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개혁신학회 2009 봄학술세미나 유상섭 교수 발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며 개혁신학회(회장 김인환 목사)는 "칼빈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2009년 봄 학술 세미나'를 지난 3월 개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두 17명이 칼빈을 주제로 발제했다. 다음은 유상섭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의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발제 전문.
1. 들어가는 말
올해는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어 전 유럽과 전 세계 교회에 확산시킨 칼빈의 탄생 500주기를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고 생명력 있게 듣게 해준 16세기의 종교개혁이야 말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강단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백성의 마음속 깊게 심어준 설교개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구교에 비하여 종교 개혁자들에게 설교가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실을 회고해 볼 때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교 분석함으로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경해석방법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미흡한 점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교와 분석을 위해서 선정된 설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본 교단의 목회자들의 설교 19편이다. 이들 설교는 합동 총회 교단지 기독신문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게재된 [우리시대의 설교]에서 신약의 본문과 관련된 지상 설교들이다. 19편의 설교문은 모두 여섯 명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교단지에 게재한 것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고, 이중에 두 분은 교수출신으로 한분은 신약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다른 한 분은 설교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 여섯 분의 설교자들은 합동교단의 중진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이분들의 설교를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 분석함으로 한국교회의 설교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 글의 목적은 설교자 개인을 공격하거나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있고 있는 본 교단 목회자들의 설교 진단을 통하여 앞으로 나갈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므로 설교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논문의 전개는 먼저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원리를 개괄적으로 제시하고 이어서 선정된 신약의 19편의 설교문을 칼빈의 주석과 비교하여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이들 설교문들은 마태복음 4편, 누가복음 2편, 사도행전 5편, 로마서 4편, 에베소서 1편, 디모데후서 1편, 그리고 야고보서 2편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에 근거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강단설교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요약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일평생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죤 머레이(John Murray)는 칼빈을 가리켜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해자요 모든 시대의 성경 주해가들 중에서 제 1급에 속한다.”고 잘 말했다. 칼빈의 성경해석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큰 논쟁에 없이 수용되는 입장이 있다. 그것은 칼빈이 사용한 성경해석의 핵심 원리는 간략함과 명료성(lucid brevity 또는 brevitas et facilitas) 또는 분명하고 간결함(perspicua brevitas 또는 clear brevity)이다.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은 칼빈의 이런 원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성경의 내용들을 주제에 따라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집대성한 그의 [기독교 강요]보다 성경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주해해하여 놓은 그의 주석책들이 이 원리를 더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칼빈이 멜랑크톤(Melanchthon), 불링거(Bullinger)와 부처(Bucer)의 방법을 수용하지 않고 배격한 것은 그들이 쓴 주석에 사용된 방법들이 이 원리에 비추어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멜랑크톤은 그의 Loci Communes에서 사용한 방법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만 골라서 설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생략되는 부분이 많이 발생하게 되고, 반면 부처의 주석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너무나 상세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칼빈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 자신은 주석을 쓸 때 일부만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아주 상세하고 장황하게 풀어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대신 주석을 쓸 때 항상 압축하고 짧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법이 바로 간략함과 명료성 또는 분명한 간략성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석자의 유일한 임무는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생각을 열어놓는 것이다"(to lay open the mind of the writer). 정경적인 해석방법을 창안하여 발전시킨 구약학자 차일즈(Childs)는 칼빈의 창세기 주석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주석은 “책의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특징 지워지는 작품”이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로마서의 대표적인 주석가 중에 하나인 크랜피일드(Cranfield)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칼빈은 “기록된 단어들 가운데 표현된 대로 바울의 생각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신실하고 단순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므로 해석자는 저자가 사용한 언어 속에서 성경 저자의 생각을 만나게 된다. 본문은 해석자가 저자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해석자가 성경의 본문을 떠나서는 결코 저자의 생각을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칼빈이 일관되게 주장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문맥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다. 칼빈은 할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17:9의 주해에서 "나는 여전히 문맥의 순서를 따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칼빈에게 성경 해석자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 주목해야 할 문맥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문맥을 모두 의미한다. 성경 해석자는 성경본문의 원래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되는 데, 그 일례로 칼빈은 이사야 14:12를 주석하면서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란 문구를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칼빈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전체 문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여기에 말해진 것은 앞에 진행된 것에 의존하므로 이것들은 한 문맥 안에서 동시적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칼빈은 문맥에 근거하여 파악되는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했기 때문에 초대교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그 당시에 무르익어 절정에 도달했던 소위 성경의 사중적인 의미는 물론 알레고리칼 해석을 모두 배격했다. 그에게 문자적인 의미는 표현방식의 성격을 감안하여 상징적인 설명을 비롯한 문법적이고 수사학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동시에 문법적, 역사 지리적, 사회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이와 같이 본문의 문맥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을 기하여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성경해석과 주해의 원리는 칼빈의 설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경해석자의 임무와 같이 “성경을 주해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음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된 것만을 선포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본문과는 상관없이 설교자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성경을 주해하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청중들은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설교자의 가르침이 성경에 충실하면 바로 그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가르침의 전달자가 누구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 남아 있는 칼빈의 설교들은 성경의 해당 책들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설교이다. 그는 성경의 본문 말씀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원어성경을 직접 사용하여 아무런 노트 없이 설교를 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메시지를 후대의 청중들에게 적용할 때는 주어진 글의 시대적인 상황을 우선적으로 잘 이해하고 이것이 후대와 상황과 어떻게 유사하거나 다른지 파악한 후에 적절한 적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 목회자들의 설교분석과 평가
선정된 신약설교 19편을 설교자 별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경 별로 구분하여 칼빈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해석의 원리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신약성경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마태복음의 설교 4편, 누가복음의 설교 2편, 사도행전의 설교 5편, 로마서 설교 4편, 에베소서 설교 1편, 디모데후서 설교 1편, 그리고 야고보서 설교 2편이다.
3.1. 마태복음 설교 4편의 분석과 평가
검토할 네 편의 마태복음 설교는 3명의 목회자가 한 설교로 순서대로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 그리고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이다.
첫 설교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에서 설교자는 본문에 분석에 근거하여 본문의 세 핵심적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성탄절에 깨달아야 할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들 세 종류의 등장인물은 헤롯,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동방박사들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의 모습은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서 세상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통하지만 “형식과 습관에 젖어서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습관과 틀이 잡혀있어 신앙인으로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려준다.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동방박사들은 부족한 성경지식과 신앙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가 초라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겸손하고 순수한 영으로 왕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오늘날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의 모습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는 본문의 세밀한 분석에 근거하여 절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지는 아니했지만 본 단락에서 핵심적인 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교는 두 가지 면에서 본문에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동방박사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께 드린 세 선물에 근거하여 이들이 세 사람으로 단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오늘 마태복음의 주석가들은 칼빈의 이러한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또 다른 문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 그는 초라한 또는 더러운 마구간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아기 예수 탄생기사에 비추어 본문의 탄생기사를 그릇되게 읽은 결과이다. 마태복음 본문은 어디에서도 아기 예수님이 있는 장소를 마구간으로 밝히지 않고 막연하게 아이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뿐이다(2:9). 더욱이 예수께서 탄생하신지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마구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상세하게 보지 못한 결과이다. 이상하게도 칼빈도 문맥이나 내용을 주목하지 않고 아무런 증거 없이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누워있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했다.
두 번째 설교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에서 설교자는 현대인들이 “칭송과 인정을 받는 높은 자리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사람들을 섬기신 것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취한 이러한 섬김과 연약함의 길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밝힌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들이 “이 섬김과 연약함의 길에 들어설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소자들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칼빈은 8:14-18의 단락에서 이사야 53:4를 인용하는 17절에만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의 핵심은 예수께서 행한 각종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각종 영적인 은혜를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단락 구분에 있어서는 칼빈이 8:14-18로 구분한 것보다 설교자가 8:14-17로 구분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저자 자신이 밝히는 본단락의 목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각종 귀신축출과 병고침이 십자가와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히는데 비하여 이 설교는 예수님의 섬김과 연약함의 길을 신자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하는데 초점이 있다. 설교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지만 본문의 의도에 충실 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한다. 이런 취지의 설교를 굳이 하려고 한다면 섬김과 연약함의 주제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된 마태복음의 다른 본문들(18:5-10; 25:31-46)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 번째 설교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은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과 칭찬을 기록하는 기사이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여인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신 것을 밝히고 여인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가졌음을 역설한다. 이 기사가 주는 두 가지 교훈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예수께 나오기만 하면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과 “무슨 말씀이든지 겸손히 ‘아멘’ 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헬라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엘레에손 메”(22절), “보에쎄이 모이”(25절), “프로세퀴네이”의 어원적인 또는 사적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도는 본문의 뜻을 잘 파악하고자 하는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단어나 문구에 대한 설명은 과장되거나 부정확하다는 것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를 “원하는 만큼 가져갈지어다”로, 부정과거 명령어로 사용된 “엘레에쏜 메”가 “단 한번만 불쌍히 여겨 달라”로, “보에데이 모이”를 “위험에 빠진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라”는 뜻으로 각각 설명한 것은 무리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 설교는 본문에 대한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칼빈도 예수께 찾아온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인정한다. 그는 또한 예수께서 여인에게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또한 칼빈의 단락구분과 이 설교의 단락구분이 일치한다. 이 점에서 본 설교는 칼빈의 성경해석과 대체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은 본 설교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특별은총(구원의 은총)이 부어질 시대가 되지 않았다는 진술을 하지 않는데 비하여 칼빈은 이러한 인식을 본문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마태복음의 병행기사에만 등장하는 문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냄을 받았다”(24절)는 설명에서 이 주장을 상세하게 확대하여 제시했다.
설교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는 다섯 차례에 걸쳐서 포도원에서 일을 일꾼을 고용하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제공한 관대한 주인의 비유이다. 이 설교는 이 시대의 고질적인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설교의 부제는 “나눔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은 수고와 헌신하는 성도돼야”이다. 설교자는 우리가 이 세상의 가르침에 굳어져 있기 때문이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하고, 본문은 “세상 논리 속에서 어떻게 천국을 세워 갈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말한다. 본문 근거하여 제시된 세 가지 핵심요점은 “부르심의 목적에 충실하자”, “선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부르신 주님의 뜻이다”, 그리고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이다. 이 설교 자체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반영하며, 선의 (절대적인) 기준에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밝힘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중 하나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원망한 것은 “주인이 부른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는 설명은 주장의 근거가 없다. 또한 우리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는 두 번째 대지는 본 비유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설교의 마지막 적용에서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의 많은 수고를 통해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어 먼저 된 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먼저 된 자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본 받아 자신도 잘 세워져 자기보다 더 나중 된 자를 위해 수고와 결과를 동일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권고는 본 비유에서 끌어낼 수 없는 인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반면 이 비유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문맥적인 흐름을 반영한다. 칼빈은 이 비유를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의 말씀의 확증과 구체적인 적용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선언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참여할 “천상적인 영광의 동등성”이나 “경건한 자들의 미래 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실 때마다 일시적으로 무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하시기 때문에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모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그의 백성이 진보를 이루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신자에게도 빚을 지지 아니하며 그의 요구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가 주시는 상급은 노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주신다. 칼빈은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도, 택자와 버림받은 자를 비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더욱더 민첩하게 나아가고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지지 말며,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공통적인 상급을 나눌 것을 권고한다.”고 결말을 맺는다.
