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신교단의 신학노선과 정체성
대신교단의 신학노선과 정체성
유 중 경 목 사
1. 서론
세계 제2차 대전 후 일제의 치하를 벗어난 후 한국교회는 분열의 시기를 맞았다. 한국교회는 일찍이 연합사업에 있어서 오랫동안 협조적이었으나 해방 이후 특히 한국동란기를 통하여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장로회를 위시하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모두 분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중 가장 심한 교파는 장로회로서 고려파(1951), 기독교장로회(1954), 합동과 통합측(1959)등의 순서로 분열되어 갔다.
분열에 대한 주요 신학적인 원인은 첫째로, 신사 참배에 대한 문제로서 장로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던 소위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총회에서 분리되어 1951년 고려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둘째로, 성서관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에서 결국 1954년 소위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되었고, 끝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문제로 친 에큐메니칼파와 반 에큐메니칼파 간에 소위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1959년 분열되었다.
1959년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게 되자 대한신학교 교장이며 총신교수이신 김치선박사는 통합이나 합동, 그 어느 편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신학교에서 주의 종을 양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래서 교단에 소속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1960년 9월 미국에서 들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마두원선교사와 함께 "성경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어 근본주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보수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2. 신학교 설립
가. 설립 배경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 이후 대한신학교는 상황에 따라 안양대학교로 표기하겠음)는 김치선 박사에 의해 창립되고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신교단의 역사성을 규명함에 있어서 설립자 김치선 박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선 박사는(1899-1968) 1919년의 3, 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1년 후 출옥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장로회연합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9년 일본코배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 2학년에 편입하여 1931년 2월 23일 코배중앙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일본신호중앙교회에서 31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치선 박사는 1934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 M. 과정을 졸업, 1936년에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모세 오경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신학 박사(Th. D) 학위를 받았다. 1944년 2월에 남대문교회 청빙을 받아 시무 하였으며, 1948년 2월에 남대문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야간신학원인 대한신학교(안양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 2대 원장으로 취임, 1950년 4월 장로회신학교 초대교수로 취임(현 총신대), 1959년 총회신학대학 이사 취임. 1961년 대신 초대, 2대 총회장 역임. 1965년 대한신학교 명예교장 취임, 1968년 2월 24일(70세) 소천 하였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신학교는 장로회 해외 선교부 협의체에서 1901년 평양에 세운 연합장로회신학교(The Union Theological Seminary)다. 그러나 일제의 교회 탄압과 신사참배의 강요로 38년의 역사와 보수신학 사상의 전통을 가진 평양신학교가 1938년 9월30일 무기 휴학을 선언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폐문 전 1938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 설립, 익년 4월 개교하였다. 이는 평양신학교의 설립정신인 보수주의 신학사상과는 달리 자유주의 신학사상으로 세워진 신학교였다. 이에 반하여 보수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일명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대한신학교는 이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48년 2월 남대문교회에서 김치선 박사를 중심으로 평양신학교 정신을 계승한 보수주의 신학의 장로회 야간신학원으로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 김선두 목사(비법인 이사회)를 세우고 초대원장에 윤필성 목사를 세웠다. 1949년 교사를 남대문교회에서 서대문으로 이전하고 2대 원장으로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여 교명을 대한신학교라 하였다.
이에 앞서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불만인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김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함으로 장로교신학교의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1948년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와 교장 박형룡 박사의 의견 충돌로 문제가 대두되던 때에 이 사건이 벌어져 1949년 4월 19일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의하였다. 이때 주간은 장로회신학, 야간은 안양대학교였다. 안양대학교 설립에 대해서 설립자 김치선 박사의 딸 김동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이 굳게 닫혔으나 38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인들, 특히 평안도 성도들이 많았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신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치선 목사가 동지목사들에게 설명하고 1948년 8월에 남대문교회에서 야간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초대교장으로 윤필선 목사가 되었고, 1949년 1월에는 서대문 건물을 얻어 이전하고 교장으로 김치선목사가 취임하였다.”
장로회신학교(장신대), 총회신학교(총신대)는 연합장로회신학교의(일명, 평양신학교) 설립 연대를 따르고 있고 조선신학교(한신대), 고려신학교(고신대), 대한신학교(안양대)는 독자적인 학교 연역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신학교는 1938년 설립된 조선신학교와 1946년 설립된 고려신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장로교신학교이다. 그리고 1972년 3월 대학원 전신으로 2년제 신학연구원(Th.M 당시 대한신학교는 1학년은 교양과목을, 2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M.Div 과정이었음)을 설립하였다.
