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멘탈리티의 핵심 키워드 : 신성한 내면아이, 구상화, 의미와 통일성, 도약~
목록
개혁주의신학자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법령 비교연구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법령 비교연구
 
[ 기독신문 2006-09-27 ]
세계칼빈신학회 주제 논문 논평 ② 아키라 데무라 박사의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법령 비교연구'
----------------------------------------------------------
'성경 그대로' 중시한 재세례파 영향 받은 듯…문헌적 지지는 미흡
사도적 교회 회복 의지 반영…칼빈의 제네바교회는 규모상 불가능
----------------------------------------------------------

2006년 세계칼빈학회(International Congress of Calvin Research)에서 발표된 7개의 주제 강연에서 우리의 주목을 받는 논문 중 하나는 제네바의 종교개혁자 칼빈과 16세기 폴란드 출신의 종교개혁자인 요한네스 아 라스코(Johannes A Lasco)의 교회법령(Ecclesiastical Ordinances)에 대한 비교연구이다.

칼빈과 아 라스코는 모두 역동의 16세기에 유럽을 전전하며 종교개혁의 정신을 불태웠던 지도자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하다. 칼빈은 1509년 프랑스 노용(Noyon)에서 태어나 종교적인 난민이 되었다가 1536년에 제네바에 부름을 받았다가 축출되었고, 마틴 부써(M. Bucer)의 배려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난민목회를 하다가 1541년에 제네바에 다시 정착하여 1564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평생을 스위스에서 사역했던 인물이다. 한편 아 라스코는 1499년 폴란드 태생으로서 종교개혁에 가담하여 1542년에 독일 엠던(Emden)의 칼빈주의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으며, 1548년 크랜머(T. Cranmer)의 초청으로 영국에 건너갔다가 1552년에 런던 난민교회의 지도자가 되었고, 유럽 대륙 여러 곳에 머물다가 1556년 남부 폴란드의 칼빈주의 교회로 돌아가 1560년에 세상을 떠났던 나그네와 같았던 종교개혁자였다. 이 아 라스코는 다소 낯선 이름 같지만, 유명한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인 아브라함 카위퍼(A. Kuyper)도 깊이 연구한 바 있는 중요한 인물이다. 칼빈과 아 라스코의 교회법령을 비교 연구한 데무라(A. Demura) 박사의 논문이 더욱 눈길을 끈 것은, 같은 아시아 칼빈 연구자로서 일본의 연구를 엿볼 수 있게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데무라 박사의 논문은, 주로 성찬을 집례하고 성찬에 참여하는 "양식"과 관련하여 제네바를 비롯한 유럽 대륙의 종교개혁 도시들과, 아 라스코가 이끌던 런던의 난민 공동체를 비교하고 있으며, 그 성찬의 집행 방식은 어디에서 영향을 받았는지 그 가능성에 대한 언급에 한정되어 논의되고 있다.

칼빈은 1537년 다른 2인의 제네바 목사들인 엘리 꼬로(Elie Coraud)와 파렐(Farel)과 함께 시의회에 제출했던 제네바 교회조직과 예배에 관한 규정(Articles concernant l'organisation de l'eglise et du culte a Geneve)과 1541년의 교회법령(Les Ordonnances ecclesiastiques)에서 성찬식을 얼마나 자주 실시해야 하는지를 주장한 바 있다. 칼빈은 처음에는 매주 성찬식을 거행할 것을 의도했으나, 제네바의 3~4개의 교구 교회에서 돌아가면서 매달 성찬식을 실시하자는 것으로 조정했다. 그렇게 되면 적어도 성도들은 한 달에 한번은 성찬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칼빈은 인구가 약 1만에서 1만 2000이나 되는 16세기 개혁 도시국가인 제네바라는 사회적 현실과, 교회와 국가 간에 존재했던 긴장 속에서 그 사역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의도를 이루지 쉽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 라스코(A Lasco)는 고작 1000명 남짓 되는 영국 런던의 난민 교회에서 국가의 통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사역을 했기 때문에, 그가 사도적 순결(Apostolic purity)이라고 확신했던 것들을 소신있게 추진할 수 있는 환경을 가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두 개혁자는 역사적 배경의 차이를 보여준다.

아 라스코(A Lasco)의 런던 공동체는 성찬에 참석하는 자들이 영적으로 충분히 준비되었는지를 면밀히 조사하는 엄격한 예비 단계(prescribed stages)가, 실제 성찬식이 있기 2주전의 공식 선포와 더불어 시작되고 있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아 라스코는 "사도적 순결과 그리스도의 모범"(puritatem Apostolicam et Christi exemplum)을 의미했던 방식, 즉 성경에 기록된 대로, 제자들이 주의 테이블 주의에 둘러앉아서 성찬을 거행하는 방식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런던 난민 교회 시절의 아 라스코에 의하면, 정지함(statio), 무릎 꿇음(genuflexio), 그리고 앞으로 나아감(ambulatio)이라고 하는 서로 다른 세 가지의 성찬 거행 방식들은, 비록 그 각각의 양식이 성찬의 유효성과는 관계없는 일종의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할지라도, 가능한 한 시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 라스코는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과 거행하셨던 방식이었던 식탁에 앉음(accumbatio)이라는 방법으로 성찬을 시행해야 한다고 집요하게 주장했다.

