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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일치에 앞서 교회론 점검 필요하다(1)

교회 일치에 앞서 교회론 점검 필요하다(1)
[기획연재] 역사 속에서 살펴본 개혁파 교회관 [2006-07-12 06:54]
 
20세기 후반의 세계교회는 교회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별히 교회 성장과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다양한 교회, 다양한 교파, 다양한 교리들은 선교지에서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효과적인 복음전파에 장애요인으로 지적되었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 없이 실제적인 방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기능적 차원의 교회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교회를 존재(Being)보다는 하나의 가능성(Becomin)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Nature)보다는 기능(Function)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격동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새롭게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야 한다. 앞으로 키프리안, 어거스틴, 칼빈, 메이천 등의 교회관을 살펴보며,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1) 키프리안의 교회관
교회는 일찍부터 안팎의 이단들의 도전에 직면하여, 응전적인 자세를 취함으로써 전통적 진리를 보수해 왔다. 에비온파(Ebionites), 케린투스주의(Cenrinthusism) 등 유대주의 기독교의 도전에 직면했는가 하면 영지주의, 그리스도 가현설 등의 혼합된 이교사상의 도전에 직면하기도 했으며 말시온(Marcion), 몬타니즘(Montanism), 모나키아니즘(Monarchianism) 등의 이단에 직면하여 교회의 신앙을 변호하고 확립했다.
또한 4세기에 이르러 그리스도의 신성의 완전성을 부인한 아리우스나 그리스도의 인성의 완전성에 도전한 아폴리나리우스, 그리고 네스토리우스파나 유티커스파, 그리고 5세기에 이르러 펠라기우스도 모두 이단으로 정되었다.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은 이미 사도시대부터 관심사였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유대주의자들의 도전이 있었고, 골로새서 2장에는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즐기는 자들의 도전이 있었고,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지자들과 멸망케 할 이단을 가르치는 자들이 있었음을 말씀하고 있으며, 유다서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바꾸는 이단의 도전을 비판하고, 요한일서 2장에서는 이미 적그리스도가 일어났다고 증거하고 있다.
화제를 돌려, 우리는 로마 감독 칼리스투스(St. Callistus Ⅰ, 217년 감독)와 히폴리투스(Hippolytus)와의 논쟁에서 교회의 일치와 순결에 대한 관심을 보게 된다. 이 가운데 히폴리투스는 당시 여러 교회에서 흔히 하던 것처럼 “친족 살인, 음행, 배교” 이 3가지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로 취급하고, 교회가 이 죄를 저지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말도록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회개한 자에게는 교회 교제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칼리스투스는 생각했다. 이에 대한 문제는 그후 키프리안(Cyprian, AD. 248. 카르타고 감독)과 노바티안(Novatian, AD. 250. 로마감독) 사이의 논쟁에서도 재연되고 있다.
터툴리안에서 어거스틴에 이르는 사람들 가운데 서방교회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키프리안을 들 수 있다. 키프리안은 카르타고에서 태어나 문학과 법학을 공부하여 수사학 교사가 되었으며, 45세의 늦은 나이로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247년 장로로 선출되었으며, 248년에는 카르타고의 감독이 되었고, 250년에는 데시우스(Decius) 황제의 박해 때에 사막으로 피신하여 편지로 교회를 지도하기도 했다. 251년 사막으로부터 돌아왔지만, 다시 발레리안(Valerian) 황제의 박해를 받아 다시 사막으로 귀양을 갔으며, 258년에 돌아와서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그가 남긴 것은 ‘교회의 일치’(De Unitate Ecclesiae)라는 책과 81편의 서신이 있다. 그는 생전에 3대 논쟁에 참가했는데 그것은 모두 교회에 관한 문제였다. 그가 당면한 최초의 논쟁은 박해 시 변절자들의 처리에 관한 문제였고, 두번째 논쟁은 그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노바티안 분파에 관한 문제였으며, 세번째 논쟁은 이단자들이 베푼 세례의 타당성에 관한 문제였다. 이 세 논쟁을 거치는 동안 그의 교회관이 확립되었다.
키프리안은 박해 시 변절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일은 적절한 권징과 규례에 따라 시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키프리안은 박해 시 변절자들의 처리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1. 회개를 거부하는 자는 용서하지 말 것.
2. 증서(certificate)를 산 자는 즉시 허용할 것.
3. 타락자는 평생 회개하고, 임종 시 또는 이후에 또 다른 박해가 있을 때 회개를 증명하는 자는 교회의 교제를 허용할 것.
4. 타락한 성직자는 폐위할 것.
