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과 칼빈주의, "칼빈과 독일의 칼빈주의"
칼빈과 칼빈주의, "칼빈과 독일의 칼빈주의"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는 최근 제40차 정기학술세미나를 열고 김요셉 교수(칼빈대학교)를 초청, "고난 당하는 피난민의 신앙 고백"(칼빈과 칼빈주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다음은 강연 전문.
3. 칼빈과 독일의 칼빈주의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는 1560년 이후 전파된 칼빈주의가 라인강 유역을 중심으로 확장됐다. 이 확장의 배경에는 슈말칼덴 동맹이 카알 5세에게 패한 이후 신성로마제국 영토에 선포된 잠정협약(The Interim)의 효력이 상실된 이후 독일 도시들이 다시 개신교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상황의 변화가 있었다.
팔라틴의 선제후(elector)였던 프레데릭 3세(1559~1576)는 칼빈주의를 보호하고 칼빈주의에 입각한 교회 개혁을 지원했던 정치 지도자였다. 그의 통치 시기인 1559년 4월에 쯔빙글리의 성찬 이론에 가까운 사상을 학위 논문으로 제시한 윌리암 클레비츠(William Klebitz)와 이를 비판한 엄격한 루터주의자 틸레만 헤수스(Tilemann Hesshus)와 논쟁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프레데릭은 스스로의 연구를 통해 루터파의 성찬 이론보다 칼빈주의의 이론이 더 성경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그 결과 그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와 피터 마터의 제자였던 우르시누스(Zacharias Urisinus, 1534~1583)을 각각 1560년과 1561년 하이델베르크에 교수로 초빙했다.
프레데릭은 그들에게 로마 교회와 구별되며 루터파와도 차별되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요리문답 작성을 의뢰했다. 두 학자들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1563년 1월 19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출판됐다.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개혁파 교회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통일된 교리적 기초를 갖게 됐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급속도로 독일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여러 언어로 보급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프랑스의 갈리아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와 루터파 양면의 공격 가운데 개혁주의 교회가 통일된 신학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프레데릭과 우르시누스는 정치적, 신학적으로 이 요리문답을 변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과 고통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요리문답이 출판되자마자 1563년 5월 독일 루터파 영주들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 프레데릭을 회유하려 했다. 그들이 편지를 보내 회유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루터파들이 보기에 이 요리문답의 성만찬에 대한 부분이 쯔빙글리의 상징설을 따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말에는 플라키우스(Matthisa Flacius)가 “논박”(Widerlegung)이라는 글로, 헤수스가 “진정한 경고”(Treue Warnung)이라는 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을 공격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은 안정된 국가 교회에서 사회를 종교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정된 규범이라기보다는 루터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안에서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와 정치 지도자가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를 변호하고 같은 신앙 위에서 교회를 세우고 후대에 이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제정한 고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의 가장 첫 번째 문답이 기독교적 위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이 신앙고백이 고난 당하는 소수자들의 교회의 맥락 가운데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해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해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칼빈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는 올레비아누스의 글에 직접적으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1563년 7월 23일 프레데릭에게 그의 예레미야서 주석을 헌정하면서 프레데릭과 그의 보호 아래 있는 팔라틴의 칼빈주의 교회들이 성만찬 교리에서 “칼빈주의”를 따름으로 인해 독일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련한 건전하고 정통적인 교리를 신실하게 붙들고 그것을 당신의 통치 안에서 자유롭고 지혜롭게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납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마치 전하께서 온 독일을 뒤집어 엎은 듯이 전하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그들이 칼빈주의를 내세운다고 하며 전하에게 불명예의 표시를 덧붙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부패와 무지와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배신을 당할 뿐입니다.
