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설교 (고후 1:1-11)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설교 (고후 1:1-11)
(1) 개혁교회와 신앙고백
우리는 지난 주에 교회개혁주일을 보냈다. 칼빈과 루터의 개혁운동은 부패한 중세 천주교를 다시 성경적인 사도적 교회로 돌이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심지어 8살난 아이가 추기경이 되고 성직 매매가 이루어 졌고 교회가 광대한 땅을 소유하여 세상 의 부와 권력의 단맛을 보면서 세상 속에 안주하면서 세속화되어 갔다.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가 아니라 군림하는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칼빈이나 루터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아 성경적인 교회로 계속해서 개혁하면서 돌아가려는 교회를 개혁교회 (reformed church)라고 부른다. 우리 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교회이지만 그 신학과 신앙생활은 개혁교회를 모델로 삼는다. 서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서 정착된 아름다운 개혁교회의 전통이 우리 실정에 다소 맞지 않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다. 주로 개혁교회는 남아공, 독일,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미국, 프랑스, 그리고 헝가리와 같은 일부 동구권 등에 정착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예배는 축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친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 시작과 마지막의 복의 선포는 언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서 말씀하시며 교제하시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은 시편 150편에 곡을 붙여서 부르는데 반주를 위해 오르간만 주로 사용한다. 설교하는 목사님만 강단에 올라가서 사회, 기도, 설교, 축도 모든 순서를 담당한다. 목사님은 입교를 받을 고 3학생들을 1주일에 한번 평일 밤에 만나서 교리를 가르친다.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와 같은 부교역자는 없다. 그냥 담임목사만 있을 뿐이다. 모든 예배 순서는 말씀 낭독과 설교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우리처럼 열심히 매주일 찬양대가 찬양하지 않고 대신 특별한 절기에만 한다. 개혁교회의 경우 오전 그리고 저녁 예배에 헌금을 한다.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집사님들이 헌금 주머니를 들고 입구에 기다리는데 성도는 동전을 넣는다. 실제적인 봉사와 구제를 담당하는 집사님은 그 돈으로 구제와 봉사를 한다. 개혁교회의 집사님과 장로님은 매주 실제로 많은 일을 하기에 계속해서 은퇴할 때까지 일할 수 없다. 개혁교회의 직분은 감투나 명예직이 아니라 봉사직이기에 임기는 최소 2년이고 주로 3년 정도이다. 3년 정도 집사나 장로로 열심히 일한 후에 1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일하게 된다.
개혁교회의 성찬식은 1년에 적어도 4번 시행한다. 개혁교회 장로님은 한국의 당회원 역할과 구역장 역할을 같이 한다. 2001-2002년에 센츄리온 개혁교회의 장로로 섬길 때 적어도 성찬식이 있는 주간에는 미리 모든 구역원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살피고 심방해야 했다. 따라서 적어도 연말에 시행하는 심방을 포함하여 1년에 5회 이상은 구역원들을 심방해야 했다. 장로는 가족 전체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가족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밤에 주로 심방하고 그 결과를 당회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목회자의 귀한 협력자이다. 이렇게 장로의 심방을 받기에 성찬이 있는 주일은 많은 성도가 예배에 참석한다. 성찬식 전 주일에는 미리 광고를 하고, 목사님은 성찬과 관련한 설교를 한다. 성찬식 때에는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식사하신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강대상 바로 앞에 설치된 긴 탁자에 12명을 초청하여 기념하게 한다. 때로는 50명 정도가 한꺼번에 강대상 앞에 설치된 몇 줄로 정렬된 탁자로 나와서 교대로 기념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찬식 때 작은 컵이 아니라 약 500ml 용량의 큰 잔을 여러 명이 함께 사용했다. 빵은 우리가 먹듯이 작은 조작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위생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우리처럼 작은 잔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분병, 분잔 위원은 집사님들이 주로 하되 장로님 혹은 여성도도 봉사하기도 한다. 다른 교회에서 온 성도가 성찬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무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당회가 발행하는 교회 신앙 생활 증명서를 당회에 제출해야 한다. 다른 자매 개혁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성찬식 전에 광고를 통해서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고 목사님이 알린다. 개혁교회에 5년간 출석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목사님들의 설교였다. 구속계시사적인 설교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은 신앙고백과 교리에 관한 설교를 2주에 한번 정도 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권징-치리를 엄격히 시행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와 개혁교회의 찬송가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전에 주로 미국의 복음성가라면 개혁교회의 찬송은 시편 150편의 가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장엄한 음조에 맞춘 찬송이다. 개혁교회의 찬송가에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다나시우스신경,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신경, 세례 문답서, 성찬 예식문, 장로-집사 임직 예식문, 모범 기도문, 교회치리헌법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모든 성도가 쉽게 이런 신앙고백서, 예식문, 헌법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역사적 배경
우리 교회에서 주일 오후 예배 시에 교독하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관해서 살펴보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요리문답은 요리법 (recipe)과는 상관없다. ‘요리’라는 말은 ‘중요한 교리’라는 뜻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신앙교육문답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함께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앙고백서이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채택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교리문답서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만들어진 때는 지금부터 440년 전인 1563년이다. 그 당시 독일은 로마 교황의 지배 하에 있었다. 하이델베르그는 과격한 루터파, 온건한 루터파, 칼빈주의자들이 뒤섞여서 성만찬에 관한 논쟁을 벌여서 자칫 분열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분위기 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만들어질 당시는 이미 루터에 의해서 교회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교회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당시 하이델베르그에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 멜랑히톤의 영향이 강했다.
독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7사람의 제후를 선거후 혹은 선제후라고 부른다. 그 중 한명이 프레드릭 3세 였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칼빈의 교회개혁이 탄력을 받게 하기위해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이며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은 (약관 27세의)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칼빈의 영향을 받아 교회개혁에 동참하다가 옥고를 치룬적 있었던 유능한 젊은 (성령교회의 궁정)설교가인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로 하여금 간단한 교리문답 지침서를 만들도록 했다. 그 결과 기도와 토의를 거친 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1563년에 출판되었다. 프레드릭 3세는 이 요리문답의 서문에서, 교리 교육을 위해 성경에 기초한 이 요리문답이 학교와 교회에서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해 중요하게 가르쳐져야 할 것을 밝혔다. 이 요리문답 책은 널리 보급되었고 주일에 교리를 가르치려는 용도로 사용되어 1년 52주에 맞추어 52주일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600년의 교회회의에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목사는 설명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결의했다. 1609년에는 미국에 소개된 최초의 개혁교회 신앙고백서이다. 1618-16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 되었다. 하지만 1566년 5월 14일에 선제후 프레드릭 3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 개혁주의 요리문답을 만들고 승인한 것으로 이단으로 정죄당할 위기에 처했다. 특별히 요리문답 제 80문에서 천주교의 미사는 우상숭배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드릭 3세는 이 위협에 굴하지 않고 막시밀라 2세 교황 앞에서 변론했다. 내가 왕관을 벗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이 요리문답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교황으로부터 프레드릭 3세는 ‘경건한 프레드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칼빈주의적 성격을 지닌 요리문답이기에 교황은 물론 루터주의자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루터주의자였던 프레드릭의 장남 루이 6세는 이 요리문답서를 불태우고 보급하는 자를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이 요리문답서는 루터주의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더 철저한 개혁주의적 성격으로 발전해 갔다.
지금까지 교회개혁 시대의 여러 교리문답 중에서 가장 널리 영향력있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되어 왔다. 개혁교회에서는 주일 저녁 예배 설교시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사용하고,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한다.
(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내용과 구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를 두루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3부분으로 나눈다: (1) 죄와 그 비참함, (2) 구원, 그리고 (3) 감사. 이 3부분은 성경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창조-타락-구원을 반영한다. 각 문답은 간결하고 연역적이고 운율적이어서 학습자로 하여금 오랫 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주에 걸쳐서 가르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총 129문으로 구성된다. 제 1부는 죄와 그 비참함을 다루는데 3-11문까지다. 우리는 사람의 범죄로 인한 비참함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통해서 아는데 그 누구도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한다. 따라서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 그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선을 행할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인간의 죄와 비참함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인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도 롬 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먼저 밝히고 있지 않는가! 대신 이런 인간의 죄성과 비참함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제 2부는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데, 12문에서 85문까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면서 제 19문에 가서야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마다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힌다. 제 21문에서 참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참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죄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을 은혜로 받았다는 신뢰라고 밝힌다. 이런 믿음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얻게 된다. 제 22-55문까지 우리가 신앙하는 내용을 사도신경을 통해서 설명한다. 제 59-64문은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를 설명한다. 제 65-85문은 성례 (세례와 성찬)를 길게 다룬다. 21문에 걸쳐서 성례를 다루는 것을 통해서 그 당시 하이델베르그에서 성례에 관한 논쟁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성찬은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라고 칼빈주의적으로 설명한다.
제 3부는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를 다루는데 86-129문까지이다. 구원받은 자가 청지기로서 봉사하며 감사하는 길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신경과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을 언급한다. 왜 구원받은 자의 감사생활을 설명하면서 사도신경을 십계명 앞에 두는가? 사도신경으로 기독교 교리를 해설한 다음에, 십계명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새로운 순종의 규범을 제시하려고 한다. 십계명은 더 이상 우리를 속박하고 죽이고 정죄하는 사망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새로운 율법이요 삶의 규칙이다. 약 1:25절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언급하는데,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제 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에게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그 답은 “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을 나의 구원을 위해 유익하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있는 영생을 확신시키셔서 더욱 주님께 충성하도록 하신다. 바울도 고후 1:1-11절에서 위로라는 말을 10번이나 사용한다. 고후 1: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자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보혜사로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유혹 속에서 도와주신다 (요일 2:1; 히 2:18).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도 우리를 격려하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신다 (요 14:16, 26). 3위 하나님은 모두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위로하신다. 왜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가? 고난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는 것이며 바로 그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가 있음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고후 1장에서 바울은 현재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지속적임을 밝힌다. 살거나 죽거나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감사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형제-자매를 위로하면서 살자.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그 비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칭의,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아멘!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1-10)
성경에는 ‘스가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30명이나 된다. 특별히 이 이름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흔한 것이었다. 스가랴서의 저자인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스가랴는 학개처럼 성전 재건을 독려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시온 (예루살렘-교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에 관해 격려하기 원했다. 스가랴는 특별히 다윗의 후손인 총독 스룹바벨과 사독의 후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해서 장차 회복될 메시아 왕국을 강조한다. 기억할 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활동할 당시에도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중 많은 부분이 손실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백성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예언은 약 5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서,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요지는 “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의와 사죄 그리고 번성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첫째로,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죄악에서 건짐받은 의롭게 된 사람이다.
슥 3장은 스가랴가 본 4번째 환상이다. 첫번째 환상 (슥 1:7-17)은 홍마를 타신 그리스도께서 석류나무 가운데 서계신 것이다. 이 환상이 말씀하는 바는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지만 석류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며 보호하시겠다는 메시지이다. 두 번째 환상 (슥 1:18-21)은 4뿔과 4공장의 환상인데, 4뿔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이방나라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를, 4공장 (장인; 바사, 헬라, 로마, 메시아왕국)은 그 뿔을 깨뜨릴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한다. 즉 이스라엘이 위협을 당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적절하게 원수를 깨뜨려서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임을 가르쳐 준다. 세 번째 환상 (슥 2:1-13)은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에 관한 환상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가운데 영광으로 거하시며 불의 장벽처럼 둘러서 보호하실 것임을 말씀한다 (슥 2:5). 따라서 바벨론 포로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속히 돌아와야 한다 (슥 2:6). 그리고 열국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슥 2:11). 이렇게 3가지 환상은 모두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하는 선한 위로의 말씀이다 (슥 1:13). 홍마를 타신 정복자 예수 그리스도, 세상 역사의 주관자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예루살렘을 불꽃 같은 눈으로 보호하실 임마누엘 주님을 왜 이렇게 반복해서 환상으로 보여주시는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주변의 많은 반대자들을 상대하면서 그것도 황무한 상태에서 재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반복적으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소망을 주신다. 스가랴 당시에 이스라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보지 말고, 대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새로운 환상이 시작되는 것을 나타내는 “내가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구절이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하는 스가랴서의 4번째 환상이 본문 슥 3장이다. 본문 바로 앞 슥 2:1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성소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강력하게 역사하시려고 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의 사자 (칼빈: 구약의 예수님)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 편에 서서 그들 대적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법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판사는 여호와의 사자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원고는 피고의 오른편에 선다 (시 109:6; 욥 1:6-12). 즉 원고 사단이 피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소하기 위해 오른 편에 서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죄로 무가치하게 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의미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고 사단은 자신의 주특기인 참소를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 늘어 놓는다. 사단의 고소에 피고인 여호수아는 묵묵부답이다. 즉 이스라엘백성의 죄악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스라엘에게 큰 위기이다. 왜냐하면 만약 대제사장이 부정한 옷을 입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어떻게 속죄를 얻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대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때 하나님이 직접 피고 여호수아의 변호사가 되시려고 자청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권능의 팔을 펴서 사단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문제가 해결될 여명이 비쳐진다. “사단아. 내가 예루살렘을 택했다. 비록 그들이 바벨론 포로를 상징하는 불에서 끄집어낸 나무처럼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나의 선택한 백성이다” (2절). 내가 선택하고 의롭다고 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원고 사단의 참소가 거짓되고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바벨론 포로의 원인이 된 죄악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충분히 죄의 대가를 치루고서 건짐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먼 바다에 던지셔서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슥 1-2장의 3개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산성이 되시며 영광 가운데 임마누엘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본문 2절에서 말씀하듯이 이스라엘백성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범죄 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때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70년 포로 생활의 상처자국이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의 할아버지는 스라야인데 느부갓네살왕에게 살해당했다 (왕하 25:18). 여호수아의 아버지 여호사닥도 포로로 끌려갔다 (대상 5:25-6:15).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 될 때 대제사장으로 일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여호수아이다. 여호수아 자신도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에서 양육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불에서 건짐을 받은 거슬린 흔적이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기에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이제 원고 사단 앞에서 피고는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 죄악의 옷을 벗겨 주신다. 대신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혀주신다 (4절). 스가랴선지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위해 더 큰 영광을 주시도록 깨끗한 관도 씌워달라고 부탁한다 (5절). 포로시절 입었던 누추하고 더럽고 헤어진 옷이 아니라 대제사장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고 머리에는 관을 씌워 주심으로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직분을 다시 수행하도록 회복받았다. 특별히 대제사장의 관 위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출 39:30-31). 여호수아는 이제 성결한 직분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전체는 거룩한 백성으로 재창조함을 받는다.
