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탤렌보쉬대학(목신93년10월호)
스탤렌보쉬대학(목신93년10월호)
정창균(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글을 쓸 당시는 박사 과정중)
개혁주의 전통 위에 세원진 남아공 최초의 신학교
포도와 대학의 전원 도시 스탤랜보쉬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향하여 내려오다 보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구도시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 )의 입법 수도인 케이프타운이다. 모도시(Mother City)라는 별명을 가진
이 나라 최초의 도시이다. 이 케이프타운에서 북동쪽으로 50킬로미터를 달리면 스텔렌보쉬( Stellenbosch)에
이르게 되는데, 케이프타운에 이어 이 나라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도시이다.1676년 11월, 판 데르 스텔(Van
der Stel)이 처음 이 지역을 돌아본 뒤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여 스텔렌보쉬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을을
설립함으로써 스텔렌보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명칭은 설립자의 이름과 나무가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판 데르 스텔의 숲(Van der Stel's forest)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바다와 신비하고 장엄한 모습의 산들과 이 천혜의 두 조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원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야말로 이 나라최고의 전원 도시가 바로 이곳 스텔렌보쉬이다.
그리고 이 전원 도시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의 하나가 바로 스텔렌보쉬 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이다.
도시의 거의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는 캠퍼스와 기숙사 건물들, 주민들과 더불어 자주 펼쳐지는 대학교의
행사들(개강 페스티벌, 선교주간 행사 등), 대학교 시설에 대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용, 방학이 되면
텅 비다시피 하는 시내 풍경 등은 여러 면에서 도시와 대학교의 일체감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
역사 깊은 유럽의 유수한 대학교들에 비하면 이 나라의 대학교들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케이프타운 대학교(University of cape Town )가 가장 먼저 설립되었고, 그보다 2주 늦게 스텔렌보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이 이 나라 최초의 두 대학인 셈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역사는 1866년에 설립된 ‘스텔렌보쉬 김나지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 신학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사전교육을 위하여 이 김나지움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1881년에는‘스텔렌보쉬 칼리지 '로 되었다가, 1918년에‘스텔렌보쉬 대학교'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텔렌보쉬 대학교는 1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때는 한 지역에 하나의 국립
대학만을 두어야 한다는 원리가 대두되어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존립을 위한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폐쇄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 학교 동문으로 후에 이 나라 4대 수상이 되었던 말란(D. F. Malan)의 강력한
반대 운동과 이 지역의 대농(大農)이었던 안마레이(Jan Marsis)의 이 지역에서의 고등교육을 위한 거액의
유산 기증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 대학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지금은(1992년 현재) 12개 단과 대학 1,100개의 코스, 15,000여명의 학생과789명의 교수, 그리고66명의
연구원(Researcher)을 갖춘 대규모 대학교로 성장하였다.
지하 건축 양식으로 유명한 중앙도서관
도서관을 언급하지 않고 대학교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는 중앙 도서관과 음대, 신학교,
공대, 의대, 경영대, 체육대, 산림대 등 단과 대학의 자체 도서관을 합하여 모두 8개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다. 모든 도서관의 자료가 컴퓨터 단말기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어서 대학교 내의 모든 자료에 대한 정보를
어느 도서관에서든지 컴퓨터에 의하여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고, 즉석에서 프린트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1인당 15권의 책을 1개월 동안(교수는 3개월) 대출받을 수 있다. 본 대학에 소장되어 있지 않는 자료는
인터-라이브러리(Inter-Library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다른 대학교로부터 복사
또는 대여받아 이용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외국으로부터
구할 수도 있으나, 소요 경비를 본인이 부담하여야 하고 또한 자료를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도 소요된다.
중앙도서관은 자연광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된 지하 2층의 특이한 건축 양식으로, 1663석의 열람석에
100만 권의 도서를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1985년에 발표된 독일의 도서관 전문가 롤프
풀로트(Rolf Fuhlrott)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스텔렌보쉬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이 지하 양식의 도서관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으로 나타나 있다(180,000평방 피트).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이
56만 여 권, 마이크로 필름 등 시청각 자료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 31,000여 권,1년 단위로 제본되어
있는 정기 간행물이 27만 여 권, 그리고 현재 구독중인 정기 간행물의 종류가6,800여 종 등 모두86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신학교로 시악된 역사
스텔렌보쉬 신학교는 남아공의 화란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교단의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그야말로 남아공 최초의 신학교이다. 1859년 11월 1일, 존 머레이(John hurray) 교수와 호프메이어(N.
J. Hofmcyr) 교수가 4명의 학생과 더불어 교단 신학교로서의 스텔렌보쉬 신학교를 시작함으로써 이 최초의
신학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신학계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계속하여 이 신학교의 교수로
가담하면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 전통을 세워나가게 되었다. 존 머레이는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이 나라에
온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인데, 많은 저술로 유명한 그의 형제 앤드류 머레이도 교단의 총무와 신학교의
이사장으로서 신학교육에 참여하였다(이 앤드류는 부친과 동일한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아들 앤드류는 ‘유명한 앤드류'(famous Andrew)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텔렌보쉬 신학교가 지금까지 배출한 목회자는3,000여 명에 이른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중의 300여
명이 선교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나라의 어느 대학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숫자이며, 사실 이 나라의
대학교를 통하여 배출된 전체선교사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스텔렌보쉬 신학교가 확고한 개혁주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며,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신학교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모든 교수들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고백서, 도르트 신경을
신조로 받는 서약에 서명을 하여야 한다.
교수진과 학문 활동
현직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는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 혹은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최종학위를 마쳤으며,
그 외에 미국, 또는 국내의 다른 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친 분도 있다.
스텔렌보쉬 신학교의 전, 현직 교수 가운데상당수가 국제 적으로 그 학문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구약의
펜샴(F.C.Fensham)과 페르호프(P.A.Vrhoef) ,신약의 뮬러 (Jac. J. Mhller ), 현직 교수인 콤브링크(H.
