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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 더 깊이 알기 (총신원보 2005년 11월호)

칼빈 더 깊이 알기(총신원보 2005년 11월호)
안인섭 (총신대 신대원 교회사 교수)

I. 들어가는 글

필자가 칼빈과 어거스틴을 연구해 오면서 많은 격려가 있었지만, 적지 않은 질문들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가장 많이 접했던 질문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 시점에서 “칼빈과 어거스틴이 아직도 필요한가?”라는 것이다. 이 문제 제기는 보수적인 기독교의 밖에서뿐 아니라, 사실은 그 안에서 조차 제기되곤 했었다. 진보적인 진영에서는 구태의연해 보이는 칼빈과 어거스틴이 현대 신학자들의 복잡한 신학적 과제를 해결해 줄 수 있겠느냐 것이다. 한편 보수적인 측에서는, 칼빈과 어거스틴은 지나치게 교리 중심적이어서 실제 목회 현장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 삶을 위해 적용하기에는 그리 적합하지 못하다는 뉘앙스다.
그러나 정말 그런 것일까? 16세기 종교개혁의 역사적 문맥에서 칼빈을 연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칼빈은 오늘날 더욱 강조되어야 할 신학자라는 일종의 확신이 점점 더 생기는 것은 왜일까?
본 글에서는, 먼저 칼빈이 활동했던 16세기의 역사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며, 그 맥락에서 칼빈의 신학적 뿌리로서 어거스틴이 논의될 것이다. 이어서 칼빈 신학의 전체적인 지향점이 무엇인지를 다룰 것이며, 마지막으로 16세기의 역사적 배경을 전제로 할때, 중요하게 다루어 져야 하는 칼빈의 국가론을 고찰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피상적이고 구호적인 칼빈의 모습이 아닌, “교회의 교사(Doctor ecclesiae)”로서 이 시대에도 여전히 중요하게 강조되어야 할 칼빈의 상세한 그림이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II. 역사적 배경

중세 후기의 로마 카톨릭 교회는 유럽의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그리고 종교적 삶을 조정하는 일종의 관료제도와 같았다. 칼빈이 종교개혁에 가담하기 전까지 몸담고 있었던 교회는 생명력을 상실한 화석과도 같은 상태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칼빈이 활동했던 16세기는 종교개혁을 수용했던 사회속에서 근본적인 변화들이 발생하면서, 역동적으로 지역적 국가적 전통들이 창출되어갔던 때였다. 그 당시의 상황은 유럽에서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로마 카톨릭과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각 지역 국가들이 생성되어 가면서, 유럽의 거의 모든 국가들이 두 개의 경쟁적인 교회들의 갈등에 관련되어 있던 역사적 격변기였던 것이다. 이때 프랑스의 개신교도로서 난민 생활을 직접 경험하면서 활동을 했던 사람이 바로 칼빈이었다. 이처럼 16세기의 역사적 문맥 속에서 칼빈의 사상을 폭넓게 조명하려고 하는 접근은 주로 네덜란드의 학자들에 의해서 강조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오버만(H. Oberman), 옐스마(A.J. Jelsma), 그리고 셀더하위스 (H. Selderhuis)등을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칼빈을 중세에서 근세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물로 보았던 부스마(W. Bouwsma)나,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당시의 지성사적 맥락에서 고찰하려고 했던 멀러(R. Muller)의 경우도 위에서 논의했던 역사적인 접근과는 다소 다른 방법이기는 하지만, 큰 틀 안에서는 같은 맥락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칼빈은 1536년에 신생 개신교 도시국가인 제네바에 정착해서, 스트라스부르그 시절(1538년~41년)을 제외한 평생(1564년까지)을 사역했다. 그런데 당시의 제네바는, 주교와 사보이에 대항하는 투쟁에서 막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지만, 주변에서 제네바를 식민지화하려는 시도가 그치지 않았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네바는 그 독립을 광범위하게 향유하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때 제네바 정부는 특별한 전통이 없는 젊은 정부였기 때문에, 그 도시의 자유는 종교개혁의 유지와 단단히 결합되어 있었다. 특히 1555년 제네바 선거에서 칼빈의 후원자들이 승리를 거둔 이후, 제네바에서 칼빈의 영향력이 확고하게 되면서, 칼빈은 자신이 지향하는 신앙의 공동체를 세워갈 수가 있었던 것이다.(E. Cameron, The European Reformation (Oxford: Clarendon Press, 1991).; W.G. Naphy, Calvin and the Consolidation of the Genevan Reformation (Manchester: Manchester University,1994), pp. 208-235.; cf. E. Troeltsch, The Social Teaching of the Christian Churches, (trans.) O. Wyon (New York: Harper & Brothers, 1960), pp. 625-27.).
