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誓願)에 대하여(2)
서원(誓願)에 대하여(2)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에 대해서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일과 관련해서 흔히 있는 오해들 가운데 하나로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과 관련된 오해가 있다. 구약에 나타난 몇몇 경우들에 근거해서 자녀들 가운데 첫째 자녀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하는 일이 있고, 그것은 그 자녀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그 서원한 사람이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돕기도 하고 악압하기도 하는 현상이 우리들 교회 안에 많이 있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매우 거룩하며 영적인 것이며 장려할만한 것으로 논의된 일도 많이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1. 구약에서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대한 이해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도록 되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출 13:2). 이는 처음 유월절 때에 이집트의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豫表]하는) 문 인방과 설주에 그 피를 바른 그 어린양의 피로 인해 자신들의 초태생이 살아 남은 것에 대한 기억과 감사의 표였다. 그러므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sacrifice)으로 드리고, 그 장자들은 짐승으로 대속(代贖)하도록 하신 것이다(출 13:12, 13, 15). 하나님께서는 초태생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신다(출 13:2, 12).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첫째만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가 대표하는 바 이스라엘의 자녀들 모두가 주께 속해 있음을 표하는 행위라고 이해해야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확을 하면 매년 토지 소산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려 제사장이 그것을 요제로 드릴 때(레 23:9-14), 그 첫 열매만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초태생을 드리는 일은 (1) 어떤 서원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고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그 초태생이 당연히 여호와의 것인데, (2) 이는 초태생만 여호와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자녀는 다 여호와의 것임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약에서는 특별히 자신이나 자녀를 주께 드리는 서원의 예가 나온다. 사사기 11:29-31, 34-40에 나오는 입다의 경우가 그러하고, 사무엘상 1:22-28에 나타나는 한나의 예가 그러하며, 나실인의 경우가 그러하다(민 6:2-21). 그러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그 경우들도 매우 다양했다. 입다의 경우에는 딸을 주께 드리되 처녀로 드리고, 한나의 경우에는 아들을 드리되 제사장을 돕는 아이로 드렸는데,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사와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나실인은 자신이 일정한 시기 동안 서원하여 자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었고, 때로는 삼손이나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요구하신 일이 있었다(삿 13:3-5; 눅 1:15). 그러나 이렇게 주께 자신과 자녀들을 드린 예들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고, 일반적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는 구약 시대에 있었던 경우들이다.
2. 신약적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자녀들은 누구인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희생제의 본체로서의 희생제적 제물로 드려진 시대, 그리하여 구약의 의식법적 요구를 다 이루신 시대인 신약 시대에 오면 초태생의 자녀가 특별히 주께 속한다는 개념조차도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녀가 다 주의 은혜 언약의 자녀들로 여겨진다. 그들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들로, 즉 구별된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 중에 한 편만 예수를 믿는 이의 자녀도 "거룩하니라"라고 단언되었다(고전 7: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다 구별된 자들이며, 언약의 자녀들인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장자만 주의 것이고, 나머지는 덜한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에서도 원칙은 모든 자녀가 다 주의 것이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다 주의 것이므로, 다 주께 바쳐진 아이들인 것이다.
3. 바쳐진[聖別된]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다 주께 바쳐진, 즉 성별된 자녀들이고, 이렇게 주께 바쳐진 자녀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에 따라 주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적법한 일이고 그의 재능과 은사에 부합한 것이라면 어떤 자녀가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주께서 시키신 거룩한 성직(聖職)을 맡아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사의 일이든지, 간호사의 일이든지, 장사하는 일이든지, 디자인하는 일이든지, 음악하는 일이든지, 건축하는 일이든지를 막론하고 말이다. 따라서 신약적 개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목사직이나 선교사직만이 아니다. 주께서 그들을 그 일에로 불러 시키셨다면(vocatio) 이 모든 일들이 다 성직(聖職), 즉 구별된 직분이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물로 이 때에 목사직이나 선교사직은 회피하려는 마음이 작용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그런 은사를 주셨고, 그런 소명을 주신 이들은 그런 일에로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목사직이나 선교사직만이 성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장자만을 주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자로 잘 양육하는 일이다. 모든 자녀들이 다 주께서 시키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게 되도록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다 주께 바쳐진 자녀들로서 그들의 일생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가 주의 가르침 안에서 자라나 주의 가르침에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양육의 책임을 다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우리의 자녀가 주께 속한 자녀라는 것을 확언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유아 세례식이다.
