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청교도 신학에서 교리와 실천의 관계
영국 청교도 신학에서 교리와 실천의 관계
박홍규
http://blog.daum.net/kkho1105/6731
그렇다면 이제 침례교회가 직접적으로 파생된 영국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에서 교리 혹은 이론과 실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침례교 신학에서 교리와 실천의 관계를 역사적이며 신학적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영국 청교도 신학은 성격상 유럽의 다른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럽은 활발한 지적은 교류가 있었고, 그들의 신학은 바로 이런 지적은 교류를 토대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영국 청교도 신학자 중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사람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이다. 퍼킨스는 윌리엄 펨블(William Pemble)과 더불어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와 목사로서 일하면서 후에 청교도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특히 영국 침례교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이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퍼킨스는 그의 신학체계를 볼 수 있는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에서 신학을 영원히 축복받으며 사는 학문(a science of living blessedly for ever) 이라고 정의하고, 축복받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퍼킨스가 거의 동시대 사람인 마코비우스와 거의 유사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퍼킨스가 규정하는 신학의 성격이 마코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실천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신학이 결코 하나님에 대한 바른 교리를 무시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신학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칼빈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교리적이며 사변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퍼킨스 신학의 실천적 성격은 그의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논의에도 잘 반영되어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가를 하나님의 본질(the nature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그 하나님께서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가를 하나님의 삶(the life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는 이런 성품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영광(glory)과 복되심(blessedness)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마무리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퍼킨스가 하나님의 속성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다룰 뿐 아니라, 결국 그런 속성에 대한 논의는 우리로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하며, 우리의 지복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학을 이론과 실천의 결합으로, 그러면서도 그 이론이 실천을 지향하도록 하는 퍼킨스의 신학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국의 청교도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캠브리지와 화란의 프레네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의 견해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에임즈는 그의 The Marrow of Theology에서 신학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the doctrine or teaching [doctrina] of living to God) 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에임즈에게 있어서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우리가 아는 그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신학이 단순히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서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보여준다. 에임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면서도 잘 사는 것이(to live both happily and well)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학의 목적이 단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good life) 곧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에임즈가 결코 올바른 교리와 올바른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임즈는 또한 보다 직접적으로 신학은 교리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학문이다(theology is not a speculative discipline, but a practical one) 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신학에는 최종적인 목적 곧 실천을 지향하지 않는 어떤 것도 없다. 곧 신학의 목적은 인간에게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우리는 스코투스나 칼빈, 그리고 더 나아가서 폴라누스와 같은 강한 주정주의적(voluntaristic) 경향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신학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폴라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로 하여금 그의 신학을 믿음의 부분과 실천의 부분으로 구분하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폴라누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신학을 믿음의 부분과 실천의 부분으로 구분한 것은 자기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약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은 이론과 실천이 서로 결합되어있지만, 궁극적으로 신학은 실천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신학의 성격에 대해 17세기 영국 최고의 신학자였으며 영국 침례교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존 오웬(John Owen)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오웬은 그의 신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Theologoumena Pantodapa에서 이론적인가 실천적인가 혹은 그것이 결합된 학문인가에 대한 스콜라적인 논의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피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신학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며, 그것은 실천을 지향한다는 견해를 수용한다.) 