3.2. 누가복음 설교 2편의 분석과 평가
누가복음의 두 편 설교는 “어부를 낚으신 예수님”(5:1-11)과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첫 번째 설교 제목에 드러나듯이 설교자는 본문의 핵심을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어부로 낚으신 예수님에게 있다고 밝히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 설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계시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접근이나 교훈 위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잘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설교는 본문의 기사에서 세 가지 핵심을 제시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실패자 베드로에게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이러한 세 핵심은 본 기사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얻은 통찰에 근거한 것으로 타당하다. 첫 번째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베드로의 실패를 강조하여 “어장을 잃고 파산상태에 있었다.”는 언급과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는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 요점은 예수님의 말씀운동의 문맥에서 볼 때 아주 적절한 핵심이다. 세 번째 요점과 관련해서 설교자는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창조주로서의 권능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었다”것과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잘 피력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이 본문의 적용으로 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의 소명과 사명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데 각각 소명을 주셨다.”고 밝힌다.
이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본질적으로 이 설교의 핵심내용과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세 가지 내용은 예수께서 배움이 부족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육신의 교만을 겸손하게 하고 영적인 은혜의 놀라운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놀라운 양의 고기 어획의 기적은 예수께서 가지신 신적은 능력 또는 신성을 입증했다는 것, 그리고 칼빈도 설교자와 같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받은 특별한 소명과 일반 신자들이 받은 소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설교문의 두 번째 요점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는 주장은 칼빈의 설명에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설교는 칼빈이 간과한 부분을 본문의 문맥과 강조점에 따라 잘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보다 더 전진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칼빈과 이 설교는 모두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의 신성 또는 그의 신적인 능력을 입증한 것으로만 해석한 것은 오늘날 많은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의 각종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다소 아쉽다.
누가복음의 두 번째 설교는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본문의 내용은 큰 자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46-48)과 어떤 사람의 귀신축출과 관련된 사건(49-50)이다. 이 설교는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는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본문에서 두 핵심적인 가르침을 도출한다. 두 교훈은 “작은 자를 귀하게 보는 눈이다.”와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전자의 교훈은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기사와 관련되어 있고, 후자의 교훈은 귀신축출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본문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두 시각을 각종 사회적인 갈등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이 설교는 본문의 내용에 근거한 아주 쉽고 성경적으로 건전한 설교로 보인다. 물론 이 설교에서 적용이 본문의 설명보다는 우선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 기사를 12 제자들의 사명과 예수님 체험의 중요성을 핵심적으로 다루는 9장 전체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맥에서 떼어서 본문이 설교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석은 큰 자에 대한 논쟁 기사를 마태복음의 기사(18:1-5)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누가의 병행기사는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귀신을 축출한 기사를 마가복음의 병행기사(9:38-40)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누가복음의 병행기사를 따로 취급하지 않았다. 칼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한 어떤 사람을 책망하여 금한 것은 성급하게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귀신을 축출할 권한 부여받은 것을 인정하는 것도, 그가 행한 것이 바르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귀신축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된 것을 제자들이 인정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가복음의 관점에서만 기록하다 보니까 칼빈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귀신을 축출할 권세를 부여받았지만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귀신 축출과 관련하여 그들의 실패는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는 누가의 언급(9:6)에 암시되어 있고, 아홉 명의 제자들의 명백하고 공개적인 대 실패는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들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축출하는 데 실패한 사건에 완전히 공개적으로 폭로되었다(9:37-43a). 이것은 마가복음의 병행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9:14-29). 이와 같이 귀신들 쫓아내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한 것은 문맥적으로 명백하다. 이런 점을 칼빈이 주목을 했다면 본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3.3. 사도행전 설교 5편
여기서 검토할 5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 “성령 충만한 성도”(7:55-60), 그리고 “성경을 강론하자”(17:1-16)이다. 다섯 편 중 마지막 설교만 제외하고 한 목회자의 설교이다. 네 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사도행전의 연속 설교로 생각된다.
첫째 설교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의 설교제목이 시사 하듯이 설교의 세 핵심 대지의 주제는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과 축복이다. 그 가운데 가장 부각된 것은 축복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그중 그의 마지막 명령은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는 쉬운 명령이다. 이 명령은 곧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다(1:4). 예수께서는 이 명령 속에 들어 있는 약속은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5절). 이 약속이야 말로 제자들이 받을 최상의 축복이다. 이 축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유일하게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의 적용으로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믿고 기다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기다림은 단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기도”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 설교는 아주 쉬우며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대지를 정하고 논점을 잘 제시한다. 이 설교는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같이 행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의 성령 받음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실과 열매이며 이 열매는 최초로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먼저 적용의 차원에서 권고의 말씀을 하기 전에 120여명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성령 받게 된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예수께서 완성한 구원역사의 선상에서 이와 같은 권고가 주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은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설교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이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을 다루는 기사 중 아나니아와 사도 베드로의 대면과 그의 즉각적인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 설교자는 들어가는 말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동시에 몸이고, 신자들은 팔다리와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밝힌다(고전 12:27). 몸이 아플 때에 치료를 받거나 심각할 때는 수술을 해야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손을 들어 대수술을 하신다. 이러한 대수술의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본문이 기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이상적이고 거룩한 모습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자 병든 지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제거하셨다. 이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처분하여 얻은 돈을 욕심에 사로잡혀 일부 감추어 교인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돈의 일부를 숨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행동했다. 사도 베드로가 진상에 대하여 물어볼 때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 유일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그 현장에서 즉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한꺼번에 불러 가신 것은 “거룩한 교회를 주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욕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알곡이 자라는 밭에 잡초를 뽑아내는 것처럼 이들을 솎아내신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그들은 잡초요 사단의 도구와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성도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이를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칼빈의 주해와 비교해 볼 때 이 설교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나 그 핵심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로, 칼빈과 이 설교는 아나니와 삽비라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취하신 심판의 사건으로 본다. 둘째로, 이들 부부가 돈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인 것처럼 받친 사건에서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셋째로, 본 설교가 한편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병든 지체로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잡초와 같은 존재로 보며, 칼빈은 이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 이들을 불신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둘 다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보다 한 가지 면에서 더욱 성경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칼빈은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그릇되게 설명한 반면, 이 설교는 우리 말 성경 개역판과 개역개정판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란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설교자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부부 속에 거짓된 마음을 (넣어) 주었다”고 잘 지적했다. 칼빈은 사단이 이들의 마음에 가득 찬 것과 관련하여 설명하기를 “사단이 마음을 사로잡은 곳에는 마치 하나님을 추방한 것과 같이 그가 전인격에 다스린다.”고 설명했다. 이것이야 말로 배도자의 표시라고 칼빈은 주장했다. 필자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이와 같은 해석과 주장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역설하였음으로 여기서 별도의 논박하지 않고자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과 맥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검토할 세 번째 설교는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이다. 설교를 위해 선택된 두 구절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다루는 단락(5:34-39)의 결론부분이다. 칼빈도 본 단락을 동일하게 구분했다. 설교는 초대교회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핍박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 시작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반기독교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전 방위적으로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이 설교는 본문의 사건에서 찾는다. 설교의 두 소 대지는 예루살렘 교회는 도전받는 거룩한 교회였으며 동시에 도전을 극복한 거룩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을 때 이 속에서 영적인 대결을 인식하고 한편으로는 간절한 기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담대히 증언하여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 교회의 기도와 관련해서는 사도들이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로 모여 철야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밤중에 옥문을 열고(5:19) 사도들을 “기도하고 있는 교회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교회가 거룩한 본질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담대하고 왕성하게 선포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할 때 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이 설교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이다. 그러나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본문이 언급도 암시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사도들이 잡혀 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철야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5장 어디에도 사도들의 투옥문제로 교회가 철야 기도했다는 언급도, 천사들을 통한 사도들의 극적인 구출이 기도의 응답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사실 사도행전은 신약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5장과 일부 장에서 기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분명 이것은 본문이 분명하게든 암시적으로든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칼빈은 이 기사에 대한 설명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사도들의 기적적인 출옥과 관련하여 교회의 기도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간섭하신 특별한 역사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기사의 핵심적인 교훈은 교회와 복음의 증인들은 어떠한 반대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가말리엘과 같은 인물을 사용하심)과 보호하심(천사를 보내 사도들을 구출함)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분석할 설교는 “성령 충만한 성도”(7:55-60)이다. 성경본문의 내용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스데반이 행한 변호연설의 마지막 증언과 이로 인한 그의 순교와 용서기도이다. 이 설교는 스데반이 증언한 내용보다는 그가 성령 충만한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종류의 복 가운데 성령 충만이 가장 큰 복이며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인물로 스데반을 소개한다. 먼저 그는 스데반이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주목한다. 스데반은 집사로 선택되기 전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심지어 순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령 충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을 종합하여 추론한 결과이다(행 6:3, 10; 7:55). 스데반이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게 된 비결은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과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은 7장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의 변호연설을 통해 추론한 주장이다. 이것은 통찰력 있는 요점이다. 그가 끝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7:59)와 죄용서를 위한 기도(7:60)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과 관련하여 본문에 명시되거나 암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는 “스데반 집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설교자의 상상을 객관화한 진술이다. 말씀의 적용과 권고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성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검토할 설교는 “성령을 강론하자”(행 17:1-16)이다. 설교의 핵심주제어는 "교회개혁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깊게 깨닫고 신앙생활 적용 돕는 강해설교가 발전 돼야”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말하면서 “복음의 승리에는 반드시 핍박과 박해가 뒤따른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위해 배후에서 섭리하며 간섭하신다.” 사실을 지적한다. 이 설명과 함께 사도들의 성령운동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 강론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설교의 세 소 대지는 바울은 “성경의 뜻을 열어 주장”함, “구속사적인 강해설교”, 그리고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이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17:2-3)는 것은 강해설교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자들 중 다수가 “자기 사상 증거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나 성경 그 자체를 강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좀 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가 되려면 흥미 위주의 예화나 간증보다도 성경본문을 깊이 깨닫게 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하는 강해설교가 많이 발전되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다. 이어서 바울이 행한 강해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졌다. 이 사실에서 바울의 설교는 “신구약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둔 구속사적인 강해설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는 소 대지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에 속속 증거되어 전체 유럽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결국은 또 다시 종교개혁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요한 주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2:13)와 베뢰아 교회(행 17:11-12)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교은 칼빈의 주석과 비교해 볼 때 일맥상통한다. 칼빈은 먼저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므로 어떠한 가르침과 배움의 규칙도 성경이외의 다른 곳에서 취해서는 안 된다.”는 좌우명을 피력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예를 들면, 성경의 불확실성, 불분명성과 이로 인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공격한다. 칼빈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모든 논쟁에서 있어서 성경의 증언은 경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로마서 설교 4편
분석할 네 편의 로마서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 “하나님께 영광을”(11:34-36), “의인의 삶”(12:9-21; 14:17)이다. 이것들은 교수 목사 두 분과 목사님 두 분의 설교이다. 첫째 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의 대지 셋은 신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자를 정죄할 자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세상의 각종 한정된 사랑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영원한지 실감나게 한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본문(31-39절)을 네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한다(31-34, 35-37, 38-39). 내용상에 있어서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다는 차이점 외에 이 설교는 칼빈의 핵심적인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위의 설교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란 진술(31절)이 “우리가 더 이상 말 할 수 없는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칼빈도 “이 말씀은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지지이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설교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는 새 생명 축제 때 교회에 초청을 받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할 일종의 구원 초청의 설교이다. 이들이 불신자인 것을 감안 탓인지 이 설교는 본문 설교보다는 주제설교에 가깝다. 이것도 구원에의 초청에 중점을 둔 적용 중심의 설교이다. 천국행 특급열차 KTX (Kingdom Train Express)란 문구는 아주 참신한 표현으로 한국에 KTX를 건설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천국행 KTX를 건설할 때 죄의 난제를 실감나게 설명한다. 보통사람들이 하루에 죄를 3번 범한다고 할 때 80년을 살면 8만여 번의 죄악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죄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망 구렁텅이 위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천국행 KTX를 개통시켰다.” 이제 이 KTX를 타는 방법은 마음 중심으로 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입술로 이 사실을 고백하는 믿음이다.