선제후 프레데릭의 보호와 체계적이고 확고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팔라틴 지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라 조직화 됐다. 이 지역의 개혁파 교회들은 안정을 얻어가면서 주변 지역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각 지방에 당회를 세우고 그들을 묶는 노회들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델베르크의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 같은 인물들처럼 칼빈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의 교회 모델을 따라 권징의 권한은 세속 정부에 놓아두기를 원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팔라틴 지역의 교회들은 루터나 쯔빙글리의 교회론적 입장보다는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적 기반 위에서 조직을 갖춰 갔다.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독일의 다른 선제후들의 견제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3세는 칼빈주의 신앙에 철저히 헌신하여서 자기의 아들 요한 카시미르(Joahann Casimir)를 위그노 전쟁에, 크리스토프(Christoph)를 화란 칼빈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보내기까지 했다. 또 그의 아들 카시미르가 삭소니의 선제후 아우구스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이미 멜랑히톤의 영향력이 증가되어 있던 삭소니 지역에 칼빈주의가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1576년 프레데릭이 죽고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된 그의 아들 루드비히 6세는 철저한 루터파의 입장에 서서 칼빈주의자들을 억압했다. 그의 치하에서 600명에 이르는 칼빈주의 목회자들과 교수들이 파면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이후 독일의 루터파들은 내부의 신학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이 발표된 50주년을 기념해 1580년 “협화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발표했다. 독일 지역 대부분의 루터파들이 이 문서에 서명했는데 86명의 제후들과 8500명의 목회자들이 이 신조에 동의를 표했다. 협화신조는 독일의 루터파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다른 개신교 세력, 특히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루터파오의 확실한 신학적 구별과 정치적 차별을 가져다 줬다. 독일 내의 칼빈주의자들은 결국 루드비히의 박해와 협화신조에 의해 활동의 입지가 좁아졌다. 다행히 팔라틴 북부 지역을 다스리던 카시미르의 통치 지역과 백작 요한 4세의 보호 아래 끝까지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나사우-딜렌부르크 지역이 설 곳을 잃은 칼빈주의자들을 보호했다. 나사우는 새로운 독일의 칼빈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1584년 세워진 헤르본 대학을 중심으로 삭소니에서 망명한 멜랑히톤주의자 크리스토프 피첼(Christoph Pezel)과 팔라틴으로부터 피난 온 올레비아누스 등이 활동했다. 라인강 하류의 베젤은 루터파 도시였으나, 1540년 대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피난을 나온 칼빈주의자들을 받아들인 후 이 도시에는 칼빈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특히 1568년에 열린 베젤의 대회는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 교회의 일치와 확장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할트와 헤세, 카셀 지역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협화 신조에 반대하는 분위기와 함께 칼빈주의 교회가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에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칼빈주의로 개종한 이후 브란덴부르크 역시 어느 정도 칼빈주의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독일 내에서 가장 강력한 칼빈주의 교회의 영향력이 남아 있던 팔라틴 지역은 루드비히 6세가 사망한 이후 선제후가 된 프레데릭 4세와 그의 섭정 카시미르에 의해 다시 칼빈주의 교회들이 복원되었고, 하이델베르크가 칼빈주의 신학의 중심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618년부터 시작된 루터파와 카톨릭파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결과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결국 남부 독일의 상류 팔라틴(Upper Palatinate) 지역을 로마 카톨릭 세력에게 넘겨주게 됐다. 17세기 후반에는 라인강 유역의 하류 팔라틴(Lower Palatinate) 지역 역시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공격과 선제후 존 윌리엄(John William, 1690~1716)의 정책에 의해 카톨릭 지역으로 전환되었고 칼빈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혹독한 핍박을 당했다.
