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역사와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를 바로 쓰기 위함이요,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 왜곡되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종교 다원주의, 혼합주의 물결 속에서 더욱 역사와 신학을 바르게 함이 시급하다.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박용규 엮음 / 총신대학교 출판부)을 읽기 전, 박형룡 박사를 더 알고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여러 저서들을 먼저 읽었다. <총신과 박형룡>, <죽산 박형룡>, <한상동과 그의 시대>, <고신의 인물과 신학 사상> 등을 참고적으로 읽었다.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책 이야기에 앞서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들어가고자 한다. 박형룡 박사는 1897년 음력 3월 28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였다.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이 창건되던 해로 광무 원년이었다. 한국교회사로 볼 때는 후일 그가 수학하고 관여하게 될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성경학교가 개교되던 해였고, 상호 신뢰와 교분이 두터웠던 주기철 목사가 출생한 해이기도 했단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그는 후일 벽동교회에서 최봉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1916년 신성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당시 기독교계의 최고 교육기관인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후 중국 남경에 있는 금능대학으로 유학, 영문과에 편입하였다. 이때가 26세였다. 이 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1923년 7월에 졸업, 소열도 선교사의 권유로 도미 유학의 길을 떠나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한다.
프린스턴신학교는 미국 북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 교육기관으로, 이 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박형룡 박사가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곳이 바로 프린스턴신학교였으나,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겠다. 그는 이미 마포삼열, 배위량 등 보수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고,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인물인 길선주 목사의 신앙적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8월에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이 발행하는 잡지인 <학지광>에 기독교를 공박하는 논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젊은 박형룡의 가슴속에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리라 결심하게 된다. 만 3년간 프린스턴에서 수학한 박형룡은 자신의 신앙적 이해를 보다 체계화한 학문적 이론으로 정립하게 된다.
프린스턴에서 그는 찰스 하지, 워필드, 월슨 등의 영향을 받지만 특히 메이첸(1881-1937)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첸은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동양의 학생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박형룡은 석사 학위를 끝내고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로 가서 1927년 9월부터 1928년 7월까지 9개월간 공부하고 귀국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변증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 귀국한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는 한편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의 장로교신학에서 교수하였고, 1930년부터는 장로교신학교의 정교수가 되어 한국인으로는 남궁혁, 이성휘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 교수가 된 것이다. 그는 명 설교가로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의 강사로 일하면서 평양신학교의 대변지인 <신학지남>의 기고자가 되어 필봉을 휘두른다.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라는 평판을 얻게 된 것은 1930년 캐나다 선교부의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대두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응, 그리고 김재준 목사와의 신학적 논쟁과 대결이 가져온 열매였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까지도 부정하려는 시대에 그는 복음적 정통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기독교 복음 진리의 변증 옹호에 온 힘을 다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을 부인하는 입장과 여권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때부터 박형룡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1947년 10월부터 1948년 4월까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죽산 박형룡은 서울에서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한다. 즉 1948년 6월에 박형룡을 임시 교장으로 서울 남산에서 장로교신학교를 개교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장신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9월 18일에는 대구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고, 그것은 지금의 총신대학이 되었다. 박형룡은 이 학교의 교수로, 교장으로 20여 년간 봉사하다가 1971년 2월에 은퇴한다. 교수와 행정직에서 은퇴한 그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자택에서 연구와 저작을 계속하다가 1978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30년 평양의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신학 교육을 시작한 후 48년 동안 교수로 봉사하였고, <교의신학> 전 7권을 비롯한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지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박형룡 박사의 삶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은 일평생을 기독교 복음 진리 옹호와 변증에 바친 박형룡 박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없었다는 인식하에 엮은 것으로, 보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글을 함께 모아서 박용규 교수가 하나로 엮었다. 이 책은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이 두 가지의 주제를 동시에 다루되 생애와 사상을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고 연계하여 다루었다.