이 은유적인 설교를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입술의 고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 자체보다는 그 구체적인 표현인 입술의 고백이라는 점을 잘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0:12-13의 단락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이 얼마나 필요한지 설명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 설교 “하나님께 영광을”(11:34-36)에서 설교자는 개혁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잘 보여주는 36절에만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는 이 본문이 로마서의 교리 부분을 마감하는 결론부임을 잘 지적한 후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란 36절의 진술은 인간의 모는 사상 체계의 골격이라고 말한다. 곧 이어서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공산주의의 유물론적인 세계관, 현대교회의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이 시대에 만연한 인본주의 사상을 비판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때문에 감격과 감탄에 사로잡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36절 마지막 부분). 설교의 적용적인 결론으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인본주의적인지 신본주의적인 지를 따지고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설교는 이 시대에 만연한 유물론적인 사상과 인본주의 사상을 의식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본문이 표방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을 아주 잘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본 설교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와 같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인본주의 사상과 유물론적인 사상과 같은 것을 배격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로마서 12-16장의 가르침에 따라서 신자의 실천적인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와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네 번째 설교 “의인의 삶”(12:9-21; 14:17)은 본문 전체에 대한 설교가 아니고, 이중에서 일부 구절을 선택하여 한 주제 설교이다. 단락의 선택은 문맥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으나, 선택된 소대지에 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문맥의 의미와 역할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 설교의 세 대지는 “의인의 삶은 사랑을 실하는 삶이다”(12:9, 19-21), “의인의 삶은 기도로 사는 삶이다”(12:12),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14:17)이다. 세 대지를 설명하는 내용들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인용된 성경구절들이다. 그 결과 문맥 속에서 볼 때만 비로소 제대로 파악되는 의미가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예를 들면, 롬 12:12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란 문맥에서 기도에 힘쓸 것을 권고하는데 반하여 본 설교는 이를 주목하지 않고 단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엡 6:18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어서 기도와 관련된 구절들을 언급한다. 또한 셋째 대지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에서 설교자는 롬 14:17의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말하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고 여기서 단어 “성령”에 주목하여 성령 충만의 관점에서 요점을 개진한다.
이 본문과 관련된 칼빈의 주석은 우선 12:9-21의 단락을 더 세분하여 넷으로 나눈다(9-13, 14-16, 17-19, 20-21). 칼빈은 특히 12:11의 “열심을 품고”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에 주목을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설교자가 주목을 했더라면 성령 충만과 관련된 셋째 대지를 본문의 문맥에 충실하게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 에베소서 설교 1편
설교 “감사에 에이 프러스(A+)"(5:18-21)는 선택된 18-21절에 대한 전체 설교가 아니고, 20절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 초점을 둔 일종의 주제설교이다. 설교는 선천적으로 면역성이 없는 아이로 태어난 12살의 소년 데이비드가 한 말 “저는 맨발로 풀밭을 걷고 싶어요.”로 시작하여 세 대지 “바울의 감사”, “감사의 비결”과 “성령의 감동”을 담고 있다. 바울의 감사와 관련해서는 투옥 중에서도, 질병 중에도, 그리고 각종 역경 중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을 언급한다. 감사의 비결로는 겸손한 은혜의식, 가시(역경)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교인들은 감사대학에 다니는 평생학생으로 감사 학점을 에이 플러스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이 설교는 내용적으로 볼 때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을 잘 반영하는 아주 실천적이며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좋은 설교이다. 그러나 선택된 본문의 문맥적인 흐름 속에서 ‘감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 칼빈은 이 설교의 초점인 20절의 주해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수없이 많은 은택들은 기쁨과 감사의 신선한 원인들을 낳는다.”고 말함으로 설교자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이 신자들로 감사하게 한다는 요점을 지지한다. 범사에 감사할 것을 촉구하는 본문이 속한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은 구체적으로 밝혔다면 본문의 설교는 문맥과 본 서신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했을 것이다.
3.6. 디모데후서 설교 1편
해당 설교는 연말에 행해진 “선한 싸움과 '의'의 면류관”(4:7-8)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각 절을 중심으로 문맥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해설교에 속한다. 설교의 다섯 가지 핵심은 바울이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음(8절의 “재판장”에서 추론함), (2) 전쟁하듯 사역을 감당함(7절), (3) 오늘을 그날, 곧 재림의 날처럼 삶(8절의 “그날”), (4) 하나님의 영광만 목적하고 힘씀(문맥에서 등장하는 “주”에서 추론함) 그리고 (5) 겸손으로 주의 일을 감당함(8절의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에서 추론함)이다. 이들 핵심들은 분명하게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설교가 개혁주의 신학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핵심에 대한 설명에서 이 설교는 바울로 하여금 전쟁과 같은 사역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본문이 설명하거나 혹은 강조하거나 심지어 암시하는 내용도 아니다. 또한 다섯째 핵심인 겸손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은 8절의 의의 면류관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마련되어있다는 말씀에서 추론되었다. 하지만 8절이 강조하는 것은 의의 면류관의 보편성이지 바울의 겸손한 사역으로 보기 어렵다. 반면 바울이 모든 겸손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에 잘 나타난다(행 20:18-21). 8절에 대한 칼빈의 설명에서도 바울이 그의 사역을 겸손으로 감당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점은 다소 무리가 있다.
3.7. 야고보서 설교 2편
두 편 설교는 “시험 중의 온전한 기쁨”(1:2-4)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4:13-17)이다. 첫째 설교는 시험에 대한 일반적인 세 태도를 언급하면서 신자들이 본문이 제시하는 태도(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김)를 가질 것을 권고한다. 이어서 설교는 환란과 시험가운데 어떻게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들은 (1)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준다는 것, (2)성숙한 신앙인격을 만들어 준다는 것, (3)환란 중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것, 그리고 (4)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 다는 것이다. 이중 (3)은 벧전 1:5-6에 근거한 내용이다. 이 설교는 본문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다른 성경구절을 삽입하여 설명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제설교와 주해설교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로 보인다. 하지만 2절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에 대한 설명에서 “기뻐한다는 헬라어 의미는 자랑할 것이 가득차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 최고조의 상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는 주장은 부정확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전혀 근거가 없다. 인용된 행 5:41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도 이 설명을 지지하는데 부족하다.
이 설교가 독자들이 처해있는 시련에 대하여 구체적인 진술을 일체하지 않는데 반하여 칼빈은 1절에 대한 설명에서 독자들이 유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로 고통을 받는 사실을 언급한다. 칼빈은 모든 역경을 포함하여 각종 시련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또한 시련들이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속에는 육신의 악덕들이 계속적으로 발아하기 때문에 시련들이 필연적으로 반복돼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검토할 마지막 설교는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약 4:13-17)이다. 설교의 부제목은 “안개 같은 인생, 기도가 등불입니다”이다. 설교제목은 14절에서 비롯되었고, 단락의 설정은 아주 적절하다. 설교는 먼저 인생을 안개와 같이 비유한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안개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한다. 인생이 안개와 같다는 의미 설명에서 이 설교는 (1)인생은 반드시 떠난다, (2)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3)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세 내용을 제시한다. 하지만 문맥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1)번뿐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안개가 영구히 남아있지 못하고 잠시잠간 일시적으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부자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과도 일치한다(1:10).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현생에만 근거한 목적들은 전적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인생이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못 간다는 교훈을 하지 않는다. 이 교훈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근거한다(딤전 6:7; 전 5:15; 욥 1:21). 또한 요점 (3)번도 안개의 이미지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
이어서 안개 같은 인생이 살아야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야고보서 전체에서 소개한다. 제시된 내용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한 생활(1:26-27; 4:4, 8), 형제사랑(1:10; 2:8-16), 그리고 기도생활(1:5; 4:2, 8; 5:13-18)이다. 신자가 행할 선을 본 구절이 속한 야고보서 전체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고 바람직한 설명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않는 것이다. 문맥에서 신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은 자기 자신의 정욕적인 뜻 실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4:15). 4장의 문맥에서 신자가 행해야 하는 주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4:7),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8절), 회개의 삶을 사는 것(9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10절), 피차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11절)등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문맥 속에 명시된 주님의 구체적인 뜻(곧, 신자가 행할 선)이 있는데 이런 교훈들에 주목을 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4. 목회자들의 설교분석에 근거한 발전방향 제안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합동교단에 소속한 목회자들의 신약 설교 19편을 칼빈의 주석(성경해석)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이어서 보다 더 건전한 설교의 발전을 위해 고려돼야 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아주 고무적인 것은 선정된 목회자들의 설교가 칼빈이 제시하고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개혁주의 신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대 원칙에서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의 결과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확신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는 원리는 모든 설교에 기본적으로 전제되거나 경우에 따라 분명하게 표명되기도 했다. 이 점은 설교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귀중하고 복된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 현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설교들이 전제하고 있는 확신이다. 칼빈이 16세기에 구교와의 충돌과 투쟁의 과정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시대에 충실하게 적용했으니 현대의 목회자들은 현 시대의 문제점들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시대의 조류와 흐름에 함몰된 자로 살지 않게 하려고 하는 자세가 설교 행간에 보인다.
셋째, 설교자들이 본문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원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원어의 뜻을 이해함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넷째로, 대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 해석에 있어서 칼빈의 통찰을 넘어서는 약간 경우도 있었다. 누가복음 5장의 기적적인 고기 어획의 사건과 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경우 제한된 부분에서 드러났다.
