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산 홍치모 교수의 생애와 사상
낙산 홍치모 교수의 생애와 사상
I. 시작하는 말
낙산 홍치모 교수는 일반 역사학계와 기독교 사학계를 망라하여 종교개혁사 분야를 개척하고 발전시켜 온 학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편하게 생을 살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었을텐데 낙산 선생은 오직 외길을 걸어 왔던 것이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수집한 서적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학문의 길로 들어선 후학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선생의 열심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학계에서, 목회 현장에서, 선교 현장에서, 일반 직장에서 나름대로 사역하고 있는 후학들에게 낙산 선생은 진한 인상을 남기었다. 그는 평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과 한 인간으로서의 도의를 다하는 태도를 교훈하였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런 모습을 견지하기 위해 실천한 사표이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먼저 홍치모 교수의 생애를 그의 사상 형성의 배경적 측면에서 조명해 보고,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는 기독교 역사가로서의 역사를 보는 관점과 역사 서술에 촛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II. 홍치모 교수의 생애
홍치모는 1932년 1월 5일 평양시내에 있는 한 민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국이 일제의 강점하에 놓여 있었으므로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런 시기를 보내면서 어린 홍치모는 특히 부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아버님은 어린 나에게 곧잘 역사를 이야기해 주시곤 하였다. 일제시대하에서도 아버님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안중근 의사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신앙인과 의인들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말씀하여 주셨다. 그는 신앙인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기독교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속해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기원과 사상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겠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1983), 4.
어린 홍치모는 평양에 있는 성남소학교를 다녔고, 1945년 평양상업학교에서 1학기 동안 재학하였다. 그는 이 상업학교에서 매우 인상적인 교사를 한 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황장엽이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그의 눈에 황장엽은 강렬한 느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북쪽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도 방학이 되면 근로 봉사를 하게 되어 있었고, 이 학교 재학생들은 현재 종합체육관이 자리하고 있는 늑라도로 가서 수원지 근처의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경작하였다.
북쪽의 사정이 악화일로에 있을 때, 청소년 홍치모는 1947년 자유를 찾아 월남을 감행하였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1947년부터 1952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고학을 하는 처지라 어려움이 상당히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인생의 고난과 환난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근저에는 어려서부터 가진 신앙의 힘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1949년 여름 방학을 그는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방학을 이용하여 고려신학교 학우회 주최로 학생수양회가 있었는데 강사인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하였던 것이다. 어려운 타향살이에 지칠대로 지친 그의 몸과 영혼에 박 목사의 메세지는 실로 마른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와도 같았다. 이런 인연으로해서 학생 홍치모는 박 목사를 존경하며 따르게 되었고, 박 목사도 친아들처럼 그를 거두어주었다. 그 후 박윤선 목사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그 분의 신앙과 삶을 배울 수 있었고, 포기할 수 없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렇게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에 그는 두가지 가슴아픈 사건을 대하게 되었다. 하나는 1950년 4월에 발생한 교회분규사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었다. 전자와 관련하여, 당시 4월 대구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와 고려신학교 문제로 총회가 나뉘어 충돌하였던 것이다. 특히 경남노회 문제는 출옥성도와 신사참배를 행한 노회원들간에 벌어진 분쟁으로, 총회전에 노회가 둘로 갈라졌고, 양 노회가 모두 총회에 총대들을 파송하면서 문제가 심각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결국 36회 총회는 극한 대립으로 싸움판이 되었고, 양측이 물리적인 완력을 동원하여 총회 장소는 격전장을 방불케 하였다.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324-325.
이 사건을 접했던 홍치모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6.25 동란 직전에 대구에서 발생한 교회분규사건은 6.25 사건과 더불어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4.
그는 일연의 사건들을 대하면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사색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고교졸업 후, 역사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속에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런 일반적인 경험들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셨던 부친과 청소년기에 개혁신앙을 심어준 박윤선 목사의 영향은 그로하여금 종교개혁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대학 재학시 전쟁과 그 이후의 상황이라 모든 것이 열악하였다. 심지어 사학과에 전임교수 한 분도 없었으니 말이다. 한 분 있기는 하였으나 납치되어 행방불명 상태였다. 시간강사만 6명이 있었는데, 연세대 조희설, 서울대 사범대 김성근, 연세대 염은현, 서강대 길현모, 서강대 이보형, 나중에 합류하게 될 민석홍 교수 등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원서강독을 하였고, 3학년 때 염은현 교수와 서양사 강독을 하게 되었는데, 북구문예부흥과 공동생활형제단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대학생 홍치모는 여러 교수 제위로부터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받았고, 학문하는 정신과 방법을 전수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들어간 청년 홍치모는 1957년부터 1961년 8월까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였고, 제대하는 그 해 9월부터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봉직하였다. 5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1967년부터 만 2년 동안 부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일하게 되면서 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에게 유학의 기회가 온 시점이기도 했다. 영국 출신 의료 선교사인 패터슨 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캠브릿지 의대 출신으로 Bible Training Institute in Glasow에서 1년간 수학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패터슨 씨의 소개로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969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969년 8월 15일 40세가 가까운 나이에 유학을 간다고 김포공항을 떠난 것이 바로 엇그제와 같이 생각된다. 당시 나는 결혼도 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라서 무턱대고 외국에 나가 장기체류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 때 나의 유학지는 미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였는데 내가 재정에 여유가 있어서 마음 놓고 유학을 떠났던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주었던 학교 당국에서 모든 장학금을 지불하는 조건이었기에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면 지체없이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일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서 나에게 학비를 지급했던 것은 학교 당국이 아니라 어떤 무명의 독실한 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누구였는지 모르고 있다.“ 홍치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1), 3.
유학생 홍치모가 공부하였던 BTI는 19세기 말엽 미국의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와 생키의 스코틀랜드 부흥집회를 계기로 일어난 대중들의 종교적 열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학교는 시작부터 복음적인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고, 선교에 비중을 두어 많은 선교사역자들을 양산하였다. BTI는 발전을 거듭하여 Glasgow Bible College로 규모를 확장하였고, 지금은 다른 성서 대학과 병합하여 International Bible College로 교명도 바꾸고 미래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지금은 아버딘 대학교와 개방대학교 등과 연계하여 대학원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 교수진도 획기적으로 보강되어 영성과 지성에 있어서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유학생 홍치모가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당시 학장이었던 죠프리 그로간의 배려로 글라스고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하게 되면서 눈코뜰새 없는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또한 스코틀랜드 역사학과 교수로 있던 Dr. I.B. Cowan은 1451년 글라스고 대학의 개교이래 처음 강의를 듣게 되는 한국 유학생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호의를 베풀었다. 글라스고 대학교는 영국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중세대학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낸 유서깊은 학원이었다.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빗 리빙스턴은 의대 출신이었고, 근대 경제학의 대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 산업혁명의 물꼬를 튼 제임스 왓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존 낙스의 뒤를 이어 개혁의 다음 세대를 이끌었던 앤드류 멜빌 등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을 배출한 요람이기도 했다. 그 무명의 한국 유학생은 여러 사람들의 배려로 소기의 유학 목적을 달성해 나갈 수 있었다. 대학 입학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종교개혁사 연구에 대한 계획,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의 본산지에 와서 사료를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짧은 2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보내면서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뒤지고 다녔다. 또한 틈나는대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을 여행하면서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의 살아있는 숨결을 대하기도 하였다. 유학생활을 통해 유학생 홍치모는 삶, 신앙, 역사에 대하여 폭넓은 이해와 실천적 교훈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시절 평양에서 다니던 장로교회, 남한으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했던 곳도 역시 장로교회, 유학은 장로교의 본산지인 스코틀랜드로 왔으니 감회와 깨닫는 바가 지대했을 것이다. 성경적인 가르침대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을 보면서 신행일치의 살아있는 신앙에 대하여 심도있게 사색하였을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주 되뇌이는 ‘스코틀랜드에는 버릴 것이 없다’는 말과 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삶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시기는 유학생 홍치모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만 2년에 걸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숭의여자전문대학의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역사와 문화사를 5년동안 교수하였다. 그런데 대학이 부도를 내게 되면서 경영진이 교체되었고, 이 와중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숭의여전을 사직하기 1년전부터 자연스럽게 총신대학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신복윤 교무처장이 역사와 관련된 4학점 강의를 부탁해 왔고, 1976년부터 총신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홍치모 교수는 총신대학에 몸담기 시작한 이후 영국사에 대한 글들을 주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16세기와 17세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정치, 종교적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이유는 그의 생각에 1560년에 성취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하나의 종교개혁운동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치와 종교의 대립과 투쟁으로 변모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Ibid., 3.
