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인 속임수, 이단적 가르침을 경계하며...
<종교개혁기념> 나의 복음과 다른 복음
오늘날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인 속임수, 이단적 가르침을 경계하며...
박혜근
종교개혁 492주년을 기념하여 박혜근 박사(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의 갈라디아서 강의 내용 중 1:6절 말씀의 내용을 녹음하여 녹취하였다. 본 강의 내용을 리폼드뉴스가 종교개혁 492주년으로 싣게 된 이유를 독자들께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정리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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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주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오직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것은 이신측칭의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내용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과거부터 지금까지 작은 로마서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그 중심내용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설명으로 꽉 찼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람들이 짧은 로마서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는 드디어 유대교하고 기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던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사역할 때와 초기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도 할 때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 오셨고 그 제자들 12명 전부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120명의 성도들이 대부분 다 유대인들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엄격한 분리가 안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사실 다른 종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구분이 잘 안 되고 있다가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그 무렵에 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서서히 차이,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사실, 확실히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거기에 몸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인식하기 시작하고 유대교인들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차이에 관해 처음에 사람들이 “기독교는 적어도 유대교에서 나온 발전된 종교다”라고 한다거나 “기독교는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종교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들인데다가 성경을 사용하는 구약성경도 동일하니까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보니까 이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라 생각하고 이단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기독교인들도 유대교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점입니다. 여기가 다소라고 하는 지역에 사도바울이 조상 대대로 그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실제로 이 해안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해안지역에서 유대인으로서 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는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주의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됨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고 하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교회안의 신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도 좋지만 구약에서 가르친 율법을 지키면 더 좋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유대교에서 가르쳤던 좋은 어떤 가르침이나 덕목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르침을 다 몽땅 버릴게 아니고 그것도 지키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 지키고 거기에다 더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하면 완벽하게 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이방인 신자들 가운데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할례 받도록 요구하고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서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율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 정도가 아닙니다. 랍비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이 있는데 그 세부 규정을 그 안식일에 대한 계명 밑에 각주를 달아 놓습니다. 예를 들면 몇 리 이상가면 안되고 어떤 것을 들면 안된다는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내용까지 다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주의는 그런 세세한 사람들이 전해준 그 자기들의 유대교 선생들이 전해준 그 세세한 율법에 해설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다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람은 완전하게 의롭게 되는데 더 유리하다, 혹은 더 효과적이다, 유효하다 이렇게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믿음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들로서는 가만 생각하니까 그냥 예수님만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도 옳지만 유대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그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도 괜찮거든요. 우리말에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 그래서 그냥 그것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무엇을 익히는가 하면 바울이 전해준 “나의 복음”이란 갈라디아서에서 중요한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변질시킬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고는 이제 그러한 갈라디아 교인 안에 들어온 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강변하는 사람들의 그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은 서로 반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 다른복음이라고 지칭하는 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물리치고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를 세울 때 자신이 전해 주었던 성경적인 바른 구원의 가르침 그것은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그 나의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자 했었던 것이 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믿음에 다른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 내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신칭의라 사람이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다른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완전하고 충분한 조건이지 그것이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그래서 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이 교리에 무엇이든 더하거나 또는 거기에서 얼마를 감하거나 하는 모든 것은 전부다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저렇게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속임수가 혹은 이 이단성 가르침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참된 복음과 거짓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하면 그것은 로마서는 그냥 로마에 있는 교회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도리를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어떤 사실을 가르치듯이 아주 질서 정연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데 반해서 이 갈라디아서는 내용은 같지만 논쟁적으로 다투고 있고 열 뜨게 말하고 있고 때로는 거칠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차이는 그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는 양상이 다릅니다. 로마서는 점잖고 쉽게 말하자면 전문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하면 이 갈라디아서는 논쟁적으로 다투는 식으로 때로는 거친 언어를 쓰면서 이신칭의의 교리가 왜 옳은 것인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오늘 이 "나의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미리 설명을 드릴게 있습니다.
"그리스도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갈라디아서 1장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이 갈라디아서 1장 6절이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사도바울의 집필 동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 갈라디아서를 썼느냐 하면 그 집필동기가 이 갈라디아인들이 사도바울이 전해준 나의 복음 그 천금 복음을 버리고 그 복음을 전해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금새 다른 복음을 또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참된 복음에 이 진정성 이 참된 복음이 훼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훼손되고 있는 그 참된 복음을 어쨌든 회복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볼 것은 "그리스도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라 하는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금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하는 그 나의 복음을 규정짓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신학적인 단서가 거기 있습니다. 구원의 모든 다양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르심, 믿음과 회개, 중생, 양자,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들어보셨습니까? 한번씩 들어는 봤지요. 이것이 전부다 구원의 경험입니다. 구원자체는 아니지만 구원의 경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면 제가 지금까지 말했던 이 다양한 구원의 경험이 일어난다고. 그런데 그러한 구원의 경험이 누구의 주도로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의 주도로 일어납니다.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의 시작도 없고 구원의 완성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우리 구원의 시작과 완성은 성령 하나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이 아니면 예를 들면 믿음과 회개도 불가능하고 성령이 아니면 중생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성화되거나 영화롭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는 죄와의 싸움에서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신년이 되면 결심합니다. 올해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결심하는데 그렇게 다짐하고 돌아간 그 첫해 초하룻날 아침에 벌써 그 다짐이 거짓말 됩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것이 거짓말됨으로써 거짓말로 한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런 일이 왜 생기는가 하면 성령을 의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의존하지 않고는 이제는 우리 몸속에 남아있는 이 죄의 원리가 절대로 우리 힘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거나 그것을 굴복시키거나 반복적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도해보세요. 