8절에서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돕는 사람들, 아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예표-징조의 사람들 (men of a sign)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룹바벨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그림자이다. 실제이신 대제사장이 오시기까지만 섬겨야 했다. 이 그림자의 실제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종이며 순 (싹-가지)이다. 종 (겔 34:24; 37:24)과 순 (가지, 사 11:1)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아직은 활짝 피어서 그 완전한 모습을 완전히 나타내 보이지 않지만 장차 왕으로 등장하실 실제는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순-새싹-가지이신 예수님은 아직 그 완전한 자태를 드러내지 않으신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이시다. 가지와 싹이시기에 건장하거나 화려한 모습이 없으신 그리스도이시다 (사 53).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멸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기에 성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가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이시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과 레위인, 성전 봉사자들이 짐승의 피로 반복해서 드린 제사를 성취하실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 예수님 이름으로만 은혜의 보좌로 향기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다.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님 안에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자이다.
둘째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은혜가운데 살기 위해서 우리의 심비에 성령으로 새겨주신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지켜야 한다.
7절에 보니, 이렇게 회복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만일 이스라엘이 도를 준행하고 율례를 지키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뜰을 지킬 것이다. 성전 뜰을 지킨다는 것은 성전 봉사를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 섰는 자들 (천사, 교회) 중에 왕래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리라 즉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하리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도록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과 관을 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거두어 가실 것이다. 만일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께서 희생 짐승의 똥으로 얼굴에 바를 것이다 (말 2:3). 만일 우리가 받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가 정상적인 성전 직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삼하 7장의 다윗 언약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은혜를 얻으며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려면 순종하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 구원받아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의 샘, 은혜의 보좌로 연결된 시온의 대로를 걷고 새롭고 산 길을 통과하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구원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순종과 실천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다.
9절에 보니, 대제사장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께서 돌을 세우신다. 그 돌 위에는 눈이 7개나 있다. 돌은 성전 (교회)의 기초석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시온에 놓이게 될 보배롭고, 귀하고, 견고하고, 요긴한 성전의 모퉁이 돌, 머릿돌, 기초석이시다 (마 21:42; 벧전 2:6-8; 사 26:18). 이것은 스가랴 당시의 스룹바벨 성전 재건의 상황에서 볼 때 적합한 말씀이다. 그 위에 7눈 즉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슥 4:10) 무언가를 새길 것이다. 7눈을 가진 돌은 산돌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위에 새겨질 글자는 새언약이다. 이 글자는 곧 성령으로 우리 심비에 새겨두신 천국 복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이시다. 예수님은 성전의 기초돌이실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서 세심한 관심과 완전한 감찰로 교회를 돌보신다. 계 5:6절에서는 7눈이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고 본문 9절 중반부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하실 것이다. 대속죄일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금요일 바로 그 날에 영원한 단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악이 사해질 것을 예언한다. 사죄함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견고하고 귀한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완전하게 보호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삶에 평안과 번성함을 주신다.
10절에 보니 ‘그 날에’ 즉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희생 제물되심으로 용서받는 날에,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게 될 것이다. 이웃이 서로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 모이고 교제를 누리는 것은 평온한 삶을 상징한다. 왕상 4:25절 솔로몬 시대의 부귀영화를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다고 말씀한다 (미 4:4). 외적인 번영과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이라는 내적인 번영과 치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회복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왜냐하면 7, 9,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말을 맺자.
1521년 5월 24일 루터는 그의 제자요 동역자인 멜랑히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내 자신이 무감각하고 완고하고 게으름의 종이 된 것을 본다. 나의 길들여지지 않은 육체가 삼키는 불길과 함께 타버리는 동안, 나는 교회를 위해 거의 한 마디도, 한마디 신음으로도 기도하지 못한다”. 위대한 교회 개혁의 불길을 점화한 루터였지만 자신의 죄와 무능력에 대해 철저히 애통해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마치 바울이 롬 7:24절 이하에서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로마 카토록의 부패와 죄를 지적한 루터 자신이 사실 죄에 대해 아주 민감했던 것이다. 독일의 Wartburg성벽에는 마틴 루터와 관련된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한다:
하루는 루터가 꿈에 사단을 본다. 사단은 루터가 태어나서 지은 모든 죄를 긴 두루마리에 적어서 읽는다. 루터의 공포는 계속 커지고 결국 뛰면서 외친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사단아.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더 있다. 너의 목록 아래에다가 이것도 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했다”. 루터는 탁자 위의 잉크 병을 집어 사단에게 던지자 사단은 도망 가버렸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거룩한 나라와 성전 삼으시기 위해서 슥 3장의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이며 구약 제사장들의 실제로서 오셨다. 골고다에서 단번의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시며 교회의 머리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우리도 세상에서 순처럼 연약해 보이고 보잘 것 없지만 사실 의롭고 강한 주인공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신 종 (두 번째) 여호수아이시며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시며 순-싹-가지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신령한 은사를 계속 누리며 예배하기 위해 우리 심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산 돌이시며 반석이신 주님을 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서 의로운 옷을 입고 날마다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를 정죄하는 사단과 인내하며 싸워야 한다. 아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벧전 3:13-22; 창 6:1-22)
나의 고향에는 문천지라는 아주 큰 호수가 있다. 전국체육대회 종목 중 카누와 조정 경기가 그 호수에서 열렸다. 어릴 적, 거의 매년 여름 장마철에 집중 호우가 내리기라도 하면 호수의 물이 넘치고 결국 둑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위협 속에 살았다. 만일 둑이 터지면 못 바로 밑에 있었던 우리 마을을 다 쓸어버리고 금호강 물과 합쳐져서 30km 떨어진 대구까지 쓸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이 쓰는 무서운 가상의 시나리오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보다 물이 무섭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체험적으로 듣고 보았다.
우리 가까이에 대홍수와 관련된 산이 있다고 한다. 광활한 억새 풀밭으로 유명한 경남 창녕에 있는 화왕산이다. 산 정상에는 배바위라는 것이 있다. 바위 한쪽 끝에 갈고리모양 같은 것이 튀어 나와있다. 전설에 의하면 큰 홍수가 났을 때, 배의 닻줄을 그 바위에 묶어 두었고, 그 배 안에 들어간 사람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 생존했던 사람으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왕산의 홍수 전설 이외에도 이 세상에는 홍수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 홍수만이 온 세상에 임한 유일한 홍수라고 말씀한다. 이 시간 노아 홍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말씀의 요지는 “나는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주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영육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창 3장에 보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직전에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21절). 그리고 창 4장에 보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보호하시겠다는 표를 주셨다 (15절). 이처럼 죄인을 당장 멸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창 3-4장에 등장한다. 그런데 창 6장에 보니, 하나님은 노아 할아버지 당시의 죄를 보시고 홍수라는 무시무시한 전 지구적인 심판을 수행하신다. 다시 한번 가죽옷과 표처럼 은혜와 기회를 주시면 안 되었던가? 무엇이 홍수라는 심판을 초래했는가? 창 6:1-2절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 즉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을 받은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즉 상속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면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심취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 없이 사는 가인의 후손이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후손은 곧 뱀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인의 7대손 라멕이 낳은 3아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으로부터 뱀의 후손들은 세상적인 기술과 문명, 취미와 쾌락, 음악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문명의 이기들, 부를 축적하는 것, 음악이나 문화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악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이런 것들만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세상 재미에 빠져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들고 만다. 가인의 7대손 라멕과 달리, 셋의 7대손 에녹은 경건한 삶으로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처럼 뱀의 후손인 가인과 여자의 후손인 셋의 후손들은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셋의 후손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아 할아버지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업과 복을 누리기 보다는, 뱀의 후손들-가인의 후손들-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재미와 예술과 육감적인 쾌락과 육체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더 선호하고 말았다. 마 24:38-39절에 보니,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은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데 바빠서 홍수가 임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 창 6:4절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네피림이라는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네피림은 ‘폭군’ 혹은 ‘타락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거인-영웅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자식을 통해서 영웅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남이야 어떻게 되던지 아랑곳하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세상의 명예와 부와 권세를 누리며 소시민적으로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살도록 했다는 말이다. 노아 당시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대신에 그들의 자식을 네피림-영웅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 자녀가 우상이 될 여지가 많이 있지 않은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는 법,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법,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법,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는 요령과 처세술을 우리가 삶으로 가르쳐준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본문은 성도가 세상과 화해하고 타협하는 것이 타락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 세상에 동화되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즐거움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 즉 구약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그리고 결심하신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을 홍수로 쓸어버리리라! (창 6:5-7).
하지만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다. 사실 노아 당시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 재미와 육감적인 쾌락에 빠져 있었을 때 홍수로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았다. 본문 창 6:3절에 보니, 하나님은 120년 후에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홍수 이후에 모든 사람이 120살 이상 살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홍수 이후에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지 않았는가! 벧전 3:20절에 보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 재미에 빠져 있었을 때 120년이라는 회개의 기간을 주시고 오래 참으셨다고 말씀한다. 120년 동안 참으신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아닌가!
8절에 보니,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한 줄기 빛을 비춰주신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노아도 우리와 똑 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상과 동화되고 강포한 생활을 했던 대다수의 사람과 구별되는 생활을 했다. 세상 조류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행한 노아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가능했다.
벧전 3장에서 베드로는 노아 홍수 사건을 설명한다. 홍수를 통해 노아 가족 8명이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가 구원을 받은 것을 바울이 고전 10장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큰 물의 심판을 통해서 노아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을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노아 홍수 사건은 장차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왜 베드로는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사람을 8명이라고 분명히 밝히는가? 8이란 숫자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날을 가리키는 숫자이며, 초대교회가 부활절 이른 아침에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정식 일원이 되는 날을 가리킨다. 흥미롭게도 1-2세기의 교회의 세례탕은 8각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 타서 구원을 받은 것은 대부분 동물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자연세계가 구원을 받을 것을 내다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선포하신 주님은 5병 2어의 기적으로 육체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셨다. 본문은 이전에 사단-뱀의 후손으로 살면서 세상 죄와 재미에 빠져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 영과 육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왕되심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창 6장 이하의 홍수사건을 설명하는 구약 성경은 시 29편이다. 다윗이 지은 시 29편은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28편과 30편 중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윗은 시 29편을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을 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 29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7번이나 나오는데, 마치 천지를 진동시키는 힘있는 천둥소리와 같다고 설명한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한 큰 음성으로 세상을 호통치실 때 백향목이 꺾어지고, 산이 요동치고, 광야가 흔들거리고, 암사슴은 낙태하고, 나무마다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진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목소리를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두려워서 떨고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다윗은 시 29:10절에서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왕으로 좌정하셨다고 노래한다. 노아 홍수는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왕권을 시행하신 사건이다. 다윗은 11절에서, 왕이신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에게는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노래하면서 시편 29편을 마친다. 다윗이 곤경 가운데 이 시를 지어 부름으로써 악을 심판하시고 언약 백성에게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실 하나님만 신뢰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벧전 3장뿐 아니라 벧후 2장에서도 노아 홍수를 언급한다. 벧후는 이방 세계 속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던 교회를 위해 기록된 편지이다. 벧후가 기록될 당시 로마 황제는 폭군 네로였다. 베드로의 수신자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벧후 2장에 보니,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진리를 대적하는 이단이 일어나고, 호색과 탐심이라는 세속주의가 엄습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벧후 2:5절에 보니, 노아 당시의 ‘옛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당시의 옛 세상에 속한 대적들도 반드시 물리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느 시대이건 옛 세상에 속한 불의한 자를 형벌 아래에 두시고, 의를 행하는 새 세상에 속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왕이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고난 가운데서라도 옛 세상의 불의를 물리치고 새 세상을 앞당겨 이 땅에 이룰 때 임하게 된다.