낙산 선생은 자신의 스승 제위로부터 전수받은 학문하는 정신과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소개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따를 것 같으면, 학문 연구의 도구는 언어로써 도구가 예리하고 잘 준비되어 있어야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논문을 작성할 때는 제목설정이 중요한데 주제는 깨알과도 같이 구체적이고 압축된 것이어야 한다고 교훈 하였다.
총신대학에서 새롭게 교편은 잡았지만, 한국 정치 현실과 교단 정치 현실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던 관계로 원하지 않게 또다시 역사의 현실 앞에서 고민을 해야만 하였다. 총신학원이 총회직영 신학교였기 때문에 교단의 기류는 그대로 학원에 전달되었고, 교권주의자들은 신성한 학교를 교단정치에 끌어드리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1980년 학내사태가 악화 일로에 있었고, 학생들이 교단관계자들의 차량을 전복시키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이 사건에 얽힌 일화가 있다. 학생들의 행동을 보고 홍치모 교수는 평생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학생들 가운데 의아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는 1990년 1학기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퇴임하기 전까지 근 10여년 동안 미국장로교회사에 관한 글들을 집필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종교개혁사 분야의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바이올라 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총신대에 재직하는 동안 홍치모 교수는 인간미가 풍기는 스승으로 제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본인이 사춘기와 청년기를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의 현실과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다. 낙산 선생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었다. 특히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필요를 휜히 알고 있었다. 유학하는 제자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가 있으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주기도 했고, 모금을 통해 스폰서를 연결시켜 주었으며, 각 장학단체에서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제자들의 집을 방문할 때는 식료품을 챙겨서 건네주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신자로서, 학자로서, 행정가로서의 낙산 선생의 삶은 초지일관 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고자 노력한 흔적으로 수놓아졌다고 하겠다.
III. 홍치모 교수의 사상-그의 기독교 역사관과 역사 서술을 중심으로-
1. 기독교 역사관
홍치모 교수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역사관을 논하기에 앞서 ‘역사’에 대한 정의를 먼저 규명함이 순서이다. 그는 역사라는 말에 두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첫째는 기록으로써의 역사인데,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들이 기록으로 남긴 사료들을 통해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을 말한다. 둘째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민족의 문화적, 교육적 전승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의 기억속에 살아 있는 역동적인 역사이다. 이 경우 전승을 받는 개인의 입장에 따라 한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질 수 있다. 홍치모/이장식, 기독교 역사관 (서울: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출판부 1989), 2-3.
자연스럽게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객관과 주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함이 기본인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에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라든가 사건들 자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객관적 실재이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의 주관적 체험과 분리시켜서 그 사실들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흔히 주관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모든 사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 보는 반면 비기독교인들은 불가지론을 주장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연의 소산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막스주의자들은 “태초에 물질이 있었으니”로 시작한다.“ Ibid., 3.
그는 이런 각도에서 설명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양자간의 견해 차이를 거의 나타내지 않을 경우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인식에 있어서 필요한 사료를 참고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사료를 조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양자는 또한 가장 과학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기독교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기 전에 사료를 수집할 때 공정성과 전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역사가로서 지녀야 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작업이 끝난 후에 비로소 해석을 가해야 한다.” Ibid., 3-5.
이와같이 주관과 객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 사관의 전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고의 근저에 사고의 당사자로 하여금 사고를 가능케 하는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이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사고 패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주권자로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그의 성장과정 속에서 부친이나 박윤선 목사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틀이야말로 기독교 역사가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 요건을 제공하였다. 그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으로 자연계와 영계를 통치하신다. 홍치모 교수는 구속사의 견지에서 특별계시를, 보편사의 측면에서 일반계시를 구분한다. 사실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되어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구속사의 현장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한되어 전개되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그 경계가 없어졌다. 기독교 역사가는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들을 다룸에 있어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성경적인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적용시킬 경우 해석에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원리를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해야 되는 것이다.
둘째로,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인간의 양면성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 형상이라는 말은 인격의 모습을 의미하거니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인격의 속성 일부를 인간의 인격에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 이성, 감정, 의지, 언어 등을 구사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어느 피조물 보다도 뛰어난 존재이다. 인간은 이와같은 기능을 가지고 땅을 정복하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사명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실을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짓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교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속이는 기만자가 되어 언제나 자신을 필요 이상 높이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 ... 인간의 영적 타락은 인간성을 전적으로 부패시켰다. ... 인간은 우주의 왕인 동시에 만물보다 못한 가증스럽고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간의 문화적 업적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Ibid., 7-8.
인간성의 양면성을 전제로 했을 때, 기독교 역사가는 인간들이 역사속에서 창출해 낸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적, 문명적 업적들에 대하여 바른 판단과 해석을 해야하는 의무가 수반된다. 특히 각 시대를 풍미하던 이데올로기, 즉 지배층이 고안해 낸 지도이념을 정확히 판명해 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당시 대중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에 사상의 실체를 파악하여 기독교적 가치에 근거하여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Ibid., 10-11.
그런 견지에서 기독교 역사가가 성경적 도덕관과 가치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근거한 비판을 낙산은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사가도 역시 한계를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가는 자신속에도 허식과 허영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실존과 함께 역사의 동기를 제공했던 역사적 인물들에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Ibid., 12-13.
결과적으로 기독교 역사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전제하는 가운데, 인간의 속성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겸허한 가운데 성경적 도덕관과 가치기준을 확립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홍치모 교수의 역사 서술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적 역사 서술과 일반적인 역사 서술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구분하여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역사 서술의 밑바닥에 은연중 기독교 신앙이 확고하게 하나의 전제적 관념으로서 깔려있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역사 서술의 특성을 규정짓는 동질적이면서 다양한 가설, 가치, 이해, 그리고 통찰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독교적 역사 서술은 세속적인 역사 서술과 상호 교류한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선별하여 수납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역사 서술보다는 선험적 위치에 있다.” Ibid., 14.
