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방교회가 분열한 까닭
동·서방교회가 분열한 까닭
2006-04-27 13:46 | VIEW : 837
사진 : 하이아소피아교회당(이스탄불)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한 까닭은 무엇인가?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며 그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아래의 글은 동방정교회와 로마교회의 분열에 대한 간결한 서술이다. 출간을 앞두고 있는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의『쌍두마차시대』(어거스틴에서 동서방교회의 분열까지, 2006년 출간예정)에 실려 있는 제16장을 옮긴 것이다. 위 책은 본문과 관련된 천연색 사진들과 그림들을 수록하고 있다. 각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약 1천 년 동안 단일성을 유지해 오던 기독교회는 1054년을 정점으로 동·서방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대개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에 발생한다. 그 가운데 한두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들이 있기 마련이다.1 정치와 문화, 지리, 경제, 인종, 상이한 언어와 풍습과 예전 등이 장기간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주도권을 둘러싼 성직자들의 증오심과 시기와 질투에 견주면 이러한 요인들은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동·서방교회 분열의 주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누가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갈 주도권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교황의 지배권에 예속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는 로마감독에게 있지 않고 감독들의 회의―공의회(Council, Synod)에 있다고 보면서 독자성을 고수했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지배권―수장권(Supremacy)을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성직자들의 우월감과 증오심이다. ‘사라센보다 더 잔인한 기독교인들’이라는 평가를 받던 성직자들의 자존심과 시기와 열등감과 질투가 교회를 분열시켰다. 문화적 우월감을 가졌던 헬라인들은 ‘버릇없는 서양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방인들에게 “해는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었다.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으며, 거칠고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여겼다. 샤를마뉴가 800년에 황제로 등극하고 그 나라를 제국이라고 일컫자 동방기독교인들은 이에 경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복음을 먼저 받았고 교회와 신학을 주도해 왔다고 하는 정통성에 집착했다.
반면에 서방인들은 비잔틴사람들을 나약하고, 이단에 쉽게 빠지는 아주 문제 많은 사람들로 여겼다. “햇볕을 쏘일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우월한 동방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열등감을 역공 형태로 표현했다. 헬라인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식은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은 동·서방교회의 갈라진 틈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1. 지리적 조건과 언어의 차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지중해 세계를 여행하던 시절에 로마제국은 정치와 문화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중해 중심의 막강한 통치는 거대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 문화, 정치를 결속시켰다. 제국은 여러 민족과 언어를 가졌다. 그러나 한 사람 황제가 일관되게 통일성을 유지했다. 지중해 세계는 이중 언어의 세계였다. 자기 민족의 언어 그리고 헬라어와 라틴어 가운데 한두 가지는 알아듣고 또 말할 줄 알았다. 이러한 정치와 문화 요인들은 초대교회의 효과적인 선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모슬렘이 제국의 동쪽과 남쪽을 장악하자 제국의 문화와 지리의 축은 자연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각각 집약되었다. 동·서 간의 접촉은 점차 어렵게 되었다. 그 결과로 정치적 통일이 와해되었다. 3세기 말까지 명목상 하나의 나라이던 제국은 동·서로 나누어졌고, 각각 다른 황제가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는 동·서방 간의 내적 분리를 심화시켰다.
서로마제국이 5세기 초에 침략자들에 의해 와해되자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자국을 보편적인 로마제국으로 간주했다. 황제 유스티니안은 동·서방 간의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한 마지막 황제였다. 이론상 당시의 유일한 로마제국 황제인 그는 야만족들이 침략한 이탈리아를 다시 점령하여 로마제국을 재차 통일시켰다. 그러나 그 정치적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중해의 변화와 더불어 샤를마뉴제국(재생 서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 등장하고, 서방세계가 동방제국으로부터 격리된 가운데 지중해가 제공하는 신속한 교통이 불가능해진 탓으로 서방교회는 동방제국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감독은 북쪽 프랑크족과 결탁하여 세속정치의 힘을 키웠다. 교회는 800년 성탄일에 샤를마뉴에게 재생 서로마제국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이로써 동·서방제국의 분열은 가시화 되었다. 로마제국의 통일성을 고대하고 그것에 집착하던 동방은 샤를마뉴를 난입자로, 로마감독을 제국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분리를 가져온 행악자로 여겼다.
지중해의 변화는 언어의 장벽으로 발생하는 서로 간의 몰이해를 부추겼다. 라틴어와 헬라어는 서로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다. 헬라문화는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면이 강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쓰인 헬라어는 미묘한 이론의 차이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세밀하고 복잡한 신학논의를 가능케 했다. 이단들이 주로 동방제국지역에서 출현한 것은 언어의 요인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반면에 라틴어는 단순하여 군사, 행정, 법률, 정치 등 현실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했다.
희미하게나마 명맥이 유지되어 오던 동·서방 간의 문화적 통일은 지중해의 변화와 함께 깨어지고 서로 간의 몰이해와 무지가 증폭되었다. 이중 언어를 구사하던 시대가 끝나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벽이 더욱 두터워졌다. 450년 무렵에는 헬라어를 읽을 수 있는 서방인이 별로 없었고, 600년 무렵에는 동방제국 안에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9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학자이며 총대감독인 포티우스(Photius of Constantinople, c. 810-c. 895)도 라틴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동·서방 간의 의사소통은 번역이나 통역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묘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곡해하거나, 고의로 오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방 신학자들은 “라틴어는 빈약하기 때문에…”(Quia latinitas penuriosa est…)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2 이것은 그들이 동방교회의 신학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말미암아 상호간의 몰이해는 점차 반목과 질시로 바뀌었다.
2. 민족성, 우월감, 자존심
언어의 차이보다 더 큰 요인은 민족성과 정신성의 차이였다. 동방사람들은 수동적이며 또 신비적인 경향을 지녔다. 명상과 관조에 몰입했다. 사회, 정치, 문화 등 현실 문제보다도 천국에서 누릴 영화와 인간의 내면세계와 신성화(Deification: 神聖化)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교회는 세속정부가 이런 것들을 고무(鼓舞)시키는 정책을 펼쳐주기 바랐다.
한편, 서방사람들은 능동적이고 공격적이며 실제적이었다.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사회의 변화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민감했다.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켰고, 교황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다. 동방교회가 초기 공의회들의 결정에 집착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반면에 서방교회는 교리를 진보시켰다. ‘필리오케’만이 아니라 성모의 무흠잉태설, 교황무오설, 심지어 마리아승천설을 만들어냈다.
동방교회는 보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 아이콘, 상징물, 상징적 활동이 설교를 대신했다. 신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내적으로, 감성적으로 경험했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가르치고 따지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감성보다 지성에 역점을 두었다. 주지주의, 합리주의에 빠질 만큼 지적이었다.3
이러한 서로 다른 민족성과 정신성을 가진 상태에서, 라틴사람들은 문화와 정신에서 오랫동안 비잔틴사람들의 신세를 져 왔다. 이민족 침략자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약탈과 전염병과 경제구조의 악순환 때문에 가난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이족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으나 동방세계에 대해서는 항상 억압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부유하게 사는 헬라인들에 대한 선망과 경멸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열등감을 자신들이 세계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하는 자존심으로 역전시키려고 했다. 사물을 규정할 때 자기의 견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제국주의적 지배욕을 가짐으로써 열등감을 만회하고자 했다. 서방교회의 열등감은 전제군주적인 교권의 신장으로 나타났다. 교황제국을 꿈꾸며 동방교회를 지배하려고 했다. 공의회가 교회문제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동방교회를 교황제국 건설의 성가신 장애물로 여겼다.
라틴사람들의 열등감은 헬라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헬라인은 부자연스럽고 소심하며 기만적이라고 욕했다. 동방사람들이 부유하게 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열등감은 문명화된 부자에 대한 야만적이고 가난한 전사의 반사 심리였다.4 차라리 이교도들은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적대관계가 분명하고, 군사의 대치상황에서도 평화로운 이동과 상업의 교류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서방 랑그리의 감독은 비잔틴사람들이 “사실상 기독교도가 아니라 단지 명목상으로만 기독교도”이며, 심지어 그들에게 “이단의 죄가 있다”5고 말했다. 4세기부터 이미 동·서방 교회가 어느 정도로 멀어졌는가를 시사한다. “헬라인들은 전혀 기독교도가 아니며, 프랑크인이 그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6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헬라인들의 자존심과 문화적 우월감은 대단했다. (1) 자신들이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유산을 갖고 있으며, (2) 사도들이 직접 동방지역 교회들을 세우고, 먼저 세웠다는 것을 강조했다. (3) 서방교회는 언제나 동방교회가 결정한 신학적 유산들을 수납해 왔기 때문에 동방교회가 서방교회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4) 동방은 고대문화에 힘입어 문명화된 의례절차의 정교하고 엄격한 예의범절, 섬세한 구분이 가능한 언어습관, 세련된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라틴사람들은 거칠고 버릇없는 야만인들이며, (5) 헬라교회는 바른 교회(正敎會) 인 반면에 라틴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레모나의 감독 리우트프란트(Lombard Liutprand)는 968년에 독일 황제 오토 1세의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였다. 롬바르드 출신인 그는 동방 황제 니케포루스가 “그대는 과연 로마인이 아니라 롬바르드인이구나”고 하면서 고압적으로 말하자 로마인을 깔보는 헬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로물루스는 형제를 살해한 자였습니다. 그는 지불 능력이 없어서 도망간 채무자이며 탈주한 노예이며 암살자였습니다. 사형수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로마인’이라 불리는 족속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 롬바르드족과 삭소니아족과 로타링기아족과 바바리아족과 스바비아족과 불군디족들은 모두 이 족속을 경멸합니다. 화가 났을 때 가장 모욕적인 말로 ‘로마놈들’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로마놈들!’이라는 말에는 온갖 비천함과 소심함과 탐욕과 방탕과 거짓과 더욱 사악하게는 모든 악의 축소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7
감독 리우트프란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날 때 수출금지 품목인 자주색 망토 다섯 벌을 가지고 나가다가 세관에서 압수당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초보적인 경제 여건에서 생활하는 이 이방족속은 자기들보다 더 발달하고 부유한 사회체제를 갖추고 있는 동방국가에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자기에게 창피를 준 헬라인들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이상한 의상을 걸치고 다니며, 거짓말을 잘하고, 거칠고, 무사안일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반면에 자신들은 정력이 넘치고, 전쟁 경험이 많고, 신앙과 자비로 충만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조잘댔다.
동·서방 사이의 자존심과 우월감으로 인한 갈등은 어이없는 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방황제 알렉시스 1세가 요청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로타링기아 십자군의 한 병사가 버릇없이 황제의 옥좌에 앉아 버렸다. 이 병사는 수많은 용감한 전사들이 서 있는 동안 동방황제 단 한 사람만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부당하며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비잔틴사람들의 문명화된 의례와 엄격한 예의범절과 세련미에 열등감을 느낀 서양인들은 비잔틴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열등감을 감추고자 했다.