오웬은 신학은 그 원인과 주제와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알려진 사실들과 원리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일반학문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인간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기초로 하며, 그 계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신학은 진리에 대한 나열을 넘어서서 그 진리의 핵심인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참다운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신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a science on God) 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넘어서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사역과 그의 뜻과 그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그에 대한 우리의 필수적인 순종과 우리의 미래의 보상과 형벌, 그리고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드러내신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 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오웬의 정의에서 우리는 그의 신학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우리의 순종과 예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웬 신학의 실천적인 특징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노아시대, 아브라함시대, 모세시대, 선지자시대, 그리스도시대로 나누어 취급하는데서 잘 나타난다.) 이는 그가 신학을 언약의 관계로 설정함으로서 단순히 사변적이고 교리적인 앎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실천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침례교 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굿윈은 그의 방대한 신학적인 저작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분석해보면 그 또한 오웬과 같은 입장에 서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령 그의 The Knowledge of God the Father, and His Son Jesus Christ를 살펴보면 그의 책은 크게 라미스트 패턴을 따라 교리적인 부분과 적용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굿윈의 자신의 책에서 성서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 논의는 믿음으로 수용이 되고,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순서에 있어서 교리적인 내용을 먼저 다루고 난 다음에 그것의 적용을 다룬다. 이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실천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천이 없는 교리 또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의 성격에 대한 그의 이해는 다른 모든 책에서 쉽게 발견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교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죠지 스위녹(George Swinnock)의 The Christian Man's Calling에서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청교도 신학자들이 교리와 실천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스위녹은 먼저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의 말을 인용하면서 목회자들의 참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른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경건한 삶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경건(godliness) 혹은 종교(religion)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 마음과 삶으로 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예배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경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며, 인간의 영혼의 맥박(the pulse of the soul) 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단순히 이론적 앎을 넘어서서 실천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베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나, 경건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반드시 성경의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또한 17세기 영국 다작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게서도 유사한 경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백스터는 그의 Of the Knowledge of God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단순히 교리적인 앎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스콜라적 전통을 따라 아주 정교하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이성은 신앙에 필수적인 하나님에 대한 교리들을 이해한다. 2. 이해한 교리들을 진리로 믿는다. 3. 따라서 하나님을 높게 평가한다. 4. 그를 최고선인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사랑한다. 5. 그를 닮고자 열망한다. 6. 다른 모든 경쟁자를 거절하고 그를 선택한다. 7. 그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드린다. 8.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그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정한다. 9. 그를 최고의 수단으로 선택하고 사용한다. 10. 그를 우리의 주권적인 통치자로 여겨 그에게 순종한다. 11.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찬양한다. 12. 믿음으로 그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러한 백스터의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긴 나열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신학은 단순히 차가운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애정과 예배를 불러일으키는 실천적 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위녹의 The Christian Man's Calling과 더불어 청교도들의 삶에 탁월한 안내서가 되었던 그의 A Christian Directory에서 백스터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비록 그들이 때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단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하는 수단이다. 지식과 믿음이 새로운 피조물의 눈이라면, 사랑은 심장이다. 믿음이 없다면 영적인 지혜는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더 이상 생명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질이나 사랑스러움은 있을 수 없다. 신학에서 모든 진리들은 거룩한 삶을 위해 드러나며, 사랑은 실천의 원리이며 원천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교리와 실천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교리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실천을 불러온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지금가지 예를 통해 우리는 영국 청교도 신학자들은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신학의 성격을 이론 혹은 교리와 연합으로,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를 실천 지향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이들과 동일하게 청교도 신학의 전통 안에 있었으면서도 교회론적인 특징으로 침례교인들로 분리되었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이다.
