 ① 이성과 감성 위주의 방법 ② 종교사적인 방법 ③ 심리학적인 방법으로 나뉘어진다.
이성과 감성은 같은 집안에 사는 두 아들이다. 이들은 이성과 계시의 조화를 시도하는 쪽으로 나아가 마침내 이성주의에 빠지거나 혹은 주관주의적인 경험신학으로 떨어지고 만다. 객관성이 결여된 이 같은 주관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실증주의적인 과학적 방법을 동원한 종교사적인 접근이 행하여졌으나, 이 역시 이론적인 부분만 실증주의적인 과학에 맡겨지고, 종교 자체는 막연히 신비한 감정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이 심리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막연한 신비스런 감정까지도 실험적인 방편을 통하여 객관화 시켜보려 하였으나, 심리란 원래 그 성격상 절대적이지 못하여 결국 상대주의에 떨어지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로써 여러 방법의 한계가 드러난 셈이 된 것이다.
전통주의적인 방법은 개혁 교의학의 원리와는 전적으로 충돌된다. 왜냐하면 개혁 교의학은 성경을 신학과 교회의 유일한 원리(principium unicum)로 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개혁 교의학은 교회 전통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는다. 성경 지상주의적인 방법은 다른 두 방법보다 월등하게 좋은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교회의 전통이나 신조를 무시하고 자신의 성경 해석만을 고집하기 때문에 자신의 옳고 그름을 비교 검증할 기회를 스스로 차단해 버리고 다분히 독단에 빠질 소지를 안고 있다. 물론 개혁 교의학은 성경의 권위를 최고로 높이는 성경 지상주의의 태도를 전적으로 동의한다. 그러나 신조를 무시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신조는 물론 성경의 진리를 반영하는 한 진리라는 조건성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하다는 점을 잊지 않는다.
개혁 교의학은 주관주의적 방법의 인식 원리를 거부한다. 그럼에도 주관 곧 인간 의식의 중요성에 대하여 결코 과소평가는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개혁 교의학은 폐일언하고 신앙의 유일한 원리를 성경으로 삼고, 교회(전통, 신조)와 기독교적인 의식(주관)의 주관성을 고려하는 방법을 교의학의 방법으로 취한다.
이처럼 개혁 교의학은 성경의 권위라는 형식 원리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이라는 실질적인 원리를 가지고 위에서 언급했던 여러 신학적인 한계들을 극복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대륙의 개혁 신학자들 가운데 특별히 카이퍼나 바빙크 그리고 스킬더 같은 교의학자들은 이 모든 한계들을 극복하면서 칼빈과 그 이후 개혁자들의 신앙적 관점을 계승하려 하였고, 미국에서의 핫지나 워필드, 머레이, 메첸, 반틸 같은 이들의 개혁 신학적인 열정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4. 실질적 원리와 교의학 각론
종교개혁의 형식원리는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요, 실질적인 원리는 ‘오직 믿음으로써(Sola fide)'였다. 루터파는 초기의 루터와는 달리 인간을 낙관적으로 이해하는 반(半)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완연히 드러냈었다. 이에 반하여 개혁파는 인간의 전적인 부패를 강조하였고, 그리고 또한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인 은총에 대하여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개혁 교의학은 ’믿음을 통한(방편) 은총으로 말미암는(원인) 구원‘(salv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의 개념(엡 2 : 8 ~ 9)을 중요한 관점으로 삼았다.
개혁 교의학은 종교 개혁자들의 유산을 이어받음으로써 반로마교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고, 조교 개혁자들 중에서도 칼빈 노선의 신학적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루터파와는 성격의 차이를 보였다. 그 뿐 아니라 재세례파와 더불어 은혜의 수단을 무시하고 성령과의 직접적인 교통을 강조했던 신비주의적인 열광주의자들의 ‘말씀 없이 성령으로’라는 입장을 ‘오직 성경으로써’라는 개혁의 원리로써 공격했었다.