이렇듯 독일 전체에 걸쳐 개혁주의 교회는 핍박을 받는 소수였다.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 자신과 마찬가지로 루터파의 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거부하지 않았고, 협화 신조 역시 적대하지 않았다. 루터파 제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했다. 그러나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핍박 받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루터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특히, 프랑스의 성 바돌로뮤 축일 학살 사건과 스페인의 네덜란드 재탈환 등으로 로마 교회가 핍박을 가해 오자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의 개혁주의 교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팔라틴의 칼빈주의자들은 독일의 루터파와의 개신교 연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독일의 루터파는 칼빈주의자들을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파들은 특별히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 문제와 관련해 칼빈주의자들과 로마주의자들을 상대해야 할 양쪽의 적으로 여겼다. 그 결과 독일 지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만찬 이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로마 카톨릭파가 아니라 같은 신앙을 갖고 있던 루터파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핍박의 양상 속에서 그들의 공동체 안에 저지대 지방이나 프랑스,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 망명한 칼빈주의자들을 포용하고 돕는 일을 지속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프란켄탈을 화란에서 추방된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피난처로 제공했고, 프랑크푸르트에는 영국에 망명한 사람들이 칼빈주의적인 신학에 입각한 피난민의 회중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김요셉 교수 (칼빈대학교)
http://blog.daum.net/kkho1105/6531
한국기독교사연구소(소장 박용규)는 최근 제40차 정기학술세미나를 열고 김요셉 교수(칼빈대학교)를 초청, "고난 당하는 피난민의 신앙 고백"(칼빈과 칼빈주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들었다. 다음은 강연 전문.
3. 칼빈과 독일의 칼빈주의
지금의 독일 지역에서는 1560년 이후 전파된 칼빈주의가 라인강 유역을 중심으로 확장됐다. 이 확장의 배경에는 슈말칼덴 동맹이 카알 5세에게 패한 이후 신성로마제국 영토에 선포된 잠정협약(The Interim)의 효력이 상실된 이후 독일 도시들이 다시 개신교 신앙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상황의 변화가 있었다.
팔라틴의 선제후(elector)였던 프레데릭 3세(1559~1576)는 칼빈주의를 보호하고 칼빈주의에 입각한 교회 개혁을 지원했던 정치 지도자였다. 그의 통치 시기인 1559년 4월에 쯔빙글리의 성찬 이론에 가까운 사상을 학위 논문으로 제시한 윌리암 클레비츠(William Klebitz)와 이를 비판한 엄격한 루터주의자 틸레만 헤수스(Tilemann Hesshus)와 논쟁이 하이델베르크에서 벌어졌다. 이 사건 이후 프레데릭은 스스로의 연구를 통해 루터파의 성찬 이론보다 칼빈주의의 이론이 더 성경적이라는 결론을 얻게 됐다. 그 결과 그는 올레비아누스(Caspar Olevianus, 1536~1587)와 피터 마터의 제자였던 우르시누스(Zacharias Urisinus, 1534~1583)을 각각 1560년과 1561년 하이델베르크에 교수로 초빙했다.
프레데릭은 그들에게 로마 교회와 구별되며 루터파와도 차별되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요리문답 작성을 의뢰했다. 두 학자들의 주도적인 역할에 의해 1563년 1월 19일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Heidelberg Catechism)이 출판됐다.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개혁파 교회들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을 통해 통일된 교리적 기초를 갖게 됐고,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급속도로 독일 지역뿐 아니라 다른 지역에도 여러 언어로 보급되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은 프랑스의 갈리아 신앙고백과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와 루터파 양면의 공격 가운데 개혁주의 교회가 통일된 신학적 정체성을 회복하기 위해 기울인 노력의 결과였다. 그러나 프레데릭과 우르시누스는 정치적, 신학적으로 이 요리문답을 변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적지 않은 노력과 고통을 감수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요리문답이 출판되자마자 1563년 5월 독일 루터파 영주들이 장문의 편지를 보내 프레데릭을 회유하려 했다. 그들이 편지를 보내 회유하려 한 가장 큰 이유는 루터파들이 보기에 이 요리문답의 성만찬에 대한 부분이 쯔빙글리의 상징설을 따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같은 해 말에는 플라키우스(Matthisa Flacius)가 “논박”(Widerlegung)이라는 글로, 헤수스가 “진정한 경고”(Treue Warnung)이라는 책으로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을 공격했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은 안정된 국가 교회에서 사회를 종교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정된 규범이라기보다는 루터파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독일 안에서 소수의 칼빈주의자 신학자와 정치 지도자가 자신들의 신앙과 교회를 변호하고 같은 신앙 위에서 교회를 세우고 후대에 이 신앙을 전수하기 위해 제정한 고백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하이델베르크 신앙고백의 가장 첫 번째 문답이 기독교적 위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이 신앙고백이 고난 당하는 소수자들의 교회의 맥락 가운데 제정되었다는 사실을 대변해 준다.