박홍규
http://blog.daum.net/kkho1105/6731
그렇다면 이제 침례교회가 직접적으로 파생된 영국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에서 교리 혹은 이론과 실천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침례교 신학에서 교리와 실천의 관계를 역사적이며 신학적 관점에서 정확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영국 청교도 신학은 성격상 유럽의 다른 후기 종교개혁 개혁주의 신학과 동일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럽은 활발한 지적은 교류가 있었고, 그들의 신학은 바로 이런 지적은 교류를 토대로 수립되었기 때문이다.영국 청교도 신학자 중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하는 사람은 윌리엄 퍼킨스(William Perkins)이다. 퍼킨스는 윌리엄 펨블(William Pemble)과 더불어 캠브리지 대학의 교수와 목사로서 일하면서 후에 청교도 신학의 형성에 중요한 신학적 기초를 놓았다. 특히 영국 침례교의 기초를 놓았던 사람들이 캠브리지 대학에서 수학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퍼킨스는 그의 신학체계를 볼 수 있는 A Golden Chaine: or the Description of Theologie에서 신학을 영원히 축복받으며 사는 학문(a science of living blessedly for ever) 이라고 정의하고, 축복받는 삶은 하나님을 아는 데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퍼킨스가 거의 동시대 사람인 마코비우스와 거의 유사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퍼킨스가 규정하는 신학의 성격이 마코비우스와 마찬가지로 실천 지향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의 신학이 결코 하나님에 대한 바른 교리를 무시하지 않는 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그는 이러한 신학에 대한 정의와 더불어 칼빈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인간을 아는 지식과 연결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그가 추구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단순히 교리적이며 사변적인 지식을 넘어서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께 올바른 반응을 요구하고 있는 지식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퍼킨스 신학의 실천적 성격은 그의 하나님의 본질과 속성에 대한 논의에도 잘 반영되어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가를 하나님의 본질(the nature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다루고, 그 하나님께서 어떤 성품을 가지고 계신가를 하나님의 삶(the life of God)'이라는 제목으로 다룬다. 그리고 그는 이런 성품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은 영광(glory)과 복되심(blessedness)을 가지고 계신 분으로 마무리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퍼킨스가 하나님의 속성을 추상적으로 다루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다룰 뿐 아니라, 결국 그런 속성에 대한 논의는 우리로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하며, 우리의 지복의 원천은 오직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도록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신학을 이론과 실천의 결합으로, 그러면서도 그 이론이 실천을 지향하도록 하는 퍼킨스의 신학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잘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영국의 청교도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 영국의 캠브리지와 화란의 프레네케에서 활동했던 윌리엄 에임즈(William Ames)의 견해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에임즈는 그의 The Marrow of Theology에서 신학을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the doctrine or teaching [doctrina] of living to God) 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정의에서 우리는 에임즈에게 있어서 신학은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우리가 아는 그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신학이 단순히 사변적이고 이론적인 것을 넘어서서 실천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는 보여준다. 에임스는 더 나아가서 인간이 행복하게 사는 것보다 행복하면서도 잘 사는 것이(to live both happily and well)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신학의 목적이 단지 행복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된 삶(good life) 곧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삶을 추구하는 것이라는 것을 내포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에임즈가 결코 올바른 교리와 올바른 삶을 분리시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임즈는 또한 보다 직접적으로 신학은 교리적인 학문이 아니라 실천적인 학문이다(theology is not a speculative discipline, but a practical one) 라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신학에는 최종적인 목적 곧 실천을 지향하지 않는 어떤 것도 없다. 곧 신학의 목적은 인간에게 단순히 교리적 지식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을 변화시켜 하나님을 위해 제대로 살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우리는 스코투스나 칼빈, 그리고 더 나아가서 폴라누스와 같은 강한 주정주의적(voluntaristic) 경향을 발견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신학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폴라누스와 마찬가지로 그로 하여금 그의 신학을 믿음의 부분과 실천의 부분으로 구분하도록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폴라누스와 마찬가지로 그가 신학을 믿음의 부분과 실천의 부분으로 구분한 것은 자기 신학의 실천적 성격을 약화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강화시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신학은 이론과 실천이 서로 결합되어있지만, 궁극적으로 신학은 실천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데 분명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이제 신학의 성격에 대해 17세기 영국 최고의 신학자였으며 영국 침례교 신학에 큰 영향을 주었던 존 오웬(John Owen)의 견해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 오웬은 그의 신학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Theologoumena Pantodapa에서 이론적인가 실천적인가 혹은 그것이 결합된 학문인가에 대한 스콜라적인 논의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것을 피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과 함께 신학은 이론과 실천의 결합이며, 그것은 실천을 지향한다는 견해를 수용한다.) 오웬은 신학은 그 원인과 주제와 목적을 생각해 볼 때 알려진 사실들과 원리들로부터 결론을 도출하는 일반학문과는 다르다고 주장한다. 