이로써 개혁 교의학은 ‘오직 성경으로써’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써’라는 두 원리를 가지고 좌우로는 신비주의와 로마교를 대항하면서, 안으로는 루터파를 비롯한 여러 개혁자들의 미흡함을 극복함으로써 개혁파의 독특한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신학사상에 관한 한, 이러한 신학적인 자리매김은 개혁 교의학 각론에서 구체적으로 반영된다. 서론에서는 교회를 신학의 원리로 삼는 로마교의 전통주의적 예전주의를 반대했고, 또한 내적인 말씀만을 강조했던 신비주의자들을 대항했다. 그리하여 개혁 교의학은 성령과 말씀의 조화로운 원리, 곧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강조한다. 이로써 성령의 주권성은 높아졌으며, 그것은 자연히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연결되어 신론으로 발전된다. 하나님은 무한히 크신 창조주, 인간은 그의 피조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무한한 질적인 차이, 그래서 신지식에 있어서 하나님의 불가해성이 강조되고 했지만, 하나님의 역사 개입과 그의 계시를 인정함으로써 제한된 지식이지만 하나님을 참으로 알 수 있다는 가지성을 견지한다.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은 자연히 그의 절대의지에 근거한 절대예정으로 인도되었고, 절대예정의 사상은 무조건적인 은총의 사상과 연계되어 발전된다.
인간론으로 들어가면서 5세기 이후, 논쟁되어 온 펠라기우스적인 경향을 반대하여, 인간의 전적인 부패, 전적인 무능력 교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개혁 교의학은 이처럼 죄의 심각성을 강조하면서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하여 자연과 은총의 연속성을 부인하는 루터파의 오류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분하고, 이 둘 사이의 기계적 연관성을 주장했던 로마교의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자연과 은총 사이의 유기적인 상관성을 성경으로부터 도출함으로써 역동적인 유연성을 발휘하였다.
이 모든 신학적인 이해들은 자연스럽게 개혁 교의학에서 구원론과 연결되어 인간의 전적인 부패, 하나님의 절대주권에 근거한 무조건적인 선택, 제한속죄, 불가항력적인 은혜, 성도의 궁극적 구원에로의 견인 교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과 인간의 피조성,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인간의 미미함 그리고 전적으로 부패한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인 은총으로써의 구원 등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Soli Deo Gloria!)라는 윤리적인 동기를 갖게 하였고, 이와 같은 경건한 동기는 하나님의 주권사상의 틀 속에서 이 세상에서의 적극적인 문화 창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5. 결론
개혁 교의학은 ① 교회적 기능 ② 재생적 기능 ③ 생산적 기능이라는 세 발 위에 놓여 있는 솥과 같다. 한 발이라도 제 몫을 다하지 못한다면, 그 솥은 넘어지고 만다.
첫째로, 교회의 기능으로서의 교의학이어야 한다. 둘째로, 성경과 신조들을 잘 요약해야 한다. 셋째로, ‘그것은 과거에 그랬다’고 말하지 않고, ‘지금 이렇다’고 말해야 한다. 세 기능이 다 중요하지만 특히 우리에게 더 요구되어지는 것이 있다면, 생산적 기능이 아닐까 생각된다.
개혁 교의학은 그 어느 신학 체계보다 탁월한 견해를 가졌다. 탁월하다는 것은 논리성이나 효용성에 의한 판단이 아니다. 오직 성경을 얼마나 성경 정신대로 반영하고 있느냐는 관점에 의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탁월하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그의 섭리의 결과인 줄 믿는다.
우리 앞에 좋은 길이 열려 있다. 걸어가는 길만 남아 있을 뿐이다. 걸어가는 길은 실천이요, 정행이다. 정론은 있으나 정행이 없는 시대에 개혁 교의학을 표방하는 우리의 할 일은 분명하다. 물론 더 알아야 하겠지만, 더 알려고 할 것이 아니다. 우선 적은 것이라도 안 것을 행하는 은혜가 더 요구되는 시대다. “저들의 가르치는 바는 듣되, 저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는 예수님의 선포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많이 받은 자에게는 더 많은 것이 요구된다는 원리 앞에 부담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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