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홍 목사의 성경적 상담 연구소 RBD COUNSELING INSTITU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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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뜨인 돌

뜨인 돌

암스테르담에 오실 일이 있으시면, 번화한 시내 중앙에 있는 버헤인 호프 (Begijnhof)에 가보시면 좋습니다. 암스테르담 시립대학 (University of Amsterdam) 맞은편에 있습니다. 일반 건물 속에 묻혀있는 그 입구는, 암스테르담의 보통 집들과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그래서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 숨겨진 교회들이 있습니다. 유럽의 각 국가 종교와 다른 신앙 때문에 난민이 되었던 사람들이 보호되었던 안식처입니다.
이곳에는, 당시 암스테르담에서 영어를 사용하는 장로교도들에게 주어진 매우 작은 교회 건물 (1607년 설립)과, 종교개혁 이후 역으로 박해를 받았던 로마 카톨릭교도들에게 주어진 숨겨진 교회 (hidden church. 1680년 이후)가 지금도 존재하고 있습니다. 미국 개혁교회의 목사회에서 1927년에 이곳에 세운 비문도 보입니다. 그들의 선조인 청교도들에게 도피처를 제공함으로, 시민적 자유와 신앙의 자유를 추구했던 네덜란드인들의 모범을 기린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이곳에서 살았을 사람들의 심정을 헤아려 보곤 합니다. 그들은 대부분 무명의 신학자요, 목사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들의 양심이 허락하는 신앙과 신학을 펼쳐가겠다는 소박하고 진솔한 의지 하나로, 자신이 살아왔던 모든 삶의 기반을 버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눈 한번 딱 감고, 국가가 요구하는 신앙을 받아들이는 척이라도 했으면 그만이었을 것을, 미련하게도(?) 스스로 험악한 나그네의 삶을 자처했던 사람들인 것입니다.
유학의 연수가 한 해 두 해 쌓여가면서, 외국에서 나그네로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가슴 절이는 것인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이곳에서 살수밖에 없었던 사람들 생각을 더 하게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다니엘 2장을 묵상해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했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와서 난민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들이 겪었을 심적이고 종교적이고 실제적인 고난들은 어느정도 짐작이 갑니다.
그런데, 그 포로중 한 청년인 다니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분명한 당신의 뜻을 보여주십니다. 바벨론 왕이 꾼 불길한 꿈을 하나님의 지혜로 해석하면서, 다니엘은 앞으로 세계의 역사가 펼쳐질 것을 설명해 줍니다.
큰 사람 모양의 동상이 있었습니다. 크게 빛이 나고, 두려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않은 뜨인 돌”이, 이 동상을 완전히 부숴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이 돌은 점점 자라서 온 세상을 가득 채운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신학자요 목회자의 길을 가는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말씀이라고 생각이 되어졌습니다.
큰 신상은, “광채가 특심”하고 “두려운” 풍채를 가졌습니다. (31절) 우리에게는 참으로 위협적인 존재이며, 그 앞에서 우리 자신은 매우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교회사는 일반 역사와 밀접히 관련되어 발전되어 왔습니다. 초대교회나 종교개혁기를 살았던 그리스도인들에게라면, 국가나 종교 집단의 박해가 이런 큰 “신상”과도 같았을 것입니다. 양심에 따라 신앙을 고백하고 신학을 전개하는 자유는, 국가에 의해서 철저히 금지되고 처벌되며, 심지어 국외로 추방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그런 유형의 “신상”을 만나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만약 우리가 정직한 목회자요 양심있는 신학자로서 살아가려고 몸부림 치면 칠수록, 우리 앞에 그 신상은 점점 더 크게 다가서 와 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어떨 때는, 극대화된 정치와 사회적 권력의 위력으로 다가 오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교단 정치의 힘으로 억압하기도 합니다. 보다 익숙한 모습으로는, 지속해서 우리를 괴롭혀 오는, “명예”라는 신상이 우리의 길을 막아 설 수도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유학을 하면서 우리가 종종 만나는 “마이너스 은행 잔고”라는 당황스러움으로 우리 앞에 서 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이 신상은 깨어질 것이라고 예언합니다. 산에서 뜨인 돌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 돌은 우리의 모퉁이 돌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34절), 즉 인간의 도움 없이 “자기 비하”로 세워진 하나님 나라의 주권적인 섭리가, 그 신상을 부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영원한 승리를 보장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문맥에서, 우리를 주목하도록 만드는 점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습니다. 매우 중요한 점으로 생각됩니다.
그 신상을 무너뜨린 것은, 산에서 떨어져 나온, “돌”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34절, 45절). 죄와 죽음과 세상의 권세를 이기시고 깨뜨리신 예수님의 권세는, 작은 띄운 돌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세상에 비하면, 아주 초라한 성육신으로 시작 되었습니다. 주님은 누울 자리조차 없는 헛간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기 위해서, 바벨론이나 이집트 같은 강대국을 택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생각에, 하나님이 그런 나라들을 택해서 하나님 나라를 진행시켰다면, 훨씬 더 멋지고, 아주 화려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셨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와 같았고, 꺼져가는 심지와 갔았던 이스라엘, 그래서 수 없는 역사적 아픔을 경험했던 그 민족을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준다고 보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연약해서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집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처음에는 산에서 떨어진 조그마한 돌조각과도 같은 모습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돌은 점점 자라서 “온 세계에 가득”하게 되었다고 2장 35절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나라는 영원이 계속될 것입니다. 영광의 주로서 역사를 완성하실 것입니다.
비록 세상의 권세가 아무리 하늘을 찌를 듯 하다고 해도, 언젠가는 쇠약하게 마련입니다. 내 주변의 상황들은, 아무리 내게 두려워 보인다고 하더라도, 결국 영원한 하나님 나라가 든든이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소망과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학함이 그런 눈을 가지고 진행되기를 기도합니다.
아직은 선명해 보이지 않는 미래가, 환히 보이는 것처럼 믿으며, 자신을 쳐서 복종함으로 묵묵히 그리스도를 따름의 길을 제시하는 신학함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권력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거기에서 부과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한 지적 사변이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인종과 국경, 이념과 계층, 보수와 진보, 남녀와 연령을 초월하여, 막힌 담을 허물게 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안에서 자유케 하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일하게 되는 당신 나라의 비젼을 보게 하소서.
 
안인섭교수

< 다니엘 2:31-35, 44-45 >
(31) 왕이여 왕이 한 큰 신상을 보셨나이다. 그 신상이 왕의 앞에 섰는데, 크고 광채가 특심하며, 그 모양이 심히 두려우니, (32) 그 우상의 머리는 정금이요 가슴과 팔들은 은이요, 배와 넓적다리는 놋이요, (33) 그 종아리는 철이요, 그 발은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이었나이다. (34) 또 왕이 보신즉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뜨인 돌이 신상의 철과 진흙의 발을 쳐서 부숴뜨리매 (35) 때에 철과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숴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었나이다.

(44) 이 열왕의 때에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리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요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로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요,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쳐서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45) 왕이 사람의 손으로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이 철과 놋과 진흙과 은과 금을 부숴뜨린 것을 보신 것은 크신 하나님이 장래일을 왕께 알게 하신 것이라. 이 꿈이 참되고 이 해석이 확실하니이다. (*)
http://blog.daum.net/kkho1105/5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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