그의 출생과 성장, 국내의 교육적 배경, 미국 유학 시절, 국내 활동 시기와 해방 이후 박형룡 박사가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 등. 이 모든 것은 그의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 하겠다. 본서의 필진들은 주로 합동측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합동 측 밖의 학계 지도자들의 평가도 실어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박형룡 박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도 개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은 죽산 박형룡의 신학에서 박형룡 박사가 말년에 남긴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전통', 그의 조직신학에서 선별한 '성경의 영감'과 '성경의 무오' 등 세 편의 논문이 실렸고, 2부의 '박형룡 박사의 생애', 3부는 '박형룡 박사의 사상', 4부는 '조직신학자가 본 박형룡 신학', 그리고 5부, '총신 밖에서 본 박형룡' 등 총 5부로 구성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글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 대륙의 칼뱅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라고 쓰고 있다.
2부, '박형룡 박사의 생애'에서 그의 아들 박아론은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신학'이란 글에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 사상의 특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성경 무오 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인 보수주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무오함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기초요, 본질적 요소이다."
그는 성경을 초자연적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연구하며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아온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가장 잘 대변하는 신학자였고, 또 그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념을 조성하는 데 그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신학자였다고 책은 강조한다.
2부에서는 특별히 박형룡 박사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비롯한 사적인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면면들을 다 아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해서 몇몇 인물들을 통해 조금씩 알 수 있는 정도다. 주로 그분 밑에서 공부했던 제자들을 통해 몇몇 에피소드를 알 수 있을 정도다. 김희보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대학 시절에 웅변에 뛰어났고, 그의 열변은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다고 전한다.
박형룡은 학생 시절에 벌써 전국 순회강연 연사로 뽑혀 순회하던 중 호남 지역인 목포에서 행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일경에 끌려가 일시 구금된 일도 있다고 한다. 소열도 선교사가 밝히는 박형룡은 또 어떤가. 그는 선천중학교에서 온 학생인 박형룡과 시골 교회들을 2, 3일간 둘러보면서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를 믿게 된 배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던 그의 모습을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다.
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빚이 끊이지 않는 가난한 집안이었다고 하다. 우연히 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에서 부흥 집회가 열렸고, 두 동생을 데리고 집회에 참석했던 박형룡은 '예수를 믿는 이들은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 주일 예배당에 참석했고,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과 참된 교제를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 노력으로 처음엔 남이 하는 더러운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귀 속에 낡은 천 조각을 틀어박고 다녔다. 또 하루에 스무 마디로 말을 제한해 보기도 하고 악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위해 단 한 걸음 앞만 보고 다니기도 하는 등 성결에 힘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진 빚도 갚고 더 깊은 산속 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엔 교회도, 예수 믿는 사람도 없었다. 박형룡은 부모 형제와 작별하고 100마일이나 걸어서 선천으로 갔다.
거기 가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천의 미션 학당에 나타난 박형룡은 입학을 신청했고 식비와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작업반에서 넣어 주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박형룡은 그의 고민을 한 목사님께 털어놓았는데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룡 군, 만유의 주께서 능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 안 되고 오직 나의 영으로만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네.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무익할 거네. 자네는 기도 가운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그가 자네 마음속에 역사하시도록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네. 오직 하나님만이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일세."
그 후 박형룡은 매일 기도문을 써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시간만 나면 암송했단다. 가장 적게는 100번, 많게는 1,000번, 이렇게 애쓰다 보니 그는 그의 생활 전체가 바뀌었노라고 했다. 새로운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들어와 그의 태도와 시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것이 소열도 선교사가 박형룡에게서 들은 이야기 내용이었다.