이와같이 기독교적 역사 서술의 개념을 이해하였던 홍치모 교수는 종교개혁사와 장로교회사 분야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제,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홍치모 교수의 역사 서술에 대한 입장을 파악하고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종교개혁사 (1977)
홍치모 교수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본 저서는 종교개혁사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위치를 가지면서 동시에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저술이다.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II. 루터와 종교개혁(1)
III. 루터와 종교개혁(2)
IV. 칼빈과 종교개혁
V. 영국과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
VI. 역사가의 연구 업적 및 평가
먼저, 제1장을 서술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중세 지성사의 연속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중세와 종교 개혁시기 사이에 존재하는 사상적 간격을 공동 생활 형제단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또한 홍 교수의 기독교적 역사 서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제2장과 제3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된다. 특히 제3장에서 마그데부르그 시절의 루터를 사실하면서 공동 생활 형제단 출신의 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결국 오늘의 헌신 운동을 지성사의 연결고리로 보려는 그의 입장에 무게를 더해 주게 된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7), 49, 81-105.
제4장과 제5장을 통해서 홍치모 교수는 자신의 개혁파 또는 장로교적 신앙과 신학의 전제를 암시하게 된다. 사실 루터파나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나 다같이 프로테스탄트 그룹에 속하지만 신학과 예전 등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전통과 교파로 구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다루면서, 홍 교수는 청교도 개혁가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로교인인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언급하면서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였던 고든 도날드슨 교수의 감독제 옹호적인 입장을 스탠포드 리드 교수의 주장을 통해 반박한다. Ibid., 131-211.
그러므로 홍치모 교수 자신이 피력했던대로 기독교 사가의 신앙적 전제와 선험이 종교개혁사 서술에 베어 있다는 사실이 재확인 되는 것이다.
2)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983)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홍치모 교수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서양사 강독을 통해 북구 르네상스와 공동생활형제단에 관한 정보들을 얻었다. 대학 졸업 후, 공동생활형제단에 관한 연구서가 미국 학자에 의해 발간되는데, 홍 교수는 미국에 가는 선교사에게 요청하여 그 책을 입수하였다. 그 책의 저자는 Albert Hyma로서 화란계 미국인이자 미시간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던 분이었다. 그는 에라스무스 연구의 대가로서 칼빈대를 나와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능한 역사가였던 것이다. 홍치모 교수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하이마 교수의 책들을 위주로 탐독하는 가운데, 서신교환을 통해 원거리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홍 교수는 문예부흥과 기독교 인문주의와 연관된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고, 결국 한 권으로 책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 본 저서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일찍이 하이마 교수가 Renaissance to eformation라는 저서를 간행한 바 있으므로 번역하여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본 저술은 제1장 북구 르네상스 운동의 기원, 제2장 말틴 루터와 Devotio Moderna 운동, 제3장은 칼빈의 사상과 종교개혁,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 교수의 역사 서술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여기서도 목격된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출신으로서 교육방면에 종사하던 형제들은 이와같이 무의식중에 서서히 이태리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에 함축되기 시작하였고, 그와 같은 변화가 진행하고 있을 때, 에라스무스는 Deventer School에 입학하여 인문주의 교육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회상하기를 12세 되던 어느 날 Rudolf Agricola를 본 일이 있으며, 자기는 Hegius 교장 밑에서 공부했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Deventer School은 Devotio Moderna 운동의 창시자인 Gerard Groote의 종교사상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새 시대의 조류인 이태리 인문주의사상을 흡수함으로써 경건적 신앙과 고전적 학문의 조화를 조심스럽게 시도했다. 그리하여 많은 인문주의자들을 배출시킴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혁자 Martin Luther도 소년시절에 비록 짧은 1년 동안이기는 했지만 마그데부르그시에서 공부할 때 공동생활의 형제단에 속해 있던 형제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곳 사원학교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북구 인문주의의 왕자 에라스무스는 소년시절에 그곳에 몸담아 배운 원시 기독교의 정신과 고전적 고대정신을 적절하게 종합하여 조화를 시도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은 곧 공동생활의 형제단들로부터 배운 Devotio Moderna 정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타당할 것이다.“ 홍치모,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서울: 성광문화사 1983), 27-28.
그의 첫 저서에서 언급된 북구 르네상스, 기독교 인문주의, 공동생활형제단 등 일련의 역사적 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 사상, 운동들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요지인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개혁 성향의 종교적인 요소와 성격이 부각되어 강조된다는 점이다.
3)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1991)
홍치모 교수가 1969년 8월에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1971년 귀국한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관한 글들을 중점적으로 연구 발표하였고, 그 결정체가 바로 본 저서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제 I 부 스코틀랜드 교회와 영국 혁명
제1장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제2장 존 낙스의 계약사상 형성과정
제3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교회제도
제4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교회재산 처리문제
제5장 제임스 IV세의 종교정책
제6장 찰스 I세의 대 스코틀랜드 정책
제7장 스코틀랜드와 영국혁명
제8장 Robert Baillie와 그 시대
제9장 스코틀랜드와 청교도 혁명
제10장 청교도 혁명에 있어서의 장로파와 독립파에 관한 논의
제11장 크롬웰 통치하의 스코틀랜드
제 2 부 스코틀랜드사 연구의 역사적 고찰
제1장 존 낙스 연구에 관한 최근의 동향
제2장 스코틀랜드에 있어서의 계약사상
제3장 스코틀랜드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계약파 연구 현황
제4장 스코틀랜드 연구의 동향
제5장 영국 혁명사 연구에 대한 재평가
홍치모 교수도 언급했거니와 1560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으로부터 1660년 왕정복고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숨막히게 전개된 양국 관계를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홍치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서울: 총신대출판부 1991)
특히 본 저술을 통해 홍 교수는 기독교 사가들의 편협성, 즉 교회사만을 위주로 연구하던 경향을 극복하고 폭넓은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한층 더 구체화 시켰다. 물론 이전 저술에서 이런 경향이 전무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상황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목차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교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사도 심도있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홍치모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 교회사에 대한 집중적 연구는 일반 세속적 역사가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역사서술은 교회사를 의미한다는 편협한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 서술이란 결코 한정된 영역안에 있어서의 연구, 즉 교회사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가가 시도해야 할 연구는 어떻게 일반 세속사를 기독교적 신앙과 안목에서 의미있게 해석하고 서술하느냐에 있다.” 홍치모, 기독교 역사관, 18.
이와같이 교회사 위주의 편협성을 넘어 기독교적 역사 서술의 지평을 넓혀가면서도 홍 교수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기독교적 또는 신학적 전제는 변함없이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장로제와 감독제의 대립, 잉글랜드 청교도 내부에서 발생한 장로파와 독립파의 대립과 논쟁 등을 비중있게 다룬 이유도 이런 전제에 근거하고 있음일 것이다.
4) 영미장로교회사 (1998)
이 역사 서술은 홍치모 교수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을 역사가로서 고백적으로 기록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로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산물이기 때문에 당대의 역사 연구는 당연히 후대의 발전 과정과 깊은 연관을 갖기 마련임으로 자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저술 활동을 하게 된 데는 1990년 3월부터 6월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연구교수로 체류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후 10년 간 미국 장로교회에 관한 연구로 일관하여 왔다.