노아 언약은 이 세상 끝날까지 유효한 영원한 언약이다. 왜냐하면 노아 언약은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언약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무지개가 사라지지 않고 있듯이,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권이 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고난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은혜로운 분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곤경 속에서라도 의를 행하는 자에게 뇌성과 같은 말씀을 발하시면서 능력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신 하나님만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옛 세상이 망했던 홍수 속에서라도 경건한 노아 식구의 생명을 보존하신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영육을 보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 속에 있던, 우리 밖에 있던 그 어떤 옛 세상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이 땅에 새 세상이 임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이 나타나도록 충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선장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본문 창 6:14절에 보니,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간을 지르고 역청-송진으로 꼼꼼히 방수처리하라고 말씀하신다. 방주 안에 간을 질러서 많은 방으로 만들면 배가 움직일 때 사람과 동물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의 크기는 길이는 300규빗- 150미터, 폭은 50규빗-25미터, 높이는 30규빗-15미터 (15-16절)로 거대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큰 배가 약 60m였기에 노아 방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3층짜리 배이다. 방주는 뚜껑이 있는 4각형의 배였다. 방주는 법궤와 비슷한 모양이다. 방주 맨 꼭대기에 창문도 만들었다. 창문이 천장 근처에 있었기에 밖으로 내다볼 수 없었고 단지 통풍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침반도, 노도, 돛대도, 닻줄도 없다. 오직 방주의 선장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만 움직이는 방주였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중심으로 광야길을 전진해가면서 오직 구름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사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를 받아 읽었던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이들은 노아가 지은 방주의 모습을 듣고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움직였던 지난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회상했을 것이다. 노아가 지은 이 방주는 작은 우주요 교회이다. 이 방주라는 작은 우주와 교회 밖은 오직 파멸과 시체만 둥둥 떠다니는 지옥 세상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 방주-교회 뿐이다. 왜냐하면 이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고, 언약이 있고, 장차 있을 구원의 확장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노아가 준비한 양식이 줄어들고, 도대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보존의 언약을 붙들고 있기에 안전하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항해 길의 선장이 되시기에 양식이 줄어들어도, 갈길을 모르고 미래와 밖을 내다보지 못해도, 삶이 고달프고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평강가운데 감사드리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방주 안에 있는 우리가 누릴 복음이요 복이다. 우리는 새로운 노아이시며 세상을 구원으로 위로하사 안식 (노아)을 주시는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언약 속에 있기에 안전함을 믿자. 노아를 통한 구원은 아주 적은 인원과 최소한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조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는 열방의 구원이다. 세상은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있기에 존속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들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언약 백성으로 살아서 악한 세상을 위로하는 자,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을 맺자.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천국의 복을 감사히 누려야 할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재미에 빠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경건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더러운 악의 세상, 옛 세상을 물리치고 왕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번성하는 새 세상이 임하도록 해야 한다.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 안에 있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안식과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부와 재미를 따라 사는 교회 밖에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라. 세상을 위로하는 이 시대의 의로운 노아가 되자. 아멘.
무릇 있는 자는 더 받겠고 (눅 19:11-28)
오늘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있었다. 대입 시험의 점수로 한 사람의 인생 등급이 매겨지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입시험은 수험생은 물론 온 가족에게 참으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 전반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착될 조짐이 보인다. 전문직종과 부를 가진 집의 아이들이 소위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높다는 통계가 나왔다.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사는 가진 자가 앞으로 더 많이 가질 확률이 높다. 우리 시대에는 예전처럼 ‘헝거리 복서’ (hungry boxer)도 찾아보기 힘들다. 좋은 시설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 좋은 영양분을 섭취한 권투선수가 이른바 배고프지만 ‘깡다구’ 하나로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부의 대물림, 전문직종의 대물림, 명예의 대물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의 통념과 관련해서 우리 크리스챤은 다르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던 작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관자이시기에, 우리의 흥망성쇄가 주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더라도 주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일이 안되고, 그렇지 않은 환경에 있더라도 주님이 도우시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되게 하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한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 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영적인 상태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이 영적인 법칙을 눅 19장을 통해서 살펴보자.
요지는 “나는 천국에서 보상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청지기로 충성하고 누려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충성해야 할 사람이다.
본문 바로 앞 단락에는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가시던 예수님은 자신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키가 작은 삭개오를 부르신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신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신다고 수군거린다.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는 매국노와 부도덕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구체적인 회개의 결단을 하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삭개오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9:10). 바로 이 때 계속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본문인데, ‘왕위를 받으러 간 귀인 비유’ 혹은 ‘은 10므나 비유’라 불린다. 이 비유도 여리고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시간적 배경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공사역의 마지막 시점인데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다. 이 때는 유월절 무렵으로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할 즈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수도요 구약부터 하나님이 통치하시겠다고 약속된 장소요 (슥 14),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된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들어가기 직전이었기에 무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천국이 지금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이 무너진 곳에, 그리고 너희 가운데 임했다고 가르치신 구절이 많이 있다! (눅 11:20; 17:21).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을 따르던 자 중에서 열성분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복자 로마를 무력으로라도 저항해서 자유를 쟁취하면 천국이 임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순례객과 사람들이 모이는 때에 정치적인 해방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요 6장에서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다가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이 나라는 이스라엘에만 한정되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다. 주님은 천국의 완성은 미래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고 땅끝까지 계속 확장 되어야 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천국의 완성의 장소가 아니라 고난의 장소이다. 이처럼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 (over-realized eschatology)이나 정치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는 위험하다. 누가복음이 아니라 행 3:16-21절에 가서야,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확장과 미래적 완성을 바르게 파악했다.
본문 앞 눅 18:31-34절에 보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거기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인자가 붙잡혀서 결국은 죽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에 무지했던 제자들이었다. 본문 비유를 뒤따르는 구절에 보니, 주님의 죽으심을 예상치도, 알지도 못한 제자들은 주님을 ‘왕’이라고 부른다 (눅 19:37-38). 무슨 말씀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상상도 못했기에 고난과 죽으심 없는 승리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 10므나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귀인-높은 사람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가게 되었다. ‘먼 나라’는 천국이 ‘당장’ 임할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의 기대와 반대된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나라로 간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부터 30년 전에 역사적인 실례가 있었다. 주전 4년 헤롯 대왕이 죽었을 무렵, 유언에 따라 사마리아와 유다와 이두메 지역을 다스리도록 된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에 왕권을 인정받으려고 갔다. 이 때 유대인 50명이 밀사를 보내어 로마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켈라오는 유대인을 유월절에 3000명이나 학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 (ethnarch)이 된 아켈라오는 반대자들을 숙청한다. 주전 40년에 헤롯 대왕도 로마에 가서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의 왕권을 인정받았다.
이 비유의 귀인은 길을 떠나기 전에 종 열을 불러서 은 한 므나씩 나눠 준다. 한 므나는 60분의 1달란트로, 100일 동안의 품삯이다. 약 400만원 정도 된다. 사실 은 1므나는 사업하기에 큰 돈이 아니다. 마크 안토니가 이끈 로마 군인들이 각각 은 한 므나를 보너스로 받고는 너무 적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은 5므나씩 보너스로 받았다고 한다. 귀인이 말한다: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 그런데 ‘그의’ 백성이 이 귀인을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밀사를 먼 나라로 보내어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이 귀인은 왕권을 받아서 돌아온다.
왕권을 받아 돌아와서 했던 첫번째 일은 종들을 불러모아 회계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불러서 회계한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을 남겼나이다”. “잘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다한 것이 착한 것이다. 두 번째 종을 불러서 회계한다.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가지고 온다. 돈을 수건으로 싸놓는 것은 땅에 감추는 것보다 덜 안전하다. 이 종에게 문제가 된 것은 일을 하지 않은 불성실뿐 아니라 부주의함이다. 이 종이 일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믿는 당신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한 사람이다. 저축하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악한 사람이다. 그래서 종으로서 수고해도 결국은 모두 주인의 것이 될 것이기에 일하지 말자고 결심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무지와 독단 속에 살았던 악한 종이다. 앞의 종 두 명에게 보상을 준 주인의 너그러움을 보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고 어리석게 말하고 만 것이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주인을 위해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22절에서 주님은 이 사람을 향해서 게으르다고 말씀하지 않고 ‘악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를 뿐 아니라 악한 것이다. 혹시 우리 가운데서도, “악한 자가 잘 사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신비이기에 그것 때문에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 번째 종처럼 주님의 자비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충성하지 못한다. 이 세 번째 사람은 주인과 형식적인 관계만 맺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아무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만다.
이 때 왕이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은행에 돈을 예금해서 이자라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한 므나 즉 100드라크마에 이자는 4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이자율이 12%였다. “열 므나있는 자에게 한 므나를 빼앗아 주어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한다. “주여 이미 그 사람에게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대답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귀인이 왕권을 받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27절에 보니, 주님의 원수들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내다본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
이 비유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공평하게 한 므나씩 받았다. 우리는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똑 같이 하루 24시간과 동일한 성령과 믿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분량은 절대적인 공평이 아니라 상대적인 공평이다. 이 말은 마 25:15절에서 밝히듯이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겨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과 비교하면서 많은 재능을 가졌다고 뽐내어서도 안 되고 적다고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이 은사를 가지고 우리는 천국확장을 위해 장사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장사해야 한다. 청지기인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왕으로 언제 오시는 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청지기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것을 가지고 섬기는 청지기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귀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왕권을 받은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왕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사단에 대한 심판이다. 누가-행전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의 통치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중심주제이다.
이 비유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1) 예수님께 충성하여 상을 받은 사람. (2)예수님과 형식적인 관계를 맺고 오해하여 일하지 않아서 있는 것도 빼앗긴 사람. (3) 왕이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대적하고 가까이 다가오기를 거부하여 죽임 당한 사람.
우리가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믿고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성할 때 그것은 곧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의 사업에 충성해서 남긴 만큼, 주님이 다시 오셔서 회계하실 때 정비례하여 저 천국에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박탈 당하고 말 것이다. 달란트에는 책임성이 따른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거부한다. 주님의 왕되심을 거부한다면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지기로 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가? 우리도 왕으로 다스리는 복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왕이 되셨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받아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승천 이전에 눅 23:2절에 보니,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왕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신다. 눅 22:29절에도, 성부 하나님이 천국을 예수님에게 맡긴 것 같이, 예수님은 천국을 다시 제자들에게 맡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천상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이 일에 잘 수종들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부익부 법칙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가뿐히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드린 기도처럼 주님 은혜로 일이 잘 풀린다면 감사하고 입에는 찬양이 있을 것이다. 기도의 재미를 본 사람은 또 기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사람은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또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 봉사의 즐거움과 보람을 아는 사람은 더욱 충성하기를 원한다. 은혜와 능력 그리고 영적인 갈증을 매일 느낀다. 하지만 마음이 상해서 기도도 못하고 말씀도 읽지 못한체 살면 하는 일마다 짜증나고 불편거리만 늘어난다.
첫째와 둘째 종이 각각 10고을, 5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의 통치 권한을 이양받는 것이며 천국에서 함께 왕노릇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왕노릇 할 수 있나? 주님의 왕권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자. 마 25:23절에서는 충성한 종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한다.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은 잔치 상에 함께 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시행되는 권세를 받아 다스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천국의 기쁨 즉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와 복을 여기서 누리는 복이다. 이 땅에서 왕으로서 천국을 누리는 만큼 미래의 천국의 보상은 비례한다. 여기서 천국을 위해 충성하지 못하고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저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 일은 없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천국의 잔치와 기쁨을 즐기는 것, 즉 구원을 즐기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구원받은 것은 시작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고난 중에서라도 천국의 은혜와 복과 은사와 풍요로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능력을 깨닫고 순종과 기도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누려야 한다. 충성하고 누리는 만큼 비례하여 저 천국에서 보상으로 주어진다.
말을 맺자.
우리는 청지기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하루 24시간을 받아 살고 있다. 시간의 청지기가 되라. 시간의 10일조를 드려라. 물질의 청지기가 되라. 재능의 청지기가 되라.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삶이다. 이 땅에서 왕으로 누리면 저 천국에서도 약속된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우리 모두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살기 원하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알아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구약에도 성령님이 활동하셨다. 천지창조 때에도 성령님은 역사하셨고, 출애굽 때에도 성령이 구름기둥-불기둥으로 역사하셨고,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시며 찬양을 주시고, 회개 운동을 일으키신 분이 구약의 성령님이시다. 성경이 기록될 때 사람 저자들을 영감시키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예수님을 잉태케 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이시며, 초대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거듭난 우리를 날마다 성황의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신다. 대신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 결국 날마다 예수님을 더 닮아가도록 하신다. 종합해보면, 성령님은 비인격적인 바람이나 불 혹은 힘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신 분이시다.
