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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신학자

칼빈과 칼빈주의, "저지대 지방에서의 칼빈주의"

칼빈과 칼빈주의, "저지대 지방에서의 칼빈주의"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는 최근 제40차 정기학술세미나를 열고 김요셉 교수(칼빈대학교)를 초청, "고난 당하는 피난민의 신앙 고백"(칼빈과 칼빈주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다음은 강연 전문.
4. 저지대 지방에서의 칼빈주의
저지대 지방은 지금의 벨기에,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에 해당하는 라인강 하류의 17개 지역을 일컫는다. 이 지역은 16세기 가장 강력한 로마 카톨릭 국가들 중 하나였던 스페인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 하에 있었지만 이 지역은 지리적인 위치상 일찍이 종교개혁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았다. 사실 16세기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이전 15세기에 공동생활 형제단(Brethren of Common Life)이 저지대 지역의 데벤터를 중심으로 발흥해 어거스틴적인 구원론과 인문주의적인 안목으로 기존 로마 교회를 비판하며 새로운 개혁 운동의 씨앗을 마련한 바 있었다. 16세기 초의 급진적 재세례파 운동도 저지대 지방의 개혁적 성향에서 동력을 얻었다. 16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 지역은 다양한 종교개혁 운동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좀 더 온건한 성향을 지닌 메노 시몬스(Meno Simons, 1496~1561)의 영향 아래 메노나이트파가 네덜란드와 북부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동쪽으로는 독일 북부의 루터파의 영향을 받았고 서쪽으로는 1558년 이후 잉글랜드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남쪽으로는 1560년대를 넘어서면서 프랑스의 위그노들의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1540년 이후 이 지역의 로마 카톨릭 정권이 본격적으로 종교개혁 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한 이후, 암스테르담과 같은 상업 지역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기 시작한 개혁주의 교회들이 루터파와 재세례파를 제치고 저지대 지방의 종교개혁 운동을 주도하게 됐다.
칼빈주의가 16세기 후반 저지대 지방의 종교개혁을 주도하게 된 데에는 크게 세 가지 요소가 중요하게 작용했다. 첫째, 저지대 지역의 경제적 주체 세력이었던 상공업자들과 상인들, 특히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남부 왈룬 지역에는 이곳으로 피난한 프랑스 개혁교회의 칼빈주의자들이 칼빈주의를 파급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둘째, 다양한 종교개혁 사상이 경쟁하는 가운데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는 체계적인 신앙 고백을 마련해 통일성 신학에 기초한 개혁을 이뤄냈다. 마지막으로 칼빈주의는 스페인 왕권에 반대해 저지대 지역의 독립을 추구하던 정치 지도자들과 연대함으로써 새로운 공화국의 종교적 기초로 자리잡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저지대 지방의 독립을 추구하던 사람들이 칼빈주의를 선호하게 된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이 1555년 아우스크부르크 종교화의 이후 루터파가 주도하게 된 독일과 차별을 원하는 정치적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뮌스터 사건의 경험 이후 계속해서 재세례파의 반정부적 성향을 우려하던 정서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세 가지 요인은 곧 저지대 지방 개혁주의 교회의 성격에 영향을 줬다. 첫째,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는 국제적 성격이 강했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독일, 프랑스를 연결하는 상업적 중심지로서 자리잡고 있던 저지대 지방은 이들 지역의 다양한 칼빈주의적 발전과 관계되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상황은 저지대 지방이 당시 종교적 피난민들,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칼빈주의자 피난민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북방의 제네바라고 불린 엠덴에는 잉글랜드와 유럽 각국의 종교적 피난민들이 몰려 들었으며 이 곳의 지도자 존 아 라스코(John a Lasco, 1499~1560) 역시 런던에서 피난민의 경험을 한 인물이었다. 이후 엘리자베스의 통치 시기에 저지대 지방이 잉글랜드 청교도들의 피난처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 역시 이 지역의 칼빈주의가 가지는 국제적 성격의 중요한 특징이었다.
