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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960년대 총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960년대 총신 
오늘의 총신과 재단이사회의 역사적 전통을 찾아서 
 소재열 목사(장로회역사헌법연구소)  
 
   역사적으로 교단 총회의 정치역학상 세 개의 권력의 축이 형성되어 왔고 지금도 그 축은 진행되고 있다. 그 세 개의 축은 첫째, 총회 임원회와 둘째, 총신대학교 이사회, 셋째, 교단의 언론을 맡고 있는 신문사이다. 총회 임원회의 임기는 1년이지만 교단 신학교 법인 이사는 임기가 4년이요, 교단 직영신학교로서 목사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으로서 그 비중이 두 개의 축보다 우위에 있다. 이러한 정치 역학의 공식은 초기 선교사 공의회 때부터 정립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김요나, 『총신90년사』, 431쪽).
 
   마포삼열 선교사가 1890년에 서울에 도착하여 6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운 후 8월 28일 조랑말을 타고 서울을 출발하여 6일만에 평양에 도착한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4월에 마포삼열 목사는 선교거점을 평양으로 옮긴다. 당시 평양의 인구는 7만에서 10만 정도되는 서울 북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미포삼열 선교사는 평양에다 선교부를 개설하고 신학교를 세웠다. 서울의 언더우드 선교사보다 앞서 평양에 신학교를 세워 멕코믹신학교 출신 군단의 시대를 연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평안도와 황해도를 양 날개로 서북파 핵심으로써 한국교회의 정치의 메카를 열어 4반세기를 이끌어 간 것이다.
 

   남산 장로회신학교 제1회 졸업식

   1948년 6월 3일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하여 남산에 장로회신학교가 설립하여 개교되고 1951년 5월 25일 부산에서 속회된 제36회 계속총회에서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는 총회 직영을 취소하고 총회 직영신학교를 신설”하기로 결의했다. 이때 신설된 신학교가 바로 1952년 9월 18일에 대구에서 개교된 총회신학교(교장 감부열 목사)이다.

   그 이후 총회신학교는 1955년 남산에 있을 때 각종학교를 인가를 받은바 있다. 그러나 1955년 통합측과 분열된 후 총회신학교는 1959년 10월에 연동측 인사들에게 <장로회신학교>라는 이름으로 귀속되어 버렸고, 교단지인 <기독공보> 역시 그들이 가져가 버렸다. 그들은 신학교 이름을 총회신학교에서 장로회신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분열된 양 총회는 신학교도 분열을 가져왔다. 장로회신학교와 총회신학교로 분열된 것이다. 이 분열을 우리는 제44회 총회(1959)의 연동측과 승동측의 분열이라고 역사는 기록한다.

   1958년 3월 7일 대전 제일교회당에서 모인 총신이사회는 3천만 환 사건으로 총회가 분열되기 1년 전 이사회에서 박형룡 박사의 사표 수리를 가결시켰다. 박형룡 박사는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사표를 냈다. 이사회는 이 사표를 받을 것인지를 표결에 부쳐 가결시켰다. 후임 교장에는 1년간 총회장 노진현 목사가 그 직을 대행하였다. 1959년 9월 24일 제44회 총회 전에 교장 선임을 위한 이사회를 소집했지만 결국 교장 선임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교장을 선임하지 못한 상태에서 총회는 분열되고 말았다.

   미국의 북장로교회와 북미연합장로회가 1958년 6월 연합총회에서 합동승인이 됨으로써 한국총회는 종래의 미북장로회 명칭을 미국연합장로회로 개정하는 결의를 해야할 것과 여기에 따라 헌법 9장 33조 1항을 개정하는 일, 그리고 종래의 미국장로회 선교부를 해체하고 총회 내에 통합하는 상호약정서를 승인한 후 연합장로회 선교부 사업을 인수하는 일이었다. 해외 선교부의 모든 일이 총회 내로 통합하는 일은 해외선교부로부터 온 선교비를 어떻게 사용하고 분배할 것인가 라는 문제는 상당한 이권으로 등장하였다. 총회의 이러한 이권문제는 총회 권력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달라졌다. 선교사들은 여전히 선교행정이 총회로 이관되더라도 여전히 총회 뒤에서 막후 조정자로 계속 남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서 제44회 총회의 혼란은 선교사들의 개입이 한 원인이기도 했다. 그 선교사들은 승동측과 연계되어 있었던 것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