나. 교육이념 및 목표
김치선 박사는 보수주의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28,000여 동네에 우물을 팔 목회자 양성과 당시의 인구 3,000만의 십분의 일인 300만 구령운동을 벌렸다. 또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 야간신학교를 설립하고, 교훈은 “주님께 충성. 타인에게 겸손, 자신에게 진실”이라는 교육 이념을 표명했다. 안양대학교의 초창기의 신학 이념은 그 시대의 보수신학으로서 개혁파(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여 가르치기보다는 구령에 불타는 선교의 열정이 신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대신교단의 개혁파 신학은 최순직 박사(1923-1999)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최순직 박사는 대한예수교연합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와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와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1966), 미국 탈보드신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박형룡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고 후에 코베개혁파신학교에서 오카다 미노루 교수의 개혁파 신학사상을 그대로 전수하였다. 그는 “6일 신학과 하나님의 종교명령과 문화명령”을 강조했다. 강의 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주장하였다. 종말론에 있어서 무천년기설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과 같다. 이때부터 대신은 무천년기설을 받아드린 것이다. 그는 강조하기를 참된 기독교 신학은 교본사(敎本史)에서 찾아야 하며 교본사적 입장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교본(텍스트)은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적 입장이란 기독교회가 역사를 통하여 성경을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역사적 신앙고백서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신학은 철저한 칼빈주의 개혁파 신학이다. 그는 대신교단의 ‘교회 선언’을 통해 대신교단의 신학의 정체성을 천명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최순직 박사는 안양대학교 약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해방과 동시에 다사다난했던 시대에 한국의 예레미야로 그 명성이 높았던 김치선 박사가 한국의 어머니 교회였던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삼백만 구령을 위한 부흥운동과 신앙청년운동을 그 극치까지 이끌어 갔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1948년 2월 대한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신학교가 야간신학교로서 출발하게된 것은 월남하여 복음 전도사명에 불타 신학에 뜻을 두었으나 경제적으로 주간에 공부할 수 없는 사명 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양대학교는 해방과 6. 25와 같은 역사적 변혁기에 민족 복음화를 위한 사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단적 지원과 성원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뜻 있는 분들의 사명에 의해 민족의 십일조인 삼백만 구령운동과 이만팔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야할 사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순수한 정신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에 대신인들은 어느누구 못지않게 구령에 대한 열정이 불탔다.
이와같이 안양대학교의 설립목적이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소명자를 양성하는 학교로 시작되었으므로 그 목적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할 것이며, 대신인 만이 가질 수 있는 끈질긴 소명의식과 신앙적 투지로 개혁주의 신학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3. 교단설립
가. 본 교단의 설립취지
최순직 목사는 교단 설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통합으로 분열되기 전)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한신학교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난문제들이 제기 되어 결국 대한 신학교가 총회에서 이탈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는 신앙노선상의 문제가 아니고 총회직영문제로 야기된 것이다. 그후 대한신학교는 교파적 배경이나 선교사의 배경이 없어졌고 이에 따라 학교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운영 면에 있어서나 졸업생들의 진로 면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때마침 1960년 8월 서울 회현동 성도교회 당에서 I.C.C.C. 극동 기독교 대회가 개최됨을 계기로 대한신학교는 이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 1961년 6월 21일 한성교회당(서울역 소재)에서 성경장로회 I.C.C.C. 소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차 긴급총회 촬요에서 교단설립취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60년 마두원 목사 김치선 목사 외 4명의 목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들어오는 신신학적이며 자유주의 현대 사조를 막기 위하여 근본주의적 보수교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경장로회를 창설하기로 합의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신교단은 신신학과 자유주의의 현대사조를 막기 위해 보수 교단을 창설했으며, 신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여 목사 안수를 주어 사명자를 양성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나. I.C.C.C. 교단으로 출발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제3공화국이 세워지고 사학(私學)에 대한 중앙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특별히 신학교에 있어서 일개교단에 단일신학 정책으로 교단이 없는 학교는 폐쇄한다는 지침까지 세워졌다.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직영신학교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로회 총회에서는 안양대학교를 교단신학교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김치선 박사는 이를 거절하고 독자적 초교파적 야간신학교로 운영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통합의 분열이전) 산하에 속해 있으며 총회신학교 교수이었으나. 1969년 9월 대전 총회 때 교수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는 총회신학 교수로 있을 때 안양대학교 운영과 교단과의 관계에 있어 교장 박형룡 박사와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사표이후 대한 신학교 운영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미 독립 장로교 선교부 선교사인 마두원목사와 협력함으로 안양대학교의 운영난이 해결되었으며 황하운, 최순직, 정현택목사들과 함께 발기인으로하여 성경장로교단을 창립하기로 하였다. 이에 경기노회를 1960년 9월 6일에 창립 조직한 후 마두원 선교사가 개척한 강원도 홍천지구를 중심하여 1961년 3월 경북노회, 4월에 경충노회, 5월에 전라노회, 경중노회, 경남노회, 경서노회로 8개 노회가 설립되었고 80여 교회가 가입하게 되었다. 1961년 서울 남산동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가 열려 김치선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여 성경장로회로 출발하였다.