참예자들이 자신의 손으로 떡을 떼기 위해서 식탁에 둘러앉는, "앉아서 시행하는 성례"(Seated Communion)라는 성찬의식은, 이미 1531년에 나타나는 보르숨 회중(congregation of Borssum)의 아퀼로몬타누스(Aquilomontanus: 1489-1548), 1528~30년의 엠던의 아포르타누스(Aportanus in Emden), 노르던의 레제(Rese in Norden) 등의 사례에서 간헐적으로 발견된다. 그렇지만, 아 라스코가 대륙의 엠던 교회의 지도적 위치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의 엠던의 교회 법령에는 이와 같이 앉아서 거행하는 성찬의 예들이 발견되지 않는다. 아마도 아 라스코는 무릎을 꿇고 참예했던 대륙의 지역교회의 법령을 묵인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칼빈이 사역했던 제네바나 그 밖에 쮜리히 같은 스위스 도시들을 살펴보면, 제네바의 경우, 1559년에 "목사가 떡과 잔을 나누어 주고, 회중은 경건한 마음으로 질서 있게 그곳에 '가는 것'을 권고한다"라고 되어있다. 따라서 칼빈의 경우에는 "앉아서 시행하는 성찬 의식"에 대한 명확한 지침이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식탁에 앉음(accumbatio)은 런던 교회 법령의 독특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은 아 라스코가 사도적 교회의 모델로 돌아가려고 했던 의지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아 라스코는 유럽 대륙인 엠던에서 사역할 때에는 무릎 꿇고 떡과 잔을 받는 성례의 양식을 용인했지만, 종교적으로 정치적으로 보다 자유했던 런던의 공동체를 이끌던 시절에는(아마도 1550~1553경), 성경이 지지해 주며 사도적인 방식이라고 그가 믿고 있었던 식탁에 앉아서 떡과 잔을 받는 방법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것으로 보인다.
 
<칼빈은 '앉아서 시행하는 성찬 의식' 명확히 지침하지 않아>

한편 종교개혁의 교회는 교회의 표지(notae ecclesiae)로서 말씀(the Word)이 바르게 선포되고 성례(Sacraments)가 정당하게 집례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에 권징(Church Discipline)이 추가된다. 칼빈보다는, 부써(Bucer)나 아 라스코(A Lasco)가 후자의 입장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와 관련하여 데무라 교수에 의하면 아 라스코는 엠던(Eden) 시절에 쯔빙글리(Zwingli)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고, 그가 이전에 바젤(Basel)에서 공부할 시절, 즉 1524~25년에 외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권징과 관련해서는 그가 런던에서 사역했던 시기에는 부써나 칼빈의 영향을 크게 받았을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이 거룩한 공동체(purified community)를 건설하기 위해서 교회 훈련의 필요를 강조하는 것은, 재세례파들(Anabaptists)과의 상호 관계 속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보는 데에  학자들은 대개 동의한다. 칼빈의 "거룩한 공동체" 개념의 경우 역시 재세례파와의 관련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데무라 교수는 만약 재세례파들의 권징에 대한 개념이 종교개혁자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면,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방식에 있어서도 재세례파들의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즉 성찬을 식사 테이블에 모여 앉아서 잔과 떡을 나누는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의 방식대로 취하는 해석은, 아 라스코가 의식을 하던 하지 못하던 간에 재세례파의 영향의 흔적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그러나 데무라 박사가 스스로 시인하듯이 그에 대한 문헌적인 지지는 아직 충분하지 못하다. 16세기 당시 재세례파는 소수파였고 그들의 급진성 때문에 종교개혁 흐름 속에서 주도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세례파들이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서 교회의 권징을 중시하고, 성경에 있는 그대로의 성찬 예식을 추구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비록 간접적인 방법일지는 몰라도, 그들은 종교개혁의 주류 운동에 "촉매적인"(catalystic)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끝으로 본 논평자는 일본에서의 칼빈 연구를 언급하면서 논평을 맺고자 한다. 아츠미 쿠메 교수가 1995년에 저술한 논문(La reception de Calvin au Japon)에 의하면, 일본은 이미 나카야마 마사키 교수가 1934년에서 1939년에 걸쳐 매우 훌륭하게 칼빈의 기독교강요(Institutio: 1559년판)를 번역했고, 다시 와타나베 노부오 교수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같은 기독교강요 1559년판을 라틴 원본에서 철저하고 수려하며 현대적인 문체로 완전하게 번역을 해 내었다. 또한 쿠메 교수 자신은 1986년에 기독교강요 1536년판을 번역, 출판했다. 그뿐 아니라 2006년에는 칼빈의 제네바 시편 찬양집이 일본어로 완전히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추가해서 일본은 바로 본 논문의 발표자인 아키라 데무라 교수를 중심으로 1983년부터 20여년에 걸쳐 일본의 종교개혁 연구 총서(Corpus Reformatorum Japonicum-Writings of the Reformers in Japanese 1983~2003)를 출판하기도 했다.

한국의 장로교회가 감사하게도 현재까지 많은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 역량을 칼빈과 개혁신학 연구를 위해 쏟아내어 세계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는 귀한 사역을 감당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보면서 글을 마친다.
안인섭 교수 /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 역사신학
http://blog.daum.net/kkho1105/5913

이 글 공유하기

독자 의견

댓글이 없습니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