   1960년 12월에 13일 제45회 계속총회에서 고신측과 예장측이 합동하여 합동총회가 탄됐다. 1963년에 고신측은 다시 환원해 나갔다. 1959년 교단지인 기독공보와 신학교와 해와 선교단체가 다 통합측에 귀속되어 버리자 합동측은 마치 빈껍데기와 같은 교단의 어려운 사정과 더불어 총회신학교 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통합측과 분열 후 9년에 문교부 당국으로부터 1967년 5월 4일(문교부 1042. 1-972호)에 학교법인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을 인가 받았다. 인가받을 당시 법인의 목적은 “대한민국 교육으 근본 이념에 기하여 고등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를 유지 경영한다”였다. 명칭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이었다.

   1967년 6월 3일에는 문교부로부터 대학령에 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교 설립을 인가받았다. 문교부터 학교법인의 인가를 받은 이후 첫 이사회가 1967년 6월 15일 오후 3시에 서울 순화동 평안교회 당회실에서 정관 변경의 건과 교장 및 교수임명의 건으로 재단이사회가 소집되어 명신홍 박사를 교장으로 임명했다. 이때 교수 임명은 문교부 자격기준에 의해 임명된 교수는 “박형룡, 박윤선, 이상근, 최의원, 차남진, 안용진”교수였고, 부교수로는 “김득룡”, 조교수는 “간하배, 김의환, 박병춘, 김혜라”교수였다. 13명의 이사에서 15명으로 “유능한 이사 증원”을 결의했다. 이 이사회를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원 제1회“라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때의 이사장은 김인득 장로였다.

   1969년 5월 15일에 명신홍 박사가 교장직 사표서를 제출하자 제9회 이사회(1969. 5. 27)에서는 사표를 수리하고 투표로 박형룡 박사를 교장으로 선임했다. 1969년 12월 24일에 각종학교에서 정식 대학의 명칭을 얻게 되었다. 학교 명칭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 탄생되었다. 총회신학대학 설립인가로 부수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제10회 이사회는 1970년 2월 9일에 박형룡 교수를 총회신학대학 학장으로 임명했다. 당시 박형룡 박사 나이 74세였다.

   재단이사회 15인과 운영이사회 15인을 선정하여 실행이사회를 구성하여 학교의 실질적인 운영을 주도해 갔다. 1970년 11월 16일 승동교회에서 회집하여 총회신학대학 발전을 위하여 사당동 캠퍼스 현 교사를 매각하고 새 후보지를 선택하기 위해 실행이사회는 <총회신학대학교 발전 위원 7인>이 선정됐다. 실행이사회의 결의와 때를 맞추어 <법인이사회>는 1971년 1월 16일 남대문 미흥여관에서 “학교운영문제(기본재단 용도변경과 처분하는데)”와 결부하여 장시간 논의 끝에 신학교 교사를 이전하는데 원칙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의하고 교사 이전하는데 전권을 박남조, 김인득을 포함한 9인 위원에게 맡기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학교 교사 건축이 시작된지 7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전기 시설조차 하지 않아 호롱불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교 운영은 어려웠다. 당시 교수들의 급료도 지불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학생들은 분노했다. 1971년 6월23일 학생들은 결의문을 채택하고 교사 이전을 반대하여 항의했다. 학생들은 각 학급에서 3명씩 대표를 뽑아 전권위원회를 조직하고 방학 중에라도 투쟁하기로 했다. 학생 전권위원회는 결의문을 작성하고 각 이사들과 총회에 제출했다.

   당시 학생 대표 전권위원들은 다음과 같다.

   대학부 1년: 오기문, 박형희, 김영배, 2년: 이경원, 김태우, 정일웅, 3년: 한복기, 김종후, 권순직, 4년: 장정일, 김영우, 박천일.

   신학부는 1년: 서병엽 이종영, 유영기, 2년: 박현, 이화식, 김영진, 3년: 박도순, 이종표, 선병문 등이었다.

   1971년 7월 31일, 학생들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대 이사회〉

1. 학원 교육 시설을 완비하라.
  . 기숙사를 신축하라.
  . 현 교사를 완공하라.
  . 전기를 가설하라.
  . 학습시설을 확보하라.

2. 실질적 인 교수진을 강화하라.
  . 교육법 시행령에 업각한 참신하고 능력있는 교수진을 보강, 확보하라.
  . 학교에 지대한 공이 있는 노교수를 명예교수로 추대하라.