제3총회가 1968년 3월 청파동 성암교회에서 개최하였는데 총회는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할 것을 가결하였다. 1972년 4월 제7회 총회 때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으로 교단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74년 8월 19일 제9회 총회 때 “교회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은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교단으로서 한국교계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4. 교회선언
가. 교회선언의 의의
1974년 공포된 「교회선언」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대신교단의 정체성을 대 내외에 알리며 지켜나가기 위한 표징이다.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서의 작성배경은 이단 사상을 방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공교회의 고백적 선언이다. 신조들은 성경을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거짓된 교훈과 생활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공적표준으로서의 방패가 된다는 정신에 의해 교회선언문이 작성된 것이다. 1974년 8월19일에 선포하고 2003년 5월에 보완한 ‘교회선언’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회 선언
1. 전문
우리는 전통과 역사적 유산을 소중히 여겨 영구히 기념하며 보존함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본 교단의 교회선언문을 전문에 붙이는 바이다.
2. 본 교단의 노선
가. 신학적 교리적 입장
① 우리는 성령으로 영감된 신․구약성경이 기독교회의 유일무오(唯一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임과 신앙과 생활의 규준(規準)임을 믿으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 신조들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본(標本) 으로 삼는다.
② 우리는 성경만이 기독교회의 근본원리임을 믿는 역사적 개혁파교회의 전통(傳統)과 정통(正統)을 지 켜나간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란 사도들의 신앙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질된 기독교회를 개혁하고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교회의 본질을 보존하며 발전해 나가는 진정한 기독교회를 의미한다. 개혁파 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회신조의 교리적 규준을 유지하는 한편 교회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고 객관적으로 확증되는 경우에는 하나님 의 말씀에 비추어서 공적이며 객관적인 논증을 거쳐서 시정할 수 있다.
③ 우리는 신율적 복음주의(神律的 福音主義) 입장이다. 신율적 복음주의란 신․구약성경이 통일적 계시 진리(啓示眞理)로서의 하나님의 도덕율법(道德律法) 임을 믿는 복음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톨릭 교회의 성례주의와 자유주의 교회의 율법경시주의와 하나님의 율법을 도덕율법으로 보지 않고 단 순히 죄와 구속(救贖)의 관계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신정통주의적 입장과는 다르다.
④ 우리의 신학은 개인신앙의 주관적 학적 표명(表明)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교회성을 본질로 하는 교회신조 (敎會信條)에 의한 개관적 학적 석명(釋明)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칼빈주의를 표방(標榜)한다. 이는 우리의 신학이 칼빈 한 사람의 개인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의 계시진리를 역사적 기독교회가 신조 또는 교회의 신학자들의 저술형태로 고백해 온 체계적 진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共同信條)를 비롯하여 어거스틴, 루터, 칼빈, 베자,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17세기 개혁파교회의 신조들, 19세기와 20세기의 개혁파 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변증, 변호, 보존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적 입장이다.
나. 교회정치
① 우리는 장로주의체제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정치체제임을 믿으며 장로들에 의한 정치, 교직평등, 단계적 교회회의를 통해 교회의 통치권이 행사됨을 원칙으로 한다.
② 우리는 교회의 자율적 원칙에 의해 교회정치를 행하며 국가에 대해서는 영역주권적 정교분리(領域主權的 政敎分離)의 원칙을 주장한다. 영역주권이란 정권과 교권을 구별하여 국가는 국가권력,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 지배권 즉 교권에 의해 통치됨을 의미한다. 교권이란 어떤 특정한 교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 전체에 부여하신 위탁권을 의미한다.
다. 신앙생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덕 율법이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음을 믿고 실천한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1과 98에 명시된 바와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도덕율법으로서 신앙생활의 유일한 도덕규준(道德規準)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신앙(聖經信仰)의 경건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무율법적(無律法的)이고 자율적인 자유로운 행위에 의한 선행이나 우리의 양심과 분별력, 신념이나 신앙의 분량 등을 신앙생활의 규준으로 삼지 않고 맹목적인 복종도 하지 않으며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것만이 선이며 온전한 행위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감사함으로 복종하는 삶을 실천한다.
3. 본 교단의 사명
가. 진정한 성경적 유신론 확립
진정한 기독교회의 근본 과제는 성경적 유신론을 확립하는 일이다. 성경적 유신론이란 역사적 기독교회가 사도적 신앙전승에 기초하여 보존되고 전달되어 온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 즉 하나님 중심 사상을 의미한다.