장로교 신자이면서 역사가인 홍치모 교수는 본 서를 계획하면서 카나다와 호주 장로교회도 포함시킬 계획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가장 핵심적인 영국(스코틀랜드)과 미국 장로교회로 그 범위를 제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사와 관련하여,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기원과 성립, 장로 교회의 수난과 영향, 교회의 변혁, 분리, 재연합, 그리고 에필로그 등으로 구성하였다. 미국 장로 교회사와 관련하여, 먼저, 미국 장로 교회의 형성 과정,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 미국 장로 교회의 분열과 재연합, 19세기 미국 장로 교회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성격, 찰스 브리그스 사건, 미국 교회 내에서의 근본주의 신학 운동, Westminster 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 J. Gresham Machen 교수의 생애와 사상, 마지막으로 미국 장로 교회와 보수주의 신앙 운동의 변천 등으로 꾸며졌다. 영미 장로 교회사를 마무리하면서 홍 교수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가지고 각 장로교회의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제시함으로 장로교회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 그리고 세속 문화와 가치들의 폭발적인 확산 등과 맞서 교회의 순수성과 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행사 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또한 진행 중이다. 현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에 따르면, 교인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스코틀랜드 교회는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홍치모, 영미장로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 127.
”
“어떤 비전도 교회는 제공하지 못한 채 주류 교단 교회들은 세속의 물결 위에 실려 떠내려 가고만 있다. 오늘의 미국 교회의 형편이나 한국 교회의 형편이 어떤 면에서 매우 유사한 면을 나타내고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미국 장로 교회는 장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Ibid., 340.
”
결과적으로, 홍 교수는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 더 구체적으로는 장로교 신앙을 전제로 역사 서술에 임했다. 위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네 권의 저서들이 그 대표적인 증거인 것이다.
VI. 결론과 평가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바를 중심으로 낙산 홍치모 교수의 생애와 사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함으로 결론에 대신코저 한다.
첫째로, 홍치모 교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을 살아오면서 소시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믿고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신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특히 언약도) 정신에 입각하여 신행일치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셋째로, 그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제하였고, 인간의 양면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한계성을 분명히 유념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홍치모 교수는 서구 학계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하곤 하였던 바,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견지하였다. 사실 인간이 만능일 수 없고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견지에서 홍 교수는 후학들에게 사심없는 연구 자세와 겸허한 삶의 덕목을 교훈하였다.
넷째로,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에 균형을 이루었다.
다섯째로, 기독교 역사가가 교회사 서술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사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문함의 과정속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상식적인 신의와 도리를 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http://cafe.daum.net/Westminster/2xh/1
I. 시작하는 말
낙산 홍치모 교수는 일반 역사학계와 기독교 사학계를 망라하여 종교개혁사 분야를 개척하고 발전시켜 온 학자로 알려져 있다. 당시 편하게 생을 살 수 있는 길이 많이 있었을텐데 낙산 선생은 오직 외길을 걸어 왔던 것이다. 그의 학문에 대한 열정은 기회 있을 때마다 수집한 서적들을 통해서 잘 알 수 있다. 또한 학문의 길로 들어선 후학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선생의 열심을 간파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학계에서, 목회 현장에서, 선교 현장에서, 일반 직장에서 나름대로 사역하고 있는 후학들에게 낙산 선생은 진한 인상을 남기었다. 그는 평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삶과 한 인간으로서의 도의를 다하는 태도를 교훈하였고 자신의 삶 속에서 그런 모습을 견지하기 위해 실천한 사표이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먼저 홍치모 교수의 생애를 그의 사상 형성의 배경적 측면에서 조명해 보고,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는 기독교 역사가로서의 역사를 보는 관점과 역사 서술에 촛점을 맞추어 살펴보고자 한다.
II. 홍치모 교수의 생애
홍치모는 1932년 1월 5일 평양시내에 있는 한 민가에서 태어났다. 당시 조국이 일제의 강점하에 놓여 있었으므로 암울한 역사의 현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야만 하였다. 이런 시기를 보내면서 어린 홍치모는 특히 부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아버님은 어린 나에게 곧잘 역사를 이야기해 주시곤 하였다. 일제시대하에서도 아버님은 아브라함에서 시작하여 안중근 의사에 이르기까지 역대의 신앙인과 의인들의 이야기를 감명깊게 말씀하여 주셨다. 그는 신앙인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다. 기독교 가정에서 자란 나는 기독교사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속해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기원과 사상을 역사적으로 규명해 보겠다는 생각이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서 싹트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1983), 4.
어린 홍치모는 평양에 있는 성남소학교를 다녔고, 1945년 평양상업학교에서 1학기 동안 재학하였다. 그는 이 상업학교에서 매우 인상적인 교사를 한 분 만나게 되는데, 바로 황장엽이다. 사춘기 소년이었던 그의 눈에 황장엽은 강렬한 느낌을 갖도록 하기에 충분하였다. 당시 북쪽의 상황이 급변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도 방학이 되면 근로 봉사를 하게 되어 있었고, 이 학교 재학생들은 현재 종합체육관이 자리하고 있는 늑라도로 가서 수원지 근처의 밭을 개간하고 작물을 경작하였다.
북쪽의 사정이 악화일로에 있을 때, 청소년 홍치모는 1947년 자유를 찾아 월남을 감행하였다. 남쪽으로 내려와서 1947년부터 1952년까지 경기중고등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고학을 하는 처지라 어려움이 상당히 컸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가 인생의 고난과 환난을 극복하며 나아갈 수 있었던 근저에는 어려서부터 가진 신앙의 힘이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1949년 여름 방학을 그는 잊을 수 없다. 그 당시 방학을 이용하여 고려신학교 학우회 주최로 학생수양회가 있었는데 강사인 박윤선 목사의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하였던 것이다. 어려운 타향살이에 지칠대로 지친 그의 몸과 영혼에 박 목사의 메세지는 실로 마른 가뭄을 해갈하는 단비와도 같았다. 이런 인연으로해서 학생 홍치모는 박 목사를 존경하며 따르게 되었고, 박 목사도 친아들처럼 그를 거두어주었다. 그 후 박윤선 목사를 가까이서 모시면서 그 분의 신앙과 삶을 배울 수 있었고, 포기할 수 없는 칼빈주의 개혁신앙을 견실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이렇게 좋은 기억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1950년에 그는 두가지 가슴아픈 사건을 대하게 되었다. 하나는 1950년 4월에 발생한 교회분규사건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민족상잔의 비극인 한국전쟁이었다. 전자와 관련하여, 당시 4월 대구에서 모인 장로교 총회에서 경남노회 문제와 고려신학교 문제로 총회가 나뉘어 충돌하였던 것이다. 특히 경남노회 문제는 출옥성도와 신사참배를 행한 노회원들간에 벌어진 분쟁으로, 총회전에 노회가 둘로 갈라졌고, 양 노회가 모두 총회에 총대들을 파송하면서 문제가 심각하게 전개되었던 것이다. 결국 36회 총회는 극한 대립으로 싸움판이 되었고, 양측이 물리적인 완력을 동원하여 총회 장소는 격전장을 방불케 하였다. 김인수,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한국장로교출판사 1996), 324-325.