금식해도 안되고 다짐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그러는가 하면 사람은 자기속에 있는 죄의 원리 이 조의 욕망을 스스로 극복하거나 그것을 제압 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내 속에 있는 이 죄를 이기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밥먹는 것을 쳐다보면 불쌍해 보입니다. ‘아 저렇게 먹기 위해 사나’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산에서 금식기도하는 동안에 벌써 사람이 스스로 거룩해진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곰탕 먹고 있는 사람이나 자기나 차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곧 이 사람은 그렇게 금식기도 하고 돌아와도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옛 생활로 또 돌아갑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보통 고 3들 보면 다들 잠이 많이 오잖아요. 그 전에 우리 교회에 있던 아이를 보니까 심방을 가서 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애 방을 한번 들여다 보았더니 그 방 책상위에 ‘절대로 자지 말자’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잠이 왔으면 절대로 자지 말자라고 되어 있는데 보니까 그 바로 밑에 책상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 어떤 청년이 의대를 다니는데 어느 날 나한테 인사를 하러와서 ‘목사님 저 한 일주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금식기도를 하러 간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여기처럼 금식기도원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금식기도를 하러 간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사 고시를 앞두고 그것 때문에 기도하러가는 줄 알고 "기도제목이 뭐니"하고 물었더니 다른 어떤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는건 아니고 "이번에 금식기도 하고 돌아와서 거짓말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금식기도하러 갑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도 젊은 청년이 참 생각이 바르다, 무슨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험에 통과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바르게 살고 싶어서 금식기도하러 간다니까 얼마나 가상해요. 그래서 내가 기도해주고 "건강하게 잘 갔다오너라" 하면서 "너 아마 갔다와도 거짓말 안하고 살기는 쉽지 않을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중팔구는 지금 그다지 못지키고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우리 속에 있는 이 짐승을 완전히 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스스로 한번 보세요. 남을 보는거나 다른 사람을 보는거나 우리 속에 그렇게 무서운 죄의 원리가 있을거라 생각이 됩니까. 얼마나 다 선남선녀로 보기 좋고 문화인이고 배운 사람이고 교양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그러한 죄의 원리가 없는 듯 싶어도 아닙니다. 원래 소리없이 흐르는 물이 깊습니다. 우리 속에 죄가 숨어 있을 뿐이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 죄의 힘이 화염같이 일어나서 우리의 인생을 태웁니다. 절대로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성령이 우리의 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하는 그것도 성령의 능력이지 우리의 결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가 힘써야 될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다짐보다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존하기를 쉬지 않아야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어쨌든 내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기를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은사가 우리 안으로 주입되고 우리 안에 들어온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죄의 능력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이 우리를 구원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 때에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우리 구원의 경험의 죄의 첫 단계에 일어나는 경험은 부르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 아까 갈라디아서 1장 6절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이렇게 되어 있는게 아니라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려면 이 설명을 잘 따라오셔야 됩니다. 이 지금 1장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말을 할 때에 사도바울이 원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른다는 부르심은 이 복음에 초청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도 전도 많이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말합니다. 교회나오십시오. 이게 복음의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교리
지금 성경에서 부르심 이렇게 말할 때에는 그렇게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들이 그 전도하는 말을 듣는 것, 그리고 그 전도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초청하는 이 복음의 초청이 부르심은 아닙니다.
우리 보통 빌리그라 목사님이 집회 할 때 보면 오늘 이 시간 예수 믿기를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해서 앞으로 쭈욱 나오잖아요. 그게 지금 말하면 이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이 복음의 초청이 들을 때에 누구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전도 다니면서 아파트를 다닙니다. 그 초인종을 누르잖아요. 사실 그 초인종을 누를때 사람들은 다 겁을 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나올까봐. 안나와야 되는데 정말 나오면 큰일 나잖아요.
나는 전하고 싶은데도 사람이 안나와서 못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가는 집마다 누른 집마다 사람이 다 나오고 또 나오는 사람들마다 험상궂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들. 그런데 그 복음의 초청 예수 믿으라고 구원하는 이 죄인이 있잖아요 믿으세요 믿으시면 앞으로 나오세요. 강당 앞으로 불러내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그러한 전도의 음성이나 설교를 들을 때나 말씀을 읽을 때에 주의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역사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다 주어집니다. 차별 없이 다 주어지지만 그러나 그 복음의 초청을 통해서 누구에게는 그것이 생명의 소식이 되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음성으로 결정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부합니다. 누구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이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가 기술적으로 설명을 잘 하기 때문에 내 전도를 받는 사람이 신앙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도할 때 영혼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복음의 초청이 주어질 때 이 부르심이 주어지지만 그 부르심의 시작은 창세전인 것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이 영원전에 자기의 자녀로 작정하신 그 사람을 복음의 초청이 주어질 때 성령을 통해 그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사랑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항상 부르심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이 교회 성도들 다 모아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이 많은 교인들 중에 성경적으로 바르게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면 그 체험하는 제일 실천적인 방법은 부르심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를 주라 신앙하고 고백하면서 나와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창세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 내가 지금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느냐 하는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나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왜 복음의 초청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 하면 모든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자연인이 다 죽어서 여러분 세상을 막 살아도 성령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지 아니한 자는 그 영적 상태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2절까지 보시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자연인은 복음의 초청을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다녀서 믿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가 믿기를 원했던 하나님 때문에 오늘 내가 성령을 통해 믿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24절까지를 보시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닙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것은 거북한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저주 받은 자인 것 입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는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무런 구원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차이가 왜 생깁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 부르심을 통해서 그 문에 덮혔던 것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영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31절까지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뜻대로"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주신 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가 깊으신 뜻대로 작정한 자만 부르심을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연히 믿거나 아무도 자신이 결정해서 믿기로 해서 믿은 자리에 나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믿은 것은 하나님 작정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영혼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작정이 먼저 있고 그 작정의 결과로 성령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받아들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이 빌립보 지방에서 처음 예수 믿고 그 빌립보 교회에 기초 돌이 되었던 루디아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보면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를 들어다 합니다. 이 (엑쿠엔) 들었다 이말이 미 완료형인 능동태인데 그때 듣고 있는 중에 이 듣고 있는 상태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들었겠지요. 듣고 있는 중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이 부정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자기도 언제 열린 것인지, 시간은 루디아 자신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하여튼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 말씀이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마치 자기를 향해 하는 말 같고 그 말이 정말 귀로 듣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때 그런 경험이 있지요. 앉아있으면 정말 그 목사님이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이 회심하기 전에 저는 4대째 믿는 집안에 태어났는데 저는 세상 사람들이 다 교회에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릴때부터 교회나가고 교회에 나가면서 철이 들었는데 이 신앙의 큰 체험이 없다가 어느 순간에 제게 일어난 변화가 그 설교시간에 설교가 그전에는 그렇게 길더니 옛날에는 설교를 오래 했습니다.
