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개혁신앙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개혁신앙
박응규 (ACTS, 역사신학)
http://blog.daum.net/kkho1105/6527
여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야말로 미국 교회역사에 있어서 가장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종말론과 선교분야에 있어서도 그의 공헌과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그동안 역사신학자들에 의한 에드워즈 연구는 주로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과 연관되어 진행되어 왔으며, 그의 신학을 비롯한 사상사적인 면에 치우친 면이 다분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강조되어야 할 주제 중의 하나가 “선교사로서의 에드워즈”일 것이다.1) 비록 적은 수의 학자들을 통해서 주장되고 있지만,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를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에드워즈는 “현대선교의 할아버지”라고 불려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2) 왜냐하면, 그의 생애와 사역은 선교역사의 과도기 속에서 펼쳐졌으며, 신대륙(New England)에 이주한 청교도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상 끝까지 확장하시기를 원한다는 새로운 선교적 패러다임을 소유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선교의 총체적 측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지적이며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3) 특히 에드워즈는 1730년대와 40년대의 대 각성 운동을 주도하면서 인디안(Indians 혹은 Native Americans) 선교야말로 부흥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며, 선교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선교적 활동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범주 속에서 일어나며, 그의 시대 속에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역사적 배경
I-1. 청교도 사회의 인디안 선교
콜롬부스가 1492년에 신대륙을 탐험하고 스페인의 국왕에게 인디안에 대해서 보고한 이후 서양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인디안에 대해서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d;se;인ㅇ,f 식민지의 노예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공생의 관계로 볼 것인가, 혹은 적으로 볼 것인가 등은 끊임없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왔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디안 학살로 인하여 선교에 막대한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청교도들의 여러 헌장들 속에는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플리무쓰 헌장에서는 “백인사회와 기독교 종교에 절망하거나 곤란에 빠져 방황하면서 아직 처져있는 야만인들의 개종을 요구한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메사추세츠 베이 헌장에서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요, 인류의 구세주에게 대한 순종과 지식에로 야만인들을 끌어오도록 식민자들에게 요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만인들인 인디안들에게 기독교 종교를 보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던 스페인과는 달리, 청교도 사회에서는 1636년 인디안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도록 법률을 통과시켰다.4) 1642년 메사추세츠에서는 토마스 메이휴(Thomas Mayhew, Jr.)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디안들에게 개인전도가 시작되었고, 1642년에는 그들에게 공식적인 설교가 선포되었으며, 같은 해에 존 엘리어트(John Eliot)의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674년까지 메사추세츠와 플리무쓰에는 약 4,000명의 “기도하는 인디안들(Praying Indians)”이 살고 있었던 14개의 마을이 존재했었다.5)
엘리어트는 캠브릿지 출신으로 1631년에 보스톤에 도착했다. 엘리어트는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인디안 선교를 준비하였다.6) 1636년 식민사회와 인디안(피쿼트, Peqout 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생포된 인디안을 통해 엘리어트는 그들의 언어를 터득하면서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엘리어트가 품은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열정은 그로 하여금 1646년에 이르게 되면 그들의 언어로 설교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사건은 메사추세츠 목회자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의회가 매년 2명 씩 인디안 선교를 위해 배출할 것을 법률로 통과시키게 된다.7) 그러나 엘리어트가 인디안 선교에 미친 공헌은 인디안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인디안 언어는 발음이 곤란하고 유사한 언어가 없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게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엘리어트에 의해 번역된 인디안 성경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1661년에 인디안 성경이 출간되었고,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논문까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상황으로 인해 인디안 사회와 백인 정착촌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았다. 특히 킹 필립 전쟁(1675-76)을 통해 수많은 인디안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인디안 선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고 거의 원점에 이르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음으로 인디안 선교에 관련된 것은 1734년이었다. 그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은 메사추세츠의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인디안들(Housatonic Indians)에 관한 문제로 존 스토다드(John Stoddard)의 노쓰햄프톤 집에서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 "스톡브리지 선교(The Stockbridge Mission)"가 시작되었다.8) 그리고 에드워즈의 신학교육을 받고 예일대학교에서 강사를 지낸 존 서전트(John Sergeant)가 최초의 선교사로 스톡브리지의 모히간 족들에게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선교적 열매는 미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어트를 비롯한 적지 않은 청교도 사회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개혁신앙에 근거한 선교적 의미가 그들의 선교사역을 통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9) 바로 이러한 인디안 선교사역이 1749년부터 1758년까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계승되었다.
I-2.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빗 브레이너드, 그리고 인디안 선교
에드워즈에게 인디안 선교의 중요성을 보다 확고하게 일깨워준 인물은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였다.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헌신으로 불탔던 청년이었다. 그는 1739년 21세의 나이로 예일대학에 입학하였다. 곧 이어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예일 대학을 방문했던 휫필드, 테넌트, 데븐포트 등의 설교를 통하여 그의 열정은 더욱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학생시절에 몸이 상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학급의 지도자가 되지만, 1741년 졸업설교를 하기 위해 온 에드워즈는 총장 토마스 클랩의 기대와는 달리 뉴 라이트(New Light)를 두둔하는 설교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여파가 브레이너드에게까지 번지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는 총장을 모욕했으며 금지된 뉴 라이트 모임에 참석했다는 구설수에 올라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예일대학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일부 목사들의 강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영향력 있는 예일 동문으로 에드워즈를 비롯한 뉴 라이트에 속한 조나단 딕킨슨(Jonathan Dickinson)과 아론 비어(Aaron Burr)가 브레이너드를 복학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올드 라이트(Old Light)의 클랩 총장은 결코 그러한 시도에 요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브레이너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었고, 1742년 학위는 받지 못했지만, 회중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브레이너드는 같은 해 딕킨슨과 버어의 주선으로 1743년 스코틀랜드 선교회로부터 인디안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와 서스퀴하나 강변에서 인디안 선교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 결과는 고생에 비해 너무 미약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745년 뉴저지 트랜튼 남쪽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안 부족들 가운데 놀라운 각성운동이 일어나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1746년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몸은 약화되었다. 학생시절부터 홍역과 폐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인디안 선교사역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고 수차례의 장거리 이동과 여행은 그의 생명을 더욱 단축시켰다. 그래서 1747년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고,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며 고향 뉴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 그 해 5월에 노스햄프톤에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 당도하였다.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만난 에드워즈는 그가 평소 추구하던 신앙의 열정을 소유한 참 성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를 맞이한 에드워즈는 불과 몇 주 전에 그의 부인 사라가 여덟 번째 딸을 출산한 상태였고, 계속되는 프랑스-인디안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의 집은 군인들의 숙사로도 제공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또한 어려움을 당하거나 목회수업을 받기 위해 적지 않은 방문객이 에드워즈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러한 가운데도 사라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헌신적으로 대하였다. 이러한 분주한 가운데 당시 17세의 제루샤(Jerusha)가 브레이너드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제루샤는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 못지않게 영성이 뛰어난 여인이었으며, 인디안 선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희생한 브레이너드의 신앙에 감화되어 극진히 그를 돌보았다.10)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브레이너드는 1747년 가을 10월에, 서른이 채 되지도 못한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4개월 후에는 제루샤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에드워즈의 슬픔은 더해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이 개인적인 슬픔을 영적인 교훈을 얻는 기회로 삼음으로 위로를 얻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 속에서 진정한 신앙의 살아있는 실례를 발견하였는데, 분명한 회심의 경험과 거룩함으로의 확연한 성숙, 그리고 열광주의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지울 수 없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그가 준비하던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려는 논문,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를 보류하는 대신에,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소재로 하여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An Account of the Life of David Brainerd)」를 편집 출판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11) 이 전기에 소개된 브레이너드의 삶은 에드워즈가 추구했던 신앙의 열정을 잘 반영한 인물로서 경건과 영성이 지성을 앞서는 고귀한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브레이너드의 선교사역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영적 삶을 드러내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브레이너드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야말로 진정한 사역자의 귀감이 될 만한 모범이었으며, 임종 직전에 그가 고통 중에도 인디안 선교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한 것이야말로 에드워즈의 마음에 크나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12)
브레이너드의 고귀한 성품과 육체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순종과 사명감은 에드워즈를 비롯한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사망 이후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를 생전에 허가를 받아 1749년에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선교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일종의 안내책자가 되었고, 에드워즈의 저서 중에서, 그리고 미국의 독립 전에 출간된 책 중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폐간된 적이 없을 만큼 횟수를 거듭하여 출판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한 브레이너드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선교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귀한 내적 삶을 반영하는 선교사들의 필수적인 명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선교사가 타문화와 민족과의 효과적인 전도와 선교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극소수의 서적 중의 하나였다.13)
이 책은 윌리암 캐리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청교도 선교뿐만 아니라 현대선교에 있어서 기초를 마련해 놓았다는 점에서도 매우 높이 평가받을만하다.14)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가 직접적으로 현대선교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 선교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그는 선교사들 개개인의 소명과 헌신과 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선교의 발전과정에 있어서도 초석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브레이너드는 인디안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아무도 없는 정글 속으로 32km를 빈번히 오가기도 했으며, 선교사역을 하는 중에 롱아일랜드의 가장 살기 좋은 이스트 햄프톤에서 목회해 달라는 청빙도 거절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통해 인디안 선교에 대한 열정을 얻게 되었고 실제적인 인디안 선교에 접하게 된다. 브레이너드의 짧은 선교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인디안 선교의 열매를 통해서 에드워즈는 사탄의 권세 하에 놓였던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완성을 향한 징표가 아닐 수 없었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인디안들의 마음속에 조성되는 “놀라운 성향”은 에드워즈가 「신앙의 열정(Religious Affections)」에서 강조하는 인간이해의 중심 사상이었다.
마치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의 생애」가 초기 수도원 운동을 촉진시켰듯이, 에드워즈가 집필한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현대 선교운동을 활화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브레이너드의 모범적인 거룩한 삶과 선교의 헌신은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합주회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을 뉴 라이트를 대변하는 영성으로 소개함으로써 부흥운동이 지속되기를 소망하였으며, 이와 같은 영성운동은 19세기 이후 일어나는 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의 초석을 놓기도 하였다.15) 또한 브레이너드의 예일대학 퇴학 사건은 프린스톤 대학의 설립동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삶과 전기가 후대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선교활동은 매우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에드워즈는 평소 인디안 선교에 큰 관심을 두면서 본격적인 선교의 기회가 오기를 소망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선교의 열정이 브레이너드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브레이너드의 전기를 통한 영향력과 더불어 심한 병중에도 그가 보스톤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1747년에 인디안 선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뉴잉글랜드에 설립된 최초의 선교기관이었다.16) 에드워즈도 후에 인디안 선교사가 되었으며, 브레이너드의 삶과 사역은 수많은 후대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에게 선교에의 열정과 의미를 불어넣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브레이너드와 에드워즈의 선교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기독교(Christendom)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영적 각성과 부흥의 결과가 가장 소외되었던 인디안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는 안목과 계기를 제공 하였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과 사역을 선구적인 선교사의 모범으로 제시함으로 선교의 지평을 비 서구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17)
I-3.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인디안 정착촌 “스톡부리지 (Stockbridge)”이다. 메사추세츠에 살던 인디안들 중의 한 부족이었던 하우서토닉 (Housatonic)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사역은 존 서전트에 의해서 1734년부터 174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인디안 선교를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게 되었고, 이곳에서 인디안 스스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자선학교가 설립되고, 인디안들의 전통주택인 가죽으로 만든 원통형 가옥에서 영국형 가옥을 보급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역이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스톡부리지에서의 인디안 선교는 한 때 활발했다가 힘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던 모히칸(Mohican) 인디안들과 아직도 건재한 모혹(Mohawk) 인디안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기숙학교(Boarding school) 형태로 영국식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인디안 부족들을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포섭해야하는 현실은 선교를 더욱 꼬이게 하는 요인이었다. 프랑스와 손을 잡은 인디안들은 언제든지 기습하여 공격을 감행할지 모르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영국과 동맹관계인 인디안들은 군사력 동원에 대한 대가지불이 지연되는 것과 불공정한 상거래로 인한 착취로 인해 몹시도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18)
에드워즈의 순수한 복음의 동기가 위협을 받은 것은 비단 당시의 정치 군사적인 상황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솔로몬 스토다드를 이어 교계의 실력자로 부상한 그의 외삼촌 윌리암 윌리암스를 비롯한 윌리암스 가(家) 사람들과의 대립관계였다. 윌리암스 가도 일찍이 인디안 선교에 복음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에드워즈의 선교관과 확연히 달랐던 것은 그들의 선교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하기보다 선교를 동시에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기회로도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톡부리지의 선교명분을 누가 메사추세츠 정부로부터 인정받느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선교사역과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벌어진 전쟁은 또 다른 복합적인 요소로 작용해 인디안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만 생각되었던 선교에 정치적 경제적 이권이 개입되는 예측하지 못한 양상이 되었다.