그러므로 위의 배경에 근거할 때, 칼빈의 사상은 크게 세 가지의 특징을 보여주며, 그것이 바로 칼빈 신학의 독특성이라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첫째로 칼빈은 기존의 로마 카톨릭에 대항해서 새로 출범한 개신교의 역사적이고 신학적인 정통성을 변호해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어거스틴이 칼빈의 사상에 중심을 차지하게 되었다. 둘째로 칼빈은 당시 그의 어머니 교회가 상실하고 있었던 생명력을 회복할 것을 목적하면서 경건(pietas)의 의미를 재 해석했고, 이 경건 개념이 결국 그의 신학적 지향점이 되었다. 셋째 칼빈이 활동했던 16세기 유럽에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앙의 자유는 곧 국가의 독립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칼빈의 신학에서 국가론은 중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특징들은 아래에서 차례로 논의될 것이다.

III. 칼빈과 어거스틴

칼빈은 어거스틴과 비교 연구될 때 칼빈 자신의 신학 이해에 매우 유용하다. 그 이유로 다음의 두 가지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칼빈이 태어나고 성장한 당시의 지적 환경을 고려할 때, 칼빈의 사상적 발전에 미친 어거스틴의 영향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거스틴 연구는 칼빈을 이해하는데 매우 필요하다. 오버만(H.A. Oberman)이나 맥그레스 (A. McGrath)가 강조하듯이, 중세 후기 유럽은 일종의 어거스틴 르네상스를 경험하게 되며, 칼빈은 중세에서 근대 세계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대인 종교개혁 시기에, 고전 언어들과 신학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적 발전은 후기 중세의 신학적 토양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칼빈이 어거스틴의 사상을 접하게 된 것도 이런 문맥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칼빈이 어거스틴의 작품들을 어디에서, 얼마나, 그리고 왜 사용(use)했는지를 고찰할 때, 어거스틴은 칼빈의 사상에 있어서 중심적인 인물임이 드러나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기 위해서 어거스틴 연구가 긴요하다는 것이다. 스미스(L. Smits)나 모이(R.J. Mooi), 레인(A.N.S. Lane), 랑어 판 라펜스바이(J.M.J. Lange van Ravenswaaij), 그리고 판 오르트(J. van Oort) 등의 칼빈 연구가들이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은, 칼빈이 자신의 작품들 속에서 수많은 어거스틴의 작품들을 인용하면서 칼빈 자신의 신학을 개진하고 있다는 점이다. 모이(R.J. Mooi)가 제시하는 자료에서 단적인 한 예를 구성해 볼 수 있다. 칼빈은 그의 1536년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교부를 118번 인용하는데, 그중 어거스틴은 가장 빈번히 인용된 교부로서 24회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칼빈은 전체 866번에 걸쳐 교부를 인용했는데, 그 가운데서 어거스틴을 389번 사용했다. 만약 다른 교부들과 비교해 본다면 칼빈이 어거스틴에게 얼만큼 의존하고 있는지가 그대로 드러나게 되는데, 칼빈은 크리소스톰은 오직 37회, 그리고 버나드가 36회 인용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칼빈의 기독교 강요의 내용중에서 어거스틴의 작품이 차지하는 중요성은 탁월하다 할 것이다.
또한 칼빈은 교부를 인용할 때 매우 선택적이었던 특징을 보여준다. 예를들어, 그의 기독교 강요 초판에서 오리겐은 단 한번 사용되었지만, 어거스틴은 24회 사용되었으며, 모두 긍정적인 문맥이었다. 그의 1559년판 기독교 강요에 의하면, 앞에서 말한 바처럼, 어거스틴은 389회 인용된 반면, 오리겐은 단 7회만 등장한다. 칼빈이 그의 주석 때문에 가장 존중했던 크리소스톰을 제외하면, 500년 이후의 동방 교부들은 거의 인용되지 않고 있다. 칼빈의 교부 인용의 선택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칼빈은 왜 여러 교부들 중에서도 특히 어거스틴을 압도적으로 많이 인용하면서 그에게 호소했을까?