J. B .Combrink), 라트한(B.C. Lategan), 조직신학의 용커(W. D. Jonker), 설교학의 뮬러(B. A. Muller)와
목회 상담학의 로우(D.J. Louw ) 교수, 그리고 교회사의 브라운(E. Brown ), 선교학의 두 프리(J. Du Preez)
교수 등은 그 학문적 수준에 있어서 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교수들이다.
교수들의 국제 적 학문 활동 무대는 주로 화란, 독일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근래에는
미국에 대한 관심도 점차 증대되고 있는 편이다. 콤브링크 교수가 신약의 문학적 해석, 수사학적 해석
방법 등을 중심으로 미국의 학자들과 관련을 맺어오고 있으며, 설교학의 뮬러 교수도 지난 해 안식년의
일부를 프린스톤과 에모리 등에서 강의와 공동 연구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자유를 맞은
핍박받은 교회(동독 교회 지칭 )에 대한 설교"의 문제를 가지고 독일의 설교학자와 공동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외국 신학자들과의 교류
스텔렌보쉬 신학교를 방문하는 외국 신학자들을 보면 이 신학교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이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의 국제적 교류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1년에 10여 명의 세계적 학자들이 이 신학교를 방문하여
강의, 리서취, 워크숍 등을 하고 돌아간다. 2년 전에는 헤르만 리델보스가 80이 훨씬 넘은 고령으로 이곳을
다녀 갔으며, 미국 웨스트민스터의 모세 실바(M. Silva ), 유니온(버지니아)의 킹스베리(J.D.Kingsbury
), 반더빌트의 다니엘패트(D. Patte), 화란의 판 부르겐, 룰(David. Lull), 판 데르 쿠이(Arie van der
Kooij),영국의 로버트 케롤(Robert Carroll ) 등등 미국, 독일, 영국 그리고 화란 등으로부터 학자들의
방문이 연중 쉬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프린스톤의 유명한 설교학자 토마스 롱(Thomes G. Long)과 뮨헨 대학의 구약학자 요르그 예레미야스(Jorg
Jeremias)가 현재 방문 강의중이고, 한국에는 솔라 스크맆투라(Sola Scriptura)로 잘 알려진 흐레이다누스(Greidanuts)가
‘구약 본문에 대한 설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기대되는 장기 프로젝트
각 학과에서는 다양한 자체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구약학과에서 진행중인 2개의 장기 계획 프로젝트는
그것이 완성되면 세계 구약학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해석학자인 보스만
교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다차원적 성경해석학(Multidimensional Hermeneutics)'의 모델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이다. 한국인 학생으로서는, 미국에서 M. Div.와 Th. M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위하여 이곳에
온 교포 2세인이 한영 전도사가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논문을 진행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프로젝트는
고고학자인 올리비에르 교수가 주도하고 있는 ‘구약 지리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Old Testament
Geography)'을 위한 프로젝트인데, 이 작업의 일환으로 이미 4,000여 매의 고대 근동 지역 지도가 확보되어
연구되고 있다.
고(古)성경을 소장하고 있는 신학도서관
신학교 도서관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신학 파트의 서적을 포함하여 6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컴퓨터로 처리된 자료목록이 국내와 해외의 데이타베이스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신학 도서관
협회의 종교색인(Religion Indexes of the American Theological Library)'과 계약을 맺고, 그 자료들을
CD-ROM에 설치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1975년 이후의 정기간행물에 실려 있는 자료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고 있다. 원하는 자료에 대한정보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기능이
도서의 수집 소장 기능 못지 않게 중요한 도서관의 기능이라는 견해가 이 도서관이 채용하고 있는 기본
정책 원리이다.
신학교 도서관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적인 고(古) 성경이다. 신학교가문을
열던 1859년에, 유명한도서 수집가로 알려져 있던 당시 케이프 지역의 지사(governor) 조지 그레이 경(Sir
George Grey)이 화란의 역사적 성경인 델프트 성경(Delft Bible)을 신학교에 기증하였는데, 이 성경은
구텐베르그 성경보다 불과21년 늦은 1477년에 인쇄된 화란어 성경으로 화란에서 인쇄된 첫번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경은 현재 세계적으로 45질만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 1질(2권)이 스텔렌보쉬
신학교도서관에 그것도 아주 완벽한 상태를 유지한 채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할 만한 고 성경은 1670년에 인쇄된 마틴 루터 번역의 독일 가죽 성경이다. 이 성경은
많은 천연색 삽화를 함께 담고 있는데, 이 삽화들의 표제는 화란어로 쓰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많은 부분이
낡고 찢어져 있었으나, 대학 본부의 서화 복원 전문가인 비르드(H. Wirth)씨의 각고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원상태로 복원되어 보관되어 있다. 그는 이 아름다운 가죽성경을 복원하기 위하여 독일로부터 300년 된
종이를 특별히 주문하여 사용하였다.
학제 및 학위 과정
스텔렌보쉬 신학교도 다른 신학교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신학, 신약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 선교학, 교회사
등 6개의 학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학사(B.Th.), 신학석사(M.Th.)그리고 신학박사(D.Th.) 등 세 종류의
학위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15명의 전임 교수(실천신학4, 조직신학3, 신약, 구약, 선교학, 교회사
각각 2)에 총 200여 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3년 과정의 B.Th. (Bachelor of Theology)는 한국의 M. Div. (Master of Divinity)에 상응하는 학위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인문대학에서 신학과목과 성경언어과목이 포함된 B.A. 학위를
먼저 받아야 한다. 성서학과(Department of Biblical Studies)와 고대근동어과(Semitic Departmend), 헬라어과(Greek
Department)는 신학교 내에 있지 않고 인문대학의 독립학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 신학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도록 되어 있다. 성경언어가 독립된 기관에 의해서 전문적으로 연구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기도
하다. 고대근동어과의 다이스트(Femend Diest) 교수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나 있는 학자이다.