라틴기독교인들은 헬라인들이 교회문제에 대개 언제나 분리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했다. 서방 성직자들은 십자군이 동일한 신앙을 가진 동방 기독교인들을 살육한 행위에 대해서 서방 평신도들이 가지는 양심의 가책을 면해 주었다. 제4차 십자군이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때 서방 성직자들은 이 전쟁의 당위성을 인정했다. 헬라인들이 옛날에는 로마법을 따랐으나 이제는 따르지 않으므로 그들을 공격해도 무방하며, 공격행위나 살육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경건한 신앙심의 위대한 발로라고 주장했다.8
비잔틴사람들에 대한 라틴사람들의 조롱과 폄하는 문학작품에도 자주 나타났다. 11세기 후반에 쓰인 ‘샤를마뉴 순례기’라는 대무훈(大武勳) 시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가 콘스탄티노플에 들렀다는 것을 가상하여 헬라인들을 비꼬고 동방황제를 능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본능적 표출도 오랫동안 쌓여온 서방인의 억압된 열등감과 선망이 뒤섞인 부자연스런 감정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학자들조차 헬라문화에 대해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이 보존한 고대 로마제국의 문화유산들을 복사하고, 또 새로운 기독교문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헬라문화를 멀리하려고 했다.9 이단들은 모조리 동방교회의 산물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이단들은 당신들에게서 태어나서 성공했지만, 우리 서유럽사람들은 그들을 교살했다”10는 말로 불만과 열등감을 나타냈다.
서방인들의 안하무인격의 태도에 대한 동방인들의 우월감은 증오심으로 변했다. 서방교회를 ‘야만적’이라고 얕잡아 보면서 “동전 한 닢을 받고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팔아먹으려는… 탐욕에 찬 서방인들, 거칠고 수다스러우며 허영심이 강하고 변덕스러운 야만인들”11이며, “살인을 교사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동방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는 드러내놓고 라틴어를 “야만인들의 언어”라고 말하면서 경멸했다.
동방은 경제면에서도 서방보다 훨씬 우월했다. 많은 서방인들은 원시 성채나 빈한한 촌락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수천 명이 밀집한 도시조차 도시계획이 되지 않은 탓으로 무질서했다. 오랫동안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신체가 허약했다. 식료품, 향료, 직물을 수입하여 사용했다.
여기에 견주어 콘스탄티노플은 계획된 도시였고, 부유했다. 어림잡아 수백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초기 십자군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할 때 이 도시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처음으로 ‘도시’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름답고 고상한 도시, 경탄할 만한 예술품들, 갖가지 물건을 싣고 바쁘게 드나드는 선박들, 수많은 성자들의 유품에 도취되었다.12 라틴사람들이 수입한 최고급 상품은 비잔틴에서 생산된 것이거나 이곳을 경유한 것들이었다. 헬라인들은 중국에서 도입한 기술로 비단을 만들어 서방세계에 고가로 팔았다. 경제수준의 차이는 헬라인들에게 우월감을 갖게 했으며, 라틴사람들에게는 열등감과 공격욕구를 부추겼다.
3. 교회 정치이념의 차이
동·서방교회의 풍습은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서방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이 보편화되었으나 동방에는 결혼한 사제들이 많았다. 서방에서는 토요일에 금식을 하지만 동방에서는 금요일에 했다. 예배의식과 교리에도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했다.
동방교회는 황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는 교회의 신학을 통제하고, 감독선거와 수도원장임명과 성직안수에 관여하고, 예배와 교회재산 관리 등에 대해 법률을 제정하면서 교회를 국가의 도구로 만들었다. 교회는 신학 논쟁에서조차 세속권력자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신학논쟁만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 성직자들은 황제의 비호를 얻기 위해 안달하고, 황제의 정치 노선에 따라 신학의 내용과 교회의 입지가 달라지기도 했다.
동·서방교회를 대결구도로 바꾼 것은 교권을 둘러싼 교회 간의 정치이념의 차이였다. 사도들이 직접 세운 동방교회는 모든 감독들과 교회들을 수평선상에 놓고 보았다. 로마감독을 으뜸 감독으로 여기지만 절대권이나 수장권(Supremacy)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았다. 형제들 가운데 맏형 정도로 여겼다. 여기에 견주어 전제군주적인 교황제국을 꿈꾸던 서방교회는 베드로의 교좌를 앞세워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고 군림하려고 했다. 세속권력조차 교회권력 아래 예속시키고자 했다. 서방교회는 이러한 야망을 가지고 시민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정치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힘에 의한 이족의 개종,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 왕국 안의 갈등에 대한 중재 등을 수단으로 교황제국의 꿈을 실현시켜나갔다. 교회는 마침내 황제에게 제관을 씌워 줄 정도가 되었다.
4. 니콜라스 대(對) 포티우스
동·서방교회는 867년에 발생한 이른바 ‘포티우스분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갈라졌다. 포티우스(Photius of Constantinople, c. 820-c. 891)는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총대감독이었다. ‘포티우스분열’이라는 표현은 그 분열의 책임을 동방교회에 전가시키는 서방교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동방교회는 이 사건을 ‘니콜라스분열’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로마감독 니콜라스 1세(Nickolas I, 858-867)와 서방교회에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포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귀족가정에서 출생했다. 성상옹호론자였던 그의 부모는 황제의 박해를 받아 일찍 순교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학당의 교수였다. 평신도이지만 당시 제국의 실권자인 매부의 힘으로 총대감독직에 올랐다. 그는 훌륭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을 지녔지만 그에 대한 서방교회의 비난과 적개심은 점차 증대했다. 그가 무능하고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능력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동방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방제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황실 안에 알력과 반목이 반동파, 급진파, 보수파, 자유파, 극단파, 온건파 사이에 거듭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아들을 내세워 섭정을 하고 있던 데오도라(Theodora)는 성상숭배를 공식화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수도사들로 구성된 극단파와 협상을 맺었다. 수도사들은 전임 황제의 아들이며 금욕주의자인 익나티우스(Igna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그 추대는 공의회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공식절차를 밟지 않았다. 익나티우스는 수도사의 열정과 경건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대중의 심리와 혁명적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없었다. 그는 왕실 출신이라는 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추상적인 원칙만을 고집했다. 그의 교만과 고집은 많은 불평을 자아냈다. 목회자가 아니라 늑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데오도라가 권력을 상실하자 온건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황제 미카엘(Michael)의 삼촌이며 포티우스의 매부인 바르다스(Bardas)가 사실상 최고 권력을 쥐었다. 이 때 포티우스는 인척관계 덕분에 황제의 시위대장과 제1 국무상을 역임했다. 그 무렵 정부측은 데오도라의 딸들을 수녀원에 보내어 황실의 발을 묶어두려고 했다. 그러나 총대감독 익나티우스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설교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그가 정부전복을 기도하여 데오도라를 섭정직에 복귀시키려고 하는 음모에 가담하거나 이를 묵인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를 제국의 부속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정교일치국가에서, 익나티우스는 한 가지 복잡한 문제에 개입된다. 그는 858년에 아내와 이혼하고 며느리와 결혼한 실권자 바르다스로 하여금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교회가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바르다스를 질책한 익나티우스는 그 해에 총대감독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으로 물러났다는 말도 있고 강압 때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익나티우스는 그 직을 강제로 박탈당했다고 하면서 또 그리스도를 위해 이 같은 핍박을 기꺼이 받고 있다고 했다. 바르다스의 처남 포티우스가 총대감독직에 오르자 익나티우스는 그를 강도, 반역자,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자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공의회는 익나티우스가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임명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성직임명 자체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의 총대감독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직에 오른 포티우스는 관례에 따라 교황과 대감독들에게 자신의 견해와 경위를 밝히는 편지를 보내 부득불 총대감독직에 올랐다고 알렸다. 교황에게 그것을 알린 것은 로마교구의 우선권(Primacy)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편지에는 모순되는 내용이 있었다. 전임자 익나티우스가 공의회에서 총대감독직을 박탈당했다는 것과 그가 스스로 사직했다는 진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제국을 꿈꾸던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모순되는 이 진술을 의심했다. 즉각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다. 총대감독 직위를 박탈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은 로마감독, 곧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기의 승인 없이 익나티우스를 내쫓은 동방 황제를 견책했다. 만약 황제가 데살로니가와 시라큐스 교구들을 로마교구에 넘겨주고 칼라브리아와 시실리의 교황청 재산을 복귀시킨다면 이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참으로 유치한 제안이었다. 또 포티우스가 평신도 신분으로 총대감독직에 오른 것을 책망하면서 총대감독직을 인준해 줄 테니 황제에게 교황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도록 권하라고 부탁했다.
동방교회는 로마감독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교회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지나친 간섭은 동방교회의 반발을 자아냈다. 그리고 교황의 사절은 포티우스의 총대감독직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공의회(861)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강압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인 확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방교회는 교황이 바라던 재산과 교구를 일부 이관했다. 그런데도 교황은 자기가 파송한 사절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종교 문제의 최종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로 여겼다. 그는 사절이 동방교회의 계략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사건에서 헬라인들은 로마감독의 명예와 통치권뿐만 아니라 교회 문제에 대한 로마감독의 최고통치권, 곧 수장권(Supremacy)을 사실상 인정했다. 포티우스도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의 이 같은 권한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교황청은 동방교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얻어낸 셈이다. 만약 교황 니콜라스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일순간에 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지하고 성급한 니콜라스는 신임 총대감독 포티우스를 탄핵했다. 포티우스에 대한 판결문을 동로마제국 모든 교구의 감독들에게 보냈다.13 그는 쫓겨난 익나티우스를 지지했다. 그러자 동방황제는 익나티우스에게 동조하는 로마감독의 선언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감정이 격했던 당시의 황제 미카엘 3세는 이 때 라틴어를 가리켜 ‘야만인들의 언어’라고 야유했다.
이에 격분한 로마감독은 포티우스를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포티우스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867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서방교황 니콜라스의 파문을 선언하면서 그를 ‘주님의 포도원을 파괴하는 이단자’로 규정했다. 869년과 870년에 걸쳐 열렸던 제8차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자치를 표방했다. 총대감독의 위치가 로마감독, 곧 교황의 위치와 동등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방제국의 정치 상황은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바실(Basil of Macedonia)이 집권자 바르다스와 황제 미카엘 3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좌에 올랐다. 그는 전임 황제와 포티우스를 지지한 세력을 쫓아내고 유배지에 있는 익나티우스를 총대감독직에 다시 불러들였다. 포티우스를 탄핵하던 교황은 익나티우스가 교황청의 요구에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알았다. 그래서 교황은 위압적으로 동방교회를 향해 불가리아지역에서 일하는 동방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서방교회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로마감독의 요구를 묵살했다.