둘째, 체계적, 저지대 지방 개혁주의 교회는 신학적 성경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따라서 16세기 말과 17세기 초에 걸쳐 중요한 칼빈주의적 신학을 대변하는 중요한 신조들을 작성했다. 이 지역 개혁주의 교회들의 통일성을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가장 대표적인 신조들은 1561년 제정된 “벨기에 신앙고백”(Belgic Confession)과 17세기 초 칼빈주의 진영의 신학적 분열에 대처하기 위해 1619년 제정된 “도르트 신조”(Canons of Dort)이다. 이 두 가지 신조들은 프랑스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핍박 받는 교회를 변호하고 개혁주의 교회가 칼빈주의에 입각한 통일된 신앙을 정립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었다. 통일된 신앙 고백의 신학적 틀은 칼빈주의였는데, 그것은 이 신조들을 작성하는데 있어 신학적 작업의 기초를 놓은 인물들이 피난의 기간 동안에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선 벨기에 신조의 주 저자인 가이 드 브레(Gudy de Bres, 1523~1567)는 그 자신이 종교적 피난민이었고 결국에는 자신의 신앙으로 인해 순교한 인물이었다. 그는 성경을 읽고 스스로 종교개혁에 참여한 이후 합스부르크의 탄압을 피해 1548년 런던으로 도피해 그곳에서 신앙과 신학을 발전시켰다. 1552년 귀환한 그는 저지대 지방의 프랑스어권 개혁주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는데 그 지역의 정치 지도자들에게 칼빈주의가 반동적이거나 미신적이지 않다는 것을 변호할 필요를 절감했고 그 결과 그의 동료들과 함께 벨기에 신앙고백을 작성했다. 이 신조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저지대 칼빈주의 발전에 공헌했다. 우선 이 신앙고백은 합스부르크의 필립 2세에 맞서 저지대 지방의 독립을 지향하던 지도자들에게 개혁주의 교회가 재세례파와는 차별된다는 것을 확실히 하여 이후 칼빈주의가 저지대 지방의 독립 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기반이 될 수 있는 기틀을 제공했다. 벨기에 신앙고백은 다음과 같이 그 마지막 조항에서 분명하게 핍박당하는 성도들에 대한 위로와 격려를 표현하고 있다.
“신실한 자들과 택함을 받은 자들은 영광과 존귀의 면류관을 쓰게 될 것이요 성자께서는 성부의 그의 택하신 천사들 앞에서 그들의 이름을 인정하실 것이며 그들의 눈에서는 모든 눈물이 사라질 것이요 지금은 많은 재판관들과 행정관리들에 의해서 이단이나 불경건이라고 정죄를 받고 있는 일들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을 위한 것이었음이 밝혀지게 될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가장 뜨거운 열심으로 이 위대한 날이 임하여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약속을 충만하게 누릴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이렇게 벨기에 신앙고백은 각기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문화적 환경이 달랐던 저지대 지방의 개혁적 교회들을 그들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 가운데에서 단일한 신앙고백으로 묶어내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신앙고백은 1568년 베젤 총회와 1571년 엠덴 총회에서 모두 채택됐고 이후 1619년에는 홀란드와 벨기에, 그리고 미국에까지 개혁파 교회들의 신학적 기준으로 자리를 잡았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저지대 지방의 새로운 정권은 프랑스나 합스부르크 왕가가 추구했던 중앙 집권적 체제를 거부하고 분권적 형태의 독립을 선호했는데, 그 결과 교회의 모습과 신학까지도 다양화 됐다. 또 이 지역은 당시 칼빈주의뿐 아니라 여러 분파의 종교적 영향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칼빈주의를 표방하는 교회 내부에서조차 신학적 일관성을 기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런 난국을 타계하기 위해 소집된 도르트 회의는 알마니안주의의 신학을 정죄하고 이른바 칼빈주의의 다섯 가지 항목의 핵심 신조를 결정했다. 도르트 회의에는 칼빈주의를 지지하는 잉글랜드, 팔라틴, 스위스의 연방 도시들과 독일 헤세, 나사우, 브레멘 등지에서 28명의 외국 대표들이 참가했는데 이는 저지대 지방 칼빈주의의 국제적 성격을 보여준다. 