나. 진정한 하나님의 중심 교회 수립
우리는 이 땅위에 있는 가시적 교회가 하늘에 있는 불가시적 교회와의 공동성(共同性)을 유지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서가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제도, 질서)와 신자의 신앙생활이 일치되도록 실천하는 일이다. 역사적 기독교회의 참 모습은 불가시적 교회의 내용이 가시적 교회의 것이 되도록 항상 힘써 노력하며 하나님 중심의 성도의 영적 교제가 참되게 이루어지는 데서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지상의 개 교회는 거룩하고 역사적인 공교회(公敎會)의 지체(肢體)됨과 구원의 확신을 입증해야 한다. 거룩하고 역사적인 공교회란 교파교회의 합동이나 이상적(理想的) 지상국가의 건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교회, 즉 성경적 교회를 의미한다.
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다. 우리는 제도상의 분파는 인정하나 교권주의적 교회 확장운동은 반대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교회의 단일성을 믿으며, 교리, 정치, 신앙생활의 일치에 의하여 교회의 참된 공교회성(公敎會性)을 유지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의한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코자 한다.
라. 하나님 중심의 문화건설에 이바지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 의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진정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며 문화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 중심의 풍토를 조성해 나가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인식한다. 이에 우리는 기독교 유신론적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의 기존 위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세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도리를 다 한다. 이는 오늘날 인본주의적으로 사회개혁을 도모하는 사회복음주의적 기독교 세속화 운동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우리는 역사적 개혁파교회의 개혁정신에 입각하여 일시적인 하나의 지역적 성격을 띤 교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원칙을 준수하는 진정한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교회성(公敎會性)과 일치성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사도적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진정한 교회의 실현을 표방(標榜)하는 교회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5. 결론
위에서 살펴본 대로 대신교단은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장로교파 중에서 설립 이념을 살려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개혁파 장로교회로 성장시켜 나아갈 의무가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본 교단의 우수성을 스스로 체득하고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교단의 발전에 힘써야할 것이다.
http://blog.daum.net/kkho1105/1961
유 중 경 목 사
1. 서론
세계 제2차 대전 후 일제의 치하를 벗어난 후 한국교회는 분열의 시기를 맞았다. 한국교회는 일찍이 연합사업에 있어서 오랫동안 협조적이었으나 해방 이후 특히 한국동란기를 통하여 사정은 크게 달라졌다. 장로회를 위시하여 한국교회의 대부분은 모두 분열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중 가장 심한 교파는 장로회로서 고려파(1951), 기독교장로회(1954), 합동과 통합측(1959)등의 순서로 분열되어 갔다.
분열에 대한 주요 신학적인 원인은 첫째로, 신사 참배에 대한 문제로서 장로회에서는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던 소위 출옥 성도를 중심으로 한 보수파가 총회에서 분리되어 1951년 고려파를 형성하게 되었고 둘째로, 성서관을 중심으로 한 보수파와 진보파의 대립에서 결국 1954년 소위 기장과 예장으로 분열되었고, 끝으로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한 문제로 친 에큐메니칼파와 반 에큐메니칼파 간에 소위 통합측과 합동측으로 1959년 분열되었다.
1959년 합동과 통합으로 갈라지게 되자 대한신학교 교장이며 총신교수이신 김치선박사는 통합이나 합동, 그 어느 편에 속하기를 원하지 않고 오직 신학교에서 주의 종을 양성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기로 하였다. 그래서 교단에 소속하지 아니하고 있다가 1960년 9월 미국에서 들어와 한국에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 마두원선교사와 함께 "성경장로회 총회"가 조직되어 근본주의 입장에서 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보수교단으로 출발하게 되었다.
2. 신학교 설립
가. 설립 배경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과 대한신학교(현. 안양대학교, 이후 대한신학교는 상황에 따라 안양대학교로 표기하겠음)는 김치선 박사에 의해 창립되고 설립되었기 때문에 대신교단의 역사성을 규명함에 있어서 설립자 김치선 박사를 소개하지 않을 수 없다. 김치선 박사는(1899-1968) 1919년의 3, 1 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어 함흥감옥에서 서대문형무소로 이송되어 1년 후 출옥하였다. 그는 감옥에서 하나님의 소명을 받아 목사가 될 것을 결심하였다. 1927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27년 장로회연합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에 입학, 1929년 일본코배중앙신학교(神戶中央神學校) 2학년에 편입하여 1931년 2월 23일 코배중앙신학교 본과를 졸업하고, 일본신호중앙교회에서 31세 때 목사 안수를 받았다. 김치선 박사는 1934년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Th. M. 과정을 졸업, 1936년에 달라스신학교(Dalla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모세 오경에 관한 연구"라는 논문으로 신학 박사(Th. D) 학위를 받았다. 1944년 2월에 남대문교회 청빙을 받아 시무 하였으며, 1948년 2월에 남대문교회에서 한국 최초의 야간신학원인 대한신학교(안양대학교)를 설립하였다. 1949년 2대 원장으로 취임, 1950년 4월 장로회신학교 초대교수로 취임(현 총신대), 1959년 총회신학대학 이사 취임. 1961년 대신 초대, 2대 총회장 역임. 1965년 대한신학교 명예교장 취임, 1968년 2월 24일(70세) 소천 하였다.