포티우스는 총대감독좌를 박탈당했지만 탁월한 인격과 지성과 성품으로 다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와 황제의 종교고문이 되었다. 익나티우스가 노년에 병상에 눕자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위로했다. 두 사람은 원수관계에서 서로 아끼는 친구관계로 바뀌었다. 익나티우스도 자신에게 가혹한 비극을 안겨 준 포티우스를 용서하는 도량(度量)을 보였다. 익나티우스가 사망하자 878년에 포티우스는 다시 동방교회의 총대감독좌에 올랐다.14 최악의 적수까지도 친구로 삼은 매력적인 성품을 지닌 그는 사람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의 충실한 ‘하인’이 되고자 했다.
포티우스는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고전서적을 읽으면서 자랐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기독교고전과 헬라철학서들을 읽고 그 내용을 섭렵했다. 그는 문화적으로 황폐해가던 당시에 고대의 학식과 영감을 헬라인들에게 전해 주었다. 신학·철학·문법·물리학·공의회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행적에 관해 자신이 읽고 공부한 280권의 고전들을 요약하고 문학비평을 가하여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라는 책으로 엮었다. 그 가운데서 158권은 종교와 관련된 것이고, 13권은 교회사에 관련된 것이었다.15 그리고 유배지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제자인 키테라의 대감독 암필로키오스를 위해 『암필로키아』(Amphilochia)를 저술했다. 성경과 신학 난제들과 교회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것으로 독창적이지 않지만 헬라교부들과 당대의 신학자들의 저작물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포티우스는 동·서방교회의 교리와 제도의 차이를 다룬 책과 동방신학의 사변적 특징과 흐름을 보여주는 책 그리고 마니교와 바울당원주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 밖에도 당대의 웅변적 표현들에 나타나는 거대한 구성, 화려한 표현, 상상이 가득한 수사법들을 동원한 많은 설교문, 연설문, 성경주석, 사전, 시, 편지 그리고 신학 작품들을 남겼다.16
5. 필리오케―성령의 이중 발출설
불가리아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비잔틴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서양선교사들과 신학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서방교회는 니케아신경 원본에 없는 ‘그리고 아들로부터’의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filioque: ‘아들로부터’)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사용해 왔다.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하신다”는 본문을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다”로 고쳐 사용했다. 스페인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프랑스와 로마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선교사들은 이것이 ‘성령의 이중 발출’을 뜻한다고 하여 서방선교사들을 맹렬히 공박했다.
샤를마뉴 시절에 프랑크족 수도사 몇 명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적이 있다. 헬라 성직자들은 그들이 문제의 니케아신경을 낭송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서 경악했다. “누가 감히 이 야만인들에게 거룩한 니케아신경을 마음대로 변개할 권한을 주었는가?” 하고 분노했다. 867년 포티우스는 불가리아에 들어온 서방선교사들을 침입자로 여기고 니케아신조문에 ‘아들로부터’라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석서 『성령의 신비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포티우스는 니케아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면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곡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동방교회 대감독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17 그는 성령의 발출(procession)에 관한 동방교회의 견해를 정밀하게 분석한 뒤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은 이단 행위이며, 삼위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단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모든 신적 생명은 성부로부터 발출되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발출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성자나 성령은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인 존재이지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부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발상이다.18 포티우스의 이러한 시각은 정통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성부의 위치가 성자에 견주어 볼 때 우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위치가 성자에 비해 우선적이라고 한 오리겐주의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필리오케’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그것이 그 같은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교회의 정치이념과 문화와 민족의 우월감에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를 감독들의 회의에 둔 동방교회는 정통신앙의 상징인 니케아신경을 아무도 함부로 손 댈 수 없으며, 그것을 변조하는 것은 감독회의―공의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로마감독이 아니라 천사라도 감히 그것을 변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동방교회공의회의 결정을 바꾼 것은 헬라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서방교회는 이 사건을 겪은 뒤로 니케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 로마신경인 사도신경을 사용했다. 사도신경은 이때부터 서방교회의 신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포티우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좌에 오르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는 또 다시 불협화음이 생겼다. 그 당시의 로마감독 요한 8세(John VIII, 872-882)는 전임자보다 이해타산에 더 밝은 인물이었다. 세속적 권한이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의 신조와 권위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포티우스의 합법성을 인정해 주고 신경에서 “아들로부터”를 삭제할 테니 그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로마교회의 법적 통치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선교권을 로마에 넘기라고 했다. 이 조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매우 난감한 것들이었다.
포티우스는 로마감독의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플 총대감독좌에 다시 취임했다. 그러나 로마감독이 요구한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교황 요한 8세는 포티우스의 취임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했다. 그리고 그의 취임식에 참석한 자신의 사절을 비난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교황의 선언을 과감히 묵살해버렸다. 성령의 이중발출을 의미하는 ‘필리오케’ 사건을 ‘제2차 포티우스 분열’이라고도 한다. 동·서방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가일층 멀어졌다.
포티우스는 8년 동안 총대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제왕처럼 군림했다. 여러 면에서 탁월한 이 헬라인은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889년에 강제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학문과 명상생활을 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6. 대 분열 ―훔베르트 사건(1054)
11세기 초까지도 동·서방교회는 외형상 통일을 유지하고 기본 정신에 일치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하나의 ‘가톨릭’교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서방 성직자들 가운데 누구의 명예와 특권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었다. 모든 교회를 예속시켜 그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 로마감독과 이와 달리 감독회의―공의회를 최종 권위로 생각하는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긴장이 팽배했다.
동·서방교회의 확고한 분열은 1054년에 발생했다. 이 일에 개입된 서방교회의 우두머리는 앞에서 살펴본 부루노―레오 9세(Leo IX, 1049-1054)였다. 동방교회의 우두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마이클 세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43-l058)였다. 명성 있는 교수였다가 총대감독이 된 세룰라리우스는 역모자들에게 체포되어 유배생활을 했다. 황제가 바뀌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여 1043년에 재차 총대감독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교구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동방교회를 황제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자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서방교회의 본격적인 분리는 불가리아의 대감독 오크리다의 레오(Leo of Ochrida)가 작성한 문서에서 시작했다. 서방교회를 비난하는 이 ‘항의서’는 서방교회가 (1) 성만찬 때에 무교병(Azymes)을 사용하며, (2) 기독교인들이 마치 유대인들처럼 토요일에 금식하고, (3)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4) 사순절에 알렐루야(Alleluiah)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방교회의 성직자들을 향해 “평신도들을 개혁시키기 전에 너희 자신들이나 먼저 개혁하라”19고 비난했다.
세룰라리우스는 이 항의서를 교황을 비롯한 서방교회의 감독과 사제와 수도사와 프랑스 국민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방수도원의 요람인 스투디움의 수도사 니케타스 스테타토스(Nicetas Stethatos)가 작성한 ‘항의서’도 그들에게 발송했다. 서방교회가 (1)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고 하는 이단 교리를 믿으며 (2) 사제들의 결혼금지를 보편화 하여 규정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을 인간 이하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라고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는 세룰라리우스의 공개 도전장을 받은 레오 9세는 정중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된 뒤에 3명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20 그런데 이 사절 가운데는 과격하고 비타협적인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헬라어권에 파견되는 사절이면서도 헬라어를 알지 못했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방교회의 이념에 충실했으며,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회개혁을 주창했다. 동방교회가 황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과 세속권력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레오가 그같이 중요한 시기에 사려 깊지 않은 인물을 사절로 보낸 것은 큰 실책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사절들을 냉대했다. 총대감독은 계속 모욕적인 말로 라틴교회를 비난했다. 1054년, 어느 여름 날 오후, 아름답고 웅장한 하기아소피아대교회당에서 성찬식이 막 시작되려고 했다. 그 때 로마감독의 사절들이 제단을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정죄하고 저주하는 파문장을 제단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마이클 세룰라리우스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규정하며 저주한다”는 파문장(Anathema)을 올려놓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을 “아리우스주의자, 니콜라당, 마니교도와 같은 이단자로 규정하며, 악마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하고 선언했다. 로마감독 레오 9세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사망했다.
동방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4일 뒤 같은 장소에서 공의회를 열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이름으로 로마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동·서방교회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깊어가던 감정의 골은 1182년에 헬라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라틴계 거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더욱 깊어졌다.
신임 총대감독 세룰라리우스도 동방교회의 자율성을 추구했지만 교회를 황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황제를 손안에 넣고자 한 그는 새 황제로 옹립된 아이작 콤네누스(Isaac Comnenus, 1057-1059)를 옹립하여 황좌에 오르게 했다. 새 황제는 그를 아버지처럼 대우하면서 자주 자문을 구했다. 동방교회의 재산관리권과 재무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세룰라리우스는 황제에게 군림하려고 하고, 황제를 향해 어설픈 만용을 부리다가 결국 직위를 박탈당했다. 훔베르트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세룰라리우스의 죽음은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 비잔틴기독교의 염원이 깨어졌음을 뜻했다. 동방교회는 여전히 국가의 한 기관으로 간주되었고, 성직자들은 황제의 신하로 취급받았다.
니콜라스/포티우스 분열 사건 뒤에도 양 교회의 지도자들은 꾸준히 교회의 통일을 희망했다. 평신도들은 대부분 동·서방교회의 갈등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갈등은 지도자들 사이에 빚어진 것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대중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은 제4차 십자군의 학살사건(1204)이었다. 동방제국의 국력이 봉건제도와 관료제도(Bureaucracy)로 말미암아 점차 쇠잔해 갈 때 십자가를 앞세운 서방교회의 ‘신앙 용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일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두고서 “천지창조 이래 이것에 버금가는 약탈이 어느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결코 없다”21고 평가한다. 비잔틴연대기의 작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Nicetas Choniates)는 “어깨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메고 다니는 기독교인들에 견주면 오히려 사라센인들이 더 착하고 관대하다”22는 말을 남겼다. 십자군은 교회에 평화를 준 것이 아니라 검을 주었다. 라틴교회의 야만적인 지배욕, 공격성, 열등감, 시기, 질투는 1204년 4월 13일에 십자가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같은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대규모로 학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헬라인들의 해묵은 우월감과 증오심을 격발시켰다. 이때부터 동·서방교회 사이의 분열은 확연하게 드러나고, 오늘날까지 그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서방교회는 비잔틴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라틴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고작 56년 뒤에 무너졌다. 이어서 비잔틴사람들이 비잔틴헬라제국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라틴사람들의 공격에서 이미 그 기력을 잃은 탓으로 모슬렘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동·서방교회의 분열 사건으로 이득을 본 것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투르크족이었다. 그들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곧장 유럽의 동남부 대부분을 정복했다. 아름다운 하기아소피아대교회당은 반달모양의 상징물이 걸린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비잔틴예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가 파악한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독교선교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불순종과 완악함 때문에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 가버렸다.