이 학과의 부속기관으로 컴퓨터 파트(Computer Department for Old Testament Studies)가 있는데, 구약
연구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놀라운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신학석사과정
이곳에서 B.Th.를 마치거나 외국에서 M. Div.를 마친 사람은 신학 석사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외국에서 M. Div.를 마치고 신학 석사과정에 들어오면 고대근동어과와 헬라어과로 보내어 히브리어와
헬라어 시험을 치르게 하고 각 해당 학과로부터 적격 통지가 와야 정식 석사과정의 공부를 시작하게 하였었는데,
지금은 많이 완화되어서 이 조건을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신학 석사과정에서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4과목과 비전공 분야에서 2과목을 부전공으로 선택하여 공부한다. 이 6과목을 다 통과하면 약식 논문(mini-thesis)을
쓰고, 그 다음 교수들 앞에서 종합시험을 치르고 끝나도록 되어 있다.
석사과정은 어느 면에서 박사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전초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사과정부터는
각 과목의 담당 교수와 일대일의 공부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아프리칸스가 필수 언어로 요구되지는 않는다(이
나라의 공용어는 영어와 화란어의 변형어라고 할 수 있는 아프리칸스어이다. 이 두 공용어 외에 여러 종류의
혹인 부족어들이 있다). 이 밖에 석사과정 특수 프로그램으로 ‘임상목회상담'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데,
학과 이수 외에 부속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6개월 동안 임상상담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외로운 학문의 길
박사과정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석사과정의 성적과 자기가 연구하고자 하는 논문의 주제와 연구 방향 등에
대한 간략한 기술(Proposal), 자기의 지도 교수와 그의 추천서, 논문에 대한본교 내의 자체 시험관(Internal
Exa miner),본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그 분야의 외부 시험관(External Examiner)을 결정하여 대학 본부의
위원회(Senate)에 제출해야 한다. 위원회의 심사에서 통과하면 박사과정 학생으로 인정이 되고, 이때부터
외로운 투쟁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논문이 완성되면(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자체 시험관과 외부
시험관에게 보내어 그들의 판정을 기다려야 하고, 여기서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전체 교수회의
앞에서 구두 종합시험(Oral Defense)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논문집 발간을
위한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졸업식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시간이 7∼8년이
걸려도 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영영 오지 않고 끝나버리는 사람도 있다.
루스텐부르그 선언
이 나라에 처음 와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교수들의 겸손함과 따뜻함에 하나같이 놀라게 된다. 이것은
이들의 문화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그러한 겸손과 진지함과 온화한 모습은, 자신들도 인종차별의
불의를 행해 온 그룹에 속해 있다는 자기인식과 그로 말미암은 자기 고민과 아픔이 가져온 결과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었다.
스텔렌보쉬 신학교의 교수들이 오래 전부터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해 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던 중 1990년에는 개혁교회 총회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죄로 규정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스텔렌보쉬 신학교 교수 전원의 동의 아래 용커(W.D. Jonker) 교수께서 그 유명한 ‘루스텐부르그
선언(Rustenburg Declaration)'을 발표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용커 교수는 조직신학계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큰 존경을 받으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분이다.
오래 전부터 인종차별 정책의 죄성을 지적해 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각오로 살고 있다"는 말을 사석에서 비칠 만큼 위협을 느끼며 지내 온 분이다. 교수들 가운데 연장자였던
그가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공식석상(Synod)에서 인종차별을 행해온 것과 그에 대한 항거를 미흡히 해온
것에 대한 사죄를 핵심으로 하는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 이후에 이곳 저곳의 교회들 안에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일부 흑인교회들 속에서도 혁명적인 메시지가 선포되기도
하였다. 북쪽 지방의어느 흑인 교회의 목사는 주일설교에서, “인종차별을 한 것은 백인들만이 아니다.
우리 흑인들도 인종차별을 해왔다. 백인 목사나 신학자가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고자 했을 때
우리가 그들을 받아 들였는가? 우리도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이 설교를 직접 듣고 와서 필자에게 전해 준 이는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이웃나라에서 온 흑인 목사인데,
그는 그 교회의 그러한 메시지의 배경을 용커 교수의 ‘루스텐부르그 선언'으로 분석하였다. 용커 교수는
이후 환영과 반대의 와중에서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인종차별 정책의 아픔을 안고
필자는,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찔러대는 잔인함을 행한다는 괴로움 때문에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나름대로는
최선의 겸손의 모습을 갖추어 인종차별에 대한 그동안의 이 신학교의 입장과 행적에 대하여 뮬러 교수께
여쭈어 보았다. 은퇴를 2∼3년 앞둔 그는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남아공에 있는
어느 아프리칸스 대학의 신학교보다도 강하게 인종차별의 죄악성을 지적하며 반대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 교수들이 발표해 온 글이나, 신문들이 우리에 대하여 쓴 기사들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이유로 우리는 많은 교회들로부터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자유주의 신학교라는
비판 때문에 많은 학생을 잃어 왔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학생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말하는 우리가성경적이고,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말하는 그들이 자유주의자라는 생각으로
우리의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만큼 큰 소리로 반대를 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커 교수의 선언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가 충분한 발언과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서 미흡했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
한국인 학생과의 인연
스텔렌보쉬 신학교와 한국인 학생과의 인연은 홍인규 박사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리폼드신학교(Reformed
Seminary)에서 M.Div.를 마치고, 그의 교수였던 키스트마커 박사의 추천으로 이곳의 콤브링크 교수에게
신약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986년에 이곳에 온 것이 한국인 유학생이 스텔렌보쉬 신학교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그는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하여 논문을 마치고, 1991년 한국인으로서는 첫 스텔렌보쉬
대학교 출신의 신학박사가 되어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개혁신학연구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논문은
국제학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영국의 쉐필드에서 출간되었다.
홍 박사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 외항선교회소속의 전철한 선교사가 둘로스를 타고 케이프타운에 입항하였다가
이곳에서 내려 선교학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케이프타운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한국인유학생이 계속 도착하게 되어 지금은 모두9가정에 10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스텔렌보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중 석사과정이 3명, 나머지 7명은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다(설교학1, 구약1,
신약3, 선교학1, 교회사1 ).