당시 행해지고 있었던 인디안 선교는 다분히 영국의 식민지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인디안과의 교류는 식민지 확장과 밀접한 정치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자체가 복음을 확장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의 선교사역도 이러한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민족이란 단위를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이란 잣대로 사람을 차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디안 문화가 상당히 미신적이고 성경과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었지만, 에드워즈는 백인이라고 해서 나은 것은 결코 없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백인들이 많은 복음의 기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인디안보다도 더 못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왔으며, 그러므로 동일한 타락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디안들에게 설교하기를, “우리가 당신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다는 것뿐입니다. 이제 그 빛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합니다.”19)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로 이주했을 때에는 학교사업이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에 온 그는 학교운영이 주요한 사역이 아님을 밝혔고, 학교 이상의 목회를 하는 것을 원하였다. 왜냐하면 인디안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구령열정은 분명히 그 시대의 것을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안들을 목회하는 에드워즈의 사역을 통해 많은 인디안들이 불신의 늪에서 광명의 빛으로 인도되었고, 천국의 부분적인 모습들이 반영될 만큼 만족할만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목회사역에 열중하면서도 에드워즈는 결코 학교를 통한 사역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1751년 스톡부리지에 처음으로 왔을 때 모히칸 족들이 학교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출석하고 있었던 것을 목격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스톡부리지의 잠재적인 성공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목회사역에 중점을 두면서도 학교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감으로 인디안 선교를 위한 새로운 연결고리로 활용하였다.20)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에 부임하기 전부터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는 목회와 신학의 유산만을 손자 에드워즈에게 남긴 것이 아니라, 선교적 유산도 함께 남겼다. 스토다드는 필립 왕의 전쟁으로 인하여 인디안 선교가 심각하게 타격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코튼 마더(Cotton Mather)와 벤자민 콜맨(Benjamin Coleman)과 함께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스톡부리지 선교는 노스햄프톤에서 시작되었으며, 에드워즈의 삼촌 존 스토다드(John Stoddard)와 그의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스톡부리지가 위치한 메사추세츠 서부 지역에서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스토다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휴사토닉(Housatonic) 인디안들이야말로 선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임을 알려주었고, 스톡부리지에서의 인디안 선교를 위한 결정적인 모임도 1734년에 회집되었다. 공교롭게도 1734년은 에드워즈가 그의 목회를 통해서 노스햄프톤에서 최초의 각성운동을 목격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스톡부리지 선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그의 목회가 전개되었다. 그 후, 1751년 노스햄프톤 목회를 마감하고 스톡부리지로 선교사역을 위해 부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21)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디안 선교야말로 마지막 시대를 예비하는 선구적이고 준비적 단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22) 에드워즈는 노스햄프톤에서 목회하면서 이미 인디안 선교학교를 후원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인디안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방법들은 사용하지만 결코 설교나 전도의 내용에서는 축약하거나 생략하지 않고 본질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선포하였다. 에드워즈가 인디안 선교를 약 7년간 행하면서 200개 이상의 새로운 설교를 선포했고 그 중에 약 20개 정도만 이전에 설교했던 내용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선교대상자들에게 적합한 말씀을 새롭게 준비하여 그가 백인 성도들에게 강조했던 신학적 내용들을 거의 총망라하여 전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에드워즈를 “선교사 목사(missionary pastor)”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항간에서는 에드워즈가 평소 집필하기로 계획했던 저술 작업을 위해 스톡브리지로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견해는 결코 설득력이 없다. 에드워즈는 목회를 사임할 당시 신대륙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알려진 상태였으므로 국내외적으로 사역의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안 선교로 떠나는 것은 평소 자신이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브레이너드를 만났을 때,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기 위하여 집필하고 있었던 「의지의 자유」 출판을 미루고,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저술했다는 것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는 기독교 복음을 접하지 못했던 민족들에게 선교함으로 지상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킴으로 결국 천년왕국이 임하게 된다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인디안 선교를 하면서 그가 평소 생각해 왔던 신학주제들을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도 사실이다. 영국과 신대륙 간의 치열한 식민전투, 인디안들을 핍박하고 홀대하는 백인들에 대한 환멸 등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이 속한 입장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안목에서 목회-선교사역과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 현재의 에드워즈 조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비록 자신은 인디안 부족어를 배우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온 가족이 인디안들 속에 함께 거주하면서 자녀들은 영어보다 인디안 말에 더 익숙한 형편이 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우리는 결코 여러분보다 낫지 않습니다”라는 자세로 일관하였다.23) 그리고 그의 아들 조나단이 인디안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에드워즈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목회자, 사상가, 교육자라는 칭호와 함께 “선교사”라는 명칭을 추가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다.
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신학적 특성
I-1. 개혁신앙(Reformed Faith)과 선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Calvinism) 혹은 개혁신앙(Reformed faith)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신학과 선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는 본고의 논리전개상 매우 중요하다. 흔히 종교 개혁자들은 선교적 개념이나 활동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교회관 속에 선교적 차원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앞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선교에 대한 그들의 신학과 자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윌리암 케리가 소유했던 세계관과 비전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24)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의 선교관도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입장에 의해 형성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이곳 저곳에서 진행되었던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맺어졌던 아우구스부르그 평화협정(The Peace of Augsburg, 1555)은 각 나라의 신민들이 군주의 종교를 추종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당시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로마 캐톨릭 교회의 소유였기 때문에 해외 선교를 시도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되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이나 삶 속에는 분명히 선교적 차원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칼빈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최초로 요약한 1535년도 판 올레비탄(Olivetan) 성경의 신약서문을 통해서 그의 선교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기 위해, 칼빈은 성경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많은 성경근거들을 소개하면서, 죄인인 인간이 은혜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구원론적 강조가 이어진다. 즉, 창조와 구속 사이에 발견되는 교리적 체계들을 요약적으로 진술함으로 칼빈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26)
또한 칼빈의 교회론이나 그가 브라질 원주민의 선교를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한 노력들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신학 속에는 분명히 선교적 차원이 내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27) 칼빈의 선교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지만, 칼하운(David B. Calhoun)은 칼빈이 왜 좀 더 강하게 “해외(foreign)” 선교를 도모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그의 신학 속에는 선교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열방들을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두려고 노력하며 그의 왕국을 온 땅에 확산시켜 나가게 하는 “내적인 역동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바로 그의 신학 속에 선교적 차원을 강하게 기능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28)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온 지구상으로 확장되는 것을 선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활동하던 제네바가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무대였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건주의가 현대 선교운동에 미친 영향과 함께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계승한 청교도들이 선교에 끼친 지대한 공헌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모라비안 선교와 독일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윌리암 캐리가 현대선교의 장을 연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비버(R. Pierce Beaver)는 뉴 잉글랜드 청교도들이야말로 현대선교 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장본인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9) 이러한 선교적 영향이 메이휴 가(the Mayhews)와 존 엘리오트,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등을 통하여 신대륙의 청교도 사회뿐만 아니라, 유럽의 교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들의 선교적 노력은 “미국교회로 하여금 영구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교회가 세계선교 비전을 품게 하였다.”30)
특히 칼빈의 신학은 선교에 종말론적 체계를 제공함으로, 현대 개신교회의 선교동기와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체니(Charles Chaney)에 의하면, 칼빈은 오순절과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시대를 세 주요한 시기로 구분하여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그 첫 기간은 사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된 시기이고, 둘째 기간은 적그리스도의 시기와 개혁자들에 의해 교회가 회복되는 시기이며, 셋째 기간은 교회의 위대한 번영의 시기라고 언급한다.31) 칼빈은 그의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그림자가 걷혀지고 교리와 예배를 개혁함으로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에게 교회는 곧 위대한 번영과 성장의 시기를 경험할 것이라는 역동적인 감각이 내재될 수 있었다.32)
그러나 영국에서의 좌절과 실망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신대륙을 향한 종말론적 이주를 시도하게 하였다. 그들의 이주 동기는 다분히 “광야로의 심부름(an errand into the wilderness)”을 연상케 한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이주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신 구속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첩경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인디안들을 선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청교도들의 이주는 종말론적 비전을 지닌 선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으며, 대 각성운동을 경험하면서 청교도 선교운동은 강력한 역동성을 지니게 되었다.33) 이런 면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성향을 지닌 선교관이 마더(Cotton Mather)와 에드워즈에 영향을 미쳐 후대의 선교운동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34)
I-2. 에드워즈의 개혁신앙과 선교지향성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사랑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선교적 사역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주요한 길이며, 인간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구속 역사의 주된 내용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역사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교에 적용시켜 선교적 열정을 도모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도록 동인을 제공하였다. 에드워즈는 교회의 영적 각성 및 부흥은 선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였고, 가장 위대한 영적 각성의 가시적인 표시는 사랑의 분출과 세상을 향한 선교적 헌신으로 드러남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구조 속에서 각성과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완성하는 준비 단계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선교운동이라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노스햄프톤에서의 목회사역이 유감스럽게 끝이 나고 스톡브리지 인디안 촌으로 이주하여 선교사역에 임하게 되지만, 그는 결코 인디안 선교를 그의 생애 후기에 빚어진 사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35) 그 이전에도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역 속에는 이미 인디안들을 품은 선교적 차원이 내재되어 있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사회가 인디안들을 야만적으로 대하고,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무자비하게 강탈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있으며, 더구나 교회에 의한 선교적 노력이 매우 미흡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36)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당시 그릇된 식민지 정책에 대한 일종의 속죄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는 누구보다도 인디안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그의 마지막 탈출구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개혁신앙의 특징 중의 하나인 예정론이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데이빗 보쉬에 의하면, 존 엘리어트나 에드워즈 같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디안들의 회심을 통해서 확장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가 오히려 선교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자세 속에서 그들은 선교야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후에는 구속론적인 관심이 보다 강한 선교의 동기로 작용하였지만, 칼빈주의적 신학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요인들이 주요한 선교의 기반이었다.37)
찰스 체니는 에드워즈 선교신학의 주요한 특성들을 대략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8) 이러한 신학적 특성들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의 동기와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19세기 이전까지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선교를 이해하고 시행하였으며, 여기에 멸망해가는 이방민족의 처참한 형편과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요한 선교동기로 작용하였다.39) 그런 면에서 미국의 대각성운동은 선교의 동기 측면에서 청교도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경건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대각성운동은 선교의 주된 요인으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에서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가 보다 강조되는 역사적 계기였다.40)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선교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I-2-1. 에드워즈의 선교동기와 열정
브레이너드와 함께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은 선교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영어권 기독교 세계에서 보다 개신교적 특성(the Protestant consciousness)이 확연해지는 선교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 이전의 선교운동은 다분히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 건설과 맞물려 일어난 경우가 많았고, 미개한 민족을 개화시키고 회심시킴으로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은 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야 구원을 얻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신학의 토대 위에 선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방인(heathenism)”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종교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선교란 단순히 형식적인 신앙고백이나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되는 차원을 벗어나 “참된 기독교”를 선포하는 것이었다.41)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와 브레이너즈는 영적 각성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복음주의적 회심의 개념을 토대로, 죄에 대한 심각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 체험에 대한 간증들이 보다 확고하게 선교에 적용되도록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회가 지녔던 “문화주의적(culturist)” 선교적 차원을 복음의 본질을 앞세우는 개념으로 전환시켜 인종이나 문화 그리고 국가 간의 차이와 편견을 넘어서, 죄와 은혜라는 상반되는 테두리 속에 놓여 있는 인류의 상태를 직시하게 하였다. 즉, 서구 기독교인들이 소유했던 이방인의 개념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차원에서 인식시켰다. 중생과 개화나 문명화를 동일시하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다.42)
에드워즈의 선교동기의 중심에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또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칼빈주의적 인간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인디안 선교를 시작하면서 1751년 8월에 선포한 최초의 설교는 창세기 1: 27에 근거한 타락 전후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우리의 첫 부모(our first Parents)”는 순종치 아니함으로 타락함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는 죄악의 늪에 빠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초기부터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역사에 관한 일련의 설교들을 통해서, 마치 그의 유명한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잡힌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를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의 상황에 대해 묘사하였다.43)
타락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필요성(necessity)”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두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the equal need of all humans for grace)”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44)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사역과 그 기간에 저술된 「인간의 원죄(Original Sin)」의 내용 속에도 반영되어 있다. 원죄의 영향으로 인간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누구나 다 구원받아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즉, 에드워즈의 원죄에 대한 강조는 인디안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차등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확신을 불어 넣어주었다. 분명히 에드워즈는 인디안들을 대하여 이방인이요 열등한 민족이라고 경시했던 당시의 서구인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견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디안들에게 행한 에드워즈의 설교의 강조는 인간의 죄성에서 구속의 역사로 전이되면서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죄와 악,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해 줄 “피난처(shelter)”가 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들은 인종이나 민족, 신분의 고하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된다고 선포하였다.45)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절대적 필요성이 에드워즈의 전도와 선교의 절실함으로 연결된다. 중생하지 아니한 인간은 다 누구나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영적 동등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확고한 견해는 상당히 심오한 선교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칼빈주의적 인간론을 토대로 한 선교관은 선진문명을 전해주는 차원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아닌,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하는 선교를 지향할 수 있는 교리적 준거를 제시한 셈이다.