7세기에서 11세기까지 동방제국은 이슬람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파제 구실을 했다. 그 덕분에 동·서유럽 국가들은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이 서방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서방 기독교문명이 멸절하고 유럽 전역에 모스크가 세워졌을 수도 있다. 서방교회는 자신들을 지켜주던 방어진을 스스로 허물어버렸다.
서방세계는 학문과 문화면에서 헬라세계의 신세를 져왔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할 때 서방으로 피난을 간 동방학자들은 동방의 문화유산들을 많이 가지고 갔다. 플라톤의 저작과 비잔틴문화의 유산들은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들에게 전달했다.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족에게도 전달했다. 그 뒤의 비잔틴학자들과 서유럽학자들 간의 교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7. 전통과 정통성
포티우스시대에 시작하여 세룰라리우스시대에 고착된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외형상으로는 교권을 둘러싼 상반된 이념 때문에 발생했다. 교회권력과 세속 권력을 교황 아래 복속시키려고 한 교황제국의 꿈은 독자적인 교회를 유지하고자 한 동방교회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문화와 지리와 경제 요인들, 상이한 언어와 풍습과 예전은 갈등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교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직자들의 증오와 시기와 질투심과 우월감에 견주면 하잘것없는 것들이다. 문화적 우월감과 자만심은 언제나 선교를 방해하는 암적 요소들이다. 교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복음의 빛을 가린다. 이러한 현상은 ‘위대한 선교시대’로 일컬어지는 19세기에도 일부 나타났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식민지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문화제국주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피선교지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또는 충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교회 지도자들이 빚어냈다. 평신도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당하기만 했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독교인이 모슬렘보다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화적 우월감이나 당파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로 기독교신앙에 유해한가를 가르쳐 준다. 종교인들의 교권의식과 문화적 열등감과 증오심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사랑23을 헌 고무신짝 대하듯 할 수 있고, 무서운 증오심과 복수심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파주의 풍토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복음 사역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비잔틴기독교의 문화나 정신은 라틴기독교보다 더 우수했다. 동방교회는 자만심을 가지고 정통성에 집착했다. 약화되고 있는 동로마제국의 현실은 직시하지 않고 헛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방교회가 베드로의 열쇠를 앞세워 수장권(Supremacy)을 주장할 때, ‘정통성’을 대응했다.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다룬 공의회와 교회기구의 연속성과 복음을 먼저 받았다고 하는 따위에 집착했다.
서방교회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대의 변화와 정치권력의 움직임에 대해 민감했으며,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교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감행했다. 그 결과로 로마감독의 수장권을 일시나마 동방 지역에까지 미치게 했다.
십자군전쟁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로마제국’을 궤멸시켰다. 로마제국의 후손들이 ‘영원한 제국’을 영영 없애버리고 동·서유럽을 지켜주는 방어벽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광대놀음을 연출했다. 이 사건은 저항력을 약화시켜 옛 로마제국의 많은 영토가 이슬람권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에 바탕을 둔 신학 사조 가운데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와해시키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신학은 이단교리보다 더 유해하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밖의 문제들로 말미암은 갈등, 분쟁, 분열에서 교회가 얻을 수 있는 선한 것은 없다. 덕을 보는 것은 세상이며 마귀이다. 세상은 원수사랑을 실천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는 것을 좋아한다. 시기와 질투심과 공격욕구에 사로잡히고, 세상보다 나을 것이 없기를 원한다. 십자가를 앞세워 저지르는 기독교인들의 비상식적이고도 야비한 행동은 자신을 보호하는 진지를 스스로 허문 십자군 사건과 같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출현한 뒤에 사람들은 자유사상에 대한 지나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외적인 권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정통 또는 전통적인 것이라면 덮어놓고 반발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옛 것을 무조건 낡은 것으로,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정통과 전통은 대개 생명력 없는 것들이다. 기독교의 경우, 정통 또는 전통은 동방교회가 보여주듯이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 수구성, 비역동성으로 나타난다.
정통성의 중심에는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살아있는 신앙을 연결시킨다. 전통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케 한다. 성령은 신앙, 신앙정신을 전승하는 행위에 의해 기독교의 원초적 행위를 재창조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정통성’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통으로 전승하고 전수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에 바탕을 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르는 삶이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정통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찾는다. 이러한 뜻에서 전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
전통은 신앙을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이다. 폭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 교권의 화신으로부터 복음을 해방시키는 항거의 정신, 과거의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잘못을 참회하는 정신, 그 같은 것을 미래로 연결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의 이성적 행위는 모두 전통에 속한다. 오랫동안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검토되고 검증된 옛 것을 새 세대에 전달한다. 세대와 세대 간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교회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정통’과 ‘전통’은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이며 성경에 튼튼히 바탕을 둔 신앙고백적 연속성에 있다. 교회의 정통성은 종교회의(총회, 연회, 대회, 노회, 당회 등)나 교회기구의 연속성에 달려있지 않다. 어느 누가 수장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교회가 복음을 먼저 받았는가 하는 따위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어느 교단이 총회록, 옛날 장부, 권위자의 도장을 가지고 있으며, 외국 선교사들이 어느 편을 지지하는가 하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에는 정통성, 적자성, 장자교단에 연연하는 교회들이 있다. 자파를 ‘장자교단’이라고 자랑한다. 총회의 차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부풀려 기록하고, 신학교의 설립연도와 졸업 차수를 날조하며, 개교한지 반세기를 갓 넘긴 학교들이 ‘개교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죽은 지 반세기가 넘은 순교자의 목사복권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파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동·서방교회가 분열하면서 보여준 헛된 자존심과 그릇된 정통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http://blog.daum.net/kkho1105/3957
2006-04-27 13:46 | VIEW : 837
사진 : 하이아소피아교회당(이스탄불)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분열한 까닭은 무엇인가? 교회의 분열은 무엇 때문에 발생하며 그것은 어떻게 막을 수 있는가? 아래의 글은 동방정교회와 로마교회의 분열에 대한 간결한 서술이다. 출간을 앞두고 있는 최덕성 교수(고려신학대학원)의『쌍두마차시대』(어거스틴에서 동서방교회의 분열까지, 2006년 출간예정)에 실려 있는 제16장을 옮긴 것이다. 위 책은 본문과 관련된 천연색 사진들과 그림들을 수록하고 있다. 각주는 책을 참고하기 바란다.
약 1천 년 동안 단일성을 유지해 오던 기독교회는 1054년을 정점으로 동·서방교회로 분열되었다. 교회의 분열은 대개 여러 가지 원인들 때문에 발생한다. 그 가운데 한두 가지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인들이 있기 마련이다.1 정치와 문화, 지리, 경제, 인종, 상이한 언어와 풍습과 예전 등이 장기간 복잡한 과정을 거치면서 갈등을 증폭시켰다. 그러나 주도권을 둘러싼 성직자들의 증오심과 시기와 질투에 견주면 이러한 요인들은 하잘것없는 것이었다.
동·서방교회 분열의 주원인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 누가 전체 교회를 이끌어 갈 주도권을 가졌는가 하는 것이었다.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교황의 지배권에 예속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는 로마감독에게 있지 않고 감독들의 회의―공의회(Council, Synod)에 있다고 보면서 독자성을 고수했다. 동방교회는 서방교회의 지배권―수장권(Supremacy)을 인정하지 않았다.
둘째, 성직자들의 우월감과 증오심이다. ‘사라센보다 더 잔인한 기독교인들’이라는 평가를 받던 성직자들의 자존심과 시기와 열등감과 질투가 교회를 분열시켰다. 문화적 우월감을 가졌던 헬라인들은 ‘버릇없는 서양인들’을 이해하지 못했다. 서방인들에게 “해는 동쪽에서 떴다가 서쪽으로 진다”는 사실을 주지시키고 싶었다. 어둠의 자식들이라고 불렀으며, 거칠고 무지몽매한 사람으로 여겼다. 샤를마뉴가 800년에 황제로 등극하고 그 나라를 제국이라고 일컫자 동방기독교인들은 이에 경악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복음을 먼저 받았고 교회와 신학을 주도해 왔다고 하는 정통성에 집착했다.
반면에 서방인들은 비잔틴사람들을 나약하고, 이단에 쉽게 빠지는 아주 문제 많은 사람들로 여겼다. “햇볕을 쏘일 가치조차 없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문화적으로 우월한 동방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열등감을 역공 형태로 표현했다. 헬라인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의식은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다.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침략은 동·서방교회의 갈라진 틈에 쐐기를 박아버렸다.
1. 지리적 조건과 언어의 차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지중해 세계를 여행하던 시절에 로마제국은 정치와 문화의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지중해 중심의 막강한 통치는 거대한 지역의 다양한 민족, 문화, 정치를 결속시켰다. 제국은 여러 민족과 언어를 가졌다. 그러나 한 사람 황제가 일관되게 통일성을 유지했다. 지중해 세계는 이중 언어의 세계였다. 자기 민족의 언어 그리고 헬라어와 라틴어 가운데 한두 가지는 알아듣고 또 말할 줄 알았다. 이러한 정치와 문화 요인들은 초대교회의 효과적인 선교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
모슬렘이 제국의 동쪽과 남쪽을 장악하자 제국의 문화와 지리의 축은 자연히 로마와 콘스탄티노플로 각각 집약되었다. 동·서 간의 접촉은 점차 어렵게 되었다. 그 결과로 정치적 통일이 와해되었다. 3세기 말까지 명목상 하나의 나라이던 제국은 동·서로 나누어졌고, 각각 다른 황제가 통치했다. 콘스탄티노플로의 천도는 동·서방 간의 내적 분리를 심화시켰다.
서로마제국이 5세기 초에 침략자들에 의해 와해되자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자국을 보편적인 로마제국으로 간주했다. 황제 유스티니안은 동·서방 간의 이론과 실제 사이의 간격을 좁히려고 노력한 마지막 황제였다. 이론상 당시의 유일한 로마제국 황제인 그는 야만족들이 침략한 이탈리아를 다시 점령하여 로마제국을 재차 통일시켰다. 그러나 그 정치적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지중해의 변화와 더불어 샤를마뉴제국(재생 서로마제국)과 신성로마제국이 등장하고, 서방세계가 동방제국으로부터 격리된 가운데 지중해가 제공하는 신속한 교통이 불가능해진 탓으로 서방교회는 동방제국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로마감독은 북쪽 프랑크족과 결탁하여 세속정치의 힘을 키웠다. 교회는 800년 성탄일에 샤를마뉴에게 재생 서로마제국황제의 관을 씌워 주었다. 이로써 동·서방제국의 분열은 가시화 되었다. 로마제국의 통일성을 고대하고 그것에 집착하던 동방은 샤를마뉴를 난입자로, 로마감독을 제국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분리를 가져온 행악자로 여겼다.