유학 희망자의 재정문제
필자가 이곳으로 유학을 오기로 결정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개혁주의 전통에 뿌리를 내린
높은 신학 수준과 저렴한 생활비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따라서
인플레이도 심해서 이제는 생활비 부담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앞으로 오는 분들은 주택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 유학생들은 정부의 국영 다세대·주택이나 시영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이 두 곳은 자기 수입에 따라 임대료를 지불하는데, 학생은 수입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월 100불
정도의 월세를 부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국영 주택은 사유화할 계획으로 더이상 임대를 하지 않게 되었고,
시영아파트는 입주희망자가 너무 많아져서 얻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개인 저택을 얻을 경우 500∼600불
정도의 월세를 부담해야 한다. 물론 학교의 기숙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대부분 독신 학생을 위한
기숙사이므로 가족을 동반하고 오는 경우 학교 기숙사 입주가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유학을 오시려는 분은 ,물론 각자의 가족 사항이나 생활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정착비(자동차, 가구 등)로 10,000불 정도와 매월 1200∼1500불 정도의 생활비를 부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의 일부를 충당한다는 것은 법적으로든지, 현실적으로든지 완전불가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학금제도가 있어서 다소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의 금액은 그리 큰 금액이 아니다.
입학 허가를 얻기 위하여
이곳은 교수가 입학 허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 교수의 입학 허가서(Admission Letter)에 의하여 이후의
모든 절차(등록, 비자)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교수와 접촉을 취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다(물론 입학원서의 입수, 등록
등 절차상으로는 등록 담당관- Registra -을 통하도록 되어 있지만).
첫 편지에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와 자신의 학력, 성적 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 예를 들어서 “제가 교수님 밑에서 실천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식의 편지는
일의 진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학, 목회학, 교육학, 교회성장학 등 담당교수가
나누어져 있어서 누가 이 학생을 맡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또 한번의 편지가 오가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자기를 가르친 교수의 추천서를 꼭 첨부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비자 획득
입학 허가를 받으면, 서울에 있는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면 된다. 비자를 받기까지는
때로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하므로 자주 대사관에 확인과 부탁을 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전환기를 맞으며
이 나라에는 지금 전환기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내년 4월 이후에는 혹인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정권을 잡을 흑인이나, 정권을 잃을 백인이나 모두가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은 불안, 염려,
절망감등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복수심, 증오심, 공포심, 폭력의 증후군들이 장래에 대한 낙관론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그동안 안일하게 지내오던 교회들이 각성을 시작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회개', ‘화해', ‘용서', ‘평화', ‘소망'. 이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말들을 고상한 개념설명으로써가
아니라, 고뇌와 자기고백의 아픔으로 응집된 삶의 생생한 모습으로 끌어안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
역사적 전환기를 새 질서의 평화적 정착으로 잘 극복하는 날, 이 나라 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주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한 교회의 지체로서, 한국교회도 간절한 간구로
이 나라 교회들을 응원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창균/ 전북대와 합동신학교를 졸업하고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신학석사를 거쳐, 설교학으로 박사학위 받은 뒤 지금은 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로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4196
정창균(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 글을 쓸 당시는 박사 과정중)
개혁주의 전통 위에 세원진 남아공 최초의 신학교
포도와 대학의 전원 도시 스탤랜보쉬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을 향하여 내려오다 보면 아름답기로 유명한 항구도시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남아프리카
공화국(Republic of South Africa )의 입법 수도인 케이프타운이다. 모도시(Mother City)라는 별명을 가진
이 나라 최초의 도시이다. 이 케이프타운에서 북동쪽으로 50킬로미터를 달리면 스텔렌보쉬( Stellenbosch)에
이르게 되는데, 케이프타운에 이어 이 나라에서는 두번째로 오래된 도시이다.1676년 11월, 판 데르 스텔(Van
der Stel)이 처음 이 지역을 돌아본 뒤 그 아름다움에 경탄하여 스텔렌보쉬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을을
설립함으로써 스텔렌보쉬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명칭은 설립자의 이름과 나무가 많은 이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붙여진 이름으로‘판 데르 스텔의 숲(Van der Stel's forest) '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아름다운 해변을 끼고 있는 바다와 신비하고 장엄한 모습의 산들과 이 천혜의 두 조건에 의하여 자연스럽게
형성된 끝없이 펼쳐지는 포도원들로 둘러싸여 있는, 그야말로 이 나라최고의 전원 도시가 바로 이곳 스텔렌보쉬이다.
그리고 이 전원 도시의 빼놓을 수 없는 자랑거리의 하나가 바로 스텔렌보쉬 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이다.
도시의 거의 전역에 걸쳐 흩어져 있는 캠퍼스와 기숙사 건물들, 주민들과 더불어 자주 펼쳐지는 대학교의
행사들(개강 페스티벌, 선교주간 행사 등), 대학교 시설에 대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이용, 방학이 되면
텅 비다시피 하는 시내 풍경 등은 여러 면에서 도시와 대학교의 일체감을 생생히 느끼게 하는 요소들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University of Stellenbosch)
역사 깊은 유럽의 유수한 대학교들에 비하면 이 나라의 대학교들은 그리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지는 않다.