요즘에는 40분만 해도 교인들이 막 난리를 치는데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1시간씩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한다고 지겹다고 생각했던 그 설교가 어느날 부터는 이 목사님이 자꾸 내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너무 닿아옵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어찌 그리 닿게 하는지 참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 설교 듣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일에 한번 가는 것도 고집피우고 가기 싫어하다가 나중에는 주일 예배가고 주일 저녁 예배가고 수요일가고 금요일 집회가고 새벽기도가고... 말씀이 좋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런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역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체험한 부정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 성경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인데 그 사랑은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의심하게 될 때에 내가 부르심 받은 그 사건을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충종하게 하신지라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서 그 말씀을 듣게 한 그때부터는 이 루디아가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닦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그 때부터는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도 듣고 있었지만 성령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진지하게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루디아가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냥 우리를 불러주신 사건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혹은 이 내적 부르심.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의도하는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 마음에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다는 말은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이해는 연다는 말이 좀 성적인 표현으로 자궁이 처음 열린다 그 말입니다. 아기를 잉태하여 가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자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서 일어난 결심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마치 여인이 아이를 갖듯이 그렇게 강대적인 힘 있잖아요. 혹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 내가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주신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것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못해서 ‘그래 너희가 그렇게 간절히 구하니 내가 들어주마.’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결과로 내가 그 말씀을 받고 믿는 자가 되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실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기 싫어하시는 것을 때를 써서 얻는 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치 않는 것을 받아 내라고 말씀한 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령이 한 개인의 마음에 역사하는 그 순간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계획한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하나님의 영화하신 깊으신 뜻이 그 부르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미 그가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미 그가 성령 받았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미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고 이미 그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사건이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 그러잖아요. 우리가 이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압니다. 이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을 경험했는데 또 무슨 다른 복음을 구하느냐 그 말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나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 이 ‘다르다’ 할 때 이 ‘다르다’ 말이 두개의 단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헷테론)이란 말이 있고 (아우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보면 자주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 다른 복음 그럽니다. 그 다르다는 말이 헷테론이란 말이고 아우로스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서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그럽니다. 그 다른 이 란 말이 곧 다르다는 말입니다. 헷테론입니다. 그런데 이 두말을 고대 헬라어에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썼는가 하면 헷테론이란 말은 종류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과와 오렌지가 서로 다르지요. 종류도 서로 다른데 그때 쓰는 말이 헷테론입니다.
그 아우로스는 똑같은 사과가 두개 있는데 이거 하나 다른 하나 할 때 그 다른 하나 숫자로 서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헷테론이란 말은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사과하고 오렌지가 서로 종류가 다르잖아요 그 때 다르다 이런 말도 있고 똑같은 사과가 두개 있는데 그 사과를 주세요 했는데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과를 안주고 다른 사과를 줄 때 그것 말고 다른거 이렇게 말할 때는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숫자에 있어서 부과적인 것 그냥 다른 것 종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아우로스란 말은 고대 헬라어에서는 종류의 다름을 가리키지 않고 그냥 이 유대교 중에 어떤 것 하나를 가리키는 쪽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헷테론이란 말은 서로 종류가 다를 때 많이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 고대 문서에 보면 헷테론이란 말과 아우로스란 말이 서로 이렇게 큰 구분 없이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헷테론이란 말과 아우로스란 이 두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서로 상호교환 가능한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읽었던 이 갈라디아서 본문에 보면 다른 복음 그럴 때 한번은 헷테론 유황겔리온 이렇게 하고 또 한번은 아우로스 유황겔리온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성경에서 이 두 말을 쓸 때에는 다른 종류를 가르키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은 기가 전가해준 복음이 아닙니다. 자신이 한번이라도 준 적이 없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준 복음이 참된 복음인데 그것은 자기가 준 복음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의미로서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그 다르다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릅니다. 첫 번째는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이라 할 때 그 나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경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준 복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다른 복음은 하나님이 준 적이 없는 복음입니다. 그 기원이 다릅니다.