한국 최초의 장로교신학교는 장로회 해외 선교부 협의체에서 1901년 평양에 세운 연합장로회신학교(The Union Theological Seminary)다. 그러나 일제의 교회 탄압과 신사참배의 강요로 38년의 역사와 보수신학 사상의 전통을 가진 평양신학교가 1938년 9월30일 무기 휴학을 선언했다. 그리고 평양신학교 폐문 전 1938년 3월 27일 조선신학교 설립, 익년 4월 개교하였다. 이는 평양신학교의 설립정신인 보수주의 신학사상과는 달리 자유주의 신학사상으로 세워진 신학교였다. 이에 반하여 보수주의 신학사상을 가진. 일명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사람들이 194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를 설립 개교하였다.
대한신학교는 이같은 시대적 상황 속에서 1948년 2월 남대문교회에서 김치선 박사를 중심으로 평양신학교 정신을 계승한 보수주의 신학의 장로회 야간신학원으로 설립되어 초대 이사장 김선두 목사(비법인 이사회)를 세우고 초대원장에 윤필성 목사를 세웠다. 1949년 교사를 남대문교회에서 서대문으로 이전하고 2대 원장으로 김치선 박사가 취임하여 교명을 대한신학교라 하였다.
이에 앞서 김재준 목사의 자유주의 신학사상에 불만인 조선신학교 학생 51명이 1947년 4월 18일 대구에서 열린 제33회 총회에 김교수에 대한 진정서를 제출함으로 장로교신학교의 재건운동이 일어나고, 1948년 고려신학교 설립자 한상동 목사와 교장 박형룡 박사의 의견 충돌로 문제가 대두되던 때에 이 사건이 벌어져 1949년 4월 19일 장로회신학교를 총회 직영 신학교로 결의하였다. 이때 주간은 장로회신학, 야간은 안양대학교였다. 안양대학교 설립에 대해서 설립자 김치선 박사의 딸 김동화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48년 5월 10일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고 8월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38선이 굳게 닫혔으나 38선을 넘어 구사일생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인들, 특히 평안도 성도들이 많았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신학교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치선 목사가 동지목사들에게 설명하고 1948년 8월에 남대문교회에서 야간신학교를 설립한 것이다. 초대교장으로 윤필선 목사가 되었고, 1949년 1월에는 서대문 건물을 얻어 이전하고 교장으로 김치선목사가 취임하였다.”
장로회신학교(장신대), 총회신학교(총신대)는 연합장로회신학교의(일명, 평양신학교) 설립 연대를 따르고 있고 조선신학교(한신대), 고려신학교(고신대), 대한신학교(안양대)는 독자적인 학교 연역을 가지게 되었다. 대한신학교는 1938년 설립된 조선신학교와 1946년 설립된 고려신학교. 다음으로 설립된 장로교신학교이다. 그리고 1972년 3월 대학원 전신으로 2년제 신학연구원(Th.M 당시 대한신학교는 1학년은 교양과목을, 2학년부터 4학년까지는 M.Div 과정이었음)을 설립하였다.
나. 교육이념 및 목표
김치선 박사는 보수주의 신학사상에 입각하여 28,000여 동네에 우물을 팔 목회자 양성과 당시의 인구 3,000만의 십분의 일인 300만 구령운동을 벌렸다. 또한 교회 지도자 양성을 위해 야간신학교를 설립하고, 교훈은 “주님께 충성. 타인에게 겸손, 자신에게 진실”이라는 교육 이념을 표명했다. 안양대학교의 초창기의 신학 이념은 그 시대의 보수신학으로서 개혁파(개혁주의) 신학을 정립하여 가르치기보다는 구령에 불타는 선교의 열정이 신학보다 앞섰다고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대신교단의 개혁파 신학은 최순직 박사(1923-1999)에 의하여 확립되었다. 최순직 박사는 대한예수교연합장로회신학교(일명, 평양신학교)와 총회신학교(현, 총신대학)와 일본 코베개혁파신학교(1966), 미국 탈보드신학교 등에서 수학하였다. 그는 박형룡 교수로부터 조직신학을 배웠고 후에 코베개혁파신학교에서 오카다 미노루 교수의 개혁파 신학사상을 그대로 전수하였다. 그는 “6일 신학과 하나님의 종교명령과 문화명령”을 강조했다. 강의 시간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성경의 무오성과 영감성을 주장하였다. 종말론에 있어서 무천년기설을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입장과 같다. 이때부터 대신은 무천년기설을 받아드린 것이다. 그는 강조하기를 참된 기독교 신학은 교본사(敎本史)에서 찾아야 하며 교본사적 입장이 아니면 안된다고 했다. 교본(텍스트)은 성경을 의미하는 것이며, 사적 입장이란 기독교회가 역사를 통하여 성경을 유일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역사적 신앙고백서의 입장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신학은 철저한 칼빈주의 개혁파 신학이다. 그는 대신교단의 ‘교회 선언’을 통해 대신교단의 신학의 정체성을 천명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였다.