케이프타운 대학교(University of cape Town )가 가장 먼저 설립되었고, 그보다 2주 늦게 스텔렌보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들이 이 나라 최초의 두 대학인 셈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역사는 1866년에 설립된 ‘스텔렌보쉬 김나지움'으로부터 시작된다. 철학, 히브리어,
헬라어, 라틴어 등 신학교에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사전교육을 위하여 이 김나지움이 세워졌는데, 이것이
1881년에는‘스텔렌보쉬 칼리지 '로 되었다가, 1918년에‘스텔렌보쉬 대학교'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스텔렌보쉬 대학교는 1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한때는 한 지역에 하나의 국립
대학만을 두어야 한다는 원리가 대두되어 케이프타운 대학교의 존립을 위한 스텔렌보쉬 대학교의 폐쇄론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이 학교 동문으로 후에 이 나라 4대 수상이 되었던 말란(D. F. Malan)의 강력한
반대 운동과 이 지역의 대농(大農)이었던 안마레이(Jan Marsis)의 이 지역에서의 고등교육을 위한 거액의
유산 기증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고 대학교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지금은(1992년 현재) 12개 단과 대학 1,100개의 코스, 15,000여명의 학생과789명의 교수, 그리고66명의
연구원(Researcher)을 갖춘 대규모 대학교로 성장하였다.
지하 건축 양식으로 유명한 중앙도서관
도서관을 언급하지 않고 대학교를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스텔렌보쉬 대학교는 중앙 도서관과 음대, 신학교,
공대, 의대, 경영대, 체육대, 산림대 등 단과 대학의 자체 도서관을 합하여 모두 8개의 도서관을 갖추고
있다. 모든 도서관의 자료가 컴퓨터 단말기에 의하여 연결되어 있어서 대학교 내의 모든 자료에 대한 정보를
어느 도서관에서든지 컴퓨터에 의하여 자유롭게 찾아볼 수 있고, 즉석에서 프린트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1인당 15권의 책을 1개월 동안(교수는 3개월) 대출받을 수 있다. 본 대학에 소장되어 있지 않는 자료는
인터-라이브러리(Inter-Library )시스템을 이용하여 그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다른 대학교로부터 복사
또는 대여받아 이용할 수 있다. 이 나라에서 구할 수 없는 자료도 이 시스템을 이용하여 외국으로부터
구할 수도 있으나, 소요 경비를 본인이 부담하여야 하고 또한 자료를 얻기까지 상당한 시간도 소요된다.
중앙도서관은 자연광이 잘 들어올 수 있도록 설계된 지하 2층의 특이한 건축 양식으로, 1663석의 열람석에
100만 권의 도서를 진열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 1985년에 발표된 독일의 도서관 전문가 롤프
풀로트(Rolf Fuhlrott)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스텔렌보쉬대학교의 중앙도서관이 지하 양식의 도서관으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도서관으로 나타나 있다(180,000평방 피트). 소장하고 있는 도서는 단행본이
56만 여 권, 마이크로 필름 등 시청각 자료의 형태로 보관되어 있는 것이 31,000여 권,1년 단위로 제본되어
있는 정기 간행물이 27만 여 권, 그리고 현재 구독중인 정기 간행물의 종류가6,800여 종 등 모두86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신학교로 시악된 역사
스텔렌보쉬 신학교는 남아공의 화란개혁교회(Dutch Reformed Church)교단의 목회자 양성을 위하여 설립된,
그야말로 남아공 최초의 신학교이다. 1859년 11월 1일, 존 머레이(John hurray) 교수와 호프메이어(N.
J. Hofmcyr) 교수가 4명의 학생과 더불어 교단 신학교로서의 스텔렌보쉬 신학교를 시작함으로써 이 최초의
신학교의 역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신학계의 기라성 같은 학자들이 계속하여 이 신학교의 교수로
가담하면서 높은 수준의 학문적 전통을 세워나가게 되었다. 존 머레이는 스코틀랜드에서 선교사로 이 나라에
온 앤드류 머레이의 아들인데, 많은 저술로 유명한 그의 형제 앤드류 머레이도 교단의 총무와 신학교의
이사장으로서 신학교육에 참여하였다(이 앤드류는 부친과 동일한 이름을 가졌기 때문에 혼돈을 피하기
위하여 아들 앤드류는 ‘유명한 앤드류'(famous Andrew)라고 부르기도 한다).
스텔렌보쉬 신학교가 지금까지 배출한 목회자는3,000여 명에 이른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그 중의 300여
명이 선교사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이 나라의 어느 대학교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숫자이며, 사실 이 나라의
대학교를 통하여 배출된 전체선교사의 절반이 넘는 숫자이다.
스텔렌보쉬 신학교가 확고한 개혁주의 전통 위에 서 있으며,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신학교라는
데는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다. 모든 교수들은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벨직 고백서, 도르트 신경을
신조로 받는 서약에 서명을 하여야 한다.
교수진과 학문 활동
현직 교수들 가운데 상당수는 암스테르담의 자유대학, 혹은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최종학위를 마쳤으며,
그 외에 미국, 또는 국내의 다른 대학교에서 학위를 마친 분도 있다.
스텔렌보쉬 신학교의 전, 현직 교수 가운데상당수가 국제 적으로 그 학문을 인정받고 있다. 특히 구약의
펜샴(F.C.Fensham)과 페르호프(P.A.Vrhoef) ,신약의 뮬러 (Jac. J. Mhller ), 현직 교수인 콤브링크(H.
J. B .Combrink), 라트한(B.C. Lategan), 조직신학의 용커(W. D. Jonker), 설교학의 뮬러(B. A. Muller)와
목회 상담학의 로우(D.J. Louw ) 교수, 그리고 교회사의 브라운(E. Brown ), 선교학의 두 프리(J. Du Preez)
교수 등은 그 학문적 수준에 있어서 내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교수들이다.
교수들의 국제 적 학문 활동 무대는 주로 화란, 독일 등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으나, 근래에는
미국에 대한 관심도 점차 증대되고 있는 편이다. 콤브링크 교수가 신약의 문학적 해석, 수사학적 해석
방법 등을 중심으로 미국의 학자들과 관련을 맺어오고 있으며, 설교학의 뮬러 교수도 지난 해 안식년의
일부를 프린스톤과 에모리 등에서 강의와 공동 연구로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 “갑작스럽게 자유를 맞은
핍박받은 교회(동독 교회 지칭 )에 대한 설교"의 문제를 가지고 독일의 설교학자와 공동연구를 하기도
하였다.