사도바울의 이 나의 복음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누구이냐 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이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나의 복음은 내가 전달해 준 것이긴 하지만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그 복음은 원래 누구로부터 왔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 불렀던 그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주신 복음입니다. 그래서 기원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의 기원은 그러나 이 다른 복음은 그 기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에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한참 걸리니까 황금으로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가지고 오늘 본문에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무잇말인가 하면 이들이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서 이 금송아지를 가지고 애굽에서 능력과 기적으로 그들을 건전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신으로 믿었던 겁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뭐냐하면 유대교에서 들어온 거짓 신자들이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구원을 받는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유대교에 따른 율법의 의의 그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던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 길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그 길이 다른 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분께 가는 서로 다른 길 일뿐이다. 한쪽 길은 믿음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한쪽 길은 행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쪽으로 올라가든 저쪽으로 올라가든 하나님께 올라가기는 매 일반인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주신 그 하나님이 곧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요. 율법을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복음을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동일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에 이른다는 그의 가르침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적극적으로 지금 논박할려고 하는 부분은 율법으로는 사람이 절대로 의롭게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라고 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이론적으로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구원의 방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죄악 연약함 무능력 때문에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고 따라서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어 구원받으라고 주신 의도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더욱 죄가 되게 하고 죄를 생각나게 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그 목적으로만 주신 것이지 한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통해 구원받으라고 하는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고 또 아무도 율법을 지킬수도 없고 따라서 율법은 한번이라도 구원의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받느냐. 오로지 은혜로서 믿음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 외에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줄 믿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의 경륜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다른 복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그 길이 은혜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도바울의 나의 복음을 대신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은 유효하지 않을뿐더러 한번이라도 우리에게 그것을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다른 복음의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없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믿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다른복음의 첫 번째 의미는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한번이라도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가르치는 그 다른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다는 그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http://blog.daum.net/kkho1105/5015
오늘날 교회 안에 다른 복음인 속임수, 이단적 가르침을 경계하며...
박혜근
종교개혁 492주년을 기념하여 박혜근 박사(칼빈대학교 조직신학 교수)의 갈라디아서 강의 내용 중 1:6절 말씀의 내용을 녹음하여 녹취하였다. 본 강의 내용을 리폼드뉴스가 종교개혁 492주년으로 싣게 된 이유를 독자들께서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정리 소재열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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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의 주된 메시지는 무엇인가? 오직 사람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것은 이신측칭의 교리에 대한 가르침이 주된 내용입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내용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과거부터 지금까지 작은 로마서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로마서가 그 중심내용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한 설명으로 꽉 찼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사람들이 짧은 로마서라고 불렀습니다.
갈라디아서를 쓸 당시에는 드디어 유대교하고 기독교가 엄격하게 분리되던 시기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사역할 때와 초기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도 할 때는 유대교와 기독교가 엄격하게 구분되지 않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유대인들 가운데 오셨고 그 제자들 12명 전부다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크게 다르다
그래서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120명의 성도들이 대부분 다 유대인들었습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 엄격한 분리가 안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유대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사실 다른 종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구분이 잘 안 되고 있다가 이 갈라디아서를 기록할 그 무렵에 이 기독교와 유대교 사이에 서서히 차이, 분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다르다’는 사실, 확실히 다른 종교라는 사실을 거기에 몸담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인식하기 시작하고 유대교인들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차이에 관해 처음에 사람들이 “기독교는 적어도 유대교에서 나온 발전된 종교다”라고 한다거나 “기독교는 유대교와 크게 다르지 않은 종교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도 유대인이고 제자들도 유대인들인데다가 성경을 사용하는 구약성경도 동일하니까 별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가 나중에 보니까 이것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인식을 하면서부터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적극적으로 핍박하지 않습니까?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다른 종교’라 생각하고 이단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렵에 기독교인들도 유대교하고는 다르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제는 이 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점입니다. 여기가 다소라고 하는 지역에 사도바울이 조상 대대로 그 지역에서 살아왔습니다. 그 실제로 이 해안지역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이 해안지역에서 유대인으로서 이 예수를 믿고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는 유대교에서 가르치는 율법주의 말하자면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됨으로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다고 하는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교회안의 신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도 좋지만 구약에서 가르친 율법을 지키면 더 좋지 않느냐 라고 말합니다.
유대교에서 가르쳤던 좋은 어떤 가르침이나 덕목 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가르침을 다 몽땅 버릴게 아니고 그것도 지키는 것은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 지키고 거기에다 더해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더하면 완벽하게 된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이방인 신자들 가운데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할례 받도록 요구하고 그리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라서 절기를 지키게 합니다.
여러분, 유대인들의 율법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십계명 정도가 아닙니다. 랍비들이 “안식일을 지킬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세부 규정이 있는데 그 세부 규정을 그 안식일에 대한 계명 밑에 각주를 달아 놓습니다. 예를 들면 몇 리 이상가면 안되고 어떤 것을 들면 안된다는 아주 상세하고 구체적인 내용까지 다 되어 있는데 유대인들이 말하는 율법주의는 그런 세세한 사람들이 전해준 그 자기들의 유대교 선생들이 전해준 그 세세한 율법에 해설을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을 다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람은 완전하게 의롭게 되는데 더 유리하다, 혹은 더 효과적이다, 유효하다 이렇게 가르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믿음을 가진지 얼마 되지 않은 이방인들로서는 가만 생각하니까 그냥 예수님만 믿고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도 옳지만 유대교에서 오랫동안 가르쳐왔던 그 율법주의적인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도 괜찮거든요. 우리말에 다다익선(多多益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 그래서 그냥 그것을 수용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결국에는 무엇을 익히는가 하면 바울이 전해준 “나의 복음”이란 갈라디아서에서 중요한 이 말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복음을 변질시킬 위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러한 위험을 직시하고는 이제 그러한 갈라디아 교인 안에 들어온 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강변하는 사람들의 그 가르침을 “다른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은 서로 반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이 다른복음이라고 지칭하는 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물리치고 자신이 처음에 갈라디아 교회를 세울 때 자신이 전해 주었던 성경적인 바른 구원의 가르침 그것은 나의 복음이라고 말하고 그 나의 복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고자 했었던 것이 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믿음에 다른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그러니까 그 내용은 아까 말씀드린 대로 이신칭의라 사람이 오로지 믿음으로만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믿음에 다른 어떤 것도 더할 필요가 없습니다. 믿음이 구원받는데 있어서 완전하고 충분한 조건이지 그것이 필요조건이 아닙니다. 오로지 믿음으로만 그래서 이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이 교리에 무엇이든 더하거나 또는 거기에서 얼마를 감하거나 하는 모든 것은 전부다 다른 복음이라고 규정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면서 사도바울이 말하는 나의 복음과 다른 복음의 차이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교회 안에도 저렇게 다른 복음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속임수가 혹은 이 이단성 가르침이 우리 주위에 언제나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말하면 참된 복음과 거짓 복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하면 그것은 로마서는 그냥 로마에 있는 교회 교인들에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 도리를 그냥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어떤 사실을 가르치듯이 아주 질서 정연하게 써 내려가고 있는데 반해서 이 갈라디아서는 내용은 같지만 논쟁적으로 다투고 있고 열 뜨게 말하고 있고 때로는 거칠게 공격합니다. 그래서 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차이는 그 이신칭의의 교리를 가르치는 양상이 다릅니다. 로마서는 점잖고 쉽게 말하자면 전문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하면 이 갈라디아서는 논쟁적으로 다투는 식으로 때로는 거친 언어를 쓰면서 이신칭의의 교리가 왜 옳은 것인지를 가르치고자 하는 것이 그 내용입니다.
