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에 속한 나
[본문] 로마서 7:14-25
변 종 길 (고려신학대학원)
2017. 9. 26(화). 고려신학대학원 새벽기도회. 310장
본문 14절의 말씀은 중요하고 논란이 많이 되어 왔습니다.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이것이 도대체 중생하기 전의 고백일까요? 아니면 중생 후의 고백일까요? 전통적으로 어거스틴 이후로 중생 후의 상태로 보아 왔습니다. 중생 후에도 여전히 육신의 연약함이 남아 있다는 것입니다. 중세 교회와 종교개혁자들도 대체로 이렇게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종교개혁 후에 알미니우스가 중생 전으로 보았으며, 알미니안들과 현대 신학자들이 이렇게 많이 보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독일의 큄멜과 네덜란드의 헤르만 리덜보스가 중생전설을 취하며, 오늘날 미국과 한국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이 중생했으면 어떻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합니다. 리덜보스에 의하면, 중생한 사람은 성령의 지배 아래 있으며, 죄에 대하여 죽었으며, 성령의 법이 그를 해방하였다고 합니다. 중생한 사람은 구속사적으로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성령의 지배 아래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14절의 ‘나’는 아직 율법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 곧 그리스도 바깥에 있는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잘못이며 본문을 오해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여기서 ‘율법’과 ‘나’ 사이에 대비를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신령하지만 ‘나’는 육신에 속하였다(육신적이다)고 말합니다. 헬라어 접속사 “de”(그런데, 그러나)를 통해 둘 사이에 대비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나’ 사이의 대비이지, ‘중생 전’과 ‘중생 후’의 대비가 아닙니다. ‘중생 전의 나’와 ‘중생 후의 나’ 사이의 대비가 아니라 ‘신령한 율법’과 ‘육신적인 나’ 사이의 대비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어떠합니까? 율법은 ‘신령하다’(pneumatikos)고 합니다. 영적(spiritual)이라는 말입니다. 그 뜻은 12절에 있는 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이다’는 동사입니다. 헬라어로 ‘에스틴’(estin)인데, 영어의 ‘이즈’(is)에 해당합니다. “율법은 신령하다”(ho nomos pneumatikos estin)고 하는데, 여기의 현재 동사 ‘에스틴’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율법은 지금만 신령하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늘 신령하다는 것을 뜻합니다. 영어로 “해는 동쪽에서 뜬다”(The sun rises from the east.)고 할 때, 현재 동사(rises)는 현재, 지금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런 진리를 나타냅니다. 이런 것을 ‘무시간적 현재’(atemporal present)라고 부릅니다. 또는 수학적 진리를 나타낼 때에도 이런 현재가 사용됩니다. “1 + 1 = 2”라고 할 때라든지 또는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이다“라고 할 때 사용하는 현재 동사 “is”는 영원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곧, 무시간적 현재입니다.