“나를 통하여 성령님의 분명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왜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분명한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의 역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하신 후 10일만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이다. 그 결과 본격적인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19장에 보니, 행 2장과 비슷한 성령 강림 사건이 에베소교회에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행 19장의 에베소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신 사건을 ‘작은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교회를 방문한다. 그곳에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12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절). 바울의 이 질문은 에베소교회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별도로 특별히 받아야 할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뜻이 아니다. 대신 “너희는 진정한 신자인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12명에게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절의 에베소교인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말은 그들이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구약에서 성령이 언급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욜 2). 그러므로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 성도였다. 이 때 바울이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한다: “요한의 세례로다” (3절).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대답한 에베소 교인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 (예수님)를 믿으라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4절).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2절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 후 바울은 그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5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에게 베푼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것이었다. 이것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크리스챤은 일평생 세례를 1번만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이미 받은 이들에게 왜 바울은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본문 1-2절에 보니, 이 12명은 제자라고 불리며 믿고 있다고 말씀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12명은 바울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을 받아서 믿고 있는 성도이다. 이들에게 분명히 성령이 거하고 계셨다. 하지만 자신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느끼지도 알지도 심지어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희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동삼동에 살면서도 동삼동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이 희한한 일이다. 동삼동에 살면서 나는 고신대학 안에 대학교회가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오늘 오후 예배에 참여하면서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며 성경골든벨이 있다는 말을 교회에 와서 처음 들어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소유한 에베소 교회에게 성령이 이렇게 특별히 다시 임한 것은 이들 이방인 성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임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행 19장에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세례를 받아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말하고 예언한 것은 불신자를 신자로 거듭나게 하는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은 ‘표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초대교회가 시작하고 발전하는 단계에서 이방인 성도나 유대인 성도나 동일한 형제 자매임을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 19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똑 같은 사건이 우리 시대에 다시 일어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성령의 특별한 회심의 사건이나 변화를 주시는 사건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행 19장의 사건과 동일한 것을 우리가 여전히 기다린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너무 초라한 것으로 제한하고 만다. 이 말은 성령의 회심케 하시는 역사와 내주하시는 역사가 부족하기에 다시 능력을 부으시는 역사가 특이하게 계속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에베소교회에 임한 특별한 성령의 강림을 다시 기대할 필요 없다. 대신 성령의 충만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주님께 헌신하려는 결단과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순종하려는 충성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기 원하는 성령님의 소원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하신 능력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는가를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살 때 주시는 약속은 무엇인가? 주님 안에서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고 될 것이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12제자처럼 세례를 2번이나 받을 이유가 없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본질적인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약에 속한 세례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이다 (마 11:9, 11). 하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나 다니엘과 같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이 그들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신 계시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천국의 여명을 알린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마 3:3).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 세례를 예상하고 조금 맛을 보여주는 세례이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례받는 사람의 죄가 용서함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과 온 교회 앞에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회개만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죄용서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큰 구약의 마지막 주자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세례가 주어졌기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된 것이다.
천국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로 살고 있다. 세례 요한은 오순절 성령 강림도 에베소에 임한 성령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알고 믿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모할 때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의 위대한 신학자들 조차도 왜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에만 일어나고 우리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섬겨라. 성령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자.
말을 맺자.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는 성령으로 진정으로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는가?”. 주님은 다른 질문도 하신다: “너희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통로로 살고 있느냐?” 성령을 제한하거나 소멸치 말자. 성령의 은사를 멸시치 말자. 성령의 강력하고 분명한 역사를 사모하자. 성령의 사람이 되자. 힘있는 성령의 통로, 거룩한 성령의 도구가 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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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혁교회와 신앙고백
우리는 지난 주에 교회개혁주일을 보냈다. 칼빈과 루터의 개혁운동은 부패한 중세 천주교를 다시 성경적인 사도적 교회로 돌이키는데 목적이 있었다. 심지어 8살난 아이가 추기경이 되고 성직 매매가 이루어 졌고 교회가 광대한 땅을 소유하여 세상 의 부와 권력의 단맛을 보면서 세상 속에 안주하면서 세속화되어 갔다. 교회는 섬김의 공동체가 아니라 군림하는 이익집단이 되어 버렸다. 이렇게 칼빈이나 루터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아 성경적인 교회로 계속해서 개혁하면서 돌아가려는 교회를 개혁교회 (reformed church)라고 부른다. 우리 교회는 대한 예수교 장로회 교회이지만 그 신학과 신앙생활은 개혁교회를 모델로 삼는다. 서구에서 오랜 기간 동안 시행착오를 거쳐서 정착된 아름다운 개혁교회의 전통이 우리 실정에 다소 맞지 않다고 배척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야 한다. 이것은 종교적-문화적 사대주의가 아니다. 주로 개혁교회는 남아공, 독일, 스코틀랜드, 네덜란드, 캐나다, 호주, 미국, 프랑스, 그리고 헝가리와 같은 일부 동구권 등에 정착했다. 개혁교회의 예배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진다. 예배는 축도로 시작해서 축도로 마친다. 축도는 기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예배 시작과 마지막의 복의 선포는 언약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만나서 말씀하시며 교제하시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찬송은 시편 150편에 곡을 붙여서 부르는데 반주를 위해 오르간만 주로 사용한다. 설교하는 목사님만 강단에 올라가서 사회, 기도, 설교, 축도 모든 순서를 담당한다. 목사님은 입교를 받을 고 3학생들을 1주일에 한번 평일 밤에 만나서 교리를 가르친다. 전도사, 강도사, 부목사와 같은 부교역자는 없다. 그냥 담임목사만 있을 뿐이다. 모든 예배 순서는 말씀 낭독과 설교에 초점이 맞추어 진다. 우리처럼 열심히 매주일 찬양대가 찬양하지 않고 대신 특별한 절기에만 한다. 개혁교회의 경우 오전 그리고 저녁 예배에 헌금을 한다. 오전 예배와 저녁 예배를 마치고 나갈 때 집사님들이 헌금 주머니를 들고 입구에 기다리는데 성도는 동전을 넣는다. 실제적인 봉사와 구제를 담당하는 집사님은 그 돈으로 구제와 봉사를 한다. 개혁교회의 집사님과 장로님은 매주 실제로 많은 일을 하기에 계속해서 은퇴할 때까지 일할 수 없다. 개혁교회의 직분은 감투나 명예직이 아니라 봉사직이기에 임기는 최소 2년이고 주로 3년 정도이다. 3년 정도 집사나 장로로 열심히 일한 후에 1년 정도 쉬었다가 다시 일하게 된다.
개혁교회의 성찬식은 1년에 적어도 4번 시행한다. 개혁교회 장로님은 한국의 당회원 역할과 구역장 역할을 같이 한다. 2001-2002년에 센츄리온 개혁교회의 장로로 섬길 때 적어도 성찬식이 있는 주간에는 미리 모든 구역원들이 성찬에 참여하도록 살피고 심방해야 했다. 따라서 적어도 연말에 시행하는 심방을 포함하여 1년에 5회 이상은 구역원들을 심방해야 했다. 장로는 가족 전체의 형편을 살피기 위해 가족 모두가 모일 수 있는 밤에 주로 심방하고 그 결과를 당회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로는 목회자의 귀한 협력자이다. 이렇게 장로의 심방을 받기에 성찬이 있는 주일은 많은 성도가 예배에 참석한다. 성찬식 전 주일에는 미리 광고를 하고, 목사님은 성찬과 관련한 설교를 한다. 성찬식 때에는 예수님이 12제자와 함께 식사하신 것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강대상 바로 앞에 설치된 긴 탁자에 12명을 초청하여 기념하게 한다. 때로는 50명 정도가 한꺼번에 강대상 앞에 설치된 몇 줄로 정렬된 탁자로 나와서 교대로 기념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성찬식 때 작은 컵이 아니라 약 500ml 용량의 큰 잔을 여러 명이 함께 사용했다. 빵은 우리가 먹듯이 작은 조작을 사용한다. 최근에는 위생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우리처럼 작은 잔을 사용하도록 허용했다. 분병, 분잔 위원은 집사님들이 주로 하되 장로님 혹은 여성도도 봉사하기도 한다. 다른 교회에서 온 성도가 성찬에 참석하려면 반드시 자신이 무흠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당회가 발행하는 교회 신앙 생활 증명서를 당회에 제출해야 한다. 다른 자매 개혁교회에서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은 성찬식 전에 광고를 통해서 함께 동참하게 되었다고 목사님이 알린다. 개혁교회에 5년간 출석하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목사님들의 설교였다. 구속계시사적인 설교의 진수를 맛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목사님은 신앙고백과 교리에 관한 설교를 2주에 한번 정도 해야 한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교회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서 권징-치리를 엄격히 시행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찬송가와 개혁교회의 찬송가는 여러가지 면에서 다르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는 이전에 주로 미국의 복음성가라면 개혁교회의 찬송은 시편 150편의 가사를 그대로 사용하여 장엄한 음조에 맞춘 찬송이다. 개혁교회의 찬송가에는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다나시우스신경, 벨직 신앙고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 도르트신경, 세례 문답서, 성찬 예식문, 장로-집사 임직 예식문, 모범 기도문, 교회치리헌법 등이 수록되어 있다. 모든 성도가 쉽게 이런 신앙고백서, 예식문, 헌법을 접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
(2)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역사적 배경
우리 교회에서 주일 오후 예배 시에 교독하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에 관해서 살펴보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무엇이며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가? 요리문답은 요리법 (recipe)과는 상관없다. ‘요리’라는 말은 ‘중요한 교리’라는 뜻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신앙교육문답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함께 개혁교회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는 신앙고백서이다. 장로교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개혁교회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채택했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독일의 하이델베르그에서 만들어진 개혁주의 신앙교리문답서이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만들어진 때는 지금부터 440년 전인 1563년이다. 그 당시 독일은 로마 교황의 지배 하에 있었다. 하이델베르그는 과격한 루터파, 온건한 루터파, 칼빈주의자들이 뒤섞여서 성만찬에 관한 논쟁을 벌여서 자칫 분열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었던 분위기 였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만들어질 당시는 이미 루터에 의해서 교회개혁이 독일에서 시작된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였다. 교회개혁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던 당시 하이델베르그에는 루터, 칼빈, 쯔빙글리, 멜랑히톤의 영향이 강했다.
독일 황제를 선출할 수 있는 7사람의 제후를 선거후 혹은 선제후라고 부른다. 그 중 한명이 프레드릭 3세 였다. 그는 경건한 사람으로서 칼빈의 교회개혁이 탄력을 받게 하기위해 하이델베르그 대학교수이며 멜랑히톤의 영향을 받은 (약관 27세의) 자카리우스 우르시누스와 칼빈의 영향을 받아 교회개혁에 동참하다가 옥고를 치룬적 있었던 유능한 젊은 (성령교회의 궁정)설교가인 카스파르 올레비아누스로 하여금 간단한 교리문답 지침서를 만들도록 했다. 그 결과 기도와 토의를 거친 후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1563년에 출판되었다. 프레드릭 3세는 이 요리문답의 서문에서, 교리 교육을 위해 성경에 기초한 이 요리문답이 학교와 교회에서 오고 오는 세대를 위해 중요하게 가르쳐져야 할 것을 밝혔다. 이 요리문답 책은 널리 보급되었고 주일에 교리를 가르치려는 용도로 사용되어 1년 52주에 맞추어 52주일 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600년의 교회회의에서는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목사는 설명하고 가르쳐야 한다고 결의했다. 1609년에는 미국에 소개된 최초의 개혁교회 신앙고백서이다. 1618-1619년에 열린 도르트 회의에서 하이델베르그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 되었다. 하지만 1566년 5월 14일에 선제후 프레드릭 3세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이 개혁주의 요리문답을 만들고 승인한 것으로 이단으로 정죄당할 위기에 처했다. 특별히 요리문답 제 80문에서 천주교의 미사는 우상숭배라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프레드릭 3세는 이 위협에 굴하지 않고 막시밀라 2세 교황 앞에서 변론했다. 내가 왕관을 벗을지언정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이 요리문답을 포기할 수 없다.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심지어 교황으로부터 프레드릭 3세는 ‘경건한 프레드릭’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칼빈주의적 성격을 지닌 요리문답이기에 교황은 물론 루터주의자로부터도 비난을 받았다. 루터주의자였던 프레드릭의 장남 루이 6세는 이 요리문답서를 불태우고 보급하는 자를 엄벌에 처했다. 하지만 이 요리문답서는 루터주의와 구별되는 방식으로 더 철저한 개혁주의적 성격으로 발전해 갔다.
지금까지 교회개혁 시대의 여러 교리문답 중에서 가장 널리 영향력있게 인정받고 있는 것이 되어 왔다. 개혁교회에서는 주일 저녁 예배 설교시에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사용하고, 청소년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사용한다.
(3)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의 내용과 구성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사도신경, 십계명, 주기도문 그리고 성례를 두루 다루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내용을 3부분으로 나눈다: (1) 죄와 그 비참함, (2) 구원, 그리고 (3) 감사. 이 3부분은 성경의 주제라고 할 수 있는 창조-타락-구원을 반영한다. 각 문답은 간결하고 연역적이고 운율적이어서 학습자로 하여금 오랫 동안 기억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은 52주에 걸쳐서 가르칠 수 있도록 되어 있고 총 129문으로 구성된다. 제 1부는 죄와 그 비참함을 다루는데 3-11문까지다. 우리는 사람의 범죄로 인한 비참함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통해서 아는데 그 누구도 그 계명을 지키지 못했다. 본성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을 미워한다. 따라서 공의의 하나님은 죄를 벌하신다. 그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선을 행할 수 없다.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이 인간의 죄와 비참함으로 시작한다고 해서 인본주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바울도 롬 1-3장에서 모든 사람은 죄인이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먼저 밝히고 있지 않는가! 대신 이런 인간의 죄성과 비참함은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한다.