오늘 이 "나의 복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미리 설명을 드릴게 있습니다.
"그리스도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
갈라디아서 1장 6절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이 갈라디아서 1장 6절이 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사도바울의 집필 동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왜 이 갈라디아서를 썼느냐 하면 그 집필동기가 이 갈라디아인들이 사도바울이 전해준 나의 복음 그 천금 복음을 버리고 그 복음을 전해준지 얼마 되지 않아서 금방 금새 다른 복음을 또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참된 복음에 이 진정성 이 참된 복음이 훼손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훼손되고 있는 그 참된 복음을 어쨌든 회복하기 위해서 이 편지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먼저 볼 것은 "그리스도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라 하는 이 구절이 중요합니다. 이것이 지금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이라고 하는 그 나의 복음을 규정짓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신학적인 단서가 거기 있습니다. 구원의 모든 다양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르심, 믿음과 회개, 중생, 양자, 칭의, 성화, 견인, 영화 들어보셨습니까? 한번씩 들어는 봤지요. 이것이 전부다 구원의 경험입니다. 구원자체는 아니지만 구원의 경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게 되면 제가 지금까지 말했던 이 다양한 구원의 경험이 일어난다고. 그런데 그러한 구원의 경험이 누구의 주도로 일어나느냐 하면 성령의 주도로 일어납니다.
성령이 아니면 절대로 구원의 시작도 없고 구원의 완성도 없습니다. 철저하게 우리 구원의 시작과 완성은 성령 하나님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 성령이 아니면 예를 들면 믿음과 회개도 불가능하고 성령이 아니면 중생하거나 의롭게 되거나 성화되거나 영화롭게 되는 것도 없습니다. 성령에 의존하지 않고는 죄와의 싸움에서도 절대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보통 신년이 되면 결심합니다. 올해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고 다짐하고 결심하는데 그렇게 다짐하고 돌아간 그 첫해 초하룻날 아침에 벌써 그 다짐이 거짓말 됩니다. 그러니까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그것이 거짓말됨으로써 거짓말로 한해를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몸부림쳐도 자꾸만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런 일이 왜 생기는가 하면 성령을 의존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성령을 의존하지 않고는 이제는 우리 몸속에 남아있는 이 죄의 원리가 절대로 우리 힘으로는 그것을 극복하거나 그것을 굴복시키거나 반복적으로 이길 수 없습니다. 아무리 시도해보세요. 금식해도 안되고 다짐해도 안 되는 것입니다. 왜그러는가 하면 사람은 자기속에 있는 죄의 원리 이 조의 욕망을 스스로 극복하거나 그것을 제압 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내 속에 있는 이 죄를 이기기를 반복하지 않으면 절대로 죄를 다스릴 수 없습니다.
한 일주일간 금식기도를 하고 내려오면 사람들이 밥먹는 것을 쳐다보면 불쌍해 보입니다. ‘아 저렇게 먹기 위해 사나’ 왜냐하면 일주일 동안 산에서 금식기도하는 동안에 벌써 사람이 스스로 거룩해진 착각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거룩해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렇게 곰탕 먹고 있는 사람이나 자기나 차이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곧 이 사람은 그렇게 금식기도 하고 돌아와도 성령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아니하면 옛 생활로 또 돌아갑니다. 안 되는 것입니다.
보통 고 3들 보면 다들 잠이 많이 오잖아요. 그 전에 우리 교회에 있던 아이를 보니까 심방을 가서 식사를 하고 난 다음에 그 애 방을 한번 들여다 보았더니 그 방 책상위에 ‘절대로 자지 말자’라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잠이 왔으면 절대로 자지 말자라고 되어 있는데 보니까 그 바로 밑에 책상에서 자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있던 교회 어떤 청년이 의대를 다니는데 어느 날 나한테 인사를 하러와서 ‘목사님 저 한 일주일동안 금식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미국에서 금식기도를 하러 간다는 것은 보통일이 아닙니다. 여기처럼 금식기도원이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금식기도를 하러 간다는 자체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나는 의사 고시를 앞두고 그것 때문에 기도하러가는 줄 알고 "기도제목이 뭐니"하고 물었더니 다른 어떤 특별한 기도 제목이 있는건 아니고 "이번에 금식기도 하고 돌아와서 거짓말하지 않고 살기 위해서 금식기도하러 갑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에 감동이 왔습니다. 그래도 젊은 청년이 참 생각이 바르다, 무슨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고 시험에 통과하게 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바르게 살고 싶어서 금식기도하러 간다니까 얼마나 가상해요. 그래서 내가 기도해주고 "건강하게 잘 갔다오너라" 하면서 "너 아마 갔다와도 거짓말 안하고 살기는 쉽지 않을거다"라고 말했습니다.