정규오 목사의 글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평소에는 과묵하나 강단에만 서면 언제나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설교를 했다고 추억한다. 박형룡 박사는 키가 평균 이하로 작다는 것도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세를 흩트리는 법이 없었고 농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항상 존대어를 썼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정문호 목사의 글로 박형룡 박사의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76년 5월 4~7일 목사 장로 기도회 때였다. 마침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7권이 완간되어서 광고 시간에 모 목사가 광고하기를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7권이 완간되었으니 여러분들도 모두 구입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책을 들고 소개했다. 광고가 끝나자마자 그 교회 당회장이 급히 강단으로 다가오더니 그 책들을 집어던지면서 "거룩한 성전에서 매매할 수 없소" 하며 소리쳤다. 그는 박형룡 박사 앞에 가서 책으로 삿대질을 하며 "당신이 이렇게 시켰소. 회개하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형룡 박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세요." 1978년 10월 25일, 이 세상을 하직하던 날, 그의 최후의 모습은 마치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요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3부, '조직신학자가 본 박형룡 박사의 사상'에서는 김의환, 정성구, 권성수, 박용규 등의 글이 실렸다. 이 글들은 그의 신학 사상에 대한 내용들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 사상은 아마도 <교의신학>전 7권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한국 신학 사상 처음으로 <교의신학>전 7권을 펴낸 신학적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교의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조직신학 또는 교의 신학은 석의 신학과 역사신학이 제공한 자료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신학 연구의 대 제목들 아래 논리적 순서로 배열한다. 조직신학은 엄밀히 말하자면 교회의 신조들에 표현된 교리들의 체계화한 변호이다."
박용규 교수는 박형룡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한국 신학자들의 박형룡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달리고 있는 것 같다. 박형룡 박사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전형적인 근본주의 카테고리 속에서 이해하고 그에게서 근본주의 특징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박형룡 박사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를 근본주의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거나 그런 방법은 그의 사상 중에서 어느 한 단면을 부각시켜 전체를 해석해 버리는 불공정한 매도라고 말한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을 근본주의요 동시에 칼뱅주의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와 글에서 칼뱅주의 혹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경건에만 국한시키려는 근본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칼뱅주의의 전 포괄적인 사상 체계에 자신을 투신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96년에 펴낸 책으로 박형룡 박사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 작업은 단 한 번밖에 없었고 그것도 그가 일생 동안 활동했던 총신과 합동 교단이 아닌 총신 밖에서 진행되어, 박형룡 박사의 일생과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게 된 것이라 한다. 한국 정통 신학을 대변하는 박형룡 박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초월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가 없는 한국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마포삼열, 곽안련, 이눌서, 구례인을 비롯해 구학파 정통에서 선교사들과 그들에 의해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정통 보수 신학을 그대로 한국교회에 계승해 주었다는 점에서, 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박사 밑에서 직접 신학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 당당히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지켜 주었다는 점에서, 거의 50년 동안 초지일관 신학 교육에만 헌신해 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 신학자로는 처음으로 방대한 조직신학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다.
일찍이 프린스턴 유학 시절에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박사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르쳐 본 동양 학생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생"이라고 평가 받았던 박형룡 박사의 삶은 한국교회를 말씀 위에 바로 세우고자 힘썼던 삶이었다. 이 책을 엮은 저자 박용규 교수는 "바른 평가 작업 없이 전체 한국교회는 물론 각 교단의 성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선입관과 단편적인 지식에 기초한 성급한 평가는 오히려 학문적 성숙을 저해한다고 말이다.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을 엮은 박용규 교수는 역사 신학자로서 현재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사연구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개혁주의와 성경의 권위>, <한국 장로교 사상사>(1992), <초대교회사>(1994), <근대교회사>(1995),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1996),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운동>(1998), <평양대부흥운동>(2000),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1994) 등 다수가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3993
역사로부터 배우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역사와 역사 속의 위대한 인물들을 연구하는 것은 오늘의 역사를 바로 쓰기 위함이요, 내일을 향한 발걸음이 왜곡되지 않고 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함이다. 종교 다원주의, 혼합주의 물결 속에서 더욱 역사와 신학을 바르게 함이 시급하다.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박용규 엮음 / 총신대학교 출판부)을 읽기 전, 박형룡 박사를 더 알고 접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여러 저서들을 먼저 읽었다. <총신과 박형룡>, <죽산 박형룡>, <한상동과 그의 시대>, <고신의 인물과 신학 사상> 등을 참고적으로 읽었다.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책 이야기에 앞서 박형룡의 생애와 사상을 짤막하게 언급하고 들어가고자 한다. 박형룡 박사는 1897년 음력 3월 28일 평안북도 벽동에서 출생하였다. 고종에 의해 대한제국이 창건되던 해로 광무 원년이었다. 한국교회사로 볼 때는 후일 그가 수학하고 관여하게 될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성경학교가 개교되던 해였고, 상호 신뢰와 교분이 두터웠던 주기철 목사가 출생한 해이기도 했단다.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김익두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 그는 후일 벽동교회에서 최봉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어렸을 때부터 총명했던 그는 1916년 신성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 당시 기독교계의 최고 교육기관인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그 후 중국 남경에 있는 금능대학으로 유학, 영문과에 편입하였다. 이때가 26세였다. 이 학교에서 2년간 수학한 후 1923년 7월에 졸업, 소열도 선교사의 권유로 도미 유학의 길을 떠나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한다.