제 2부는 인간의 구원을 다루는데, 12문에서 85문까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설명하면서 제 19문에 가서야 하나님의 말씀은 시대마다 점진적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밝힌다. 제 21문에서 참된 신앙을 하나님의 말씀을 참이라고 확신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통한 죄용서와 영원한 의와 구원을 은혜로 받았다는 신뢰라고 밝힌다. 이런 믿음은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 안에 역사하심으로 얻게 된다. 제 22-55문까지 우리가 신앙하는 내용을 사도신경을 통해서 설명한다. 제 59-64문은 공로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신칭의를 설명한다. 제 65-85문은 성례 (세례와 성찬)를 길게 다룬다. 21문에 걸쳐서 성례를 다루는 것을 통해서 그 당시 하이델베르그에서 성례에 관한 논쟁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성찬은 부활-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영적인 임재라고 칼빈주의적으로 설명한다.
제 3부는 구원받은 사람의 감사를 다루는데 86-129문까지이다. 구원받은 자가 청지기로서 봉사하며 감사하는 길을 설명하기 위해 사도신경과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을 언급한다. 왜 구원받은 자의 감사생활을 설명하면서 사도신경을 십계명 앞에 두는가? 사도신경으로 기독교 교리를 해설한 다음에, 십계명을 통해서 구원받은 사람이 마땅히 따라야 할 새로운 순종의 규범을 제시하려고 한다. 십계명은 더 이상 우리를 속박하고 죽이고 정죄하는 사망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케 하는 새로운 율법이요 삶의 규칙이다. 약 1:25절 “자유케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마지막으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를 언급하는데, 기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방편이기 때문이다.
제 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에게 유일한 위로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 그 답은 “나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 것이 아니라 나의 신실한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나를 구원하신 예수님은 삶과 죽음의 모든 것을 나의 구원을 위해 유익하게 역사하신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내 안에 있는 영생을 확신시키셔서 더욱 주님께 충성하도록 하신다. 바울도 고후 1:1-11절에서 위로라는 말을 10번이나 사용한다. 고후 1:3절: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자로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만 위로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도 보혜사로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하시고 유혹 속에서 도와주신다 (요일 2:1; 히 2:18).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도 우리를 격려하시고 힘주시고 인도하신다 (요 14:16, 26). 3위 하나님은 모두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위로하신다. 왜 우리에게 위로가 필요한가? 고난 때문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주님을 위한 고난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는 것이며 바로 그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위로가 있음을 확실히 믿었기 때문이다. 고후 1장에서 바울은 현재형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로가 지속적임을 밝힌다. 살거나 죽거나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의 아버지가 되심을 믿고 감사하자.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고난 중에 있는 형제-자매를 위로하면서 살자.
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통해서 우리의 죄와 그 비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과 칭의, 그리고 감사하는 삶을 분명히 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 아멘!
내 종 순을 나게 하리라 (슥 3:1-10)
성경에는 ‘스가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30명이나 된다. 특별히 이 이름은 바벨론 포로 귀환 후에 흔한 것이었다. 스가랴서의 저자인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스가랴는 학개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스가랴는 학개처럼 성전 재건을 독려했지만, 이스라엘 백성에게 먼 미래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때 시온 (예루살렘-교회)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것에 관해 격려하기 원했다. 스가랴는 특별히 다윗의 후손인 총독 스룹바벨과 사독의 후손인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통해서 장차 회복될 메시아 왕국을 강조한다. 기억할 것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활동할 당시에도 하나님의 회복의 약속 중 많은 부분이 손실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벨론에서 돌아온 후에도 이스라엘백성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스가랴의 예언은 약 500년 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져서, 예수님과 연합된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요지는 “나는 말씀에 순종하여 의와 사죄 그리고 번성의 은혜를 누려야 한다”.
첫째로,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죄악에서 건짐받은 의롭게 된 사람이다.
슥 3장은 스가랴가 본 4번째 환상이다. 첫번째 환상 (슥 1:7-17)은 홍마를 타신 그리스도께서 석류나무 가운데 서계신 것이다. 이 환상이 말씀하는 바는 백향목처럼 화려하고 웅장하지 않지만 석류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친히 거하시며 보호하시겠다는 메시지이다. 두 번째 환상 (슥 1:18-21)은 4뿔과 4공장의 환상인데, 4뿔은 이스라엘을 공격할 이방나라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를, 4공장 (장인; 바사, 헬라, 로마, 메시아왕국)은 그 뿔을 깨뜨릴 하나님의 도구를 상징한다. 즉 이스라엘이 위협을 당할 것이지만 하나님은 적절하게 원수를 깨뜨려서 결국은 하나님 나라를 세우실 것임을 가르쳐 준다. 세 번째 환상 (슥 2:1-13)은 측량줄을 잡은 한 사람에 관한 환상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가운데 영광으로 거하시며 불의 장벽처럼 둘러서 보호하실 것임을 말씀한다 (슥 2:5). 따라서 바벨론 포로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은 속히 돌아와야 한다 (슥 2:6). 그리고 열국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것이다 (슥 2:11). 이렇게 3가지 환상은 모두 이스라엘을 보호하실 하나님의 열심을 설명하는 선한 위로의 말씀이다 (슥 1:13). 홍마를 타신 정복자 예수 그리스도, 세상 역사의 주관자로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시는 하나님, 예루살렘을 불꽃 같은 눈으로 보호하실 임마누엘 주님을 왜 이렇게 반복해서 환상으로 보여주시는가?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주변의 많은 반대자들을 상대하면서 그것도 황무한 상태에서 재건 사업을 추진하는 것이 어려웠기에 반복적으로 환상을 보여주심으로 소망을 주신다. 스가랴 당시에 이스라엘이 처한 어려운 상황을 보지 말고, 대신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환상을 보라는 것이다. 믿음으로 현실을 극복하라는 말씀이다.
새로운 환상이 시작되는 것을 나타내는 “내가 눈을 들어 본즉”이라는 구절이 없이 갑작스럽게 시작하는 스가랴서의 4번째 환상이 본문 슥 3장이다. 본문 바로 앞 슥 2:13절에 보니, 여호와께서 성소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강력하게 역사하시려고 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여호와의 사자 (칼빈: 구약의 예수님) 앞에 섰고, 사단은 그의 오른 편에 서서 그들 대적하고 있다. 이것은 고대의 법정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판사는 여호와의 사자 즉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원고는 피고의 오른편에 선다 (시 109:6; 욥 1:6-12). 즉 원고 사단이 피고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고소하기 위해 오른 편에 서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죄로 무가치하게 된 이스라엘의 죄악상을 의미한다.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스라엘의 죄악을 보고 사단은 자신의 주특기인 참소를 판사이신 하나님 앞에 늘어 놓는다. 사단의 고소에 피고인 여호수아는 묵묵부답이다. 즉 이스라엘백성의 죄악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이것은 참으로 이스라엘에게 큰 위기이다. 왜냐하면 만약 대제사장이 부정한 옷을 입어서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백성 전체는 어떻게 속죄를 얻으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단 말인가? 대속죄일에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갈 사람이 없다면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어야 하지 않는가?
이 때 하나님이 직접 피고 여호수아의 변호사가 되시려고 자청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권능의 팔을 펴서 사단에게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무언가 문제가 해결될 여명이 비쳐진다. “사단아. 내가 예루살렘을 택했다. 비록 그들이 바벨론 포로를 상징하는 불에서 끄집어낸 나무처럼 불에 그을린 흔적이 있지만 여전히 나의 선택한 백성이다” (2절). 내가 선택하고 의롭다고 한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원고 사단의 참소가 거짓되고 헛된 것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바벨론 포로의 원인이 된 죄악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고발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제 이스라엘은 충분히 죄의 대가를 치루고서 건짐을 받아 구원받았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죄를 먼 바다에 던지셔서 다시 기억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슥 1-2장의 3개의 환상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시며 그들의 산성이 되시며 영광 가운데 임마누엘하시겠다고 이미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본문 2절에서 말씀하듯이 이스라엘백성이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와 같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범죄 후 회개하여 용서를 받았지만 때로 그 흔적이 남아 있을 수 있다는 점이다. 70년 포로 생활의 상처자국이 이스라엘에게 남아 있었다. 이 사실을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잘 알고 있었다. 여호수아의 할아버지는 스라야인데 느부갓네살왕에게 살해당했다 (왕하 25:18). 여호수아의 아버지 여호사닥도 포로로 끌려갔다 (대상 5:25-6:15). 나라가 망하고 성전이 파괴 될 때 대제사장으로 일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여호수아이다. 여호수아 자신도 포로로 잡혀가서 바벨론에서 양육되었다가 돌아온 사람이다. 이것이 바로 불에서 건짐을 받은 거슬린 흔적이다.
여호수아는 대제사장이기에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이제 원고 사단 앞에서 피고는 의롭다고 선언하신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더러운 옷, 죄악의 옷을 벗겨 주신다. 대신 아름답고 화려한 옷을 입혀주신다 (4절). 스가랴선지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여호수아를 위해 더 큰 영광을 주시도록 깨끗한 관도 씌워달라고 부탁한다 (5절). 포로시절 입었던 누추하고 더럽고 헤어진 옷이 아니라 대제사장만 입을 수 있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주시고 머리에는 관을 씌워 주심으로 여호수아는 대제사장 직분을 다시 수행하도록 회복받았다. 특별히 대제사장의 관 위에는 ‘여호와께 성결’이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출 39:30-31). 여호수아는 이제 성결한 직분을 수행할 수 있으며, 이스라엘 전체는 거룩한 백성으로 재창조함을 받는다.
8절에서 하나님은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돕는 사람들, 아마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예표-징조의 사람들 (men of a sign)이라고 말씀하신다. 스룹바벨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들은 그림자이다. 실제이신 대제사장이 오시기까지만 섬겨야 했다. 이 그림자의 실제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종이며 순 (싹-가지)이다. 종 (겔 34:24; 37:24)과 순 (가지, 사 11:1)은 누구인가? 하나님의 종인 동시에 아직은 활짝 피어서 그 완전한 모습을 완전히 나타내 보이지 않지만 장차 왕으로 등장하실 실제는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순-새싹-가지이신 예수님은 아직 그 완전한 자태를 드러내지 않으신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이시다. 가지와 싹이시기에 건장하거나 화려한 모습이 없으신 그리스도이시다 (사 53). 그러므로 무지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멸시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종’이기에 성부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이루실 것이다. 불신자들의 눈에는 그리스도가 보잘 것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분은 왕이시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대제사장과 레위인, 성전 봉사자들이 짐승의 피로 반복해서 드린 제사를 성취하실 것이다. 예수님 안에서만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새롭고 산 길을 발견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중보자가 되신다. 예수님 이름으로만 은혜의 보좌로 향기나는 기도를 올릴 수 있다.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예수님 안에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자이다.
둘째로, 사죄의 은총을 입은 우리의 사명은 무엇인가? 계속해서 은혜가운데 살기 위해서 우리의 심비에 성령으로 새겨주신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지켜야 한다.
7절에 보니, 이렇게 회복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만일 이스라엘이 도를 준행하고 율례를 지키면 여호수아가 하나님의 집을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집의 뜰을 지킬 것이다. 성전 뜰을 지킨다는 것은 성전 봉사를 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여기 섰는 자들 (천사, 교회) 중에 왕래하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보좌로 나아가리라 즉 대제사장으로서 중보기도를 하리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은 자신을 예배하도록 여호수아에게 아름다운 옷과 관을 주신 것이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총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데 사용하지 않으면 거두어 가실 것이다. 만일 제사장이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면 하나님께서 희생 짐승의 똥으로 얼굴에 바를 것이다 (말 2:3). 만일 우리가 받은 은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고 하나님을 경배하지 않으면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가 정상적인 성전 직무를 지속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도와 율례를 지켜 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삼하 7장의 다윗 언약의 핵심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지속적인 은혜를 얻으며 주님의 은혜의 보좌로 나아가려면 순종하는 삶이 뒤따라야 한다. 구원받아 의롭게 된 하나님의 백성이 은혜의 샘, 은혜의 보좌로 연결된 시온의 대로를 걷고 새롭고 산 길을 통과하려면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구원과 은혜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순종과 실천없는 믿음은 헛것이요 죽은 것이다.