4. 유아 세례의 진정한 의미 회복을 위한 제언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아 세례는 그 부모에게 있어서나, 유아 세례를 받는 이에게 있어서나, 그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유아 세례식을 하는 것은 그저 전통 때문에 하는 것도, 그저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리고 자녀들 드리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녀가 우리가 속한 은혜 언약에 속한 자녀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식이며, 위의 자녀들이 언약의 자녀이므로 가정과 교회 내에서 언약의 자녀답게 자라나도록 부모와 온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의미에 충실한 유아 세례식을 행하며, 그 의미에 걸맞은 교육을 힘써 나가서 우리의 자녀들이 진정 주께 드려진 자답게 자라나서 그들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유지 발전시키며, 다음 세대의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증시(證示)하는 이들이 되도록 힘써 나가야만 한다.
[출처] 서원(誓願)에 대하여(2)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에 대해서 -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51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에 대해서 -
이승구 교수(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하나님 앞에 서원하는 일과 관련해서 흔히 있는 오해들 가운데 하나로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서원과 관련된 오해가 있다. 구약에 나타난 몇몇 경우들에 근거해서 자녀들 가운데 첫째 자녀를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하는 일이 있고, 그것은 그 자녀가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도록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이 그 서원한 사람이나 자녀들을 심리적으로 돕기도 하고 악압하기도 하는 현상이 우리들 교회 안에 많이 있다. 과거에는 이런 것들이 매우 거룩하며 영적인 것이며 장려할만한 것으로 논의된 일도 많이 있었다. 이런 현상에 대해서 우리는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1. 구약에서 자녀를 하나님께 바치는 일에 대한 이해
출애굽 이후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돌리"도록 되었다. 그것은 특히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출 13:2). 이는 처음 유월절 때에 이집트의 사람과 짐승의 초태생은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은 (장차 오실 메시아이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예표[豫表]하는) 문 인방과 설주에 그 피를 바른 그 어린양의 피로 인해 자신들의 초태생이 살아 남은 것에 대한 기억과 감사의 표였다. 그러므로 초태생의 수컷은 다 여호와께 희생(sacrifice)으로 드리고, 그 장자들은 짐승으로 대속(代贖)하도록 하신 것이다(출 13:12, 13, 15). 하나님께서는 초태생은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신다(출 13:2, 12).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첫째만이 여호와께 속해 있음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첫째가 대표하는 바 이스라엘의 자녀들 모두가 주께 속해 있음을 표하는 행위라고 이해해야 한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수확을 하면 매년 토지 소산의 첫 이삭 한 단을 드려 제사장이 그것을 요제로 드릴 때(레 23:9-14), 그 첫 열매만 하나님 것이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초태생을 드리는 일은 (1) 어떤 서원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고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에게는 그 초태생이 당연히 여호와의 것인데, (2) 이는 초태생만 여호와의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자녀는 다 여호와의 것임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구약에서는 특별히 자신이나 자녀를 주께 드리는 서원의 예가 나온다. 사사기 11:29-31, 34-40에 나오는 입다의 경우가 그러하고, 사무엘상 1:22-28에 나타나는 한나의 예가 그러하며, 나실인의 경우가 그러하다(민 6:2-21). 그러나 이는 매우 예외적인 경우였고 그 경우들도 매우 다양했다. 입다의 경우에는 딸을 주께 드리되 처녀로 드리고, 한나의 경우에는 아들을 드리되 제사장을 돕는 아이로 드렸는데, 그가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서 이스라엘의 중요한 사사와 선지자 역할을 하게 되었으며, 나실인은 자신이 일정한 시기 동안 서원하여 자신을 구별하여 드릴 수 있었고, 때로는 삼손이나 세례 요한의 경우(?)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을 요구하신 일이 있었다(삿 13:3-5; 눅 1:15). 그러나 이렇게 주께 자신과 자녀들을 드린 예들은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고, 일반적인 것이라고 하기 어렵다. 그리고 이는 구약 시대에 있었던 경우들이다.