여기서 “율법은 신령하다”고 할 때의 현재 동사 ‘에스틴’도 무시간적 현재입니다. 현재만 그런 것이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에 항상 ‘신령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율법은 언제나 그 자체로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완전합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러합니다. 따라서 이것은 ‘율법의 본질적 속성’을 나타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에 대비(contrast)되는 ‘나’(에고)는 어떤 모습입니까? 나는 ‘육신적’(sarkinos)이라고 말합니다. ‘살키노스’는 ‘육적인, 육신적인, 육신에 속한’이란 뜻입니다. 이것은 율법의 ‘신령함’(프뉴마티코스)에 반대되는 상태입니다. 거룩하고 의롭고 선한 ‘율법’에 비해 ‘나’는 육신적이다, 육신에 속했다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하고 불완전한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완전한 율법,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완전하고 거룩한 율법에 비해, ‘나’는 항상 불완전하고 연약하고 육신적이고 죄가 있습니다. 이러한 나의 연약한 모습은 ‘중생 전’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중생 후’에도 그러합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변함없이 항상 거룩한 율법에 비추어 볼 때, 나는 항상 부족하고 연약한 모습입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항상 그러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는 육신적이다”(ego sarkinos eimi)라고 할 때의 현재 동사 ‘에이미’(eimi)도 무시간적 현재입니다. 영원한 진리를 나타냅니다. 따라서 여기서 “나는 육신적이다”고 하는 것은 중생 전에만 그러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생 후에도 그러한 상태를 말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나’는 ‘완전한 율법’에 대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비록 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완벽한 율법에 비추어 볼 때에는 연약하고 부족하고 불완전하고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는 법정적으로 의롭다 함 받은 칭의(稱義)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실제적(實際的) 관점에서 보고 있습니다. 비록 법적으로는 의롭다 함 받은 사람이지만, 즉 중생한 사람이지만, 그래서 성령이 그 안에 내주하시지만, 실제적 상태를 볼 때에는 여전히 부족하고 육신적이고 죄가 남아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17절과 20절에서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적 상태, 실제적 모습을 말합니다. 중생한 자라 할지라도 실제적으로는 죄가 있습니다. 신학교에 들어오더라도 죄가 있으며, 전도사가 되고 강도사가 되고 목사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학박사가 되고 신학교수가 되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비참한 처지를 인식하고 이렇게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 이 ‘사망의 몸’이라고 합니다. 현재의 이 몸은 죽을 수밖에 없고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그것은 죄 때문입니다. 내 안에 거하는 죄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하고 나서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25절) 바울이 자기 죄로 말미암아 고민하고 고통하고 몸부림치다가 문득 눈을 들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니, 거기에 이미 하나님이 다 이루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 실제적으로 육신적인 나의 문제, 내 안에 거하는 죄를 예수님이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미 값을 다 지불하셨습니다. 전에 지은 나의 모든 죄만 짊어지고 죽으신 게 아닙니다. 물론 전에 지은 나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게 해 주셨지만(의롭다고 해 주셨지만), 그뿐만 아니라 또한 중생 후에도 있는 육신의 연약함의 문제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해결해 주셨습니다.
어떻게 해결해 주셨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영혼만 죽으신 게 아니라 육체가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싸륵스)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의 육신과 같은 연약한 육신이 죽으셨습니다. 목마르고 아프고 고통을 느끼고, 죄의 유혹을 받고, 피곤해 하고, 쉬고 싶고, 다 그만두고 싶은 육신입니다. 이런 온갖 유혹을 끝없이 받는 육신, 연약한 육신, 그러나 죄는 없으신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께서 그 육신에 못을 박고, 그 육신에 죄를 정하시고 죽으셨습니다(롬 8:3). 살 찢고 피 흘려 죽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육신이 가진 근본적인 문제, 그 육신의 죗값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미 다 지불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비록 육신의 연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이미 그 죗값을 다 지불하셨기 때문에, 우리에게 다시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정죄함’(카타크리마)이 없다는 것은 ‘단죄’가 없다는 말, ‘저주’가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비록 ‘징계’는 있을지라도 결코 ‘단죄’나 ‘저주’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대상입니다. 비록 불완전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입니다. 중생 후에도 계속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된 장애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장애인입니다. 육체적으로 장애인일 뿐 아니라, 지적으로도 장애인입니다. 헬라어도 잘 못하고 히브리어 못 하고 또 영어도 잘 못합니다. 영적으로는 더 더욱 장애인입니다. 성경을 잘 모르고, 읽어도 무슨 뜻인지 잘 모릅니다. 찌질이도 못 나고 부족한 우리를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지극히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 예수님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장애인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는 지금도 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감동되어 감사함으로 삽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려 애씁니다. 우리의 공로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다 이루어 주신 공로에 감사하여 기쁨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감사의 삶’이라 할 수 있고,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은혜의 복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이런 은혜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세워주신 것을 감사하며, 기쁨으로 자신을 드리는 자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내일도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017년 9월 26일 화요일 천안 고려신학대학원 새벽기도회 설교)
자료출처 https://blog.naver.com/jgbyun119/221106104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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