이 사건을 접했던 홍치모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6.25 동란 직전에 대구에서 발생한 교회분규사건은 6.25 사건과 더불어 나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그리하여 역사적 현실에 대하여 나는 스스로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4.
그는 일연의 사건들을 대하면서 역사적 현실에 대한 사색에 깊이 빠져들게 되었다.
고교졸업 후, 역사인식이 심화되어 가는 과정속에서 서울대 사학과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런 일반적인 경험들과 더불어, 어려서부터 역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셨던 부친과 청소년기에 개혁신앙을 심어준 박윤선 목사의 영향은 그로하여금 종교개혁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도록 이끌었다. 대학 재학시 전쟁과 그 이후의 상황이라 모든 것이 열악하였다. 심지어 사학과에 전임교수 한 분도 없었으니 말이다. 한 분 있기는 하였으나 납치되어 행방불명 상태였다. 시간강사만 6명이 있었는데, 연세대 조희설, 서울대 사범대 김성근, 연세대 염은현, 서강대 길현모, 서강대 이보형, 나중에 합류하게 될 민석홍 교수 등이었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것은 대학 2학년 때부터 원서강독을 하였고, 3학년 때 염은현 교수와 서양사 강독을 하게 되었는데, 북구문예부흥과 공동생활형제단을 언급한 내용이었다. 대학생 홍치모는 여러 교수 제위로부터 따뜻한 사랑과 격려를 받았고, 학문하는 정신과 방법을 전수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에 들어간 청년 홍치모는 1957년부터 1961년 8월까지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였고, 제대하는 그 해 9월부터 숭의여자중고등학교 역사교사로 봉직하였다. 5년간의 교사 생활을 마치고 1967년부터 만 2년 동안 부산 고려신학교 전임강사로 일하게 되면서 신학교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에게 유학의 기회가 온 시점이기도 했다. 영국 출신 의료 선교사인 패터슨 씨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캠브릿지 의대 출신으로 Bible Training Institute in Glasow에서 1년간 수학한 바 있는 인물이었다. 패터슨 씨의 소개로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는데, 그 때가 1969년 8월 15일이었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969년 8월 15일 40세가 가까운 나이에 유학을 간다고 김포공항을 떠난 것이 바로 엇그제와 같이 생각된다. 당시 나는 결혼도 했고 두 아이의 아버지라서 무턱대고 외국에 나가 장기체류할 처지가 못되었다. 그 때 나의 유학지는 미국이 아니라 스코틀랜드 였는데 내가 재정에 여유가 있어서 마음 놓고 유학을 떠났던 것이 아니라 나를 받아주었던 학교 당국에서 모든 장학금을 지불하는 조건이었기에 떠날 수 있었다. 그리고 공부를 마치면 지체없이 곧 한국으로 돌아가는 것이 전제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그 학교에 도착하고 나서 일년이 지난 다음에야 비로서 나에게 학비를 지급했던 것은 학교 당국이 아니라 어떤 무명의 독실한 신자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가 누구였는지 모르고 있다.“ 홍치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1991), 3.
유학생 홍치모가 공부하였던 BTI는 19세기 말엽 미국의 부흥사 드와이트 무디와 생키의 스코틀랜드 부흥집회를 계기로 일어난 대중들의 종교적 열정에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이 학교는 시작부터 복음적인 입장을 강하게 견지하였고, 선교에 비중을 두어 많은 선교사역자들을 양산하였다. BTI는 발전을 거듭하여 Glasgow Bible College로 규모를 확장하였고, 지금은 다른 성서 대학과 병합하여 International Bible College로 교명도 바꾸고 미래를 향해 정진하고 있다. 지금은 아버딘 대학교와 개방대학교 등과 연계하여 대학원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이 학교 교수진도 획기적으로 보강되어 영성과 지성에 있어서 강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유학생 홍치모가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당시 학장이었던 죠프리 그로간의 배려로 글라스고 대학교 사학과에서 수학하게 되면서 눈코뜰새 없는 바쁜 시간들을 보냈다. 또한 스코틀랜드 역사학과 교수로 있던 Dr. I.B. Cowan은 1451년 글라스고 대학의 개교이래 처음 강의를 듣게 되는 한국 유학생에게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호의를 베풀었다. 글라스고 대학교는 영국에서 네 번째로 오래된 중세대학으로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해 낸 유서깊은 학원이었다. 선교사요 탐험가였던 데이빗 리빙스턴은 의대 출신이었고, 근대 경제학의 대부로 불리는 아담 스미스, 산업혁명의 물꼬를 튼 제임스 왓트,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가 존 낙스의 뒤를 이어 개혁의 다음 세대를 이끌었던 앤드류 멜빌 등 역사를 움직인 인물들을 배출한 요람이기도 했다. 그 무명의 한국 유학생은 여러 사람들의 배려로 소기의 유학 목적을 달성해 나갈 수 있었다. 대학 입학때부터 가지고 있었던 종교개혁사 연구에 대한 계획, 장로교인으로서 장로교의 본산지에 와서 사료를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으로 짧은 2년 동안의 유학생활을 보내면서 시간적 여유만 있으면 신간서점과 고서점을 뒤지고 다녔다. 또한 틈나는대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북아일랜드 등을 여행하면서 고적답사를 통한 역사의 살아있는 숨결을 대하기도 하였다. 유학생활을 통해 유학생 홍치모는 삶, 신앙, 역사에 대하여 폭넓은 이해와 실천적 교훈을 체득하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린시절 평양에서 다니던 장로교회, 남한으로 내려와 신앙생활을 지속적으로 했던 곳도 역시 장로교회, 유학은 장로교의 본산지인 스코틀랜드로 왔으니 감회와 깨닫는 바가 지대했을 것이다. 성경적인 가르침대로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는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을 보면서 신행일치의 살아있는 신앙에 대하여 심도있게 사색하였을 것이다. 또한 스코틀랜드 사람들이 자주 되뇌이는 ‘스코틀랜드에는 버릴 것이 없다’는 말과 같이 검소하고 소박한 삶에 자극을 받았을 것이다. 결국 이 시기는 유학생 홍치모에게 있어서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 되었음에 틀림없다.
만 2년에 걸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숭의여자전문대학의 전임교수로 임용되어 역사와 문화사를 5년동안 교수하였다. 그런데 대학이 부도를 내게 되면서 경영진이 교체되었고, 이 와중에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숭의여전을 사직하기 1년전부터 자연스럽게 총신대학 관계자들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신복윤 교무처장이 역사와 관련된 4학점 강의를 부탁해 왔고, 1976년부터 총신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홍치모 교수는 총신대학에 몸담기 시작한 이후 영국사에 대한 글들을 주로 쓰기 시작했다. 그는 16세기와 17세기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정치, 종교적 문제들을 다루었는데, 이유는 그의 생각에 1560년에 성취된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하나의 종교개혁운동으로만 끝난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정치와 종교의 대립과 투쟁으로 변모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장로교회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Ibid., 3.