프린스턴신학교는 미국 북 장로교의 대표적인 신학 교육기관으로, 이 신학교에서 신학사와 신학 석사학위를 받는다. 박형룡 박사가 신학적으로 결정적인 영향을 받은 곳이 바로 프린스턴신학교였으나, 이곳에 오기 전에 이미 결정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하겠다. 그는 이미 마포삼열, 배위량 등 보수주의적인 선교사들의 영향을 받았고, 당시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적 인물인 길선주 목사의 신앙적 지도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1923년 8월에 미국으로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널 때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한국인 학생들이 발행하는 잡지인 <학지광>에 기독교를 공박하는 논문을 읽다가 충격을 받았고, 그때부터 젊은 박형룡의 가슴속에는 기독교의 진리를 변증하고 옹호하는 데 일생을 바치리라 결심하게 된다. 만 3년간 프린스턴에서 수학한 박형룡은 자신의 신앙적 이해를 보다 체계화한 학문적 이론으로 정립하게 된다.
프린스턴에서 그는 찰스 하지, 워필드, 월슨 등의 영향을 받지만 특히 메이첸(1881-1937)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메이첸은 "내가 지금까지 가르친 동양의 학생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생이었다"고 말했다. 박형룡은 석사 학위를 끝내고 루이스빌에 있는 남침례신학교로 가서 1927년 9월부터 1928년 7월까지 9개월간 공부하고 귀국한다. 그는 이 학교에서 변증학을 전공하였다.
1928년 귀국한 그는 평양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사역하는 한편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의 장로교신학에서 교수하였고, 1930년부터는 장로교신학교의 정교수가 되어 한국인으로는 남궁혁, 이성휘에 이어 세 번째로 한국인 교수가 된 것이다. 그는 명 설교가로서 이름을 떨쳤을 뿐 아니라 교육자로서 숭실중학교, 숭실전문학교, 평양신학교의 강사로 일하면서 평양신학교의 대변지인 <신학지남>의 기고자가 되어 필봉을 휘두른다.
그가 한국의 대표적인 보수 신학자라는 평판을 얻게 된 것은 1930년 캐나다 선교부의 관할 지역을 중심으로 서서히 대두된 자유주의 신학에 대한 대응, 그리고 김재준 목사와의 신학적 논쟁과 대결이 가져온 열매였다고 한다. 자유주의 신학의 공격,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들까지도 부정하려는 시대에 그는 복음적 정통 신학을 지켜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기독교 복음 진리의 변증 옹호에 온 힘을 다했다.
1934년에 모였던 장로교 제23회 총회에서 모세의 창세기 저작설을 부인하는 입장과 여권 문제가 제기되었고, 이때부터 박형룡은 신학적 문제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1947년 10월부터 1948년 4월까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일했던 죽산 박형룡은 서울에서 새로운 신학교를 시작한다. 즉 1948년 6월에 박형룡을 임시 교장으로 서울 남산에서 장로교신학교를 개교하는데, 이것이 지금의 장신대학으로 발전하였다.