외국 신학자들과의 교류
스텔렌보쉬 신학교를 방문하는 외국 신학자들을 보면 이 신학교의 학문에 대한 열정과 이 신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학문의 국제적 교류를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1년에 10여 명의 세계적 학자들이 이 신학교를 방문하여
강의, 리서취, 워크숍 등을 하고 돌아간다. 2년 전에는 헤르만 리델보스가 80이 훨씬 넘은 고령으로 이곳을
다녀 갔으며, 미국 웨스트민스터의 모세 실바(M. Silva ), 유니온(버지니아)의 킹스베리(J.D.Kingsbury
), 반더빌트의 다니엘패트(D. Patte), 화란의 판 부르겐, 룰(David. Lull), 판 데르 쿠이(Arie van der
Kooij),영국의 로버트 케롤(Robert Carroll ) 등등 미국, 독일, 영국 그리고 화란 등으로부터 학자들의
방문이 연중 쉬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프린스톤의 유명한 설교학자 토마스 롱(Thomes G. Long)과 뮨헨 대학의 구약학자 요르그 예레미야스(Jorg
Jeremias)가 현재 방문 강의중이고, 한국에는 솔라 스크맆투라(Sola Scriptura)로 잘 알려진 흐레이다누스(Greidanuts)가
‘구약 본문에 대한 설교'를 연구하기 위하여 현재 이곳에 머무르고 있다.
기대되는 장기 프로젝트
각 학과에서는 다양한 자체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데, 특히 구약학과에서 진행중인 2개의 장기 계획 프로젝트는
그것이 완성되면 세계 구약학계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되고있다. 그 중의 하나는 해석학자인 보스만
교수의 주도 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다차원적 성경해석학(Multidimensional Hermeneutics)'의 모델 개발을
위한 프로젝트이다. 한국인 학생으로서는, 미국에서 M. Div.와 Th. M을 마치고 박사과정을 위하여 이곳에
온 교포 2세인이 한영 전도사가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논문을 진행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의 프로젝트는
고고학자인 올리비에르 교수가 주도하고 있는 ‘구약 지리의 재구성(Reconstruction of Old Testament
Geography)'을 위한 프로젝트인데, 이 작업의 일환으로 이미 4,000여 매의 고대 근동 지역 지도가 확보되어
연구되고 있다.
고(古)성경을 소장하고 있는 신학도서관
신학교 도서관은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일부 신학 파트의 서적을 포함하여 6만 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컴퓨터로 처리된 자료목록이 국내와 해외의 데이타베이스에 연결되어 있다. 또한 ‘미국 신학 도서관
협회의 종교색인(Religion Indexes of the American Theological Library)'과 계약을 맺고, 그 자료들을
CD-ROM에 설치하여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1975년 이후의 정기간행물에 실려 있는 자료들에
대한 정보를 찾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고 있다. 원하는 자료에 대한정보를 효과적으로 제공하는 기능이
도서의 수집 소장 기능 못지 않게 중요한 도서관의 기능이라는 견해가 이 도서관이 채용하고 있는 기본
정책 원리이다.
신학교 도서관의 자랑 가운데 하나는, 이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역사적인 고(古) 성경이다. 신학교가문을
열던 1859년에, 유명한도서 수집가로 알려져 있던 당시 케이프 지역의 지사(governor) 조지 그레이 경(Sir
George Grey)이 화란의 역사적 성경인 델프트 성경(Delft Bible)을 신학교에 기증하였는데, 이 성경은
구텐베르그 성경보다 불과21년 늦은 1477년에 인쇄된 화란어 성경으로 화란에서 인쇄된 첫번째 책으로
알려져 있다. 이 성경은 현재 세계적으로 45질만이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중 1질(2권)이 스텔렌보쉬
신학교도서관에 그것도 아주 완벽한 상태를 유지한 채 보관되어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자랑할 만한 고 성경은 1670년에 인쇄된 마틴 루터 번역의 독일 가죽 성경이다. 이 성경은
많은 천연색 삽화를 함께 담고 있는데, 이 삽화들의 표제는 화란어로 쓰여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많은 부분이
낡고 찢어져 있었으나, 대학 본부의 서화 복원 전문가인 비르드(H. Wirth)씨의 각고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원상태로 복원되어 보관되어 있다. 그는 이 아름다운 가죽성경을 복원하기 위하여 독일로부터 300년 된
종이를 특별히 주문하여 사용하였다.
학제 및 학위 과정
스텔렌보쉬 신학교도 다른 신학교들과 마찬가지로 구약신학, 신약신학, 실천신학, 조직신학, 선교학, 교회사
등 6개의 학과로 구성되어 있으며, 신학사(B.Th.), 신학석사(M.Th.)그리고 신학박사(D.Th.) 등 세 종류의
학위과정이 설치되어 있다. 현재 15명의 전임 교수(실천신학4, 조직신학3, 신약, 구약, 선교학, 교회사
각각 2)에 총 200여 명의 학생이 등록되어 있다.
3년 과정의 B.Th. (Bachelor of Theology)는 한국의 M. Div. (Master of Divinity)에 상응하는 학위로
볼 수 있는데, 이 과정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인문대학에서 신학과목과 성경언어과목이 포함된 B.A. 학위를
먼저 받아야 한다. 성서학과(Department of Biblical Studies)와 고대근동어과(Semitic Departmend), 헬라어과(Greek
Department)는 신학교 내에 있지 않고 인문대학의 독립학과로 설치되어 있으면서 신학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도록 되어 있다. 성경언어가 독립된 기관에 의해서 전문적으로 연구되도록 되어있다는 것은 큰 강점이기도
하다. 고대근동어과의 다이스트(Femend Diest) 교수는 이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명성이 나 있는 학자이다.