낙산 선생은 자신의 스승 제위로부터 전수받은 학문하는 정신과 방법을 기회 있을 때마다 소개하였다. 그의 가르침에 따를 것 같으면, 학문 연구의 도구는 언어로써 도구가 예리하고 잘 준비되어 있어야 훌륭한 학문적 성과를 올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논문을 작성할 때는 제목설정이 중요한데 주제는 깨알과도 같이 구체적이고 압축된 것이어야 한다고 교훈 하였다.
총신대학에서 새롭게 교편은 잡았지만, 한국 정치 현실과 교단 정치 현실이 그렇게 순탄하지 않았던 관계로 원하지 않게 또다시 역사의 현실 앞에서 고민을 해야만 하였다. 총신학원이 총회직영 신학교였기 때문에 교단의 기류는 그대로 학원에 전달되었고, 교권주의자들은 신성한 학교를 교단정치에 끌어드리려는 시도를 지속하였다. 1980년 학내사태가 악화 일로에 있었고, 학생들이 교단관계자들의 차량을 전복시키는 일까지 감행하였다. 이 사건에 얽힌 일화가 있다. 학생들의 행동을 보고 홍치모 교수는 평생 자가용 승용차를 소유하지 않겠노라고 선언한 것이었다. 학생들 가운데 의아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이들도 있었겠지만, 아무튼 현재까지 자신이 한 약속을 지키고 있다.
그는 1990년 1학기 동안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초빙교수로 활동하였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퇴임하기 전까지 근 10여년 동안 미국장로교회사에 관한 글들을 집필하였다. 1996년 12월에는 종교개혁사 분야의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위치한 바이올라 대학교로부터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총신대에 재직하는 동안 홍치모 교수는 인간미가 풍기는 스승으로 제자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다. 본인이 사춘기와 청년기를 어렵게 보냈기 때문에 가난한 학생들의 현실과 심정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였다. 낙산 선생은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선행을 베풀었다. 특히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유학생활을 직접 경험한 당사자로서 제자들이 처한 상황과 그들의 필요를 휜히 알고 있었다. 유학하는 제자 가운데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가 있으면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주기도 했고, 모금을 통해 스폰서를 연결시켜 주었으며, 각 장학단체에서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실제적인 도움을 베풀었다. 그리고 유학하는 제자들의 집을 방문할 때는 식료품을 챙겨서 건네주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신자로서, 학자로서, 행정가로서의 낙산 선생의 삶은 초지일관 역사 앞에서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생을 살고자 노력한 흔적으로 수놓아졌다고 하겠다.
III. 홍치모 교수의 사상-그의 기독교 역사관과 역사 서술을 중심으로-
1. 기독교 역사관
홍치모 교수의 견해에 의할 것 같으면, 역사관을 논하기에 앞서 ‘역사’에 대한 정의를 먼저 규명함이 순서이다. 그는 역사라는 말에 두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첫째는 기록으로써의 역사인데, 문자가 발명된 이후 인간들이 기록으로 남긴 사료들을 통해 과거의 사건이나 사실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역사적 지식을 말한다. 둘째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민족의 문화적, 교육적 전승을 통해 개인이나 집단의 기억속에 살아 있는 역동적인 역사이다. 이 경우 전승을 받는 개인의 입장에 따라 한 사건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질 수 있다. 홍치모/이장식, 기독교 역사관 (서울: 기독교대학설립동역회출판부 1989), 2-3.
자연스럽게 역사를 바라봄에 있어서 객관과 주관을 바르게 이해하고 접근함이 기본인 것이다. 이점에 대하여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역사에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이라든가 사건들 자체는 의심할 여지없이 객관적 실재이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의 주관적 체험과 분리시켜서 그 사실들을 만날 수 없다. 이것은 인간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인생관 세계관 가치관의 차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서 우리는 이것을 흔히 주관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 세계를 바라볼 때 모든 사물이 하나님에 의하여 창조된 것으로 보는 반면 비기독교인들은 불가지론을 주장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우연의 소산으로 생각한다. 더구나 막스주의자들은 “태초에 물질이 있었으니”로 시작한다.“ Ibid., 3.
그는 이런 각도에서 설명을 계속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 사이에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양자간의 견해 차이를 거의 나타내지 않을 경우가 있지만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본질적인 차이를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기독교인이나 비기독교인을 막론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역사인식에 있어서 필요한 사료를 참고한다는 점에서 양자는 동일하다. 그리고 사료를 조작하고 분석하는 과정에 있어서 양자는 또한 가장 과학적이고 공정한 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 기독교 역사가들은 역사를 서술하기 전에 사료를 수집할 때 공정성과 전체성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역사가로서 지녀야 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은 작업이 끝난 후에 비로소 해석을 가해야 한다.” Ibid., 3-5.
이와같이 주관과 객관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강조하면서,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 사관의 전제를 중요하게 다룬다. 그에 따르면, 인간 사고의 근저에 사고의 당사자로 하여금 사고를 가능케 하는 패러다임이 있다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이 어떻게 형성되고 무엇을 지향하느냐에 따라 전체적인 사고 패턴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첫째로, 그는 주권자로서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전제한다. 위에서 살펴본대로, 그의 성장과정 속에서 부친이나 박윤선 목사 등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칼빈주의 개혁신학의 틀이야말로 기독교 역사가가 되기에 충분한 자질 요건을 제공하였다. 그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분으로 자연계와 영계를 통치하신다. 홍치모 교수는 구속사의 견지에서 특별계시를, 보편사의 측면에서 일반계시를 구분한다. 사실 하나님의 계시와 기록되어진 계시의 말씀인 성경은 구속사의 현장인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민족에게 제한되어 전개되었다. 신약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교회의 탄생과 더불어 그 경계가 없어졌다. 기독교 역사가는 기록되어진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섭리에 대하여 알 수 있다.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역사적 사건과 사실들을 다룸에 있어서 특히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성경적인 모델을 무비판적으로 적용시킬 경우 해석에 문제가 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원리를 가지고 역사를 연구하고 서술해야 되는 것이다.
둘째로,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 역사가들이 인간의 양면성을 전제하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할 때 자기의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성경은 말한다. 여기에서 형상이라는 말은 인격의 모습을 의미하거니와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할 때 자신의 인격의 속성 일부를 인간의 인격에 포함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곧 사람이 가지고 있는 양심, 이성, 감정, 의지, 언어 등을 구사할 수 있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땅 위에 있는 어느 피조물 보다도 뛰어난 존재이다. 인간은 이와같은 기능을 가지고 땅을 정복하고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사명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과 악을 구별하는 과실을 따 먹음으로 하나님께 반역의 죄를 짓게 되었다. 따라서 인간은 교만해졌을 뿐만 아니라 자기자신을 속이는 기만자가 되어 언제나 자신을 필요 이상 높이려는 유혹에 사로잡혀 있다. ... 인간의 영적 타락은 인간성을 전적으로 부패시켰다. ... 인간은 우주의 왕인 동시에 만물보다 못한 가증스럽고 찌꺼기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인간의 문화적 업적을 평가해야 할 것이다.” Ibid., 7-8.
인간성의 양면성을 전제로 했을 때, 기독교 역사가는 인간들이 역사속에서 창출해 낸 수많은 유무형의 문화적, 문명적 업적들에 대하여 바른 판단과 해석을 해야하는 의무가 수반된다. 특히 각 시대를 풍미하던 이데올로기, 즉 지배층이 고안해 낸 지도이념을 정확히 판명해 내는 작업이 중요하다. 이데올로기는 당시 대중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그들을 움직였기 때문에 사상의 실체를 파악하여 기독교적 가치에 근거하여 건설적인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Ibid., 10-11.