그 이유는, 칼빈은 어거스틴을 “가장 순수하고 원시적 교회”의 선생으로 보았으며, 개신교 운동이 역사적 기독교와 연속성을 갖는다고 주장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우로는 16세기 로마 카톨릭 교회와, 좌로는 급진적인 재세례파들과의 투쟁속에서, 어거스틴의 작품들과 어거스틴의 권위에 호소하면서, 자신의 개혁사상의 진로를 설정했던 것이다.
이런 배경을 고려한다면, 어거스틴에 대한 이해는 칼빈의 사상을 해석하는데 매우 긴요한 조건임을 인식할 수 있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 수용자였다고 평가될 수 있으며, 따라서 칼빈과 어거스틴의 비교 연구는 칼빈 이해를 위한 보다 심도깊은 통찰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말하자면, 어거스틴에 대한 연구, 특별히 어거스틴과 칼빈을 서로 관련시켜서 진행하는 연구는, 칼빈의 신학적 근거들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IV. 칼빈 신학의 지향점: 경건 (pietas)

칼빈이 자라났던 그의 모교회는 제도화되고 관료화 되어서 행정적으로는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었지만, 복음의 생명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따라서 칼빈의 종교개혁은 새로운 경건을 모색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때 칼빈이 택한 길은, 이미 14세기에 네덜란드에서부터 시작되어 잔잔히 유럽 전체로 확산되어 있었던 근대적 경건(Devotia Moderna)이었다.
이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은 14세기에 흐로떼에 의해서 네덜란드의 데이펀터(Deventer)와 쯔볼레(Zwolle)에서 시작되어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에서 꽃을 피웠으며, 독일과 프랑스와 스위스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종교개혁의 안내자가 되었다. 옐스마(Prof. Dr. A.J. Jelsma) 교수는 네덜란드의 근대적 경건 운동은 16세기 종교개혁이 지향했던 방향과 동일한 지향점을 향하고 있었다고 잘 지적하고 있다.
칼빈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근대적 경건의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그의 청년기에 파리의 몽테규(Montaigu) 대학에서 공부했을 때, 네덜란드의 하우다(Gouda)에 있는 공동생활 형제단에 유학을 다녀왔던 John Standonick의 제자인 Noel Beda를 통해서 어거스틴과 근대적 영성의 저서들을 접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칼빈은 프랑스의 모(Meaux) 공동체에서 르페브르(Jacques Lefevres d’Etaples)를 통해서 공동생활 형제단의 경건을 접할 수 있었다. 또한 당시의 네덜란드의 Liege(현재는 벨기에)의 공동생활 형제단에서 훈련을 받았고, 그 정신을 스트라스부르그에서 구현하려고 시도했던 Johann Sturm을 통해서, 칼빈은 근대적 경건의 영성을 배울 수 있었다.  
이 근대적 경건 운동은 하나님과의 직접적이고 개인적인 관계를 중시하면서, 경건의 토대로서 성경을 강조했다. 근대적 경건의 대표자인 Thomas a Kempis 대해서는 P. van Geest의 다음의 책을 추천할 만 하다. Thomas a Kempis (1379/80-1471): Een studie van zijn mens- en godsbeeld (Kok: Kampen, 1996.
한가지 중요한 점은, 칼빈이 말하는 경건(pietas)은 그의 신학 체계의 한 구성 요소가 아니라, 그의 전체 신학이 지향하고 있는 목적이요 방향성이라는 점이다. 칼빈은 그의 기독교 강요의 헌정사에서, 기독교 강요를 저술하는 자신의 목적이 참된 경건한 삶(ad veram pietatem)을 위함이라고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이런 경건은 그의 기독교 강요의 초판(1536년)부터 마지막 판(1559년)까지 시종일관 “지식(eruditio)”과 연결되어 있다. 즉 칼빈에 의하면, 진정한 경건이란, 성경이 제시해 주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인간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성경적인 인식에 토대를 둔다는 것이다.