9절에 보니, 대제사장 여호수아 앞에 하나님께서 돌을 세우신다. 그 돌 위에는 눈이 7개나 있다. 돌은 성전 (교회)의 기초석 (예수님)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시온에 놓이게 될 보배롭고, 귀하고, 견고하고, 요긴한 성전의 모퉁이 돌, 머릿돌, 기초석이시다 (마 21:42; 벧전 2:6-8; 사 26:18). 이것은 스가랴 당시의 스룹바벨 성전 재건의 상황에서 볼 때 적합한 말씀이다. 그 위에 7눈 즉 감찰하시는 하나님이 (슥 4:10) 무언가를 새길 것이다. 7눈을 가진 돌은 산돌이신 예수님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위에 새겨질 글자는 새언약이다. 이 글자는 곧 성령으로 우리 심비에 새겨두신 천국 복음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완전한 지혜이시다. 예수님은 성전의 기초돌이실 뿐 아니라 교회의 머리로서 세심한 관심과 완전한 감찰로 교회를 돌보신다. 계 5:6절에서는 7눈이 성령을 가리킨다. 예수님의 사역은 성령의 사역이다. 그리고 본문 9절 중반부에서 말씀하시듯이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악을 하루 만에 제하실 것이다. 대속죄일이 아니라 주님이 십자가에서 못박히신 금요일 바로 그 날에 영원한 단번의 제사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악이 사해질 것을 예언한다. 사죄함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견고하고 귀한 반석이신 예수님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완전하게 보호하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가운데 말씀에 순종하면서 예배의 삶을 살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어떤 약속을 주시는가? 삶에 평안과 번성함을 주신다.
10절에 보니 ‘그 날에’ 즉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희생 제물되심으로 용서받는 날에, 이스라엘은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로 서로 초대하게 될 것이다. 이웃이 서로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 모이고 교제를 누리는 것은 평온한 삶을 상징한다. 왕상 4:25절 솔로몬 시대의 부귀영화를 포도나무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안연히 살았다고 말씀한다 (미 4:4). 외적인 번영과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죄사함이라는 내적인 번영과 치료가 있어야만 가능하다. 이런 회복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진다. 왜냐하면 7, 9, 10절에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말을 맺자.
1521년 5월 24일 루터는 그의 제자요 동역자인 멜랑히톤에게 이렇게 편지를 쓴다: “나는 내 자신이 무감각하고 완고하고 게으름의 종이 된 것을 본다. 나의 길들여지지 않은 육체가 삼키는 불길과 함께 타버리는 동안, 나는 교회를 위해 거의 한 마디도, 한마디 신음으로도 기도하지 못한다”. 위대한 교회 개혁의 불길을 점화한 루터였지만 자신의 죄와 무능력에 대해 철저히 애통해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마치 바울이 롬 7:24절 이하에서 고뇌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로마 카토록의 부패와 죄를 지적한 루터 자신이 사실 죄에 대해 아주 민감했던 것이다. 독일의 Wartburg성벽에는 마틴 루터와 관련된 이런 글이 적혀 있다고 한다:
하루는 루터가 꿈에 사단을 본다. 사단은 루터가 태어나서 지은 모든 죄를 긴 두루마리에 적어서 읽는다. 루터의 공포는 계속 커지고 결국 뛰면서 외친다. 모든 것이 사실이다. 사단아.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 아시는 죄가 더 있다. 너의 목록 아래에다가 이것도 쓰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정결케 했다”. 루터는 탁자 위의 잉크 병을 집어 사단에게 던지자 사단은 도망 가버렸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거룩한 나라와 성전 삼으시기 위해서 슥 3장의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으로이며 구약 제사장들의 실제로서 오셨다. 골고다에서 단번의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부활하셔서 성전의 머릿돌이시며 교회의 머리로서 성령의 능력으로 보호하시는 분으로 계신다. 우리도 세상에서 순처럼 연약해 보이고 보잘 것 없지만 사실 의롭고 강한 주인공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신 종 (두 번째) 여호수아이시며 신실한 하나님의 종이시며 순-싹-가지이신 예수님 때문이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천국의 신령한 은사를 계속 누리며 예배하기 위해 우리 심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산 돌이시며 반석이신 주님을 터로 삼아야 한다. 우리는 이 시대의 제사장으로서 의로운 옷을 입고 날마다 보좌로 나아가야 한다. 또한 우리를 정죄하는 사단과 인내하며 싸워야 한다. 아멘.
그 방주로 들어가고 (벧전 3:13-22; 창 6:1-22)
나의 고향에는 문천지라는 아주 큰 호수가 있다. 전국체육대회 종목 중 카누와 조정 경기가 그 호수에서 열렸다. 어릴 적, 거의 매년 여름 장마철에 집중 호우가 내리기라도 하면 호수의 물이 넘치고 결국 둑이 터질지도 모른다는 위협 속에 살았다. 만일 둑이 터지면 못 바로 밑에 있었던 우리 마을을 다 쓸어버리고 금호강 물과 합쳐져서 30km 떨어진 대구까지 쓸어버릴 지도 모른다는 어른들이 쓰는 무서운 가상의 시나리오를 자주 들었다. 그러나 한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불보다 물이 무섭다는 말을 어릴 때부터 체험적으로 듣고 보았다.
우리 가까이에 대홍수와 관련된 산이 있다고 한다. 광활한 억새 풀밭으로 유명한 경남 창녕에 있는 화왕산이다. 산 정상에는 배바위라는 것이 있다. 바위 한쪽 끝에 갈고리모양 같은 것이 튀어 나와있다. 전설에 의하면 큰 홍수가 났을 때, 배의 닻줄을 그 바위에 묶어 두었고, 그 배 안에 들어간 사람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 때 생존했던 사람으로부터 인류가 다시 번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화왕산의 홍수 전설 이외에도 이 세상에는 홍수와 관련된 전설이 많다. 그러나 성경은 노아 홍수만이 온 세상에 임한 유일한 홍수라고 말씀한다. 이 시간 노아 홍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들어보자.
말씀의 요지는 “나는 고난 가운데서도 구원의 주님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첫째로, 본문이 말씀하는 우리의 신분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아 영육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창 3장에 보니,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 동산에서 추방되기 직전에 하나님은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셨다 (21절). 그리고 창 4장에 보니, 가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후에 하나님은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보호하시겠다는 표를 주셨다 (15절). 이처럼 죄인을 당장 멸하지 않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 창 3-4장에 등장한다. 그런데 창 6장에 보니, 하나님은 노아 할아버지 당시의 죄를 보시고 홍수라는 무시무시한 전 지구적인 심판을 수행하신다. 다시 한번 가죽옷과 표처럼 은혜와 기회를 주시면 안 되었던가? 무엇이 홍수라는 심판을 초래했는가? 창 6:1-2절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 즉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이 타락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구원을 받은 아담의 셋째 아들인 셋의 후손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의 아들 즉 상속자로서의 특권을 포기하면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에 심취한다. 그렇다면 사람의 딸들은 누구인가? 이들은 하나님 없이, 하나님께 제사드리는 것 없이 사는 가인의 후손이다. 최초의 살인자 가인의 후손은 곧 뱀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가인의 7대손 라멕이 낳은 3아들인 야발, 유발, 두발가인으로부터 뱀의 후손들은 세상적인 기술과 문명, 취미와 쾌락, 음악과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문명의 이기들, 부를 축적하는 것, 음악이나 문화생활을 하는 것 자체가 악하지 않다. 하지만 하나님 없이 이런 것들만 추구하는 것은 결국 세상 재미에 빠져서 하나님께 등을 돌리게 만들고 만다. 가인의 7대손 라멕과 달리, 셋의 7대손 에녹은 경건한 삶으로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 이처럼 뱀의 후손인 가인과 여자의 후손인 셋의 후손들은 결정적인 차이점을 가질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셋의 후손으로부터 여자의 후손이신 예수님이 태어나셔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아 할아버지 시대에 와서 하나님의 아들들인 셋의 후손조차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기업과 복을 누리기 보다는, 뱀의 후손들-가인의 후손들-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재미와 예술과 육감적인 쾌락과 육체적인 아름다움 그리고 부를 축적하는 것을 더 선호하고 말았다. 마 24:38-39절에 보니, 노아 홍수 전에 사람들은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데 바빠서 홍수가 임할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본문 창 6:4절에 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네피림이라는 자식을 낳았다고 한다. 네피림은 ‘폭군’ 혹은 ‘타락한 사람’이라는 뜻인데 거인-영웅이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세상에서 자식을 통해서 영웅처럼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했다는 것이다. 자기 자식들이 남이야 어떻게 되던지 아랑곳하지 않고, 일류대학에 들어가서, 좋은 직장을 얻고, 세상의 명예와 부와 권세를 누리며 소시민적으로 일신의 영달을 위해 살도록 했다는 말이다. 노아 당시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 대신에 그들의 자식을 네피림-영웅으로 만들기를 원했다. 우리 시대에도 우리 자녀가 우상이 될 여지가 많이 있지 않은가! 지혜와 지식의 근본이신 여호와 하나님만 경외하는 법, 예수님을 더욱 사랑하는 법,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법,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출세하는 요령과 처세술을 우리가 삶으로 가르쳐준다면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본문은 성도가 세상과 화해하고 타협하는 것이 타락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이 세상에 동화되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은혜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의 즐거움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는 소망이 없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들 즉 구약 교회의 타락한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것을 한탄하시고 마음에 근심하셨다. 그리고 결심하신다.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물을 홍수로 쓸어버리리라! (창 6:5-7).
하지만 여기서 기억할 것이 있다. 사실 노아 당시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에 동화되어 세상 재미와 육감적인 쾌락에 빠져 있었을 때 홍수로 즉각적으로 심판하시지 않았다. 본문 창 6:3절에 보니, 하나님은 120년 후에 심판하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년이 되리라”는 말씀은 홍수 이후에 모든 사람이 120살 이상 살 수 없다는 말씀이 아니다. 홍수 이후에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살지 않았는가! 벧전 3:20절에 보니,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 재미에 빠져 있었을 때 120년이라는 회개의 기간을 주시고 오래 참으셨다고 말씀한다. 120년 동안 참으신 것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시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아닌가!
8절에 보니, “그러나 노아는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더라”고 말씀하심으로 구원의 한 줄기 빛을 비춰주신다. 노아는 의인이요 완전한 자며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이다. 노아도 우리와 똑 같은 죄인이다. 그러나 그 당시의 세상과 동화되고 강포한 생활을 했던 대다수의 사람과 구별되는 생활을 했다. 세상 조류를 따라가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경건하게 행한 노아였다. 이것은 노아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기에 가능했다.
벧전 3장에서 베드로는 노아 홍수 사건을 설명한다. 홍수를 통해 노아 가족 8명이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가 세례를 통해서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말씀한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너가 구원을 받은 것을 바울이 고전 10장에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베드로는 큰 물의 심판을 통해서 노아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을 성도가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라고 설명한다. 노아 홍수 사건은 장차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구원을 받을 것인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던 것이다. 왜 베드로는 홍수로부터 구원받은 사람은 사람을 8명이라고 분명히 밝히는가? 8이란 숫자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한 날을 가리키는 숫자이며, 초대교회가 부활절 이른 아침에 세례를 통해서 교회의 정식 일원이 되는 날을 가리킨다. 흥미롭게도 1-2세기의 교회의 세례탕은 8각형 모양이었다. 그리고 노아의 방주에 타서 구원을 받은 것은 대부분 동물들이었다. 이것은 예수님 안에서 모든 자연세계가 구원을 받을 것을 내다본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만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구원하시기 원하신다. 영혼의 양식인 말씀을 선포하신 주님은 5병 2어의 기적으로 육체의 배고픔도 해결해 주셨다. 본문은 이전에 사단-뱀의 후손으로 살면서 세상 죄와 재미에 빠져 있던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 안에서 영과 육의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로 영육의 구원을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의 왕되심을 믿고 믿음으로 순종해야 한다.
창 6장 이하의 홍수사건을 설명하는 구약 성경은 시 29편이다. 다윗이 지은 시 29편은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 28편과 30편 중간에 위치한다. 그러므로 아마도 다윗은 시 29편을 어려움 속에 처해 있었을 때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 29편에는 ‘여호와 하나님의 목소리’라는 표현이 7번이나 나오는데, 마치 천지를 진동시키는 힘있는 천둥소리와 같다고 설명한다. 여호와의 목소리가 바다 위에 있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쩌렁쩌렁한 큰 음성으로 세상을 호통치실 때 백향목이 꺾어지고, 산이 요동치고, 광야가 흔들거리고, 암사슴은 낙태하고, 나무마다 잎사귀가 우수수 떨어진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이 목소리를 한번 발하시면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두려워서 떨고 심판을 받는다는 말씀이다. 다윗은 시 29:10절에서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께서 영원히 왕으로 좌정하셨다고 노래한다. 노아 홍수는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왕권을 시행하신 사건이다. 다윗은 11절에서, 왕이신 하나님은 불의한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자기 백성에게는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신다고 노래하면서 시편 29편을 마친다. 다윗이 곤경 가운데 이 시를 지어 부름으로써 악을 심판하시고 언약 백성에게 힘과 평강의 복을 주실 하나님만 신뢰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벧전 3장뿐 아니라 벧후 2장에서도 노아 홍수를 언급한다. 벧후는 이방 세계 속에서 믿음의 싸움을 싸우던 교회를 위해 기록된 편지이다. 벧후가 기록될 당시 로마 황제는 폭군 네로였다. 베드로의 수신자는 안팎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다. 벧후 2장에 보니, 교회를 대적하기 위해, 진리를 대적하는 이단이 일어나고, 호색과 탐심이라는 세속주의가 엄습하고 있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베드로는 벧후 2:5절에 보니, 노아 당시의 ‘옛 세상’을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자기 당시의 옛 세상에 속한 대적들도 반드시 물리치실 것이라고 확신한다. 베드로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어느 시대이건 옛 세상에 속한 불의한 자를 형벌 아래에 두시고, 의를 행하는 새 세상에 속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왕이신 하나님께서 역사를 다스리시는 방법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가 고난 가운데서라도 옛 세상의 불의를 물리치고 새 세상을 앞당겨 이 땅에 이룰 때 임하게 된다.