1951년 9월 18일에는 대구에서 총회 직영 신학교인 총회신학교를 개교하였고, 그것은 지금의 총신대학이 되었다. 박형룡은 이 학교의 교수로, 교장으로 20여 년간 봉사하다가 1971년 2월에 은퇴한다. 교수와 행정직에서 은퇴한 그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 위치한 자택에서 연구와 저작을 계속하다가 1978년 10월 25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1930년 평양의 장로교신학교 교수로 신학 교육을 시작한 후 48년 동안 교수로 봉사하였고, <교의신학> 전 7권을 비롯한 20여 권의 저작을 남겼다.
지인들의 시선으로 보는 박형룡 박사의 삶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은 일평생을 기독교 복음 진리 옹호와 변증에 바친 박형룡 박사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없었다는 인식하에 엮은 것으로, 보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글을 함께 모아서 박용규 교수가 하나로 엮었다. 이 책은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 이 두 가지의 주제를 동시에 다루되 생애와 사상을 독립적으로 다루지 않고 연계하여 다루었다.
그의 출생과 성장, 국내의 교육적 배경, 미국 유학 시절, 국내 활동 시기와 해방 이후 박형룡 박사가 활동했던 시대적 상황 등. 이 모든 것은 그의 신학과 사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라 하겠다. 본서의 필진들은 주로 합동측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들이지만, 좀 더 객관적으로 다루기 위해 합동 측 밖의 학계 지도자들의 평가도 실어 균형을 이루도록 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박형룡 박사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도 개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책은 죽산 박형룡의 신학에서 박형룡 박사가 말년에 남긴 '한국 장로교의 신학적 전통', 그의 조직신학에서 선별한 '성경의 영감'과 '성경의 무오' 등 세 편의 논문이 실렸고, 2부의 '박형룡 박사의 생애', 3부는 '박형룡 박사의 사상', 4부는 '조직신학자가 본 박형룡 신학', 그리고 5부, '총신 밖에서 본 박형룡' 등 총 5부로 구성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라는 글에서 "장로교회의 신학이란 구주 대륙의 칼뱅 개혁주의에 영미의 청교도 사상을 가미하여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신학이다. 한국 장로교회의 신학적 전통이란 이 웨스트민스터 표준에 구현된 영미 장로교회의 청교도 개혁주의 신학이 한국에 전래되고 성장한 과정"이라고 쓰고 있다.
2부, '박형룡 박사의 생애'에서 그의 아들 박아론은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신학'이란 글에서 박형룡 박사의 신학 사상의 특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즉, 성경 무오 사상에 입각하는 비타협적인 보수주의 신학이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계시의 말씀으로서의 성경의 무오함을 믿는 신앙이야말로 그의 신학의 기초요, 본질적 요소이다."
그는 성경을 초자연적 영감으로 기록된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연구하며 신앙과 생활의 법칙으로 삼아온 장로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가장 잘 대변하는 신학자였고, 또 그와 같은 한국 장로교회의 성경의 권위에 대한 신념을 조성하는 데 그 누구보다도 크게 공헌한 신학자였다고 책은 강조한다.
2부에서는 특별히 박형룡 박사가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비롯한 사적인 글을 남기지 않았기에 그의 면면들을 다 아는 데 한계가 있음을 지적한다. 해서 몇몇 인물들을 통해 조금씩 알 수 있는 정도다. 주로 그분 밑에서 공부했던 제자들을 통해 몇몇 에피소드를 알 수 있을 정도다. 김희보 목사는 박형룡 박사가 대학 시절에 웅변에 뛰어났고, 그의 열변은 많은 사람에게 감화를 주었다고 전한다.
박형룡은 학생 시절에 벌써 전국 순회강연 연사로 뽑혀 순회하던 중 호남 지역인 목포에서 행한 연설이 문제가 되어 일경에 끌려가 일시 구금된 일도 있다고 한다. 소열도 선교사가 밝히는 박형룡은 또 어떤가. 그는 선천중학교에서 온 학생인 박형룡과 시골 교회들을 2, 3일간 둘러보면서 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예수를 믿게 된 배경, 말씀대로 살려고 애썼던 그의 모습을 짤막한 이야기 속에서 알 수 있다.