또 도르트 신조의 채택 과정에는 이미 저지대 지방에 머물고 있는 종교적 피난민 신학자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잉글랜드에서 추방당해 네덜란드 영국 난민 교회의 목회자로 있던 윌리엄 에임스(William Ames, 1576~1633)와 존 데이브넌트(John Davenant, 1576~1691) 등이 도르트 신조 형성에 신학적 영향을 줬고, 도르트 회의의 사회를 맡았던 보거만(John Bogerman, 1576~1637) 역시 제네바에서 베자에게 칼빈주의를 배운 인물이었다. 그러므로 도르트 회의와 신조는 저지대 지방의 개혁주의 교회가 갖고 있던 국제적 성격과 이에 따른 피난민 교회로써의 특성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신앙고백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는 이 지역의 정치적 독립 움직임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발전했다. 당시 저지대 지방의 독립을 주도하던 인물은 나사우의 오렌지공 윌리엄(William of Orange, 1533~1584)이었다. 비록 자신의 칼빈주의적 신앙에 대한 고백은 늦게 이뤄졌지만 오렌지공 윌리엄은 칼빈주의 신앙을 소유한 사람이었다. 네덜란드는 윌리엄과 같은 정치 지도자들에 의해 필립 2세가 파견한 알바 장군을 1572년 격파하고 정치적 독립을 얻어냈다. 이후 저지대 지방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프랑스와 영국에 비해 더 빠른 속도로 신학적 체계화를 이뤄냈고 정치적 승리를 얻어냈지만 그 과정 가운데 박해와 피난의 경험은 피할 수 없었다. 1566년과 1578년까지 이 지역에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필립 2세와 오렌지의 윌리엄이 이끄는 애국자들 사이의 전쟁이 계속 됐고, 이 과정에서 많은 칼빈주의자들은 주변 팔라틴 지역이나 스위스 등지로 피난해야만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 개혁주의 교회들은 공권력이 약한 틈을 타 교회를 약탈한 반성직자주의적 성향을 가진 폭도들로부터 지속적인 고통을 당해야 했다. 오렌지의 윌리엄의 승리 이후 세워진 공화국은 메노나이트파와 루터파, 그리고 심지어 로마 카톨릭주의자들과의 더 이상의 갈등을 원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 새로운 공화국 내에서 칼빈주의자들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성례의 정당한 집행과 더불어 치리의 시행을 참된 교회의 표지로 삼는 개혁주의 교회의 이상을 세워나가야 하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개혁주의 교회들은 네덜란드의 독립 이후 “교회법”을 제정하고 세속 정부로부터 교회의 치리권의 독립적 시행을 보장 받고자 했으나 오렌지의 윌리엄은 이런 칼빈주의자들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았다. 1574년 제정된 “교회법”은 세속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1578년 소집하려던 전국 총회 역시 모이지 못하고 3년 후인 1581년에야 소집될 수 있었다. 네덜란드의 칼빈주의자들은 교회가 독립적인 당회를 구성해 권징을 시행하고 목회자를 선출하기를 희망했지만 정치 지도자들은 쯔빙글리의 교회 모델을 따라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설정하려고 했고 영주의 인정을 받지 않는 당회를 용납하지 않았다. 그 겨로가 비록 다른 지역보다 종교적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계속되는 스페인과의 전쟁 과정에서 개혁주의 교회는 더딘 성장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17세기 후반까지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 교회는 그 지역 전 인구의 5분의 1만을 차지하는데 불과했다. 칼빈주의자들은 대부분 상공업자, 상인들이 거주하는 도시들을 중심으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로마 카톨릭 신자들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업 지역에서는 그 세력이 여전히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정치적 사회적 소외와 난관 속에서도 저지대 지방 칼빈주의 교회는 그들의 신앙을 지키고 전수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계속)
김요셉 교수 (칼빈대학교)
http://blog.daum.net/kkho1105/6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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