I-2-2. 에드워즈의 시대인식
에드워즈의 시대인식은 그가 1739년 3월부터 8월까지 노스햄프톤 교회 성도들에게 외친 39개의 설교들로 구성된 「구속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라는 그의 사후에 출판된 저서 속에 잘 설명되어있다. 에드워즈의 시대구분은 첫째로 타락부터 그리스도의 도성인신까지의 시대(Fall to Incarnation), 둘째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까지의 시대(Incarnation to Resurrection), 그리고 셋째로 부활 이후부터 세상의 종말까지의 시대(Resurrection to the End of the World)로 이루어져 있다.46) 그의 기본적인 역사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근본적인 성격을 변화시켰으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 이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나 소위 세속역사는 그러한 적용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인식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역사의 목적은 바로 구원이며 그것은 바로 회심과 함께 시작하며 선교를 통해 증진되어 간다.47) 즉 구속사적인 안목과 선교사관적인 관점이 에드워즈의 역사관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부흥을 촉진하고, 부흥은 선교를 초래하면서 구속역사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에드워즈는 “교회는 선교적 교회여야한다”라는 명제를 미국 교회에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는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선교에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독려함으로 그리스도의 전도대사명을 대중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상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러한 우주적 소명과 비전을 불러일으킴으로 훗날 19세기가 위대한 선교의 세기가 되고 미국이 선교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 「비상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의견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증진하기 위한 겸허한 시도(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에드워즈가 소유했던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완성을 향하여 점진하고 있다는 낙관적 견해와 부흥에 대한 열망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기도합주회 운동과 부흥설교는 선교지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이렇게 진작된 선교는 결국 천년왕국이라는 단계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당대에 일어났던 영적각성운동도 결국은 만방에 복음이 전해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선교적 소망”의 차원에서 이해했던 것이다.48)
에드워즈의 출판되지 않은 글들(Miscellanies) 속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라는 “구속역사의 진보”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시대는 마지막 완성의 단계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준비적 단계로 보았다.49) 이러한 사실은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적 견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현대 선교운동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재림 전에 지구 곳곳에 확장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네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첫 시대는 사도들의 활동 시기이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종식되었고, 그 둘째 시대는 콘스탄틴 대제의 회심과 함께 기독교가 박해를 승리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으며, 그 셋째 시대는 적그리스도의 멸망이고, 그 마지막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세 번째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며,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제압되었고 그러한 절정을 그의 시대에 경험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적그리스도가 패배함으로 교회는 세계 열방의 이방 족속들이 모여드는 것을 목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부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시대임을 알리는 “종말론적 증거들”이라고 믿고 있었다.50)
그런데 에드워즈의 구속사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천년왕국은 기독교인의 복음사역과 교육, 그리고 선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천년왕국 사상을 통하여 당시 일어나고 있던 부흥과 선교를 접목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선교적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천년왕국 사상과 함께 회심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타올랐던 부흥과 선교의 열정은 더 이상 신대륙이나 미국만의 기독교가 아닌 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선교적 지경을 확대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이렇게 천년왕국 사상에 의한 새로운 시대적 인식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를 구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선교운동이 확산되었다.51)
이러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부여된 선교 동기는 청교도들로 하여금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후에 미국교회가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2) 또한 청교도들의 인디안 선교야말로 후대 선교운동의 귀한 모델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비버에 의하면, 신대륙에서 일어난 선교운동의 주요한 선교적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디안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동기는 그 후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을 경험한 이후의 시기(1776-1800)에 이르게 되면, 미국 교회는 어느 때보다도 천년왕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가득하게 된다. “천년왕국 사상으로 취했다”라고 표현될 만큼, 전천년설 혹은 후천년설을 선호하는 경향이 공존하였지만, 결국은 남북전쟁 이전까지는 보다 낙관적인 천년왕국 사상이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53) 그런 면에서, 제임스 드 종(James A. de Jong)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천년왕국 대망,” 특히 후천년설적 기대야말로 17-18세기의 영미 선교운동을 활성화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54) 결국은 종말론적 동기가 미국을 비롯한 현대 선교운동이 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방향성을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I-2-3.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역과 인간의 전적인 헌신
이미 전술한 에드워즈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시대는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런데 이 시대도 대략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이교도적 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그 이후부터 적그리스도의 멸망까지의 시기로 나누어서 이해했다. 자신의 시대에 바로 적그리스도의 멸망과 지상의 사탄왕국이 궤멸되면, 바로 천년왕국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았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이야말로 교회의 부흥과 선교, 그리고 기도합주회 운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 땅에 임한다고 믿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하는 데에 매우 필수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교회가 적극적으로 선교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협력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우며 의미 있는 일임을 강조하였다.55)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역동성을 제공한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켜 선교와 부흥을 도모할 수 있는지에 집중되었다. 에드워즈와 그의 신학적 후예들(the New Divinity)은 구원과 은혜의 수단으로서 “선교적 확장”에 대하여 긍정적인 인식을 하였다. 하나님의 신적 목적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구원의 목적과 수단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이해하였다.56)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신봉하면서도 결코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속사역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이며, 복음 선포라는 선교적 과제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인 것이다. 그는 선교적 확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설교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신적 방법이며, 또한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하며, 그리고 천년왕국이 임하게 하는 거룩한 수단이라고 확신하였다.57)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도 에드워즈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도구적 성격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믿음의 도구적 성격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크게 의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그것을 적용시키는 도구적 원인은 우리의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콘라드 체리(Conrad Cherry)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명백하게 전가의 교리를 고수하고자 했지만, “개혁주의적 전통이 인간의 믿음의 행위를 칭의에 포함시키려고 시도한 태도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8)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믿음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매우 필요하다. 그는 고린도전서 1:29-31을 근거한 “인간의 의존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ence)”이라는 설교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고, 우리의 선이 오직 하나님만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며, 선 자체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내용이다. 믿음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체감(sensibleness)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였다.59) 이 설교 안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찾을 수 있고, 구속사적 역사관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기독론의 역동성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역할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혜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전적으로 참여하라는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役事)하심이 우리의 선교적 노력을 도구로 하여 역사(歷史)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이루어간다고 간주할 수 있다.
I-2-4. 에드워즈의 새로운 선교 이미지
에드워즈에게 선교는 구속역사를 움직이는 주된 동인이었다. 믿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며, 악에 대하여 선이 이기도록 격려하고, 택한 성도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교의 목적이야말로 초기부터 에드워즈의 주요한 관심사였다.60) 이러한 목적을 완수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선교에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며,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부흥운동이 선교운동을 촉진시키고 동력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각성운동은 무엇보다도 선교의 긴박성을 제공하고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소망의 계기로 인식되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특수하게 임한 시기이며,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선교야말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과정에서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이며 우선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였다.61)
선교사역의 결과는 구속사역의 진보로 나타나며, 선교사(missionary)는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62)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선교와 부흥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였다. 영적인 각성 혹은 부흥 운동은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고, 부르심의 소명에 합당하게 임하게 하며, 그리고 죄인을 회심시키는 것들은 마지막 세대의 특징들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려는 의도와 그것을 드러내 보이시는 임재를 인식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 올 것을 간절하게 선포하였다.