노아 언약은 이 세상 끝날까지 유효한 영원한 언약이다. 왜냐하면 노아 언약은 영원한 왕이신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언약이기 때문이다. 세상 끝날까지 무지개가 사라지지 않고 있듯이, 예수님 안에는 영원한 하나님의 왕권이 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고난을 만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감당할 시험만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는 은혜로운 분임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곤경 속에서라도 의를 행하는 자에게 뇌성과 같은 말씀을 발하시면서 능력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신 하나님만 신뢰하고 순종해야 한다. 옛 세상이 망했던 홍수 속에서라도 경건한 노아 식구의 생명을 보존하신 하나님은 곧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우리의 영육을 보존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우리 속에 있던, 우리 밖에 있던 그 어떤 옛 세상도 하나님의 심판과 형벌을 받고, 이 땅에 새 세상이 임하여 하나님의 왕되심이 나타나도록 충성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순종하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인가? 우리 인생의 선장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인도하신다.
본문 창 6:14절에 보니, 하나님은 노아에게 잣나무로 방주를 만들고 간을 지르고 역청-송진으로 꼼꼼히 방수처리하라고 말씀하신다. 방주 안에 간을 질러서 많은 방으로 만들면 배가 움직일 때 사람과 동물이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방지했을 것이다. 그런데 방주의 크기는 길이는 300규빗- 150미터, 폭은 50규빗-25미터, 높이는 30규빗-15미터 (15-16절)로 거대하다. 고대 이집트에서 가장 큰 배가 약 60m였기에 노아 방주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거대한 3층짜리 배이다. 방주는 뚜껑이 있는 4각형의 배였다. 방주는 법궤와 비슷한 모양이다. 방주 맨 꼭대기에 창문도 만들었다. 창문이 천장 근처에 있었기에 밖으로 내다볼 수 없었고 단지 통풍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침반도, 노도, 돛대도, 닻줄도 없다. 오직 방주의 선장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만 움직이는 방주였다. 이것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법궤를 중심으로 광야길을 전진해가면서 오직 구름과 불 기둥의 인도를 받았던 것과 유사하다. 사실 모세가 기록한 창세기를 받아 읽었던 사람들은 출애굽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 직전의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가! 이들은 노아가 지은 방주의 모습을 듣고는 오직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움직였던 지난 40년간의 광야 생활을 회상했을 것이다. 노아가 지은 이 방주는 작은 우주요 교회이다. 이 방주라는 작은 우주와 교회 밖은 오직 파멸과 시체만 둥둥 떠다니는 지옥 세상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 방주-교회 뿐이다. 왜냐하면 이 방주 안에만 구원이 있고, 언약이 있고, 장차 있을 구원의 확장의 씨앗이 있기 때문이다. 노아가 준비한 양식이 줄어들고, 도대체 배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 보존의 언약을 붙들고 있기에 안전하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 항해 길의 선장이 되시기에 양식이 줄어들어도, 갈길을 모르고 미래와 밖을 내다보지 못해도, 삶이 고달프고 불편하더라도 우리는 은혜를 사모하면서 평강가운데 감사드리며 찬송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방주 안에 있는 우리가 누릴 복음이요 복이다. 우리는 새로운 노아이시며 세상을 구원으로 위로하사 안식 (노아)을 주시는 보혜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언약 속에 있기에 안전함을 믿자. 노아를 통한 구원은 아주 적은 인원과 최소한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하나님의 언약적 조처였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구별이 없는 열방의 구원이다. 세상은 구원의 방주인 교회가 있기에 존속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주인공들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의로운 언약 백성으로 살아서 악한 세상을 위로하는 자, 구원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말을 맺자.
하나님은 의로운 분이시기에, 천국의 복을 감사히 누려야 할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 재미에 빠지는 것을 방관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여 경건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한다. 더러운 악의 세상, 옛 세상을 물리치고 왕되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번성하는 새 세상이 임하도록 해야 한다. 노아를 통해서 세상을 다시 창조하신 하나님은, 예수님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셨다. 이제 하나님은 구원의 방주 안에 있는 우리를 통하여 이 세상에 안식과 구원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세상의 부와 재미를 따라 사는 교회 밖에 죽어가는 불쌍한 사람들을 보라. 세상을 위로하는 이 시대의 의로운 노아가 되자. 아멘.
무릇 있는 자는 더 받겠고 (눅 19:11-28)
오늘 대학입학 수능시험이 있었다. 대입 시험의 점수로 한 사람의 인생 등급이 매겨지는 나라가 한국이다. 이런 현실에 비추어 볼 때 대입시험은 수험생은 물론 온 가족에게 참으로 중압감으로 다가온다. 우리 사회 전반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고착될 조짐이 보인다. 전문직종과 부를 가진 집의 아이들이 소위 명문대에 입학할 확률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몇 배나 더 높다는 통계가 나왔다. 좋은 환경에서 교육받고 사는 가진 자가 앞으로 더 많이 가질 확률이 높다. 우리 시대에는 예전처럼 ‘헝거리 복서’ (hungry boxer)도 찾아보기 힘들다. 좋은 시설에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과 좋은 영양분을 섭취한 권투선수가 이른바 배고프지만 ‘깡다구’ 하나로 세계 챔피언을 꿈꾸는 사람보다 성공할 확률이 더 높은 것이 우리 현실이다. 부의 대물림, 전문직종의 대물림, 명예의 대물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와 공의가 실현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러한 세상의 통념과 관련해서 우리 크리스챤은 다르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던 작던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의 주관자이시기에, 우리의 흥망성쇄가 주님의 손에 있음을 믿는다.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 있더라도 주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일이 안되고, 그렇지 않은 환경에 있더라도 주님이 도우시면 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되게 하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도우시는 선한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가 아닌가 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과 영적인 상태에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나타난다고 분명히 말씀한다. 이 영적인 법칙을 눅 19장을 통해서 살펴보자.
요지는 “나는 천국에서 보상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청지기로 충성하고 누려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충성해야 할 사람이다.
본문 바로 앞 단락에는 여리고에 살던 세리장 삭개오의 이야기가 나온다. 길가시던 예수님은 자신을 보기 위해 뽕나무에 올라간 키가 작은 삭개오를 부르신다. 그리고 삭개오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신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죄인의 집에 유하신다고 수군거린다.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해 일하는 매국노와 부도덕의 대명사였기 때문이다. 삭개오가 남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구체적인 회개의 결단을 하자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임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주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구원의 백성으로 인정하신다. 이 사건을 통해서 주님은 삭개오처럼 죄인으로 낙인찍힌 사람,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시러 오신 분이라고 말씀하신다 (마 19:10). 바로 이 때 계속해서 주님이 말씀하신 비유가 본문인데, ‘왕위를 받으러 간 귀인 비유’ 혹은 ‘은 10므나 비유’라 불린다. 이 비유도 여리고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시간적 배경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공사역의 마지막 시점인데 예루살렘성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다. 이 때는 유월절 무렵으로 온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할 즈음이었다. 이스라엘의 수도요 구약부터 하나님이 통치하시겠다고 약속된 장소요 (슥 14), 세상의 중심이 될 것이라고 예언된 예루살렘에 예수님이 들어가기 직전이었기에 무리들은 하나님 나라가 당장 이루어질 것으로 믿었다.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에 천국이 지금 이 땅에, 사단의 세력이 무너진 곳에, 그리고 너희 가운데 임했다고 가르치신 구절이 많이 있다! (눅 11:20; 17:21). 제자들을 포함한 유대인들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특별히 예수님을 따르던 자 중에서 열성분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복자 로마를 무력으로라도 저항해서 자유를 쟁취하면 천국이 임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많은 순례객과 사람들이 모이는 때에 정치적인 해방을 꿈꾼 것으로 보인다. 요 6장에서 5병 2어의 기적을 행하신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다가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던 유대인들이 아닌가! 그러나 주님이 나라는 이스라엘에만 한정되는 정치적인 나라가 아니다. 주님은 천국의 완성은 미래적인 것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확장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고 땅끝까지 계속 확장 되어야 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은 천국의 완성의 장소가 아니라 고난의 장소이다. 이처럼 과도하게 실현된 종말론 (over-realized eschatology)이나 정치적인 하나님 나라 이해는 위험하다. 누가복음이 아니라 행 3:16-21절에 가서야, 주님이 승천하신 후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확장과 미래적 완성을 바르게 파악했다.
본문 앞 눅 18:31-34절에 보니,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제자들과 함께 가시면서 거기서 죽으시고 부활하실 것을 말씀하셨으나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인자가 붙잡혀서 결국은 죽고 3일 만에 살아나야 하리라”는 말씀에 무지했던 제자들이었다. 본문 비유를 뒤따르는 구절에 보니, 주님의 죽으심을 예상치도, 알지도 못한 제자들은 주님을 ‘왕’이라고 부른다 (눅 19:37-38). 무슨 말씀인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것을 상상도 못했기에 고난과 죽으심 없는 승리만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은 10므나 비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떤 귀인-높은 사람이 왕위를 받으러 먼 나라로 가게 되었다. ‘먼 나라’는 천국이 ‘당장’ 임할 것이라고 믿었던 제자들의 기대와 반대된다. 귀인이 왕위를 받으러 먼나라로 간 것은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부터 30년 전에 역사적인 실례가 있었다. 주전 4년 헤롯 대왕이 죽었을 무렵, 유언에 따라 사마리아와 유다와 이두메 지역을 다스리도록 된 아들 아켈라오가 로마에 왕권을 인정받으려고 갔다. 이 때 유대인 50명이 밀사를 보내어 로마 아우구스투스황제에게 아켈라오가 유대의 왕이 되는 것을 반대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켈라오는 유대인을 유월절에 3000명이나 학살한 전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 (ethnarch)이 된 아켈라오는 반대자들을 숙청한다. 주전 40년에 헤롯 대왕도 로마에 가서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의 왕권을 인정받았다.
이 비유의 귀인은 길을 떠나기 전에 종 열을 불러서 은 한 므나씩 나눠 준다. 한 므나는 60분의 1달란트로, 100일 동안의 품삯이다. 약 400만원 정도 된다. 사실 은 1므나는 사업하기에 큰 돈이 아니다. 마크 안토니가 이끈 로마 군인들이 각각 은 한 므나를 보너스로 받고는 너무 적다고 불평했다고 한다. 결국 그들은 은 5므나씩 보너스로 받았다고 한다. 귀인이 말한다: “이것을 가지고 장사하라”. 그런데 ‘그의’ 백성이 이 귀인을 미워하여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밀사를 먼 나라로 보내어 이 사람이 왕이 되는 것을 우리가 원치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결국 이 귀인은 왕권을 받아서 돌아온다.
왕권을 받아 돌아와서 했던 첫번째 일은 종들을 불러모아 회계하는 것이다. 첫번째 종을 불러서 회계한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을 남겼나이다”. “잘하였도다. 착한 종이여.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여기서 착하다는 말은 도덕적으로 선한 것을 뜻하지 않는다. 대신 자기 일을 충성스럽게 다한 것이 착한 것이다. 두 번째 종을 불러서 회계한다.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그러나 마지막 사람은 한 므나를 수건으로 싸서 가지고 온다. 돈을 수건으로 싸놓는 것은 땅에 감추는 것보다 덜 안전하다. 이 종에게 문제가 된 것은 일을 하지 않은 불성실뿐 아니라 부주의함이다. 이 종이 일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음과 같다: “내가 믿는 당신은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엄한 사람이다. 저축하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악한 사람이다. 그래서 종으로서 수고해도 결국은 모두 주인의 것이 될 것이기에 일하지 말자고 결심했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무지와 독단 속에 살았던 악한 종이다. 앞의 종 두 명에게 보상을 준 주인의 너그러움을 보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고 어리석게 말하고 만 것이다.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잘못된 생각이 주인을 위해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이다. 22절에서 주님은 이 사람을 향해서 게으르다고 말씀하지 않고 ‘악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맡겨 주신 일을 하지 않는 것은 게으를 뿐 아니라 악한 것이다. 혹시 우리 가운데서도, “악한 자가 잘 사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면 나는 그런 하나님을 믿지 않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신비이기에 그것 때문에 실족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 번째 종처럼 주님의 자비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충성하지 못한다. 이 세 번째 사람은 주인과 형식적인 관계만 맺고 있었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아무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이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을 받았을지라도 있는 것까지 빼앗기고 만다.