그런 견지에서 기독교 역사가가 성경적 도덕관과 가치기준을 갖는다는 것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랑에 근거한 비판을 낙산은 주장한다. 왜냐하면 기독교 사가도 역시 한계를 느끼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가는 자신속에도 허식과 허영이 있다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자신의 실존과 함께 역사의 동기를 제공했던 역사적 인물들에 접근해 들어가야 한다. Ibid., 12-13.
결과적으로 기독교 역사가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전제하는 가운데, 인간의 속성을 성경적으로 이해하고, 겸허한 가운데 성경적 도덕관과 가치기준을 확립하고 객관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2. 홍치모 교수의 역사 서술
홍치모 교수는 기독교적 역사 서술과 일반적인 역사 서술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구분하여 이해한다. 이런 점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기독교적이라는 말은 역사 서술의 밑바닥에 은연중 기독교 신앙이 확고하게 하나의 전제적 관념으로서 깔려있는 것을 말하는 동시에 역사 서술의 특성을 규정짓는 동질적이면서 다양한 가설, 가치, 이해, 그리고 통찰을 가리킨다. 그리고 기독교적 역사 서술은 세속적인 역사 서술과 상호 교류한다. 그러나 비판적으로 선별하여 수납한다. 그러므로 세속적 역사 서술보다는 선험적 위치에 있다.” Ibid., 14.
이와같이 기독교적 역사 서술의 개념을 이해하였던 홍치모 교수는 종교개혁사와 장로교회사 분야를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였다. 이제, 그의 대표적인 저술들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홍치모 교수의 역사 서술에 대한 입장을 파악하고 정리해 보고자 한다.
1) 종교개혁사 (1977)
홍치모 교수의 처녀작이라고 할 수 있는 본 저서는 종교개혁사 분야에서 선구자적인 위치를 가지면서 동시에 고전으로 분류될 수 있는 저술이다. 이 책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I. 문예부흥과 종교개혁
II. 루터와 종교개혁(1)
III. 루터와 종교개혁(2)
IV. 칼빈과 종교개혁
V. 영국과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
VI. 역사가의 연구 업적 및 평가
먼저, 제1장을 서술하면서, 종교 개혁 운동이 중세 지성사의 연속 선상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고, 중세와 종교 개혁시기 사이에 존재하는 사상적 간격을 공동 생활 형제단을 통해 해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또한 홍 교수의 기독교적 역사 서술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제2장과 제3장에서도 이러한 흐름은 계속된다. 특히 제3장에서 마그데부르그 시절의 루터를 사실하면서 공동 생활 형제단 출신의 교사들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측면을 부각시킨다. 결국 오늘의 헌신 운동을 지성사의 연결고리로 보려는 그의 입장에 무게를 더해 주게 된다. 홍치모, 종교개혁사 (서울: 성광문화사 1977), 49, 81-105.
제4장과 제5장을 통해서 홍치모 교수는 자신의 개혁파 또는 장로교적 신앙과 신학의 전제를 암시하게 된다. 사실 루터파나 칼빈을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나 다같이 프로테스탄트 그룹에 속하지만 신학과 예전 등 중요한 부분에서 차이가 나기 때문에 각기 다른 전통과 교파로 구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잉글랜드 종교개혁을 다루면서, 홍 교수는 청교도 개혁가요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장로교인인 토마스 카트라이트를 중점적으로 조명한다. 그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을 언급하면서 에딘버러 대학의 교수였던 고든 도날드슨 교수의 감독제 옹호적인 입장을 스탠포드 리드 교수의 주장을 통해 반박한다. Ibid., 131-211.
그러므로 홍치모 교수 자신이 피력했던대로 기독교 사가의 신앙적 전제와 선험이 종교개혁사 서술에 베어 있다는 사실이 재확인 되는 것이다.
2)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1983)
앞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홍치모 교수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서양사 강독을 통해 북구 르네상스와 공동생활형제단에 관한 정보들을 얻었다. 대학 졸업 후, 공동생활형제단에 관한 연구서가 미국 학자에 의해 발간되는데, 홍 교수는 미국에 가는 선교사에게 요청하여 그 책을 입수하였다. 그 책의 저자는 Albert Hyma로서 화란계 미국인이자 미시간대 역사학과 교수로 재직중에 있던 분이었다. 그는 에라스무스 연구의 대가로서 칼빈대를 나와 미시간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유능한 역사가였던 것이다. 홍치모 교수는 1956년부터 1969년까지 하이마 교수의 책들을 위주로 탐독하는 가운데, 서신교환을 통해 원거리 개인지도를 받기도 했다. 이런 과정속에서 홍 교수는 문예부흥과 기독교 인문주의와 연관된 논문들을 발표하게 되고, 결국 한 권으로 책으로 묶어 출간한 것이 본 저서이다. 이 책의 제목은 일찍이 하이마 교수가 Renaissance to eformation라는 저서를 간행한 바 있으므로 번역하여 동일하게 사용하였다.
본 저술은 제1장 북구 르네상스 운동의 기원, 제2장 말틴 루터와 Devotio Moderna 운동, 제3장은 칼빈의 사상과 종교개혁, 그리고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홍 교수의 역사 서술에 대한 일관된 입장은 여기서도 목격된다.
“공동생활의 형제단의 출신으로서 교육방면에 종사하던 형제들은 이와같이 무의식중에 서서히 이태리 인문주의자들의 사상에 함축되기 시작하였고, 그와 같은 변화가 진행하고 있을 때, 에라스무스는 Deventer School에 입학하여 인문주의 교육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훗날 회상하기를 12세 되던 어느 날 Rudolf Agricola를 본 일이 있으며, 자기는 Hegius 교장 밑에서 공부했다고 분명히 말한 바 있다.
Deventer School은 Devotio Moderna 운동의 창시자인 Gerard Groote의 종교사상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새 시대의 조류인 이태리 인문주의사상을 흡수함으로써 경건적 신앙과 고전적 학문의 조화를 조심스럽게 시도했다. 그리하여 많은 인문주의자들을 배출시킴으로서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개혁자 Martin Luther도 소년시절에 비록 짧은 1년 동안이기는 했지만 마그데부르그시에서 공부할 때 공동생활의 형제단에 속해 있던 형제들의 가르침을 받아 그곳 사원학교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배우게 되었던 것이다.
북구 인문주의의 왕자 에라스무스는 소년시절에 그곳에 몸담아 배운 원시 기독교의 정신과 고전적 고대정신을 적절하게 종합하여 조화를 시도하는 것을 평생의 사명으로 생각했으며 그것은 곧 공동생활의 형제단들로부터 배운 Devotio Moderna 정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또한 타당할 것이다.“ 홍치모, 북구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서울: 성광문화사 1983), 27-28.
그의 첫 저서에서 언급된 북구 르네상스, 기독교 인문주의, 공동생활형제단 등 일련의 역사적 진행 과정에서 나타난 사건, 사상, 운동들이 16세기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주게 된다는 요지인데,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개혁 성향의 종교적인 요소와 성격이 부각되어 강조된다는 점이다.