I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의 영향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청교도 사회와 인디안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신앙적 동기에서 선교를 시행했어도 청교도 백인사회와 그 땅에 먼저 살고 있었던 인디안들의 입장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고 갈등과 전쟁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디안 선교를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세우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약 절반가량의 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안들은 신대륙에 정착한 백인사회의 안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3)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 사회는 인디안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진정한 인간”으로 간주했으며, 복음에 반응하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마음을 소유했다고 확신하였다. 비록 인디안들이 문명의 혜택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하고, 악한 영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만, 복음이 전해지면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고 야만적 상태에서도 벗어나 문명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인디안들도 고유한 인간성과 영혼, 그리고 마음의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청교도들의 확신은 그 후에도, 인종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미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인디안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는 문명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저주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성장은 인디안들에게 영국의 문명에 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복음을 통해 인종을 초월하여 백인 기독교인과 인디안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는 경험도 하면서 이러한 이중적 선교과제는 초기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시행되었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인디안을 선교하는데 교리적 설교와 문답교육을 매우 중시하면서 다양한 선교방법들을 적용하였다. 특히, 교육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는 청교도들은 회심을 단지 고백의 차원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 회심의 증거를 삼는 신학적 특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문명화가 회심의 전제가 될 수는 없지만 결과로서 주어질 수 있음은 에드워즈도 그의 사역을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64)
브레이너드와 인디안 선교를 감당했던 모라비안들은 예외였고, 토마스 메이휴는 개인 간의 대화방법을 통해 전도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교도 신앙을 배경으로 한 선교방법을 교리문답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선교방법은 설교의 역할을 드높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안 부족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이 존 엘리어트의 「인디안 교리문답(Indian Cathechism)」이었다.65) 이러한 선교방법을 우선적으로 시행한 배후에는 기독교의 복음을 어느 누구에게든지, 어디서든지 차등 없이 전하고자 하는 열의와 함께, 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백인들과 이교도 인디안들로부터의 부정적인 영향을 차단하고 신앙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을 지켜나가게 하기 위한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인디안들을 “기도하는 인디안들”의 마을에 모여 살도록 독려하곤 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교와 교회를 세워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물론 인디안 사회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언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 외에도 농경술, 목공기술, 철공예, 피혁 및 모직 공업 등을 교육함으로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사실은 초기에는 백인들이 교사로 활동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안 중에서 교육과 목회를 담당하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최초로 히아쿰스(Hiacoomes)라는 인디안 목사가 1670년에 배출되었고, 1700년에 이르게 되면 메사추세츠 지역에만 37명의 인디안 목회자들이 활동하게 되었다.66)
존 서전트는 효과적인 학교교육을 위하여 기숙사 학교 제도를 도입함으로 인디안들의 교육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교육을 시행한 이유는 가능한 이교도적 가정적 영향으로부터 분리시켜 기독교 교육을 보다 효과적으로 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교육의 실례는 후대의 인디안 선교뿐만 아니라 미국교회가 시행하는 해외선교에 널리 적용되는 선례를 남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선발된 인디안들을 보스톤 라틴학교나 하바드 대학에 보내기도 했으나, 이러한 실험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인디안 부족어를 교육시키는 것이 교육과 신앙생활에 유익함을 절감하여 인디안어로 성경을 비롯한 신앙서적을 번역하여 보급하는 기독교 문서운동인 소위 “인디안 문서사업(Indian Library)”이 엘리어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렇게 인디안 선교에 시행한 방법들이 후에 미국 개신교회가 해외 선교에 적용한 실례들이 되었다.67)
청교도들의 인디안 선교에서나, 미국 개신교회의 해외선교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개의 다른 대사명”은 구분은 되었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준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피선교인들이 처해 있는 형편과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에드워즈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개인을 회개시키고 성화의 삶으로 나와 영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복음전도가 필수적이며, 또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그리고 섭리와 관계된 국면에서 선교적 사업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복음적인 영적 대 각성운동은 사회개혁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68)
에드워즈를 비롯한 개신교회에 의한 인디안 선교는 세계적 규모의 선교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어느 선교운동보다도 강력한 역동성을 제공하였다.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겸허한 시도」 등을 비롯한 신학 저서들은 신대륙뿐만 아니라, 영국의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도합주운동과 함께 강력한 해외선교 열정이 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인디안 선교로부터 모든 개신교회가 참여하는 세계적 규모의 선교사업과 미국 내지선교본부(American Home Missions)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종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에드워즈와 그의 신학적 후예들이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의 시작과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미국이 해외선교를 시행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통해서 선교사의 모델을 제시함으로 현대선교운동의 확산에 공헌하였다.69)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선교지 상황과 청중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가 인디안들에게 선포한 설교들의 내용은 나중에 그의 신학저서들의 기본주제가 될 영적 보화였으며, 칼빈주의적 교리들을 중심으로 전달하였다.70) 그러나 그의 전달방법은 인디안들에게 매우 적합했다.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신구약에서 거의 균등하게 본문을 택했으나, 인디안들에게 선포된 설교들은 상당부분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하여 선포되었다.71) 그 이유는 다양한 비유들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무게 있는 교리적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전해야 할 내용은 전하면서, 그 전달방법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는 선교적 자세와 목양적 태도를 겸비한 선교사-목사(missionary-pastor)였다.
닫는 말
고찰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구속역사에 대한 관심, 선교를 위한 신학적 토대조성, 그리고 브레이너드의 선교적 사표는 현대 선교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인들이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철저히 개혁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선교와 부흥을 지향하는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 에드워즈의 선교적 업적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에 비해서는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에드워즈의 선교적 전설”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선교적 자각이 필요한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도전을 제공할 것이다. “개혁으로 말미암는 부흥과 선교(revival and mission out of reform)”가 절실한 이때에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은 더욱 점증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신학과 선교적 삶이야말로 개혁신앙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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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야말로 미국 교회역사에 있어서 가장 확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인물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종말론과 선교분야에 있어서도 그의 공헌과 영향은 매우 지대하다. 그동안 역사신학자들에 의한 에드워즈 연구는 주로 대각성운동(Great Awakening)과 연관되어 진행되어 왔으며, 그의 신학을 비롯한 사상사적인 면에 치우친 면이 다분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강조되어야 할 주제 중의 하나가 “선교사로서의 에드워즈”일 것이다.1) 비록 적은 수의 학자들을 통해서 주장되고 있지만, 윌리암 케리(William Carey)를 "현대선교의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에드워즈는 “현대선교의 할아버지”라고 불려야 할 당위성이 존재한다.2) 왜냐하면, 그의 생애와 사역은 선교역사의 과도기 속에서 펼쳐졌으며, 신대륙(New England)에 이주한 청교도들이 하나님께서 그의 나라를 세상 끝까지 확장하시기를 원한다는 새로운 선교적 패러다임을 소유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선교의 총체적 측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지적이며 영적인 활력을 불어넣었다.3) 특히 에드워즈는 1730년대와 40년대의 대 각성 운동을 주도하면서 인디안(Indians 혹은 Native Americans) 선교야말로 부흥역사의 중요한 부분이며, 선교는 인류 역사에서 매우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선교적 활동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라는 범주 속에서 일어나며, 그의 시대 속에 점진적으로 확장되고 있다고 확신했다.
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역사적 배경
I-1. 청교도 사회의 인디안 선교
콜롬부스가 1492년에 신대륙을 탐험하고 스페인의 국왕에게 인디안에 대해서 보고한 이후 서양의 지속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천주교나 개신교 모두 인디안에 대해서 선교적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나,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느냐가 중요한 문제였다. d;se;인ㅇ,f 식민지의 노예대상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공생의 관계로 볼 것인가, 혹은 적으로 볼 것인가 등은 끊임없는 논란의 여지가 있어 왔다.
유럽인들이 신대륙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인디안 학살로 인하여 선교에 막대한 장애가 되기도 했지만, 청교도들의 여러 헌장들 속에는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이 반영되어 있다. 플리무쓰 헌장에서는 “백인사회와 기독교 종교에 절망하거나 곤란에 빠져 방황하면서 아직 처져있는 야만인들의 개종을 요구한다”라고 기록하기도 하였고, 메사추세츠 베이 헌장에서는 “유일한 참 하나님이요, 인류의 구세주에게 대한 순종과 지식에로 야만인들을 끌어오도록 식민자들에게 요구한다”고 명시하였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야만인들인 인디안들에게 기독교 종교를 보급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민했던 스페인과는 달리, 청교도 사회에서는 1636년 인디안들에게도 복음을 전파하도록 법률을 통과시켰다.4) 1642년 메사추세츠에서는 토마스 메이휴(Thomas Mayhew, Jr.)에 의해서 처음으로 인디안들에게 개인전도가 시작되었고, 1642년에는 그들에게 공식적인 설교가 선포되었으며, 같은 해에 존 엘리어트(John Eliot)의 선교사역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1674년까지 메사추세츠와 플리무쓰에는 약 4,000명의 “기도하는 인디안들(Praying Indians)”이 살고 있었던 14개의 마을이 존재했었다.5)
엘리어트는 캠브릿지 출신으로 1631년에 보스톤에 도착했다. 엘리어트는 목회를 시작하면서부터 인디안 선교를 준비하였다.6) 1636년 식민사회와 인디안(피쿼트, Peqout 족)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고, 생포된 인디안을 통해 엘리어트는 그들의 언어를 터득하면서 구체적인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엘리어트가 품은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열정은 그로 하여금 1646년에 이르게 되면 그들의 언어로 설교를 가능하게 하였고, 이러한 사건은 메사추세츠 목회자들에게 적지 않은 자극을 주어 의회가 매년 2명 씩 인디안 선교를 위해 배출할 것을 법률로 통과시키게 된다.7) 그러나 엘리어트가 인디안 선교에 미친 공헌은 인디안어로 성경을 번역한 것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인디안 언어는 발음이 곤란하고 유사한 언어가 없어 배우기가 매우 어렵게 인식되고 있는 상황에서, 엘리어트에 의해 번역된 인디안 성경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1661년에 인디안 성경이 출간되었고, 리차드 박스터(Richard Baxter)의 논문까지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라는 상황으로 인해 인디안 사회와 백인 정착촌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가 멈추지 않았다. 특히 킹 필립 전쟁(1675-76)을 통해 수많은 인디안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이 전쟁으로 인하여 인디안 선교는 심각한 타격을 받게 되고 거의 원점에 이르게 된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처음으로 인디안 선교에 관련된 것은 1734년이었다. 그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은 메사추세츠의 서부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던 인디안들(Housatonic Indians)에 관한 문제로 존 스토다드(John Stoddard)의 노쓰햄프톤 집에서의 모임에 참석하면서 비롯되었으며, 그 결과 "스톡브리지 선교(The Stockbridge Mission)"가 시작되었다.8) 그리고 에드워즈의 신학교육을 받고 예일대학교에서 강사를 지낸 존 서전트(John Sergeant)가 최초의 선교사로 스톡브리지의 모히간 족들에게 선교사로 파송되었으나 선교적 열매는 미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어트를 비롯한 적지 않은 청교도 사회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특히 개혁신앙에 근거한 선교적 의미가 그들의 선교사역을 통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9) 바로 이러한 인디안 선교사역이 1749년부터 1758년까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계승되었다.
I-2. 조나단 에드워즈와 데이빗 브레이너드, 그리고 인디안 선교
에드워즈에게 인디안 선교의 중요성을 보다 확고하게 일깨워준 인물은 데이빗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였다. 브레이너드는 하나님을 섬기려는 헌신으로 불탔던 청년이었다. 그는 1739년 21세의 나이로 예일대학에 입학하였다. 곧 이어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당시 예일 대학을 방문했던 휫필드, 테넌트, 데븐포트 등의 설교를 통하여 그의 열정은 더욱 불같이 타오르고 있었다. 학생시절에 몸이 상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면서 뛰어난 성적을 올리고 학급의 지도자가 되지만, 1741년 졸업설교를 하기 위해 온 에드워즈는 총장 토마스 클랩의 기대와는 달리 뉴 라이트(New Light)를 두둔하는 설교를 하였고, 결과적으로 그 여파가 브레이너드에게까지 번지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는 총장을 모욕했으며 금지된 뉴 라이트 모임에 참석했다는 구설수에 올라 학교로부터 퇴학을 당하게 된다.