다섯째로, 성경해석의 대원칙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각론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분석한 19편의 설교 중 선택된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과 문맥적인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설교는 소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주(강)해설교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오랫동안 한국교회 설교를 특징져왔던 주제 설교의 범주에 머물고 있었다. 목회자들이 성경의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선택된 본문의 진리(메시지)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적용하는 본문의 뜻 중심의 설교,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주(강)해설교로 발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대부분의 설교가 적용에는 아주 강하나 인위적인 것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취약한 것은 설교의 적응이 본문의 깊은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고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섯째로, 저자의 의도와 본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저자의 어법과 표현방식과 문맥에 주목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설교자들에게 미흡한 것 같다. 성경이 입은 옷인 표현의 핵심수단인 언어와 어법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문맥이 단어, 구절, 문단, 단원의 내용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하고 이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곱째로, 대부분의 설교가 선택된 본문의 진리를 각종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아직도 미흡하다. 칼빈의 지속적인 관심은 주석가와 설교자가 그 본연의 임무에 따라 본문이 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저자의 생각(마음)을 풀어 설명하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임무에 전념하는 설교자와 그러한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발전될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여덟째로, 일부 설교자들이 헬라어 단어나 동사를 취급함에 있어서 어떠한 증거로도 입증될 수 없는 과잉 해석 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본문을 성경의 원어로 보는 실력을 구비한 가운데 원문의 전체 속에서 단어, 문구, 구절과 문장과 문단을 보지 않고 사전적으로 정의에 따라 단어 자체만 보고 이를 단어의 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단어나 문구나 구절이 얼마나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 의하여 결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주어진 문맥 속에서 성실하게 성경본문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5. 나가는 말
칼빈이 시대에 앞서 표방하였고 그를 이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유산은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 치의 오차도 흔들림도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성경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서 버려서는 안 되는 복되고 소중한 전통과 자산이다. 이 전통에 따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는 세부적인 면에서 더욱더 이 원리에 충실하게 발전돼야 할 것이다. 칼빈이 한 평생을 성경의 주석과 설교를 통해 성경 저자의 마음(뜻) 파악하고 설명하여 그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쳤던 것과 같이 21세기를 사는 목회자들은 동일한 성격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만일 칼빈이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나타나서 한마디 핵심적인 권고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가 할 충고는 성경의 저자가 다양한 어법을 사용하여 문맥 속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만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충실하게 가르치라고 충고할 것이다.
유상섭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
http://blog.daum.net/kkho1105/5764
개혁신학회 2009 봄학술세미나 유상섭 교수 발제
칼빈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며 개혁신학회(회장 김인환 목사)는 "칼빈과 한국교회"라는 주제로 '2009년 봄 학술 세미나'를 지난 3월 개최했다. 총신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세미나에서는 모두 17명이 칼빈을 주제로 발제했다. 다음은 유상섭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의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본 한국 목회자들의 설교" 발제 전문.
1. 들어가는 말
올해는 종교개혁의 꽃을 피우고 그 열매를 맺어 전 유럽과 전 세계 교회에 확산시킨 칼빈의 탄생 500주기를 기념하는 뜻 깊은 해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백성의 손에 올려놓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권위 있고 생명력 있게 듣게 해준 16세기의 종교개혁이야 말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쳤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강단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 백성의 마음속 깊게 심어준 설교개혁의 시대였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다. 종교개혁 당시 구교에 비하여 종교 개혁자들에게 설교가 엄청나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사실을 회고해 볼 때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설교를 비교 분석함으로 어떤 점에서 칼빈의 성경해석방법의 유산을 계승하고 있으며, 어떤 점에서 미흡한 점이 있는지 점검하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비교와 분석을 위해서 선정된 설교는 한국교회의 개혁주의 신학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본 교단의 목회자들의 설교 19편이다. 이들 설교는 합동 총회 교단지 기독신문에 2005년부터 2008년까지 게재된 [우리시대의 설교]에서 신약의 본문과 관련된 지상 설교들이다. 19편의 설교문은 모두 여섯 명의 목회자들이 교회에서 설교했던 것을 교단지에 게재한 것들이다. 이들 대부분이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고, 이중에 두 분은 교수출신으로 한분은 신약학 교수를 역임한 바 있고, 다른 한 분은 설교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이 여섯 분의 설교자들은 합동교단의 중진으로 교단을 대표하는 분이라고 해도 크게 무리가 없다. 이분들의 설교를 칼빈의 성경해석에 비추어 분석함으로 한국교회의 설교 현주소를 확인하고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본 글의 목적은 설교자 개인을 공격하거나 폄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개혁주의 신학의 전통을 있고 있는 본 교단 목회자들의 설교 진단을 통하여 앞으로 나갈 긍정적인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므로 설교자들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논문의 전개는 먼저 칼빈의 성경해석 방법과 원리를 개괄적으로 제시하고 이어서 선정된 신약의 19편의 설교문을 칼빈의 주석과 비교하여 하나씩 설명하고자 한다. 이들 설교문들은 마태복음 4편, 누가복음 2편, 사도행전 5편, 로마서 4편, 에베소서 1편, 디모데후서 1편, 그리고 야고보서 2편이다. 이러한 비교 분석에 근거하여 앞으로 한국교회의 강단설교가 나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고자 한다.
2.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리와 방법요약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일평생 조직신학을 가르쳤던 죤 머레이(John Murray)는 칼빈을 가리켜 “칼빈은 종교개혁의 주해자요 모든 시대의 성경 주해가들 중에서 제 1급에 속한다.”고 잘 말했다. 칼빈의 성경해석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 큰 논쟁에 없이 수용되는 입장이 있다. 그것은 칼빈이 사용한 성경해석의 핵심 원리는 간략함과 명료성(lucid brevity 또는 brevitas et facilitas) 또는 분명하고 간결함(perspicua brevitas 또는 clear brevity)이다.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하는 기독교 강요와 주석들은 칼빈의 이런 원리가 구체적으로 적용된 것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성경의 내용들을 주제에 따라 교리적으로 정리하여 집대성한 그의 [기독교 강요]보다 성경 본문의 흐름에 따라 본문의 가르침을 설명하고 주해해하여 놓은 그의 주석책들이 이 원리를 더 분명하게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칼빈이 멜랑크톤(Melanchthon), 불링거(Bullinger)와 부처(Bucer)의 방법을 수용하지 않고 배격한 것은 그들이 쓴 주석에 사용된 방법들이 이 원리에 비추어 맞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멜랑크톤은 그의 Loci Communes에서 사용한 방법은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구절만 골라서 설명하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생략되는 부분이 많이 발생하게 되고, 반면 부처의 주석은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너무나 상세하게 설명하여 독자들을 지치게 만든다고 칼빈은 예리하게 지적했다. 따라서 이러한 폐단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 자신은 주석을 쓸 때 일부만 선별하여 집중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모든 것을 아주 상세하고 장황하게 풀어 놓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대신 주석을 쓸 때 항상 압축하고 짧게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방법이 바로 간략함과 명료성 또는 분명한 간략성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주석자의 유일한 임무는 로마서 주석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 것과 같이 “자신이 설명하고자 하는 저자의 생각을 열어놓는 것이다"(to lay open the mind of the writer). 정경적인 해석방법을 창안하여 발전시킨 구약학자 차일즈(Childs)는 칼빈의 창세기 주석에 대한 평가에서 그의 주석은 “책의 문자적인 의미를 이해하려는 진지한 노력으로 특징 지워지는 작품”이라고 격찬하였다. 또한 로마서의 대표적인 주석가 중에 하나인 크랜피일드(Cranfield)는 칼빈의 로마서 주석에 대한 평가와 관련하여 칼빈은 “기록된 단어들 가운데 표현된 대로 바울의 생각을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신실하고 단순하고 간략하게 설명하려고 추구했다.”고 평가했다. 저자는 언어를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므로 해석자는 저자가 사용한 언어 속에서 성경 저자의 생각을 만나게 된다. 본문은 해석자가 저자를 만나는 유일한 장소이므로 해석자가 성경의 본문을 떠나서는 결코 저자의 생각을 파악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 바로 칼빈이 일관되게 주장한 성경의 문자적인 의미이다.
본문의 문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문맥을 제대로 간파하는 것이다. 칼빈은 할례를 다루고 있는 창세기 17:9의 주해에서 "나는 여전히 문맥의 순서를 따를 것인데, 나는 이렇게 하는 것이 해석자의 임무에 더 적합하다."고 말했다. 칼빈에게 성경 해석자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 주목해야 할 문맥은 본문을 둘러쌓고 있는 직접적인 문맥과 성경 전체의 문맥을 모두 의미한다. 성경 해석자는 성경본문의 원래적인 문맥을 무시하고 해석할 때 오류에 빠지게 되는 데, 그 일례로 칼빈은 이사야 14:12를 주석하면서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란 문구를 사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맥을 무시한 결과라고 비판했다. 칼빈은 본문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전체 문맥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하여 “여기에 말해진 것은 앞에 진행된 것에 의존하므로 이것들은 한 문맥 안에서 동시적으로 읽혀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칼빈은 문맥에 근거하여 파악되는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했기 때문에 초대교회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그 당시에 무르익어 절정에 도달했던 소위 성경의 사중적인 의미는 물론 알레고리칼 해석을 모두 배격했다. 그에게 문자적인 의미는 표현방식의 성격을 감안하여 상징적인 설명을 비롯한 문법적이고 수사학적인 의미를 포함하며, 동시에 문법적, 역사 지리적, 사회적인 상황들을 고려하여 해석한다.
이와 같이 본문의 문맥적이고 문자적인 의미에 충실을 기하여 저자의 생각을 파악하고 설명하려는 성경해석과 주해의 원리는 칼빈의 설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설교자의 임무는 성경해석자의 임무와 같이 “성경을 주해하는 것, 즉 하나님의 음성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설교자는 성경에 계시되고 기록된 것만을 선포해야 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본문과는 상관없이 설교자 자신이 고안해 낸 것을 말해서는 안 된다. 설교는 성경을 주해하고 해석하여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 뜻을 설명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 칼빈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청중들은 성경의 본문에 충실한 설교를 들을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선포하신 말씀을 듣는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설교자의 가르침이 성경에 충실하면 바로 그 때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가르침의 전달자가 누구든지 전혀 상관이 없다. 남아 있는 칼빈의 설교들은 성경의 해당 책들에 대한 연속적인 주해설교이다. 그는 성경의 본문 말씀에 충실을 기하기 위하여 원어성경을 직접 사용하여 아무런 노트 없이 설교를 하였다. 칼빈은 성경의 메시지를 후대의 청중들에게 적용할 때는 주어진 글의 시대적인 상황을 우선적으로 잘 이해하고 이것이 후대와 상황과 어떻게 유사하거나 다른지 파악한 후에 적절한 적용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3. 목회자들의 설교분석과 평가
선정된 신약설교 19편을 설교자 별로 구분하기 보다는 성경 별로 구분하여 칼빈의 주석에 나타난 성경해석의 원리에 비추어 구체적으로 검토해보자. 신약성경의 순서대로 열거하면 마태복음의 설교 4편, 누가복음의 설교 2편, 사도행전의 설교 5편, 로마서 설교 4편, 에베소서 설교 1편, 디모데후서 설교 1편, 그리고 야고보서 설교 2편이다.
3.1. 마태복음 설교 4편의 분석과 평가
검토할 네 편의 마태복음 설교는 3명의 목회자가 한 설교로 순서대로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 그리고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이다.