그리고 분파에 대해서는 추종자는 파문할 것을 명령했다. 또한 AD. 250년경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 구제를 시행했던 자비한 일면도 보여주고 있으며, 박해 시 변절자나 이단자에 의해 시행된 세례는 개종할 때 재세례를 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로마 감독의 반대를 받았고, 재세례 제도는 로마제국에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터툴리안의 제자인 키프리안은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 교회의 교리를 발전시킨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감독이 주님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사도들의 참된 후계자라고 생각했으며, 특히 마태복음 16장 18절을 기초로 해서 교회는 감독들 위에 세워진 것이라고 주장했다. (계속)
김길성 교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고려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신약전공)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조직신학)
총신대학교백년사 집필위원
총신대학교 교무처장 및 대학원장 역임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교회 일치에 앞서 교회론 점검 필요하다 (2)
[기획연재] 역사 속에서 살펴본 개혁파 교회관 [2006-07-25 08:41]
20세기 후반의 세계교회는 교회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별히 교회 성장과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없이 실제적인 방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기능적 차원의 교회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교회를 존재(Being)보다는 하나의 가능성(Becoming)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Nature)보다는 기능(Function)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격동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새롭게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야 한다. 앞으로 키프리안, 어거스틴, 칼빈, 메이천 등의 교회관을 살펴보며,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1) 키프리안의 교회관
1) 키프리안에 따르면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 키프리안은 말하기를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자는 타인이며, 속인이며, 적이다. 교회를 어머니로 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없는 것이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가지 않고 구원받는 사람이 있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구원받을 수 있다”
또한 키프리안은 “그가 누구이든 간에, 그리고 그의 사람됨이 어떠하든 간에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 있지 않는 자는 크리스천이 아니다”라고 했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하는 키프리안의 견해는 교회를 떠나는 자들에 대해서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했다. 그는 “감독은 교회에 있다. 교회는 감독에 있다. 감독과 함께 있지 않은 자는 교회와 함께 있지 않는 자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의 신자들과 감독 사이의 관계가 어린아이들과 아버지 사이의 관계와 같기 때문에 감독에게 복종하지 않는 자는 교회와의 교제와 구원을 상실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감독에 대한 반역이 곧 감독으로 대표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반역이요,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기 때문에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본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교회와 감독을 떠나 분리된 교회에서 세례를 받는 것은 무효라고 선언했다. 그는 “하나의 세례 이상 다른 세례가 있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례를 베풀 수 있다고 망상한다. 생명의 샘을 저버리고서라도 그들은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주는 물의 은혜를 약속한다. 그들은 거기서 씻음 받은 것이 아니라 더럽힘을 받는다. 그들의 죄가 사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증하게 된다. 그들의 신생은 하나님을 위한 자녀로서가 아니라 마귀를 위한 자식으로 만든다. 거짓으로부터 출생했으니 진리의 약속을 받을 수 없으며, 불신으로부터 태어났으니 그들은 믿음의 은혜를 상실한다”고 말했다.
그가 감독으로 대표되는 일치를 주장하고 교회 이외의 생활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는 장차 중세 가톨릭교회를 위한 준비 단계를 이미 키프리안의 교회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2) 키프리안은 감독이 사도의 계승자이며, 교회가 감독들로 말미암아 세워졌다고 하는 개념을 발전시켰다. 키프리안은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택하여 세운 자들로서,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가르치신 것을 충실하고도 세밀하게 전달했으며, 사도들도 역시 감독들을 자신들의 계승자로 임명하여 이들에게 교회들을 위탁하셨다”고 주장한다.
키프리안은 이 사도적 계승의 관념을 ‘승계의 언약’의 의미로 이해했으며, 감독은 누구나 하나님의 명령에 의해 하나님을 위하여 취임하게 된다고 인식하였다. 그는 “그때로부터 해가 바뀌고 계승됨에 따라 감독들의 임명과 교회의 모든 의결은 이들 감독들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말한다.