지중해의 변화는 언어의 장벽으로 발생하는 서로 간의 몰이해를 부추겼다. 라틴어와 헬라어는 서로 다른 문화를 발전시켰다. 헬라문화는 사색적이고 신비적인 면이 강했다.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에 쓰인 헬라어는 미묘한 이론의 차이를 잘 설명할 수 있었다. 세밀하고 복잡한 신학논의를 가능케 했다. 이단들이 주로 동방제국지역에서 출현한 것은 언어의 요인 때문이라는 학설도 있다. 반면에 라틴어는 단순하여 군사, 행정, 법률, 정치 등 현실 문제를 다루기에 적합했다.
희미하게나마 명맥이 유지되어 오던 동·서방 간의 문화적 통일은 지중해의 변화와 함께 깨어지고 서로 간의 몰이해와 무지가 증폭되었다. 이중 언어를 구사하던 시대가 끝나고 서로에 대한 이해의 벽이 더욱 두터워졌다. 450년 무렵에는 헬라어를 읽을 수 있는 서방인이 별로 없었고, 600년 무렵에는 동방제국 안에 라틴어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9세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위대한 학자이며 총대감독인 포티우스(Photius of Constantinople, c. 810-c. 895)도 라틴어를 구사할 줄 몰랐다.
동·서방 간의 의사소통은 번역이나 통역에 의해 이루어졌다. 미묘한 신학적인 문제들을 곡해하거나, 고의로 오역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방 신학자들은 “라틴어는 빈약하기 때문에…”(Quia latinitas penuriosa est…)라는 말을 자주 했는데,2 이것은 그들이 동방교회의 신학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것을 뜻한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으로 말미암아 상호간의 몰이해는 점차 반목과 질시로 바뀌었다.
2. 민족성, 우월감, 자존심
언어의 차이보다 더 큰 요인은 민족성과 정신성의 차이였다. 동방사람들은 수동적이며 또 신비적인 경향을 지녔다. 명상과 관조에 몰입했다. 사회, 정치, 문화 등 현실 문제보다도 천국에서 누릴 영화와 인간의 내면세계와 신성화(Deification: 神聖化)에 관심을 집중시켰다. 교회는 세속정부가 이런 것들을 고무(鼓舞)시키는 정책을 펼쳐주기 바랐다.
한편, 서방사람들은 능동적이고 공격적이며 실제적이었다.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사회의 변화와 정치적 이해관계에 민감했다. 서방교회는 십자군을 일으켰고, 교황은 세상을 지배하고자 했다. 동방교회가 초기 공의회들의 결정에 집착하는 보수적인 태도를 지닌 반면에 서방교회는 교리를 진보시켰다. ‘필리오케’만이 아니라 성모의 무흠잉태설, 교황무오설, 심지어 마리아승천설을 만들어냈다.
동방교회는 보고 듣는 것을 좋아했다. 그림, 아이콘, 상징물, 상징적 활동이 설교를 대신했다. 신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고 내적으로, 감성적으로 경험했다. 반면에 서방교회는 가르치고 따지는 것에 역점을 두었다. 감성보다 지성에 역점을 두었다. 주지주의, 합리주의에 빠질 만큼 지적이었다.3
이러한 서로 다른 민족성과 정신성을 가진 상태에서, 라틴사람들은 문화와 정신에서 오랫동안 비잔틴사람들의 신세를 져 왔다. 이민족 침략자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고, 약탈과 전염병과 경제구조의 악순환 때문에 가난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이족에 대해서는 우월감을 갖고 있었으나 동방세계에 대해서는 항상 억압된 열등감을 갖고 있었다. 부유하게 사는 헬라인들에 대한 선망과 경멸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서양인들은 열등감을 자신들이 세계의 한복판에 살고 있다고 하는 자존심으로 역전시키려고 했다. 사물을 규정할 때 자기의 견해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고, 제국주의적 지배욕을 가짐으로써 열등감을 만회하고자 했다. 서방교회의 열등감은 전제군주적인 교권의 신장으로 나타났다. 교황제국을 꿈꾸며 동방교회를 지배하려고 했다. 공의회가 교회문제의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동방교회를 교황제국 건설의 성가신 장애물로 여겼다.
라틴사람들의 열등감은 헬라인들을 경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헬라인은 부자연스럽고 소심하며 기만적이라고 욕했다. 동방사람들이 부유하게 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열등감은 문명화된 부자에 대한 야만적이고 가난한 전사의 반사 심리였다.4 차라리 이교도들은 위협적이기는 하지만 적대관계가 분명하고, 군사의 대치상황에서도 평화로운 이동과 상업의 교류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동방세계는 그렇지 않았다. 서방 랑그리의 감독은 비잔틴사람들이 “사실상 기독교도가 아니라 단지 명목상으로만 기독교도”이며, 심지어 그들에게 “이단의 죄가 있다”5고 말했다. 4세기부터 이미 동·서방 교회가 어느 정도로 멀어졌는가를 시사한다. “헬라인들은 전혀 기독교도가 아니며, 프랑크인이 그들을 죽이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6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한편, 헬라인들의 자존심과 문화적 우월감은 대단했다. (1) 자신들이 플라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철학자들의 유산을 갖고 있으며, (2) 사도들이 직접 동방지역 교회들을 세우고, 먼저 세웠다는 것을 강조했다. (3) 서방교회는 언제나 동방교회가 결정한 신학적 유산들을 수납해 왔기 때문에 동방교회가 서방교회보다 우수하다고 생각했다. (4) 동방은 고대문화에 힘입어 문명화된 의례절차의 정교하고 엄격한 예의범절, 섬세한 구분이 가능한 언어습관, 세련된 생활문화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라틴사람들은 거칠고 버릇없는 야만인들이며, (5) 헬라교회는 바른 교회(正敎會) 인 반면에 라틴교회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크레모나의 감독 리우트프란트(Lombard Liutprand)는 968년에 독일 황제 오토 1세의 콘스탄티노플 주재 대사였다. 롬바르드 출신인 그는 동방 황제 니케포루스가 “그대는 과연 로마인이 아니라 롬바르드인이구나”고 하면서 고압적으로 말하자 로마인을 깔보는 헬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다음과 같이 답했다.
역사가 보여주듯이 로물루스는 형제를 살해한 자였습니다. 그는 지불 능력이 없어서 도망간 채무자이며 탈주한 노예이며 암살자였습니다. 사형수에게 피난처를 제공했으며, 그의 주변에는 ‘로마인’이라 불리는 족속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우리 롬바르드족과 삭소니아족과 로타링기아족과 바바리아족과 스바비아족과 불군디족들은 모두 이 족속을 경멸합니다. 화가 났을 때 가장 모욕적인 말로 ‘로마놈들’이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로마놈들!’이라는 말에는 온갖 비천함과 소심함과 탐욕과 방탕과 거짓과 더욱 사악하게는 모든 악의 축소판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7
감독 리우트프란트는 콘스탄티노플을 떠날 때 수출금지 품목인 자주색 망토 다섯 벌을 가지고 나가다가 세관에서 압수당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초보적인 경제 여건에서 생활하는 이 이방족속은 자기들보다 더 발달하고 부유한 사회체제를 갖추고 있는 동방국가에 굴욕감을 느껴야 했다. 그는 나중에 자기에게 창피를 준 헬라인들이 무기력하고, 나약하며, 이상한 의상을 걸치고 다니며, 거짓말을 잘하고, 거칠고, 무사안일한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반면에 자신들은 정력이 넘치고, 전쟁 경험이 많고, 신앙과 자비로 충만하고, 하나님께 복종하고, 덕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라고 조잘댔다.
동·서방 사이의 자존심과 우월감으로 인한 갈등은 어이없는 한 사건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동방황제 알렉시스 1세가 요청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을 때 로타링기아 십자군의 한 병사가 버릇없이 황제의 옥좌에 앉아 버렸다. 이 병사는 수많은 용감한 전사들이 서 있는 동안 동방황제 단 한 사람만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부당하며 적절하지 못하다고 판단했다. 비잔틴사람들의 문명화된 의례와 엄격한 예의범절과 세련미에 열등감을 느낀 서양인들은 비잔틴사람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열등감을 감추고자 했다.
라틴기독교인들은 헬라인들이 교회문제에 대개 언제나 분리주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비난했다. 서방 성직자들은 십자군이 동일한 신앙을 가진 동방 기독교인들을 살육한 행위에 대해서 서방 평신도들이 가지는 양심의 가책을 면해 주었다. 제4차 십자군이 1204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할 때 서방 성직자들은 이 전쟁의 당위성을 인정했다. 헬라인들이 옛날에는 로마법을 따랐으나 이제는 따르지 않으므로 그들을 공격해도 무방하며, 공격행위나 살육은 죄가 아니라 오히려 경건한 신앙심의 위대한 발로라고 주장했다.8
비잔틴사람들에 대한 라틴사람들의 조롱과 폄하는 문학작품에도 자주 나타났다. 11세기 후반에 쓰인 ‘샤를마뉴 순례기’라는 대무훈(大武勳) 시는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던 샤를마뉴가 콘스탄티노플에 들렀다는 것을 가상하여 헬라인들을 비꼬고 동방황제를 능멸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 같은 본능적 표출도 오랫동안 쌓여온 서방인의 억압된 열등감과 선망이 뒤섞인 부자연스런 감정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학자들조차 헬라문화에 대해 상당한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수도원이 보존한 고대 로마제국의 문화유산들을 복사하고, 또 새로운 기독교문화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헬라문화를 멀리하려고 했다.9 이단들은 모조리 동방교회의 산물이라고 비난하면서 “모든 이단들은 당신들에게서 태어나서 성공했지만, 우리 서유럽사람들은 그들을 교살했다”10는 말로 불만과 열등감을 나타냈다.
서방인들의 안하무인격의 태도에 대한 동방인들의 우월감은 증오심으로 변했다. 서방교회를 ‘야만적’이라고 얕잡아 보면서 “동전 한 닢을 받고 자기 아내와 자식들을 팔아먹으려는… 탐욕에 찬 서방인들, 거칠고 수다스러우며 허영심이 강하고 변덕스러운 야만인들”11이며, “살인을 교사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했다. 동방황제 미카엘 3세(Michael III)는 드러내놓고 라틴어를 “야만인들의 언어”라고 말하면서 경멸했다.
동방은 경제면에서도 서방보다 훨씬 우월했다. 많은 서방인들은 원시 성채나 빈한한 촌락에서 가난하게 살았다. 수천 명이 밀집한 도시조차 도시계획이 되지 않은 탓으로 무질서했다. 오랫동안 빈곤한 삶을 살았으며, 신체가 허약했다. 식료품, 향료, 직물을 수입하여 사용했다.