예일대학 당국의 이러한 조치는 일부 목사들의 강한 비난에 직면하게 되었다. 당시 영향력 있는 예일 동문으로 에드워즈를 비롯한 뉴 라이트에 속한 조나단 딕킨슨(Jonathan Dickinson)과 아론 비어(Aaron Burr)가 브레이너드를 복학시키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올드 라이트(Old Light)의 클랩 총장은 결코 그러한 시도에 요동하지 않았다. 이러한 일로 인하여 브레이너드에 대한 관심이 급증하게 되었고, 1742년 학위는 받지 못했지만, 회중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가를 받았다. 브레이너드는 같은 해 딕킨슨과 버어의 주선으로 1743년 스코틀랜드 선교회로부터 인디안 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브레이너드는 델라웨어와 서스퀴하나 강변에서 인디안 선교를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그 결과는 고생에 비해 너무 미약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1745년 뉴저지 트랜튼 남쪽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인디안 부족들 가운데 놀라운 각성운동이 일어나며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다. 그러나 이러한 부흥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1746년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그의 몸은 약화되었다. 학생시절부터 홍역과 폐결핵으로 고생했던 그는 인디안 선교사역으로 인하여 육체적 고통이 더욱 가중되었고 수차례의 장거리 이동과 여행은 그의 생명을 더욱 단축시켰다. 그래서 1747년 더 이상 사역을 감당할 수 없었고, 죽음의 고비를 넘겨가며 고향 뉴잉글랜드로 돌아가던 중, 그 해 5월에 노스햄프톤에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집에 당도하였다.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만난 에드워즈는 그가 평소 추구하던 신앙의 열정을 소유한 참 성도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브레이너드를 맞이한 에드워즈는 불과 몇 주 전에 그의 부인 사라가 여덟 번째 딸을 출산한 상태였고, 계속되는 프랑스-인디안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그의 집은 군인들의 숙사로도 제공되고 있던 실정이었다. 또한 어려움을 당하거나 목회수업을 받기 위해 적지 않은 방문객이 에드워즈의 집을 드나들었다. 이러한 가운데도 사라는 찾아오는 손님들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헌신적으로 대하였다. 이러한 분주한 가운데 당시 17세의 제루샤(Jerusha)가 브레이너드를 정성껏 간호하였다. 제루샤는 어린 나이였지만 부모 못지않게 영성이 뛰어난 여인이었으며, 인디안 선교를 위해 자신의 몸을 남김없이 희생한 브레이너드의 신앙에 감화되어 극진히 그를 돌보았다.10) 정성어린 간호에도 불구하고 브레이너드는 1747년 가을 10월에, 서른이 채 되지도 못한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4개월 후에는 제루샤의 죽음으로 이어지면서 에드워즈의 슬픔은 더해만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이 개인적인 슬픔을 영적인 교훈을 얻는 기회로 삼음으로 위로를 얻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 속에서 진정한 신앙의 살아있는 실례를 발견하였는데, 분명한 회심의 경험과 거룩함으로의 확연한 성숙, 그리고 열광주의로부터의 자유로움은 지울 수 없는 감격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그가 준비하던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려는 논문, 「의지의 자유(Freedom of the Will)」를 보류하는 대신에,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소재로 하여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An Account of the Life of David Brainerd)」를 편집 출판하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11) 이 전기에 소개된 브레이너드의 삶은 에드워즈가 추구했던 신앙의 열정을 잘 반영한 인물로서 경건과 영성이 지성을 앞서는 고귀한 삶으로 묘사되고 있다. 브레이너드의 선교사역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그의 내면의 영적 삶을 드러내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다. 브레이너드의 하나님의 일에 대한 전적인 헌신이야말로 진정한 사역자의 귀감이 될 만한 모범이었으며, 임종 직전에 그가 고통 중에도 인디안 선교를 위하여 간절하게 기도한 것이야말로 에드워즈의 마음에 크나큰 감동과 도전을 주었다.12)
브레이너드의 고귀한 성품과 육체적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대한 절대순종과 사명감은 에드워즈를 비롯한 당대의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의 사망 이후 에드워즈는 그의 일기를 생전에 허가를 받아 1749년에 출판하였는데, 이 책은 선교를 준비하는 자들에게 일종의 안내책자가 되었고, 에드워즈의 저서 중에서, 그리고 미국의 독립 전에 출간된 책 중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폐간된 적이 없을 만큼 횟수를 거듭하여 출판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헌신한 브레이너드의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부각되었다. 「데이빗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선교의 동기를 부여하고 고귀한 내적 삶을 반영하는 선교사들의 필수적인 명저일 뿐만 아니라, 당시 선교사가 타문화와 민족과의 효과적인 전도와 선교사역에 임할 수 있도록 안내하는 극소수의 서적 중의 하나였다.13)
이 책은 윌리암 캐리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청교도 선교뿐만 아니라 현대선교에 있어서 기초를 마련해 놓았다는 점에서도 매우 높이 평가받을만하다.14)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가 직접적으로 현대선교를 낳은 것은 아니지만, 여러 선교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해 볼 때, 그는 선교사들 개개인의 소명과 헌신과 사역에서 뿐만 아니라 현대선교의 발전과정에 있어서도 초석과도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브레이너드는 인디안 언어를 배우기 위해 아무도 없는 정글 속으로 32km를 빈번히 오가기도 했으며, 선교사역을 하는 중에 롱아일랜드의 가장 살기 좋은 이스트 햄프톤에서 목회해 달라는 청빙도 거절하였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통해 인디안 선교에 대한 열정을 얻게 되었고 실제적인 인디안 선교에 접하게 된다. 브레이너드의 짧은 선교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인디안 선교의 열매를 통해서 에드워즈는 사탄의 권세 하에 놓였던 민족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이 사건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속역사의 완성을 향한 징표가 아닐 수 없었다. 복음의 선포를 통해서 인디안들의 마음속에 조성되는 “놀라운 성향”은 에드워즈가 「신앙의 열정(Religious Affections)」에서 강조하는 인간이해의 중심 사상이었다.
마치 아타나시우스의 「안토니의 생애」가 초기 수도원 운동을 촉진시켰듯이, 에드워즈가 집필한 「브레이너드의 생애」는 현대 선교운동을 활화 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브레이너드의 모범적인 거룩한 삶과 선교의 헌신은 부흥을 사모하는 기도합주회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을 뉴 라이트를 대변하는 영성으로 소개함으로써 부흥운동이 지속되기를 소망하였으며, 이와 같은 영성운동은 19세기 이후 일어나는 선교를 강조하는 복음주의 운동의 초석을 놓기도 하였다.15) 또한 브레이너드의 예일대학 퇴학 사건은 프린스톤 대학의 설립동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그의 삶과 전기가 후대 선교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촉매역할을 하였다.
당시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선교활동은 매우 미약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 에드워즈는 평소 인디안 선교에 큰 관심을 두면서 본격적인 선교의 기회가 오기를 소망하고 있었는데, 그러한 선교의 열정이 브레이너드를 통해 표출된 것이다. 브레이너드의 전기를 통한 영향력과 더불어 심한 병중에도 그가 보스톤을 방문한 것을 계기로 1747년에 인디안 선교회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은 당시 뉴잉글랜드에 설립된 최초의 선교기관이었다.16) 에드워즈도 후에 인디안 선교사가 되었으며, 브레이너드의 삶과 사역은 수많은 후대 선교사들과 선교단체들에게 선교에의 열정과 의미를 불어넣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브레이너드와 에드워즈의 선교관은 서구의 제국주의적 기독교(Christendom)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도록 영적 각성과 부흥의 결과가 가장 소외되었던 인디안들에게도 전해질 수 있는 안목과 계기를 제공 하였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의 삶과 사역을 선구적인 선교사의 모범으로 제시함으로 선교의 지평을 비 서구 세계로 확장시키는 데에도 기여하였다.17)
I-3.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인디안 정착촌 “스톡부리지 (Stockbridge)”이다. 메사추세츠에 살던 인디안들 중의 한 부족이었던 하우서토닉 (Housatonic) 인디안들에 대한 선교사역은 존 서전트에 의해서 1734년부터 1749년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인디안 선교를 위해 새로운 정착지를 만들게 되었고, 이곳에서 인디안 스스로 학교를 운영할 수 있도록 자선학교가 설립되고, 인디안들의 전통주택인 가죽으로 만든 원통형 가옥에서 영국형 가옥을 보급하게 된다. 그리고 이 사역이 후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인계되었다.
당시 스톡부리지에서의 인디안 선교는 한 때 활발했다가 힘을 거의 상실해가고 있던 모히칸(Mohican) 인디안들과 아직도 건재한 모혹(Mohawk) 인디안들의 자녀들을 데려다가 기숙학교(Boarding school) 형태로 영국식 교육을 시킨다는 명목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전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인디안 부족들을 군사적이며 정치적인 목적으로 포섭해야하는 현실은 선교를 더욱 꼬이게 하는 요인이었다. 프랑스와 손을 잡은 인디안들은 언제든지 기습하여 공격을 감행할지 모르는 공포의 대상이었고, 영국과 동맹관계인 인디안들은 군사력 동원에 대한 대가지불이 지연되는 것과 불공정한 상거래로 인한 착취로 인해 몹시도 불만이 가득한 상황이었다.18)
에드워즈의 순수한 복음의 동기가 위협을 받은 것은 비단 당시의 정치 군사적인 상황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솔로몬 스토다드를 이어 교계의 실력자로 부상한 그의 외삼촌 윌리암 윌리암스를 비롯한 윌리암스 가(家) 사람들과의 대립관계였다. 윌리암스 가도 일찍이 인디안 선교에 복음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은 사실이나, 에드워즈의 선교관과 확연히 달랐던 것은 그들의 선교는 순수하게 복음만을 전하기보다 선교를 동시에 자신들의 이권을 추구하는 기회로도 간주하였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스톡부리지의 선교명분을 누가 메사추세츠 정부로부터 인정받느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에 에드워즈의 선교사역과 전면적인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벌어진 전쟁은 또 다른 복합적인 요소로 작용해 인디안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로만 생각되었던 선교에 정치적 경제적 이권이 개입되는 예측하지 못한 양상이 되었다.