십중팔구는 지금 그다지 못지키고 살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구라도 우리 속에 있는 이 짐승을 완전히 죽일 수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내가 스스로 한번 보세요. 남을 보는거나 다른 사람을 보는거나 우리 속에 그렇게 무서운 죄의 원리가 있을거라 생각이 됩니까. 얼마나 다 선남선녀로 보기 좋고 문화인이고 배운 사람이고 교양이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게는 그러한 죄의 원리가 없는 듯 싶어도 아닙니다. 원래 소리없이 흐르는 물이 깊습니다. 우리 속에 죄가 숨어 있을 뿐이지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그 죄의 힘이 화염같이 일어나서 우리의 인생을 태웁니다. 절대로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그런데 어쨌든 성령이 우리의 죄를 굴복시키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살게 하는 그것도 성령의 능력이지 우리의 결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쨌든 우리가 힘써야 될 것은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하는 개인적이고 인격적인 다짐보다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존하기를 쉬지 않아야 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서 어쨌든 내가 성령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기를 힘써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능력과 그의 은사가 우리 안으로 주입되고 우리 안에 들어온 그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로 하여금 죄의 능력을 이길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이 우리를 구원 가운데로 이끌어 가실 때에 특별히 주목해야 될 것은 우리 구원의 경험의 죄의 첫 단계에 일어나는 경험은 부르심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르심 아까 갈라디아서 1장 6절에도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란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서 이렇게 되어 있는게 아니라 원문에는 “그리스도의 은혜로”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려면 이 설명을 잘 따라오셔야 됩니다. 이 지금 1장 6절에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 말을 할 때에 사도바울이 원문에 보면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너희를 불렀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른다는 부르심은 이 복음에 초청하고는 다릅니다. 우리가 보통 교회에서도 전도 많이 하잖아요. 예수님께서 말합니다. 교회나오십시오. 이게 복음의 초청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것은 부르심이 아닙니다.
부르심의 교리
지금 성경에서 부르심 이렇게 말할 때에는 그렇게 우리가 전도할 때 사람들이 그 전도하는 말을 듣는 것, 그리고 그 전도하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초청하는 이 복음의 초청이 부르심은 아닙니다.
우리 보통 빌리그라 목사님이 집회 할 때 보면 오늘 이 시간 예수 믿기를 원하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세요 해서 앞으로 쭈욱 나오잖아요. 그게 지금 말하면 이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이 복음의 초청이 들을 때에 누구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누구는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 전도 다니면서 아파트를 다닙니다. 그 초인종을 누르잖아요. 사실 그 초인종을 누를때 사람들은 다 겁을 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나올까봐. 안나와야 되는데 정말 나오면 큰일 나잖아요.
나는 전하고 싶은데도 사람이 안나와서 못 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가 가는 집마다 누른 집마다 사람이 다 나오고 또 나오는 사람들마다 험상궂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상대하기 버거운 사람들. 그런데 그 복음의 초청 예수 믿으라고 구원하는 이 죄인이 있잖아요 믿으세요 믿으시면 앞으로 나오세요. 강당 앞으로 불러내는 것 그것이 성경에서 지금 말하고 있는 부르심이 아닙니다.
이 부르심은 그러한 전도의 음성이나 설교를 들을 때나 말씀을 읽을 때에 주의 성령이 그 사람의 마음의 문을 열어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성령의 역사 그것을 부르심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복음의 초청은 누구에게나 다 주어집니다. 차별 없이 다 주어지지만 그러나 그 복음의 초청을 통해서 누구에게는 그것이 생명의 소식이 되고 누구에게는 심판의 음성으로 결정되고 맙니다. 그리고 거부합니다. 누구는 그것을 기쁨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아들이게 만드시는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가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내가 기술적으로 설명을 잘 하기 때문에 내 전도를 받는 사람이 신앙으로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도할 때 영혼 전에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그 사람이 복음을 들을 때는 그 사람의 마음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복음의 초청이 주어질 때 이 부르심이 주어지지만 그 부르심의 시작은 창세전인 것입니다.
부르신 하나님이 영원전에 자기의 자녀로 작정하신 그 사람을 복음의 초청이 주어질 때 성령을 통해 그 말씀을 듣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부르심은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요. 창세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 사랑의 실현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날 때는 항상 부르심으로 나타납니다.
여러분 오늘 제가 이 교회 성도들 다 모아놓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체험했습니까 하고 물으면 아마 이 많은 교인들 중에 성경적으로 바르게 대답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하나님 사랑을 체험하면 그 체험하는 제일 실천적인 방법은 부르심을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성령의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여기에 예수를 주라 신앙하고 고백하면서 나와 앉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창세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증거입니다. 어떤 자리에 있느냐. 내가 지금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느냐 하는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나로 하여금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셨다는 그 사실이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입니다.
왜 복음의 초청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으면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느냐 하면 모든 자연인은 영적으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에 모든 자연인이 다 죽어서 여러분 세상을 막 살아도 성령을 통해서 부르심을 받지 아니한 자는 그 영적 상태는 사망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나라에 속한 것을 깨달아 알 수 있는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에베소서 2장 1절부터 2절까지 보시면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고 했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기 때문에 자연인은 복음의 초청을 받는다 할지라도 거기에 믿음으로 응답하면서 수용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내가 믿고 다녀서 믿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입니다. 내가 믿기를 원했던 하나님 때문에 오늘 내가 성령을 통해 믿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장 22절~24절까지를 보시면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했습닙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입니다.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것은 거북한 것입니다. 사람이 나무에 매달려 죽은 것은 저주 받은 자인 것 입니다. 그래서 거리끼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이 볼 때는 그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아무런 구원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에게는 그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차이가 왜 생깁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 부르심을 통해서 그 문에 덮혔던 것이 벗겨지고 하나님의 복음의 진리를 볼 수 있는 영화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8장 28절~31절까지 보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 뜻대로" 그럽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심을 주신 자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가 깊으신 뜻대로 작정한 자만 부르심을 받아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도 우연히 믿거나 아무도 자신이 결정해서 믿기로 해서 믿은 자리에 나오는 사람이 없습니다.