여기에 견주어 콘스탄티노플은 계획된 도시였고, 부유했다. 어림잡아 수백만 명의 주민이 거주했다. 상점마다 물건이 가득 차 있었다. 초기 십자군병사들이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할 때 이 도시의 황홀함에 도취되어 처음으로 ‘도시’란 것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알게 되었다. 아름답고 고상한 도시, 경탄할 만한 예술품들, 갖가지 물건을 싣고 바쁘게 드나드는 선박들, 수많은 성자들의 유품에 도취되었다.12 라틴사람들이 수입한 최고급 상품은 비잔틴에서 생산된 것이거나 이곳을 경유한 것들이었다. 헬라인들은 중국에서 도입한 기술로 비단을 만들어 서방세계에 고가로 팔았다. 경제수준의 차이는 헬라인들에게 우월감을 갖게 했으며, 라틴사람들에게는 열등감과 공격욕구를 부추겼다.
3. 교회 정치이념의 차이
동·서방교회의 풍습은 몇 가지 차이가 있었다. 서방에서는 성직자의 독신생활이 보편화되었으나 동방에는 결혼한 사제들이 많았다. 서방에서는 토요일에 금식을 하지만 동방에서는 금요일에 했다. 예배의식과 교리에도 차이가 있었다. 동방교회는 헬라어를 사용하고, 서방교회는 라틴어만을 사용했다.
동방교회는 황제가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는 교회의 신학을 통제하고, 감독선거와 수도원장임명과 성직안수에 관여하고, 예배와 교회재산 관리 등에 대해 법률을 제정하면서 교회를 국가의 도구로 만들었다. 교회는 신학 논쟁에서조차 세속권력자의 영향을 받아야 했다. 신학논쟁만으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안 성직자들은 황제의 비호를 얻기 위해 안달하고, 황제의 정치 노선에 따라 신학의 내용과 교회의 입지가 달라지기도 했다.
동·서방교회를 대결구도로 바꾼 것은 교권을 둘러싼 교회 간의 정치이념의 차이였다. 사도들이 직접 세운 동방교회는 모든 감독들과 교회들을 수평선상에 놓고 보았다. 로마감독을 으뜸 감독으로 여기지만 절대권이나 수장권(Supremacy)을 가진 존재로 보지 않았다. 형제들 가운데 맏형 정도로 여겼다. 여기에 견주어 전제군주적인 교황제국을 꿈꾸던 서방교회는 베드로의 교좌를 앞세워 모든 교회들을 다스리고 군림하려고 했다. 세속권력조차 교회권력 아래 예속시키고자 했다. 서방교회는 이러한 야망을 가지고 시민정부의 역할을 하면서 정치공백을 채워나갔다. 그리고 서서히 힘에 의한 이족의 개종, 선교사들의 적극적인 선교 활동, 왕국 안의 갈등에 대한 중재 등을 수단으로 교황제국의 꿈을 실현시켜나갔다. 교회는 마침내 황제에게 제관을 씌워 줄 정도가 되었다.
4. 니콜라스 대(對) 포티우스
동·서방교회는 867년에 발생한 이른바 ‘포티우스분열’ 사건으로 말미암아 실제적으로 갈라졌다. 포티우스(Photius of Constantinople, c. 820-c. 891)는 당시의 콘스탄티노플 총대감독이었다. ‘포티우스분열’이라는 표현은 그 분열의 책임을 동방교회에 전가시키는 서방교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이다. 동방교회는 이 사건을 ‘니콜라스분열’이라고 일컫는다. 당시 로마감독 니콜라스 1세(Nickolas I, 858-867)와 서방교회에 분열의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포티우스는 콘스탄티노플의 한 귀족가정에서 출생했다. 성상옹호론자였던 그의 부모는 황제의 박해를 받아 일찍 순교했다. 그는 콘스탄티노플의 어느 학당의 교수였다. 평신도이지만 당시 제국의 실권자인 매부의 힘으로 총대감독직에 올랐다. 그는 훌륭한 인품과 풍부한 학식을 지녔지만 그에 대한 서방교회의 비난과 적개심은 점차 증대했다. 그가 무능하고 게을렀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탁월한 능력과 대단한 열정을 가지고 동방교회의 새로운 시대를 창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동방제국의 정치 상황은 매우 복잡했다. 황실 안에 알력과 반목이 반동파, 급진파, 보수파, 자유파, 극단파, 온건파 사이에 거듭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아들을 내세워 섭정을 하고 있던 데오도라(Theodora)는 성상숭배를 공식화하고자 했다.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수도사들로 구성된 극단파와 협상을 맺었다. 수도사들은 전임 황제의 아들이며 금욕주의자인 익나티우스(Ignatius)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그 추대는 공의회를 거치지 않은 것이었다. 공식절차를 밟지 않았다. 익나티우스는 수도사의 열정과 경건을 지닌 인물이었으나 대중의 심리와 혁명적 상황에 대한 대처 능력이 없었다. 그는 왕실 출신이라는 자만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추상적인 원칙만을 고집했다. 그의 교만과 고집은 많은 불평을 자아냈다. 목회자가 아니라 늑대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데오도라가 권력을 상실하자 온건파가 다시 정권을 잡았다. 황제 미카엘(Michael)의 삼촌이며 포티우스의 매부인 바르다스(Bardas)가 사실상 최고 권력을 쥐었다. 이 때 포티우스는 인척관계 덕분에 황제의 시위대장과 제1 국무상을 역임했다. 그 무렵 정부측은 데오도라의 딸들을 수녀원에 보내어 황실의 발을 묶어두려고 했다. 그러나 총대감독 익나티우스가 이를 반대했다. 그는 설교와 더불어 국민들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정부의 정책을 사사건건 반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무렵 그가 정부전복을 기도하여 데오도라를 섭정직에 복귀시키려고 하는 음모에 가담하거나 이를 묵인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교회를 제국의 부속기관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정교일치국가에서, 익나티우스는 한 가지 복잡한 문제에 개입된다. 그는 858년에 아내와 이혼하고 며느리와 결혼한 실권자 바르다스로 하여금 성찬에 참여하지 못하게 했다. 교회가 황제의 지배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바르다스를 질책한 익나티우스는 그 해에 총대감독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자발적으로 물러났다는 말도 있고 강압 때문이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익나티우스는 그 직을 강제로 박탈당했다고 하면서 또 그리스도를 위해 이 같은 핍박을 기꺼이 받고 있다고 했다. 바르다스의 처남 포티우스가 총대감독직에 오르자 익나티우스는 그를 강도, 반역자, 교회의 순수성을 훼손시키는 자라고 비난했다. 어쨌든 공의회는 익나티우스가 공의회를 거치지 않고 임명되었으며 따라서 그의 성직임명 자체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의 총대감독직을 박탈하고 유배를 보냈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직에 오른 포티우스는 관례에 따라 교황과 대감독들에게 자신의 견해와 경위를 밝히는 편지를 보내 부득불 총대감독직에 올랐다고 알렸다. 교황에게 그것을 알린 것은 로마교구의 우선권(Primacy)을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의 편지에는 모순되는 내용이 있었다. 전임자 익나티우스가 공의회에서 총대감독직을 박탈당했다는 것과 그가 스스로 사직했다는 진술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교황제국을 꿈꾸던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모순되는 이 진술을 의심했다. 즉각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다. 총대감독 직위를 박탈할 수 있는 최종 권한은 로마감독, 곧 교황에게만 있다는 것을 천명하기 위함이었다. 그는 자기의 승인 없이 익나티우스를 내쫓은 동방 황제를 견책했다. 만약 황제가 데살로니가와 시라큐스 교구들을 로마교구에 넘겨주고 칼라브리아와 시실리의 교황청 재산을 복귀시킨다면 이것을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다. 참으로 유치한 제안이었다. 또 포티우스가 평신도 신분으로 총대감독직에 오른 것을 책망하면서 총대감독직을 인준해 줄 테니 황제에게 교황의 요구조건을 수락하도록 권하라고 부탁했다.
동방교회는 로마감독의 비위를 상하게 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다. 교회의 통일성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지나친 간섭은 동방교회의 반발을 자아냈다. 그리고 교황의 사절은 포티우스의 총대감독직의 합법성을 인정하는 공의회(861)의 판결을 받아들였다.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인지, 강압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인 확신 때문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동방교회는 교황이 바라던 재산과 교구를 일부 이관했다. 그런데도 교황은 자기가 파송한 사절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종교 문제의 최종 결정권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처사로 여겼다. 그는 사절이 동방교회의 계략에 넘어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였다. 이 사건에서 헬라인들은 로마감독의 명예와 통치권뿐만 아니라 교회 문제에 대한 로마감독의 최고통치권, 곧 수장권(Supremacy)을 사실상 인정했다. 포티우스도 동방교회가 서방교회의 이 같은 권한에 대해 침묵하고 있었다. 교황청은 동방교회에서 얻어낼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을 얻어낸 셈이다. 만약 교황 니콜라스가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서방교회는 동방교회를 일순간에 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무지하고 성급한 니콜라스는 신임 총대감독 포티우스를 탄핵했다. 포티우스에 대한 판결문을 동로마제국 모든 교구의 감독들에게 보냈다.13 그는 쫓겨난 익나티우스를 지지했다. 그러자 동방황제는 익나티우스에게 동조하는 로마감독의 선언을 헛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 결정을 번복하라고 요구했다. 감정이 격했던 당시의 황제 미카엘 3세는 이 때 라틴어를 가리켜 ‘야만인들의 언어’라고 야유했다.
이에 격분한 로마감독은 포티우스를 파문한다고 선언했다. 그러자 침묵하고 있던 포티우스가 드디어 분노를 터뜨렸다. 867년의 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 서방교황 니콜라스의 파문을 선언하면서 그를 ‘주님의 포도원을 파괴하는 이단자’로 규정했다. 869년과 870년에 걸쳐 열렸던 제8차 공의회는 콘스탄티노플 교구의 자치를 표방했다. 총대감독의 위치가 로마감독, 곧 교황의 위치와 동등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동방제국의 정치 상황은 기이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바실(Basil of Macedonia)이 집권자 바르다스와 황제 미카엘 3세를 살해하고 스스로 황좌에 올랐다. 그는 전임 황제와 포티우스를 지지한 세력을 쫓아내고 유배지에 있는 익나티우스를 총대감독직에 다시 불러들였다. 포티우스를 탄핵하던 교황은 익나티우스가 교황청의 요구에 호락호락 넘어갈 줄 알았다. 그래서 교황은 위압적으로 동방교회를 향해 불가리아지역에서 일하는 동방 선교사들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요구했다. 이 지역에 대한 관할권을 서방교회에 넘기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익나티우스는 로마감독의 요구를 묵살했다.