첫 설교 “엎드려 경배하라”(마 2:1-12)에서 설교자는 본문에 분석에 근거하여 본문의 세 핵심적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성탄절에 깨달아야 할 메시지를 제시한다. 이들 세 종류의 등장인물은 헤롯,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동방박사들이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던 헤롯의 모습은 “보이는 것에 집착하면서 세상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종교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은 성경에 능통하지만 “형식과 습관에 젖어서 화석처럼 굳어져 버린 신앙”을 가진 사람들로 “외형적으로는 신앙의 습관과 틀이 잡혀있어 신앙인으로 빈틈이 없어 보이지만, 그 내면에 주님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그려준다. 오늘날 신자들이 본받아야 할 동방박사들은 부족한 성경지식과 신앙에도 불구하고 아기 예수가 초라한 마구간에 누워있는 것에 실망하지 않고 그들의 겸손하고 순수한 영으로 왕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동방박사들은 오늘날 “겸손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보다 귀하게 여기는 자”의 모습을 예고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설교는 본문의 세밀한 분석에 근거하여 절의 흐름을 따라 전개되지는 아니했지만 본 단락에서 핵심적인 세 등장인물을 중심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문의 내용을 잘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설교는 두 가지 면에서 본문에 전혀 근거가 없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나는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찾아온 동방박사는 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동방박사들의 숫자가 얼마인지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예수께 드린 세 선물에 근거하여 이들이 세 사람으로 단정하는 것을 반대한다. 오늘 마태복음의 주석가들은 칼빈의 이러한 견해에 대체적으로 동의한다. 또 다른 문제는 동방박사들이 아기 예수님을 방문했을 때 그는 초라한 또는 더러운 마구간 누워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복음 2장에 기록된 아기 예수 탄생기사에 비추어 본문의 탄생기사를 그릇되게 읽은 결과이다. 마태복음 본문은 어디에서도 아기 예수님이 있는 장소를 마구간으로 밝히지 않고 막연하게 아이가 있는 곳이라고 말할 뿐이다(2:9). 더욱이 예수께서 탄생하신지 상당 기간이 지났는데 그가 아직도 여전히 마구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본문을 상세하게 보지 못한 결과이다. 이상하게도 칼빈도 문맥이나 내용을 주목하지 않고 아무런 증거 없이 그리스도가 마구간에 누워있었다고 말하는 실수를 범했다.
두 번째 설교 “연약함에 담긴 진리”(마 8:14-17)에서 설교자는 현대인들이 “칭송과 인정을 받는 높은 자리로 나아가고 싶어”하는 것과는 반대로 예수께서는 낮은 자리로 내려가 사람들을 섬기신 것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취한 이러한 섬김과 연약함의 길은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르렀음을 밝힌다.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우리들이 “이 섬김과 연약함의 길에 들어설 때 비로소 주님과 같이 소자들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반면 칼빈은 8:14-18의 단락에서 이사야 53:4를 인용하는 17절에만 초점을 두고 설명한다. 그의 설명의 핵심은 예수께서 행한 각종 육신적인 질병의 치유는 예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시는 각종 영적인 은혜를 알려주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단락 구분에 있어서는 칼빈이 8:14-18로 구분한 것보다 설교자가 8:14-17로 구분한 것이 더 자연스럽다. 저자 자신이 밝히는 본단락의 목적은 예수께서 행하신 각종 귀신축출과 병고침이 십자가와 어떻게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지 밝히는데 비하여 이 설교는 예수님의 섬김과 연약함의 길을 신자들이 참여할 것을 권고하는데 초점이 있다. 설교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을 인정하지만 본문의 의도에 충실 하는 것이 낫지 않는가 한다. 이런 취지의 설교를 굳이 하려고 한다면 섬김과 연약함의 주제와 더욱 분명하게 연결된 마태복음의 다른 본문들(18:5-10; 25:31-46)을 선택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세 번째 설교 “예수님이 감동하신 큰 믿음”(마 15:21-28)은 흉악한 귀신에 들려 고통당하는 딸을 가진 가나안 여인의 끈질긴 간청과 예수님의 반응과 칭찬을 기록하는 기사이다. 이 설교는 예수께서 여인의 믿음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신 것을 밝히고 여인이 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믿음을 가졌음을 역설한다. 이 기사가 주는 두 가지 교훈은 “불쌍히 여겨 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으면서 예수께 나오기만 하면 큰 은혜를 받는다.”는 것과 “무슨 말씀이든지 겸손히 ‘아멘’ 하면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복을 받는다.”는 것이다. 설교자는 본문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헬라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28절), “엘레에손 메”(22절), “보에쎄이 모이”(25절), “프로세퀴네이”의 어원적인 또는 사적적인 의미를 설명한다. 이러한 시도는 본문의 뜻을 잘 파악하고자 하는 좋은 시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헬라어 단어나 문구에 대한 설명은 과장되거나 부정확하다는 것이 옥의 티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네 소원대로 되리라”를 “원하는 만큼 가져갈지어다”로, 부정과거 명령어로 사용된 “엘레에쏜 메”가 “단 한번만 불쌍히 여겨 달라”로, “보에데이 모이”를 “위험에 빠진 사람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달려가라”는 뜻으로 각각 설명한 것은 무리한 해석으로 보인다.
이 설교는 본문에 대한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본질적으로 일치한다. 칼빈도 예수께 찾아온 여인의 믿음이 얼마나 확고한지 인정한다. 그는 또한 예수께서 여인에게 처음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밝힌다. 또한 칼빈의 단락구분과 이 설교의 단락구분이 일치한다. 이 점에서 본 설교는 칼빈의 성경해석과 대체적으로 맥을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 가지 근본적인 차이점은 본 설교는 아직 본격적으로 이방인들에게 특별은총(구원의 은총)이 부어질 시대가 되지 않았다는 진술을 하지 않는데 비하여 칼빈은 이러한 인식을 본문 설명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칼빈은 마태복음의 병행기사에만 등장하는 문구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만 보냄을 받았다”(24절)는 설명에서 이 주장을 상세하게 확대하여 제시했다.
설교 “먼저 된 자가 되자”(마 20:1-16)는 다섯 차례에 걸쳐서 포도원에서 일을 일꾼을 고용하여 모두에게 동일하게 한 데나리온씩 제공한 관대한 주인의 비유이다. 이 설교는 이 시대의 고질적인 양극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성경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이 설교의 부제는 “나눔이 천국의 원리입니다. 먼저 와서 더 많은 수고와 헌신하는 성도돼야”이다. 설교자는 우리가 이 세상의 가르침에 굳어져 있기 때문이 이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다고 지적하고, 본문은 “세상 논리 속에서 어떻게 천국을 세워 갈 것인가?”를 알려준다고 말한다. 본문 근거하여 제시된 세 가지 핵심요점은 “부르심의 목적에 충실하자”, “선한 것은 내 뜻이 아니라 부르신 주님의 뜻이다”, 그리고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이다. 이 설교 자체는 성경의 일반적인 가르침을 반영하며, 선의 (절대적인) 기준에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고 밝힘으로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중 하나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그러나 먼저 온 사람들이 원망한 것은 “주인이 부른 목적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는 설명은 주장의 근거가 없다. 또한 우리 “모두가 먼저 된 자가 되자”는 두 번째 대지는 본 비유의 취지를 무색하게 한다. 설교의 마지막 적용에서 “나중 된 자는 먼저 된 자의 많은 수고를 통해 동일한 품삯을 받게 되어 먼저 된 자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며, 먼저 된 자의 그 아름다운 모습을 본 받아 자신도 잘 세워져 자기보다 더 나중 된 자를 위해 수고와 결과를 동일하게 나눌 수 있어야 한다.” 권고는 본 비유에서 끌어낼 수 없는 인위적인 주장으로 보인다.
반면 이 비유에 대한 칼빈의 설명은 문맥적인 흐름을 반영한다. 칼빈은 이 비유를 19:30의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의 말씀의 확증과 구체적인 적용으로 해석한다. 예수께서 이 비유에서 선언하시는 것은 신자들이 참여할 “천상적인 영광의 동등성”이나 “경건한 자들의 미래 조건”에 관한 것이 아니고, “주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실 때마다 일시적으로 무시했던 것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과 동등하게 하시기 때문에 먼저 부름 받은 사람들은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들을 모독할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그의 백성이 진보를 이루도록 계속적으로 노력하도록 촉구하는 것 외에 다른 목적이 없다. 그리스도께서는 어느 누구에게나 신자에게도 빚을 지지 아니하며 그의 요구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며, 그가 주시는 상급은 노력에 대한 대가가 아니라, 순전히 은혜로 주신다. 칼빈은 이 비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과 이방인도, 택자와 버림받은 자를 비교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 보다 먼저 부름 받은 자들은 더욱더 민첩하게 나아가고 겸손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월감에 빠지지 말며,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공통적인 상급을 나눌 것을 권고한다.”고 결말을 맺는다.
3.2. 누가복음 설교 2편의 분석과 평가
누가복음의 두 편 설교는 “어부를 낚으신 예수님”(5:1-11)과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첫 번째 설교 제목에 드러나듯이 설교자는 본문의 핵심을 엄청나게 많은 고기를 잡은 베드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어부로 낚으신 예수님에게 있다고 밝히는 것으로 출발한다. 이 설교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의 계시이기 때문에 “윤리적인 접근이나 교훈 위주로 성경을 접근해서는 안된다.”고 잘 지적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 설교는 본문의 기사에서 세 가지 핵심을 제시한다. 첫째로, 예수께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실패자 베드로에게 의도적으로 찾아오셨다. 둘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 셋째로, 예수께서는 베드로에게 확신을 주기 위해 기적을 일으켜 주셨다. 이러한 세 핵심은 본 기사의 내용을 면밀하게 검토하여 얻은 통찰에 근거한 것으로 타당하다. 첫 번째 요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설교자는 베드로의 실패를 강조하여 “어장을 잃고 파산상태에 있었다.”는 언급과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이러한 강조는 본문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다. 두 번째 요점은 예수님의 말씀운동의 문맥에서 볼 때 아주 적절한 핵심이다. 세 번째 요점과 관련해서 설교자는 예수께서 기적을 통해 “창조주로서의 권능으로 일하고 계심을 보여주었다”것과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하지만 들은 대로 순종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주장을 잘 피력한다. 마지막으로 설교자는 이 본문의 적용으로 신자들이 “베드로와 같은 전도자의 소명과 사명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하나님 나라의 건설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데 각각 소명을 주셨다.”고 밝힌다.
이 본문에 대한 칼빈의 주석은 본질적으로 이 설교의 핵심내용과 일치한다. 이와 관련하여 지적할 세 가지 내용은 예수께서 배움이 부족한 베드로를 부르신 것은 “육신의 교만을 겸손하게 하고 영적인 은혜의 놀라운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놀라운 양의 고기 어획의 기적은 예수께서 가지신 신적은 능력 또는 신성을 입증했다는 것, 그리고 칼빈도 설교자와 같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이 받은 특별한 소명과 일반 신자들이 받은 소명의 차이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와는 다르게 설교문의 두 번째 요점인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셨다.”는 주장은 칼빈의 설명에는 일체 등장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이 설교는 칼빈이 간과한 부분을 본문의 문맥과 강조점에 따라 잘 지적한 것으로 보인다. 바로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보다 더 전진했다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칼빈과 이 설교는 모두 예수께서 행한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확장의 관점에서 보지 않고 예수님의 신성 또는 그의 신적인 능력을 입증한 것으로만 해석한 것은 오늘날 많은 신약 학자들이 예수님의 각종 기적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보는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다소 아쉽다.