믿은 것은 하나님 작정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영혼 전에 우리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 보면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부르시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작정이 먼저 있고 그 작정의 결과로 성령이 복음을 들을 때 믿음으로 아멘이라고 받아들이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 14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이 빌립보 지방에서 처음 예수 믿고 그 빌립보 교회에 기초 돌이 되었던 루디아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런데 말씀에 보면 루디아라고 하는 한 여자가 사도바울의 복음 전도를 들어다 합니다. 이 (엑쿠엔) 들었다 이말이 미 완료형인 능동태인데 그때 듣고 있는 중에 이 듣고 있는 상태가 계속 되고 있는 것을 묘사합니다. 그러니까 설교를 들었겠지요. 듣고 있는 중에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이 부정과거로 되어 있습니다. 어느 순간에 그냥 하나님께서 어떤 때에 그 말씀을 듣고 있는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의 마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자기도 언제 열린 것인지, 시간은 루디아 자신도 모르는 겁니다. 그러나 하여튼 말씀을 듣고 있는 중에 갑자기 그 말씀이 자기 마음 깊은 곳에 들어온 것입니다. 마치 자기를 향해 하는 말 같고 그 말이 정말 귀로 듣는게 아니라 마음으로 들려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은혜 받을 때 그런 경험이 있지요. 앉아있으면 정말 그 목사님이 지금 내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저도 어릴 때 이 회심하기 전에 저는 4대째 믿는 집안에 태어났는데 저는 세상 사람들이 다 교회에 나가는 줄 알았습니다. 어릴때부터 교회나가고 교회에 나가면서 철이 들었는데 이 신앙의 큰 체험이 없다가 어느 순간에 제게 일어난 변화가 그 설교시간에 설교가 그전에는 그렇게 길더니 옛날에는 설교를 오래 했습니다.
요즘에는 40분만 해도 교인들이 막 난리를 치는데 옛날에는 목사님들이 1시간씩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오래 한다고 지겹다고 생각했던 그 설교가 어느날 부터는 이 목사님이 자꾸 내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너무 닿아옵니다. 그 말씀이 내 마음을 어찌 그리 닿게 하는지 참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 설교 듣는 것이 너무 좋았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주일에 한번 가는 것도 고집피우고 가기 싫어하다가 나중에는 주일 예배가고 주일 저녁 예배가고 수요일가고 금요일 집회가고 새벽기도가고... 말씀이 좋았습니다. 어느 순간에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열어 듣게 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 그런 경험이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하면 성령께서 우리를 불러주시는 역사가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런 경우가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체험한 부정할 수 없는 경험입니다. 그 성경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인데 그 사랑은 영원한 과거에서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하나님의 사랑을 정말 의심하게 될 때에 내가 부르심 받은 그 사건을 생각하고 내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충종하게 하신지라 했습니다. 이것은 현재형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을 열어서 그 말씀을 듣게 한 그때부터는 이 루디아가 그 말씀을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닦는 것입니다. 계속 말씀을 그 때부터는 듣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전에도 듣고 있었지만 성령이 마음의 문을 열어주신 그 다음부터는 계속해서 진지하게 믿음으로 그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 말입니다.
루디아가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서 예수를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효과적인 부르심이라 합니다. 그냥 우리를 불러주신 사건이 아니라 효과적으로 불러 주신 것입니다. 혹은 이 내적 부르심. 우리 안에 일어나는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의도하는대로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성령이 그 말씀을 듣는 사람 마음에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연다는 말은 말하자면 유대인들의 이해는 연다는 말이 좀 성적인 표현으로 자궁이 처음 열린다 그 말입니다. 아기를 잉태하여 가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속에 자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부적으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속에서 일어난 결심이 아닙니다. 누군가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마치 여인이 아이를 갖듯이 그렇게 강대적인 힘 있잖아요. 혹은 알 수 없는 초월적인 힘에 의해서 내가 그 말씀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불러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불러주신 것은 창세전에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그것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에 따라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마지못해서 ‘그래 너희가 그렇게 간절히 구하니 내가 들어주마.’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구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셨고 그 결과로 내가 그 말씀을 받고 믿는 자가 되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하나님의 사랑에 실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이 주기 싫어하시는 것을 때를 써서 얻는 다고 생각하면 하나님에 대한 오해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치 않는 것을 받아 내라고 말씀한 적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기도하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하나님의 부르심은 성령이 한 개인의 마음에 역사하는 그 순간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계획한 하나님의 사랑에 따라 하나님의 영화하신 깊으신 뜻이 그 부르심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이미 그가 구원에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미 그가 성령 받았음을 알아야 됩니다. 이미 그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음을 알아야 되고 이미 그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심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선포하시는 사건이 있음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1장 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너희를 부르신 이" 그러잖아요. 우리가 이미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미 하나님을 압니다. 이미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사건을 경험했는데 또 무슨 다른 복음을 구하느냐 그 말입니다. 이 사도바울의 나의 복음 외에는 다른 복음, 이 ‘다르다’ 할 때 이 ‘다르다’ 말이 두개의 단어로 사용될 수 있습니다. (헷테론)이란 말이 있고 (아우로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성경에 보면 자주 나옵니다.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 다른 복음 그럽니다. 그 다르다는 말이 헷테론이란 말이고 아우로스란 말입니다.
