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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칼빈의 신약 주석 해설

칼빈의 신약 주석 해설
 
* 들어가는 말 *
파렐이 칼빈을 1536년에 제네바에 성공적으로 붙잡았을때, 칼빈은 바울 서신에 대한 Saint Pierre에서의 강연으로 그의 사역을 시작했다. 우리는 칼빈이 그것을 9월 5일 이전 언젠가에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왜냐하면 그 날짜는, 파렐이 의회 앞에서 요청된 강연을 하기 시작했던 “그 프랑스 사람”(칼빈)을 후원할 것을 요구했던 날이기 때문이다. 1537년 이전 언젠가 칼빈은 또한 제네바의 목사로서의 그의 임무를 부여 받았다. 그러나 칼빈에게는 언제나 그의 성경에 대한 강의를 듣는 학생들이 매우 중요했다.
칼빈이 1538년에 스트라스부르그로 갔을때, 그는 우선 프랑스 이민 회중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1539년 1월 이후에 그는 또한 요한복음과 고린도 전서를 Jean Sturm이 교장으로 있었던 김나지움에서 학생들에게 강의했다. 1539년 2월 1일에 그는 신약 성경 해석 선생으로 임명되었다.
칼빈은 그 자신을 강의를 하는 것으로 제한하지 않았으며, 주석을 쓰는 데까지 나갔다. 그가 신약 주석들을 먼저 쓰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그의 모든 신약 주석에 우선 주의를 기울이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나서 구약 주석으로 돌아갈 것이다.

* 신약 주석 *
* 로마서 주석
칼빈의 처음 주석은 로마서 주석이었는데, 1540년에 스크라스부르그에서 인쇄되었다. 그 내용들은 아마도 그가 1536년에서 1538년 사이에 제네바에서 했던 강의들의 요약을 개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주석의 시작에서, 우리는 칼빈이 1539년 10월 18일에 Simon Grynaeus에게 썼던 편지를 발견할 수 있다. 그는 1529년에 바젤에서 헬라어 교수가 되었고, 1536년 3월에 로마서를 담당하는 신학 교수로서 강의를 시작했던 사람이었다. 그 편지에서 칼빈은, 그들이 좋은 주석의 크리테리아에 대해서 몇년전에 그리네우스와 나누었던 대화를 상기한다. 그들은 주석의 원칙적인 덕목은 perspicua brevitas인에, 그것에 의해서 교리적인 설명들이 가능하면 간단하게 포함되어야 하는 것을 의미했다.
게다가, 칼빈에 의하면, 주석은 주어진 작가가 말하려고 의도했던 바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해 주는 것인, mens scriptoris에 집중해야 한다. 칼빈은 그가 좋은 주석의 이상에 도달했는지를 의심한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에 그 이상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오래전과 보다 최근에 모두 로마서 주석들을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는 특별히 필립 멜랑흐톤, 하인리히 불링거, 그리고 마틴 부쳐의 작업을 언급한다. 그는 또한 주석들은 항상 서로 동의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한다. 왜냐하면, 주 하나님은 어느 한 사람에게만 모든것에 대한 통찰력을 부여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가 겸손과 협력으로 나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칼빈에 의하면, 주석이라는 것은, 자신의 혁신을 위한 열정이나 논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서 인도되어서는 않된다. 주석가는 다른 사람을 공격해서도 않되며, 자기 자신의 야망을 만족시키기를 추구해서도 않된다는 것이다.
그의 주석의 서언에서, 칼빈은 정당하게 이해했는데, 로마서는 성경의 모든 숨겨진 보화에 접근하는 열쇄라고 말한다. 그는 서신의 내용에 대한 개략을 제시한다. 그렇게 연결하면서, 그는 우리는 믿음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그것은 첫 5장에서 다루어지고 있으며, 전 서신의 주요 주제 역할을 하는데 말이다.