이 때 왕이 말한다. “그렇다면 왜 은행에 돈을 예금해서 이자라도 가지고 오지 않았느냐?” 한 므나 즉 100드라크마에 이자는 4드라크마 정도였다고 한다. 로마에서는 이자율이 12%였다. “열 므나있는 자에게 한 므나를 빼앗아 주어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한다. “주여 이미 그 사람에게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대답한다: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그리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귀인이 왕권을 받는 것을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이다. 이들은 27절에 보니, 주님의 원수들이다. 따라서 이 심판은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이 파괴될 것을 내다본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셨다.
이 비유를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우리도 주님으로부터 공평하게 한 므나씩 받았다. 우리는 동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믿고 있고, 똑 같이 하루 24시간과 동일한 성령과 믿음을 받았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분량은 절대적인 공평이 아니라 상대적인 공평이다. 이 말은 마 25:15절에서 밝히듯이 ‘각각 그 재능대로’ 맡겨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과 비교하면서 많은 재능을 가졌다고 뽐내어서도 안 되고 적다고 의기소침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한계를 인식하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기를 원하신다. 이 은사를 가지고 우리는 천국확장을 위해 장사해야 한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장사해야 한다. 청지기인 우리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은 주인이 왕으로 언제 오시는 가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라기보다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충성하는 것이다. 본문이 밝히는 우리의 신분은 청지기이다.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는 주님의 것을 가지고 섬기는 청지기이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귀인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왕권을 받으러 먼 나라로 간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부활-승천하심으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실 것을 의미한다. 주님이 승천하시기 전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왕권을 받은 사건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왕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 사단에 대한 심판이다. 누가-행전의 중요한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의 천상의 통치이다. 승천하신 예수님이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중심주제이다.
이 비유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등장한다: (1) 예수님께 충성하여 상을 받은 사람. (2)예수님과 형식적인 관계를 맺고 오해하여 일하지 않아서 있는 것도 빼앗긴 사람. (3) 왕이신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대적하고 가까이 다가오기를 거부하여 죽임 당한 사람.
우리가 주님이 누구이신가를 바로 믿고 비록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성할 때 그것은 곧 더 큰 일을 하기 위한 발판이 된다. 우리가 이 땅에서 주의 사업에 충성해서 남긴 만큼, 주님이 다시 오셔서 회계하실 때 정비례하여 저 천국에서도 보상을 받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달란트를 사용하지 못한다면 박탈 당하고 말 것이다. 달란트에는 책임성이 따른다. 주님의 승천과 재림 사이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왕되심을 거부한다. 주님의 왕되심을 거부한다면 결국 그들의 소원대로 주님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청지기로 사는 우리에게 무엇이 약속되어 있는가? 우리도 왕으로 다스리는 복이다.
본문의 비유에서 예수님은 승천하심으로 왕이 되셨다.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왕권을 받아서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 승천 이전에 눅 23:2절에 보니,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왕이라고 스스로 인정하신다. 눅 22:29절에도, 성부 하나님이 천국을 예수님에게 맡긴 것 같이, 예수님은 천국을 다시 제자들에게 맡기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천국을 주시기를 원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천상의 통치가 실현되기를 원하신다. 이 일에 잘 수종들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부익부 법칙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 주님께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가뿐히 하루를 시작한다. 아침에 드린 기도처럼 주님 은혜로 일이 잘 풀린다면 감사하고 입에는 찬양이 있을 것이다. 기도의 재미를 본 사람은 또 기도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한 사람은 모든 일 속에서 주님을 더욱 의지하게 된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또 성령 충만을 사모한다. 봉사의 즐거움과 보람을 아는 사람은 더욱 충성하기를 원한다. 은혜와 능력 그리고 영적인 갈증을 매일 느낀다. 하지만 마음이 상해서 기도도 못하고 말씀도 읽지 못한체 살면 하는 일마다 짜증나고 불편거리만 늘어난다.
첫째와 둘째 종이 각각 10고을, 5고을을 다스리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왕의 통치 권한을 이양받는 것이며 천국에서 함께 왕노릇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왕노릇 할 수 있나? 주님의 왕권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이다. 이를 위해 작은 일이라도 주님을 위해서 충성하자. 마 25:23절에서는 충성한 종에게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라”고 한다.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은 잔치 상에 함께 앉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이 시행되는 권세를 받아 다스리는 것은 다름 아니라 천국의 기쁨 즉 천국을 누리는 것이다. 다스리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사와 은혜와 복을 여기서 누리는 복이다. 이 땅에서 왕으로서 천국을 누리는 만큼 미래의 천국의 보상은 비례한다. 여기서 천국을 위해 충성하지 못하고 은사를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저 천국에서 큰 상급을 받는 일은 없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과 천국의 잔치와 기쁨을 즐기는 것, 즉 구원을 즐기는 것은 확연히 다르다. 구원받은 것은 시작이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과 고난 중에서라도 천국의 은혜와 복과 은사와 풍요로움, 성령의 기름부으심과 능력을 깨닫고 순종과 기도 그리고 성령충만으로 누려야 한다. 충성하고 누리는 만큼 비례하여 저 천국에서 보상으로 주어진다.
말을 맺자.
우리는 청지기로 살고 있는가? 누구나 하루 24시간을 받아 살고 있다. 시간의 청지기가 되라. 시간의 10일조를 드려라. 물질의 청지기가 되라. 재능의 청지기가 되라. 그것이 바로 주님과 함께 다스리는 삶이다. 이 땅에서 왕으로 누리면 저 천국에서도 약속된 보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아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 19:1-7)
우리 모두는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살기 원하고, 성령의 9가지 열매를 맺으면서 성령님의 인도를 받으며 살기 원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람직한 성도의 삶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성령님은 어떤 분이신가? 어떤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하는 일을 알아보면 된다. 마찬가지로 성령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무슨 일을 하셨는가를 알아보면 된다. 구약에도 성령님이 활동하셨다. 천지창조 때에도 성령님은 역사하셨고, 출애굽 때에도 성령이 구름기둥-불기둥으로 역사하셨고, 구약의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분이시며 찬양을 주시고, 회개 운동을 일으키신 분이 구약의 성령님이시다. 성경이 기록될 때 사람 저자들을 영감시키신 분도 성령님이시고, 예수님을 잉태케 하신 분이시며,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분이시며, 초대 교회를 시작하게 하신 분도 성령님이시며, 우리를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거듭나게 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거듭난 우리를 날마다 성황의 생활을 하도록 인도하시는 분도 성령님이시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성령님은 근심하신다. 대신 우리가 성령님의 충만을 사모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은 우리 가운데 충만히 임재하신다. 성령님은 우리가 성령의 열매를 맺어 결국 날마다 예수님을 더 닮아가도록 하신다. 종합해보면, 성령님은 비인격적인 바람이나 불 혹은 힘이 아니라, 인격적인 하나님으로서 이렇게 중요한 일을 하신 분이시다.
“나를 통하여 성령님의 분명한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는 요지로 말씀을 전하고자 한다.
첫째로, 왜 우리를 통하여 성령의 분명한 역사가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가 세례를 받음으로 죄사함과 성령의 내주의 역사를 받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구름타고 승천하신 후 10일만에, 다른 보혜사이신 성령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다. 그것이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에 예루살렘의 마가 요한 다락방에 성령이 강림하신 사건이다. 그 결과 본격적인 교회 시대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사도행전 19장에 보니, 행 2장과 비슷한 성령 강림 사건이 에베소교회에서 일어난다. 어떤 사람은 행 19장의 에베소교회에 성령님이 임하신 사건을 ‘작은 오순절’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바울은 제 3차 전도 여행 중에 에베소교회를 방문한다. 그곳에는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은 12명의 제자들이 있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묻는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절). 바울의 이 질문은 에베소교회가 예수님을 믿은 후에 별도로 특별히 받아야 할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뜻이 아니다. 대신 “너희는 진정한 신자인가?”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바울은 이 12명에게 진정으로 거듭난 신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2절의 에베소교인의 대답은 충격적이다: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이 말은 그들이 유대인 출신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구약에서 성령이 언급된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욜 2). 그러므로 이들은 대부분 이방인 성도였다. 이 때 바울이 다시 묻는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들이 대답한다: “요한의 세례로다” (3절). 요한의 세례만 안다고 대답한 에베소 교인을 향하여 바울은 “너희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니 이제 성령의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회개의 세례를 베풀던 세례 요한이 내 뒤에 오시는 이 (예수님)를 믿으라고 하였다”고 설명한다 (4절).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을 믿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2절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는 질문은 “너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라는 질문과 같은 것이다. 그 후 바울은 그들에게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다 (5절).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게 되었다.
바울이 에베소 교인에게 베푼 세례는 요한의 세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베푼 것이었다. 이것은 특별하고 예외적인 경우이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크리스챤은 일평생 세례를 1번만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례 요한의 세례를 이미 받은 이들에게 왜 바울은 다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는가? 본문 1-2절에 보니, 이 12명은 제자라고 불리며 믿고 있다고 말씀한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역사가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12명은 바울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받기 전에 이미 성령을 받아서 믿고 있는 성도이다. 이들에게 분명히 성령이 거하고 계셨다. 하지만 자신 속에 거하시는 성령을 느끼지도 알지도 심지어 성령이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런 희한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우리가 동삼동에 살면서도 동삼동이라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도 못했다고 말하는 것도 같이 희한한 일이다. 동삼동에 살면서 나는 고신대학 안에 대학교회가 있다는 말을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오늘 오후 예배에 참여하면서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이며 성경골든벨이 있다는 말을 교회에 와서 처음 들어보았다고 말하는 것처럼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을 믿어 성령을 소유한 에베소 교회에게 성령이 이렇게 특별히 다시 임한 것은 이들 이방인 성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성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새 언약 백성임을 확증하는 차원에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행 19장에서 에베소 교회가 다시 세례를 받아 성령이 임하여 방언도 말하고 예언한 것은 불신자를 신자로 거듭나게 하는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이것은 ‘표적’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초대교회가 시작하고 발전하는 단계에서 이방인 성도나 유대인 성도나 동일한 형제 자매임을 가르쳐 주려는 목적으로 일어난 특별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 19장에서 일어난 사건과 똑 같은 사건이 우리 시대에 다시 일어날 필요가 없다. 이 말은 성령의 특별한 회심의 사건이나 변화를 주시는 사건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만일 행 19장의 사건과 동일한 것을 우리가 여전히 기다린다면 우리는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를 너무 초라한 것으로 제한하고 만다. 이 말은 성령의 회심케 하시는 역사와 내주하시는 역사가 부족하기에 다시 능력을 부으시는 역사가 특이하게 계속 있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에베소교회에 임한 특별한 성령의 강림을 다시 기대할 필요 없다. 대신 성령의 충만을 지속적으로 받아서, 주님께 헌신하려는 결단과 주님의 다스림을 받아 순종하려는 충성이 필요하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민감해야 한다.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기 원하는 성령님의 소원을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얼마나 강력하신 능력으로 성령이 역사하시는가를 믿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성령의 역사의 통로로 살 때 주시는 약속은 무엇인가? 주님 안에서 천국에서 큰 자가 되었고 될 것이다.
우리는 에베소 교회의 12제자처럼 세례를 2번이나 받을 이유가 없다. 요한의 세례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는 세례와 본질적인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구약에 속한 세례이다.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구약에 속한 마지막 선지자로서 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이다 (마 11:9, 11). 하지만 세례 요한의 세례는 나름대로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다. 세례 요한이 엘리야나 다니엘과 같은 구약의 선지자보다 더 큰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이 그들보다 더 위대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다. 대신 계시사적인 이유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실 천국의 여명을 알린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마 3:3). 그러므로 회개를 촉구하는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 세례를 예상하고 조금 맛을 보여주는 세례이다. 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풀 때 세례받는 사람의 죄가 용서함 받은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하나님과 온 교회 앞에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서 죄를 용서받았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우리는 회개만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고 죄용서와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자가 나은 자 중에서 가장 큰 구약의 마지막 주자인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이 되었다. 우리에게 죄사함과 성령의 세례가 주어졌기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된 것이다.
천국에서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자로 살고 있다. 세례 요한은 오순절 성령 강림도 에베소에 임한 성령도 알지 못했지만 우리는 알고 믿고 있다. 우리는 언제든지 사모할 때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더욱 힘써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개혁주의의 위대한 신학자들 조차도 왜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에만 일어나고 우리 시대에는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말하는가? 성령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자. 성령의 은사를 사모하라. 그것을 통해서 교회를 섬겨라. 성령 안에서 하나된 공동체가 되도록 힘쓰자.
말을 맺자.
주님은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너희는 성령으로 진정으로 거듭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는가?”. 주님은 다른 질문도 하신다: “너희는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통로로 살고 있느냐?” 성령을 제한하거나 소멸치 말자. 성령의 은사를 멸시치 말자. 성령의 강력하고 분명한 역사를 사모하자. 성령의 사람이 되자. 힘있는 성령의 통로, 거룩한 성령의 도구가 되자. 아멘.
http://christianity.pe.kr/iezn/index.php?g_num=31&gs_num=33&idx=5&mode=view&num=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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