사나 죽으나 그대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 사나 죽으나 나의 몸도 영혼도 나의 것이 아니요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죗값을 다 치르셨고 나를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구원해 내셨으며,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털 하나도 떨어질 수 없도록 과연 모든 것이 합력해 나의 구원을 이루도록 그렇게 나를 보존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영생을 확신하게 하시며 이제부터 그를 위해 살기를 진정으로 바라도록 만드시고 또한 그렇게 살 준비를 갖추도록 만드십니다.
칼빈은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에 대한 평가를 요구하는 올레비아누스의 글에 직접적으로 답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1563년 7월 23일 프레데릭에게 그의 예레미야서 주석을 헌정하면서 프레데릭과 그의 보호 아래 있는 팔라틴의 칼빈주의 교회들이 성만찬 교리에서 “칼빈주의”를 따름으로 인해 독일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 위로의 말을 전하고 있다.
당신께서 그리스도의 성만찬에 관련한 건전하고 정통적인 교리를 신실하게 붙들고 그것을 당신의 통치 안에서 자유롭고 지혜롭게 인정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납고 비이성적인 사람들이 마치 전하께서 온 독일을 뒤집어 엎은 듯이 전하에게 분노하고 있습니다…그들이 칼빈주의를 내세운다고 하며 전하에게 불명예의 표시를 덧붙이려고 애를 쓰고 있지만, 그들은 다만 자신들의 부패와 무지와 수치스러움에 스스로 배신을 당할 뿐입니다.
선제후 프레데릭의 보호와 체계적이고 확고한 신앙고백의 기초 위에서 팔라틴 지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칼빈주의 신학을 따라 조직화 됐다. 이 지역의 개혁파 교회들은 안정을 얻어가면서 주변 지역에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고, 각 지방에 당회를 세우고 그들을 묶는 노회들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하이델베르크의 토마스 에라스투스(Thomas Erastus, 1524~1583) 같은 인물들처럼 칼빈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쯔빙글리의 교회 모델을 따라 권징의 권한은 세속 정부에 놓아두기를 원한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팔라틴 지역의 교회들은 루터나 쯔빙글리의 교회론적 입장보다는 칼빈주의자들의 신학적 기반 위에서 조직을 갖춰 갔다.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2세와 독일의 다른 선제후들의 견제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레데릭 3세는 칼빈주의 신앙에 철저히 헌신하여서 자기의 아들 요한 카시미르(Joahann Casimir)를 위그노 전쟁에, 크리스토프(Christoph)를 화란 칼빈주의자들을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보내기까지 했다. 또 그의 아들 카시미르가 삭소니의 선제후 아우구스트의 딸인 엘리자베스와 결혼함으로써 이미 멜랑히톤의 영향력이 증가되어 있던 삭소니 지역에 칼빈주의가 확장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그러나 1576년 프레데릭이 죽고 뒤를 이어 선제후가 된 그의 아들 루드비히 6세는 철저한 루터파의 입장에 서서 칼빈주의자들을 억압했다. 그의 치하에서 600명에 이르는 칼빈주의 목회자들과 교수들이 파면 당하거나 추방당했다. 이후 독일의 루터파들은 내부의 신학적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이 발표된 50주년을 기념해 1580년 “협화신조”(The Formula of Concord)를 발표했다. 독일 지역 대부분의 루터파들이 이 문서에 서명했는데 86명의 제후들과 8500명의 목회자들이 이 신조에 동의를 표했다. 협화신조는 독일의 루터파들을 하나로 묶는 데는 크게 기여했지만 다른 개신교 세력, 특히 칼빈주의자들에게는 루터파오의 확실한 신학적 구별과 정치적 차별을 가져다 줬다. 독일 내의 칼빈주의자들은 결국 루드비히의 박해와 협화신조에 의해 활동의 입지가 좁아졌다. 