최순직 박사는 안양대학교 약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국해방과 동시에 다사다난했던 시대에 한국의 예레미야로 그 명성이 높았던 김치선 박사가 한국의 어머니 교회였던 남대문교회를 중심으로 삼백만 구령을 위한 부흥운동과 신앙청년운동을 그 극치까지 이끌어 갔고 이와 때를 같이 하여 그의 선교이념을 실현하기 위하여 1948년 2월 대한신학교를 설립하였다. 대한신학교가 야간신학교로서 출발하게된 것은 월남하여 복음 전도사명에 불타 신학에 뜻을 두었으나 경제적으로 주간에 공부할 수 없는 사명 자들을 교육하기 위한 것이었다.”
안양대학교는 해방과 6. 25와 같은 역사적 변혁기에 민족 복음화를 위한 사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열악한 환경 속에서 교단적 지원과 성원에 의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뜻 있는 분들의 사명에 의해 민족의 십일조인 삼백만 구령운동과 이만팔천여 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야할 사명자들을 양성하기 위한 순수한 정신으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에 대신인들은 어느누구 못지않게 구령에 대한 열정이 불탔다.
이와같이 안양대학교의 설립목적이 민족복음화와 세계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소명자를 양성하는 학교로 시작되었으므로 그 목적을 계속 이어 나가야 할 것이며, 대신인 만이 가질 수 있는 끈질긴 소명의식과 신앙적 투지로 개혁주의 신학을 세워 나가야 할 것이다.
3. 교단설립
가. 본 교단의 설립취지
최순직 목사는 교단 설립 배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합동, 통합으로 분열되기 전)와의 관계에 있어서 대한신학교 문제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난문제들이 제기 되어 결국 대한 신학교가 총회에서 이탈하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는 신앙노선상의 문제가 아니고 총회직영문제로 야기된 것이다. 그후 대한신학교는 교파적 배경이나 선교사의 배경이 없어졌고 이에 따라 학교시설은 말할 것도 없었지만 운영 면에 있어서나 졸업생들의 진로 면에서 여러 가지 시련을 겪게 되었다. 이리하여 대한신학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단이 출범하게 되었다. 때마침 1960년 8월 서울 회현동 성도교회 당에서 I.C.C.C. 극동 기독교 대회가 개최됨을 계기로 대한신학교는 이 국제기구에 가입하고 그 이듬해 1961년 6월 21일 한성교회당(서울역 소재)에서 성경장로회 I.C.C.C. 소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제1차 긴급총회 촬요에서 교단설립취지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1960년 마두원 목사 김치선 목사 외 4명의 목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장로회에 들어오는 신신학적이며 자유주의 현대 사조를 막기 위하여 근본주의적 보수교단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성경장로회를 창설하기로 합의되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대신교단은 신신학과 자유주의의 현대사조를 막기 위해 보수 교단을 창설했으며, 신학교 졸업생을 배출하여 목사 안수를 주어 사명자를 양성하여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실천하기 위한 교단으로 설립되었다.
나. I.C.C.C. 교단으로 출발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 제3공화국이 세워지고 사학(私學)에 대한 중앙정부의 규제가 강화되었다. 특별히 신학교에 있어서 일개교단에 단일신학 정책으로 교단이 없는 학교는 폐쇄한다는 지침까지 세워졌다. 장로회신학교는 총회직영신학교로 설립되었기 때문에 이 정책에 대해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로회 총회에서는 안양대학교를 교단신학교로 할 것을 요구했으나 김치선 박사는 이를 거절하고 독자적 초교파적 야간신학교로 운영하게 되었다. 김치선 목사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통합의 분열이전) 산하에 속해 있으며 총회신학교 교수이었으나. 1969년 9월 대전 총회 때 교수직 사표를 제출하였다. 그는 총회신학 교수로 있을 때 안양대학교 운영과 교단과의 관계에 있어 교장 박형룡 박사와 의견의 차이가 있었다. 사표이후 대한 신학교 운영에 문제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때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미 독립 장로교 선교부 선교사인 마두원목사와 협력함으로 안양대학교의 운영난이 해결되었으며 황하운, 최순직, 정현택목사들과 함께 발기인으로하여 성경장로교단을 창립하기로 하였다. 이에 경기노회를 1960년 9월 6일에 창립 조직한 후 마두원 선교사가 개척한 강원도 홍천지구를 중심하여 1961년 3월 경북노회, 4월에 경충노회, 5월에 전라노회, 경중노회, 경남노회, 경서노회로 8개 노회가 설립되었고 80여 교회가 가입하게 되었다. 1961년 서울 남산동 대한신학교 강당에서 창립총회가 열려 김치선 목사를 총회장으로 선출하여 성경장로회로 출발하였다.