칼빈이 해석하는 경건의 출발점은, 하나님은 창조주요 구속주가 되시며,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며, 성경은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를 지탱해주는 틀이 된다. 따라서 피조물된 인간이 참된 자아를 발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 속에서만 가능하다. 이점에 있어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내향성과 인격주의는 근대적 경건(Devotio Moderna)과 일면 연속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칼빈의 경건이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해된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본래적 정체성을 아는 지식은 바로 칼빈이 말하는 경건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경건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를 정점으로 나타나게 된다. 유일한 중보자인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한 예배를 드리게 되며, 이 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중심에 위치하게 된다. 칼빈의 전 신학적 체계가 경건을 지향하면서 세워졌기 때문에, 칼빈의 특징 중 하나는, 그의 신학이 경건과 별개로 존재하지 않고 통합되어 있다는 점이다.
칼빈의 경건은 넓은 의미에서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에 기초하여,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들의 상호 관계에까지 관련을 맺는다고 볼 수 있다. 칼빈에게 있어서 비록 타자를 위한 사랑은 구원을 위한 원인은 아니지만, 이웃을 위하는 사랑은 “중생의 확실한 상징”이자 “성령의 특별한 열매”가 된다.
칼빈의 경건 개념의 토대가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에 대한 지식에 의하면,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 세계를 부성애적 사랑으로 돌보라는 사명을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았다. 그러나 인간이 범죄함으로 그 본래적 위치를 상실하게 되었을 때, 인간뿐 아니라 전 창조 세계에 그 비참한 결과가 도입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의 전 우주적 구속 사역으로, 모든 피조물은 다시 회복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이와 같이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인간의 본래적인 정체성을 발견하는 칼빈의 경건의 신학은, 우리의 시야를 창조 세계로 까지 확대해 주는 신학적 포괄성을 보여주며, 바로 이점이 여러 종교개혁자 중에서 칼빈의 신학이 갖는 독특함이라고 할 수 있다.

V. 칼빈의 교회와 국가
앞에서 논의된 바와 같이, 칼빈의 신학은 중세 말에서 근세로 전이되는 시대적 배경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로마 카톨릭 주의를 후원하는 신성로마 제국으로부터 각 민족 국가들이 각성하기 시작하면서 각 민족 국가 혹은 도시 국가들이 나름대로의 신앙고백을 가질 수 있는 신앙의 자유는, 정치적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이 점이 칼빈의 사상을 해석할 때 국가론을 논해야 하는 중요 이유이다. 칼빈의 경우 신생 독립 도시국가인 제네바는 내,외의 압력을 이겨가면서 그 종교개혁의 신앙을 지켜가야 했다.
칼빈은 근본적으로 국가의 권력과 위정자의 권위는 하나님으로부터 기원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국민들은 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칼빈에게 있어서 국가와 그 지도자의 권위는 어디까지나 최고의 권위가 되는 하나님 밑에 귀속되어 상대화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칼빈은 불의한 권력에도 맹목적으로 복종할 것을 강변하지는 않았으며, 불의한 지배자에 대해서는 불복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인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가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 칼빈에게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존재한다.
첫째 칼빈은 국가의 권위와 위정자에 대한 복종과 악행자에 대한 처벌에 대해서는 일면 연속성을 보여주면서도, 악행자에 대한 보다 엄격한 처벌을 점차 강화하는 등 국가의 소임을 점점 강조했다.
둘째, 칼빈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 점차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는 방향으로 사상을 발전시켰다. 이런 현상에는 16세기 종교개혁이라는 격동기에 독립을 쟁취한 개혁주의 도시국가인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 교회를 세워나가야 했던 교회의 신학자인 칼빈의 역사적 책임이 반영되어 있다고 여겨진다. 주목할 만한 것은 칼빈 시대에 로마 카톨릭을 신봉하는 국가들은 개신교도들을 가혹하게 탄압하여 교정할 것을 주장했지만, 칼빈은 단지 국가는 하나님께 대한 예배와 바른 교리를 수호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을 뿐이라는 점이다.