여러분 그 세례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보내서 묻습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니이까 아니면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이까 그럽니다. 그 다른 이 란 말이 곧 다르다는 말입니다. 헷테론입니다. 그런데 이 두말을 고대 헬라어에서는 서로 조금씩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썼는가 하면 헷테론이란 말은 종류가 다르다는 말입니다. 사과와 오렌지가 서로 다르지요. 종류도 서로 다른데 그때 쓰는 말이 헷테론입니다.
그 아우로스는 똑같은 사과가 두개 있는데 이거 하나 다른 하나 할 때 그 다른 하나 숫자로 서로 다른 것을 말합니다. 헷테론이란 말은 종류가 다른 것입니다. 사과하고 오렌지가 서로 종류가 다르잖아요 그 때 다르다 이런 말도 있고 똑같은 사과가 두개 있는데 그 사과를 주세요 했는데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사과를 안주고 다른 사과를 줄 때 그것 말고 다른거 이렇게 말할 때는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고 어떤 숫자에 있어서 부과적인 것 그냥 다른 것 종류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아우로스란 말은 고대 헬라어에서는 종류의 다름을 가리키지 않고 그냥 이 유대교 중에 어떤 것 하나를 가리키는 쪽으로 많이 사용되었고 헷테론이란 말은 서로 종류가 다를 때 많이 사용됐습니다.
그러나 어떤 이 고대 문서에 보면 헷테론이란 말과 아우로스란 말이 서로 이렇게 큰 구분 없이 교호적으로 사용되는 것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헷테론이란 말과 아우로스란 이 두 말이 서로 다르다는 뜻을 표현하는데 있어서 서로 상호교환 가능한 단어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오늘 읽었던 이 갈라디아서 본문에 보면 다른 복음 그럴 때 한번은 헷테론 유황겔리온 이렇게 하고 또 한번은 아우로스 유황겔리온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니까 사도바울이 지금 성경에서 이 두 말을 쓸 때에는 다른 종류를 가르키기 위해서 사용했다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복음은 기가 전가해준 복음이 아닙니다. 자신이 한번이라도 준 적이 없는 복음입니다. 그것은 자신도 모르는 복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준 복음이 참된 복음인데 그것은 자기가 준 복음이 아닌 또 다른 종류의 복음인 것입니다. 그래서 은밀한 의미로서는 그것은 복음이 아니고 거짓말입니다.
어떻게 다르냐 그 다르다는 두 가지 차원에서 다릅니다. 첫 번째는 사도바울이 나의 복음이라 할 때 그 나의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은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 성경의 삼위일체의 하나님이 준 복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인가 하면 그 다른 복음은 하나님이 준 적이 없는 복음입니다. 그 기원이 다릅니다.
사도바울의 이 나의 복음은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누구이냐 이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아버지입니다. 이 성경의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이 나의 복음은 내가 전달해 준 것이긴 하지만 사도바울의 말에 의하면 그러나 그 복음은 원래 누구로부터 왔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아버지라 불렀던 그 하나님 성경의 하나님 바로 그 하나님이 주신 복음입니다. 그래서 기원은 하나님께서 나의 복음의 기원은 그러나 이 다른 복음은 그 기원이 다릅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기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열왕기상 12장 28절에 보면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하고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한참 걸리니까 황금으로 두 금송아지를 만들어가지고 오늘 본문에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 신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은 무잇말인가 하면 이들이 금송아지 두개를 만들어서 이 금송아지를 가지고 애굽에서 능력과 기적으로 그들을 건전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있는 신으로 믿었던 겁니다. 이것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뭐냐하면 유대교에서 들어온 거짓 신자들이 유대교의 율법에 따라 구원을 받는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그 유대교에 따른 율법의 의의 그것은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던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과 다르지 않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말인가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그 길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이 거룩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그 길이 다른 길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 한분께 가는 서로 다른 길 일뿐이다. 한쪽 길은 믿음으로 올라가는 길이고 한쪽 길은 행위로 올라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이쪽으로 올라가든 저쪽으로 올라가든 하나님께 올라가기는 매 일반인겁니다.
그러니까 복음을 주신 그 하나님이 곧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라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 것입니다. 그럴듯하지요. 율법을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복음을 주신 이가 누구입니까. 하나님입니다. 그러면서 복음을 주신 하나님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이 동일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킴으로써 의에 이른다는 그의 가르침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적극적으로 지금 논박할려고 하는 부분은 율법으로는 사람이 절대로 의롭게 되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사실이나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는 율법을 통해서 사람이 의롭게 되라고 해서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사람이 의롭게 되는 길이 이론적으로는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구원의 방편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율법이 구원의 방편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죄악 연약함 무능력 때문에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가 없고 따라서 사람이 율법으로 구원받지 못한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애초부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은 우리가 할 수 있으면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어 구원받으라고 주신 의도가 없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죄를 더욱 죄가 되게 하고 죄를 생각나게 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만드는 그 목적으로만 주신 것이지 한번이라도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실 때에 할 수 있는 사람은 율법을 통해 구원받으라고 하는 구원의 방편으로 율법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을 사도바울이 누누이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이 없고 또 아무도 율법을 지킬수도 없고 따라서 율법은 한번이라도 구원의 방편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 지난주에 제가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원받느냐. 오로지 은혜로서 믿음으로 예수라고 하는 이름 외에 또 다른 구원의 길을 우리에게 주신 적이 없는 줄 믿습니다. 절대로 없습니다. 다른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구원의 경륜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 다른 복음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그 길이 은혜로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사도바울의 나의 복음을 대신할 수 있다고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여전히 유효하다 이렇게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그것은 유효하지 않을뿐더러 한번이라도 우리에게 그것을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다른 복음의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속에 없는 복음입니다. 여러분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것 자체가 믿는 사람으로서 합당한 태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말하는 다른복음의 첫 번째 의미는 그 기원이 하나님께 있지 않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한번이라도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적이 없다는 점에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가르치는 그 다른 복음은 참된 복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가르치고 있다는 그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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