3. 학원경영의 합리화를 기하라.
  . 현 교사 불법적인 매각을 즉시 중지하라.
  . 3천만원 모금을 조속히 완료하라.
  . 교수, 강사의 처우를 개선하라.
  . 공석중인 총무처장을 능력 있는 행정가로 조속히 발탁하라.
  . 실무이사를 학교에 상주시 켜 라.

〈대 총회〉

4. 현재 이사진을 개편하라.
  . 불법적인 교사 매각을 시도한 이사는 사퇴하라.
  . 파벌 및 지방색을 선동 노정해온 이사는 사퇴하라.
  . 지방신학교의 책임자 및 그와의 겸직이사는 사퇴하라.
  . 효율적 이사업무 수행 불능의 노이사는 사퇴하라.
  . 참신하고 능력 있는 새 이사진을 구성하라.

5. 총회 직영 신탁 교육기관인 본교의 발전을 위해 지방신학교를 폐쇄하라.

이에 이사회와 각 노회와 총회는 조속한 시일 안에 합법적 방안을 모색하여 명확한 결정을 내리고 구체적 해결에 임하라.

<행동강령>

이상과 같은 우리의 요구사항이 관철되었다고 인정될 때까지 전국 각노회장의 추천으로 본 교에 입학한 우리 3백여 학우는 자퇴를 각오하고 끝까지 단결, 투쟁한다.

   1971년 7월 15일에 실행이사회는 사태 수습에 나섰고 일단 학교 전기공사는 경기장로회에 요청하여 시설토록 했고 각 강의실에 미장공사를 방학중에 마무리 하기로 했다. 이날 실행이사회는 학생들의 쟁점인 사당동 캠퍼스 이전 문제를 백지화하는 등 적극적인 사태 수습에 나섰다.

   1971년 9월 23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제56회 총회가 개회됐다. 이때 이사회가 해산되고 재조직을 위해 전국 32개 노회에서 파송한 이사회가 11월 11일에 모임을 갖고 이사회를 재조직했다. 이때 이사회 임원진을 구성하고 실행이사회를 조직한 후 총신대 운영소위와 재단대책위로부터 그간의 활동을 청취한뒤 이사회는 총신대 캠퍼스 매매건이 완전히 불법임을 결의하였고 조속한 시일 내에 복구토록 <재단대책위>에 촉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재단이사는 모집을 원칙으로> 각 지역별로 안배하되 대상교회를 정해 이사들을 선출하기로 결의했다.

   1971년 10월 2일 총신 재산보호위원회가 결성되어 <7인 재산위원회>가 발족됐다. 신학교가 초기 교사를 건축할 때 자금난으로 사채를 끌여다 쓴 것이 화근이 되어 이자가 눈동이 처럼 불어났다. 이 이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사당동 학교부지를 비싸게 팔아 빚을 갚고도 학교를 건축할 수 있는 경기도 광주에 땅을 싸게 구입하자는 것이었다. 학교 부지를 1억 4천500만 원에 계약금 10%을 받아 700만을 광주 땅 10만평의 계약중도금으로 치렀다. 이런 계획이 원활하게 진행되는 중에 학생들의 시위가 진행됐고 총회는 본 건에 대한 매매문제가 폭로되자 총회가 큰 혼란에 빠졌다. 이 일로 재단이사회와 실행이사회, 그리고 전체이사회가 해산되었을 뿐만 아니라 계약된 땅을 해약하도록 결의하였고 <재산 보호위원회>를 구성하여 수습하도록 일임했다.

   계약 당사자인 땅 주인은 신학교가 계약 이행을 하지 않자 매매 성립을 위해 법원에 소송을 제기하였다. 신학교측은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계약파기를 위한 소송을 제기하였으나 두 번 판결 모두가 “해약하려면 계약금의 두 배인인 2,900만원을 변상하라”는 판결이 나왔다. 결국 땅주인들을 설득하여 1,100만으로 합의를 했고 모든 문제가 일달락 됐다. 사당동 캠퍼스 매매사건은 4년이란 세월이 걸렸고 1974년 4월 27일에 해결됐다.

   1975년 12월 16일에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신학대학>이라는 교명이 문교부로부터 변칭변경 허가를 받았다. 학교 명칭은 <총신대학>이었다. 이 이름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9. 5. 21. 리폼드뉴스)
http://blog.daum.net/kkho1105/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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