세 아들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빚이 끊이지 않는 가난한 집안이었다고 하다. 우연히 산 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에서 부흥 집회가 열렸고, 두 동생을 데리고 집회에 참석했던 박형룡은 '예수를 믿는 이들은 영광의 문으로 들어가고 믿지 않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에 떨어진다'는 내용의 설교를 듣고 충격을 받았다. 그때부터 매 주일 예배당에 참석했고, 날이 가고 달이 가면서 그는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과 참된 교제를 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 노력으로 처음엔 남이 하는 더러운 이야기를 듣지 않으려고 귀 속에 낡은 천 조각을 틀어박고 다녔다. 또 하루에 스무 마디로 말을 제한해 보기도 하고 악은 듣지도 않고 말하지도 않기 위해 단 한 걸음 앞만 보고 다니기도 하는 등 성결에 힘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부친이 진 빚도 갚고 더 깊은 산속 마을로 이사를 갔는데, 거기엔 교회도, 예수 믿는 사람도 없었다. 박형룡은 부모 형제와 작별하고 100마일이나 걸어서 선천으로 갔다.
거기 가면 기독교 교리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는 기독교 계통의 중학교가 있다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선천의 미션 학당에 나타난 박형룡은 입학을 신청했고 식비와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작업반에서 넣어 주어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 박형룡은 그의 고민을 한 목사님께 털어놓았는데 목사님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룡 군, 만유의 주께서 능으로도 안 되고 힘으로 안 되고 오직 나의 영으로만 할 수 있다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네. 마음을 깨끗하게 하기 위한 모든 노력은 무익할 거네. 자네는 기도 가운데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그가 자네 마음속에 역사하시도록 간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네. 오직 하나님만이 성령의 권능으로 마음을 깨끗하고 순결하게 유지시킬 수 있기 때문일세."
그 후 박형룡은 매일 기도문을 써서 호주머니에 넣어 다니면서 시간만 나면 암송했단다. 가장 적게는 100번, 많게는 1,000번, 이렇게 애쓰다 보니 그는 그의 생활 전체가 바뀌었노라고 했다. 새로운 기쁨과 평화가 마음속에 들어와 그의 태도와 시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이것이 소열도 선교사가 박형룡에게서 들은 이야기 내용이었다.
정규오 목사의 글에서는 박형룡 박사가 평소에는 과묵하나 강단에만 서면 언제나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는 설교를 했다고 추억한다. 박형룡 박사는 키가 평균 이하로 작다는 것도 언급한다. 하지만 그는 결코 자세를 흩트리는 법이 없었고 농담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누구에게도 항상 존대어를 썼다는 것도 기록하고 있다.
다음은 정문호 목사의 글로 박형룡 박사의 신앙 인격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76년 5월 4~7일 목사 장로 기도회 때였다. 마침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7권이 완간되어서 광고 시간에 모 목사가 광고하기를 "박형룡 박사의 교의신학 7권이 완간되었으니 여러분들도 모두 구입하시기 바랍니다"하고 책을 들고 소개했다. 광고가 끝나자마자 그 교회 당회장이 급히 강단으로 다가오더니 그 책들을 집어던지면서 "거룩한 성전에서 매매할 수 없소" 하며 소리쳤다. 그는 박형룡 박사 앞에 가서 책으로 삿대질을 하며 "당신이 이렇게 시켰소. 회개하시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박형룡 박사는 어린아이와 같은 순진한 모습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다. "나는 죄인입니다. 용서하세요." 1978년 10월 25일, 이 세상을 하직하던 날, 그의 최후의 모습은 마치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요 예수님과 같이 거룩한 모습이었다고 전한다.