당시 행해지고 있었던 인디안 선교는 다분히 영국의 식민지 정서를 반영하고 있었다. 인디안과의 교류는 식민지 확장과 밀접한 정치 군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고, 그 자체가 복음을 확장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에드워즈의 선교사역도 이러한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철저하게 성경적인 세계관을 소유하고 있었다. 비록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민족이란 단위를 사용하셨던 것이 사실이지만, 신약적 관점에서 볼 때, 민족이란 잣대로 사람을 차등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인디안 문화가 상당히 미신적이고 성경과 거리가 먼 것은 사실이었지만, 에드워즈는 백인이라고 해서 나은 것은 결코 없다는 입장이었다. 오히려 백인들이 많은 복음의 기회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인디안보다도 더 못한 존재들인지도 모른다고 간주하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한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서 나왔으며, 그러므로 동일한 타락한 존재라고 주장한다. 그는 인디안들에게 설교하기를, “우리가 당신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우리에게 먼저 하나님이 빛을 비추셨다는 것뿐입니다. 이제 그 빛을 여러분에게 소개하려 합니다.”19)
에드워즈가 스톡브리지로 이주했을 때에는 학교사업이 그런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곳에 온 그는 학교운영이 주요한 사역이 아님을 밝혔고, 학교 이상의 목회를 하는 것을 원하였다. 왜냐하면 인디안들에 대한 에드워즈의 구령열정은 분명히 그 시대의 것을 앞서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인디안들을 목회하는 에드워즈의 사역을 통해 많은 인디안들이 불신의 늪에서 광명의 빛으로 인도되었고, 천국의 부분적인 모습들이 반영될 만큼 만족할만한 것이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있다. 이러한 목회사역에 열중하면서도 에드워즈는 결코 학교를 통한 사역도 소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가 1751년 스톡부리지에 처음으로 왔을 때 모히칸 족들이 학교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출석하고 있었던 것을 목격하면서 그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되기 전에 스톡부리지의 잠재적인 성공을 확신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목회사역에 중점을 두면서도 학교 사역을 효과적으로 수행해 나감으로 인디안 선교를 위한 새로운 연결고리로 활용하였다.20)
에드워즈는 스톡브리지에 부임하기 전부터 인디안 선교에 대한 관심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외조부 솔로몬 스토다드는 목회와 신학의 유산만을 손자 에드워즈에게 남긴 것이 아니라, 선교적 유산도 함께 남겼다. 스토다드는 필립 왕의 전쟁으로 인하여 인디안 선교가 심각하게 타격받는 것을 막기 위하여 코튼 마더(Cotton Mather)와 벤자민 콜맨(Benjamin Coleman)과 함께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리고 스톡부리지 선교는 노스햄프톤에서 시작되었으며, 에드워즈의 삼촌 존 스토다드(John Stoddard)와 그의 친구들은 누구보다도 스톡부리지가 위치한 메사추세츠 서부 지역에서 유력한 인사들이었다. 그리고 스토다드는 프랑스의 영향을 받지 않은 휴사토닉(Housatonic) 인디안들이야말로 선교하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임을 알려주었고, 스톡부리지에서의 인디안 선교를 위한 결정적인 모임도 1734년에 회집되었다. 공교롭게도 1734년은 에드워즈가 그의 목회를 통해서 노스햄프톤에서 최초의 각성운동을 목격하였으며, 그 이후에도 스톡부리지 선교와는 매우 밀접한 연관 속에서 그의 목회가 전개되었다. 그 후, 1751년 노스햄프톤 목회를 마감하고 스톡부리지로 선교사역을 위해 부임한 것은 하나님의 섭리였다.21)
그는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인디안 선교야말로 마지막 시대를 예비하는 선구적이고 준비적 단계라고 확신하고 있었다.22) 에드워즈는 노스햄프톤에서 목회하면서 이미 인디안 선교학교를 후원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그가 인디안 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는 그들의 입장에서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다양한 표현방법들은 사용하지만 결코 설교나 전도의 내용에서는 축약하거나 생략하지 않고 본질적인 내용을 충실하게 선포하였다. 에드워즈가 인디안 선교를 약 7년간 행하면서 200개 이상의 새로운 설교를 선포했고 그 중에 약 20개 정도만 이전에 설교했던 내용이었다. 그만큼 새로운 선교대상자들에게 적합한 말씀을 새롭게 준비하여 그가 백인 성도들에게 강조했던 신학적 내용들을 거의 총망라하여 전했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에드워즈를 “선교사 목사(missionary pastor)”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항간에서는 에드워즈가 평소 집필하기로 계획했던 저술 작업을 위해 스톡브리지로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러한 견해는 결코 설득력이 없다. 에드워즈는 목회를 사임할 당시 신대륙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상당히 알려진 상태였으므로 국내외적으로 사역의 기회가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안 선교로 떠나는 것은 평소 자신이 지대한 관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고, 브레이너드를 만났을 때,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기 위하여 집필하고 있었던 「의지의 자유」 출판을 미루고,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저술했다는 것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에 대한 열정을 확인할 수 있는 단면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는 기독교 복음을 접하지 못했던 민족들에게 선교함으로 지상의 그리스도의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킴으로 결국 천년왕국이 임하게 된다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인디안 선교를 하면서 그가 평소 생각해 왔던 신학주제들을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서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음도 사실이다. 영국과 신대륙 간의 치열한 식민전투, 인디안들을 핍박하고 홀대하는 백인들에 대한 환멸 등 당시의 상황에서 자신이 속한 입장을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는 안목에서 목회-선교사역과 저술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는 것이 현재의 에드워즈 조명에도 지대한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비록 자신은 인디안 부족어를 배우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온 가족이 인디안들 속에 함께 거주하면서 자녀들은 영어보다 인디안 말에 더 익숙한 형편이 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우리는 결코 여러분보다 낫지 않습니다”라는 자세로 일관하였다.23) 그리고 그의 아들 조나단이 인디안 선교사가 되기를 소망하였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에드워즈를 미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신학자, 목회자, 사상가, 교육자라는 칭호와 함께 “선교사”라는 명칭을 추가해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다.
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와 신학적 특성
I-1. 개혁신앙(Reformed Faith)과 선교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적 배경이 칼빈주의(Calvinism) 혹은 개혁신앙(Reformed faith)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신학과 선교와의 연관성에 대한 기본적인 논의는 본고의 논리전개상 매우 중요하다. 흔히 종교 개혁자들은 선교적 개념이나 활동에 대해 인식하고 있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들의 교회관 속에 선교적 차원이 존재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에 앞서 우리는 종교개혁자들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선교에 대한 그들의 신학과 자세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윌리암 케리가 소유했던 세계관과 비전을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24)
주지하는 바와 같이 종교개혁자들의 선교관도 그들이 살았던 역사적 상황과 신학적 입장에 의해 형성되었다. 종교개혁 이후 유럽의 이곳 저곳에서 진행되었던 종교전쟁의 와중에서 맺어졌던 아우구스부르그 평화협정(The Peace of Augsburg, 1555)은 각 나라의 신민들이 군주의 종교를 추종하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당시의 식민지들은 대부분 로마 캐톨릭 교회의 소유였기 때문에 해외 선교를 시도하는 것에는 상당한 어려움이 수반되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신학이나 삶 속에는 분명히 선교적 차원이 강하게 내포되어 있었다. 칼빈이 자신의 신학적 입장을 최초로 요약한 1535년도 판 올레비탄(Olivetan) 성경의 신약서문을 통해서 그의 선교에 대한 입장을 확인할 수 있다. 이방인에게 구원의 길을 알리기 위해, 칼빈은 성경의 역사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이 타락으로 말미암아 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을 주지시킨다. 그리고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향하는 많은 성경근거들을 소개하면서, 죄인인 인간이 은혜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구원론적 강조가 이어진다. 즉, 창조와 구속 사이에 발견되는 교리적 체계들을 요약적으로 진술함으로 칼빈은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26)
또한 칼빈의 교회론이나 그가 브라질 원주민의 선교를 위해 선교사들을 파송한 노력들을 감안해 볼 때, 그의 신학 속에는 분명히 선교적 차원이 내재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27) 칼빈의 선교관에 대하여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지만, 칼하운(David B. Calhoun)은 칼빈이 왜 좀 더 강하게 “해외(foreign)” 선교를 도모하지 않았는가라는 문제보다는 그의 신학 속에는 선교적 차원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것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열방들을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두려고 노력하며 그의 왕국을 온 땅에 확산시켜 나가게 하는 “내적인 역동성”이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칼빈의 하나님 나라 사상이 바로 그의 신학 속에 선교적 차원을 강하게 기능하게 하는 주된 요인이라고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28) 복음의 전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주권이 온 지구상으로 확장되는 것을 선교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가 활동하던 제네바가 그와 같은 역할을 감당했던 무대였다.
그러므로 독일의 경건주의가 현대 선교운동에 미친 영향과 함께 칼빈의 신학적 유산을 계승한 청교도들이 선교에 끼친 지대한 공헌 또한 간과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흔히 모라비안 선교와 독일 경건주의 영향을 받은 윌리암 캐리가 현대선교의 장을 연 것으로 간주되고 있지만, 비버(R. Pierce Beaver)는 뉴 잉글랜드 청교도들이야말로 현대선교 운동의 토대를 마련한 장본인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29) 이러한 선교적 영향이 메이휴 가(the Mayhews)와 존 엘리오트, 그리고 조나단 에드워즈 등을 통하여 신대륙의 청교도 사회뿐만 아니라, 유럽의 교회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그들의 선교적 노력은 “미국교회로 하여금 영구적인 선교활동을 시작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유럽교회가 세계선교 비전을 품게 하였다.”30)
특히 칼빈의 신학은 선교에 종말론적 체계를 제공함으로, 현대 개신교회의 선교동기와 활성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체니(Charles Chaney)에 의하면, 칼빈은 오순절과 그리스도의 재림 사이의 시대를 세 주요한 시기로 구분하여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그 첫 기간은 사도들에 의하여 교회가 설립된 시기이고, 둘째 기간은 적그리스도의 시기와 개혁자들에 의해 교회가 회복되는 시기이며, 셋째 기간은 교회의 위대한 번영의 시기라고 언급한다.31) 칼빈은 그의 시대에 적그리스도의 그림자가 걷혀지고 교리와 예배를 개혁함으로 교회의 회복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청교도들에게 교회는 곧 위대한 번영과 성장의 시기를 경험할 것이라는 역동적인 감각이 내재될 수 있었다.32)
그러나 영국에서의 좌절과 실망이 청교도들로 하여금 신대륙을 향한 종말론적 이주를 시도하게 하였다. 그들의 이주 동기는 다분히 “광야로의 심부름(an errand into the wilderness)”을 연상케 한다. 청교도들은 그들의 이주야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하신 구속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첩경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리고 인디안들을 선교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다. 청교도들의 이주는 종말론적 비전을 지닌 선교적 의미가 함축되어 있었으며, 대 각성운동을 경험하면서 청교도 선교운동은 강력한 역동성을 지니게 되었다.33) 이런 면에서 칼빈의 종말론적 성향을 지닌 선교관이 마더(Cotton Mather)와 에드워즈에 영향을 미쳐 후대의 선교운동과 연결되고 있는 것이다.34)
I-2. 에드워즈의 개혁신앙과 선교지향성
에드워즈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의 사랑은 계시를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기 때문에, 선교적 사역이야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주요한 길이며, 인간의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야말로 구속 역사의 주된 내용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리고 역사 속에 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선교에 적용시켜 선교적 열정을 도모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인간의 궁극적인 목적을 추구하도록 동인을 제공하였다. 에드워즈는 교회의 영적 각성 및 부흥은 선교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논증하였고, 가장 위대한 영적 각성의 가시적인 표시는 사랑의 분출과 세상을 향한 선교적 헌신으로 드러남을 강조하였다.