* 고린도 전후서 주석
로마서 주석 다음에 많은 다른 주석들이 나왔다. 우리는 여기에서 1542년과 1545년에 칼빈에 의해서 출판된 유다서의 해설과, 두번째로, 베드로 전후서와 함께 출판된 유다서 해설은 포함시키지 않을 것이다. 이 출판들은 아마도 그가 했던 강의들일 것이다. 더구나 후에 그의 유다서와 베드로 전후서 주석이 그것들을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로마서 주석 다음으로 진정으로 첫번째로 저술된 주석은 고린도전후서 주석들이다.
칼빈은 1546년 1월 24일에 고린도 전서 주석을, lord of Falais and Breda인 Jacques de Bourgogne에게 헌정했다. 그 편지는 그 주석의 서언이다. Falais는 챨스 5세의 법정에서 자랐고, 젊었들때에 이미 종교개혁에 합류했던 사람이었다.
1543년 10월에 칼빈은 (Charles d’Espeville라는 이름으로) Falais와 그의 아내 Yolande de Brederod를 이민 나가도록 조언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더이상 프랑스에서 안전하다고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는 1545년에 제네바를 향해 출발했다. 그러나 Falais가 아팠기 때문에 스트라스부르그에서 남았다. 서언에서 칼빈은 Falais를 하나의 예로 들고있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에게서 그 자신을 영적인 능력으로 나타내는 복음의 표현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1556년 1월 24일에 칼빈은 고린도전서 주석의 새 판에 전적으로 새로운 서언을 적었다. 왜냐하면 제롬 볼섹과의 논쟁 후에 칼빈과 de Falais는 소원해졌기 때문이다. 새로운 서언은 이제 오리지날 한 것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Falais는 이것 때문에 실망해서는 않된다고 칼빈은 기록한다. 왜냐하면, 그는 그 자신이 나로부터 소원해진것뿐 아니라, “우리 교회”와 무관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칼빈은 그가 Falais의 이름을 제거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한다. 왜냐하면, 그가 일반적인 실천으로부터 떠나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칼빈은 새로운 판을 Galeazzo Caraccioli de Vico에게 헌정했다. 그는 그의 믿음때문에 나폴리와 그의 아내와 가정을 떠났고, 제네바에 정착했던 두드러진 이탈리아 귀족이었다. 칼빈은 비코 자신이 좋은 예로 이야기 되는 것을 스스로 부인했다는 점을 칭찬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비코에게 견인의 선물을 주시기를 그는 기록했다.
칼빈은 고린도후서 주석을 1546년 8월 1일에 Melchior Wolmar에게 헌정했다. 볼마르는 오를레앙즈에서 헬라어를 가르쳤고, 당시 학생이었던 칼빈은 그때 그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Strasbourg에서 Wendelin Rihel에 의해서 주석이 출판되도록 하는 것이 칼빈의 의도였다. 그는 파렐에게 약간의 의무감을 느꼈던 것을 기록하고 있는데, 왜냐하면 Rihel은 그가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었을 때에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주석을 손으로 쓴 원고를 스트라스부르크로 보내면서, 칼빈은 그것을 한달 내내 염려했다. 왜냐하면 그는 그것이 길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미래에는 어떤 것을 보내기 전에, 그 자신이 먼저 복사본을 만들었다. 고린도후서 주석이 실제로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출판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쨌든 불어판은 1547년에 제네바에 나타났고, 거기에서 라틴판이 일년 후에 또한 출판될 수 있었다. 칼빈의 이후의 모든 주석들 또한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 주석
1548년에 칼빈의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그리고 골로새서 주석들이 제네바에서 출판되었다. 칼빈은 1548년 2월 1일에 그 주석을 Württemberg의 공작(duke)인 Christoph에게 헌정했다. 그는 또한 Montbéliard 지역을 다스리고 있던 자였다. 그곳은 1543과 1544에, Pierre Toussaint와 다른 사람들이 문제를 만났던 곳이었다. 그 공작이 루터교의 실천을 소개하려고 했을 때 말이다.
칼빈은 Pierre Toussaint이 그 공작을 칭찬하면서 그에게 헌정하도록 권고 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빈은 자신의 주석을 읽으면서 라틴어를 알았던 그 공작이 옳은 길로 계속 가도록 격려했다고 믿었다. 그는 또한 그 공작을 하나의 예로 들었는데, 왜냐하면 그는 모든 난국을 조용하고 침착하게 잘 타개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칼빈은 이전에 루터교에 빠져있었던 그의 과거의 문제들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http://www.church-history.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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