제3총회가 1968년 3월 청파동 성암교회에서 개최하였는데 총회는 I.C.C.C.(International Council of Christian Churches)를 탈퇴하기로 결의하고 총회명칭을 대한예수교장로회로 개칭할 것을 가결하였다. 1972년 4월 제7회 총회 때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으로 교단명칭을 변경하였으며, 1974년 8월 19일 제9회 총회 때 “교회선언”을 채택하였다. 이리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 대신교단은 칼빈주의와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를 중심으로 하는 개혁파교단으로서 한국교계에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4. 교회선언
가. 교회선언의 의의
1974년 공포된 「교회선언」은 시대적 상황에 의해 대신교단의 정체성을 대 내외에 알리며 지켜나가기 위한 표징이다. 역사적 정통 기독교의 신앙고백서의 작성배경은 이단 사상을 방어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위한 공교회의 고백적 선언이다. 신조들은 성경을 요약해 주고, 성경의 올바른 이해에 도움을 주며, 성경을 가르치는 자들을 하나로 묶어주고, 거짓된 교훈과 생활을 막아내는데 있어서 공적표준으로서의 방패가 된다는 정신에 의해 교회선언문이 작성된 것이다. 1974년 8월19일에 선포하고 2003년 5월에 보완한 ‘교회선언’ 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회 선언
1. 전문
우리는 전통과 역사적 유산을 소중히 여겨 영구히 기념하며 보존함과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더욱 견고히 하고 발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본 교단의 교회선언문을 전문에 붙이는 바이다.
2. 본 교단의 노선
가. 신학적 교리적 입장
① 우리는 성령으로 영감된 신․구약성경이 기독교회의 유일무오(唯一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임과 신앙과 생활의 규준(規準)임을 믿으며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 신조들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우리의 신앙고백의 표본(標本) 으로 삼는다.
② 우리는 성경만이 기독교회의 근본원리임을 믿는 역사적 개혁파교회의 전통(傳統)과 정통(正統)을 지 켜나간다. 역사적 개혁파 교회란 사도들의 신앙적 유산을 토대로 하여 시대와 환경의 변화에 따라 변질된 기독교회를 개혁하고 역사적 기독교회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교회의 본질을 보존하며 발전해 나가는 진정한 기독교회를 의미한다. 개혁파 교회는 교회의 일치를 위한 교회신조의 교리적 규준을 유지하는 한편 교회신조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고 객관적으로 확증되는 경우에는 하나님 의 말씀에 비추어서 공적이며 객관적인 논증을 거쳐서 시정할 수 있다.
③ 우리는 신율적 복음주의(神律的 福音主義) 입장이다. 신율적 복음주의란 신․구약성경이 통일적 계시 진리(啓示眞理)로서의 하나님의 도덕율법(道德律法) 임을 믿는 복음주의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카톨릭 교회의 성례주의와 자유주의 교회의 율법경시주의와 하나님의 율법을 도덕율법으로 보지 않고 단 순히 죄와 구속(救贖)의 관계에서만 이해하려고 하는 신정통주의적 입장과는 다르다.
④ 우리의 신학은 개인신앙의 주관적 학적 표명(表明)이 아니라 역사적 기독교회의 교회성을 본질로 하는 교회신조 (敎會信條)에 의한 개관적 학적 석명(釋明)이다. 이 같은 의미에서 우리는 칼빈주의를 표방(標榜)한다. 이는 우리의 신학이 칼빈 한 사람의 개인의 신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칼빈의 신학적 입장이 성경의 계시진리를 역사적 기독교회가 신조 또는 교회의 신학자들의 저술형태로 고백해 온 체계적 진리를 옹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학은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동신조(共同信條)를 비롯하여 어거스틴, 루터, 칼빈, 베자, 17세기 개혁파 신학자들, 17세기 개혁파교회의 신조들, 19세기와 20세기의 개혁파 교회 신학자들에 의해 변증, 변호, 보존되어 온 역사적 기독교회의 정통적 입장이다.