에드워즈의 종말구조 속에서 각성과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완성하는 준비 단계로 간주되고 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부흥운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은 선교운동이라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노스햄프톤에서의 목회사역이 유감스럽게 끝이 나고 스톡브리지 인디안 촌으로 이주하여 선교사역에 임하게 되지만, 그는 결코 인디안 선교를 그의 생애 후기에 빚어진 사태로 말미암아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것은 아니었다.35) 그 이전에도 에드워즈의 신학과 사역 속에는 이미 인디안들을 품은 선교적 차원이 내재되어 있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사회가 인디안들을 야만적으로 대하고, 그들의 재산과 생명을 무자비하게 강탈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기독교 신앙과 점점 더 멀어지게 하고 있으며, 더구나 교회에 의한 선교적 노력이 매우 미흡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절감하고 있었다.36)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당시 그릇된 식민지 정책에 대한 일종의 속죄적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며, 그는 누구보다도 인디안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그의 마지막 탈출구가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개혁신앙의 특징 중의 하나인 예정론이 선교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가 존재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데이빗 보쉬에 의하면, 존 엘리어트나 에드워즈 같은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주권이 인디안들의 회심을 통해서 확장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하나님의 선택교리가 오히려 선교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자세 속에서 그들은 선교야말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간주하였다. 후에는 구속론적인 관심이 보다 강한 선교의 동기로 작용하였지만, 칼빈주의적 신학의 토대 위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예정,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요인들이 주요한 선교의 기반이었다.37)
찰스 체니는 에드워즈 선교신학의 주요한 특성들을 대략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38) 이러한 신학적 특성들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의 동기와 의도를 반영하고 있다. 대체적으로 19세기 이전까지 청교도들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위한 궁극적인 목적으로 선교를 이해하고 시행하였으며, 여기에 멸망해가는 이방민족의 처참한 형편과 그들의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주요한 선교동기로 작용하였다.39) 그런 면에서 미국의 대각성운동은 선교의 동기 측면에서 청교도적 특성을 유지하면서도 경건주의적 성향이 농후해지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대각성운동은 선교의 주된 요인으로 “하나님의 주권(God's sovereignty)”에서 “하나님의 은혜(God's grace)”가 보다 강조되는 역사적 계기였다.40)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선교 신학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I-2-1. 에드워즈의 선교동기와 열정
브레이너드와 함께 에드워즈의 선교신학은 선교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하였다. 특히 영어권 기독교 세계에서 보다 개신교적 특성(the Protestant consciousness)이 확연해지는 선교의 길을 열어 놓았다. 그 이전의 선교운동은 다분히 기독교 국가의 식민지 건설과 맞물려 일어난 경우가 많았고, 미개한 민족을 개화시키고 회심시킴으로 그들의 삶을 개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경우도 많았다. 뿐만 아니라, 명목상의 기독교인을 양산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죄 가운데 있는 모든 인간은 다 멸망 받을 수밖에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야 구원을 얻으며 거룩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복음주의적 신학의 토대 위에 선교적 노력을 경주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방인(heathenism)”이라는 개념도 더 이상 종교나 인종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이며, 선교란 단순히 형식적인 신앙고백이나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되는 차원을 벗어나 “참된 기독교”를 선포하는 것이었다.41)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와 브레이너즈는 영적 각성으로 말미암아 회복된 복음주의적 회심의 개념을 토대로, 죄에 대한 심각한 회개와 그리스도의 사랑에 대한 개인적 체험에 대한 간증들이 보다 확고하게 선교에 적용되도록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서구 기독교회가 지녔던 “문화주의적(culturist)” 선교적 차원을 복음의 본질을 앞세우는 개념으로 전환시켜 인종이나 문화 그리고 국가 간의 차이와 편견을 넘어서, 죄와 은혜라는 상반되는 테두리 속에 놓여 있는 인류의 상태를 직시하게 하였다. 즉, 서구 기독교인들이 소유했던 이방인의 개념을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은혜라는 차원에서 인식시켰다. 중생과 개화나 문명화를 동일시하는 위험을 벗어날 수 있는 안목을 제공하였다.42)
에드워즈의 선교동기의 중심에는 모든 인간은 동등하고 또한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칼빈주의적 인간론이 자리 잡고 있다. 그가 인디안 선교를 시작하면서 1751년 8월에 선포한 최초의 설교는 창세기 1: 27에 근거한 타락 전후의 인간의 본성에 대한 것이었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우리의 첫 부모(our first Parents)”는 순종치 아니함으로 타락함으로 인종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는 죄악의 늪에 빠졌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음을 선포하였다. 그는 초기부터 창조, 타락, 그리고 구속의 역사에 관한 일련의 설교들을 통해서, 마치 그의 유명한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잡힌 죄인들(Sinners in the Hands of an Angry God)”이라는 설교를 연상케 하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는 죄인의 상황에 대해 묘사하였다.43)
타락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가 아니고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필요성(necessity)”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원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모두 다 동일하게 하나님의 은혜(the equal need of all humans for grace)”를 절실히 필요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하였다.44) 이러한 주장은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사역과 그 기간에 저술된 「인간의 원죄(Original Sin)」의 내용 속에도 반영되어 있다. 원죄의 영향으로 인간은 인종과 문화를 초월하여 누구나 다 구원받아야 할 필연성이 존재하며,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누구도 죄의 영향력을 벗어날 수 없다. 즉, 에드워즈의 원죄에 대한 강조는 인디안들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기만 하면 차등 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과 확신을 불어 넣어주었다. 분명히 에드워즈는 인디안들을 대하여 이방인이요 열등한 민족이라고 경시했던 당시의 서구인들과는 상당히 대조적인 견해를 소유하고 있었다.
인디안들에게 행한 에드워즈의 설교의 강조는 인간의 죄성에서 구속의 역사로 전이되면서 그리스도께서만이 모든 죄와 악, 그리고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보호해 줄 “피난처(shelter)”가 됨을 강조한다. 그리스도께 연합된 자들은 인종이나 민족, 신분의 고하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집”에 거하게 된다고 선포하였다.45) 바로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의 절대적 필요성이 에드워즈의 전도와 선교의 절실함으로 연결된다. 중생하지 아니한 인간은 다 누구나 멸망 받을 수밖에 없다는 “영적 동등성”에 대한 에드워즈의 확고한 견해는 상당히 심오한 선교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칼빈주의적 인간론을 토대로 한 선교관은 선진문명을 전해주는 차원의 제국주의적 선교가 아닌, 모든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얻게 하는 선교를 지향할 수 있는 교리적 준거를 제시한 셈이다.
I-2-2. 에드워즈의 시대인식
에드워즈의 시대인식은 그가 1739년 3월부터 8월까지 노스햄프톤 교회 성도들에게 외친 39개의 설교들로 구성된 「구속사역의 역사(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라는 그의 사후에 출판된 저서 속에 잘 설명되어있다. 에드워즈의 시대구분은 첫째로 타락부터 그리스도의 도성인신까지의 시대(Fall to Incarnation), 둘째로 그리스도의 오심과 부활까지의 시대(Incarnation to Resurrection), 그리고 셋째로 부활 이후부터 세상의 종말까지의 시대(Resurrection to the End of the World)로 이루어져 있다.46) 그의 기본적인 역사 인식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성인신이야말로 인류 역사의 근본적인 성격을 변화시켰으며, 그리스도의 속죄가 그의 지상사역을 통해 완성되었고, 그 이후의 역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적용해 나가는 과정이었다. 그리스도 이전의 역사나 소위 세속역사는 그러한 적용을 위한 준비기간이라고 인식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역사의 목적은 바로 구원이며 그것은 바로 회심과 함께 시작하며 선교를 통해 증진되어 간다.47) 즉 구속사적인 안목과 선교사관적인 관점이 에드워즈의 역사관을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선교는 부흥을 촉진하고, 부흥은 선교를 초래하면서 구속역사의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필수불가결한 요소들이다.
에드워즈는 “교회는 선교적 교회여야한다”라는 명제를 미국 교회에 제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에드워즈는 교회 지도자들과 평신도들에게 선교에의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를 취하도록 독려함으로 그리스도의 전도대사명을 대중화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지상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러한 우주적 소명과 비전을 불러일으킴으로 훗날 19세기가 위대한 선교의 세기가 되고 미국이 선교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사상이 담겨있는 책이 「비상한 기도 안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분명한 의견일치와 가시적 연합을 증진하기 위한 겸허한 시도(Humble Attempt to Promote Explicit Agreement and Visible Union of God's People in Extraordinary Prayer)」인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에드워즈가 소유했던 하나님의 구속역사가 완성을 향하여 점진하고 있다는 낙관적 견해와 부흥에 대한 열망이 빚어낸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기도합주회 운동과 부흥설교는 선교지향적인 특성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이렇게 진작된 선교는 결국 천년왕국이라는 단계로 이어지는 중요한 계기가 되리라고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는 당대에 일어났던 영적각성운동도 결국은 만방에 복음이 전해짐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선교적 소망”의 차원에서 이해했던 것이다.48)
에드워즈의 출판되지 않은 글들(Miscellanies) 속에서 “주의 길을 예비하라(Prepare Ye the Way of the Lord)”라는 “구속역사의 진보”에 대한 언급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각 시대는 마지막 완성의 단계를 향하여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준비적 단계로 보았다.49) 이러한 사실은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적 견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현대 선교운동에 가장 지대한 공헌을 미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왕국이 재림 전에 지구 곳곳에 확장될 것으로 확신하였다. 에드워즈도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기간이 네 시대로 구분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첫 시대는 사도들의 활동 시기이며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종식되었고, 그 둘째 시대는 콘스탄틴 대제의 회심과 함께 기독교가 박해를 승리한 시기라고 간주할 수 있으며, 그 셋째 시대는 적그리스도의 멸망이고, 그 마지막 시대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세 번째 시대의 마지막 세대에 살고 있었다고 믿었으며,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아 적그리스도의 세력이 제압되었고 그러한 절정을 그의 시대에 경험할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적그리스도가 패배함으로 교회는 세계 열방의 이방 족속들이 모여드는 것을 목격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일어나고 있었던 부흥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마지막 시대임을 알리는 “종말론적 증거들”이라고 믿고 있었다.50)
그런데 에드워즈의 구속사관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도래할 천년왕국은 기독교인의 복음사역과 교육, 그리고 선교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천년왕국 사상을 통하여 당시 일어나고 있던 부흥과 선교를 접목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임하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선교적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리고 천년왕국 사상과 함께 회심의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타올랐던 부흥과 선교의 열정은 더 이상 신대륙이나 미국만의 기독교가 아닌 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선교적 지경을 확대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이렇게 천년왕국 사상에 의한 새로운 시대적 인식은 전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와 의도를 구하는 것으로 발전하면서 선교운동이 확산되었다.51)
이러한 신학적 토대 위에서 부여된 선교 동기는 청교도들로 하여금 인디안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어졌고, 후에 미국교회가 전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52) 또한 청교도들의 인디안 선교야말로 후대 선교운동의 귀한 모델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비버에 의하면, 신대륙에서 일어난 선교운동의 주요한 선교적 동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디안들의 영혼을 향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동기는 그 후에도 지속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독립전쟁을 경험한 이후의 시기(1776-1800)에 이르게 되면, 미국 교회는 어느 때보다도 천년왕국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가득하게 된다. “천년왕국 사상으로 취했다”라고 표현될 만큼, 전천년설 혹은 후천년설을 선호하는 경향이 공존하였지만, 결국은 남북전쟁 이전까지는 보다 낙관적인 천년왕국 사상이 더 호소력을 지니고 있었다.53) 그런 면에서, 제임스 드 종(James A. de Jong)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천년왕국 대망,” 특히 후천년설적 기대야말로 17-18세기의 영미 선교운동을 활성화하는 주요한 동기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54) 결국은 종말론적 동기가 미국을 비롯한 현대 선교운동이 전 세계를 품을 수 있는 방향성을 제공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I-2-3. 하나님의 주권적 구속사역과 인간의 전적인 헌신
이미 전술한 에드워즈의 시대구분에 의하면, 그는 자신의 시대는 세 번째에 해당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런데 이 시대도 대략 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예루살렘의 멸망, 예루살렘의 멸망으로부터 콘스탄틴 대제에 의한 이교도적 로마제국의 멸망, 그리고 그 이후부터 적그리스도의 멸망까지의 시기로 나누어서 이해했다. 자신의 시대에 바로 적그리스도의 멸망과 지상의 사탄왕국이 궤멸되면, 바로 천년왕국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확신 속에 살았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천년왕국이야말로 교회의 부흥과 선교, 그리고 기도합주회 운동을 통하여 점진적으로 이 땅에 임한다고 믿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속사역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이 이 땅에 도래하는 데에 매우 필수적이라고 간주하였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후천년설은 교회가 적극적으로 선교를 비롯한 하나님의 일에 참여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협력자가 되는 것은 영광스러우며 의미 있는 일임을 강조하였다.55)
에드워즈가 하나님의 예정과 인간의 전적 타락을 신봉했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와 선교에 있어서 역동성을 제공한 것은 매우 가치 있는 공헌이 아닐 수 없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신학적 주제 중의 하나는 바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을 어떻게 조화시켜 선교와 부흥을 도모할 수 있는지에 집중되었다. 에드워즈와 그의 신학적 후예들(the New Divinity)은 구원과 은혜의 수단으로서 “선교적 확장”에 대하여 긍정적인 인식을 하였다. 하나님의 신적 목적이 구현되는 과정에서 구원의 목적과 수단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이해하였다.56)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예정을 철저히 신봉하면서도 결코 복음을 선포하는 사역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구속사역이야말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주된 방법이며, 복음 선포라는 선교적 과제는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첩경인 것이다. 그는 선교적 확장에 있어서 필수적인 설교야말로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신적 방법이며, 또한 인간을 변화시켜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게 하며, 그리고 천년왕국이 임하게 하는 거룩한 수단이라고 확신하였다.57)
믿음의 이해에 있어서도 에드워즈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도구적 성격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은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도록 하나님의 주권적으로 사용하시는 도구라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믿음의 도구적 성격에 대한 칼빈의 이해에 크게 의존했다고 볼 수 있다. 즉, 공로적 원인은 그리스도의 의이며, 그것을 적용시키는 도구적 원인은 우리의 믿음이다. 따라서 우리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콘라드 체리(Conrad Cherry)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명백하게 전가의 교리를 고수하고자 했지만, “개혁주의적 전통이 인간의 믿음의 행위를 칭의에 포함시키려고 시도한 태도에 대해서는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58)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믿음의 성격에 대한 이해는 매우 필요하다. 그는 고린도전서 1:29-31을 근거한 “인간의 의존을 통하여 영광 받으시는 하나님(God Glorified in Man's Dependence)”이라는 설교를 통해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주권에만 의존할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장 크게 드러난다고 강조했다. 하나님 한 분만이 인간의 구원을 포함한 모든 선의 유일한 근원이고, 우리의 선이 오직 하나님만을 통해서만 오는 것이며, 선 자체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내용이다. 믿음도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존해야 함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체감(sensibleness)할 수 있어야 함을 역설하였다.59) 이 설교 안에서 삼위일체 신학을 찾을 수 있고, 구속사적 역사관을 발견할 수 있으며, 그리고 기독론의 역동성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우리는 알미니안 신학을 비판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역할을 균형 있게 조화시키는 에드워즈의 신학적 혜안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의 구속사역에 전적으로 참여하라는 에드워즈의 강조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役事)하심이 우리의 선교적 노력을 도구로 하여 역사(歷史)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이루어간다고 간주할 수 있다.