3부, '조직신학자가 본 박형룡 박사의 사상'에서는 김의환, 정성구, 권성수, 박용규 등의 글이 실렸다. 이 글들은 그의 신학 사상에 대한 내용들이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 사상은 아마도 <교의신학>전 7권에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박형룡은 한국 신학 사상 처음으로 <교의신학>전 7권을 펴낸 신학적 업적을 남긴 학자이다. 그는 자신의 저서 '교의 신학'을 이렇게 정의한다.
"조직신학 또는 교의 신학은 석의 신학과 역사신학이 제공한 자료들을 취하여 그것들을 신학 연구의 대 제목들 아래 논리적 순서로 배열한다. 조직신학은 엄밀히 말하자면 교회의 신조들에 표현된 교리들의 체계화한 변호이다."
박용규 교수는 박형룡 박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대 한국 신학자들의 박형룡에 대한 평가는 양극을 달리고 있는 것 같다. 박형룡 박사를 비판하는 학자들은 박형룡 박사를 전형적인 근본주의 카테고리 속에서 이해하고 그에게서 근본주의 특징들을 찾아내려고 노력하는 한편, 박형룡 박사를 변호하는 이들은 그를 근본주의로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지 않다거나 그런 방법은 그의 사상 중에서 어느 한 단면을 부각시켜 전체를 해석해 버리는 불공정한 매도라고 말한다."
"박형룡 박사의 신학적 입장을 근본주의요 동시에 칼뱅주의라고 단정할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여러 저서와 글에서 칼뱅주의 혹은 개혁주의라는 말을 쓰기를 좋아했을 뿐 아니라, 기독교 신앙을 개인적인 경건에만 국한시키려는 근본주의의 위험에 빠지지 않고 항상 칼뱅주의의 전 포괄적인 사상 체계에 자신을 투신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1996년에 펴낸 책으로 박형룡 박사에 대한 공식적인 평가 작업은 단 한 번밖에 없었고 그것도 그가 일생 동안 활동했던 총신과 합동 교단이 아닌 총신 밖에서 진행되어, 박형룡 박사의 일생과 사상을 담은 책을 펴내게 된 것이라 한다. 한국 정통 신학을 대변하는 박형룡 박사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신학적 입장과 교리를 초월해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그가 없는 한국 신학을 이야기할 수 없다 할 것이다.
저자의 표현대로 "마포삼열, 곽안련, 이눌서, 구례인을 비롯해 구학파 정통에서 선교사들과 그들에 의해 설립된 평양신학교의 정통 보수 신학을 그대로 한국교회에 계승해 주었다는 점에서, 구 프린스턴신학교에서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박사 밑에서 직접 신학 교육을 받았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도전 앞에서 당당히 한국교회의 보수주의를 지켜 주었다는 점에서, 거의 50년 동안 초지일관 신학 교육에만 헌신해 왔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국 신학자로는 처음으로 방대한 조직신학을 집대성했다는 점에서 박형룡 박사는 한국교회가 낳은 위대한 신학자라는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다.
일찍이 프린스턴 유학 시절에 보수주의 거장 메이첸 박사로부터 "지금까지 내가 가르쳐 본 동양 학생 가운데 가장 탁월한 학생"이라고 평가 받았던 박형룡 박사의 삶은 한국교회를 말씀 위에 바로 세우고자 힘썼던 삶이었다. 이 책을 엮은 저자 박용규 교수는 "바른 평가 작업 없이 전체 한국교회는 물론 각 교단의 성숙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선입관과 단편적인 지식에 기초한 성급한 평가는 오히려 학문적 성숙을 저해한다고 말이다.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을 엮은 박용규 교수는 역사 신학자로서 현재 총신대 신학대학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한국교회사연구소도 함께 운영하고 있다. 저서로는 <한국 개혁주의와 성경의 권위>, <한국 장로교 사상사>(1992), <초대교회사>(1994), <근대교회사>(1995), <죽산 박형룡 박사의 생애와 사상>(1996), <한국교회를 깨운 복음주의운동>(1998), <평양대부흥운동>(2000), <한국교회와 네비우스 선교 정책>(1994) 등 다수가 있다.
http://blog.daum.net/kkho1105/3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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