신학은 인간을 향해 자신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를 기초로 하며, 그 계시에 입각하여 구성되는 신학은 진리에 대한 나열을 넘어서서 그 진리의 핵심인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기에 참다운 신학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이러한 신학의 본질에 대한 이해는 신학에 대한 그의 정의에 잘 나타나있다. 그는 신학은 하나님에 대한 학문(a science on God) 이라는 고전적인 정의를 넘어서서 하나님 자신과 그의 사역과 그의 뜻과 그에 대한 예배와 관련된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그에 대한 우리의 필수적인 순종과 우리의 미래의 보상과 형벌, 그리고 자신의 이름의 영광을 높이기 위해 하나님 자신이 드러내신 모든 것을 연구하는 것 으로 정의한다.) 이러한 오웬의 정의에서 우리는 그의 신학이 단순히 하나님에 대한 교리적인 이해를 넘어서서 우리의 순종과 예배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웬 신학의 실천적인 특징은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구속사를 언약 신학적 관점에서 노아시대, 아브라함시대, 모세시대, 선지자시대, 그리스도시대로 나누어 취급하는데서 잘 나타난다.) 이는 그가 신학을 언약의 관계로 설정함으로서 단순히 사변적이고 교리적인 앎을 넘어서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실천적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또한 이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침례교 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굿윈은 그의 방대한 신학적인 저작물에도 불구하고 체계적인 조직신학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그의 직접적인 언급을 찾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그의 글을 분석해보면 그 또한 오웬과 같은 입장에 서있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가령 그의 The Knowledge of God the Father, and His Son Jesus Christ를 살펴보면 그의 책은 크게 라미스트 패턴을 따라 교리적인 부분과 적용부분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굿윈의 자신의 책에서 성서에 입각하여 하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해 논의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 논의는 믿음으로 수용이 되고, 더 나아가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기를 원한다.) 그는 순서에 있어서 교리적인 내용을 먼저 다루고 난 다음에 그것의 적용을 다룬다. 이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는 실천을 의미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실천이 없는 교리 또한 공허한 메아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학의 성격에 대한 그의 이해는 다른 모든 책에서 쉽게 발견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청교도의 경건생활의 교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죠지 스위녹(George Swinnock)의 The Christian Man's Calling에서 비록 간접적이기는 하지만 청교도 신학자들이 교리와 실천과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알 수 있다. 스위녹은 먼저 테오도르 베자(Theodore Beza)의 말을 인용하면서 목회자들의 참된 임무는 단순히 올바른 교리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것과 함께 경건한 삶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경건(godliness) 혹은 종교(religion)를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 따라 마음과 삶으로 참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예배는 하나님께 마땅히 돌려 드려야 할 영광을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이러한 경건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이며, 인간의 영혼의 맥박(the pulse of the soul) 이라고 주장한다.) 이렇게 볼 때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단순히 이론적 앎을 넘어서서 실천이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베자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나, 경건의 정의에서 알 수 있듯이, 그에게 있어서 신학이란 반드시 성경의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우리는 또한 17세기 영국 다작가 리처드 백스터(Richard Baxter)에게서도 유사한 경향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백스터는 그의 Of the Knowledge of God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단순히 교리적인 앎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그는 스콜라적 전통을 따라 아주 정교하게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무엇을 포함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1. 이성은 신앙에 필수적인 하나님에 대한 교리들을 이해한다. 2. 이해한 교리들을 진리로 믿는다. 3. 따라서 하나님을 높게 평가한다. 4. 그를 최고선인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사랑한다. 5. 그를 닮고자 열망한다. 6. 다른 모든 경쟁자를 거절하고 그를 선택한다. 7. 그가 우리 하나님이심을 인정하고 우리를 그의 백성으로 드린다. 8. 우리의 삶의 과정에서 그를 우리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인정한다. 9. 그를 최고의 수단으로 선택하고 사용한다. 10. 그를 우리의 주권적인 통치자로 여겨 그에게 순종한다. 11. 그를 하나님으로 경배하고 찬양한다. 12. 믿음으로 그를 즐거워하고 기뻐한다.) 이러한 백스터의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한 긴 나열에서 우리는 그에게서 신학은 단순히 차가운 이론적 지식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애정과 예배를 불러일으키는 실천적 지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스위녹의 The Christian Man's Calling과 더불어 청교도들의 삶에 탁월한 안내서가 되었던 그의 A Christian Directory에서 백스터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비록 그들이 때대로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단지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인도하는 수단이다. 지식과 믿음이 새로운 피조물의 눈이라면, 사랑은 심장이다. 믿음이 없다면 영적인 지혜는 없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없다면 더 이상 생명이나 받아들일 수 있는 자질이나 사랑스러움은 있을 수 없다. 신학에서 모든 진리들은 거룩한 삶을 위해 드러나며, 사랑은 실천의 원리이며 원천이다 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서 교리와 실천은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교리에 대한 믿음은 곧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라는 실천을 불러온다는 것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지금가지 예를 통해 우리는 영국 청교도 신학자들은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마찬가지로 한결같이 신학의 성격을 이론 혹은 교리와 연합으로,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를 실천 지향적으로 이해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이들과 동일하게 청교도 신학의 전통 안에 있었으면서도 교회론적인 특징으로 침례교인들로 분리되었던 사람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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