이와 같이 키프리안에게 있어 교회는 사도들의 계승자로서의 감독들 위에 기초하고 있으며, 교회의 관리를 통해 감독들 위에 입각하여 발전해 나가는 구성체였다. 이러한 키프리안의 주장은 결국 감독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임명되며, 동시에 회중들을 위해 절대권을 행사하는 신적 권위를 가지는 지도자로 인식되도록 하였다.(계속)
교회 일치에 앞서 교회론 점검 필요하다 (3)
[기획연재] 역사 속에서 살펴본 개혁파 교회관 [2006-08-10 07:20]
20세기 후반의 세계교회는 교회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별히 교회 성장과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없이 실제적인 방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기능적 차원의 교회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교회를 존재(Being)보다는 하나의 가능성(Becoming)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Nature)보다는 기능(Function)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격동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새롭게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야 한다. 앞으로 키프리안, 어거스틴, 칼빈, 메이천 등의 교회관을 살펴보며,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1) 키프리안의 교회관
3) 키프리안은 “교회의 연합은 감독의 연합”이라고 하는 사상을 체계화시켰다. 키프리안에 따르면, 개개의 감독은 전 감독단의 일부이지만, 개개의 감독은 추상적 의미에서 감독단의 전권을 소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들은 교회의 연합을 안전하게 수호할 의무를 가지고 있으며, 감독직은 개별적이면서도 동시에 전체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는 “주님께서는 교회의 연합을 명백히 하시기 위해 이 연합이 처음부터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되도록 주님 자신의 권위로 제정하셨다. 다른 사도들도 베드로의 신분과 정확히 동일한 신분을 소유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도 동일한 직분과 능력을 위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라는 것을 시위하기 위하여 교회가 있기 전에 시초부터 연합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은 로마제국이 베드로가 감독 직무를 보았던 교좌라는 일반적 신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시대의 교회로 하여금 성직자의 연합이 최초로 이루어졌던 원천으로 로마 교좌를 향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가 비록 로마를 외적 연합의 상징으로 주장하긴 했지만, 로마의 감독을 다른 여러 지역의 감독들보다 어떤 특별한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정하지는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키프리안에게 있어서 교회의 연합은 교황 중심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감독직의 결속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 교좌를 중심으로 한 감독직의 결속을 강조했던 키프리안의 인식은 훗날 교황제도의 발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 역시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4) 키프리안에 따르면, 감독직은 신자의 제사를 유효하게 하는 것이었다. 죄인들은 감독과 사제를 통해 교회에 받아들여졌고, 그리스도의 공로는 사제의 경의를 통해 그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다. 또한 어떤 사람이 교회에 소속된 구성원이며, 어떤 사람이 교회에 교통에 동참할 수 있도록 복위될 것인가 하는 사안 등은 감독의 결정권에 포함된 것이었다.
결국 키프리안에 따르면, 감독은 영감을 받은 선지자요, 성령의 은사를 부여받은 자요, 하나님의 영감과 환상으로 인도함을 받는 자로 이해될 수 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키프리안은 최초로 교회론을 크게 체계화시킨 교부였다. 중요한 것은 그의 교회론이 감독들을 기초로 하여 교회의 단일성을 확립하였다고 하는 사실이다. 그는 로마 교좌의 우위성을 직접적으로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로마 교좌를 중심으로 하는 감독직의 결속을 통해 교회의 연합을 이룰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키프리안이 보여준 교회관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단점을 보여준다:
(1) 그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고 말했을 때, 감독들이 다스리는 교회만을 포함시켜서 이 제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구원이 없다고 단정지어 버린 것은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2) 그의 교회관은 교회의 외적인 연합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유형교회에만 비중을 둠으로써, 영적인 무형 교회의 성격을 정당하게 강조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초래했다.
(3)감독직에 대한 그의 지나친 강조는 교회의 역동적인 측면을 무시하는 문제점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의 참된 교제를 나누는 자유롭고 거룩한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모습이 빛을 바래고 체제와 제도 속에 얽매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4)감독 중심적인 그의 교회관은 부인할 수 없게 중세 가톨릭교회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교회관은 박해에 직면한 교회를 보호하기 위한 책임을 맡은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데 도움을 주었지만, 배교자에 대한 처리에 있어서 엄격한 면을 찾아 볼 수 있다.
김길성 교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고려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신약전공)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조직신학)
총신대학교백년사 집필위원
총신대학교 교무처장 및 대학원장 역임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교회 일치에 앞서 교회론 점검 필요하다 (4)
[기획연재] 역사 속에서 살펴본 개혁파 교회관 [2006-08-24 07:24]
20세기 후반의 세계교회는 교회론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특별히 교회 성장과 에큐메니칼 운동으로 인한 교회의 일치에 대한 관심은, 교회론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교회의 본질에 대한 진지한 논의없이 실제적인 방향에 대한 지나친 관심을 갖는 것은 기능적 차원의 교회론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교회를 존재(Being)보다는 하나의 가능성(Becoming)으로 보며, 교회의 본질(Nature)보다는 기능(Function)에 더 강조점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격동의 20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21세기를 맞이한 우리는 새롭게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야 한다. 앞으로 키프리안, 어거스틴, 칼빈, 메이천 등의 교회관을 살펴보며, 개혁파 교회관을 정립해보고자 한다.