이 학과의 부속기관으로 컴퓨터 파트(Computer Department for Old Testament Studies)가 있는데, 구약
연구에 컴퓨터를 도입하여 놀라운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신학석사과정
이곳에서 B.Th.를 마치거나 외국에서 M. Div.를 마친 사람은 신학 석사과정에 지원할 수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하여도 외국에서 M. Div.를 마치고 신학 석사과정에 들어오면 고대근동어과와 헬라어과로 보내어 히브리어와
헬라어 시험을 치르게 하고 각 해당 학과로부터 적격 통지가 와야 정식 석사과정의 공부를 시작하게 하였었는데,
지금은 많이 완화되어서 이 조건을 강하게 요구하지는 않는다. 신학 석사과정에서는 자신의 전공 분야에서
4과목과 비전공 분야에서 2과목을 부전공으로 선택하여 공부한다. 이 6과목을 다 통과하면 약식 논문(mini-thesis)을
쓰고, 그 다음 교수들 앞에서 종합시험을 치르고 끝나도록 되어 있다.
석사과정은 어느 면에서 박사과정에 진입하기 위한 전초 과정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석사과정부터는
각 과목의 담당 교수와 일대일의 공부를 하게 되어 있으므로 아프리칸스가 필수 언어로 요구되지는 않는다(이
나라의 공용어는 영어와 화란어의 변형어라고 할 수 있는 아프리칸스어이다. 이 두 공용어 외에 여러 종류의
혹인 부족어들이 있다). 이 밖에 석사과정 특수 프로그램으로 ‘임상목회상담' 과정이 개설되어 있는데,
학과 이수 외에 부속병원에서 환자들을 상대로 6개월 동안 임상상담사역을 수행해야 한다.
외로운 학문의 길
박사과정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석사과정의 성적과 자기가 연구하고자 하는 논문의 주제와 연구 방향 등에
대한 간략한 기술(Proposal), 자기의 지도 교수와 그의 추천서, 논문에 대한본교 내의 자체 시험관(Internal
Exa miner),본교와 직접 관련이 없는 그 분야의 외부 시험관(External Examiner)을 결정하여 대학 본부의
위원회(Senate)에 제출해야 한다. 위원회의 심사에서 통과하면 박사과정 학생으로 인정이 되고, 이때부터
외로운 투쟁의 길이 시작되는 것이다. 논문이 완성되면(몇 년 후가 될지 모르지만) 자체 시험관과 외부
시험관에게 보내어 그들의 판정을 기다려야 하고, 여기서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마지막으로 전체 교수회의
앞에서 구두 종합시험(Oral Defense)을 거쳐야 하는데, 여기서도 무사히 통과하게 되면 논문집 발간을
위한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면서 편안한 마음으로 졸업식을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시간이 7∼8년이
걸려도 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영영 오지 않고 끝나버리는 사람도 있다.
루스텐부르그 선언
이 나라에 처음 와서 공부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교수들의 겸손함과 따뜻함에 하나같이 놀라게 된다. 이것은
이들의 문화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그러한 겸손과 진지함과 온화한 모습은, 자신들도 인종차별의
불의를 행해 온 그룹에 속해 있다는 자기인식과 그로 말미암은 자기 고민과 아픔이 가져온 결과라고 분석하는
이도 있었다.
스텔렌보쉬 신학교의 교수들이 오래 전부터 인종차별 정책을 비판해 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던 중 1990년에는 개혁교회 총회에서 인종차별 정책을 죄로 규정하는 선언서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1991년에는 스텔렌보쉬 신학교 교수 전원의 동의 아래 용커(W.D. Jonker) 교수께서 그 유명한 ‘루스텐부르그
선언(Rustenburg Declaration)'을 발표하여 크게 파문을 일으켰다. 용커 교수는 조직신학계에서는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 큰 존경을 받으며 많은 영향력을 행사해 온 분이다.
오래 전부터 인종차별 정책의 죄성을 지적해 오면서, 개인적으로는 “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각오로 살고 있다"는 말을 사석에서 비칠 만큼 위협을 느끼며 지내 온 분이다. 교수들 가운데 연장자였던
그가 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공식석상(Synod)에서 인종차별을 행해온 것과 그에 대한 항거를 미흡히 해온
것에 대한 사죄를 핵심으로 하는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이 선언 이후에 이곳 저곳의 교회들 안에 새로운
각성의 움직임이 일기 시작하였고, 심지어는 일부 흑인교회들 속에서도 혁명적인 메시지가 선포되기도
하였다. 북쪽 지방의어느 흑인 교회의 목사는 주일설교에서, “인종차별을 한 것은 백인들만이 아니다.
우리 흑인들도 인종차별을 해왔다. 백인 목사나 신학자가 우리 교회에 들어와서 같이 일하고자 했을 때
우리가 그들을 받아 들였는가? 우리도 회개해야 한다"는 내용의 충격적인 메시지를 선포하기도 하였다.
이 설교를 직접 듣고 와서 필자에게 전해 준 이는 신학교에서 함께 공부하는 이웃나라에서 온 흑인 목사인데,
그는 그 교회의 그러한 메시지의 배경을 용커 교수의 ‘루스텐부르그 선언'으로 분석하였다. 용커 교수는
이후 환영과 반대의 와중에서 곤혹을 치르기도 하였다.
인종차별 정책의 아픔을 안고
필자는, 상대방의 아픈 곳을 찔러대는 잔인함을 행한다는 괴로움 때문에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나름대로는
최선의 겸손의 모습을 갖추어 인종차별에 대한 그동안의 이 신학교의 입장과 행적에 대하여 뮬러 교수께
여쭈어 보았다. 은퇴를 2∼3년 앞둔 그는 거의 눈물을 글썽이며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남아공에 있는
어느 아프리칸스 대학의 신학교보다도 강하게 인종차별의 죄악성을 지적하며 반대하여 왔습니다. 이것은
그동안 우리 교수들이 발표해 온 글이나, 신문들이 우리에 대하여 쓴 기사들을 통해서도 입증되는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 이유로 우리는 많은 교회들로부터 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고, 자유주의 신학교라는
비판 때문에 많은 학생을 잃어 왔습니다. 많은 교회들이 학생을 보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입각하여 말하는 우리가성경적이고, 이데올로기에 입각하여 말하는 그들이 자유주의자라는 생각으로
우리의 입장을 견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만족할 만큼 큰 소리로 반대를 하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커 교수의 선언을 통하여 그동안 우리가 충분한 발언과 행동을 취하는 데 있어서 미흡했다는
고백을 하였습니다. "
한국인 학생과의 인연
스텔렌보쉬 신학교와 한국인 학생과의 인연은 홍인규 박사로부터 시작된다. 미국의 리폼드신학교(Reformed
Seminary)에서 M.Div.를 마치고, 그의 교수였던 키스트마커 박사의 추천으로 이곳의 콤브링크 교수에게
신약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1986년에 이곳에 온 것이 한국인 유학생이 스텔렌보쉬 신학교와 맺은 첫 인연이었다.