누가복음의 두 번째 설교는 “평화 공동체를 세우는 비결”(9:46-50)이다. 본문의 내용은 큰 자에 대한 제자들의 논쟁(46-48)과 어떤 사람의 귀신축출과 관련된 사건(49-50)이다. 이 설교는 현대인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직장이든 가정이든 교회는 인간관계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본문에서 두 핵심적인 가르침을 도출한다. 두 교훈은 “작은 자를 귀하게 보는 눈이다.”와 “모든 사람을 동역자로 볼 수 있는 시각이다.” 전자의 교훈은 큰 자가 누구인가에 관한 논쟁기사와 관련되어 있고, 후자의 교훈은 귀신축출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본문에 드러나는 예수님의 두 시각을 각종 사회적인 갈등 속에 살아가는 신자들이 자신의 것으로 삼아 살아갈 것을 권고한다.
이 설교는 본문의 내용에 근거한 아주 쉽고 성경적으로 건전한 설교로 보인다. 물론 이 설교에서 적용이 본문의 설명보다는 우선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본 기사를 12 제자들의 사명과 예수님 체험의 중요성을 핵심적으로 다루는 9장 전체의 문맥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문맥에서 떼어서 본문이 설교되었다는 것이다. 칼빈의 주석은 큰 자에 대한 논쟁 기사를 마태복음의 기사(18:1-5)를 중심으로 설명하며 누가의 병행기사는 별도로 다루지 않았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을 귀신을 축출한 기사를 마가복음의 병행기사(9:38-40)를 중심으로 설명하여 누가복음의 병행기사를 따로 취급하지 않았다. 칼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축출한 어떤 사람을 책망하여 금한 것은 성급하게 권한을 남용한 것이라고 지적하고, 예수께서는 그 사람이 귀신을 축출할 권한 부여받은 것을 인정하는 것도, 그가 행한 것이 바르다고 하는 것도 아니며, 그의 귀신축출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된 것을 제자들이 인정해야 했을 것이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마가복음의 관점에서만 기록하다 보니까 칼빈은 제자들이 그로부터 귀신을 축출할 권세를 부여받았지만 귀신을 쫓아내는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본 사건을 이해하지 못했다. 제자들의 귀신 축출과 관련하여 그들의 실패는 “제자들이 나가 각 촌에 두루 행하여 처처에 복음을 전하며 병을 고치더라.”는 누가의 언급(9:6)에 암시되어 있고, 아홉 명의 제자들의 명백하고 공개적인 대 실패는 예수께서 세 제자와 함께 산에 있을 때에 산 밑에 있는 마을에서 나머지 제자들이 귀신들려 간질병으로 고생하는 아이에게서 귀신을 축출하는 데 실패한 사건에 완전히 공개적으로 폭로되었다(9:37-43a). 이것은 마가복음의 병행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9:14-29). 이와 같이 귀신들 쫓아내는 데 실패한 제자들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것을 금한 것은 문맥적으로 명백하다. 이런 점을 칼빈이 주목을 했다면 본 사건을 좀 더 정확하게 설명했을 것으로 사료된다.
3.3. 사도행전 설교 5편
여기서 검토할 5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 “성령 충만한 성도”(7:55-60), 그리고 “성경을 강론하자”(17:1-16)이다. 다섯 편 중 마지막 설교만 제외하고 한 목회자의 설교이다. 네 편의 사도행전 설교는 사도행전의 연속 설교로 생각된다.
첫째 설교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과 약속과 축복”(1:4-14)의 설교제목이 시사 하듯이 설교의 세 핵심 대지의 주제는 예수님의 명령과 약속과 축복이다. 그 가운데 가장 부각된 것은 축복이다. 예수께서는 수많은 명령을 하셨지만 그중 그의 마지막 명령은 마음만 먹으면 행할 수 있는 쉬운 명령이다. 이 명령은 곧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다(1:4). 예수께서는 이 명령 속에 들어 있는 약속은 그들이 성령 세례를 받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5절). 이 약속이야 말로 제자들이 받을 최상의 축복이다. 이 축복의 약속을 받기 위해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유일하게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 예수께서 성령을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목적은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설교자는 이 말씀의 적용으로 신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믿고 기다리는 일을 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이 기다림은 단지 수동적인 것이 아니고, “끝까지 인내하는 믿음의 기도”로 기다리는 것이다.
이 설교는 아주 쉬우며 본문에 나와 있는 내용에 따라 대지를 정하고 논점을 잘 제시한다. 이 설교는 제자들이 행한 것과 같이 행하면 우리가 성령을 받는다는 것이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제자들의 성령 받음은 예수님의 구원사역의 결실과 열매이며 이 열매는 최초로 그들에게 주어진 구원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다. 또한 신자들은 이미 성령을 받았다. 이러한 사실을 감안해 볼 때 먼저 적용의 차원에서 권고의 말씀을 하기 전에 120여명의 제자들이 처음으로 성령 받게 된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예수께서 완성한 구원역사의 선상에서 이와 같은 권고가 주어졌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점에서 칼빈의 주석은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다음 설교는 “성령과 거룩한 교회”(5:1-5)이다.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갑작스런 죽음을 다루는 기사 중 아나니아와 사도 베드로의 대면과 그의 즉각적인 죽음과 관련된 부분이다. 설교자는 들어가는 말로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이며 동시에 몸이고, 신자들은 팔다리와 같은 지체라는 사실을 밝힌다(고전 12:27). 몸이 아플 때에 치료를 받거나 심각할 때는 수술을 해야 하듯이 교회도 하나님께서 필요하시면 손을 들어 대수술을 하신다. 이러한 대수술의 구체적인 사례가 바로 본문이 기록하는 사건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를 세우셨고, 교회의 이상적이고 거룩한 모습을 위협하는 심각한 사건이 발생하자 병든 지체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제거하셨다. 이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처분하여 얻은 돈을 욕심에 사로잡혀 일부 감추어 교인들 앞에서 명예를 얻고자 하는 마음에 돈의 일부를 숨긴 사실을 말하지 않고 모든 것을 바친 것으로 행동했다. 사도 베드로가 진상에 대하여 물어볼 때 회개할 기회가 있었으나 이 유일한 회개의 기회를 상실하게 그 현장에서 즉사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을 한꺼번에 불러 가신 것은 “거룩한 교회를 주도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욕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알곡이 자라는 밭에 잡초를 뽑아내는 것처럼 이들을 솎아내신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을 훼손한 그들은 잡초요 사단의 도구와 같은 존재였다. 이러한 사실을 깊이 의식하고 성도들은 교회의 거룩함을 유지하고 이를 어떠한 경우에도 훼손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사건에 대한 칼빈의 주해와 비교해 볼 때 이 설교는 그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나 그 핵심적인 면에서 유사하다. 첫째로, 칼빈과 이 설교는 아나니와 삽비라의 사건을 하나님께서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기 위해서 취하신 심판의 사건으로 본다. 둘째로, 이들 부부가 돈의 일부를 감추고 나머지를 전부인 것처럼 받친 사건에서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시인한다. 셋째로, 본 설교가 한편으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병든 지체로 보고, 다른 한편으로는 잡초와 같은 존재로 보며, 칼빈은 이들을 “악한 사람들”이라고 말함으로 이들을 불신자로 간주하는 것으로 보인다. 넷째로, 둘 다 교회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보다 한 가지 면에서 더욱 성경적인 측면이 있다. 이것은 칼빈은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그릇되게 설명한 반면, 이 설교는 우리 말 성경 개역판과 개역개정판에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란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입장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와 관련하여 설교자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부부 속에 거짓된 마음을 (넣어) 주었다”고 잘 지적했다. 칼빈은 사단이 이들의 마음에 가득 찬 것과 관련하여 설명하기를 “사단이 마음을 사로잡은 곳에는 마치 하나님을 추방한 것과 같이 그가 전인격에 다스린다.”고 설명했다. 이것이야 말로 배도자의 표시라고 칼빈은 주장했다. 필자는 사도행전 주석에서 이와 같은 해석과 주장이 얼마나 성경적으로 타당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역설하였음으로 여기서 별도의 논박하지 않고자 한다. 요약해서 말하면 이 설교는 칼빈의 주석과 맥을 같이하면서 동시에 그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검토할 세 번째 설교는 “세상이 무너뜨릴 수 없는 교회”(5:38-39)이다. 설교를 위해 선택된 두 구절은 산헤드린의 결정을 다루는 단락(5:34-39)의 결론부분이다. 칼빈도 본 단락을 동일하게 구분했다. 설교는 초대교회로 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핍박의 역사에 대한 개괄로 시작된다. 오늘 한국교회가 반기독교적인 세력들에 의하여 전 방위적으로 공격과 비난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 교회가 이길 수 있는 비결을 이 설교는 본문의 사건에서 찾는다. 설교의 두 소 대지는 예루살렘 교회는 도전받는 거룩한 교회였으며 동시에 도전을 극복한 거룩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는 외부로부터 핍박을 받았을 때 이 속에서 영적인 대결을 인식하고 한편으로는 간절한 기도로, 다른 한편으로는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복음을 담대히 증언하여 지혜롭게 잘 대처했다. 교회의 기도와 관련해서는 사도들이 투옥되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교회로 모여 철야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러한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밤중에 옥문을 열고(5:19) 사도들을 “기도하고 있는 교회로 돌려보냈다”고 했다. 오늘날 한국교회도 이와 같이 한편으로는 교회가 거룩한 본질을 회복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복음을 담대하고 왕성하게 선포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할 때 위기를 잘 극복할 것이라고 권면한다.