3)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1991)
홍치모 교수가 1969년 8월에 영국 스코틀랜드로 유학을 떠나 1971년 귀국한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관한 글들을 중점적으로 연구 발표하였고, 그 결정체가 바로 본 저서이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제 I 부 스코틀랜드 교회와 영국 혁명
제1장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
제2장 존 낙스의 계약사상 형성과정
제3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교회제도
제4장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교회재산 처리문제
제5장 제임스 IV세의 종교정책
제6장 찰스 I세의 대 스코틀랜드 정책
제7장 스코틀랜드와 영국혁명
제8장 Robert Baillie와 그 시대
제9장 스코틀랜드와 청교도 혁명
제10장 청교도 혁명에 있어서의 장로파와 독립파에 관한 논의
제11장 크롬웰 통치하의 스코틀랜드
제 2 부 스코틀랜드사 연구의 역사적 고찰
제1장 존 낙스 연구에 관한 최근의 동향
제2장 스코틀랜드에 있어서의 계약사상
제3장 스코틀랜드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계약파 연구 현황
제4장 스코틀랜드 연구의 동향
제5장 영국 혁명사 연구에 대한 재평가
홍치모 교수도 언급했거니와 1560년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으로부터 1660년 왕정복고에 이르기까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에 숨막히게 전개된 양국 관계를 중점적으로 고찰하였다. 홍치모,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 영국혁명 (서울: 총신대출판부 1991)
특히 본 저술을 통해 홍 교수는 기독교 사가들의 편협성, 즉 교회사만을 위주로 연구하던 경향을 극복하고 폭넓은 역사 서술의 가능성을 한층 더 구체화 시켰다. 물론 이전 저술에서 이런 경향이 전무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상황이 정치와 종교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왜곡하는 것도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목차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기독교적 관점에서 교회사 뿐만 아니라 일반사도 심도있게 다루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경향은 홍치모 교수의 주장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된다.
“... 교회사에 대한 집중적 연구는 일반 세속적 역사가들로 하여금 기독교적 역사서술은 교회사를 의미한다는 편협한 인식을 갖게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적 역사 서술이란 결코 한정된 영역안에 있어서의 연구, 즉 교회사에만 국한시킬 수 없다.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역사가가 시도해야 할 연구는 어떻게 일반 세속사를 기독교적 신앙과 안목에서 의미있게 해석하고 서술하느냐에 있다.” 홍치모, 기독교 역사관, 18.
이와같이 교회사 위주의 편협성을 넘어 기독교적 역사 서술의 지평을 넓혀가면서도 홍 교수의 저작에서 일관되게 목격되는 기독교적 또는 신학적 전제는 변함없이 그 근저에 깔려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에서 일어난 장로제와 감독제의 대립, 잉글랜드 청교도 내부에서 발생한 장로파와 독립파의 대립과 논쟁 등을 비중있게 다룬 이유도 이런 전제에 근거하고 있음일 것이다.
4) 영미장로교회사 (1998)
이 역사 서술은 홍치모 교수의 장로교 신학과 신앙을 역사가로서 고백적으로 기록한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로교회가 16세기 종교개혁의 산물이기 때문에 당대의 역사 연구는 당연히 후대의 발전 과정과 깊은 연관을 갖기 마련임으로 자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고 저술 활동을 하게 된 데는 1990년 3월부터 6월까지 미국 필라델피아에 위치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연구교수로 체류하면서부터이다. 그는 향후 10년 간 미국 장로교회에 관한 연구로 일관하여 왔다.
장로교 신자이면서 역사가인 홍치모 교수는 본 서를 계획하면서 카나다와 호주 장로교회도 포함시킬 계획이었으나, 여러 가지 사정에 의해 가장 핵심적인 영국(스코틀랜드)과 미국 장로교회로 그 범위를 제한하였다.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사와 관련하여,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기원과 성립, 장로 교회의 수난과 영향, 교회의 변혁, 분리, 재연합, 그리고 에필로그 등으로 구성하였다. 미국 장로 교회사와 관련하여, 먼저, 미국 장로 교회의 형성 과정, 프린스톤 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 미국 장로 교회의 분열과 재연합, 19세기 미국 장로 교회에 있어서 근본주의와 현대주의의 성격, 찰스 브리그스 사건, 미국 교회 내에서의 근본주의 신학 운동, Westminster 신학교 설립의 역사적 배경, J. Gresham Machen 교수의 생애와 사상, 마지막으로 미국 장로 교회와 보수주의 신앙 운동의 변천 등으로 꾸며졌다. 영미 장로 교회사를 마무리하면서 홍 교수는 자신의 신앙적 확신을 가지고 각 장로교회의 현실적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점을 제시함으로 장로교회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인 메시지를 남겼다.
“... 그리고 세속 문화와 가치들의 폭발적인 확산 등과 맞서 교회의 순수성과 사회에 대한 지도력을 행사 하기 위해 투쟁하였고, 또한 진행 중이다. 현금,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매년 발표하는 통계에 따르면, 교인 수는 계속 감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하였듯이, 스코틀랜드 교회는 우리가 예기치 못하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홍치모, 영미장로교회사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 127.
”
“어떤 비전도 교회는 제공하지 못한 채 주류 교단 교회들은 세속의 물결 위에 실려 떠내려 가고만 있다. 오늘의 미국 교회의 형편이나 한국 교회의 형편이 어떤 면에서 매우 유사한 면을 나타내고 있거니와 무엇보다도 미국 장로 교회는 장로 교회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한다. Ibid., 340.
”
결과적으로, 홍 교수는 철두철미한 개혁주의 역사관을 가지고 기독교 신앙, 더 구체적으로는 장로교 신앙을 전제로 역사 서술에 임했다. 위에서 간략하게 정리한 네 권의 저서들이 그 대표적인 증거인 것이다.
VI. 결론과 평가
지금까지 간략하게 살펴본 바를 중심으로 낙산 홍치모 교수의 생애와 사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함으로 결론에 대신코저 한다.
첫째로, 홍치모 교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을 살아오면서 소시적부터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의 절대 주권 사상을 믿고 실천해 왔다고 할 수 있다.
둘째로, 그는 잉글랜드의 청교도 정신과 스코틀랜드의 장로교(특히 언약도) 정신에 입각하여 신행일치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였다.
셋째로, 그는 역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전제하였고, 인간의 양면성을 인식하는 가운데 그 한계성을 분명히 유념하였다. 이런 견지에서 홍치모 교수는 서구 학계의 연구를 한국에 소개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라고 말하곤 하였던 바, 자신의 한계를 정하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견지하였다. 사실 인간이 만능일 수 없고 그 한계가 분명하다는 견지에서 홍 교수는 후학들에게 사심없는 연구 자세와 겸허한 삶의 덕목을 교훈하였다.
넷째로, 그는 역사 서술에 있어 주관적인 요소와 객관적인 요소에 균형을 이루었다.
다섯째로, 기독교 역사가가 교회사 서술에만 한정되지 않고 일반사를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다룰 수 있다는 사실을 실제적으로 제시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는 학문함의 과정속에서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서 뿐만 아니라 사람과의 수평적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여 상식적인 신의와 도리를 다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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