셋째로 국왕에게 복종하는 문제에 대해서 칼빈은 두 가지의 관점을 공유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제네바의 정치적인 상황의 긍정적인 전개는 칼빈을 고무하여, 그에게 국가에 대해 복종할 것을 강조하는 적극적인 한 관점을 제공했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의 조국 프랑스 자체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상황들은 그에게 국가에 대한 저항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1539년과 1540년에, 프랑스의 왕인 프랑스와 1세가 내린 칙령으로, 프랑스 안에서 종교개혁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은 이교도로 취급 받게 되었다. 그 뒤를 이었던 앙리 2세(1547-59) 아래에서는 종교개혁 진영의 신자들이 이교도로 정죄되어 국가로부터 박해를 받았다. 이처럼 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의 악화로 인해서, 칼빈의 후대의 작품들(특히 1550년대 이후)은, 정의로운 왕에 대한 복종을 더욱 강조하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한편 칼빈은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고 죄인을 교화하는 차원에서 권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중요한 것은 이 권징이 국가에 의해서 시행되는 정치적인 행위가 아니라, 교회의 목회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칼빈에 의하면 교회가 국가와 사회에 줄 수 있는 영향력은 설교를 통한 사람 개개인의 인격적 변화를 통해 영적인 감화를 주는 방식으로 발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VI. 나오는 글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6세기의 역사적 상황을 주의 깊게 고찰하면 할수록 칼빈에 대한 보다 선명한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칼빈은 중세는 해체되었으나 근세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던 역사적 격변기요 과도기에 서 있었던 “교회의 신학자”였다. 그의 신학적 특징은 이런 맥락 속에서 형성되었다. 칼빈은 새로 출범하는 종교개혁 교회의 진로를 선택하기 위해서 ad fontes(근원으로)의 정신으로 어거스틴에게 돌아가서 그에게 물었다. 칼빈은 생명력이 소진했던 옛 교회의 잔해 속에서 생명력이 역동하는 새로운 경건을 지향하는 신학을 건축했다. 이렇게 세워진 칼빈의 신학은 근대 국가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하기 시작하면서 오늘날까지 전래되어 왔다.
칼빈 신학의 이런 특징들은, 16세기와 유사한 역사적 격변기인 21세기에, 왜 칼빈의 신학이 더욱 연구되어야 하는지를 웅변적으로 대답해 준다. 요컨대 이 시대에 칼빈은 더더욱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더욱 진행되어야 할 칼빈 연구는 어떤 분야가 있을까?
판 오르트(J. van Oort)는 칼빈의 어거스틴 이해에 대해서 더 광범위한 연구가 필요함을 지적하면서, “단지 예정론 뿐 아니라, 성례론, 칭의론, 원죄론, 역사관, 교회론, 그리고 예컨대 일반적인 금욕주의와 특별히 어거스틴의 수도원 주의에 대한 평가”를 심도있게 연구할 것을 제시한다.(J.van Oort, “Calvijn en Augustinus,” Nederlands archief voor Kerkgeschiedenis 72-1(1992), p. 103.) 한편 더글라스(J.D. Douglass)에 의하면 미래의 칼빈 학자들은 (1) “사회적 문맥”에 대한 연구, (2) “주석과 설교와 서간문”에 대한 연구, (3) “청년 칼빈”에 대한 연구, 그리고 (4) “성” 연구(gender studies) 등에 헌신할 것을 조언하고 있다.(J.D. Douglass, “Pastor and Teacher of the Refugees: Calvin in the Work of Heiko A. Oberman,” in The Work of Heiko A. Oberman: Paper from the Symposium on His Seventieth Birthday, (eds.) T.A. Brady, Jr., K.G. Brady, S. Karant-Nunn and J.D. Tracy (Leiden: Brill, 2003), pp. 63-65.)
필자는 여기에 한 분야를 더 추천하고 싶은데, 그것은 바로 “After Calvin”의 연구이다. 즉 한국을 비롯한 Non-Western지역에서 칼빈의 신학과 사상이 어떻게 수용(reception)되었는지를 고찰하는 것이다. 이 연구는 칼빈주의의 국제화를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 작업으로 인해서 우리는 미래의 개혁주의를 전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http://blog.daum.net/kkho1105/5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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