나. 교회정치
① 우리는 장로주의체제가 성경적 교회의 고유한 정치체제임을 믿으며 장로들에 의한 정치, 교직평등, 단계적 교회회의를 통해 교회의 통치권이 행사됨을 원칙으로 한다.
② 우리는 교회의 자율적 원칙에 의해 교회정치를 행하며 국가에 대해서는 영역주권적 정교분리(領域主權的 政敎分離)의 원칙을 주장한다. 영역주권이란 정권과 교권을 구별하여 국가는 국가권력, 교회는 그리스도의 영적 지배권 즉 교권에 의해 통치됨을 의미한다. 교권이란 어떤 특정한 교회 계급의 독점물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교회 전체에 부여하신 위탁권을 의미한다.
다. 신앙생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바 의무를 행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덕 율법이 십계명에 요약되어 있음을 믿고 실천한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91과 98에 명시된 바와 같이 성경이 하나님의 도덕율법으로서 신앙생활의 유일한 도덕규준(道德規準)임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신앙(聖經信仰)의 경건한 삶을 실천하기 위해 무율법적(無律法的)이고 자율적인 자유로운 행위에 의한 선행이나 우리의 양심과 분별력, 신념이나 신앙의 분량 등을 신앙생활의 규준으로 삼지 않고 맹목적인 복종도 하지 않으며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행하는 것만이 선이며 온전한 행위로 인정하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해 감사함으로 복종하는 삶을 실천한다.
3. 본 교단의 사명
가. 진정한 성경적 유신론 확립
진정한 기독교회의 근본 과제는 성경적 유신론을 확립하는 일이다. 성경적 유신론이란 역사적 기독교회가 사도적 신앙전승에 기초하여 보존되고 전달되어 온 하나님 절대주권 신앙 즉 하나님 중심 사상을 의미한다.
나. 진정한 하나님의 중심 교회 수립
우리는 이 땅위에 있는 가시적 교회가 하늘에 있는 불가시적 교회와의 공동성(共同性)을 유지해야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고백서가 천명하고 있는 바와 같이 교회의 교리와 정치(제도, 질서)와 신자의 신앙생활이 일치되도록 실천하는 일이다. 역사적 기독교회의 참 모습은 불가시적 교회의 내용이 가시적 교회의 것이 되도록 항상 힘써 노력하며 하나님 중심의 성도의 영적 교제가 참되게 이루어지는 데서 나타나게 되는 법이다.
지상의 개 교회는 거룩하고 역사적인 공교회(公敎會)의 지체(肢體)됨과 구원의 확신을 입증해야 한다. 거룩하고 역사적인 공교회란 교파교회의 합동이나 이상적(理想的) 지상국가의 건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중심의 진정한 교회, 즉 성경적 교회를 의미한다.
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파한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중심으로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며, 현재적이며,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에 충성한다. 우리는 제도상의 분파는 인정하나 교권주의적 교회 확장운동은 반대한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 안에서 교회의 단일성을 믿으며, 교리, 정치, 신앙생활의 일치에 의하여 교회의 참된 공교회성(公敎會性)을 유지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명령에 의한 세계선교의 사명을 수행코자 한다.
라. 하나님 중심의 문화건설에 이바지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생활에 의해 사회와 국가와 세계의 진정한 변화를 위하여 헌신하며 문화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 중심의 풍토를 조성해 나가야 하는 사명이 있음을 인식한다. 이에 우리는 기독교 유신론적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의 기존 위에서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세계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의 세상의 빛과 소금의 도리를 다 한다. 이는 오늘날 인본주의적으로 사회개혁을 도모하는 사회복음주의적 기독교 세속화 운동과는 다른 것이다. 이에 우리는 역사적 개혁파교회의 개혁정신에 입각하여 일시적인 하나의 지역적 성격을 띤 교파가 아니고, 종교개혁의 원칙을 준수하는 진정한 역사적 기독교회의 공교회성(公敎會性)과 일치성을 보존하고 계승하는 사도적 신앙의 토대 위에 세워지는 진정한 교회의 실현을 표방(標榜)하는 교회임을 엄숙히 선언한다."
5. 결론
위에서 살펴본 대로 대신교단은 역사적 개혁주의 입장을 지켜야할 의무가 있다. 오늘날 많은 장로교파 중에서 설립 이념을 살려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개혁파 장로교회로 성장시켜 나아갈 의무가 우리 목회자들에게 있는 것이다. 본 교단의 우수성을 스스로 체득하고 자신감과 자긍심을 가지고 교단의 발전에 힘써야할 것이다.
http://blog.daum.net/kkho1105/1961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