그는 6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각고의 노력을 하여 논문을 마치고, 1991년 한국인으로서는 첫 스텔렌보쉬
대학교 출신의 신학박사가 되어 귀국하여 지금은 서울의 개혁신학연구원에서 가르치고 있다. 그의 논문은
국제학회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영국의 쉐필드에서 출간되었다.
홍 박사가 이곳에 도착한 이후, 외항선교회소속의 전철한 선교사가 둘로스를 타고 케이프타운에 입항하였다가
이곳에서 내려 선교학석사과정을 마치고 지금은 케이프타운에서 사역하고 있다. 그 이후 한국과 미국에서
한국인유학생이 계속 도착하게 되어 지금은 모두9가정에 10명의 한국인 유학생이 스텔렌보쉬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 이 중 석사과정이 3명, 나머지 7명은 박사과정을 진행하고 있다(설교학1, 구약1,
신약3, 선교학1, 교회사1 ).
유학 희망자의 재정문제
필자가 이곳으로 유학을 오기로 결정한 데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개혁주의 전통에 뿌리를 내린
높은 신학 수준과 저렴한 생활비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로 이 나라의 경제가 어려워지고, 따라서
인플레이도 심해서 이제는 생활비 부담도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더욱이 앞으로 오는 분들은 주택비 부담이
크게 늘어나게 되었다. 그동안 한국 유학생들은 정부의 국영 다세대·주택이나 시영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었다. 이 두 곳은 자기 수입에 따라 임대료를 지불하는데, 학생은 수입이 없는 것으로 간주되어 월 100불
정도의 월세를 부담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국영 주택은 사유화할 계획으로 더이상 임대를 하지 않게 되었고,
시영아파트는 입주희망자가 너무 많아져서 얻기가 매우 어렵게 되었다. 개인 저택을 얻을 경우 500∼600불
정도의 월세를 부담해야 한다. 물론 학교의 기숙사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지만, 대부분 독신 학생을 위한
기숙사이므로 가족을 동반하고 오는 경우 학교 기숙사 입주가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곳으로 유학을 오시려는 분은 ,물론 각자의 가족 사항이나 생활 성향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정착비(자동차, 가구 등)로 10,000불 정도와 매월 1200∼1500불 정도의 생활비를 부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아르바이트를 해서 생활비의 일부를 충당한다는 것은 법적으로든지, 현실적으로든지 완전불가능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장학금제도가 있어서 다소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외국인으로서 받을 수 있는
장학금의 금액은 그리 큰 금액이 아니다.
입학 허가를 얻기 위하여
이곳은 교수가 입학 허가를 주도록 되어 있다. 교수의 입학 허가서(Admission Letter)에 의하여 이후의
모든 절차(등록, 비자)가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느 교수 밑에서 공부를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결정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교수와 접촉을 취하는 것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이다(물론 입학원서의 입수, 등록
등 절차상으로는 등록 담당관- Registra -을 통하도록 되어 있지만).
첫 편지에 자신이 공부하고자 하는 분야와 자신의 학력, 성적 등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자세히 소개하는
것이 자신에게 유익하다. 예를 들어서 “제가 교수님 밑에서 실천신학을 공부하고 싶다"는 식의 편지는
일의 진척에 아무런 유익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설교학, 목회학, 교육학, 교회성장학 등 담당교수가
나누어져 있어서 누가 이 학생을 맡아야 할 것인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또 한번의 편지가 오가야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학교에서는 자기를 가르친 교수의 추천서를 꼭 첨부할 것을 부탁하고 있다.
비자 획득
입학 허가를 받으면, 서울에 있는 주한 남아프리카공화국 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하면 된다. 비자를 받기까지는
때로 수개월이 소요되기도 하므로 자주 대사관에 확인과 부탁을 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전환기를 맞으며
이 나라에는 지금 전환기의 회오리바람이 불고 있다. 내년 4월 이후에는 혹인 정부가 들어설 것이다. 그러나
정권을 잡을 흑인이나, 정권을 잃을 백인이나 모두가 장래에 대한 불확실성으로 말미암은 불안, 염려,
절망감등에 시달리고 있다. 여기저기에서 복수심, 증오심, 공포심, 폭력의 증후군들이 장래에 대한 낙관론들을
압도하고 있다. 이러한 틈바구니에서 그동안 안일하게 지내오던 교회들이 각성을 시작하며 꿈틀거리고
있다. ‘회개', ‘화해', ‘용서', ‘평화', ‘소망'. 이제 많은 교회들이 이러한 말들을 고상한 개념설명으로써가
아니라, 고뇌와 자기고백의 아픔으로 응집된 삶의 생생한 모습으로 끌어안으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
역사적 전환기를 새 질서의 평화적 정착으로 잘 극복하는 날, 이 나라 교회는 세계교회 앞에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게 될 것이다. 우주에 퍼져 있는 하나님의 한 교회의 지체로서, 한국교회도 간절한 간구로
이 나라 교회들을 응원해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정창균/ 전북대와 합동신학교를 졸업하고 스텔렌보쉬 대학에서 신학석사를 거쳐, 설교학으로 박사학위 받은 뒤 지금은 합동신학대학원 설교학 교수로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4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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