다행히 팔라틴 북부 지역을 다스리던 카시미르의 통치 지역과 백작 요한 4세의 보호 아래 끝까지 칼빈주의를 고수하고 있던 나사우-딜렌부르크 지역이 설 곳을 잃은 칼빈주의자들을 보호했다. 나사우는 새로운 독일의 칼빈주의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이곳에서는 1584년 세워진 헤르본 대학을 중심으로 삭소니에서 망명한 멜랑히톤주의자 크리스토프 피첼(Christoph Pezel)과 팔라틴으로부터 피난 온 올레비아누스 등이 활동했다. 라인강 하류의 베젤은 루터파 도시였으나, 1540년 대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으로부터 피난을 나온 칼빈주의자들을 받아들인 후 이 도시에는 칼빈주의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다. 특히 1568년에 열린 베젤의 대회는 저지대 지방의 칼빈주의 교회의 일치와 확장을 위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안할트와 헤세, 카셀 지역에서도 정치적인 이유로 협화 신조에 반대하는 분위기와 함께 칼빈주의 교회가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었다. 17세기 초에 선제후 요한 지기스문트(Johann Sigismund)가 칼빈주의로 개종한 이후 브란덴부르크 역시 어느 정도 칼빈주의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유를 갖게 됐다.
독일 내에서 가장 강력한 칼빈주의 교회의 영향력이 남아 있던 팔라틴 지역은 루드비히 6세가 사망한 이후 선제후가 된 프레데릭 4세와 그의 섭정 카시미르에 의해 다시 칼빈주의 교회들이 복원되었고, 하이델베르크가 칼빈주의 신학의 중심지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런 회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1618년부터 시작된 루터파와 카톨릭파 사이에 벌어진 30년 전쟁의 결과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결국 남부 독일의 상류 팔라틴(Upper Palatinate) 지역을 로마 카톨릭 세력에게 넘겨주게 됐다. 17세기 후반에는 라인강 유역의 하류 팔라틴(Lower Palatinate) 지역 역시 프랑스의 루이 14세의 공격과 선제후 존 윌리엄(John William, 1690~1716)의 정책에 의해 카톨릭 지역으로 전환되었고 칼빈주의자들은 지속적으로 혹독한 핍박을 당했다.
이렇듯 독일 전체에 걸쳐 개혁주의 교회는 핍박을 받는 소수였다.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칼빈 자신과 마찬가지로 루터파의 아우그스부르크 신앙 고백을 거부하지 않았고, 협화 신조 역시 적대하지 않았다. 루터파 제후들과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적, 신학적으로 칼빈주의자들을 지속적으로 억압했다. 그러나 독일의 칼빈주의자들은 언제나 핍박 받는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루터파와의 화해를 모색했다. 특히, 프랑스의 성 바돌로뮤 축일 학살 사건과 스페인의 네덜란드 재탈환 등으로 로마 교회가 핍박을 가해 오자 프랑스와 저지대 지방의 개혁주의 교회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팔라틴의 칼빈주의자들은 독일의 루터파와의 개신교 연합을 추구했다. 그러나 독일의 루터파는 칼빈주의자들을 협력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루터파들은 특별히 성찬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재적 임재 문제와 관련해 칼빈주의자들과 로마주의자들을 상대해야 할 양쪽의 적으로 여겼다. 그 결과 독일 지역의 개혁주의 교회들은 성만찬 이론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로마 카톨릭파가 아니라 같은 신앙을 갖고 있던 루터파들에게 핍박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핍박의 양상 속에서 그들의 공동체 안에 저지대 지방이나 프랑스, 영국 등 다른 나라에서 망명한 칼빈주의자들을 포용하고 돕는 일을 지속했다. 프레데릭은 자신의 영토 안에 있는 프란켄탈을 화란에서 추방된 칼빈주의자들을 위한 피난처로 제공했고, 프랑크푸르트에는 영국에 망명한 사람들이 칼빈주의적인 신학에 입각한 피난민의 회중들이 교회를 세울 수 있었다.
김요셉 교수 (칼빈대학교)
http://blog.daum.net/kkho1105/6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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