이 설교는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이다. 그러나 본문의 구체적인 내용과 이에 대한 칼빈의 주석에 비추어 볼 때 한 가지 본문이 언급도 암시하지 않는 것을 지나치게 부각시키는 문제점이 있다. 이것은 사도들이 잡혀 갔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철야기도를 했다는 것이다. 5장 어디에도 사도들의 투옥문제로 교회가 철야 기도했다는 언급도, 천사들을 통한 사도들의 극적인 구출이 기도의 응답과 연결되어 있지도 않다. 사실 사도행전은 신약에서 기도를 가장 많이 언급함에도 불구하고 5장과 일부 장에서 기도를 언급하지 않는 것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분명 이것은 본문이 분명하게든 암시적으로든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칼빈의 성경해석의 원칙에서 벗어난다. 칼빈은 이 기사에 대한 설명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기도를 일체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사도들의 기적적인 출옥과 관련하여 교회의 기도를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간섭하신 특별한 역사로 이해한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볼 때 본 기사의 핵심적인 교훈은 교회와 복음의 증인들은 어떠한 반대와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가말리엘과 같은 인물을 사용하심)과 보호하심(천사를 보내 사도들을 구출함) 복음 전파의 사명을 담대하게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 분석할 설교는 “성령 충만한 성도”(7:55-60)이다. 성경본문의 내용은 산헤드린 법정에서 스데반이 행한 변호연설의 마지막 증언과 이로 인한 그의 순교와 용서기도이다. 이 설교는 스데반이 증언한 내용보다는 그가 성령 충만한 사실에 초점을 맞춘다. 이 설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종류의 복 가운데 성령 충만이 가장 큰 복이며 성령 충만의 대표적인 인물로 스데반을 소개한다. 먼저 그는 스데반이 어떻게 성령 충만한 사람이 되었는가를 주목한다. 스데반은 집사로 선택되기 전에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 심지어 순교할 때까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한 사실을 강조한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성령 충만에 대하여 언급하는 구절들을 종합하여 추론한 결과이다(행 6:3, 10; 7:55). 스데반이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하게 된 비결은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과 순교의 마지막 순간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 충만했다는 것은 7장에 상세하게 기록된 그의 변호연설을 통해 추론한 주장이다. 이것은 통찰력 있는 요점이다. 그가 끝까지 예수님을 본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자신의 영혼을 부탁하는 기도(7:59)와 죄용서를 위한 기도(7:60)에 분명하게 등장한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닮은 것과 관련하여 본문에 명시되거나 암시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설교는 “스데반 집사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가운데서 그는 예수님처럼 살고 싶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설교자의 상상을 객관화한 진술이다. 말씀의 적용과 권고로 이 설교는 성도들이 그와 같이 성령 충만하고 예수님처럼 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실 성도가 될 것이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검토할 설교는 “성령을 강론하자”(행 17:1-16)이다. 설교의 핵심주제어는 "교회개혁은 ‘말씀’에서 시작됩니다. “성경 깊게 깨닫고 신앙생활 적용 돕는 강해설교가 발전 돼야”된다는 것이다. 본문의 줄거리를 개괄적으로 말하면서 “복음의 승리에는 반드시 핍박과 박해가 뒤따른다는 사실”과 “하나님은 세계 선교를 위해 배후에서 섭리하며 간섭하신다.” 사실을 지적한다. 이 설명과 함께 사도들의 성령운동의 중심에 하나님의 말씀 강론이 있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사실을 잘 보여주는 것이 본문이다. 설교의 세 소 대지는 바울은 “성경의 뜻을 열어 주장”함, “구속사적인 강해설교”, 그리고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이다. 바울이 성경을 가지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고 증거했다(17:2-3)는 것은 강해설교의 원리를 잘 보여준다. 하지만 오늘의 설교자들 중 다수가 “자기 사상 증거를 위해서 성경을 인용하”나 성경 그 자체를 강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좀 더 하나님의 뜻에 합한 교회가 되려면 흥미 위주의 예화나 간증보다도 성경본문을 깊이 깨닫게 하고 그것을 구체적인 신앙생활에 적용하도록 하는 강해설교가 많이 발전되어야 합니다.”라고 역설한다. 이어서 바울이 행한 강해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이어졌다. 이 사실에서 바울의 설교는 “신구약의 모든 사건들에 대하 예수 그리스도를 그 중심에 둔 구속사적인 강해설교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피력한다. “말씀이 말씀되게 해야”는 소 대지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이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 등에 속속 증거되어 전체 유럽이 말씀으로 변화되고 결국은 또 다시 종교개혁의 본산지가 되었습니다. 그 때에도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친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중요한 주장은 데살로니가 교회(살전 2:13)와 베뢰아 교회(행 17:11-12)가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 설교은 칼빈의 주석과 비교해 볼 때 일맥상통한다. 칼빈은 먼저 “성경은 하나님에게서 기원하므로 어떠한 가르침과 배움의 규칙도 성경이외의 다른 곳에서 취해서는 안 된다.”는 좌우명을 피력한다. 이 관점에서 그는 당시 천주교의 잘못된 성경관(예를 들면, 성경의 불확실성, 불분명성과 이로 인한 사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을 공격한다. 칼빈은 성경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 “모든 논쟁에서 있어서 성경의 증언은 경청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3.4. 로마서 설교 4편
분석할 네 편의 로마서 설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 “하나님께 영광을”(11:34-36), “의인의 삶”(12:9-21; 14:17)이다. 이것들은 교수 목사 두 분과 목사님 두 분의 설교이다. 첫째 설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8:31-39)의 대지 셋은 신자는 “반드시 승리한다, 신자를 정죄할 자가 없다, 신자는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끊어지지 않는다.”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개되었다. 결코 끊어질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 할 때 세상의 각종 한정된 사랑과 비교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영원한지 실감나게 한다.
칼빈은 로마서 주석에서 이 본문(31-39절)을 네 단락으로 나누어 설명한다(31-34, 35-37, 38-39). 내용상에 있어서 칼빈의 설명이 상세하다는 차이점 외에 이 설교는 칼빈의 핵심적인 주장과 큰 차이가 없다. 위의 설교가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란 진술(31절)이 “우리가 더 이상 말 할 수 없는 만큼 감격스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이 칼빈도 “이 말씀은 모든 시험에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유일한 지지이다.”고 주장했다.
두 번째 설교 “천국행 KTX를 타십시오”(10:9-10)는 새 생명 축제 때 교회에 초청을 받은 불신자를 대상으로 할 일종의 구원 초청의 설교이다. 이들이 불신자인 것을 감안 탓인지 이 설교는 본문 설교보다는 주제설교에 가깝다. 이것도 구원에의 초청에 중점을 둔 적용 중심의 설교이다. 천국행 특급열차 KTX (Kingdom Train Express)란 문구는 아주 참신한 표현으로 한국에 KTX를 건설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해결해야 했던 것같이 하나님께서 천국행 KTX를 건설할 때 죄의 난제를 실감나게 설명한다. 보통사람들이 하루에 죄를 3번 범한다고 할 때 80년을 살면 8만여 번의 죄악을 범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죄를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죄 값을 치르고 부활하게 하심으로 해결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사망 구렁텅이 위로 우리와 하나님을 연결하는 천국행 KTX를 개통시켰다.” 이제 이 KTX를 타는 방법은 마음 중심으로 부터 예수님을 구주로 인정하고 입술로 이 사실을 고백하는 믿음이다.
이 은유적인 설교를 칼빈의 설명과 비교해 볼 때 한 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그가 마음으로 믿는 믿음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입술의 고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칼빈은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믿음 자체보다는 그 구체적인 표현인 입술의 고백이라는 점을 잘 지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10:12-13의 단락은 입술로 고백하는 신앙이 얼마나 필요한지 설명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 설교 “하나님께 영광을”(11:34-36)에서 설교자는 개혁주의 사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 주권사상을 잘 보여주는 36절에만 초점을 맞춘다. 설교자는 이 본문이 로마서의 교리 부분을 마감하는 결론부임을 잘 지적한 후에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란 36절의 진술은 인간의 모는 사상 체계의 골격이라고 말한다. 곧 이어서 이러한 사상에 근거하여 공산주의의 유물론적인 세계관, 현대교회의 물질만능주의 사상과 이 시대에 만연한 인본주의 사상을 비판한다.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절대주권 사상 때문에 감격과 감탄에 사로잡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 것이다(36절 마지막 부분). 설교의 적용적인 결론으로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신앙과 신학이 인본주의적인지 신본주의적인 지를 따지고 묻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설교는 이 시대에 만연한 유물론적인 사상과 인본주의 사상을 의식하고 이를 대처하기 위한 유일한 대안으로 본문이 표방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 사상을 아주 잘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칼빈의 입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 그는 모든 만물이 주님으로부터 나오고 그로 말미암고 그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피조물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본 설교가 강조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이와 같은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인본주의 사상과 유물론적인 사상과 같은 것을 배격하는 것이 타당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식이 로마서 12-16장의 가르침에 따라서 신자의 실천적인 삶에 그대로 투영되어 나와야 한다는 점을 언급했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 생각된다.
네 번째 설교 “의인의 삶”(12:9-21; 14:17)은 본문 전체에 대한 설교가 아니고, 이중에서 일부 구절을 선택하여 한 주제 설교이다. 단락의 선택은 문맥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으나, 선택된 소대지에 대한 설명은 대체적으로 문맥의 의미와 역할을 반영하지 않는다. 이 설교의 세 대지는 “의인의 삶은 사랑을 실하는 삶이다”(12:9, 19-21), “의인의 삶은 기도로 사는 삶이다”(12:12),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14:17)이다. 세 대지를 설명하는 내용들은 성경 여기저기에서 인용된 성경구절들이다. 그 결과 문맥 속에서 볼 때만 비로소 제대로 파악되는 의미가 반영되지 못하는 한계를 가진다. 예를 들면, 롬 12:12는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란 문맥에서 기도에 힘쓸 것을 권고하는데 반하여 본 설교는 이를 주목하지 않고 단지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엡 6:18의 말씀을 인용하고 이어서 기도와 관련된 구절들을 언급한다. 또한 셋째 대지 “의인의 삶은 성령 안에서 사는 삶이다”에서 설교자는 롬 14:17의 본문이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인 특성으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말하는 사실을 주목하지 않고 여기서 단어 “성령”에 주목하여 성령 충만의 관점에서 요점을 개진한다.
이 본문과 관련된 칼빈의 주석은 우선 12:9-21의 단락을 더 세분하여 넷으로 나눈다(9-13, 14-16, 17-19, 20-21). 칼빈은 특히 12:11의 “열심을 품고”에서 성령에 대한 언급에 주목을 한다. 만일 이러한 사실을 설교자가 주목을 했더라면 성령 충만과 관련된 셋째 대지를 본문의 문맥에 충실하게 전개할 수 있었을 것이다.
3.5. 에베소서 설교 1편
설교 “감사에 에이 프러스(A+)"(5:18-21)는 선택된 18-21절에 대한 전체 설교가 아니고, 20절의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에 초점을 둔 일종의 주제설교이다. 설교는 선천적으로 면역성이 없는 아이로 태어난 12살의 소년 데이비드가 한 말 “저는 맨발로 풀밭을 걷고 싶어요.”로 시작하여 세 대지 “바울의 감사”, “감사의 비결”과 “성령의 감동”을 담고 있다. 바울의 감사와 관련해서는 투옥 중에서도, 질병 중에도, 그리고 각종 역경 중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을 언급한다. 감사의 비결로는 겸손한 은혜의식, 가시(역경)에 대한 바른 이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이 설교는 교인들은 감사대학에 다니는 평생학생으로 감사 학점을 에이 플러스를 받아야 할 것이라고 권고한다.
이 설교는 내용적으로 볼 때 성경의 일반적인 교훈을 잘 반영하는 아주 실천적이며 청중이 이해하기 쉬운 좋은 설교이다. 그러나 선택된 본문의 문맥적인 흐름 속에서 ‘감사’를 다루지 않고 있다. 칼빈은 이 설교의 초점인 20절의 주해에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수없이 많은 은택들은 기쁨과 감사의 신선한 원인들을 낳는다.”고 말함으로 설교자가 언급한 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이 신자들로 감사하게 한다는 요점을 지지한다. 범사에 감사할 것을 촉구하는 본문이 속한 에베소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풍성한 은혜들은 구체적으로 밝혔다면 본문의 설교는 문맥과 본 서신의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했을 것이다.