포티우스는 총대감독좌를 박탈당했지만 탁월한 인격과 지성과 성품으로 다시 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그는 유배지에서 돌아와 황제의 종교고문이 되었다. 익나티우스가 노년에 병상에 눕자 그를 정기적으로 방문하여 위로했다. 두 사람은 원수관계에서 서로 아끼는 친구관계로 바뀌었다. 익나티우스도 자신에게 가혹한 비극을 안겨 준 포티우스를 용서하는 도량(度量)을 보였다. 익나티우스가 사망하자 878년에 포티우스는 다시 동방교회의 총대감독좌에 올랐다.14 최악의 적수까지도 친구로 삼은 매력적인 성품을 지닌 그는 사람들의 극진한 존경을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의 충실한 ‘하인’이 되고자 했다.
포티우스는 부모로부터 많은 재산을 상속받아 부유하게 살았다. 어려서부터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고전서적을 읽으면서 자랐다. 성년이 되기도 전에 기독교고전과 헬라철학서들을 읽고 그 내용을 섭렵했다. 그는 문화적으로 황폐해가던 당시에 고대의 학식과 영감을 헬라인들에게 전해 주었다. 신학·철학·문법·물리학·공의회와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행적에 관해 자신이 읽고 공부한 280권의 고전들을 요약하고 문학비평을 가하여 『비블리오테카』(Bibliotheca)라는 책으로 엮었다. 그 가운데서 158권은 종교와 관련된 것이고, 13권은 교회사에 관련된 것이었다.15 그리고 유배지에서 자신의 친구이자 제자인 키테라의 대감독 암필로키오스를 위해 『암필로키아』(Amphilochia)를 저술했다. 성경과 신학 난제들과 교회정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쓴 것으로 독창적이지 않지만 헬라교부들과 당대의 신학자들의 저작물들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탁월한 문장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포티우스는 동·서방교회의 교리와 제도의 차이를 다룬 책과 동방신학의 사변적 특징과 흐름을 보여주는 책 그리고 마니교와 바울당원주의의 기원과 역사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 밖에도 당대의 웅변적 표현들에 나타나는 거대한 구성, 화려한 표현, 상상이 가득한 수사법들을 동원한 많은 설교문, 연설문, 성경주석, 사전, 시, 편지 그리고 신학 작품들을 남겼다.16
5. 필리오케―성령의 이중 발출설
불가리아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비잔틴선교사들은 그곳에서 일하는 서양선교사들과 신학 문제로 갈등을 겪었다. 서방교회는 니케아신경 원본에 없는 ‘그리고 아들로부터’의 의미를 가진 ‘필리오케’(filioque: ‘아들로부터’)라는 단어를 삽입하여 사용해 왔다. “성령께서 아버지로부터 발출하신다”는 본문을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하신다”로 고쳐 사용했다. 스페인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여 프랑스와 로마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동방선교사들은 이것이 ‘성령의 이중 발출’을 뜻한다고 하여 서방선교사들을 맹렬히 공박했다.
샤를마뉴 시절에 프랑크족 수도사 몇 명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한 적이 있다. 헬라 성직자들은 그들이 문제의 니케아신경을 낭송하는 것을 귀담아 듣고서 경악했다. “누가 감히 이 야만인들에게 거룩한 니케아신경을 마음대로 변개할 권한을 주었는가?” 하고 분노했다. 867년 포티우스는 불가리아에 들어온 서방선교사들을 침입자로 여기고 니케아신조문에 ‘아들로부터’라는 구절을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는 주석서 『성령의 신비에 관한 논문』을 저술했다.
포티우스는 니케아신경에 ‘필리오케’를 삽입하면 전통적 삼위일체론을 곡해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동방교회 대감독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17 그는 성령의 발출(procession)에 관한 동방교회의 견해를 정밀하게 분석한 뒤 ‘필리오케’를 삽입한 것은 이단 행위이며, 삼위의 관계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는 것 자체가 이단적인 발상이라고 말했다. 모든 신적 생명은 성부로부터 발출되기 때문에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동시에 발출한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성자나 성령은 성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인 존재이지 생명을 부여하는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성령께서 성부만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로부터 오신다는 것은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파괴하는 발상이다.18 포티우스의 이러한 시각은 정통신앙의 울타리 안에서 성부의 위치가 성자에 견주어 볼 때 우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그 위치가 성자에 비해 우선적이라고 한 오리겐주의의 분위기를 보여준다.
오늘날의 기독교신학의 관점에서 보면 ‘필리오케’ 문제는 사소한 것이다. 그것이 그 같은 민감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것은 교회의 정치이념과 문화와 민족의 우월감에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신앙 문제의 최종 권위를 감독들의 회의에 둔 동방교회는 정통신앙의 상징인 니케아신경을 아무도 함부로 손 댈 수 없으며, 그것을 변조하는 것은 감독회의―공의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생각했다. 로마감독이 아니라 천사라도 감히 그것을 변개할 수 없다고 보았다. 동방교회공의회의 결정을 바꾼 것은 헬라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서방교회는 이 사건을 겪은 뒤로 니케아신경을 사용하지 않고 고대 로마신경인 사도신경을 사용했다. 사도신경은 이때부터 서방교회의 신앙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포티우스가 다시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좌에 오르자 로마와 콘스탄티노플 사이에는 또 다시 불협화음이 생겼다. 그 당시의 로마감독 요한 8세(John VIII, 872-882)는 전임자보다 이해타산에 더 밝은 인물이었다. 세속적 권한이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교회의 신조와 권위를 내동댕이쳤다. 그는 포티우스의 합법성을 인정해 주고 신경에서 “아들로부터”를 삭제할 테니 그 대신에 콘스탄티노플에 대한 로마교회의 법적 통치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했다. 불가리아에 대한 선교권을 로마에 넘기라고 했다. 이 조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매우 난감한 것들이었다.
포티우스는 로마감독의 사절이 참석한 가운데 콘스탄티노플 총대감독좌에 다시 취임했다. 그러나 로마감독이 요구한 것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격분한 교황 요한 8세는 포티우스의 취임이 무효라고 선언하고 그를 파문했다. 그리고 그의 취임식에 참석한 자신의 사절을 비난했다. 그러나 동방교회는 교황의 선언을 과감히 묵살해버렸다. 성령의 이중발출을 의미하는 ‘필리오케’ 사건을 ‘제2차 포티우스 분열’이라고도 한다. 동·서방교회는 이 문제 때문에 가일층 멀어졌다.
포티우스는 8년 동안 총대감독직을 수행하면서 제왕처럼 군림했다. 여러 면에서 탁월한 이 헬라인은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889년에 강제로 직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되었다. 수도원에 들어가서 학문과 명상생활을 하다가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6. 대 분열 ―훔베르트 사건(1054)
11세기 초까지도 동·서방교회는 외형상 통일을 유지하고 기본 정신에 일치하고 있었다. 신자들은 동·서를 막론하고 자신들이 하나의 ‘가톨릭’교회의 일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서방 성직자들 가운데 누구의 명예와 특권이 더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미해결 과제로 남아 있었다. 모든 교회를 예속시켜 그 위에 군림하고 싶어 한 로마감독과 이와 달리 감독회의―공의회를 최종 권위로 생각하는 콘스탄티노플 사이에 긴장이 팽배했다.
동·서방교회의 확고한 분열은 1054년에 발생했다. 이 일에 개입된 서방교회의 우두머리는 앞에서 살펴본 부루노―레오 9세(Leo IX, 1049-1054)였다. 동방교회의 우두머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마이클 세룰라리우스(Michael Cerularius, 1043-l058)였다. 명성 있는 교수였다가 총대감독이 된 세룰라리우스는 역모자들에게 체포되어 유배생활을 했다. 황제가 바뀌자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귀환하여 1043년에 재차 총대감독이 되었다. 그의 목표는 두 가지였다. 콘스탄티노플 교구를 로마교구와 동등한 위치에 올려놓고, 동방교회를 황제의 굴레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 목표를 달성하자면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동·서방교회의 본격적인 분리는 불가리아의 대감독 오크리다의 레오(Leo of Ochrida)가 작성한 문서에서 시작했다. 서방교회를 비난하는 이 ‘항의서’는 서방교회가 (1) 성만찬 때에 무교병(Azymes)을 사용하며, (2) 기독교인들이 마치 유대인들처럼 토요일에 금식하고, (3) 목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를 먹으며, (4) 사순절에 알렐루야(Alleluiah) 찬송을 부르지 못하도록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서방교회의 성직자들을 향해 “평신도들을 개혁시키기 전에 너희 자신들이나 먼저 개혁하라”19고 비난했다.
세룰라리우스는 이 항의서를 교황을 비롯한 서방교회의 감독과 사제와 수도사와 프랑스 국민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방수도원의 요람인 스투디움의 수도사 니케타스 스테타토스(Nicetas Stethatos)가 작성한 ‘항의서’도 그들에게 발송했다. 서방교회가 (1)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발출한다고 하는 이단 교리를 믿으며 (2) 사제들의 결혼금지를 보편화 하여 규정하는 것은 자연법칙에 어긋날 뿐만이 아니라 성직자들을 인간 이하의 차원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라고 비방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선전포고나 다를 바 없는 세룰라리우스의 공개 도전장을 받은 레오 9세는 정중히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 동안의 시간이 경과된 뒤에 3명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20 그런데 이 사절 가운데는 과격하고 비타협적인 추기경 훔베르트(Humbert)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헬라어권에 파견되는 사절이면서도 헬라어를 알지 못했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서방교회의 이념에 충실했으며, 성직자의 독신주의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세속권력으로부터 교회의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교회개혁을 주창했다. 동방교회가 황제의 꼭두각시 노릇을 하고 있으며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하는 것과 세속권력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레오가 그같이 중요한 시기에 사려 깊지 않은 인물을 사절로 보낸 것은 큰 실책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로마의 사절들을 냉대했다. 총대감독은 계속 모욕적인 말로 라틴교회를 비난했다. 1054년, 어느 여름 날 오후, 아름답고 웅장한 하기아소피아대교회당에서 성찬식이 막 시작되려고 했다. 그 때 로마감독의 사절들이 제단을 향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성찬에 참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정죄하고 저주하는 파문장을 제단 위에 올려놓기 위해서였다. “마이클 세룰라리우스와 그의 모든 추종자들을 이단자로 규정하며 저주한다”는 파문장(Anathema)을 올려놓았다.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을 “아리우스주의자, 니콜라당, 마니교도와 같은 이단자로 규정하며, 악마와 그의 천사들과 함께 저주를 받을지어다. 아멘, 아멘, 아멘” 하고 선언했다. 로마감독 레오 9세는 이 일이 있기 전에 사망했다.
동방교회는 이에 대항하여 4일 뒤 같은 장소에서 공의회를 열고 콘스탄티노플의 총대감독 이름으로 로마감독과 그의 추종자들에 대한 파문을 선언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동·서방교회의 적대감은 극에 달했다. 깊어가던 감정의 골은 1182년에 헬라인들이 콘스탄티노플에 거주하는 상당수의 라틴계 거주민들을 대량 학살한 사건으로 더욱 깊어졌다.