I-2-4. 에드워즈의 새로운 선교 이미지
에드워즈에게 선교는 구속역사를 움직이는 주된 동인이었다. 믿는 성도들을 불러 모아 그리스도께 연합시키며, 악에 대하여 선이 이기도록 격려하고, 택한 성도들의 아름다움을 완성하고, 그리고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선교의 목적이야말로 초기부터 에드워즈의 주요한 관심사였다.60) 이러한 목적을 완수하도록 하나님께서는 선교에로 그의 백성들을 부르시며, 성령의 역사하심에 따라 일어나는 부흥운동이 선교운동을 촉진시키고 동력을 제공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각성운동은 무엇보다도 선교의 긴박성을 제공하고 많은 이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소망의 계기로 인식되었다. 즉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이 특수하게 임한 시기이며, 그리스도께서 자비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안으로 들어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에드워즈는 “선교야말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가시는 과정에서 주변적이거나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적이며 우선적인 것”이라고 간주하였다.61)
선교사역의 결과는 구속사역의 진보로 나타나며, 선교사(missionary)는 하나님께서 그의 일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선택한 도구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62) 그리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선교와 부흥은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였다. 영적인 각성 혹은 부흥 운동은 성령께서 강력하게 임하셔서 죄인들로 하여금 죄를 자각하고, 부르심의 소명에 합당하게 임하게 하며, 그리고 죄인을 회심시키는 것들은 마지막 세대의 특징들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인식을 바탕으로 하여 에드워즈는 하나님께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려는 의도와 그것을 드러내 보이시는 임재를 인식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아 올 것을 간절하게 선포하였다.
III. 조나단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의 영향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방법을 고찰하는 데 있어서, 당시의 청교도 사회와 인디안들이 처했던 시대적 상황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무리 신앙적 동기에서 선교를 시행했어도 청교도 백인사회와 그 땅에 먼저 살고 있었던 인디안들의 입장은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고 갈등과 전쟁으로 얼룩질 수밖에 없었던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디안 선교를 위한 거점을 확보하는 것은 군사적 목적을 위하여 세우는 것보다 경제적으로 약 절반가량의 비용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독교로 개종한 인디안들은 신대륙에 정착한 백인사회의 안전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63)
신대륙으로 이주한 청교도 사회는 인디안들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진정한 인간”으로 간주했으며, 복음에 반응하고 복음을 이해할 수 있는 이성적인 마음을 소유했다고 확신하였다. 비록 인디안들이 문명의 혜택과는 동떨어진 삶을 영위하고, 악한 영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지만, 복음이 전해지면 죄와 영원한 죽음에서 구원받고 야만적 상태에서도 벗어나 문명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인디안들도 고유한 인간성과 영혼, 그리고 마음의 합리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청교도들의 확신은 그 후에도, 인종적 편견에도 불구하고, 미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중요한 기반으로 작용하였다.
인디안 선교에 있어서 복음전도는 문명화와 밀접한 관련성을 맺으면서 전개되었다. 저주에서 구속으로, 그리고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성장은 인디안들에게 영국의 문명에 접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복음을 통해 인종을 초월하여 백인 기독교인과 인디안 기독교인이 하나가 되는 경험도 하면서 이러한 이중적 선교과제는 초기에는 비교적 순조롭게 시행되었다. 약간의 예외는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청교도들은 처음부터 인디안을 선교하는데 교리적 설교와 문답교육을 매우 중시하면서 다양한 선교방법들을 적용하였다. 특히, 교육을 중시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는 청교도들은 회심을 단지 고백의 차원만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열매로 회심의 증거를 삼는 신학적 특성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문명화가 회심의 전제가 될 수는 없지만 결과로서 주어질 수 있음은 에드워즈도 그의 사역을 통해 인식하고 있었다.64)
브레이너드와 인디안 선교를 감당했던 모라비안들은 예외였고, 토마스 메이휴는 개인 간의 대화방법을 통해 전도하기를 즐겨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청교도 신앙을 배경으로 한 선교방법을 교리문답을 강조하였고 이러한 선교방법은 설교의 역할을 드높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인디안 부족어로 출판된 최초의 책이 존 엘리어트의 「인디안 교리문답(Indian Cathechism)」이었다.65) 이러한 선교방법을 우선적으로 시행한 배후에는 기독교의 복음을 어느 누구에게든지, 어디서든지 차등 없이 전하고자 하는 열의와 함께, 악한 의도를 갖고 있는 백인들과 이교도 인디안들로부터의 부정적인 영향을 차단하고 신앙적인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을 지켜나가게 하기 위한 의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에 입문하는 인디안들을 “기도하는 인디안들”의 마을에 모여 살도록 독려하곤 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학교와 교회를 세워 새로운 신앙공동체의 중심이 되도록 하였다. 물론 인디안 사회에 교회를 설립하는 것은 학교를 세우는 것보다 시간이 더 걸린 것은 사실이다. 학교에서는 신앙교육 뿐만 아니라, 글을 읽고 쓰는 언어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그 외에도 농경술, 목공기술, 철공예, 피혁 및 모직 공업 등을 교육함으로 그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다양한 기술을 습득하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그런데 특기할만한 사실은 초기에는 백인들이 교사로 활동하는 자들이 많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디안 중에서 교육과 목회를 담당하는 자들이 더 많아졌다는 것이다. 최초로 히아쿰스(Hiacoomes)라는 인디안 목사가 1670년에 배출되었고, 1700년에 이르게 되면 메사추세츠 지역에만 37명의 인디안 목회자들이 활동하게 되었다.66)
존 서전트는 효과적인 학교교육을 위하여 기숙사 학교 제도를 도입함으로 인디안들의 교육의 질을 향상시켰다. 이러한 교육을 시행한 이유는 가능한 이교도적 가정적 영향으로부터 분리시켜 기독교 교육을 보다 효과적으로 시키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교육의 실례는 후대의 인디안 선교뿐만 아니라 미국교회가 시행하는 해외선교에 널리 적용되는 선례를 남기는 역할을 하였다. 이 뿐만 아니라, 선발된 인디안들을 보스톤 라틴학교나 하바드 대학에 보내기도 했으나, 이러한 실험은 곧 중단되고 말았다. 인디안 부족어를 교육시키는 것이 교육과 신앙생활에 유익함을 절감하여 인디안어로 성경을 비롯한 신앙서적을 번역하여 보급하는 기독교 문서운동인 소위 “인디안 문서사업(Indian Library)”이 엘리어트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렇게 인디안 선교에 시행한 방법들이 후에 미국 개신교회가 해외 선교에 적용한 실례들이 되었다.67)
청교도들의 인디안 선교에서나, 미국 개신교회의 해외선교에 있어서 전도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개의 다른 대사명”은 구분은 되었지만, 서로 분리되지 않은 채 준수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 사함을 통한 구원의 메시지를 강력하게 선포하면서, 피선교인들이 처해 있는 형편과 처지를 개선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에드워즈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役事)에는 두 가지 국면이 있다고 생각했으며, 개인을 회개시키고 성화의 삶으로 나와 영화의 길로 나아가도록 복음전도가 필수적이며, 또한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창조와 역사 그리고 섭리와 관계된 국면에서 선교적 사업이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그래서 복음적인 영적 대 각성운동은 사회개혁에도 열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다.68)
에드워즈를 비롯한 개신교회에 의한 인디안 선교는 세계적 규모의 선교운동의 초석이 되었으며, 어느 선교운동보다도 강력한 역동성을 제공하였다.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겸허한 시도」 등을 비롯한 신학 저서들은 신대륙뿐만 아니라, 영국의 성도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기도합주운동과 함께 강력한 해외선교 열정이 점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인디안 선교로부터 모든 개신교회가 참여하는 세계적 규모의 선교사업과 미국 내지선교본부(American Home Missions)가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의 종교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에드워즈와 그의 신학적 후예들이 미국의 해외선교운동의 시작과 형성에 미친 지대한 영향력에 대해서는 거의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에드워즈는 미국이 해외선교를 시행할 수 있는 신학적 토대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통해서 선교사의 모델을 제시함으로 현대선교운동의 확산에 공헌하였다.69)
에드워즈의 인디안 선교는 선교지 상황과 청중들의 입장을 존중하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그가 인디안들에게 선포한 설교들의 내용은 나중에 그의 신학저서들의 기본주제가 될 영적 보화였으며, 칼빈주의적 교리들을 중심으로 전달하였다.70) 그러나 그의 전달방법은 인디안들에게 매우 적합했다. 에드워즈의 설교들은 신구약에서 거의 균등하게 본문을 택했으나, 인디안들에게 선포된 설교들은 상당부분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본문으로 하여 선포되었다.71) 그 이유는 다양한 비유들이나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무게 있는 교리적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전해야 할 내용은 전하면서, 그 전달방법은 대상과 상황에 따라 적절하게 대응하는 선교적 자세와 목양적 태도를 겸비한 선교사-목사(missionary-pastor)였다.
닫는 말
고찰한 바와 같이 에드워즈의 구속역사에 대한 관심, 선교를 위한 신학적 토대조성, 그리고 브레이너드의 선교적 사표는 현대 선교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요인들이었다. 에드워즈의 신학은 철저히 개혁신앙에 근거하고 있으면서, 선교와 부흥을 지향하는 특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최근에 들어서 에드워즈의 선교적 업적에 대한 연구가 증가하고 있지만, 그 영향력에 비해서는 아직도 부족한 실정이다. “에드워즈의 선교적 전설”에 대한 다각적인 논의와 연구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선교적 자각이 필요한 한국교회에도 적지 않은 도전을 제공할 것이다. “개혁으로 말미암는 부흥과 선교(revival and mission out of reform)”가 절실한 이때에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은 더욱 점증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에드워즈의 신학과 선교적 삶이야말로 개혁신앙을 가늠하는 시금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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