3.6. 디모데후서 설교 1편
해당 설교는 연말에 행해진 “선한 싸움과 '의'의 면류관”(4:7-8)이다. 이 설교는 본문의 각 절을 중심으로 문맥에 따라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해설교에 속한다. 설교의 다섯 가지 핵심은 바울이 (1)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음(8절의 “재판장”에서 추론함), (2) 전쟁하듯 사역을 감당함(7절), (3) 오늘을 그날, 곧 재림의 날처럼 삶(8절의 “그날”), (4) 하나님의 영광만 목적하고 힘씀(문맥에서 등장하는 “주”에서 추론함) 그리고 (5) 겸손으로 주의 일을 감당함(8절의 “내게만 아니라 모든 자에게니라”에서 추론함)이다. 이들 핵심들은 분명하게 개혁주의 신앙의 핵심적인 요소들을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설교가 개혁주의 신학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둘째 핵심에 대한 설명에서 이 설교는 바울로 하여금 전쟁과 같은 사역에서 승리하게 하신 분이 성령님이라고 밝힌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본문이 설명하거나 혹은 강조하거나 심지어 암시하는 내용도 아니다. 또한 다섯째 핵심인 겸손으로 주의 사역을 감당했다는 것은 8절의 의의 면류관이 자신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해서도 마련되어있다는 말씀에서 추론되었다. 하지만 8절이 강조하는 것은 의의 면류관의 보편성이지 바울의 겸손한 사역으로 보기 어렵다. 반면 바울이 모든 겸손으로 사역을 감당한 것은 그가 밀레도에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행한 마지막 설교에 잘 나타난다(행 20:18-21). 8절에 대한 칼빈의 설명에서도 바울이 그의 사역을 겸손으로 감당했다는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요점은 다소 무리가 있다.
3.7. 야고보서 설교 2편
두 편 설교는 “시험 중의 온전한 기쁨”(1:2-4)과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4:13-17)이다. 첫째 설교는 시험에 대한 일반적인 세 태도를 언급하면서 신자들이 본문이 제시하는 태도(시험을 온전히 기쁘게 여김)를 가질 것을 권고한다. 이어서 설교는 환란과 시험가운데 어떻게 온전히 기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네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들은 (1)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준다는 것, (2)성숙한 신앙인격을 만들어 준다는 것, (3)환란 중에 하나님의 보호가 있다는 것, 그리고 (4)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신 다는 것이다. 이중 (3)은 벧전 1:5-6에 근거한 내용이다. 이 설교는 본문을 설교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다른 성경구절을 삽입하여 설명하는 점에 비추어 볼 때 주제설교와 주해설교의 중간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대체적으로 무난한 설교로 보인다. 하지만 2절의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에 대한 설명에서 “기뻐한다는 헬라어 의미는 자랑할 것이 가득차서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상태, 최고조의 상태, 충만한 상태를 의미합니다.”는 주장은 부정확한 설명일 뿐만 아니라, 전혀 근거가 없다. 인용된 행 5:41의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도 이 설명을 지지하는데 부족하다.
이 설교가 독자들이 처해있는 시련에 대하여 구체적인 진술을 일체하지 않는데 반하여 칼빈은 1절에 대한 설명에서 독자들이 유대인으로서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 신자로 고통을 받는 사실을 언급한다. 칼빈은 모든 역경을 포함하여 각종 시련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는 또한 시련들이 우리의 육신을 죽이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인정하고, 우리 속에는 육신의 악덕들이 계속적으로 발아하기 때문에 시련들이 필연적으로 반복돼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검토할 마지막 설교는 “너희 인생이 무엇이뇨”(약 4:13-17)이다. 설교의 부제목은 “안개 같은 인생, 기도가 등불입니다”이다. 설교제목은 14절에서 비롯되었고, 단락의 설정은 아주 적절하다. 설교는 먼저 인생을 안개와 같이 비유한 뜻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이어서 이러한 안개 같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하여 논한다. 인생이 안개와 같다는 의미 설명에서 이 설교는 (1)인생은 반드시 떠난다, (2)떠날 때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한다, (3)언제 떠날지 모른다는 세 내용을 제시한다. 하지만 문맥에서 명확하게 밝히는 것은 (1)번뿐이다. 본문은 분명하게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안개가 영구히 남아있지 못하고 잠시잠간 일시적으로 있다가 곧 사라지는 것을 분명하게 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부자가 풀의 꽃과 같이 사라지고 말 것이라는 말씀과도 일치한다(1:10). 이러한 맥락에서 칼빈은 “현생에만 근거한 목적들은 전적으로 사라지고 말 것이다”라고 했다. 이 말씀은 인생이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못 간다는 교훈을 하지 않는다. 이 교훈은 성경의 다른 구절들에 근거한다(딤전 6:7; 전 5:15; 욥 1:21). 또한 요점 (3)번도 안개의 이미지와는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다.
이어서 안개 같은 인생이 살아야 삶의 내용은 하나님의 자녀로써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그 구체적인 내용을 야고보서 전체에서 소개한다. 제시된 내용은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한 생활(1:26-27; 4:4, 8), 형제사랑(1:10; 2:8-16), 그리고 기도생활(1:5; 4:2, 8; 5:13-18)이다. 신자가 행할 선을 본 구절이 속한 야고보서 전체에 근거하여 설명하는 것은 타당하고 바람직한 설명이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본문의 직접적인 문맥에서 선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밝히지 않는 것이다. 문맥에서 신자가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은 자기 자신의 정욕적인 뜻 실현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4:15). 4장의 문맥에서 신자가 행해야 하는 주님의 뜻은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하고 마귀를 대적하는 것(4:7), 손을 깨끗하게 하고 마음을 정결하게 하는 것(8절), 회개의 삶을 사는 것(9절),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10절), 피차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지 않는 것(11절)등이다. 이렇게 직접적인 문맥 속에 명시된 주님의 구체적인 뜻(곧, 신자가 행할 선)이 있는데 이런 교훈들에 주목을 하지 않는 것은 아쉽다.
4. 목회자들의 설교분석에 근거한 발전방향 제안
지금까지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고 있는 합동교단에 소속한 목회자들의 신약 설교 19편을 칼빈의 주석(성경해석)과 비교하여 살펴보았다. 우선 긍정적인 측면을 지적하고 이어서 보다 더 건전한 설교의 발전을 위해 고려돼야 할 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아주 고무적인 것은 선정된 목회자들의 설교가 칼빈이 제시하고 실천했을 뿐만 아니라, 후에 개혁주의 신학에서 발전된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대 원칙에서 빗나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이 성령의 영감의 결과로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라는 확신과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된다는 원리는 모든 설교에 기본적으로 전제되거나 경우에 따라 분명하게 표명되기도 했다. 이 점은 설교자들이 공유하고 있는 귀중하고 복된 유산이라고 생각된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통해 현시대를 사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적절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은 설교들이 전제하고 있는 확신이다. 칼빈이 16세기에 구교와의 충돌과 투쟁의 과정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그 시대에 충실하게 적용했으니 현대의 목회자들은 현 시대의 문제점들을 의식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시대의 조류와 흐름에 함몰된 자로 살지 않게 하려고 하는 자세가 설교 행간에 보인다.
셋째, 설교자들이 본문의 메시지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 성경원어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원어의 뜻을 이해함으로 본문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파악하고자하는 노력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넷째로, 대표적인 것은 아니지만 본문에 해석에 있어서 칼빈의 통찰을 넘어서는 약간 경우도 있었다. 누가복음 5장의 기적적인 고기 어획의 사건과 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의 경우 제한된 부분에서 드러났다.
다섯째로, 성경해석의 대원칙에 있어서는 큰 문제가 없으나 각론적인 측면에서 아직도 미흡한 점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 분석한 19편의 설교 중 선택된 본문의 역사적인 배경과 문맥적인 흐름을 충실하게 반영하는 설교는 소수였고, 나머지 대부분은 주(강)해설교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은 오랫동안 한국교회 설교를 특징져왔던 주제 설교의 범주에 머물고 있었다. 목회자들이 성경의 일반적인 진리가 아니라, 선택된 본문의 진리(메시지)를 충실하게 설명하고 적용하는 본문의 뜻 중심의 설교, 다시 말해 진정한 의미의 주(강)해설교로 발전할 필요성이 절실하다. 대부분의 설교가 적용에는 아주 강하나 인위적인 것은 본문의 의미를 이해함에 있어서 취약한 것은 설교의 적응이 본문의 깊은 이해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지 않고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나오기 때문으로 보인다.
여섯째로, 저자의 의도와 본문의 뜻을 파악하기 위해 저자의 어법과 표현방식과 문맥에 주목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인식이 아직도 설교자들에게 미흡한 것 같다. 성경이 입은 옷인 표현의 핵심수단인 언어와 어법에 대한 이해만이 아니라, 문맥이 단어, 구절, 문단, 단원의 내용이해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 깊이 인식하고 이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일곱째로, 대부분의 설교가 선택된 본문의 진리를 각종 배경에 비추어 이해하고 이를 구체적으로 적용하는 데는 아직도 미흡하다. 칼빈의 지속적인 관심은 주석가와 설교자가 그 본연의 임무에 따라 본문이 말하는 것, 다시 말해서 저자의 생각(마음)을 풀어 설명하는 데 있었다. 이와 같은 임무에 전념하는 설교자와 그러한 설교가 한국교회에서 발전될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된다.
여덟째로, 일부 설교자들이 헬라어 단어나 동사를 취급함에 있어서 어떠한 증거로도 입증될 수 없는 과잉 해석 또는 과도한 의미를 부여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는 점이 보인다. 이 점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본문을 성경의 원어로 보는 실력을 구비한 가운데 원문의 전체 속에서 단어, 문구, 구절과 문장과 문단을 보지 않고 사전적으로 정의에 따라 단어 자체만 보고 이를 단어의 확정적인 의미로 이해하는 경향이 여전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단어나 문구나 구절이 얼마나 그것이 사용된 문맥에 의하여 결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를 깊이 인식하지 못한 결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주어진 문맥 속에서 성실하게 성경본문을 이해하려는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5. 나가는 말
칼빈이 시대에 앞서 표방하였고 그를 이어 개혁주의 신학자들이 발전시킨 개혁주의 성경해석의 유산은 한국 교회 설교자들의 귀중한 유산이다. 한 치의 오차도 흔들림도 없이 성경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위 있는 말씀이며, 성경은 성경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한다는 원리는 아무리 시대가 바뀌어서 버려서는 안 되는 복되고 소중한 전통과 자산이다. 이 전통에 따라 한국교회의 목회자들의 설교는 세부적인 면에서 더욱더 이 원리에 충실하게 발전돼야 할 것이다. 칼빈이 한 평생을 성경의 주석과 설교를 통해 성경 저자의 마음(뜻) 파악하고 설명하여 그 시대의 하나님 백성에게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가르쳤던 것과 같이 21세기를 사는 목회자들은 동일한 성격의 사역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만일 칼빈이 오늘 한국교회 목회자들에게 나타나서 한마디 핵심적인 권고를 하게 된다면 아마도 그가 할 충고는 성경의 저자가 다양한 어법을 사용하여 문맥 속에서 말하는 것을 말하고 이것만을 하나님의 백성에게 충실하게 가르치라고 충고할 것이다.
유상섭 교수(총신대학교 신약학)
http://blog.daum.net/kkho1105/57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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