신임 총대감독 세룰라리우스도 동방교회의 자율성을 추구했지만 교회를 황제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하지는 못했다. 황제를 손안에 넣고자 한 그는 새 황제로 옹립된 아이작 콤네누스(Isaac Comnenus, 1057-1059)를 옹립하여 황좌에 오르게 했다. 새 황제는 그를 아버지처럼 대우하면서 자주 자문을 구했다. 동방교회의 재산관리권과 재무관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그러나 세룰라리우스는 황제에게 군림하려고 하고, 황제를 향해 어설픈 만용을 부리다가 결국 직위를 박탈당했다. 훔베르트사건이 발생한 지 4년이 지나지 않을 때였다.
세룰라리우스의 죽음은 황제의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한 비잔틴기독교의 염원이 깨어졌음을 뜻했다. 동방교회는 여전히 국가의 한 기관으로 간주되었고, 성직자들은 황제의 신하로 취급받았다.
니콜라스/포티우스 분열 사건 뒤에도 양 교회의 지도자들은 꾸준히 교회의 통일을 희망했다. 평신도들은 대부분 동·서방교회의 갈등의 깊이를 알지 못했다. 갈등은 지도자들 사이에 빚어진 것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들 간의 갈등을 대중의 차원으로 끌어내린 것은 제4차 십자군의 학살사건(1204)이었다. 동방제국의 국력이 봉건제도와 관료제도(Bureaucracy)로 말미암아 점차 쇠잔해 갈 때 십자가를 앞세운 서방교회의 ‘신앙 용사들’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동일한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두고서 “천지창조 이래 이것에 버금가는 약탈이 어느 곳에서도 일어난 적이 결코 없다”21고 평가한다. 비잔틴연대기의 작가 니케타스 코니아테스(Nicetas Choniates)는 “어깨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메고 다니는 기독교인들에 견주면 오히려 사라센인들이 더 착하고 관대하다”22는 말을 남겼다. 십자군은 교회에 평화를 준 것이 아니라 검을 주었다. 라틴교회의 야만적인 지배욕, 공격성, 열등감, 시기, 질투는 1204년 4월 13일에 십자가를 내세우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구호를 외치면서 같은 기독교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대규모로 학살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사건은 헬라인들의 해묵은 우월감과 증오심을 격발시켰다. 이때부터 동·서방교회 사이의 분열은 확연하게 드러나고, 오늘날까지 그 상태가 유지되고 있다.
서방교회는 비잔틴기독교인들을 학살한 그 자리에 콘스탄티노플라틴제국을 건설했다. 이 제국은 고작 56년 뒤에 무너졌다. 이어서 비잔틴사람들이 비잔틴헬라제국을 세웠지만 그것조차 라틴사람들의 공격에서 이미 그 기력을 잃은 탓으로 모슬렘의 침공을 막아내지 못하고 무너졌다.
동·서방교회의 분열 사건으로 이득을 본 것은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투르크족이었다. 그들은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곧장 유럽의 동남부 대부분을 정복했다. 아름다운 하기아소피아대교회당은 반달모양의 상징물이 걸린 이슬람사원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비잔틴예술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콘스탄틴 대제가 파악한 것처럼 콘스탄티노플은 전략적 요충지였다. 기독교선교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불순종과 완악함 때문에 모슬렘의 수중에 들어 가버렸다.
7세기에서 11세기까지 동방제국은 이슬람세력에 대한 유럽의 방파제 구실을 했다. 그 덕분에 동·서유럽 국가들은 독립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이 서방세계의 방파제 역할을 하지 않았으면 서방 기독교문명이 멸절하고 유럽 전역에 모스크가 세워졌을 수도 있다. 서방교회는 자신들을 지켜주던 방어진을 스스로 허물어버렸다.
서방세계는 학문과 문화면에서 헬라세계의 신세를 져왔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할 때 서방으로 피난을 간 동방학자들은 동방의 문화유산들을 많이 가지고 갔다. 플라톤의 저작과 비잔틴문화의 유산들은 이탈리아의 휴머니스트들에게 전달했다. 알프스를 넘어 프랑크족에게도 전달했다. 그 뒤의 비잔틴학자들과 서유럽학자들 간의 교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시대에 활발히 이루어졌다.
7. 전통과 정통성
포티우스시대에 시작하여 세룰라리우스시대에 고착된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외형상으로는 교권을 둘러싼 상반된 이념 때문에 발생했다. 교회권력과 세속 권력을 교황 아래 복속시키려고 한 교황제국의 꿈은 독자적인 교회를 유지하고자 한 동방교회에 의해 ‘방해’를 받았다. 문화와 지리와 경제 요인들, 상이한 언어와 풍습과 예전은 갈등을 가속화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은 교회의 주도권을 둘러싼 성직자들의 증오와 시기와 질투심과 우월감에 견주면 하잘것없는 것들이다. 문화적 우월감과 자만심은 언제나 선교를 방해하는 암적 요소들이다. 교회의 통일성을 깨뜨리고 복음의 빛을 가린다. 이러한 현상은 ‘위대한 선교시대’로 일컬어지는 19세기에도 일부 나타났다. 선교사들은 피선교지 사람들을 복음화 하는 것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 식민지인으로 만들려고 했다. 문화제국주의 오리엔테이션을 받은 피선교지 사람들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또는 충실한 기독교인이 되는 것으로 여겼다.
동·서방교회의 분열은 교회 지도자들이 빚어냈다. 평신도들은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으로 당하기만 했다.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점령은 기독교인이 모슬렘보다 더 잔혹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문화적 우월감이나 당파 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로 기독교신앙에 유해한가를 가르쳐 준다. 종교인들의 교권의식과 문화적 열등감과 증오심은 그리스도인과 교회의 첫 번째 표지인 사랑23을 헌 고무신짝 대하듯 할 수 있고, 무서운 증오심과 복수심의 포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교파주의 풍토에서 목회를 하고 있는 복음 사역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이다.
비잔틴기독교의 문화나 정신은 라틴기독교보다 더 우수했다. 동방교회는 자만심을 가지고 정통성에 집착했다. 약화되고 있는 동로마제국의 현실은 직시하지 않고 헛된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 서방교회가 베드로의 열쇠를 앞세워 수장권(Supremacy)을 주장할 때, ‘정통성’을 대응했다. 교회의 신학과 교리를 다룬 공의회와 교회기구의 연속성과 복음을 먼저 받았다고 하는 따위에 집착했다.
서방교회는 현실을 중요하게 여겼다. 시대의 변화와 정치권력의 움직임에 대해 민감했으며,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교권을 확보하려고 했다. 그래서 피비린내 나는 학살을 감행했다. 그 결과로 로마감독의 수장권을 일시나마 동방 지역에까지 미치게 했다.
십자군전쟁은 형식적으로나마 존재하던 ‘로마제국’을 궤멸시켰다. 로마제국의 후손들이 ‘영원한 제국’을 영영 없애버리고 동·서유럽을 지켜주는 방어벽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광대놀음을 연출했다. 이 사건은 저항력을 약화시켜 옛 로마제국의 많은 영토가 이슬람권으로 들어가도록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문화에 바탕을 둔 신학 사조 가운데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와 기독교 신앙의 근본을 와해시키는 것도 있다. 이러한 신학은 이단교리보다 더 유해하다. 교회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러나 그 밖의 문제들로 말미암은 갈등, 분쟁, 분열에서 교회가 얻을 수 있는 선한 것은 없다. 덕을 보는 것은 세상이며 마귀이다. 세상은 원수사랑을 실천해야 할 기독교인들이 적대감과 증오심으로 가득 차는 것을 좋아한다. 시기와 질투심과 공격욕구에 사로잡히고, 세상보다 나을 것이 없기를 원한다. 십자가를 앞세워 저지르는 기독교인들의 비상식적이고도 야비한 행동은 자신을 보호하는 진지를 스스로 허문 십자군 사건과 같다.
데카르트와 칸트가 출현한 뒤에 사람들은 자유사상에 대한 지나친 신념을 갖게 되었다. 외적인 권위에 대한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다. 정통 또는 전통적인 것이라면 덮어놓고 반발하는 경향이 팽배하다. 옛 것을 무조건 낡은 것으로, 비과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정통과 전통은 대개 생명력 없는 것들이다. 기독교의 경우, 정통 또는 전통은 동방교회가 보여주듯이 변화를 거부하는 보수성, 수구성, 비역동성으로 나타난다.
정통성의 중심에는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이것은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고 시간적으로 이미 오래 전에 존재한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과 살아있는 신앙을 연결시킨다. 전통은 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과거에 존재했던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케 한다. 성령은 신앙, 신앙정신을 전승하는 행위에 의해 기독교의 원초적 행위를 재창조한다.
우리가 소중히 여겨야 하는 ‘정통성’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교회가 정통으로 전승하고 전수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에 바탕을 둔 역사적 기독교 신앙이다. 인류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에 따르는 삶이다. 프로테스탄트교회는 정통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찾는다. 이러한 뜻에서 전통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있다.
전통은 신앙을 공동체에서 공동체로,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이다. 폭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지혜, 교권의 화신으로부터 복음을 해방시키는 항거의 정신, 과거의 경험을 열린 마음으로 수용하고 잘못을 참회하는 정신, 그 같은 것을 미래로 연결시키는 것과 같은 인간의 이성적 행위는 모두 전통에 속한다. 오랫동안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 검토되고 검증된 옛 것을 새 세대에 전달한다. 세대와 세대 간의 대화를 가능케 한다.
교회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정통’과 ‘전통’은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이며 성경에 튼튼히 바탕을 둔 신앙고백적 연속성에 있다. 교회의 정통성은 종교회의(총회, 연회, 대회, 노회, 당회 등)나 교회기구의 연속성에 달려있지 않다. 어느 누가 수장권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교회가 복음을 먼저 받았는가 하는 따위의 논의는 무의미하다. 어느 교단이 총회록, 옛날 장부, 권위자의 도장을 가지고 있으며, 외국 선교사들이 어느 편을 지지하는가 하는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의 프로테스탄트 진영에는 정통성, 적자성, 장자교단에 연연하는 교회들이 있다. 자파를 ‘장자교단’이라고 자랑한다. 총회의 차수를 실제보다 훨씬 더 부풀려 기록하고, 신학교의 설립연도와 졸업 차수를 날조하며, 개교한지 반세기를 갓 넘긴 학교들이 ‘개교100주년 기념행사’를 성대히 거행했다. 죽은 지 반세기가 넘은 순교자의 목사복권 행사를 가지기도 했다. 순교자를 상품화하여 자파의 위상향상과 정통성 확보의 수단으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동·서방교회가 분열하면서 보여준 헛된 자존심과 그릇된 정통성에 집착하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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