(2) 어거스틴의 교회관
어거스틴(St. Augustine of Hippo, 354~430)은 354년 아프리카 누미디아(Numidia)의 타가스테(Tagaste, 현재 알제리 북쪽의 수크아라스)에서 태어나 어머니 모니카(Monica, 332~387)에 의해 어릴 적부터 신앙교육을 받으며 자라났다. 그러나 그는 젊어서 한때 마니교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기도로 말미암아 어거스틴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으며, 387년에 33세의 나이로 암브로시우스(Ambrosius) 감독에게 세례를 받고, 392년에는 히포의 장로로 선출되었으며, 395년에는 히포의 감독이 되어 훌륭한 저서를 남기고 430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거스틴은 그의 생애동안 북아프리카 지방에 있었던 도나투스파의 분열에 대한 처리로 고심했다. 그로 하여금 교회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도록 만든 것도 바로 이 도나투스파와의 거듭된 논쟁이었다. 도나투스파(the Donatists)는 도나투스(Donatus)로부터 시작되었다. 도나투스는 어거스틴보다 약 1세기 전에 카르타고의 감독 지위에 있던 인물로서, 그와 그의 일파는 기독교 계율에 관해 대단히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어떤 종류의 죄를 범한 사람은 교회로부터 격리되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교회의 구성원으로 포함되어 있는 교회는 하나님께로부터 완전히 떨어져 나간 것이다. 또한 이러한 죄를 범한 교사들을 통해 과거에 받았던 세례는 모두 무효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도나투스파에 대한 교계 지도자들 사이의 신학적 입장은 매우 다른 양상을 보였다. 북아프리카의 중심지 카르타고의 감독이었던 키프리안은 어거스틴이 평소에 존경하던 인물이었는데, 도나투스파와 신학적 입장을 같이하고 있었다. 키프리안은 박해시 생긴 배교자, 또는 이단자가 베푼 세례의 정당성과 효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도나투스파의 존경을 받았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교회에서 배교자와 이단자만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도나투스파와 같은 교회의 분열자들을 더욱 위험한 사람들로 간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다음의 몇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1) 어거스틴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정의하고, 교회의 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에 달려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기독교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도나투스파는 “참 교회”를 “이단자는 물론 박해시 신앙의 정조를 지키지 못한 배교자들을 제거해 버린 흠없는 신자들로만 구성된 교회”로 규정하였으며, 이러한 참 교회를 곧 “거룩한 교회”라고 했다. 이러한 도나투스파의 이론에 대항하여 어거스틴은 “교회의 순정성이 신자들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사실로부터 기인한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에 따르면,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그리스도가 교회 안에 영적으로 임재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거룩하며, 신자들은 이 교회 안에서 성화되어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어거스틴의 생각은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는 비록 배교자나 이단자의 교회에서 시행된 것이라고 해도 합법적이며 유효한 것으로 인정하도록 하였으며, 이 문제로 인한 도나투스파의 분열을 부당한 것으로 주장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어거스틴은 도나투스파의 흠 없는 신자들로만 구성된 “참 교회”에 대해서도 반대 입장을 취하고, 지상 교회는 유형 교회와 무형 교회, 또는 선택받은 자들로 구성된 영적 교회와 선택받지 못한 자가 섞여 있는 제도적 교회를 구별하여 교회의 이중 구조를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하나의 유형적 유형 교회를 어머니로 가지지 못한 사람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성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세례주의 방향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며, 또한 도나투스파의 완전주의적 교회관에도 반대 입장을 취함으로써, 역사적 교회는 근본적으로 세속적 기관이며, 따라서 의인과 악인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어거스틴은 현세의 교회를 하나님의 도성과 상이한 것(불가견적∙영적 공동체)으로 인식할 뿐 아니라 또한 동일한 것(역사적∙제도적 공동체)으로 이해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구속 섭리가 인간 역사의 영역에서 실현되어 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성이 역사적 교회 안에서 이루어져가고 있음을 강조했다.
어거스틴에게 있어 “역사적 교회는 하나님의 도성의 형상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도성으로 되어 가고 있는 하나님의 도성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현세적∙역사적 교회가 항상 현재성과 미래성 사이의 긴장과 이중 구조 속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고 할 수 있다. 이 경우, 도나투스파의 사회적 이중성이 어거스틴에게 있어 종말론적 긴장으로 바뀌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김길성 교수
고려대 영어영문학과
고려대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Th.M., 신약전공)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Ph.D., 조직신학)
총신대학교백년사 집필위원
총신대학교 교무처장 및 대학원장 역임
현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조직신학교수
http://blog.daum.net/kkho1105/6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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