2. 신약적 의미에서 하나님께 바쳐진 자녀들은 누구인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모든 희생제의 본체로서의 희생제적 제물로 드려진 시대, 그리하여 구약의 의식법적 요구를 다 이루신 시대인 신약 시대에 오면 초태생의 자녀가 특별히 주께 속한다는 개념조차도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의 모든 자녀가 다 주의 은혜 언약의 자녀들로 여겨진다. 그들은 다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한 자들로, 즉 구별된 자들로 여겨지는 것이다. 심지어 부모 중에 한 편만 예수를 믿는 이의 자녀도 "거룩하니라"라고 단언되었다(고전 7:14).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은 다 구별된 자들이며, 언약의 자녀들인 것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장자만 주의 것이고, 나머지는 덜한 것이 아니다. (사실 구약에서도 원칙은 모든 자녀가 다 주의 것이었음에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다 주의 것이므로, 다 주께 바쳐진 아이들인 것이다.
3. 바쳐진[聖別된] 자녀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렇게 우리의 모든 자녀들은 다 주께 바쳐진, 즉 성별된 자녀들이고, 이렇게 주께 바쳐진 자녀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사와 재능에 따라 주께서 맡기신 일을 감당해야 한다. 그러므로 적법한 일이고 그의 재능과 은사에 부합한 것이라면 어떤 자녀가 어떤 일을 하든지 다 주께서 시키신 거룩한 성직(聖職)을 맡아 감당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사의 일이든지, 간호사의 일이든지, 장사하는 일이든지, 디자인하는 일이든지, 음악하는 일이든지, 건축하는 일이든지를 막론하고 말이다. 따라서 신약적 개념에서 보면 중요한 것은 목사직이나 선교사직만이 아니다. 주께서 그들을 그 일에로 불러 시키셨다면(vocatio) 이 모든 일들이 다 성직(聖職), 즉 구별된 직분이라는 의식을 가져야만 한다. (물로 이 때에 목사직이나 선교사직은 회피하려는 마음이 작용해서도 안 된다. 주께서 그런 은사를 주셨고, 그런 소명을 주신 이들은 그런 일에로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 여기서의 핵심은 목사직이나 선교사직만이 성직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중요한 것은 장자만을 주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자녀를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자로 잘 양육하는 일이다. 모든 자녀들이 다 주께서 시키신 일을 제대로 감당하게 되도록 우리는 자녀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과 함께 기도하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자녀들이 다 주께 바쳐진 자녀들로서 그들의 일생을 살아가도록 말이다. 우리의 자녀들이 모두가 주의 가르침 안에서 자라나 주의 가르침에 자신을 헌신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양육의 책임을 다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렇게 우리의 자녀가 주께 속한 자녀라는 것을 확언하며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식이 바로 유아 세례식이다.
4. 유아 세례의 진정한 의미 회복을 위한 제언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유아 세례는 그 부모에게 있어서나, 유아 세례를 받는 이에게 있어서나, 그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우리가 유아 세례식을 하는 것은 그저 전통 때문에 하는 것도, 그저 우리의 마음을 다 드리고 자녀들 드리기 위해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자녀가 우리가 속한 은혜 언약에 속한 자녀라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의식이며, 위의 자녀들이 언약의 자녀이므로 가정과 교회 내에서 언약의 자녀답게 자라나도록 부모와 온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의미에 충실한 유아 세례식을 행하며, 그 의미에 걸맞은 교육을 힘써 나가서 우리의 자녀들이 진정 주께 드려진 자답게 자라나서 그들의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우리의 신앙을 유지 발전시키며, 다음 세대의 교회와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더 잘 증시(證示)하는 이들이 되도록 힘써 나가야만 한다.
[출처] 서원(誓願)에 대하여(2) --자신이나 자녀를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에 대해서 - (캘거리 개혁신앙연구회(CKRIRF)) |작성자 주나그네
http://cafe.naver.com/calgaryreformed.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1351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